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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시성의 의미

작성자따르릉|작성시간08.10.15|조회수47 목록 댓글 0

서울 성체대회 및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60주년 특별강론-류한영 신부(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워원회 총무)

조선 왕조 치하에서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시복시성 조사는 이미 박해시대 때 시작됐으며,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과정을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성인과 현재 절차를 밟고 있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로 나눠 살펴본다.
 
 1. 103위 성인의 시성 추진

 (1)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1839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조사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말께 체포된 몇몇 신자들에 대한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출발했다. 1847년 페레올 주교는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들의 기록을 포함한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해 홍콩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고, 같은 해 극동대표부가 이 일기를 교황청에 제출함으로써 공식 시복소송 절차가 시작됐다.

 1857년 9월 교황 비오 9세가 82명의 순교자를 '가경자'로 선포함에 따라 교황청 수속을 시작할 수 있게 됐고, 한국교회는 여러 차례 조사와 검증을 거쳐 1905년 7월 교황청 시성성에 '기해ㆍ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을 제출했다. 교황청은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관계자 회의를 열었고, 교황 비오 11세는 1925년 7월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순교자 79위를 시복했다.

 (2)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1876년에 시작된 자료조사 및 예비조사는 1880년 뮈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부터 활기를 띠었다. 1890년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돼 다시 한국에 입국하자 예비조사 작업이 본격화됐고, 1895년 순교자 877명의 전기가 「치명일기」로 간행됐다.

 1899년에 열린 교구 시복재판은 다음해 11월30일까지 100명의 증언을 토대로 이뤄졌으며, 1921년 2월부터 1926년 3월까지 129회에 걸쳐 85명의 증인들을 대상으로 한 교황청 재판이 열렸다. 이 과정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박해 치명사적'이 자료집으로 정리됐고, 교황청 재판기록은 1952년 3월 그 유효성을 인정받았다. 연이은 교황청 시복 관계자 회의를 거쳐 1968년 10월6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됐다.

 (3)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
 한국교회는 1976년 4월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를 통해 103위 복자들에 대한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고, 교황청은 1978년 4월 한국 복자 103위 시성 건을 정식으로 접수했다. 이 안건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입안됐다. 1982년 11월 로마 추기경회의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은 200주년 기념행사에 교황을 초청했고, 그에 대한 확답을 들었다. 이후 한국교회 시성 추진 관계자들은 1984년에 한국 순교자들 시성식을 열고자 노력했으며, 1983년 3월 한국 주교단 명의로 '기적 관면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했다. 1983년 9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3위 시성을 승인, 선포한 데 이어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역사적인 103위 시성식을 주례했다.
 
 2. 조선 왕조 치하의 순교자 및 증거자 시복 추진

 (1)1980년대와 1990년대 시복 추진 노력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는 1982년 9월 제1차 시복시성 추진위원회를 열고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사업을 논의했다. 이 사업은 103위 시성 추진과 상충될 소지가 있어 일시 중단됐지만 시성식이 끝난 직후인 1984년 6월 추진위원회가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인 광암 이벽 요한세자와 그 동료 순교자 및 증거자들'이라는 제목으로 98위 순교자 시복 추진 심사를 선언함으로써 재개됐다.

 시복 추진을 해당 교구별로 추진키로 한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 전주교구는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4위 순교자 시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전주교구는 1989년 4월12일자 공문을 통해 '장애없음'을 통보받았다. 또 수원교구는 1996년 '윤유일 바오로와 동료 7위'의 순교자 시복을 추진했고, 그해 10월24일자 공문을 통해 '교령과 장애없음'을 얻게 됐다.

 (2)주교회의 차원 시복 통합 추진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통합 추진'이 결정됨에 따라 1999년 1월 시복 통합 추진 첫 회의가 열렸다.

 2001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는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특별위원회는 2002년 9월 제3차 회의에서 전국 공용 '시복시성 기도문'을 제정했다. 이후 지속적 노력 끝에 2002년 9월 교황청 시성성에서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건이 단일 안건으로 받아들여졌음을 통보받았다. 또한 2003년 10월에는 시성성에서 이들에 대한 시복 심사가 '장애없음'을 통보받았다. 2004년 7월 개정된 이들에 대한 시복재판은 16회기로 증인 소환을 마무리하고 지난 2월부터 8월까지 현장조사를 마쳤다.
 
 3.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의 신앙과 영성

 현재 시복절차가 진행 중인 하느님의 종들 가운데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한 분들은 52명이며 신유박해 이전 신해박해(1791년)와 정사박해(1797년)로 순교한 분들은 15명이다. 따라서 반 이상이 신유박해 이전 순교자들이다. 이러한 순교자들이 시복된다는 것은 선교사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연구하고 실천한 선조들의 삶을 본받고 따른다는 데 의미가 크다.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은 단순히 성인의 숫자를 늘리는 과정이 아니다. 그분들이 받은 순교의 은총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고 찬미하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시복과정은 우리가 현재 받은 신앙의 은총에 대한 감사 행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선조들이 피흘려 전해준 신앙의 의미와 본질을 새롭게 깨닫고 신앙을 쇄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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