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장례 예식(葬禮 禮式) 안에서의 파스카 - 초대교회에서 트렌토 공의회까지 장례예식 연구 - 이완희 신부 1. 들어가는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장 서둘러 반포한 헌장은 전례헌장이다.1) 이는 쇄신(aggiornamento)을 추구하던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이 가장 시급하게 쇄신되어야 할 영역이 전례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전례의 역사를 쇄신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많은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로마제국의 분열 이후 동로마제국의 느슨한 틀에 속한 지역의 전례인 동방전례 그룹들은 각각 자신의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간직한 채 그리스도교의 보화들을 다양하게 예식화시켜 나갈 수 있었다. 이에 비해서 서방 로마 제국은 게르만 민족의 남하로 급격하게 몰락하였고 뒤이은 프랑코 왕국과 이교도들의 빠른 그리스도교화를 통해 서방교회는 로마 중심의 중앙집권적 교회 구조를 갖게 되었다. 이는 곧 서방교회 전례의 통일성 유지에 기여하였고 결국 지역 토착 풍습과 언어를 무시한 로마식 라틴어 전례가 그 중심에 자리를 잡게 됨으로써 지역 언어와 지역 문화가 배제된 전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례의 라틴어화와 단일화는 지역교회의 개별 신자들의 신심을 부흥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이는 지역 정서와 동떨어진 전례로 변질되어 갔다는 사실을 지적해야하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라고 하겠다. 이런 교회의 가시적 일치를 강조하는 중앙통제식 구조에 의해 서방전례 전승은 동방전례가 지닌 풍요성과는 달리 거의 로마-갈리아화 되었고, 이렇게 로마-갈리아화 된 전례는 중세를 지나면서 일반 대중과는 유리된 전례, 일반 신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전례로 변모되어갔다. 따라서 전례가 신자들의 신심생활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극히 미미한 영향만을 끼치게 되었고 전례가 차지해야할 자리에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대중 신심 운동들이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백성의 신앙고백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장(場)이 전례라고 할 때 전례집전과 회중과의 괴리는 공적인 신앙고백의 기회를 신자들에게 제대로 부여하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활발하게 살아있는 친교(κοινονια)와 축복(ευλογια)을 전례 안에서 구현해 내었던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의 초대 교회가 중세를 지나면서 전례적 차원의 많은 변질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 전례사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례를 활성화시키고 그 안에 파스카의 신비를 담아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책임이라고 하겠다. 중세 초기부터 라틴어와 로마-갈리아 전례에 의지해서 가시적 일치(Unificatio)를 지켜내려 했던 교회에 의해 결국 전례집전과 대중신심과의 괴리가 초래되고 말았고 이러한 전례와 회중과의 괴리는 교회 안에 살아있는 생생한 예배의 즐거움을 앗아가 버리게 되었다. 결국 대중신심의 지원을 받지 못한 전례는 외면당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적인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공의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다른 모든 문헌 보다 앞서서 전례헌장이 공의회의 주요 주제로 다루어졌고 또한 20세기 전례운동(Liturgical Movement)의 성과를 바탕으로 서방교회 사상 가장 장엄한 형태의 전례 개정이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위해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은 모든 신앙생활의 중심에 전례를 두고 있으며 전례는 다름 아닌 파스카의 신비에의 참여임을 선포하고 있다.2) 파스카가 인류의 구세사의 생생한 과정이며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구원의 손을 건네심이라면 여기에 참여하는 것은 곧 구원의 성취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파스카라는 말 자체가 의미하듯이 피안에서 차안으로 “건너감”이며 전례는 파스카를 위한 다리(橋)가 되는 것이다. 피안에서 차안으로 건너가는 가장 확실한 전례적 표징은 장례 예절 안에 들어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곧 파스카적 내용이 장례 전례 안에 들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본고(本考)에서는 초대교회에서부터 트렌토 공의회까지의 서방 교회의 장례예절을 파스카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서방 전례 안에서 파스카적인 요소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겪는지를 살펴보고 서방교회의 전례사적 흐름을 비판해 보고자 한다. 2. 초대교회의 장례예절 초대교회 당시에는 아직 그리스도교 고유의 장례예절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장례예절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 전례 형성에 영향을 끼친 두 가지 관습에 대한 신중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전례의 첫 번째 뿌리는 유다이즘에 있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대다수가 히브리인들이었으므로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예절은 히브리적 관습을 그대로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처음에는 유대인 거주지역(diaspora)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이방인의 지역까지 그 영역을 넓히게 되었다. 이는 결국 유다이즘 이외의 다양한 지역문화와의 조우를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장례 예절은 유다이즘 이외에도 또한 이방인들의 다양한 문화와 관습에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유대인의 관습과 이방인의 문화가 모두 초기 그리스도교 장례예절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자신들의 고유한 부활에 대한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소속해 있고 생득적으로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고유 문화 안에서 신앙의 표현인 전례를 거행하였을 것이기에 초대교회 장례예절도 이런 토양에서 준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부활신앙과 위배되는 관습과 문화는 적절히 제거되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박해의 와중에 있었다. 따라서 많은 신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야 했으며 따라서 신앙의 표현인 전례집전에 있어서 이 세상을 뛰어넘어 저 영원한 생명의 세상을 향하는 파스카적인 요소가 그 전례 안에 매우 강하게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장례예절에는 파스카적인 측면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3) 2-1. 초대교회의 장례예절의 형성 2-1-1. 히브리적 전통의 승계 히브리적 관습은 초대교회 장례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왜냐하면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 대다수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시신을 다루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4) 다른 문화에서와 같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죽은 이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은 의무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은 죽은 이를 위해 장사를 치르고 매장까지 해야 했던 것이다.5) 우리는 성서에서 어떻게 히브리인들이 죽은 이의 시신을 처리했는지 볼 수 있는데, 그들은 먼저 눈을 감기고, 몸을 가지런히 하고 수의를 완전하게 입혔다.6) 초대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와 같은 유대 관습을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 관습에 육신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덧붙여 거행하였다. 따라서 시신의 처리를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더욱 정성껏 하였다.7)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사망 후부터 매장까지 얼마나 간격을 두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오늘날 중동에서 죽은 당일에 장례를 행하는 것처럼 그 간격은 매우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8) 히브리인들의 시신 처리는 통상 바위 안에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방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하는 것이었다.9) 그리고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매장 당하지 못한 시신은 모욕과 불명예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10) 이런 배경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히브리인들 또는 이방인들을 위한 공동 묘지를 그들과 함께 사용하였다. 또한 히브리인들의 관습에서는 죽은 이의 가족들과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외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방법은 공적인 재앙이 닥쳤을 때, 혹은 참회의 시기에 행하던 관습을 따랐다.11) 또한 죽은 이의 가족들은 단식을 행하기도 하였다.12) 그리고 망자와 친했던 이들이나 친척들은 위로의 빵과 위로의 잔을 가져다가 상을 당한 가족들을 위로하였다.13)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히브리인들의 장례 관습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슬픔의 표명과 위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죽은 이의 가족들은 커다란 고통을 표시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곡을 하였다.14) 반면에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장례식에서 처음부터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기에 슬픔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부활 신앙이란 여기 이 세상에서 참된 파스카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세상에로의 부활을 향한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오히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기쁨을 드러내려고 애를 썼고 파스카에 관련된 시편과 감사의 찬가를 노래불렀다. 첫 번째 히브리인의 전례서로 보이는 Tzidduk Ha-din15)과 장례예절과 관계된 탈무드의 전승으로 보이는 Semahoth16)라는 책을 통해서 유다이즘의 장례 관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장례 기간17) 및 몇 가지 장례관습을 확인할 수 있다.18) 또한 Kaddish19)로부터 유래한 청원기도 형식의 장례예절 기도문도 발견되는데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이 기도가 “주님의 기도”의 한 모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Tzidduk Ha-din예식서에서는 또한 구약성서 특히 시편의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기도문도 찾아볼 수 있다.20) 결론적으로 위에서 살펴본 구약과 유다이즘의 전통이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음이 틀림없다. 이 유다이즘은 내적으로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외적으로는 예절적인 측면에서 강하게 그리스도교 원시 전례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며 이러한 증거를 우리는 성서에서 강하게 영감을 받아 쓰여진 초대 교회의 전례 기도문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1-2. 이교인의 장례 관습으로부터의 영향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적어도 중세 초기까지는 표준 장례예식서를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속해있고 자라온 문화적 관습 위에 그리스도교적 부활 신앙을 결합하여 각 지역별로 다양하게 장례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유대인들의 세계를 넘어서 점차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됨에 따라서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이방인들의 문화와 관습이 그리스도교 전례 형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특히 장례 문화는 각 지역별로 독특한 것이었기에 매우 다양한 형태의 이교적 관습이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토인비에 의하면 고대 로마에서는 임종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을 불러모아 죽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21) 이러한 관습은 초대 교회에 행해졌던 임종자를 위한 밤샘기도를 연상하게 한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는 그의 호교론에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임종자에게 줄 노자성체(Viaticum)를 위한 성찬례를 집전하면서 임종자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22) 임종자가 죽으면 로마인들은 시신을 정리하였는데 우선 눈을 감기고 죽은 이의 이름을 부르고, 수의를 입히며 입안에 동전을 넣어 주었다고 한다.23) 죽은 이의 집에서 묘지까지의 장례 행렬은 로마인들의 관습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실제로 장례식을 일컫는 라틴어 Exsequiae, Prosequi는 이와 같은 행렬을 “뒤따른다”는 말에서 유래했을 정도였다. 시신을 매장한 후에 Silicernium이라고 불리는 장례 후 음식 나눔이 거행되는 것이 또한 로마의 관습이었다.24) 이 이교 관습은 사적으로 거행되었으며 기일에 거행되곤 하였다.25) 이 이교 관습이 곧바로 그리스도교로 전승되게 되는데 이 장례 음복이 Refrigerium이라고 불리게 되는 초대교회의 음복 관습이다.26) 이 관습은 망자를 기념하는 날에 행해졌는데 특히 순교자의 경우에는 장엄한 성찬례의 집전으로 발전되었다. 장례식과 관련된 초기 교부들의 단편들을 살펴보면, 초대교회 신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거행된 이교 장례관습의 많은 부분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시대에는 그리스도교 신자이든 이교도이든, 죽음이란 하나의 다이내믹한 여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용이나 사자로 묘사되곤 했던 악마는 종종 이 여행의 방해자로 등장하였다.27) 반면에 천사는 어떤 특정한 여행의 동반자28)요 보호자로 묘사되었는데 특히 거룩하게 이 세상을 살다가 천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망인의 동반자로 묘사되기도 하였다.29) 초기 교부들이 장례예식 안에서 이교문화로부터 유래된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교도들의 관습은 그리스도교 전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왜냐하면 박해 중이었고 교계제도의 정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교회 상황에서 교회는 적절한 통일 예식서를 만들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이교도적인 관습은 그 지역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교회 전승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교회의 장례예절은 대체적으로 부활신앙에 근거한 예절의 파스카적인 측면을 사도적 전승으로 잘 간직하고 있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이다. 2-2. 초대교회 장례예식 안에서의 파스카 2-2-1. 교부들의 문헌에 나타난 파스카적인 요소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초대교회 공동체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이 속한 전승과 관습에 입각하여 장례예절을 거행하였다. 박해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그리스도교 전례 안에서 정통신앙을 수호하고 우상숭배적인 이교도들의 예식을 제거하느라고 힘썼고 그에 관한 많은 단편들을 남겼다. 밀라노 칙령(313년) 이후 교회 체계가 정비되어 가면서 동시에 전례도 교회 교의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리되기 시작하였다.30) 그러나 현재 그 당시의 장례 예절에 관한 예식서나 정확한 정보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몇몇 역사적인 단편과 교부들의 언급을 통해서 당시의 전례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7세기, Ordines Romani31)의 49번 예식이 사용될 때까지는 장례예식 안에 파스카적인 요소들이 충만하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교부들의 문헌과 전례 단편들 안에서 파스카적인 요소들이 얼마나 강조되었는지에 대해서 검증해 보도록 하겠다. 떼르뚤리아노는 장례예절의 형식은 대부분 이방인의 관습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는 죽음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부활 신앙에 대한 중요성을 부각하고자 하였다.32) 이 교부의 시대에 죽음이란 파스카적인 생명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여겨졌고 장례예절은 그것의 외적인 집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140년경의 교부 아리스티데스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장례식에서 슬픔과 비애감을 표시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주님께 감사드리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그 형제가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복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3) 또한 성 지롤라모도 첫 번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장례식에 참가했을 때 슬픔을 감추고 찬미가를 부르며 행렬하였고 시편이 노래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34)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장례 예절 중에 큰 소리로 우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천사들에 의해서 호위 받으며 영원한 왕국에 입성하는 망자에 대한 환호의 상징으로 찬가와 시편을 노래하라고 권고하고 있다.35) 치쁘리아노 역시 상중에 검은 색의 상복을 입지 말 것을 권고하는데 검은 색은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희망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6) Thumuis의 Serapion(+362)의 작품으로 알려진 350-356년경의 죽은 이를 위한 기도문은 다분히 성서적이며 파스카적이다. 이 기도문은 다음과 같이 망자를 위하여 기도한다; “파란 풀밭 위에서(시편23,2) 그의 영혼과 정신이 쉴 수 있도록 안식을 주소서. 그 안식의 방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주님의 성인들이 머무르는 곳이나이다”.37) 아우구스띠노도 그의 모친 모니카의 장례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시편 101편을 낭송하는 조용한 장면을 우리에게 그려준다.38) 또한 아우렐리오 푸르덴시우스 클레멘스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당대의 매우 아름다운 장례식의 찬미가를 찾아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느님, 당신은 영혼의 빛나는 샘이시오니 이 망자를 빛나게 하시옵소서.”39) 이 찬미가에는 당시의 사목적인 경향과 장례식의 신학이 담겨져 있다. 사도헌장(Constitutiones Apostolorum)40)은 장례식을 파스카와 연결시켜주는 다양한 요소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사도헌장에서 장례 행렬을 Exodus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파스카적인 견지에서 볼 때 매우 의미 있는 단어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례식에서 구약성서의 유명한 4개의 찬미가(시편 116,15; 116,7; 잠언10,7; 지혜 3,1)가 노래불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도헌장의 8권에는 주교의 기도와 부제의 예절 안내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기도문과 안내문에서 “아브라함의 품”이라든지 “부활의 약속”,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 “당신의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파스카적으로 재해석이 가능한 성서의 표상들이라 할 수 있다.41) 또한 시리아 전승 중에서 가-디오니시오(Pseudo-Dionysius Areopagita)의 작품으로 알려진 교계제도론(De Ecclesiastica Hierarchia)은 장례식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42) 이 책의 제7장은 여러 종류의 장례 예절에 관해 쓰여졌다.43) 제7장은 망자가 성인들의 품에 안기는 기쁨에 대한 긴 묘사로서 시작된다. 임종의 순간이 오면, 임종자의 가족과 친지들은 그의 이 세상에서의 승리를 경축하기 위해서 모여온다. 그들은 찬미가와 감사기도를 노래부르며 임종자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도한다. 임종을 한 후에 주교는 망자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품안으로, 고통도 슬픔도 다시는 없는 영원한 빛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망자의 죄의 용서를 청하며 장례예절을 주도한다. 이 때 주교는 감사기도를 드렸고 참석자들과 함께 시편을 노래하였으며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성서의 말씀을 읽었다. 이러한 예절을 마친 다음에 주교와 모든 장례식 참석자들은 망자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한다. 입맞춤이 끝나면 주교는 망자에게 도유를 하며 이 도유는 병자의 도유의 성격을 띈 것이 아니라 세례로 다시 태어남의 의미를 띈 것이라고 하겠다. 가-디오니시오에 의하면 세례 때의 도유가 이 세상에서의 거룩한 전투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 마지막 도유는 망자가 그 전투에서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세례는 파스카로 새로 태어나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이에 비해 죽음은 세례의 완성이 된다. 이러한 도유는 동방전례 뿐만 아니라 서방 전례에서도 발견되는데 7세기의 캔터베리의 테오도로의 참회예식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유는 현재까지 희랍 전례에 그 형태가 남아있다.44) 2-2-2. 초기 성사집(Sacramentarium)들 안에서의 장례예절 초기 그리스도교의 문헌 중에서 전례에 관계된 자료들은 교부들의 문헌에 단편적으로 흩어져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5세기 전후로 하여 전례만을 위한 문헌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성사집(Sacramentarium)이라고 불리는 책들이다. 첫 번째 성사집들은 5세기 이전의 전례집전 기도문까지 수록하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남아 있는 필사본들은 대개 7세기 이후의 것들이라고 여겨진다. 장례예식과 관련하여 현존하는 최초의 장례예식서는 Ordo 49번 일 것이다. 그러나 성사집 안에도 이미 위령기도와 죽은 이들을 위한 배려 등이 담겨 있으므로 Ordo 49번을 살펴보기 전에 최초의 두 개의 성사집에서의 죽은 이들을 위한 전례 기도문을 먼저 살펴보겠다.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성사집으로 여겨지는 베로나 성사집45)에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인 “Super Defunctos"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성사집에는 6개의 장례미사 기도문이 들어있다. 첫 번째 미사는 한 명의 망자를 위한 예식이며(1138-1140) 뒤따르는 3개의 미사 기도문(1141-1143, 1144-1146, 1147-1150)은 완성되지 않은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 미완의 기도문들은 아직 사죄를 받지 못하고 참회 중에 있는 죄인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한 미사 기도문들로 보여진다. 마지막 두 개의 기도문들은 성 라우렌시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로마의 주교가 죽었을 때를 위한 기도문(1151-1154, 1155-1160)으로 여겨진다. 이 베로나 성사집에 포함되어 있는 기도문들이 비록 망자를 위한 청원 기도문의 성격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속죄와 참회의 기도46)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성사집에는 파스카의 내용을 상기시키는 기도문, 예를 들어 영원한 생명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든지, 빛에 관한 언급들이 들어 있다.47) 젤라시오 성사집48)은 초기 교회의 장례미사 기도문을 매우 풍부하게 전달해준다. 젤라시오 성사집의 3권 91부는 망자를 위한 기도(Orationes post obitum hominis)로 꾸며져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한 미사 기도문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크게 5종류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임종 후에 바치는 기도(Orationes post obitum hominis 1607-1614)이고 두 번째가 묘지까지 이동하는 동안의 기도(Item orationes antequam ad sepulchrum deferatur 1616-1619), 세 번째는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하는 기도(Item orationes ad sepulchrum, priusquam seperiatur 1620-1622), 네 번째는 매장을 한 후에 하는 기도(Item orationes post sepolturam 1623-1625),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가 고별식 즉 영혼을 맡기는 기도(Commendatio animae 1626-1627)이다. 이 기도문들의 성격은 대부분 파스카적인 측면을 강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기도문에 많이 사용된 단어들 중에 특히 즐거움(Gaudium 9번), 기쁨(Laetitia 2번), 복됨(Beatitudo 10번), 이주 혹은 옮겨감(Migrans 1번, Transire 1번 Transito 2번)은 파스카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드러내는 말이라고 하겠다.49) 이러한 단어들을 죽음이라는 상황과 연결시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 파스카의 신비에 대한 신앙고백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이 기도문들 안에는 구약과 신약의 파스카를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구절도 발견된다.50) 물론 이 젤라시오 성사집의 장례기도문 안에 속죄나 형벌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51) 전체적으로 이 기도문들은 부활의 희망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톤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파스카를 상징하는 단어와 표현들을 자주 사용함으로서 가능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초기의 성사집 두 권에 실린 장례예절과 관련된 기도문들을 분석해 보았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죽음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한계상황을 부활에 대한 파스카 신앙과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죽음을 영원한 생명의 즐거움으로 나아가는 여행이며 길로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2-3. 초기 로마 장례예절 - 로마 예식 49권(Ordo XLIX) 로마예식(Ordo) 49권52)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장례예식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현재 보존되어 있는 예식서 원본이 비록 11세기의 필사본이라고 할지라도 이 예식의 사용시기는 7세기 이전까지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예식서는 예절지시문(Rubrica)을 중심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53) 이 예절지시문을 통해서 장례예식의 구조와 성격을 살펴볼 수 있다.54) 이 예식의 중심부에 두 개의 행렬이 있는데 이 행렬이 이 예식서의 성격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이 행렬은 망자의 집에서부터 성당까지 그리고 성당에서 묘지까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 행렬 중에 참석자들은 시편과 후렴을 노래하는데 이 행렬은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무리를 지어 나아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연상시킨다. 파스카의 시편이 노래되기 때문인데 이것이 이 장례예절이 간직한 파스카적 요소의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행렬 중에는 모두 8편의 시편을 노래한다.55) 이 중에는 명백하게 파스카의 시편이라고 할 수 있는 시편 113편이 있는데 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서 올 제, 야만족을 야곱 집안이 떠나서 올 제”라는 부분은 이와 같은 파스카의 행렬을 연상시켜주는 명확한 파스카 시편인 것이다. 또한 시편 117편도 노래되는데, 이 시편 또한 파스카의 과정에 대한 이스라엘의 감사의 노래, 이스라엘의 해방절 만찬의 시작과 끝 부분에 노래 불려지는 대표적인 파스카 시편이다. 이러한 시편이 불려지는 로마예식 49권은 죽음이 이와 같은 영광스러운 자리 옮김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망자는 아직 살아남은 신자들의 환송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서 파견된 천사들의 환호 속에(Chorus angelorum te suscipiat) 영원한 왕국의 문으로(Aperite mihi portas iustitiae et ingressus in eos confiteor domino) 들어가는 것이다.56) 이 장례 예식서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근심에 대한 문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적어도 7세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죽음이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해서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왕국으로 떠나는 여행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로마예식 49권을 분석하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중세 초기까지 동, 서방교회를 막론하고 교회공동체는 파스카의 기쁨을 신앙 안에서 체험하며 영원한 삶을 향한 부활을 선포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한시적인 이 세상에서 영원한 저 세상으로 나아가는 파스카의 여행을 굳게 믿고 있었고, 죽음이 이러한 여행의 시작이라는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따라서 죽음의 현실 앞에서도 그리스도교의 최상의 덕목들인 기쁨, 생명, 희망, 사랑 등을 장례 예절 안에서 강하게 표명하였던 것이다. 비록 당시의 장례식 집전에 대한 완벽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 당시 교회가 죽음을 파스카로 이해하고 그 예절을 파스카적으로 집전하였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57) 3. 중세의 장례예절 - 비 파스카적 예절의 시작 초기 교부들의 문헌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장례는 파스카적 기쁨의 전례였다. 이는 중세 초기까지의 장례예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로마예식 49권의 장례예절에서도 확인된다. 초기 교부 시대의 역사적 상황이 박해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박해시대였던 당시에 이러한 파스카적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어있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죽은 이를 하느님께 맡기는 전례인 장례예식의 기도문과 구조에서도 이와 같은 파스카적인 특징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교회의 파스카 신앙에 입각한 장례 전례는 중세초기를 넘기면서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한다. 그 동안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었던 속죄적 성격과 파스카적 성격의 균형이 깨어지면서 파스카적 요소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3-1. 파스카적 요소의 감퇴 아우구스티노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를 강조했던 것처럼58) 대 그레고리오 교황도 망자가 살아 있을 때 지은 죄의 용서를 위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는 꼭 필요한 것이라는, 죽음에 있어서의 속죄와 참회의 측면을 강조하였다.59) 이와 같은 교부들의 가르침은 교회에 속죄와 참회의 신학의 발달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교회의 분위기는 장례예식의 변천과정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결국 장례예식은 이제 하느님의 심판 때에 징벌을 피하기 위해 하느님의 자비에 호소하는 쪽으로 그 집전의 중심이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부터 망자의 영혼을 위한 속죄의 표시로 미사가 집전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장례예식 안에서도 파스카의 기쁨은 망자의 영혼의 죄를 씻는 속죄적인 성격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속죄의 정신은 죄로 인한 심판의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 죽음 앞에서 파스카적인 기쁨보다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느껴야하는 종교심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례예절도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망자의 죄의 용서를 씻기 위한 예식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결국 장례예식 안에서의 파스카적인 요소는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특히 8세기 이후 갈리아 지방의 전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60) 이러한 파스카적 요소의 감퇴는 중세의 모든 지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찾고, 대성당들을 세우고, 국가 종교화됨으로써 세속적인 권한도 부여받게 됨으로써 이러한 파스카적인 요소의 감퇴는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교회가 세속적이고 외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기득권을 갖게될 때 교회는 보수화 되고 안정을 추구하게 된다. 이 안정과 기득권을 한꺼번에 상실하게 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한다면 결국 죽음은 파스카적인 기쁨이나 즐거움의 표상으로 다가오기보다는 심판과 재앙의 모습으로 다가오기가 더 쉬운 일이었을 것이며 결국 이는 장례 전례에도 영향을 강하게 미침으로써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전례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스카적 요소의 감소에 따라 그레고리오 성사집과 그 동시대의 장례 기도문에 새로이 등장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우선 살아있을 때 범한 죄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기인하는 사죄경의 성격을 띈 기도문이 나타난다(Ut absoluta omnium vinculo peccatorum Gre.1400).61) 또한 죽음은 더 이상 저 세상을 향하는 통과의 기쁨이 아니라 두려운 심판(Non intres in iudicio... non ergo eum tua quaesumus iudicialis sententia praemat... Gre 1401)이며 이러한 심판을 통하여 지옥의 불길(ignis flammaque tartaris RH 1332)로 빠지게 될지 모르는 위험한 여행이 죽음이라는 것이다.62) 따라서 죽은 후에 다가올 저승에 대한 개념도 부정적인 언어로 묘사된다. 물론 이 중세 장례 예식서 중에서도 긍정적인 단어가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천국(paradisum Gre 1407)", "안식과 빛이 있는 곳”(locum lucis et refrigerii Gre 1409), "천사들의 모이는 곳”(Societ angelicis Gre 1402), "뽑힌 이들과 성인들 사이에서”(inter sanctos et electos Gre 1400)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조차 심판날이라는 단어와 연결됨으로써 그 긍정적인 의미를 축소시키고 있다.(et cum dies iudicii aduenerit, cum santis et electis tuis Gre 1409). 다시 말해서 장례 예식 전체를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주제로 재구성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서는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심판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아직 심판 중에 있는 망자의 영혼을 위해서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며, 이러한 기도문이 이 예식서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미사성제는 이러한 기도 중에서 가장 효력 있는 기도로 여겨져 봉헌되었으며, 모든 장례식의 기도문들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느님(Deus)을 향해 바쳐졌다. 그럼으로써 성자와 성령이라는 표현은 예식서에서 찾아보기가 힘들게 되었으며 이 시대의 장례 예식서들은 파스카 사건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행업에 대해 대부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장례 예식서들의 기도문에서는 그리스도론적인 진술이나 파스카적인 진술 그 어느 것도 발견되지 않는다.63) 장례예식에 있어서 시편들은 아직도 중요한 요소였다. 옛 파스카 만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시편 41편과 117편은 Rheinaugiens 성사집(RH)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파스카를 주제로 쓰여진 시편인 113편(In Exitu Israel)은 22편(Dominus regit me)으로 대체되었다. 또한 이 성사집은 후렴구절인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 mei Deus)>를 강조하는데 H.Frank에 의하면 이 후렴구절은 분명하게 속죄의 성격을 갖고 있는 구절이라는 것이다.64) 또한 중세의 예식서들은 9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죽음에 대한 근심을 노래한 응송인 <저를 풀어주소서(Libera me PRG 149,40)>를 담고 있다. 멘데의 주교였던 G, Durandus(1230-1296)는 클뤼니 수도회의 장례예식에 대해서 언급하였다.65) 이 자료에서 우리는 임종 직전에서부터 매장 때까지의 장례예절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먼저 임종이 가까이 온 것을 느낀 수도자는 아빠스나 원장신부를 불러 자신의 임종에 대해서 알린다. 이어서 공적인 죄의 고백과 병자의 도유, 노자성체가 시편이 불려지는 가운데 집전된다. 임종 때가 되면 임종자에게 재를 뿌린다. 그리고 성인호칭기도가 뒤따르는데 후렴은 <그를 위하여 빌어주소서(Ora pre eo)>라고 변형되어 노래된다. 임종 후에 바로 위령 성무일도가 성당에서 거행된다. 성무일도는 저녁기도에서 아침기도까지 계속 되는데 이 성무일도가 끝나면 미사가 이어지고 미사 후에 곧 바로 묘지까지 행렬하여 시신을 매장한다. 이 예식에서 볼 수 있듯이, 죄를 고백하고 재를 뿌리며 망자를 위한 호칭기도를 하는 것은 망자의 속죄와 죽은 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강조되었기에 생겨난 전례 형태로 보인다. 여기서 재를 뿌리는 부분은 구약성서의 재앙에 대한 기사들을 떠올리게 하는데 죽음이 파스카의 여행이 아니라 재앙의 성격으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 때 바쳐지는 위령 성무일도가 성삼일의 성무일도와 비슷한 구조로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이 성무일도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의 위로를 중심테마로 삼고 있으며 파스카적인 기쁨의 테마는 거기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이 수도원 전승의 장례예절은 그 골격이 1614년 로마 예식서의 장례예절에 수용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의 장례예절에서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기억은 인간의 속죄에 대한 염려로 뒤바뀌기 시작했다고 하겠다. 3-2. 중세 초 중기의 세 가지 장례 예절 텍스트 비교 중세의 장례예절에서 파스카적인 측면이 사라지게 되는 과정을 중세 초기와 중기의 장례 텍스트들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더욱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중세 초 중기의 3가지 장례 텍스트를 선택하여 비교 분석해 보도록 하겠다. 비교 분석할 3가지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선정하였다. 먼저 7세기 이전의 예식을 반영하고 있는 로마예식 49권(Ordo49)인데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둘째 텍스트는 쾰른 텍스트(CMS123)인데 이 사본은 로마에서 유입된 전례로 10세기경의 예식으로 판단된다.66) 셋째 텍스트는 로마 게르만 주교예식서 149장(PRG149)인데 이 예식서 역시 10세기의 전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7) 첫째와 둘째 텍스트는 장례예식의 구조와 시편들 후렴구절만 알 수 있음에도 이 세 가지 예식서들이 모두 로마 전승이라는 동일한 전승 안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68) 왜냐하면 이 세 예식서들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예식을 구성하고 있는 시편이나 후렴구절에 있어서 서로 많은 부분들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 예식서가 같은 전승 안에서 발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예식서에서 우리는 7세기에서 10세기까지 일어났던 파스카적인 요소의 감소현상을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이 예식서들은 3부분의 집전으로 이뤄져 있는데 망자의 집에서의 예식, 성당에서의 예식, 무덤에서의 예식이 그것이다. 이 3가지 예식서의 구조를 면밀히 비교하여볼 때 장례예식 안에서 파스카적 요소가 어떻게 감소되었는지 확인 될 수 있을 것이다. 3-2-1. 망자의 집에서 하는 예식 Ordo49와 CMS123은 망자의 집에서 하는 예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PRG에서는 몇 가지 요소가 첨가되었는데 그것들은 대부분 망자를 위한 청원기도 의 성격을 띈 것들이다. 특히 PRG에서는 망자의 집에서 읽었던 주님의 수난복음이 완전히 생략되었고 그 자리에 모든 성인의 호칭기도가 들어가게 되었다.69) 망자가 숨을 거둔 후 곧바로 이 세 예식서들은 한결같이 시편과 후렴을 노래하고 있다. Ordo49는 응답송의 후렴으로 <오소서 주님의 성인들이여(Subvenite, Sancti Dei)>, <그리스도 너를 환영하시리니(Suscipiat te Christus)>를 수록하고 있다. 또한 파스카의 시편인 113편(Exitu Israel :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서 올 때)을 싣고 있으며 이 시편의 후렴으로 <천사들의 합창이 너를 환영하리니(Chorus angelorum te suscipiat Ordo 49 3항)>를 수록하고 있다. 이 시편과 후렴구절들은 모두 파스카의 위로와 희망을 노래하는 파스카적인 요소들로서 천사와 성인들에 의해서 낙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CMS123은 Ordo49의 모든 요소들을 보존하면서 몇 가지를 첨가하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Requiem aeternam>70)과 시편 114편(주님을 나는 사랑하노라; Dilexit quoniam exaudiet dominus)이다. 한편 PRG는 더욱 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시편 136편과 자비를 구하는 기도인 Kyrie, 주의 기도 등이 그것이다. 시신을 수시하기 전에 Ordo49와 CMS123은 한 개의 기도만을 수록하고 있다.71) 이에 비해서 PRG는 3가지의 기도를 3번에 걸쳐 하도록 수록하고 있다. Ordo49에서 사용되었을 기도(GeV 1627, OE174) 역시 PRG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PRG의 기도는 매우 복잡한 신학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집트의 탈출을 상기시키는 파스카적인 요소(7항)에서부터 세상에서 육신에 의해 범한 죄의 속죄라는 파스카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속죄적 요소(11항), 그리고 심판 때에 자비를 청하며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해달라는 심판의 신학(14항)까지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PRG는 첫 번째 단계인 망자의 집에서 행하는 예식에서부터 긴 예식으로 변모되었고 많은 요소들을 첨가시킴으로써 파스카적인 요소들이 퇴조하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수시와 입관예절을 끝낸 후에 행하는 예식들이 있는데 세 가지 예식서들은 서로 다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72) 이 예식은 시신을 성당까지 옮기는 예절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Ordo49는 시편92편(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차리시니 : Dominus regnavit)과 후렴 <나를 만들었던 흙에서부터(De terra formasti me)>를 수록하고 있다. CMS123은 후렴은 같은 것을 사용하되 시편은 22편(주님은 나의 목자 : Dominus regit me)으로 대체하였다. 시편 92는 왕이 왕좌에서 다스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시편 22는 주님의 집에서 천상 옷을 입고 즐기는 모습의 시편으로 비슷한 주제의 시편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PRG에서는 아무런 시편도 후렴구도 찾아볼 수 없고 단지 기도문들만 수록되어 있다. 이 기도문들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죄의 용서를 호소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PRG에 와서 파스카적인 기쁨과 주님의 나라에서의 즐거움을 담아내던 시편과 후렴구들이 장중한 톤의 속죄를 청하는 기도문으로 대체된 것이다. 3-2-2. 성당 안에서 행하는 예식 세 예식서는 각각 성당으로 향하는 행렬73) 중에 부르는 시편과 후렴을 소개하고 있다. 이 행렬 중의 노래로서 Ordo49는 시편 41편과 후렴 <주님 나를 태어나게 명하소서(Tu iussisti nasci me, domine)>, 시편 4편과 후렴 <하느님의 천국으로 천사들이 너를 인도하리라 (In paradiso D[e]i ducanti te angeli)>을 수록하고 있다. CMS123은 시편 41편과 후렴은 Ordo49와 같지만 시편 142편(주여 내 기도를 들어주소서; Domine Exaudi)을 후렴 <내 소리를 들으소서(Audivi vocem)>와 연결시켜 추가하고 있다. 이는 Ordo49가 CMS123으로 전승되어오면서 청원의 부분이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서 PRG는 이외에도 3개의 시편과 후렴을 추가 수록하고 있는데 시편 24편, 64편과 후렴 <천국으로 천사들이 너를 봉헌하리라(In paradiso deducant te angeli)> 그리고 시편 50편과 후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Requiem aeternam)>가 각각 예식 안에 삽입되었다. 여기서 시편 50편과 그 후렴 <Requiem>은 파스카적인 성격에서 애원조의 청원기도로 예식의 성격이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고 하겠다. Ordo49가 사용했던 후렴 <Tu iussisti>를 PRG는 매장예절에서 사용하고 있다. CMS123에는 누락되어 있는 후렴구 <In pardiso...>에서 Ordo49에서는 동사를 Ducere(ducant)를 쓰는데 비해서 PRG에서는 Deducere(deducant)를 사용한다. 이는 PRG가 Ordo49보다 훨씬 더 예전적인 어휘를 채택한 증거로 보인다. 망자의 집에서 성당으로 가는 행렬에서 불려진 노래들을 종합하여 볼 때 전반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보여주는데 망자가 최후로 자신의 집과 가족들의 땅에서 떠나는 슬픔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Ordo49에서 CMS123을 거쳐 PRG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청원의 성격을 띈 노래들이 강화되어 점차 무거운 분위기로 변모되어 갔다. 성당에 도착해서 계속해서 밤샘기도의 형식을 띈 위령기도가 거행된다. Ordo49와 CMS123이 보여주는 이 위령기도 부분은 매우 간결하다. 이 위령기도는 욥기를 읽고 알렐루야 없는 후렴을 부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Ordo49의 예절지시문은 사제의 기도가 있었고, 시편 117(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이 후렴구 <정의의 문을 활짝 열어라(Aperite mihi portas iustitiae)>와 함께 노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편은 다른 두 예식서에서는 무덤으로 가는 행렬 중에 불려지게 된다. PRG는 앞의 두 예식서와는 달리 훗날의 로마예식서(1614년)의 위령성무일도와 거의 유사한 위령기도를 소개하고 있다.74) 위령기도를 마친 후 CMS123과 PRG는 Ordo49에는 없는 위령미사의 봉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75) 초대교회에서 장례예절을 집전할 때 사망 당일이나 매장하는 날에는 파스카적인 성격이 강한 찬가와 시편을 불렀으나 미사를 집전하지 않았으며 기일76)에나 미사를 집전했다는 사실을 볼 때, Ordo49가 더 초대교회의 예절과 가까운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장례 당일에 미사가 들어온 것과 죽은 이를 위한 청원기도의 성격을 강하게 띄는 위령성무일도의 봉헌은 Ordo49에 존속했었던 파스카적인 요소가 감소하고 대신 그 자리에 보충된 것이라고 하겠다. 미사 후에 PRG는 망자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속죄와 참회의 기도를 계속한다. 즉 미사 후에 Kyrie가 후렴구 <지옥 불에 주님 저를 구하소서 (Libera me Domin de infermi)>와 함께 다시 한 번 불려지며, 지옥 불과 형벌에서 구해달라는 청원기도가 뒤따르는 것이다. 이는 파스카적인 요소가 점차 생략되고 죽음 이후의 망자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망자를 지옥에서 구해달라는 간구가 강조되어 나타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3-2-3. 성당에서 묘지로의 행렬 이 행렬에 대해서 3가지 예식서는 각각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Ordo49는 4개의 시편과 후렴을 제시하면서 간단하게 이 행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Ordo49가 사용한 시편은 시편 14(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이리까. Domine, quis habitabit)와 후렴 <어떻게 네 영혼이 천국으로 갈 수 있으랴 (Qui posuit animam tuam ad vitam)>, 시편50(하느님 자비하시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Miserere mei Deus)과 후렴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오르는도다(Animam de corpore quam assumpsisiti)>, 시편24(주여 내 영혼이 Ad Te Domine levavi)와 후렴 <주님 저의 겸허함을 굽어보소서(Vide Domine humilitatem meam)>, 그리고 한 번 더 시편50과 후렴 <하느님의 나라에 너를 봉헌하리라.(In Regnum Dei deducant te)>이다. 위의 시편과 후렴에 사용된 동사 중에서 ducere, suscipere, perducere 등이 어떤 행렬이나 움직임을 묘사하는 말이라면 이것들은 “통과해 나감”이라는 파스카의 뜻과 어울리는 단어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CMS123은 이 행렬에서 시편 117(주님을 찬미하여라, Confitemini Domino)과 후렴 <정의 문을 내게 열어주소서(Aperite mihi portas iustitiae)>를 제시하고 있다. 무덤에 도착해서 사제는 기도를 하고 기도가 끝나면 시편41(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Quemadmodum)이 후렴 <내 영혼이 갈구하나이다(Sitivit anima mea)>와, 시편 42가 후렴 <성소에 들어서게 하소서 (Ingrediar in locum tabernaculi)>와 그리고 시편 131편(주여 다윗을 기억하시고 Memento Domine David)이 후렴 <여기 나의 안식에 Haec requies mea)>와 함께 불려진다. PRG도 행렬 중에 불려질 한 편의 시편을 소개하는데 시편 122편과 후렴 <너를 천국으로 봉헌하오니 (In paradisum deducant te)>가 그것이다. 묘지에 도착한 후에 계속하여 기도를 바친다. PRG는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행하는 몇 가지 기도와 2개의 시편을 수록하고 있다. 시편은 64(당신을 찬미함이 Te decet hymnus)가 후렴 <나를 태어나게 명하소서 (Tu iussisti nasci ne)>와 시편 117이 후렴 <문을 내게 열어주소서(Aperite mihi portas)>와 함께 낭송되었다. 하관을 할 때도 역시 PRG는 두 개의 시편과 기도를 바친다. 시편은 41편이 후렴 <성소에 들어서게 하소서 (Ingrediar in locum)>77)와 시편138이 후렴 <흙으로 나를 빚으셨으니 (De Terra formasti me)>78)가 기도와 함께 노래되는 것이다. 또 시편131을 후렴 <여기 나의 안식이(Haec requies meas)>와 함께 노래하면서 무덤을 덮었다. 매장이 끝난 후에도 PRG는 몇 가지 기도와 후렴을 바치도록 하였고 그리고 무덤 위에 사죄경 기도를 해주었으며 마지막으로 시신의 축복으로 매장예절을 끝맺었다. 살펴본 대로 PRG는 많은 기도문과 예식들을 보충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첨부된 새로운 예식과 기도들은 대부분 망자의 속죄와 심판을 위한 청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례 자체를 하느님 나라에서의 탄생 예절로 보았던 초대교회의 파스카적 성격이 거의 훼손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기도문들은 망자가 범한 죄에 대한 염려를 반복하고 있으며79) 또한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다.80) 그리고 기도문들도 어떤 것을 없게 해달라는 부정형의 문장이 많이 사용되었다.81) 지금까지 3가지 중세 예식서들을 비교해 보았다. 이와 같은 비교를 통하여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것은 Ordo49에서 PRG로 변천해오는 동안 예식이 매우 길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식의 비대해짐은 주로 속죄적인 측면이 추가됨으로써 기인된 것이다.82) 그리고 망자에 대한 죄와 그 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집착하여 예식을 거행하게 됨으로써 예식서 전체가 속죄와 참회의 예식서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러한 속죄와 참회예식의 강조는 구원에 대한 불확실성을 낳게 되었으며 결국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의 자비에 입각하여 구원을 확신하고 죽음이 구원으로 나아가는 통과의례(Pascha)로 여겼던 초대교회의 신심과는 많이 멀어졌음을 이 예식서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론적으로 Ordo49 이후에 장례 예식서들에서 파스카적인 측면이 급격하게 약화되었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4. 1614년 로마 예식서의 장례 예절 17세기초까지 각 지역별로 여러 수도원의 전승에서 기인한 각기 다른 장례와 매장 예절이 로마 교회 안에 존속했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전 교회적인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된 장례예절은 없었다. 교황 바오로 5세는 1614년에 전 교회를 향하여 통일된 예식서의 사용을 선포하는데 이를 로마 예식서(Rituale romanum)라고 부른다.83) 4-1. 1614년 예식서의 구조 1614년 예식서는 죽음과 관련된 여러 예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노자성체(Viaticum) 예식은 성체성사 예식의 끝 부분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 임종자를 위한 예식은84) 따로 Ordo commendationis animae라는 부분에 수록되어 병자의 집에서 거행될 수 있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병자 방문과 병자성사 예식은 따로 구별되어 De visitatione et cura infirmorum(혹은 In Expiratione)라는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1614년 로마예식서에서 본연의 장례예식 부분은 앞에서 언급한 예식들의 뒷부분에 De Exsequiis라는 이름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장례예절은 모두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즉, 첫 번째 망자의 집에서 성당으로의 행렬을 중심으로 하는 예절과, 성당 안에서 하는 예절(위령 성무일도, 미사, 사죄예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묘지로 향하는 행렬을 포함한 묘지에서 하는 예절로 구분되는 것이다. 이 예식서는 망인의 집에서 행해지는 수시와 입관 등의 예절은 생략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가 망인의 임종의 순간에서부터 무덤에 묻힐 때까지 공적으로 예절을 함께 하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85) 1614년 예식서는 또한 많은 기도문들과 시편, 후렴구절을 생략하고 있는데 미사와 매장 중에 바치던 후렴과 기도들이 생략되었기에 1614년 예식서는 매우 단순한 장례예식만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4-2. 첫 번째 행렬 (망자의 집에서 성당까지) 서문과 장례집전 거부에 대한 언급86) 후에 1614년 예식서는 망자의 집에서 성당으로 행렬하는 것으로 장례예식을 시작하고 있다. 행렬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시신에 성수를 뿌리고 시편 129(깊은 구렁 속에서 De profundis clamavi)를 후렴 <부당한 종이라면(Si iniquitates)>을 노래한다. 행렬이 시작되면 시편50(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Miserere)과 후렴 <주님께 뛰어갔나이다 Exultabunt Domino)>를 노래한다. 행렬 중에는 계속하여 시편 119(괴로움 속에서 주께 Ad dominum cum tribularer)와 위령 성무일도의 시편들을 노래하는데 시편의 끝마다 후렴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Requiem aeternam dona ei)>를 불렀다. 이 첫 번째 행렬예식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시편의 교체에 있다. 이전시대의 예식서들이 행렬 서두에 사용했던 파스카의 시편이랄 수 있는 113편은 생략되고 그 자리에 속죄와 참회의 시편인 129편이 자리잡은 것이다. 또 시편 50이나 119편도 속죄나 참회의 테마와 관련있는 시편들로서 이 행렬이 파스카적 행렬이 아니라 속죄의 행렬이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다. 4-3. 성당 안에서의 예절 성당 가운데로 유해가 모셔지는 동안 오래된 후렴인 <하느님의 성인들이 오소서(Subvenite Sancti Dei)>가 노래불려진다. 유해를 모신 관은 제대 앞에 놓여지게 되고87) 곧 이어 위령 성무일도가 봉헌된다.88) 성무일도 찬미(Benedictus와 주님의 기도)가 끝나면 <주님 용서를 구하오니(Absolve quaesumus Domine)>로 시작되는 기도가 뒤따른다. 그리고 곧 이어 미사를 봉헌한다. 비오 5세 미사경본에는 장례를 치르는 날을 위한 미사경문이 한 개만 들어있다.89) 이 미사경본의 본기도는 현행 미사경본의 부활시기가 아닌 때 드리는 양식의 본기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하느님 당신은 자비하시니(Deus, cui proprium est misereri)>로 시작된다. 미사 중의 독서는 1데살로니카1서(4,13-18)와 요한복음(11,21-27)이 봉독되었는데 이는 현행 독서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부속가로서 그 유명한 <분노의 날(Dies Irae)>이 노래되었는데 이는 거의 반 파스카적 요소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 만큼 속죄와 징벌의 측면이 강조된 형태이다. 파스카의 기쁨의 천상 탄일이 이제 분노의 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 <Dies Irae>는 죽음과 심판에 대한 묵상집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또 다른 후렴인 <저를 해방시키소서(Libera me)>처럼 장례예식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90) 중세 시대의 대중 신심에 있어서 사후의 평화는 가장 중요한 주제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따라서 분노의 날에 해방을 간구하는 기도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고 이 기도들이 죽은 이를 위한 예식에 들어오게 된 것으로 보인다.91) 미사의 봉헌기도 또한 속죄를 청하고 있으며(Propitiare quaesumus Domine) 감사송과 영성체 후 기도는 현행 예식서의 기도와 일치한다. 이 미사 기도문에서는 속죄의 요소가 많이 발견되며 망자를 위한 중재와 청원의 요소 또한 많이 발견된다. 살아 남은 자들이 가공할 심판으로부터 죽은 이의 해방을 비는 기도가 미사의 중심테마가 된 것이다. 미사가 끝나면 사죄예식(Ritus absolutionis)92)이라는 것을 행한다. 사제는 먼저 망자를 심판에 넘기지 말라는 기도(Non intres in iudicium)93)를 바치며 Kyrie가 노래되는 가운데 성당 앞을 향하여 분향을 한다. 이어서 주님의 기도를 낭송하고 관을 향하여 분향을 하고 성수를 뿌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이 망자의 위험한 여행을 지켜주시기를 청하는 청원기도가 바쳐진다. 이 관을 향한 사죄예식은 망자의 구원을 위한 청원 기도의 형식으로 당시의 죄와 최후 심판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이 잘 반영된 예식이라고 하겠다. 4-4. 성당에서 묘지로의 행렬 성당에서 묘지로 행렬 중에는 1614년 로마 예식서는 <낙원으로 (In Paradisum)>를 노래한다. 묘지에 도착하여 무덤이 아직 축복되지 않았다면 축복기도(Deus cujus miseratione)를 바치며 무덤을 축복한다. 망자의 시신에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린 다음, 후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Ego sum resurrectio et vita)>를 즈가리야의 노래와 함께 부른다. 이어서 Kyrie와 주님의 기도, 그리고 사제의 기도(Fac quaesumus Domine)94)가 뒤따른다. 사제는 참석자들과 함께 <Requiem aeternam>을 노래하면서 무덤을 향해 십자 표시를 한다. 묘지에서 돌아올 때 시편 129를 읽는데 후렴은 <허물이 있더라도(Si iniquitates)>를 사용하며 이 때 시편을 노래하지 않고 그냥 낭독한다. 장례예절은 성당으로 돌아와 제의방 앞에서 끝이 난다. 이 끝 부분에서 파스카적인 요소가 하나 발견되는데 감사의 찬가인 ”즈가리야의 노래“가 그것이다. 이는 1614 로마 예식서의 전반에 흐르는 심판을 위한 속죄와 참회의 성격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라고 하겠다. 4-5. 1614년 로마 예식서 장례예식의 성격 1614년 로마 장례예식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예식이 매우 간소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예식은 이전예식들이 지니고 있던 많은 시편들을 생략했으며(시편 113, 24, 114, 131, 41 등), PRG에 아직 남아 있었던 많은 파스카 성격을 띄는 기도문들의 숫자를 줄여놓았다.95) 반면에 1614년 예식서는 <Dies irae>나 <Libera me>처럼 속죄의 성격을 띈 기도문, 시편, 후렴 등은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다. 또 초대교회의 장례의 색깔이 부활을 상징하는 흰색이었음에도 1614년 예식서는 검정색을 장례예식을 상징하는 색으로 규정하여 검정색 제의와 제구의 사용을 결정하였다. 또 이 예식서는 사죄예식(Absolutio)을 예식의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1614년 예식서가 파스카적인 성격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죄경은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고려로 생겨난 예식이므로 구원을 확신하는 파스카적 표현이 이 예식의 출현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 예식서에서 우리는 속죄의 신학을 만나게 된다. 중세에 이르러 연옥에 대한 교의적 개념이 발전하게 된다.96) 이 신학에 따르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하느님 나라는 성인들의 나라이므로 아무도 죄인인 채로는 그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를 씻을 곳이 필요했고 이곳이 연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중세이래 장례예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12세 말까지는 연옥(Purgatorium)라는 명사는 찾아볼 수 없다.97) 아무튼 이러한 연옥 개념의 발전은 장례예식이 이 세상에서 범한 망자의 죄의 용서와 가벼운 심판을 위한 청원의 형식으로 변모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하겠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한 교회분열 이후, 교회는 외적인 일치에 더욱 노력하였고 이런 노력은 교의적인 측면과 함께 성사-전례적인 측면에서도 한층 강화되었다. 이는 결국 예식서의 통일을 초래하게 되었고 이 통일된 예식서는 인쇄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전세계적인 예식의 일치가 가능하게 되었다. 이 결과 지역 교회와 수도전승이 나름대로 보존하고 있었던 전승들은 폐기되었다. 그 중에는 많은 지역의 고유관습을 포함하는 예식도 있었고 또한 파스카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예식서들도 있었다. 이러한 예식서의 통일 이후에 지역교회는 자신의 고유전례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전례집전에 있어서 활력을 잃게 되기도 한다. 트렌토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또한 성직자 중심주의적 성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런 성향은 예식서에도 반영되어 예식 안에서 성직자들의 역할이 더욱 커지게 되었고 신자들의 역할은 더욱 축소되었다. 본당신부들과 관할권자들은 전례와 사목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부각되었고 이는 1614년 예식서 곳곳에서 나타난다.98) 평신도들은 수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하게 되었고 장례예식에서도 모든 이가 하느님의 구원에 감사드리며 부활을 노래하는 파스카적인 요소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소수의 성직자가 중심이 되어 망자의 죄를 씻어주고 받을 심판을 가볍게 해달라는 사죄경의 성격을 띄는 기도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교회는 장례예식 안에서 활력 있는 전례집전과 능동적인 참례자들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5. 맺는 말 지금까지 몇 가지 장례 예식서를 중심으로 초중세 교회이래 트렌토 공의회까지의 장례 형식을 비교 분석해 보았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고유의 예식서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그리스도교적이며 파스카적인 집전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시편과 찬가를 노래하면서 장례예절 안에서 기쁨까지도 표현하였던 것이다. 인간적인 슬픔과 고통을 드러내는 것을 참아내면서 망자를 위해 기도하며 망자가 참여할 파스카의 기쁨을 살아남은 그들도 그리워했던 것이다. 박해 시대였으므로 그들은 서로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고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그리스도적인 희망을 장례예식을 통해서 고백했던 것이다. 당대의 교부들과 순교자들은 삶의 중심에 신앙을 놓았고 신앙의 중심에 저 파스카를,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여정을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신앙을 고백했던 것처럼 똑같은 방법으로 장례예절을 거행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박해는 끝나고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지만 이와 같은 외적인 요인은 장례예식의 변질을 초래하였다. 여러 문화와 관습들이 그리스도교 전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초대 교회 교부들은 외적으로는 이방인의 미신적인 관습과 싸워야 했으며 내적으로는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이단과 싸워야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이교의 신화적인 관습은 그리스도교 전승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의 전례는 문화유입(inculturatio)과 문화배척(exculturatio)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발전하였던 것이다.99) 그러나 중세에 접어들면서 교회의 장례예절은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장례예식 안에는 파스카의 기쁨과 죄악에 대한 불안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성격이 함께 자리해왔는데 중세에 접어들면서 이 둘 사이의 균형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분석했던 것처럼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은 적어도 7세기까지는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7세기의 장례 예식서로 보이는 Ordo 49권에는 파스카적인 측면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스카적인 측면은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교회의 장례예식 안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분석했던 쾰른 사본 123번의 장례예식을 거쳐 10세기의 로마-게르만 주교예식서에 이르러 속죄와 청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 파스카적인 요소들이 장례예식의 중심에 자리잡게 되었고 이 예식서에서 파스카적인 요소들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 로마-게르만 주교예식서 안에는 파스카적인 측면의 흔적들은 엿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주교예식서는 전승되어온 모든 요소들을 가능한 한 제거하지 않고 집대성한 예식서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프로테스탄트들에 의한 교회분열이 일어나고 트렌토 공의회가 개최되었으며 1614년 교황 바오로 5세에 의해 로마예식서가 반포되었다. 이 로마 예식서는 로마-게르만 주교예식서와는 달리 전승되어 내려오던 장례예식서를 매우 간결하게 축소시켰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축소의 과정에서 얼마 남지 않았던 초대교회 이래의 파스카적인 요소들의 대부분이 삭제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1614년 로마예식서는 파스카적인 측면은 대부분 삭제한 채, 죄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의 언어로 가득찬 예식서로 로마 장례 예식을 변질시킨 것이다. 따라서 장례예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범한 죄에 대한 속죄의 예식서로 변모되었고 위로보다는 걱정을, 희망보다는 두려움을, 기쁨보다는 슬픔을 표현하는 예식서가 되어버렸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헌장에서 장례예식의 개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장례예식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파스카적인 성격을 더욱 명백히 표시할 수 있도록 개정되어야 한다100)”고 공의회는 선언한다. 초대교회에서 중세, 그리고 트렌토 공의회까지의 장례예절의 변천사를 개관하면서 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와 같은 선언을 하였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도 상장례 예식서 개정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로마 교황청에서 가장 많은 토착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은 전례가 바로 이 장례예식서이다. 장례 예식의 개정을 담당하는 이들이 장례예식의 중심에는 파스카가 있음을 깊이 숙지하여 참으로 저 파스카의 희망과 기쁨을 보여주는 장례 예식서가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장례예식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끝과 시작을,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파스카를 직접 열어 보여주는 그리스도교 전례의 마지막 장이기 때문이다. <약어표> AAS : Acta Apostolica Sedis. Commentarium officiale (Typis Polyglottis Vaticanis 1909ss) AFL : Archiv für Liturgiewissenschaft (Maria Laach / Ratisbone 1950) CCL : Corpus Christianorum Series Latina, (Turnhout 1953ss) CMS123 : Cologne MS.123 : G.Haenni, Un Ordo Defuntorum du Xe siécle, in EpL 73 (1959) pp.431-434 CSEL : Corpus Scriptorum Ecclesiasticorum Latinorum, (Wien 1866ss) DPAC : Dizionario Patristico e di Antichità Cristiane, (ed. A.Di Berardino, Marietti, Roma 1983) EpL : Ephemeriedes Liturgicae (Roma 1887ss) GeV : Sacramentarium Gelasianum (ed. L.C.Mohlberg, L.Eizenhofer & P.Siffrin) Gre : Sacramentarium Gregorianum (ed. J.Deshusses) LMD : La Maison Dieu (Paris 1945ss) OE : Ordo Exsequiarum (Rituale Romanum ex decreto Sacrosancti Oecumenici Concilii Vaticani II instauratum auctoritate Pauli PP.VI Promulgatum, Editio Typica. Typis Polyglottis Vaticanis 1969) Ordo49 : Ordo Romanus 49 (M.Andrieu(ed.), Les Ordines Romani du Haut Moyen Age, Tom.IV Louvain 1985, pp.529-530) PG : Patrologiae Cursus Completus. Series Graeca (ed. J.P.Migne, Paris 1857-1866) PRG149 : Pontificale Romano Germanico 149 : C.Vogel & R.Elze(ed.), Le Pontifical Romano Germanique du dixiéme siécle, Città del Vaticano 1963, vol.II, pp.281-305 RH : Scaramentarium Rheinaugiense (ed. A.Hänngi & A.Schönherr, Zürich Zentralbibliothek, cod. Rh.30) Sch : Sources Chrètiennes (Paris 1942ss) 1) 전례헌장이 당시 교회 내에서 가장 시급한 전례 쇄신 작업과 맞물려 빨리 다뤄지게 되었지만 이와 같은 이면에는 19세기말부터 활발하게 이루어진 전례학의 연구 업적들과 특히 무엇보다도 20세기초부터 교회 안에서 큰 반향을 가지고 전개되어온 전례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사실 교황 요한23세가 공의회 개최를 결심하면서 내세운 4가지 목적은, 그리스도교 신자의 신앙생활 쇄신, 현대의 요청에 대한 순응,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의 일치, 모든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수단의 강화<참조: AAS 51(1959), 511> 등이었는데 이는 모두 어떤 형태로든지 전례와 긴밀한 관계를 지닌 사안이었다. 또한 공의회에서 다룰 의제를 전세계 주교들로부터 수집할 때도 수집된 의제의 1/4이 전례에 관한 것들이었다. 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의 첫 두 장은 파스카를 향해야 하는 전례의 본질에 대한 설명과 또한 이러한 파스카적 전례에 능동적인 참여를 촉구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참고 : 전례헌장 1-20항) 3) R.Rutherford, T.Barr, The Death of a Christian. The Order of Christian Funerals. (Revised edition), Collegeville 1990, pp.3-11 4) R.De Vaux, Les institution de l'Ancien Testament, Tom. I, Paris 1958 p.93 ; 이스라엘에서는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지 않았다. 오직 nepes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죽음이란 이 nepes가 sheol 안에 자리잡는 것을 의미했다. 5) 더욱이 아들들은 그들의 죽은 부모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남겼다면 그것까지 해결해야 했다. (1열왕 2,5-9; 집회 30,4-6) ; A.Dubarle, La maladie et la mort d'après l'Ancien Testament, in La maladie et la mort du chrétien dans la liturgie, Roma 1975, p.133 6) 시신 처리(收屍)에 대한 언급은 창세 46,4; 50,1; 1사무 28,14 등을 참조. 이스라엘에서 향유나 관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의 야곱과 요셉의 장례기사(창세 50,2-3)에서 관의 사용은 이집트 문화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R.Vaux 위의 책 p.94 7) G.Rowell, The Liturgy of Christian Burial, London 1977, pp.19-20 8) 위의 책 p.94 ; 신명기 22,22-23에는 사형을 당한 자는 밤이 오기 전에 매장되어야 한다고 정하고 있으며 야곱의 경우는 70일 동안 장사를 지냈는데(창세50), 아마 이는 이집트 왕실의 관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상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죽은 당일 매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G.Rowell, 위의 책 pp.19-30 9) 이러한 무덤은 통상 가족 전용 무덤이었다. 그리고 왕과 고관들은 자기 개인의 무덤을 가지고 있었다(1열왕 2,10: 이사22,16 등). 이에 비해서 가난한 가정은 자기 가정의 무덤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단순하게 땅에 매장하였다. 또한 범죄자나 유랑인들을 위한 공동묘지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예레26,23; 2열왕 23,6). 반면에 화장은 불명예의 상징이었다. (창세38,24; 레위20,14; 아모2,1 참조). 10) 1사무31,10-13; 2사무21,12-14; 1열왕14,11-13 등 참조. 이런 까닭에 시신을 만지는 것은 부정하다는 계율(레위21,3)에도 불구하고 토비야가 길거리에 버려진 시신을 묻어준 것은 커다란 애덕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토비1,17; 2,7). 또한 무덤 밖으로 끌어내어진 시신은 저주와 모욕의 상징이었다(이사14,19; 예레8,1-2). A.Dubarle, 위의 책 pp.135-136 참조. 11) 상이나 재난을 당했거나 참회를 행할 때 히브리인들은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거나(창세37,34; 2사무3,31 등), 맨 발로 다니거나(2사무15,30; 에제24,17), 머리두건 없이 다니거나 얼굴을 천으로 가렸다(2사무19,5; 에제 24,17.23). 그리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기도 하였고 먼지를 머리 위에 뿌리기도 하였다(여호7,6; 1사무4,12; 느헤9,1). 또 먼지 속에서 뒹굴기도 하였으며(미가 1,10),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뿌리기도 했다(에스4,3; 이사58,5; 에제27,30). 그리고 드물게는 머리와 수염을 밀어버리거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욥1,20; 예레16,6; 에제7,18; 아모8,18). 그러나 이런 행위는 레위기(19,27-28)와 신명기(14,1)에서 금지된 것들이었다. 12) 2사무 1,12; 3,35 참조. 통상 단식기간은 7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창세50,10, 유딧16,24, 1사무31,13). 13) 예레17,7 에제24,17 참조. 이는 죽은 이의 집에서 준비한 음식은 부정한 것으로 여겼던 유대의 율법규정(호세9,4)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죽은 이들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바룩서(6,26)의 기록은 죽은 이들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가나안 지방의 풍습으로 보인다(성서는 70인역 집회 30,18, 신명 26,14). R. De Vaux 위의 책 p.98 참조. 14) 창세23,2:50,10; 1열왕13,30; 1사무25,1; 2사무19,1;11,26; 아모5,16;8,10; 예레22,18; 즈가12,10 사도8,2 등 참조. 이러한 통곡은 독특한 리듬을 가진 곡(哭)으로 발전된다(2사무1,17; 2사무1,19-27; 3,33-34; 2역대35,25; 아모5,16; 8,10 등 참조). 예언서에서는 이와 같은 곡과 관련된 노래 텍스트들을 찾아 볼 수 있다(예레 9,9-11; 에제 19,1-14; 아모 5,1-2 등). 15) “심판의 변론”이라는 뜻으로 유다이즘에 있어서 기도의 순서를 제공하기 위해 가오님(Gaonim)이라는 유대 학자가 9세기에 쓴 첫 번째 유다이즘 전례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탈무드(Talmud)와 미슈나(Mishnah)의 흔적이 담겨져 있는 책으로서 그 근원은 초대 교회 시기까지 소급할 수 있는 책이다. 이에 대해서는 G.Rowell, 위의 책 pp.3-4 참조. 16) 이 책의 이름인 semahoth는 역설적으로 “기쁨”이라는 뜻이다. 이 책은 기원 1세기 이후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던 예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G.Rowell, 위의 책 p.4 17) 장례의 기간은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첫째, 3일간의 통곡기간, 둘째, 7일간의 금욕기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략30일 정도 되는 기간으로서, 고통과 슬픔을 완화시키는 기간의 3단계가 있었다. 둘째 기간까지의 경과는 구약성서의 진술과 일치된다(창세50,10; 신명34,8; 집회38,17; 22,12). 18) 예를 들자면 시신을 수습하는 일, 장례 행렬, 장례식 이후의 위로의 음식(labra'ah)등이 그것이다. G.Rowell, 위의 책 pp.4-8 참조. 19) 이 기도는 오래된 종말론적 기도문으로서 시나고가의 모임에서도 사용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J.Jeremias, Théologie du Nouveau Testament Tom. I, Paris 1973 pp.247-249 참조. 20) G.Rowell, 위의 책 p.8 ; 특히 Tzidduk Ha-din의 시작부분에서 우리는 신명32,4; 시편17,15; 78,38; 욥기1,21; 예레32,19 등의 성서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21) 이교 관습에 따라서 가족들은 임종자에게 마지막 입맞춤을 하였고 이는 임종자의 영혼이 죽은 후에도 그들의 집에 머물 수 있게 하는 이교적 의식으로부터 기인했다고 한다. 참조: J.M.C.Toynbee, Death and Burial in the Roman World, New York 1971 pp.41-64 22) J.Milne, A new Fragment of the Apology of Aristides, in The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25(1924), p.77; M.Righetti, Manuale di storia liturgica vol.II, Milano 1946 pp.330-336 23) 이 동전의 이름은 Sharon's fee라고 불렸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죽은 이는 이 삯을 사공에게 지불해야만 Styx라고 불리는 저승의 강을 건널 수 있다고 한다. 이 강은 이 세상과 저승(hades)을 가로지르는 강이라고 한다.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인들의 관습에서처럼 죽은 이의 입에 즉시 축성된 빵을 넣어주었는데 이도 역시 이러한 로마관습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이러한 관습은 후에 교회로부터 단죄되었다(힙뽀 교회회의 393년, 카르타고 교회회의 419년).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고 결국 노자성체의 전승으로 변화되어 남게 되는 것이다. 참조: G.Grabka, Christian Viaticum: a study of its cultural background, in Traditio 9(1953) pp.1-43; G.Rowell, 위의 책 p.9 24) 고대 로마의 민간신앙에 의하면 죽은 이에게는 죽은 후의 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식사가 필요하다고 여겼다. 이런 이유로 매장 후에는 이와 같은 식사의 잔치가 거행되었는데 때로는 이 잔치가 난잡하게 거행되거나 술 주정으로 망쳐지기도 했다. 그리스도교화 이후에는 많은 교부들이 이와 같은 잔치를 금하였고 그 대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을 행하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쉽게 이런 관습은 없어지지 않았고 결국 이를 척결하기 위해서 죽은 후에 장례미사를 봉헌하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참조: 떼르뚤리아노 호교론 13,7(in CCL vol.I, p.111); Constitutiones Apostolorum 8,42-44(in SCh 336 pp.259-263). 25) 이러한 기일을 지키는 관습은 처음에는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으나 곧바로 전 그리스도교회에 전파되어 결국 매장한 후 3일째, 9일째(혹은 7일째), 40일째(혹은 30일째)되는 날을 기일로 삼아 Silicernium을 거행하였다. G.Rowell, 위의 책 p.10-13 26) 4세기경에는 Refrigerium이란 말이 두 가지 뜻을 지니게 되는데 첫째는 안식의 장소를, 둘째는 장례 음복을 의미하게 된다. Refrigerium과 기일성찬례에 대해서는 C.Vogel, L'environnement cultuel du défunt durant la période paléochrétienne, in La maladie et la mort du Chrétien dans la liturgie, Roma 1975, pp.392-413 27) 이러한 내용은 성 베드로의 서간에도 나와 있는데 그리스도교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악마의 모습을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있다(1베드로 5,8이하 참조). 28) 창세24,7; 출애23,20; 민수20,16; 토비5,4; 루까16,22 참조 29) 몇 가지 고대 전례 문헌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는데 Consitutiones Apostolorum 8,41 (in SCh 336 pp.257-259)과 젤라시아노 성사집 (GeV). 1621항에서 이런 묘사를 찾을 수 있으며 이는 현행 예식서에도 남아있다. 현행예식서(OE).47항과 50항 참조. 30) 초대교회 3세기 동안의 장례 관습에 관해서는 M.Muccioli, Le esequie cristiane nella chiesa dei primi tre secoli, Bologna 1961 pp.39-123 참조. 31) 이는 중세까지의 전례예식을 집대성 해 놓은 책으로서 M.Andieu에 의해서 최종 편집되었다. M.Andieu(ed.), Les Ordines Romani du haut moyen age vol.I-V, Louvain 1931-1961. 이중 제5권의 49번째 Ordo가 장례예식을 다루고 있다. 32) Tertullianus, De Resurrectione Mortuorum, 27,6 in CCL Vol.II p.957: De idololatria, 11, in CCL vol.II p.1110. 여기서 떼르뚤리아노는 장례를 위해 향을 구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로마인들의 관습에 분향은 그들의 향을 경배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그의 Apologia 42,7 in CCL vol.I p.157참조). 그러나 교회는 로마의 분향관습을 교회로 받아들여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하여 사용했다. 그러나 이미 유다이즘의 예식에도 향의 사용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R.Rutherford, T.Barr, 위의 책, pp.10-11 33) C.Vona, L'apologia di Aristide, Introduzione, versione dal siriaco e commento, Roma 1950, p.117 참조 34) "Sonabant psalmi, et aurata tecta templorum reboans in sublime alleluia quatiebat"; Girolamus, Epistula 77,11 in CSEL 55, p.48: Epistula 27,2-3 in CSEL 54, pp.225-226 참조. 35)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장례예절에 사용되었던 시편에 관해서 언급하는데 특히 시편 22; 31; 114등과 같이 파스카적인 시편들이 사용되었음을 증언한다. 이에 대해서는 Johannes Chrisostomus, Homiliae in Epistolam ad Hebraeos 4,5 PG 63 cc.42-44; Homiliae in Johannem 62, PG 59 cc.341-350 참조. 36) Ciprianus, De Mortalitate, 20 in CSEL 3, p.309: 이러한 언급은 대 바실리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Basilius Magnus, De Gratiarum actione 6 in PG 31, cc.229-233. 37) J.Wordsworth, Bishop Serapion's Prayer Book, 1910 pp.79-80 38) “Imus, redimus sine lacrime";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9,11-13 (고백록 원본은 CSEL 33. pp.220-224 참조). 또한 아우구스티노는 영성적인 의미에서 망자의 시신의 처치(收屍)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한다. Augustinus, De cura pro mortuis gerenda, 6,22 in CSEL 41, pp.629-630. 39) Aurelii Prudentii Clementis Carmina, Liber Cathemerinon, 7 (Hymnus Ieiunantium); 8 (Hymnus post ieiunim) in CCL 126 pp.35-46 40) 4세기경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사도들의 가르침 Didaschalia Apostolorum을 비롯하여 여러 원전을 바탕으로 쓰여진 문헌으로 당대의 전례집전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진술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B.Altaner, Patrologia, Casale Monferrato 1977, pp.257-258 참조. 41) Constitutiones Apostolorum 6,30 in SCh 329 pp.388-393: 8,41 in SCh 336 pp.257-259. 42) 이는 저자와 저술연대 미상의 작품이다. 단지 시리아 지방에서 5세기 말 이후에 저술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될 뿐이다. B.Altaner, Patrologia, 위의 책 pp.538-543; S.Lilla, Dionigi Areopagita(Pseudo), in DPAC vol.I cc.971-980 참고 43) De Ecclesiastica Hierarchia, 7, in PG 3, 551D-584D; T.Campbell, Dionysius the pseudo Areopagite : The ecclesiastical Hierarchy, Maryland 1981, pp.79-91 44) G.Rowell, 위의 책, p.30; p.118(각주 46-48 참조); R.Rutherford, T.Barr, 위의 책 pp.22-23 참조. 45) 이 성사집의 불완전한 형태로 인해 성사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현재 판본으로는 L.C.Mohlberg, L.Eizenhöfer & P.Siffrin(ed.), Sacramentarium Veronense (Cod. Bibl .Capit. Veron. LXXXV[80]), RED Series Maior Fontes I, Roma 19783, pp.144-146이 있으며 이에 대한 설명으로는; C.Vogel, Medieval! Liturgy. An introduction of the Sources, Washington 1986, pp.38-46; A.Chavasse, La liturgie de la ville de Rome du 5e au 8e siécle, Roma 1993, pp.94-95 참조. 46) 참회와 속죄를 위한 기도로는; “a peccatis omnibus expiatam in tuae redemptionis" (1138); "ad perfectum remedium consequendum paenitentiam"(1144); "remissionem tribue peccatorum... ut devotio paenitentiae"(1145)등이 있다. 47) 여행은 그 자체가 파스카적인 요소이며 빛 또한 파스카의 중심테마인데 부활 성야 빛의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그 실례라고 하겠다. 이에 대한 베로나 성사집의 기도문 구절은; “transitus mereatur ad vitam(1140)," "misericordiam sempiternam inmensam, ut eam mortalibus nexibus expeditam lux aeterna possideat(1149)," "in beatitudinis sempiternae luce constitue(1156)". 48) 전례력의 순서에 의거해서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최고(最古)의 성사집이다. 젤라시오 교황이 편집했다는 속설에 따라 젤라시오 성사집으로 불린다; L.C.Mohlberg, L.Einzenhöfer & P.Siffirin(ed.), Liber Sacramentorum Romane aeclesiae Ordinis Anni Circuli (Cod. Vat. Reg. lat. 316/ Paris Bibl. Nat. 7193, 41/56). Sacramentarium Gelasianum. RED Series Maior Fontes IV, Roma, 1981 pp.234-246 49) 이에 대해서는 A.Nocent, La maladie et la mort dans le Sacramentaire Gélasien, in La Maladie et la mort du chrétien dans la liturgie, Roma 1975 pp.249-260 50) 구약의 이집트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언급으로는 “revertentem de Aegipti partibus profiscentem ad te"(1610); "post Israhelis exitu ex Aegipto"(1625) 등이 있으며 신약의 파스카인 부활을 직접 지칭하는 부분으로는 ”Ut eum in aeterna requie suscipiat et beatae resurectione"(1613)가 있다. 51) 속죄에 대한 언급으로는 “remittat omnes lubriche temeritatis offensas"(1607)가 있으며, 형벌에 대한 언급으로는 “locum paenalem et gehenne ignem flammamquae tartari"(1609)가 있다. 52) M.Andrieu(ed.), Les Ordines Romani du Haut Moyen Age, Tom.IV Louvain 1985, pp.529-530 53) 로마예식 49권에 대해서는 P.Rouillard, I riti dei funerali, in I Saramentali e le Benedizioni (Anamnesis vol.7), Genova 1989 pp.204-205; G,Rowell, 위의 책, pp.57-59; D.Sicard, Le rituel des funerailles dans la tradition, in LMD 101(1970), pp.33-38; C.Vogel, Medieval! Liturgy, 위의 책 p.187; L.Brandolini, Il nuovo Ordo Exsequiarum, in EpL 84(1970) pp.129-148 54) 중세 초기의 오래된 예식서 중에서 8세기경의 예식서인 Codex Phillips 1667과 Sacramentarium Rheinaugiense도 역시 전체적인 장례예식의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데 많은 부분이 Ordo 49권과 유사하다. 이에 대한 비교는 D.Sicard, La liturgie de la mort dans l'eglise latine des origines à la réforme carolingienne, Münster 1978 pp.1-33 55) 시편 113; 92; 41; 4; 14; 50; 24; 117 56) 이 예식서에는 이 외에도 파스카를 연상시키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예를 들어 낙원으로(In Paradiso), 하느님의 왕국(In regnum Dei), 새날에 나를 일으켜 세우소서(Resuscita me in novissimo die). M.Andrieu, 위의 책 (Ordo 49) p.529-530 참조 57)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묘비명에 적혀있는 문구들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는데; pax tibi, pax tecum, vivas in Deo, vivas inter sanctis라는 표현들이 쉽게 눈에 띈다. 이에 대해서는 C.Pietri, La mort en occident dans l'épigraphie latine, in LMD 144 (1980) pp.35-39 58) Augustinus, De Civitate Dei, 21, 24 in CCL 48, p.790 59) Gregorius Magnus, Dialigorum Liber 4, 38-60 PL 77, 389C-429A 60) 8세기 젤라시오 성사집들에는 이러한 심판과 속죄의 내용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A.Hänggi & A.Schönherr (ed.), Sacramentarium Rheinaugiense, Zürich Zentralbibliothek cod. Rh.30, f151-155, Fribourg 19782, pp.272-276; A.Dumas(ed.), Liber Sacramentorum Gellonensis, Turnholti 1981, pp.460-468; J.Deshusses(ed,), Le Sacramentaire Grégorien Tom.I, Fribourg 1979, pp.457-463 참조 61) 이외에도 ab omni vinculo delictorum(Gre 1404); remissionem quam semper optavit, mereatur percipere peccatorum(Gre 1405) 등이 있다. 62) 또한 이와 연결된 다른 표현들도 등장하는데; Umbras mortis, Chaos et caligo tenebrum, dolor horrendae visionis; poenalis timor (Gre 1410); inferorum cruciatibus (Gre 1407); infernalibus claustris (Gre 1408). 63) P.Rouillard, 위의 책 p.207 64) H.Frank. Der älteste erhaltene Ordo defunctorum der römischen Liturgie und sein Fortleben in Totenagenden des frühen Mitteralters, in AFL 7(1962), pp.374-375 65) G.Rowell, 위의 책, pp.65-67; G.Durandus, Rationale divinorum officiorum VII, 35. Lugduni 1672, pp.452-458 참고. 66) 이 쾰른 사본 123번(Cologne MS.123)에 대해서는 G.Haenni, Un Ordo Defuntorum du Xe siécle, in EpL 73 (1959) pp.431-434; D.Socard. La Liturgie de la mort, 위의 책, pp.11-17; H.Frank, 위의 책, pp.362-363 67) 이 로마-게르만 주교예식서 149장(Pontificale Romano Germanico 149)에 대해서는; C.Vogel & R.Elze(ed.), Le Pontifical Romano Germanique du dixiéme siécle, Città del Vaticano 1963, vol.II, pp.281-305; vol.III pp.1-57(introduction); 또한 C.Vogel, Medielval Liturgy 위의 책, pp.230-239 참조. 68) V.K.Owusu, The Roman Funeral Liturgy: History, Celebration and Theology, Nettetal 1993 pp.8-23 69) 호칭기도는 또한 베를린 Phillips 1667 사본에서도 발견된다. H.Frank., 위의 책 pp. 363-364; D.Sicard, La liturgie de la mort, 위의 책 p.8 참조. 70) 장례미사곡의 이름처럼 되어있는 이 Requiem aeternam (영원한 안식을)은 에즈라4서 2,34-35 (Requiem aeternam davit vobis)에서 유래한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D,Sicard, La liturgie et la mort, 위의 책, p.76; 이와 비슷한 후렴구로서 베로나 성사집 1149(Lux aeterna), 1155(sempiterna luce constitue)가 있다. 71) D.Sicard에 의하면 Ordo49 예절은 젤라시오 성사집의 1627번을 이 때 기도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오래된 고대 로마 예식서들은 한 가지 기도를 두 번 기도하였는데 망자가 임종 직후에 기도하였고 무덤에 매장할 때 또 한 번 기도하였다. D.Sicard, 위의 책, pp.79-102 참조. 72) 베를린 필립 사본 1667에 수록된 예식에는 수의를 입히는 예식이 들어 있기도 하다.; D.Sicard 위의 책 pp.108-111 73) CMS123은 이 행렬에 대한 언급이 없다. H,Frank는 RH에서 Rubrica를 빌려다가 수록하여 편집해 놓았다. H.Frank, 위의 책 p.374 74) PRG에서 이 위령기도는 욥기를 읽고 화답송과 후렴을 노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시편은 5, 6, 7편이 첫 번째 밤기도로, 22, 24, 26편이 두 번째 밤기도로, 그리고 37, 40, 41이 세 번째 밤기도로 사용되었고 아침기도로는 시편 50, 64, 21, 148이 저녁기도로는 시편 114, 119, 120, 129, 137이 사용되었다. 이 시편들은 1614년 예식서와 3개의 시편(시편 37, 50, 21)만 제외하고 모두 같다. 75) Ordo49의 예절지시문(Rubrica)은 “Vel respondaria, missam vel lectiones de Iob(7항)”이라고 지시하는데 여기서 missam은 mixsta의 오기라고 보기도 하고 또는 기도와 독서로 이뤄진 예절이라고 보기도 한다. P.Rouillad, 위의 책 p.204 특히 mixsta의 오기로 보는 이유는 CMS123에는 responsoria permixtos(6항)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D.Sicard, 위의 책 p.175 76) 기일이라 함은 사망한지 3, 7, 30일째의 날과 기일(Anniversarium)을 의미한다. C.Vogel L'evironnement culturel, 위의 책, pp.392-400 참조 77) 이 후렴은 CMS123에서는 시편 42와 함께 사용되었다. 78) 이것은 Ordo49와 CMS123에서는 시신을 수시할 때 사용하던 후렴이었다. 79) 범한 모든 죄의 용서에 대한 부분으로는: remittat omnes rubricae temeritatis offensas (59항), nec peccati recipiat vicem (72항), a nostrae mortalitatis tenebris absoluta(79항), qui per fragilitatem carnis peccata(80항) 등이 있다. 80) 이에 대한 내용으로는 ut locum poenalem et gehennae ignem flammasque tartari(63항), quod calet in flammis, quod stridet in poenis(83항) 등이 있다. 81) 부정형이 사용된 곳으로는 Non intres in iudicium(50항), non eam tormentum mortis attingat, non dolor horrendae visione afficiat, non penalis timor excruciet, non reorum proxima catena constringat(62, 67항) 등이 있다. 82) 증가된 요소로는 kyrie, 그리고 여러편의 기도들, 예를 들어 Non intres in jiudicium(50항)이라든지 absolbe quaesumus Domine(83항)이 있으며, 또한 후렴으로는 libera me(41, 48항)등이 있다. 83) Rituale Romanum Pauli V Pontificis Maximi Jussu Editum, Romae 1614. 이 예식서에 대해서는; P.M.Gy, Les funéreilles d'après le rituel de 1614 in LMD 44(1955), pp.70-82; L.Brandolini, 위의 책, pp.11-12; P.Rouillard, 위의 책, pp.208-209; R.Kaczynski, Liturgia della morte e della sepoltura, in La Liturgia della Chiesa vol.9, Torino 1994, pp.312-317; V.K,Owusu, 위의 책, pp.33-36; G.Rowell, 위의 책, pp.70-73. 물론 1614년 이전에도 예식서는 존재하였었다. 예를 들면 ; Alberto Castellani의 Liber sacerdotalis(1531), Santori 추기경의 Rituale 등이 그것이며 특히 Santori의 예식서는 1614년 로마예식서의 모델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P.M.Gy, 위의 책, p.71참조 84) PRG에서는 이 때 임종자를 위하여 성인호칭기도, 수난 복음 낭독, 사제의 기도 등의 예절을 행하였다. 85) 중세 초 중기의 예식서들은 시편과 후렴을 부르는 가운데 집에서 망인을 수시하고(Ordo49, CMS123, RH, PRG 등), 옷을 입히고(PH), 입관하는(Ordo49, PH, CMS123, RH, PRG) 예식을 포함하고 있다. 이는 긴 파스카의 여행을 떠나기 전의 준비과정처럼 보이는데 1614년 예식서에서는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이 초대교회의 집에서의 예절에 대해서는; P.Ariès, La liturgie ancienne des funérailles, in LMD 144(1980) pp.49-57 참조. 86) 트렌토 공의회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자와 기타 이교인, 배교자, 유대인 등에 대해서 교회장례를 해주지 말 것을 권고하는 일러두기 형태의 글임; Rituale romanum, 앞의 책 pp.149-150 참조. 87) 망자가 평신도이면 발이 제대를 향하고 성직자이면 머리가 제대를 향하게 관을 놓아야하며 관 주변에는 초를 켜놓으라는 Rubrica가 이 예식서에서도 보존되었다. Rituale romanum, 위의 책, p.152 88) 서두의 일러두기에 의하면 위령 성무일도는 의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Rituale romanum, 위의 책 p.162 89) Missale Romanum ex Decreto Sacrosancti Concili Tridentini Restitutum S.Pii V Pontificis Maximi Jussu Editum Aliorum Pontificum Cura Recognitum A Pio X Reformatum et Benedicti XV Auctoritate Vulgatam, Edito XII Juxta Typicam Vaticanam, Romae, 1956 pp.269 [85]-[101] 90) 이 Dies Irae의 저자는 프란치스코 수도자였던 Celano의 Tommaso(1190-1260)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부속가는 원래 대림시기의 첫 주일에 불려졌던 부속가였다. 그러나 14세기에 와서 이 부속가가 프란치스코회 미사경본에서 발견되므로 작자 미상이라고 하는 편이 낳을 것이다. G.Rowell, 위의 책 p.67 91) Dies irae나 Libera me처럼 속죄의 의미를 지닌 중세 시대의 후렴으로는; Ave Iesu, tunc pavendus, Peccatori metuendus, Arbiter adveniens. In horrenda ignis nube, In clangore vocis tubae, Orbis totum quatiens. Ave, Iesu, tunc inferni, Flamma, ignes sempiterni concremabunt perditos.가 있다. P.S.Everts, Hymni Medaeval!es, Zwolle 1950, pp.77-79 92) 이 예식에 대해서는 M.Righetti, 위의 책, pp.336-337 93) 이 기도는 그레고리오 성사지 1401과 PRG 50항에서 발견된다. 94) 현행 장례예식서(OE) 56항에 수록되어 있는 이 기도는 시편 118, 24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스페인 전례의 기도로 보인다.; P.M.Gy, Les funéreilles d'aprè, 위의 책 p.75 95) PRG는 위령 성무일도를 제외하고도 12개의 시편을 예식에 수록하고 있으며, 파스카적인 요소들이 남아있는 기도문들을 보존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73항, 83항 등). 96) 이 에 대해서는; J.Le Goff. Le Purgatoire entre l'enfer et le paradis, in LMD 144(1980), pp.102-137; H.Vorgrimler, Mysterum Salutis vol.10 (이태리어 판), Brescia 1978 pp.546-552 참조 97) J.Le Goff, 위의 책, p.106 98) Rituale romanum, 위의 책, p.148 99) 예를 들어 노자성체의 오용은 단죄되었지만 이른바 Refrigerium이라고 불리던 음복잔치는 교회에 받아들여져서 기일 성찬례 집전으로 교회 안에 전래되었다. 100)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 81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