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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하나님 백성의 선교", 크리스토퍼 라이트.

작성자leedongki|작성시간22.11.24|조회수389 목록 댓글 0

서평, "하나님 백성의 선교", 크리스토퍼 라이트.

 강호경 목사 ・ 2021. 10. 2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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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백성의 선교"

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IVP(2012)


I. 서 론

선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해외로 나가서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선교에 대한 이런 편협한 이해는 오늘날 꽤 많이 개선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주변에서 ‘직장인 선교’, ‘장애인 선교’ 등 전통적인 선교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선교를 자주 들을 수 있다. 선교를 단지 ‘지리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해오던 옛 인식은 오늘날 어느 정도 새로워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잘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것은 ‘선교’를 나의 일상적인 삶과는 구분되는 어떤 특수한 종류의 사역으로 여기는 인식이다. 선교에 대한 이해가 꽤 많이 넓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교’는 어떤 전문 사역자들이나 선교 단체들의 몫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다가 가끔씩 삶의 일정 부분을 떼어 그러한 사역자들과 함께 어떠한 ‘일’을 하면 그것을 ‘선교’라고 여긴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인식 속에서 선교는 선교고, 삶은 삶이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이 곧 선교일 수 있고 또 선교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좀처럼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잘 뿌리박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선교’가 무엇인지를 탄탄한 성경 신학의 기초 위에서 다시 정의해준다. 그에게 있어 ‘선교’는 어떤 특별한 사역자나 단체에게만 맡겨진 사명도 아니고, 가끔씩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 어떤 특별한 종류의 사역도 아니다. ‘선교’는 구속 받은 하나님 백성의 삶 가운데 항상 나타나야 하는 본질적인 삶의 특징이며 정체성이다. 

그러므로 본 서평에서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에 나타난 라이트의 ‘선교관’을 비평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비평자는 먼저 라이트의 주요 주장들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선교관이 오늘날 우리의 선교 이해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부분이 무엇인지와, 그의 의견 중 필자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해 차례대로 제시해보고자 한다. 

II. 본 론

요 약(Summary)

저자는 성경의 선교가 예수님의 ‘대위임령’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은 타락하고 죄악된 창조 세계를 새 창조의 구속받은 세계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이야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창세기 3장에서 벌어진 타락과 저주의 상태를 요한계시록 22장의 새 창조의 상태로 구속해 가시는 하나님의 모든 주권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1-2장)

성경이 창조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저자는 먼저 “창조 세계를 돌보는 선교”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창조주 하나님의 찬양과 영광을 위해 지음 받은 이 창조 세계는 인간 삶의 일회용 배경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구속 대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처음부터 광대한 범위를 갖는다. 그 대상은 단순히 인류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에 해당한다.(3장)

하나님의 모든 창조 세계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는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저주를 받은 열방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을 향해 원대한 구속적·회복적 언약을 맺어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와 그의 후손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의’와 ‘공도’에 순종하는 ‘윤리적 공동체’가 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선교의 주된 실행자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며, 그들이 살아내는 윤리적 삶이 그들의 부르심과 선교를 연결시키는 중대한 연결 고리가 됨을 보여준다. “성경적 윤리 없는 성경적 선교는 있을 수 없다.”(4-5장)

한편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관’을 좀 더 포괄적으로 정의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그들을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출하시며 그것을 위해 모든 대가를 지불하신다. 그리고 그 구속의 범위는 단지 개인적 죄사함의 영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부분을 모두 포괄한다. 이러한 총체적 구속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다. 곧 십자가는 출애굽의 성취를 보여주며, 인류와 창조 세계를 노예로 만들고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의 선교도 총체적이고 포괄적이어야 한다.(6장)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모든 열방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심을 받는다. 하나님 백성의 ‘제사장직’은 열방에 하나님을 제시하고, 또 열방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복음 전도의 과제로 이해할 수 있다. 또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삶’은 죄와 우상으로 오염된 열방 중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을 이 땅 가운데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러한 삶을 잘 감당할 때 그들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빛을 발하는 ‘매력적인 공동체’가 된다. 그리고 그 빛은 온 열방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나아오게 만드는 선교적 빛이 된다.(7-8장)

전반부(1-8장)의 강조점이 선교의 총체적인 특징과 윤리성에 있었다면, 후반부(9-14장)는 ‘증거’의 측면을 강조한다. 성경적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창조 세계와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행동하신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에 근거하며, 그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와 같은 구원을 제공할 수 있는 다른 하나님이나 다른 원천은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며, 이 모든 지식을 아는 사람들에게 완전한 충성을 요구한다. 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이 복음의 ‘증인’으로 세우시고는 하나님의 유일성과 주권, 구원 사역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와 선, 그리고 회복과 구원을 가져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좋은 소식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의 아들과 성령을 이 땅 가운데 보내셨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자기 백성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선교는 계속해서 보내고 보냄을 받는 일들을 통해 이루어진다.(9-12장)

한편 저자는 일반 신자들이 ‘공적 광장’에서 살아가는 삶의 ‘선교적 의미’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는 우리가 문화 명령 안에서 창조 세계를 사용해 만든 모든 것이 포함된다. 즉 공적 광장에서 일어나는 ‘일’의 영역도 하나님의 구속 대상이라는 것이다. 공적 광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가 새 창조에서 구속되고 성취된다면, 인간의 모든 생산적인 일은 이러한 종말론적 희망 때문에 그 자체의 가치와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공적 광장 가운데 적극적으로 참여하되, 죄와 우상으로 오염된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히 저항해야 한다.(13장)

마지막으로 저자는 선교의 ‘목표’이자 ‘수단’으로서 ‘예배’를 제시한다. 예배는 선교의 궁극적인 목표임과 동시에 선교를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하나님 백성의 찬송은 ‘선교적’이며 열방을 그분께로 인도하는 전도의 수단이 될 수 있다. 또한 ‘기도’는 열방을 축복함과 동시에 열방의 우상숭배를 전복시키는 무기가 될 수 있다.(14장)

긍정적 평가

1. 선교에 대한 총체적이고 폭넓은 이해

라이트에게 있어 ‘선교’는 매우 넓고 포괄적인 단어다. 라이트는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meta-narrative)가 “창조에서 시작해서 창조로 끝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황폐해진 이 창조 세계를 완전히 구속하고 회복하기로 결심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행하시는 모든 주권적인 구속 행위를 “하나님의 선교”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라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교”란 하나님의 “광대하고 포괄적인 우주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창세기 1장부터 계시록 22장까지의 하나님의 모든 구속 역사를 다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원대한 구속 계획을 위하여 그분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또한 자신의 선교에 동참하게 하시는데, 여기서부터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시작된다.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창조 세계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그 범위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구속하시려 하시는 만큼 넓어진다. 그래서 라이트는 선교의 범위를 “창조 세계를 돌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멸하시거나 폐하시지 않고, 오히려 더 완전한 모습으로 구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라이트는 선교의 대상을 “모든 열방”과 “모든 인류”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실 때부터 모든 열방에 대한 구속 계획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또 라이트는 선교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속하실 때 단순히 영적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등 “총체적”으로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 가운데 라이트는 심지어 “공적 광장”에 대한 선교적 이해까지 나아간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과 생산적인 모든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선교’로 이해할 수 있는가?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해낸 모든 ‘문화’까지도 하나님의 구속 범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공적 상호작용과 공적 광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역사는 버려지거나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 창조에서 구속되고 성취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생산적인 일은 창조와 그것이 우리에게 부과했던 명령 때문만이 아니라, 새 창조와 그것이 우리 앞에 놓는 종말론적 희망 때문에 그 자체의 가치와 영원한 중요성을 가진다.

이렇듯 라이트에게 있어서 ‘선교’의 개념은 매우 폭이 넓다. 하나님께서 구속하시려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 백성의 선교 대상이다. 물론 그는 선교에 있어서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절대 간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 백성의 복음 증거를 선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여기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다. (만약 그가 복음 증거를 핵심으로 두지 않는 ‘총체적 선교’를 제시했다면, 그의 주장은 에큐메닉 진영의 선교 이해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동안 너무 제한적이고 좁게 이해되어 왔던 ‘선교’의 개념을 좀 더 폭 넓게 확장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선교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복음 전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 백성의 선교는 하나님께서 구속하시려는 범위만큼 크고 폭넓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도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회 활동은 사회적 관심이 없는 전도만큼 비총체적이다.”

이러한 선교 이해가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 가운데 적용된다면, 이제부터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은 다 ‘선교’에 속하게 된다. 더 이상 선교는 단순히 타문화권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어떤 특수한 종류의 사역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 자기가 속한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소명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 삶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가 된다.

2. 풍성한 성경 신학을 기초로 세워지는 선교 이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독보적인 기여는 바로 풍성한 ‘성경 신학’을 통해 성경적 선교관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물론 성경 신학을 통해 ‘선교’를 제시하는 책이 적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라이트의 말처럼 “기독교 선교를 주제로 하는 수많은 책들은 대부분 ‘대위임령’에서 시작”된다. 이는 ‘선교’가 기본적으로 신약적인 개념이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관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라이트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의 선교와 긴밀하게 연결한다. 그러므로 구약으로부터 시작하는 뿌리 깊은 선교 신학이 이 책의 가장 독보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먼저 그는 하나님 백성의 선교적 특징을 구약의 ‘아브라함’으로부터 찾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복을 열방에 전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도구”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러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우리도 “아브라함의 복을 확산시키는 사명”을 받는다. 또 그는 십자가 구속의 첫 번째 모델을 ‘출애굽’에서 찾는다.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화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구속”하신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영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출애굽이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것이며, 진정한 출애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출애굽을 대체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마치 출애굽의 모든 사회경제적∙정치적 측면들이 줄어들고 오로지 영적인 의미만 남는 것처럼)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를 출애굽의 성취로 본다. 십자가의 완전한 구속적 업적은 인류와 창조세계를 노예로 만들고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최종적 해방을 포함한다.

이외에도 그는 신약에 나타난 선교의 원리들이 사실은 구약에서부터 이미 제시되고 드러나 있었던 것임을 줄곧 강조한다. 이스라엘이 모든 세계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신약의 백성들도 온 열방에 대해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통해 온 열방에 ‘빛’을 발하실 것이라는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우심을 입은 제자들을 통해 성취되었다. 또 신명기가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명령하는 것처럼, 신약 성경도 오직 유일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할 것을 명령한다. 이처럼 신약에서 드러난 선교의 원리는 모두 그 뿌리를 구약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는 매우 통일성 있고 일관되게 하나님 백성의 선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트의 이러한 관점은 그동안 ‘구약’에서는 잘 발견하지 못 했던 선교의 원리를 이해하고 깨닫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사실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원리들은 어쩌면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신약뿐만이 아니라 구약까지 포함한 전체 성경의 풍성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믿고 순종해야 할 선교의 원리를 ‘성경 신학’적으로 제시했다. 그러므로 필자는 바로 이 점이 그의 책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고 평가한다. 

부정적 평가

1. 교회는 수단인가, 목적인가?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저자의 ‘교회 이해’이다. 시종일관 저자는 ‘교회’를 위해 ‘선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그분의 교회를 위해 선교를 품고 계신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그분의 선교를 위해 교회를 품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를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포된 하나님의 선교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백성을 창조하신 이유다.

이러한 교회 이해는 교회를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필자는 저자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는 ‘목적’에 해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처음부터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는 저자의 견해에 반대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통치를 받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다스림 가운데 두셨으며, 하나님을 영원토록 예배하고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창조 세계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공간(영토)’으로 주어졌다. 그러므로 이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돌보고 섬기도록 명령하신 대상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만큼의 존귀한 것은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선한) 세상”의 창조를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한 선물로써 주어졌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주권적 구속 행위는 다시 한 번 회복될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그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주님(主)’으로 세우셨다.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구속 받은 ‘교회’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 세계를 구속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려 하심도 결국에는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가 살아갈 완전한 공간을 주시려는 것에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1장이 말하는 것처럼 교회는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구속 경륜을 진행해 오신 ‘목적’에 해당하는 존재다. 존 파이퍼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구속과 선교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고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새로운 백성, 곧 교회를 세우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교회”를 위해 “선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정말로 교회가 “선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시 그분의 백성인 ‘교회’를 세우고자 하심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선교를 행하시는 목적은 결국 새 창조를 통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백성인 ‘교회’에 있는데, ‘선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모순이다. 물론 ‘선교’가 교회의 존재에 있어서 본질적인 부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교회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사실 그는 14장에서 존 파이퍼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파이퍼의 말은 저자가 지금껏 주장해온 것과 서로 배치된다.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선교가 아니다. 예배가 궁극적 목표다.” 그리고 필자는 파이퍼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선교가 아니다. 교회의 궁극적 목표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화롭게 하는 그분의 백성, 곧 교회 자체이다.

2.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 동일한 우선순위를 갖는가?

마지막으로 필자는 저자의 ‘총체적 선교’ 개념 이해에 우려를 표한다. 저자가 언급하듯이 저자는 1974년 제1차 로잔 언약에서 논의된 “전도의 수위성”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1982년에 개최된 CRESR 협의회의 결정을 자신의 입장으로 취한다. “어느 하나가 ‘수위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는 선교에 있어서 ‘전도’의 역할을 ‘수위성’보다는 ‘중심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통합적 선교”를 주장한다.

물론 필자는 저자의 ‘총체적 선교’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저자는 ‘선교’라는 단어를 폭넓게 정의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구속하시려 하시는 범위만큼 우리가 참여하는 모든 것이 다 ‘선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행위가 다 ‘선교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저자가 비록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선교에 있어서 ‘전통적인 전도의 개념’이 약화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거나 가르치지 않아도 자신이 넓은 범위로 보면 ‘선교’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직접적인 전도에 비적극적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속의 범위를 넓게 잡아서 모든 것을 다 선교적으로 이해하게 한 저자의 기여는 인정하지만, 일반은총 영역의 구속이 ‘사람’의 구속과 동일한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창조에서부터 드러났지만 성경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사람’이다. ‘사람’이 구속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저자는 마치 창조 세계의 구속과 문화를 비롯한 일반 은총 영역의 구속을 ‘사람’의 구속만큼이나 높은 위치에 올려놓는다. ‘전도’는 사람을 구속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고(고전 1:21), 다른 방법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총체적인 개념으로 선교에 대해 접근할지라도, 복음 전도의 ‘우선권(필자는 수위성이라는 말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을 명확히 하지 않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서 김성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총체적인 선교개념의 등장이다. 전도적인 명령의 우선권은 타락한 피조 세계에 먼저 선행되어야 할 하나님과이 관계 회복이다. 문하적인 명령이 타락 이전의 하나님의 창조의 언약과 축복으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구속적인 은총이 선행되어야 한다. 존 스토트의 접근 방식처럼 전도적인 명령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우선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측면에서 먼저 우선권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고 어떠한 삶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주재권을 증거할 수 없고 문화적 명령을 바로 수행할 수 없다.

여기에서 김성태 박사는 자신이 74년 로잔 언약의 신학적 입장을 옹호한다. 필자도 그렇다. 전도 명령의 우선권을 다른 여러 가지 이름으로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전도 명령의 우선권을 명확히 인식하고 확립한 채(이는 단순히 반드시 복음 전도부터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인식’과 ‘믿음’에 관련된 문제다.), 거기서부터 총체적인 선교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III. 결 론

지금까지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 백성의 선교』를 비평해보았다. 필자는 저자가 교회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과, 총체적 선교의 개념에서 ‘전도의 우선권’을 명확히 하지 않는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성경 신학을 바탕으로 성경 전체에서 통일되고 일관된 선교 원리를 이끌어낸 것과, 선교의 개념을 폭넓게 확장하여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가 선교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해낸 큰 기여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 책은 그 난이도와 수준을 고려해보았을 때 성경을 설교해야 하는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설교자들이 이 책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성경 전체에서 그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폭 넓은 구속의 개념과 그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경 66권을 ‘선교적’이고 ‘구속사적’으로 설교하는 것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와 온 세계의 교회 가운데 그러한 기여가 이 책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폭넓은 선교 이해를 바탕으로 한 역동적이고 선교적인 삶이 모든 성도들의 삶 가운데 나타나길 소망한다.

[출처] 서평, "하나님 백성의 선교", 크리스토퍼 라이트.|작성자 강호경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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