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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누가복음 6:6~11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26.06.08|조회수44 목록 댓글 0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

누가복음 6:6~11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이 말라 오그라져 펴지 못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고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지난 주일에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길에서 이삭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었던 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은 일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로써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병을 공개적으로 고침으로써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는 확실한 증거가 드러남으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작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의 내용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군데의 본문 말씀을 함께 참고하여서 주님의 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성령께서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바를 잘 배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대적자들이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일을 계속 하셨습니다.

6절로부터 7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님께서 평일에도 계속 전도와 가르침과 병 고치는 사역을 하셨지만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들어가셔서 안식일을 지키는 동족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가르치는 설교 시간에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고 고발할 꺼리를 찾는 자들이 자리에 앉아서 그를 노리고 있는 것을 예수님이 분명 알고 계셨지만 예수님께서 거리끼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계속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방해가 있고 비방하는 자, 시비 거는 자, 그를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있는 중에도 위축되어 한탄하며 도망치지 않고 꾸준히 자기의 사명의 길을 계속 걸어가셨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사역 중반기가 지난 후에 예수님께 호의를 가진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조언하기를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누가복음 13:32,33)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잡혀 죽는 일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입니다. 그러기까지 예수님은 오늘과 내일의 지상의 사역을 감당하는 나날을 계속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을 체포하여 목을 쳐서 죽인 저 여우 같은 헤롯 안디바 왕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를 쓴다 해도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남은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이라고 당당히 밝히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과 그의 뒤를 따라간 사도들의 삶의 자세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나 다른 사도들은 수많은 박해와 장애, 동족 유대인들의 질투와 살해 음모 등이 계속 있었지만 그러한 고난과 꿋꿋히 맞서면서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사도행전 20:22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에 마지막 방문을 앞둔 사도 바울이 만류하는 동료 성도들 앞에서 이렇게 말씀한 바 있는데 그의 사생관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사도행전 20:22~24)

사도 바울이 이처럼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을 위하여 자기 앞길에 닥쳐오는 여러 시련과 역경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험한 길을 올라가고 있는 사도의 이 고백과 이 모습은 마치 예수님과 동일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주님과 사도들을 본받아 이 땅에 사는 동안 의연하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고수하며 맡겨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충성하며 직임을 감당합시다. 어떠한 비방과 방해가 있고 그로 인하여 손해가 생길지라도 아랑곳하지 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알아주는 이가 없더라도, 내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꾸준히 걸어갑시다. 그리할진대 때가 되면 승리자이신 우리 주님과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의 얼굴을 직접 뵈면서 기뻐하며 만족하게 될 날이 오게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7절과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서거늘

당시 예수님께서 회당의 강대상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회당에서 말씀 듣는 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행동을 엿보고 고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동안 예수님의 여러 행동들을 조사해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버움의 한 집에서 중풍병자에게 병 고치기 전에 죄를 사해주시는 말씀을 하신 것을 듣고 신성모독의 말로 생각하고 고발꺼리로 메모해두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다 지옥에 떨어질 죄인 중에 죄인들인 세리와 창기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려 식사하는 것을 보고서 예수님께 항의한 바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신 일 때문에 시비가 붙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발언함으로 하나님을 자기와 동등하게 여기자 이것을 신성모독적인 말로 알고서 점점 예수님을 심각한 위험분자로 여기고 치밀하게 조사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 안식일에도 예수께서 갈릴리 가나나움의 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시면서 병자가 있으면 또 고치는가 여부를 살펴보려고 그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마침 그 회당의 모인 사람들 중에는 손이 말라 고부라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자 혹시라도 치료해주실까 하는 소망이 생겨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을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도 그 바리새인들은 마음이 딴 데 있는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환자를 고치는 일을 하실까 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만 분주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저 사람을 고친다면 그것은 분명히 안식일을 위반한 일이요 자기들은 한 건 큰 것 잡은 셈이 될 것이라는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8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그 회중 각 사람들의 마음을 다 보시며 속에 있는 생각들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무엇인지도 다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 추한 생각, 교만한 생각, 욕심 많은 생각, 선한 생각, 아름다운 생각, 자기의 부족함을 깊이 인정하는 생각, 가난한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착한 생각들을 다 손바닥을 보듯이 예수님을 들여다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겉 모습도 단정하게 가꾸어야 하지만, 우리의 말도 공손하고 예의 있고 차분하게 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더욱 우리 속마음을 잘 지키고 우리 생각을 잘 가꾸어 가야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4:8 말씀에 사도 바울이 당부하여 쓰기를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항상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받을 만하며 덕이 되고 모두가 잘했다고 인정할 만한 생각들을 늘 힘쓰는 저희가 됩시다. 생각이 쌓이면 결국 그 사람의 인품이 되고 그 사람 자체가 되고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아계신 우리 주님 앞에서 우리 생각이 다 드러나 있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생각을 보고 알고 계심을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선하고 의로운 착하고 진실한 생각,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생각들을 잘 가꾸어감으로써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보면서 늘 기뻐하며 사랑스러워 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잘 지키는 것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그 자리에 참석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지금 그 병자를 예수님이 혹시라도 안 고치는가 염려하면서 신경쓰고 있는데, 예수님은 아예 그 사람을 일으켜 세워 한 가운데 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안식일 준수의 문제를 공개적이고 도전적으로 바리새인들 앞에서 확정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근슬쩍 문제의 핵심을 흐리고 두루뭉술 넘어가고 책임 지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반대가 있고 그 일로 인하여 비난과 멸시와 박해가 가중된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진리 문제를 가지고서 타협이나 물러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물으신 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옳을까요?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을까요? 답은 상식적으로 분명히 정해진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할 수 있는데 이것을 안식일에 외면하고 내버려 두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악을 행하는 것이요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는데, 외면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곧 죄를 범한 것이며 옳지 못한 일을 행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대한 율법 규정을 살펴봅시다. 출애굽기 20:8 이하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애굽기 20:8~10)

고 분명히 말씀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생계를 위하여 먹고 살기 위하여 생업에 관련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 학자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나치게 확장하여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들까지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치료하는 행위조차도 일로 규정하였습니다. 엄격한 학파에서는 사람을 치유하는 모든 행위를 다 일로 여기고 안식일에는 절대로 치료행위를 해서도, 받아서도 안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좀 온건한 학파에서는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는 안식일에 치료 행위를 받거나 치료 행위를 할 수 있다고 허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회당 한 가운데 서 있는 오른손이 말라 구부러져 펴지 못하는 그 사람은 생명이 위급한 환자는 결코 아닙니다.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치료해도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안식일에 고쳐주면 안식일에 일한 것이 됩니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한 사람이 되어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법 해석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부정적이었고 그릇된 해석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목적은 진정한 쉼을 사람들에게 주고자 한 것입니다. 주인에게도 종들에게도 가축들에게도 안식일만큼은 일에서 해방되어 쉬면서 휴식을 취하고 활력을 회복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6일 동안 쌓인 피로를 쉬면서 풀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 안식일만큼은 6일 동안의 노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경배하며 지낼 수 있도록 함이 제 4계명 안식일 준수의 뜻이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말씀의 의도는 거룩히 지킨다는 말씀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그 날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나머지 6일은 생계를 위하여 일하지만 단 하루 안식일만은 구별하여 하나님의 날이라고 인정하여 주권을 하나님께 인정하고 그 날은 성별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오락을 금하고 놀러다니거나 파티를 열거나 육신적인 일을 힘쓰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일, 농담을 일삼고, 방탕한 일을 하거나 여행을 일삼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불가피한 일들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프기에 찾아 뵙는다거나 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교우를 방문하여 교제를 나누며 격려하고 기도해주는 일도 필요한 일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히 잘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기뻐하시고 번성하게 하고 높여주시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58:13 이하에 이르기를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이사야 58:13~14)

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신약 성도들의 안식일인 주일을 거룩한 주님의 날이라고 구별하여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드리고 주일을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사사롭게 자기의 욕심과 오락과 육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쓰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를 힘쓰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가족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교우들을 돌아보며 복음을 전하며 자기의 몸과 마음과 다른 이들의 몸과 마음을 주 안에서 평안히 쉬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진대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영혼이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고 그의 삶을 존귀하게 하시고 풍성한 기업을 누리며 살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생계를 위하여 일하지 말고 회당에 나와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가 주시는 약속을 믿고 온 가족과 종들과 가축들까지 쉬면서 쉼을 누리며 영혼과 육신의 생명을 풍성히 얻어 회복하는 것이 안식일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여기서 그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던진 이 질문은 당시 안식일의 의미를 곡해하고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꼼짝하지 말고 아무리 병으로 고생할지라도 당장 죽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치료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틀렸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틀렸습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안식일이라도 생명을 살리고 구하는 일을 해야 그것이 안식일 정신에 부합하는 일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성도가 주일에 교회로 오기 위하여 운전해오는데, 앞에 운전하던 사람이 사고를 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운전석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습니다. 길에도 부딪혀 쓰러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교회에 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급한 상황에 속히 그 다친 사람들에게 응급 처치를 하고 다친 사람을 안전한 곳에 옮기고 119에 연락하여 병원으로 이송하는 일을 돕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렇게 일하다가 교회 예배에 뒤늦게 도착한다 할지라도 주님은 매우 기뻐하며 잘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자비를 베풀고 생명을 살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예배의 핵심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도운 것이 곧 예배 드린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성경 해석에서 틀릴 뿐 아니라 매우 이중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안식일에도 예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허용하는 지침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마태복음 12:11 이하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태복음 12:11~13)

당시 그 지역은 목축업이 널리 퍼진 산업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양을 기르는데 한 마리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 양을 건져올리는 것은 안식일을 범한 것이 아니라고 바리새인들이 이미 던 것입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양들을 구덩이에 그대로 버려두면 그 양은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하기에, 바리새인들도 규칙상 이러한 예외를 허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파고들면서, 양도 그렇게 안식일에 죽지 않게 살려내려고 구덩에서 건져올리는데, 양보다 지극히 더 귀한 사람이 질병의 구덩이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데, 당장 죽는 것 아니라고 해서 다음날까지 그냥 두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한데, 양보다 못한 취급을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하느냐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지금 논리적으로 추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칙들이 성경의 가르침과 안식일의 근본 정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잘못된 것인가를 명백하게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드러내어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안식일을 이유로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핑계꺼리로 삼으면 안됩니다. 안식일을 이유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하는 핑계로 삼아도 안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이라도, 주일이라도 선을 행할 기회가 주어질 때 선을 힘써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 맞다고 적극적으로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의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패쇄적인 안식일 준수 지침을 정면으로 비판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방향과 달리 그 반대의 경향이 문제가 됩니다. 안식일과 주일의 중요한 정신인 하나님을 경배하는 주의 날을 거룩히 구별해야 하는데 이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오락을 추구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말을 삼가라는 가르침을 무시하고 세속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주일을 사용합니다. 예배도 소중힝 여기지 않고 주님의 날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고 귀찮게 여깁니다. 이런 성향이 있는 기독교인은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여기고 존귀하게 여기는 성도만이 천국 백성임을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천국 생활은 영원한 찬송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신령한 기쁨과 성도의 교제가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 자들이 천국에서 영광스런 보상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안식일을 거룩하고 존귀하게 지키는 자가 천국을 상속할 상속권자라는 증거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일을 소중히 여기고 모이기 힘쓰며 성도의 교제를 힘씁시다. 할렐루야.

 

넷째로,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깨끗이 고친 일을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 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워놓고 가르치신 후에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렸는데 그 똑똑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그 사람을 바라보시고 그를 고쳐주십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손을 내밀라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 사람은 예수님 말씀의 권위를 믿고 구부러진 손을 쭉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힘을 줘도 펴지지 않던 그 손이 쫙 펴지는 것이었습니다. 신경과 힘줄이 줄어들어 손이 오그라져서 펴지지 아니하였던 그 사람은 자기의 펴진 손과 팔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뛸 듯이 기뻐하며 예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 일파는 얼굴이 찌그러졌습니다. 1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니라

여기 오랜 질병에서 놓여나 기뻐하며 환호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놀라워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속이 뒤틀리고 화가 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그의 생명을 어떻게 하면 해칠까 하는 살해 의지를 갖고 의논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많이 뒤틀린 자들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똑 같은 구약 성경을 갖고 있으면서 성전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예배도 참석 많이 하고 금식과 기도를 자주 하면서도 이렇게 그 심령을 마귀가 점령하여 자기를 의롭게 여기고 천국을 자기들만 들어갈 줄 확신하며 다른 이들에 대한 교만과 질투와 자기 자랑과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분노와 악독이 가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당시에 유대 종교의 주류 종교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선생들이었습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됩니다. 참으로 이러한 암울한 시대, 캄캄한 시대 가운데 진리의 빛을 비추려고 예수님께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당당하고 감추임없이 생명의 진리를 밝히 증거하여 모든 속박당한 자들을 자유케 하며 진리 가운데 생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르신 말씀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한복음 8:12)

고 외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리 모두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와 그의 말씀을 듣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달읍시다. 수많은 인류의 스승이 있습니다. 빛이 나는 도를 가르쳐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짝이긴 하지만 그 빛은 완전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빛이 아닙니다. 반사된 빛이요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주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완전합니다. 참 생명을 주는 진리의 빛입니다. 그를 믿고 그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여 그 빛 가운데 거하고자 힘쓰는 자는 자유함을 얻습니다. 생명을 얻고 완전하고 풍성하고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글을 소중히 읽고 그 가르침을 겸손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받읍시다. 성령께서 진리의 빛을 밝히 깨닫도록 간절히 기도하면서 배워갑시다. 그리할진대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우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천년 전 가버나움 한 회당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안식일의 규례의 참된 의미를 오늘 다시 살펴보았습니다. 안식일은 지극히 복된 축복의 규례입니다. 그 날은 거룩한 구별된 날입니다. 이 날에 주님은 풍성한 진리의 말씀을 가르침으로 그들의 심령을 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된 교만으로 꽉 뭉쳐진 자들에게도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자 말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안식일의 참 의미에 대하여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당시에 악한 마귀가 안식일의 생명과 자유와 기쁨을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서 빼앗아버렸는데, 오늘날에는 안식일의 거룩함과 그 지극히 복스러움과 신령한 영적 은혜의 풍성함을 가볍게 여기고 세속적인 즐거움과 재물에 대한 욕심과 경건한 두려움이 없어진 불경스러움으로 인하여 안식일의 그 풍요롭고 자유롭고 행복한 은혜를 잃어버리는 영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 모두 주일의 이 지극히 복스러움을 감사함으로 지킵시다. 주일을 사랑하며 귀히 여기며 사모합시다. 하나님께 거룩함으로 단장하고 마음을 다하여 감사함으로 예배 드립시다.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 교회 공동체에 모여서 한 아버지의 형제 자매로서의 우애를 나누는 성도의 교제를 즐거워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교훈들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진리를 즐거워합시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진정한 본체인 우리 주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의 충만한 기쁨과 자유와 생명을 영원히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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