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예수님
누가복음 6:12~19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특별히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라 부르시며 따로 세우시는 내용을 접하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의 이름은 사도행전 1장에서 한번 더 등장합니다. 이렇듯 열두 명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발하신 이 일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이 일의 의미를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기초를 다지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시는 시기와 정황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신 때는 사역을 시작하신 지 1년쯤 될 때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소문으로 듣고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7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은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병렬 구절인 마가복음 3:3에 보면,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 뿐 아니라 멀리 이두매 곧 에돔 지방에서나 요르단 지역에서나 요단 동편 땅 데가볼리나 멀리 서쪽 시돈과 두로 지역인 수로보니게 지역에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병 고침의 은혜를 사모하여 몰려든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스라엘의 종교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 상황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서 몰아내고자 그들과는 전혀 사상이 다른 헤롯당원들까지 만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하고 의논을 시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깊은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옛 이스라엘 대신에 새 이스라엘을 세워가야 하실 것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이루어갈 백성들을 따로 준비해야 하겠다는 구체적인 일을 예수님도 실행하고자 하십니다. 그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새 이스라엘, 참 이스라엘,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새 이스라엘 새 백성의 대표로서 12명의 제자들을 선발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왜 열 두 명인가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열두 지파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각 지파의 대표가 되어서 열두 지파가 구약의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이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섬기는 새 이스라엘 백성인 신약 성도들 역시 열두 명이 그 대표가 되도록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당시 육신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을 실패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을 내려놓고 새롭게 부름받은 이스라엘 신약 성도들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려고 이렇게 열두 제자들을 신약 성도들의 대표자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말씀에 “이 때에”라는 말인데, 원문 그대로 말하면 “이와 같은 날들에”라는 말입니다. 즉 어떠한 날들이냐면 그 앞서 나온 대로 예수님의 대적들이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어떻게 죽일까 서로 긴밀하게 의논할 때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열두 제자들의 선발하심은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큰 사건이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열두 명의 사도들을 세우기 위하여 행하신 일을 어떤 일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두 명을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예수님은 열두 명의 선발의 의미가 중대함을 잘 아시기에, 자기의 뜻대로 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께 예수님은 자기를 도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귀한 영적 기둥들을 선발하도록 간청합니다. 그 일이 중대한 일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밤을 새면서 기도에 전무합니다. 그런데 사람을 세우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은 잘 모르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과거에 사울이 왕으로서 자기의 직무를 감당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뜻을 펼치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고 사울 대신에 이새의 아들들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사울 다음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베들레헴에 가서 이새의 아들들을 제사 후 식사 자리에 불렀을 때에 이새의 첫 아들 엘리압을 보고서 그 용모와 키를 보고서 마음이 반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속으로 하나님께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르기를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사무엘상 16:7)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의 깊은 곳을 다 들여다 보시고 다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사람을 온전히 바르게 아시고 세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날 밤을 새면서 자기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열두 명의 제자를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기를 기도로 간청하였으며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더해주시기를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의 사도의 명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름들입니다. 그래서 열두 명의 사도들은 다같이 미완성의 믿음과 인격을 가진 분들로서 예수님 곁에서 실수도 많고 넘어지기도 많이 했지만 변절자 가룟 유다 외에는 그들 모두 훗날에 자기의 사명들을 끝까지 잘 감당하고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만 보시고 우리를 부르시거나 일을 맡기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장래까지 다 알고 계시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죄와 허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불러 쓰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장립은 하나님의 품에서 이미 계획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그들을 자기의 사도로 낳으신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사도들이 사역을 감당해가는 모든 과정에서 그들을 기억하며 늘 기도함으로 돕고 지키곤 했던 것입니다.
사도라도 직분을 받는 것과 그 후에 그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기도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편지를 쓸 때마다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데살로니가전서 5:25)
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의 사도들의 전승을 이어받아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도록 부름받은 주의 종들에게 가장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의 중보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셔서 사도의 뒤를 이어서 말씀 사역을 감당하는 주의 종들을 위하여, 말씀 사역을 위하여 늘 간절히 기도로 돕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님이 불러 세우신 열두 명은 어떤 사람들인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 열두 명의 사도의 이름이 13절로부터 16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초창기부터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일곱 명의 제자들이 여기 포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 그리고 어부로서 동역자였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 그리고 베드로의 동향 출신인 빌립과 그의 친구 바돌로매가 있습니다. 바돌로매는 요한복음에서는 나다나엘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관에 있을 때 부른 마태가 있습니다. 그들 7명이 예수님과 지난 1년 동안에 함께 다녔다면, 이제 산 위에 올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또 다른 제자 다섯 명의 명단이 나옵니다.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이라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가룟 유다입니다.
여기서 도마는 요한복음 11:16 말씀에 보면, ‘디두모’ 곧 쌍둥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그의 본명이 아니고 별명이었는데, 그것이 그의 정식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요한의 형 야보고와 구분하기 위하여 ‘작은 야고보’라고 불리곤 했습니다. 마가복음 15:40 말씀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켜보는 여인들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라는 내용에 나오는 ‘작은 야고보’가 바로 여기서 나오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또 셀롯이라는 유다라는 제자의 이름을 보면, 셀롯은 열심당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롯인 유다는 당시에 로마로부터 무장봉기해서라도 독립해야 한다는 열심당원으로 일하는 중에 예수님을 알게 되어 제자로서 따라다니다가 이렇게 주님의 택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또한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다대오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가 나옵니다. 가룟은 ‘그리욧’이라는 유다의 남부 지방을 가리킵니다. 훗날 예수님을 배반하여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가 이렇게 신성한 예수님의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선발된 것은 우리 인간의 지성과 상식을 뛰어넘는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장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를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악한 자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지으셨기에,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가 자기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하여 그처럼 부름받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분명 그에게도 다른 제자들처럼 선한 것을 주셨고, 지극히 복스러운 은사도 주셨고 직분의 영광도 주셨건만, 그는 끝내 구주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는 것을 거절하였으며, 자기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자기에게 끝까지 믿어주고 선으로 대하시고 사랑하신 스승이자 진정한 친구인 예수님을 은 삼십 량에 원수들에게 팔아 넘기는 길을 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지극히 복된 은혜를 입은 자일지라도 끝내 그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자들도 주의 종들 가운데에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외면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직위와 사역의 외적 열매가 있다 하더라도 끝까지 가봐야 그 사람의 진실을 알 수 있으며, 최후까지 가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알 수 있습니다.
넷째로, 사도로 부름받은 인물들을 볼 때 외적인 면에서 특별한 점이 없다는 점입니다.
사도로 부름받은 이들을 보면, 특별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너무나 평범합니다. 도리어 평범 이하로 부족한 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이 넷이나 끼어 있고, 나아가 한 사람은 가장 비천하게 여기는 세리 출신도 한 명 있습니다. 단도를 품에 숨기고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하던 열심 당원 출신도 끼어 있습니다. 그들은 랍비 훈련을 받은 적 없고 예루살렘의 종교적 명문가와는 거리가 먼 변방의 갈릴리 촌뜨기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도모하고자 예수님은 작정하시고 그들을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통하여 옛 이스라엘 시대를 뒤집어 엎으시고 새 이스라엘의 시대를 열어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훗날 초대 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을 불러서 온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이나 능력이나 문벌이나 지혜를 통하여 일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일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장차 일어날 새 시대의 원동력에 대하여 스가랴서 4:6 말씀에서 이렇게 예고하신 바 있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며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바 말씀과 같이, 이제 새 이스라엘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인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뛰어난 학벌을 가진 자도 아니요 많은 돈과 놀라운 지식을 가진 자도 아닙니다. 대단한 수완을 가진 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순박한 믿음을 가지고 성령을 받아 주님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일꾼들은 성령의 새 술을 마시고 주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통하여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예 바리새인들과 함께 어울려 꼬질꼬질한 인간의 규칙들로 생각이 짓눌린 사람들을 일체 부르지 않고 생활 속에서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들, 순수한 감정과 양심과 열정을 가진 변방 갈릴리의 젊은이들을 자기의 제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힘과 용기를 줍니다. 외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그들은 우리보다 탁월한 점이 별로 없습니다. 재산이나 재주나 성품이나 도덕성에 있어서 크게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주님은 불러서 자기의 일꾼으로 삼아 훈련하여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귀한 기둥으로 삼았으니, 우리도 주님께서 얼마든지 쓰실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합시다.
그래서 오늘날도 우리가 주님의 열두 제자들을 보면서 용기를 갖고 나도 주님을 위하여 쓰임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주님을 곁에 가까이 나아갑시다. 그래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써주세요”하고 말씀 드리며 성령 충만을 구하고 날마다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째로,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병렬구절인 마가복음 3:14 말씀에서 이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가장 중요한 열두 제자의 일과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대표로서 부름받은 것입니다. 임금이 그 백성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의 대표인 열두 제자들과 늘 함께 거함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을 기르시며 사랑으로 섬기며 함께 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사시는 공동체 생활은 그 자체가 왕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사는 것을 실현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장차 우리가 천국에 가서 목자이신 주님 앞에서 그의 양무리들 가운데 우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 그것 자체가 천국입니다. 아무리 모든 것이 다 갖춰 있다 하여도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않으면 그곳은 천국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우리를 대표하여 그렇게 우리의 목자이며 왕이시며 우리의 신랑이신 주님과 함께 육신을 입고 그렇게 매일 먹고 마시며 지낸 것입니다. 이것이 열두 제자 됨의 가장 큰 특권이라 생각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은 성령님을 보내 주시어 늘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먹고 마시며 자고 깨고 일하는 모든 삶에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모든 삶을 주님과 공유하십시오.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외로울 때에도, 화날 때에도, 지칠 때에도, 아플 때에도, 힘들고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도 항상 주님께 마음을 열고 곁에 모시고 우리의 것들을 함께 나누십시오. 그것이 제자 됨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특권입니다. 이후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한 솥밥을 먹으면서 함께 여행하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기도하며 지내는 지극히 복된 영광의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주님의 영을 보내셨으니, 성령님 안에서 주님과 늘 기도로 대화하면서 함께 생활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열두 사도의 일은 주님의 보냄을 받아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6:13 말씀에 보면, 그들을 ‘사도’라 칭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원어로, ‘아포스톨로스’인데, 이는 ‘보냄받은 자’, 혹은 ‘전권대사’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열두 명은 세상에 보내시어 예수님과 동일하게 여기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낸 사도들은 예수님을 대리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을 본 자는 예수님을 본 자와 같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들은 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당신이 가시고자 하나 육신을 가진 마당에 가실 수 없을 때에는 사도들을 자기 대신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보면 사도들을 임명하는 맥락이 일할 곳이 많은 데 예수님께서 혼자라서 어찌할 바 없어서 대신 가서 일할 일꾼을 찾는 맥락입니다. 마태복음 9장 35절 이하에 그것이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열두 사도의 이름이 이러하니”(마태복음 9:35~10:2상)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세상 가서 일하고 싶으나 일꾼이 부족하여 불러 세운 예수님의 대리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사명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곡식들을 추수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곧 주님께 보냄을 받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주님께 돌이키는 일이 그들의 일인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두 명의 사도들은 당대에 복음을 전하려고 세상 각곳으로 보냄을 받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각곳에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 때에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전해져옵니다.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에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에게 칼로 목베임을 받아 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칼에 의하여 순교당했습니다. 바돌로매 곧 나다나엘은 전도하다가 생가죽이 벗겨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내려옵니다. 마태도 이티오피아 또는 애굽에서 선교하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고도 하며 혹은 화형을 당했다고도 전해져내려옵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곧 작은 야고보와 셀롯인 시몬도 페르시아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설교 도중에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또한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의 반열에 가입하게 된 맛디아 역시 유다 지방에서 사역하던 중에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오직 사도 요한만이 순교당하지 않고 기적적으로 끓는 기름가마에서 살아남아 밧모 섬에 귀양살이하면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면서 사도들의 빈 자리를 지키며 주님을 증거하고 교회를 지키고 사도들을 뒤이어서 교회를 지도할 속사도들을 세우는 일을 감당하다가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그들 모두가 맡겨진 사도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여 1세기만에 로마 전역에 복음이 증거되고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져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귀한 진리의 등불들이 비추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비록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심히 미약하고 부족했지만 그들이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주님의 인격을 배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며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 두려움없이 자기들의 생명을 바쳐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그들의 증언들이 남겨져 오늘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구든지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말할 때에 에베소서 2:20 말씀에서 이렇게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사도들이 보고 경험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의 바탕 위에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들 외에 다른 사도는 없다 할 것입니다. 오늘날 혹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자기들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이 20세기 후반에 펼쳐진 바 있습니다. 은사는 더 받을 수 있으나 그러나 예수님이 지명하여 세우신 열두 사도는 반복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유일무이합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사도를 세우신 의미는 그렇듯 중대합니다. 훗날 우리는 천국에 가면 하늘의 새 예루살렘 성벽을 지탱하는 열두 기초석에 그 열두 명의 사도들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인격과 부족한 신앙을 가졌던 갈릴리의 젊은이들을 부르셔서 사도로 훈련시켜서 새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초를 세우신 주님께서, 오늘날도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지극히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들도 쓰시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믿읍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 손에 내어드립시다. 주님께서 피로써 값주고 사시고 사도들이 그 터를 세운 지극히 존귀한 교회를 우리들에게 이렇게 맡겨주셨으니, 우리도 충성된 마음을 가지고 주님과 늘 함께 거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품고 부족한 모습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교회를 받들어 세워갑시다. 사도들이 늘 기도를 힘썼고 늘 기도를 부탁한 것처럼 우리도 늘 기도에 힘쓰고 주의 종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 많이 함으로써 영적인 주님의 일꾼들이 다 됩시다. 그리하여 오늘날도 여전히 교회를 훼방하는 어둠의 영들과의 싸움에서 지지 말고 성령으로 교회를 굳건히 세워가도록 합시다. 또한 사도들이 보냄받아 목숨을 바쳐 주님의 증인이 되어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증거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 말고 힘을 다하여 전도하도록 합시다. 사도로 부름받은 그들은 주님처럼 살도록 부름받은 자들인데, 주님이 십자가 지신 것처럼, 제자들도 고난의 십자가를 마다않고 그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달게 받고 기꺼이 고난을 이기고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사도의 후계자들이 되어서 장차 주님 앞에 가서 영광의 상을 받는 사도의 계승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