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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3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26.06.22|조회수33 목록 댓글 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3,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는 말씀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곁에 두고 함께 다니며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함께 할 특별한 제자들 열두 명을 부르셔서 따로 세운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밤을 새며 기도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산 아래 내려왔을 때에 그에게 모여든 많은 사람들 중에 이들 열두 제자를 호명하여 자기 곁에 세움으로써 열두 사도 장립식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5장으로부터 7장까지 이르는 말씀을 그 모인 무리에게 베푸신 것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에 베푸신 말씀을 일컬어 산상수훈이라고 명명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산 위에서 하사하여 베푸신 교훈이라는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산상수훈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산상수훈은 구약 시대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천둥 번개와 불꽃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과 율법을 하사하신 일과 비견할 만합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 하사의 경우에는 두려움과 엄위함의 분위기 속에서 선포된 말씀이라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한 산에서 모여든 백성들에게 베푸신 이 말씀은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부드러운 주님의 음성으로 베풀어주신 교훈이라는 점에서 대조가 됩니다.

 

주님의 앉으심의 의미

오늘 본문 말씀 마태복음 51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왔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앉는다는 것은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랍비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기 위하여 취하시는 자세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 중에 마태복음 23:2 말씀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모세의 자리는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랍비들은 가르칠 때에 자리에 앉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 두루마리를 펴서 읽으신 후에 자리에 앉으셔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 해변을 걷다가 사람들이 몰려들면 한 배를 취하여 그 배 위에 앉으셔셔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해변에 서서 그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주간에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 위에 앉으셨습니다. 그 고개 마루에 앉을 만한 곳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다윗 시대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이라고 불리던 곳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앉으셔서 장차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권위있고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을 선발한 후에 내려와 자기에게 나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지켜야 할 삶의 원리를 입을 열어 큰 소리로 가르쳐 주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증거해주신 산상수훈을 일컬어 하나님 나라의 대헌장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만큼 산상수훈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준수해야 할 중요한 삶의 윤리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이 있나니-‘마카리오스의 의미

그 산상수훈의 첫 단락은 8개의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으로 구성된 팔복이라는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팔복 중에서 주님께서 맨 처음 선포하신 마태복음 5:3 말씀을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3절 말씀을 함께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먼저,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께서 복이 있다라고 한 이 말씀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 세상적인 축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많이 벌어 행복하고,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 행복하고, 자녀를 많이 낳아서 행복하다고 믿었던 유대인들과 우리네 조상들이 생각하는 지상적인 행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이 재물을 많이 얻는다고 해서 꼭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재물 때문에 근심도 더 많게 되기도 하고 화가 닥치기도 하지 않습니까? 세상 권세 자리에 올랐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면 책임져야 할 일은 많고 결정자로서의 부담도 더 크고 경쟁하며 도전해오는 대적들도 그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더 스트레스를 받아 괴로움이 큽니다. 자식이 많으면 든든하고 유익하기도 하지만 가지 많은 나무가 바람 잘 날이 없다는 말처럼, 그 만큼 자식으로 인하여 슬픔과 근심도 많아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상적인 행복 조건은 사실 참된 행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복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지상적인 행복 조건에 일치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마카리오스라는 단어의 복 됨은 사실 천상적인 것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께 적용되어 사용된 바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1 말씀에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는 말씀에서 복 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복되시다고 사도 바울은 선언합니다. 디모데전서 6:15,16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이 다시 이 점을 선언합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 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유일하시고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유일하신 주권자시며 영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복되시다’,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 역시 일시적이고 지상적이고 환경에 의하여 좌우되고 감정에 의하여 좌우되고 변질될 수 있는 지상적 복스러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환경과 여건에 좌우되지 않는 천상적인 복을 가리킨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남편의 위로와 보호를 얻고자 하여 결혼 실패 후에 여러 남편을 만났으나 여전히 진정한 만족과 평안과 기쁨을 얻지 못하여 지쳐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와 수가 성 야곱의 우물 곁에서 우물 물을 두고 하신 말씀에서 천상적인 복스러움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3,14)

세상이 주는 만족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만족은 늘 새롭게 솟아나는 영생수와 같습니다.

또 한 가지 요한복음 14:27 말씀을 생각해보면, 이르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오래 가지 않습니다. 지금 미국과 이란이 종전 협정을 맺었지만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롭습니다. 이스라엘은 휴전 협정에 아랑곳없이 레바논에서 계속 포를 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약속하는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금방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님이 성령 안에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는 평안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가 전도하다가 체포되어 가이사랴 감옥에 갇혔을 때나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에 그는 감옥 안에서 심령이 자유롭습니다. 평강이 넘칩니다. 그를 심문하거나 방문하여 취조하는 자들이 도리어 이 자유롭고 평안하고 명석한 진리의 전파자 앞에서 자기들의 나태한 삶을 부끄러워하면서 서둘러 물러가곤 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모든 것에서 자족하며 자유로웠습니다. 그의 심령에는 환경을 초월해서 부어지는 평강과 자유와 생명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하듯이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에서 이르신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은 지상적이고 세상적인 행복 조건을 충족함으로써 얻어지는 일시적이고 변질되는 행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신 복이 있나니의 이 행복은 그 기원이 지상적이 아니라 천상적이요, 또 이 행복은 환경과 여건을 뛰어넘어 계속 솟아나는, 온전히 충만해지는 참된 행복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그러면 누가 이 천상적 행복의 주인공일까요? 주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밝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으시고,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라고 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매우 가난한 사람들 중에 오히려 마음이 더 쪼들리고 물질에 매여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 중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공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두 렙돈을 헌금함에 드린 과부가 그 한 예입니다. 그녀는 비록 물질적으로 심히 가난했지만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만큼은 가장 컸던 사람입니다. 그녀는 물질적인 면에서 극한 가난 속에 있었지만, 그 심령은 늘 하나님께 더 드릴 간절함으로 인하여 늘 안타까움이 가득한 가난한 심령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생활비 전부, 예루살렘에 오고가는 여행비까지 포함된 두 렙돈을 다 드리고 집에 갈 때에는 그냥 흐르는 시냇물을 손으로 마시면서 그렇게 내려가려는 참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물질의 큰 부자라고 해서 심령까지 기름진 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많은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나 그 물질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는 하늘의 장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큰 거부였지만 늘 그 심령만큼은 늘 하나님을 향하여 굶주린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난함의 의미-‘프토코스

그렇다면 여기서 가난함은 어느 정도의 가난함의 의미일까요?

원문에 보면, 이 가난함을 프토코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리스 말에는 가난하다라는 단어가 네페스라는 단어가 있고, ‘프토코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네페스의 가난함은 일용직 노동자가 나가서 일해서 그 번 임금으로 간신히라도 먹고 살아가는 것을 해결하는 가난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프토코스의 가난함은 절대적 빈곤 상태를 의미합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여서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하루도 더 살 수 없는 완전한 가난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노력과 자기의 힘으로는 이 처절한 가난과 패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신 심령의 가난함의 상태는 프토코스의 절대 빈곤의 가난함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르신 바 복 있는 자는 그의 심령 깊은 곳에서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어서 자기 힘과 지혜로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이 세상에서 하루도 더 살 수 없는 절대적인 무력감을 느끼기에, 그는 오직 자기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매달립니다. 구약 성경 시편에서 다윗이 자주 노래한 탄식시에 나오는 가난한 자, 가련한 자, 곤고한 자, 외로운 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시편 356절 말씀에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05절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니 여호와여 지체하지 마소서

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다윗은 젊은 시절부터 많은 고난과 압제를 당했습니다. 사울 왕이 그를 잡아 죽이려고 국가 권력을 동원하여 수천 명의 병사들을 다윗이 숨은 곳을 수색하여 그를 찾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에 처한 상황에서 자기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피할 분은 하나님 한분뿐으로 알고 다윗은 하나님만을 간절히 찾고 도와주시기를 부르짖곤 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밤을 광야에서 울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시편 102:6,7 말씀에 보면 그는 자신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었사오며 내가 밤을 새우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그는 황폐한 광야의 동굴과 수풀 속에서와 황폐한 요새 한쪽 귀퉁이에서 하나님께 울면서 밤을 새면서 훌쩍이며 기도하곤 했으니, 하나님이 아니면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하나님께서 나의 유일한 구원자요 유일한 피난처가 되신다고 매달리곤 했던 것입니다. 다윗처럼 이렇게 심령에 있어서 완전히 파산 상태인 사람이 도리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여기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다윗처럼 자기로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고 인정한 사람, 하나님만이 자기를 구원하시며 살려내고 지켜주실 자라고 믿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가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할 수 있다고 자신감 있는 사람, 자기의 힘과 지혜와 재산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넉넉히 꾸려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생을 그럭저럭 경영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기름진 자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유형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하여 책망하신 라오디게아 교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주님의 메시지를 보면 매우 준엄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요한계시록 3:15~20)

그러므로 세상 재물과 세상 인기와 세상 지위 등을 통하여 인생을 그럭 저럭 잘 살아오고 있으며 앞으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믿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라오디게아 교회와 그 성도들의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의 실상은 믿음의 보화가 없는 가난뱅이 신세입니다. 그가 비록 화려한 옷으로 치장했지만 사실은 의의 옷이 다 찢어지고 낡아버린 것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벌거숭이 신세입니다. 또한 자신이 예리한 눈로 세상을 잘 분석하며 세상 돌아가는 것을 잘 파악하여 똑똑하다 생각하지만, 정작 자기의 영적 상태와 자기에게 닥쳐올 미래에 대하여는 전혀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달당봉사라는 것입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성도 중에는 큰 부자들도 많았고 당시 그 도시의 고위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날마다 기름진 파티를 즐기면서 지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믿음도 가져 천국도 가게 되고 세상에서도 이렇게 복을 받고 있으니 진짜 부자라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럽게 지냈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그 생각은 착각이라면서 나는 너희를 토하고 싶다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열심을 가지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고 그리할 때에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고 날마다 그들의 밥상 자리에 함께 먹고 마시면서 진정한 교제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 되라는 촉구인 것입니다. “나는 부자다라고 자부하지 말고, 영적으로 갈망하는 자, 하나님을 향하여 목말라 하는 자,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의가 깨어진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속에 의로움이 하나도 없다고 깨달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임을 깊이 느낍니다. 자기의 무력함, 자기의 자격 없음을 절실히 느낍니다. 모세가 시내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그 앞에 엎드려서 한사코 거절합니다.

나는 못합니다. 나는 입술이 둔한 사람입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 성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니다. 그 높고 장대한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는 순간 선지자는 탄식하며 말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여”(이사야 6:5)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순간 자기 내면의 불결함을 깊이 느끼고 두려워 떨었스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물고기가 잡힌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놀라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누가복음 5:8)

한낱 나사렛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갈릴리 어부인 자기보다 바닷속을 알겠는가 속으로 생각하고 설마 하면서 순종했는데, 놀라운 그 반전의 결과를 경험하니까 자기 앞에 계신 예수님이 누구신가 보이며, 그리고 자기 속에 엄청난 죄들이 가득차 있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감히 판단하고 정죄한 죄가 보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거꾸러져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온전히 인정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을 오랫동안 모신 후에도 그는 이렇게 디모데전서 1:15 말씀에서 진심을 다하여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동사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그는 죄인들 중에 항상 첫째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지 25년 정도가 지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십오 년 가까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를 죄인으로 깊이 인식합니다. 자기 속에 죄성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죄인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자기야말로 가장 악하고 추한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만약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자기야말로 가장 뜨거운 밑바닥에 떨어져야 할 가장 악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 속에 자랑할 만한 의로움이 하나도 없음을 깊이 인정합니다. 이런 사람은 선행이나 구제와 같은 것을 행할지라도 자기의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습니다. 당연히 할 바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사람은 죄인인 자기를 멸망에서 건져주신 하나님 아버지만을 자랑합니다. 자기의 죄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주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이렇게 심령 가운데 깨어지고 부서진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렇듯 자기 의가 깨어지고 부서져서 자기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언제나 옳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평가에 대하여 항의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게 주신 주의 말씀이 옳습니다.”라고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자기 의가 가득찬 사람은 성경의 가르침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령이 책망하실진대 도리어 분노합니다. 도리어 엇나가는 길로 나갑니다.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시자, 그는 더 빗나가 기어코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중년의 솔로몬 왕이 그러했고 사울 왕이 그러하였고, 웃시야가 그러했습니다.

인간의 자만의 본성이 이처럼 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의가 부서진 자, 자기에 대하여 죽은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죽은 사람은 성경은 이렇게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라고 감히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자기 판단, 자기 감정, 자기 이성이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기에, 자기 판단을 기꺼이 내려놓고 주의 판단을 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판단 앞에서 내 자신이 철저하게 완전히 죽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가 받는 축복

이제 심령이 가난한 자의 축복에 대하여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는 약속의 말씀을 덧붙여 주시고 계십니다.

천국은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는 곳이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그 즉시 순종하여 이행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그 천국의 은혜가 지상의 순례자인 우리에게도 분명히 찾아와 부어집니다. 저 천국의 충만한 기쁨, 평강, 생명과 자유가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도 우리 심령 속에 부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가까이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옛날 다윗이 성령의 감동 속에서 인도함을 받으며 살았듯이,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성령과 깊은 교제 속에 인도함을 받았듯이, 우리도 이 시대에도 성령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천국의 지상 분점이 되어서, 우리를 통하여 작은 천국의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 권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바로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자도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들어간다 할 것입니다. 이 심령의 가난함이 모든 천국 백성의 다른 덕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을 돌아봅시다. 과연 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과연 나는 하나님을 가장 간절히 찾고 구하는가, 인생의 위기에서 나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리며 도우심을 청하는가, 정말 내가 가장 자랑하는 보물은 무엇인가? 나의 보물이 혹시나 재물이나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나 자기의 가문이나 자기의 어떤 공덕이지는 않은가요? 그런 것들은 진정한 자랑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들을 도리어 배설물로 여기고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소유, 진정한 나의 보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정금 같은 믿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영적인 면에서 볼 때에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철저하게 가련한 자요 죄인의 괴수요 무력한 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빛이 우리 심령을 비추어주실 때에 이 복된 깨달음을 얻습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 진정으로 가장 행복한 자로 살기를 갈망합시다. 저 사막과 수풀과 황무지와 동굴 속을 살기 위하여 떠돌며 당아새처럼 울지라도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많은 세월을 보낸 모습을 지켜 보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윗을 극히 사랑하시고 하나님 자신을 선물로 주시고 늘 함께 하시며 붙잡아 써주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성전 안에서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청하며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한 그 세리도 그의 심령의 가난함으로 의의 선물을 받고 내려갔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모든 재산과 시간을 다 낭비하고 돌아왔을지라도 아버지의 사랑의 품을 향하여 먼 길을 걸어와 그 품에 달려온 탕자도 심령의 극히 가난함을 돼지 막사에서 깨달았기에 그의 생애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가장 행복한 자는 바로 이렇게 자기 속에 이렇게 완전한 파산을 경험한 자입니다. 자기 의가 더러운 옷과 같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고 오직 지옥밖에 떨어질 곳이 없다고 절규한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만 붙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철저히 죽은 자가 됩니다. 이 사람만이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섬기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 은혜가 날마다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성령께서 심령의 가난함의 행복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이 깨달음이 날마다 더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심령과 삶에 천국이 충만히 임하여서 모든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 있더라도 시들지 않고 마르지 않는 평강이 있기를 바랍니다. 샘솟듯 솟아나는 기쁨과 풍성한 생명과 자유함으로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족과 이웃과 친구와 동료들까지 천국을 느끼고 맛보고 경험하게 되어 주님께 다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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