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36~43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장면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일시는 주님께서 죽으신 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날 밤입니다. 예수님은 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최초로 보이신 후에 다른 여인들도 만나주시고 시몬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만나주셨고 그리고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몇 시간 동안 함께 동행하시며 가르치신 후에 식사 때에 기도해주신 직후에 그가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게 해주신 바 있습니다. 이제 다섯 번째로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장면이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24장 36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에 나옵니다. 오늘 이 두 곳에서 묘사한 그 날 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주님의 몸의 부활을 깊이 확신하면서 믿음 생활에 기쁨과 열심을 더 얻는 복된 성도들이 됩시다.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다섯 번째 현현하심은 교회 공동체 전체 앞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 동안 부활의 주님이 만나주신 것은 개인적으로 만나주신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다른 여인들, 베드로 시몬, 엠마오의 두 제자 등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셨지만 그것들은 좀 비밀스러운 개인적 접촉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다섯 번째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곳은 도마를 제외한 다른 사도들 전부와 갈릴리 여인들과 예루살렘의 신실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할 때 그것을 의심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환상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갖기에 충분한 객관적인 사건인 점에서 이 다섯 번째로 제자들에게 주님이 나타나신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충분한 증인들이 있는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둘째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으라 하신 말씀이 담고 있는 은혜를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36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뿐 아니라 입을 열어 말씀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첫마디가 평강을 빌어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유대인들끼리 만났을 때 나누는 인사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병렬 구절인 요한복음 20장 19절 이하 구절에서 19절과 21절에 예수님은 그 날 밤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한번만 아니라 두 번씩이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두려움과 근심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단순한 인사말을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가지도록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보면 우리는 부활의 주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향하여 온유하며 용서해주시기를 기뻐하시며 격려와 사랑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에 다들 도망친 사람들입니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을 가까이 두고서도 계집 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떼며 저주하며 맹세까지 한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그 고통을 홀로 겪을 때나 장례를 치르는 그 날에 골고다 언덕과 돌무덤에 나타난 제자는 사도 요한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의 얼굴을 처음 만나는 이 자리에서 그들에 대하여 얼마든지 책망도 하실 수 있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마디의 꾸짖으심도 없이 그들에게 평안을 빌어주며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시는 말씀을 해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점을 볼진대, 참으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도 한없이 오랫동안 노여움을 품으시거나 우리 죄를 계속하여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나 보자’ 하고 꿍하니 미움을 품고 대하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은 지나간 잘못을 인하여 면목이 없어서 늘 주님 앞에 서면 주눅이 들고 고개를 못 들고 스스로 기를 못 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고 그 어깨를 펴게 해주셨고 풀죽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그들의 믿음 없음을 용납해주시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믿어주고 있다고 확실히 증거해주신 것을 기억합시다. 그래서 허물많고 믿음이 부족한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온유하게 대해주시고 너그럽게 다 용서해주시고 옛 잘못들을 싹 잊어주시며 어서 힘을 내라고 용기를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러한 주님의 넓은 마음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을 본받읍시다. 잠언 19:11 말씀에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3:12~14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으로부터 많은 너그러운 온유한 대접과 용서와 사랑을 입었으니, 우리도 우리에게 허물과 잘못을 범한 자들을 기꺼이 그 잘못도 잊어주고 너그럽게 대해주고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됩시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는 영으로만 아니라 몸을 가지고 부활하셨음이 분명합니다.
37절로부터 4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원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예수님께서 갑자기 자기들 가운데 한 가운데 문도 안 여시고 나타나시니까 그들은 너무 놀랐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령 혹은 귀신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유령이 아니라 몸을 가진 존재임을 그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주님의 손과 발을 보라고 또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귀신이란 만질 수 없는 영체이고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몸을 가졌기에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게 하려고 주님의 손과 발을 내밀어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발과 손에는 십자가의 대못이 거칠게 박힌 구멍이 선명하게 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0절에는 예수님께서 옆구리까지 보여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옆구리에는 창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바로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또한 자기는 유령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부활한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믿음이 안 생길까봐 예수님은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물어서 그들이 내놓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로써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요 분명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한 몸을 분임을 확실하게 입증해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주님께서는 영으로만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은 몸까지도 다시 생명을 얻어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몸을 가진 존재로 부활하신 것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도 장차 우리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고 화장터에서 우리 몸이 불에 타서 한 줌 하얀 재로 변했다 할지라도 다시금 주님의 재림할 그 때에는 우리 영혼만 아니라 우리 몸까지도 죽음이 더 이상 이기지 못하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살아날 것을 굳게 믿읍시다. 할렐루야.
네 번째로, 자기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이신 뜻을 살펴봅시다.
앞서 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몸의 부활을 증명하시려고 자기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지 몸의 부활을 증명하려는 것만은 아니라 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영적인 산 교육의 일환으로 자기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부활하여 지극히 영광스럽게 되셨지만 주님께서 여전히 그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손의 상처, 발의 상처. 옆구리의 창자국을 선명히 갖고 계신 것은 그것이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그가 당하신 고난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가 치르신 십자가의 희생과 수치와 고통과 죽음은 우리 주님의 가장 큰 영광의 증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하늘의 성전의 중앙에 있는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 곁에 계신 우리 주님께서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과 모든 천사들과 세상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찬양과 경배를 받으l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에 계시록 5:6 말씀에 보면, 찬양받으시는 우리 구주 어린 양 예수님에 대하여 이러한 표현이 나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하늘 성전의 영광의 보좌에 서 계신 어린 양 우리 구주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은 뚜렷한 상처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장차 하늘에 가서 주님을 볼 때에 분명히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그 고난의 흔적이 뚜렷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못자국난 손과 발과 창 자국 난 옆구리를 볼 때에 우리 마음이 뜨거워질 것이요 그가 치르신 그 희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을 인하여 영원히 감격하며 그를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 드릴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그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줌으로써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드려진 헌신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것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가 이 땅에서 사역하면서 많은 환난과 시련을 당했는데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이 평안하고 대접을 잘 받고 아무런 고생 없이 사역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고 이리 저리 쫓겨다니는 시련을 당한 것을 보고 비난하고 조롱하였으나, 사도 바울은 복음을 인하여 고생하며 수고하는 것을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맞서서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이방 선교를 다니면서 겪었던 시련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11:22 이하에서 그 내용을 나열하고 있는데 읽어보면 참 그 고생이 막심합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게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서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린도후서 11:22~30)
이렇듯 주님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희생의 흔적을 가졌듯이, 사도 바울도 복음 때문에 숱한 흔적이 그 몸 여기 저기에 남아 있었음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기에 거짓 교사들의 현혹에 속아 넘어갈 위험에 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사도는 그 편지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그렇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는 중에 그 몸에 예수를 위한 고난의 뚜렷한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의 흔적이요 그가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채찍질, 매질, 돌 맞은 흔적들이 그의 몸 여기 저기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고생하고 모욕을 당하고 희생을 하고 손해 본 일에 대하여 낙망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이것을 인하여 기뻐하며 감사합시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14~16 말씀에 보면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히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에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라”(베드로전서 4:12~17상)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인하여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그 십자가의 상처를 영광스럽게 그 몸에 영원히 지니신 것처럼,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쓰며 희생하며 멸시와 모욕을 당할진대 그것들이 훗날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때에 지극한 영광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신앙 때문에 다가오는 시련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 고난을 인하여 장차 받을 영광을 바라보면서 도리어 기뻐하며 즐거워합시다. 더욱더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충성합시다. 그리할진대 장차 주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에 주님께서 자기의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이실 때에 우리도 함께 즐거워하며 우리가 복음을 인하여 당한 수고와 희생을 인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칭찬과 상급을 인하여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