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수요설교

거짓 교훈과 바른 교훈, 디모데전서 1:1~11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26.06.18|조회수29 목록 댓글 0

거짓 교훈과 바른 교훈

디모데전서 1:1~11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에 살펴본 바 말씀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의 주된 요점은 거짓 교훈과 바른 교훈의 차이점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울이 쓴 이 편지의 차례를 따라 차분하게 설명해가고자 합니다.

 

먼저 편지의 서두인 인사말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절과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자기가 사도로서 디모데에게 편지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그가 사도가 된 원천이 스스로 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두 가지 원천을 사도가 밝히는데, 하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구주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통상적으로 구원하시는 주를 소개할 때에 예수님을 가리키곤 하는데, 사도가 이렇게 하나님을 구주 하나님으로 소개한 점이 특이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시발점은 하나님 아버지임은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16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씀하신 바대로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구원 작정을 실행하신 구원의 원천이기에, 하나님은 구주 하나님이라고 불리움이 합당합니다.

또한 또 하나 바울이 사도로 세워진 원천은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에 사도 바울은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 길로 가야 할 우리 인생들에게 죄사함의 은혜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써 베풀어주셔서 생명의 소망을 안겨 주신 분이 바로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의 소망입니다. 골로새서 1:27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소망의 근원이 됩니다. 장차 저 천국에 들어가게 됨과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는 모든 원천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 그 자체가 되십니다.

 

이제 바울 선생은 자기가 사도가 된 원천이 무엇임을 밝힌 후에 편지를 받는 수신자인 디모데를 소개하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

라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일차 선교 여행 중에 루스드라 성에 들렀을 때에 전도하여 예수님을 알게 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 사람이요 어머니 유니게와 외할머니 로이스는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독실한 신앙을 가진 그들이 사도 바울의 전도 때에 진리를 깨닫고 주 예수를 믿어 구원받는 복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다시 2차 전도 여행 때에 루스드라 성에 들렀을 때에 디모데는 어느틈엔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그의 믿음도 처음 때보다 더 굳건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실라 외에 젊은 동역자가 필요했던 차라 디모데를 사역의 조력자로 불렀는데, 기꺼이 그 집안은 순종하였고 디모데도 사도의 부르심을 영광으로 여기고 따랐습니다. 그 이후 디모데는 사도 바울을 아버지처럼 따랐습니다. 빌립보서 2:21 말씀에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자기를 대신하여 디모데를 보내면서 이렇게 디모데의 충성됨을 빌립보 교회에 써 보냈습니다.

그들이 다 자기의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빌립보서 3:21~23)

사도 바울이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갇히고 순교를 앞둘 때에도 디도데에게 편지를 보내어 겨울 전에 속히 오라고 말한 것 역시 디모데에 대한 사도 바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에게 사도는 2절 후반절에 축복의 말을 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통상적으로 사도 바울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축복의 말을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언급하곤 합니다. 그런데 디도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축복의 인사말을 건넬 때에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신분적인 은총입니다. 죄사함과 의롭다 함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긍휼은 구체적인 곤경의 상황 속에서 건져지는 자비의 손길을 의미합니다. 평강은 하나님과 함께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행복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긍휼을 디모데에게 덧붙여 축복한 것은 그 만큼 주의 종으로서 선교 사역에 힘쓸 때에 겪는 수많은 고난과 시련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함을 사도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언제나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도 사도와 같이 다른 이들을 위하여 이 세 가지 축복의 내용이 늘 넘치도록 기도하며 복을 빕시다.

 

사도는 인사말을 마친 후에 그의 동역자인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머물도록 권면한 이유에 대하여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3절로부터 4절 전반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갈 때에 디모데에게는 에베소에 계속 머물도록 명한 시기와 상황은 대체로 사도 바울의 5차 전도 여행 기간으로 여겨집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2년 동안 갇혀 있다가 별 문제가 없다는 사법 당국의 판단을 받고서 풀려나온 후에 사도 바울은 또 다시 전도 여행을 다닌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로마 감옥의 일차 투옥 당시 쓴 편지들을 종합해보면,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반드시 다시 가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지역에는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라오디게아 교회, 골로새 교회, 서머나 교회, 버 거모 교회 등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다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 때에 직접 다니거나 그의 영향 아래 세워진 교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 있는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성도들의 믿음을 격려하곤 했는데,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회요 사도 바울이 이전에 삼년 동안이나 머물면서 가르쳤던 에베소 교회가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교회 안에 종교 지도자들 중에 왜곡된 교훈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일어난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최대한 일정을 미뤄 에베소 교회에서 가르침을 베풀다가 어쩔 수 없이 일정 때문에 바다 건너 마게도냐 지방 곧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등이 있는 곳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을 때에, 자기는 떠나는 대신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에 남아 그 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까? 3절에 나온 대로 그들은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훈이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와 부활을 근간으로 하는 복음과 결이 다른 가르침을 말합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의 가르침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이라고 사도는 밝힙니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한다는 것은 약 기원전 2세기부터 시작된 그릇된 신앙 관습인데, 유대인들이 성경에 나오는 기이한 이야기들을 부풀려 만들고 또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신앙 선배들의 족보들을 가지고 수많은 전설들을 덧붙여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희년서가 그 대표적인 책인데, 창세기로부터 가나안 땅에 들어간 시기까지의 역사를 주석을 써서 기록한 책입니다. 이런 책들은 성경과 거리가 먼 이야기들을 짜깁기하고 그릇 풀어서 성경의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의 거짓 교사들은 이런 책들을 가지고 그릇된 해석을 하였고 알 필요도 없는 족보를 깊이 파서 끝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어 논점을 흐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믿고 신뢰하는 신앙의 동역자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겨 두어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으려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른 교훈과 거짓 교훈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다음 몇 가지 열매를 보면 분별할 수 있습니다. 4절 후반절로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먼저, 바른 교훈인가 거짓 교훈인가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가 아닌가를 보면 압니다.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이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경륜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오이코노미아로서 경영, 계획, 청지기직, 직분, 계획, 사명등의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을 가리킨다 할 것입니다. 그 거짓 교사들이 쓸데없이 신화를 만들어내고 끝없는 족보를 만들어 전설적이고 영웅적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 사역,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임하게 된 죄사함과 의로움과 성령의 은혜들에 대하여 관심이 흐려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성경의 가르침들이 흐릿해지고 사람들의 영웅담이 더 주안점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가고자 하시는 일들이 도리어 약화되고 맙니다. 그리고 도리어 사람들 사이에 서로 쓸데없이 의문스러운 점을 가지고 입씨름을 하는 변론만이 더욱 무성하게 피어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가르침의 열매는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구원 사역에 유익을 주는가 아닌가, 그것들이 쓸데없는 변론만 일으키는 것인가를 따지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진정한 교훈에 대하여 맹백한 기준을 5절에서 제시해주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참된 교사로부터 나오는 가르침의 최종 열매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도는 여기 네 가지의 말씀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먼저, 청결한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거기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갖다 주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가르침을 받을 때에 우리 마음에 정결하고 깨끗해지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많이 얻고 변론할 꺼리를 많이 찾아낼지라도 도리어 그 마음은 독선과 고집과 교만이 차오르면 이 사람은 잘못 성경을 읽은 것이요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자기의 마음의 더러움을 더욱 밝히 깨닫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나아가 죄를 씻으시는 어린 양의 피로써 자기 마음을 씻는 자만이 성경을 바르게 읽고 있는 자입니다.

또한 선한 양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양심은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의 도덕적 판단 보좌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간의 마음 속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판단하도록 하는 양심이 있습니다. 이 양심이 선해야 합니다. 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바로 이러한 양심이 선해지고 의로워지고 올곧아져서 자기 자신을 판단할 때에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악해져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시하면 그 사람은 양심이 화인맞은 자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며 온전한 복음의 교사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양심이 살아나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여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자기 마음을 항상 살펴서 비양심적인 모습들을 없애려고 늘 애쓰게 될 것입니다.

또한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께서 구원자로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꾸밈없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바른 교사들의 사역의 열매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견고해지는 것이 참된 사역의 열매입니다. 만약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의혹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거짓 교사요 잘못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른 교훈인가 거짓 교훈인가는 사랑의 열매를 맺어가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거늘

이 말씀대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그의 교훈대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풍성해지는 열매를 맺어갈 때에 그러한 교사는 참된 교사요 그의 가르침이 참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아무리 잘 안다 해도, 변론을 하는 상대방마다 다 굴복을 시킨다 해도, 그의 가르침을 듣는 자들에게서 이렇게 마음이 청결해지고 양심이 선해지고 믿음이 온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아름다운 사랑을 본받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는 실패한 사역자입니다. 신학 논쟁을 벌이고 자기의 주장을 확고하게 편다 할지라도 만약 사랑이 없는 신학자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의 경고대로 촛대를 옮겨지는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궁극적인 열매가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지고 거기서부터 우러나오는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늘 기억하고 이러한 귀한 열매를 우리의 내면과 삶에서 풍성히 맺어가기를 늘 힘쓰는 성도들이 됩시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진정한 교훈의 열매에 대하여 가르친 후에 참된 교사와 상반된 거짓 교사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거짓 교사들은 말쟁이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 되고자 합니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가르치는 자리를 탐합니다. 하지만 사실 자기가 말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가 성경과 상관없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으면서 자기만 알고 있는 그 대단한 이야기를 자랑하느라고 아무런 인격적, 신앙적 열매를 맺는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결과를 맺습니다.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14)

그들은 율법의 선생으로 자처하지만 율법의 목적과 율법의 한계,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에 대하여 무지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율법의 존재 의의와 목적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앞에서 거짓 교사들이 스스로를 율법의 선생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도는 먼저 율법은 선한 것임을 먼저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시내산과 과야 행진 가운데서 증거해주신 율법의 내용들은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 백성의 윤리와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에 대한 자세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 행해야 할 선민의 헌법입니다. 그래서 적법하게 그 율법을 쓴다면 그것은 공동체를 보호하고 개인들을 보호해주고 복을 주는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결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잘 지키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선하고 의로운 삶의 법도를 담은 율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2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7:12,13)

여기서 사도 바울은 율법 자체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선민의 삶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율법은 지극히 선합니다. 그런데 율법의 모든 규정을 사람이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도 남김없이 완벽하게 계속하여 지킬 자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용도는 그것 자체가 그 율법을 지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율법의 용도는 사람의 죄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사 자신이 할 수 없는 죄인임을 확실히 깨닫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1:9, 10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9절과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그렇습니다. 율법이란 따지고 보면 최소한의 것입니다. 율법의 요체는 십계명인데, 열 개의 계명들은 하나님에 관한 계명과 사람에 대한 계명 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율법은 악한 행하는 자들에게 경고와 심판을 말씀함으로써 죄를 심히 죄 되게 하여 돌이키게 하는 것이 율법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사람, 거룩한 사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이웃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율법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과 그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정신으로 충만한 사람은 율법이 필요 없습니다.

율법이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상을 섬기려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하여 한사코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우습게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멸시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율법이 무서운 심판을 준비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닥치는 하나님의 재앙을 체험적으로 알고 돌이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바뀌어지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듣지 않는 자에게 필요합니다.

또한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라고 하는 것은 부모를 심히 구타하는 자를 말합니다. 율법에서 이르기를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장수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셨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구타하는 자들이 있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 자는 구약 율법 신명기 21장에 보면, 그 부모가 동네 장로들에게 말하여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그를 성문에서 돌로 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부모 외에 살인하는 자도 여기 9절에서 나옵니다. 10절에서는 제 7계명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라고 하였으니, 그 당시에 로마 제국 곧 로마 성읍뿐 아니라 그리스 전역과 튀르키예 그리고 팔레스타인까지도 음풍이 널리 퍼졌고 동성연애가 널리 퍼졌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에게 율법은 분명하게 정죄하고 있으니, 비록 오늘날 그러한 성향을 가진 자들이 있다 하더라고 긍휼히 여기고 기도로 돕긴 해야 하지만, 그러한 성향의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구약 시대나 신약 복음 시대나 동일하게 죄악에 속한 행위임을 명백하게 말씀하고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당시 도둑질 중에 최고의 악질 도둑질을 하는 자를 사도는 인신매매를 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국이 점점 팽창하면서 돈을 많이 가진 로마의 귀족들이 그리스 풍류에 대한 호감 때문에, 그리스 예절이나 시나 노래 등을 잘하는 노예들을 고가로 사곤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엄청난 가격을 가진 노예들은 흔히 인신매매단의 표적이 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그런 악행을 저지른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종종 인신매매단이 있어서 어린아이들을 납치하고 장기 적출을 하려는 자들, 혹은 아기를 낳는 도구로 만들기 위하여 국제 납치를 자행하는 악당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에 해당하는 두 사람이 나옵니다.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가 그러한 자들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은 죄요 특별히 법정에서 거짓말로 증언하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모든 계명들은 인간에게 죄가 무엇인가 분명히 드러내 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죄가 확실하여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자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도록 엎드리게 하는 것이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자체가 비록 선하고 거룩하고 의롭지만 율법 자체는 선을 행하게 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진정 선을 행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사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의롭게 하시고 그에게 생명을 주시고 새 본성을 심어 주시고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시어 하나님의 율법을 능히 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이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율법 시대 뒤에 이 세상에 오시어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복음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5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을 갖게 해주는 힘입니다. 그것은 10절 하반절에 잠깐 나온 말씀에 보면, ‘바른 교훈입니다. 원문을 보면, ‘바른 교훈휘기아노라는 헬라어 뜻으로서 직역하면 건강하고 회복시키는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죄인으로 하여금 점점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만듭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점점 그 깊은 상처에서 치료받게 해줍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늘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이 복음을 듣고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자기를 스스로 안아주면서, 잘 살아왔다고 다독일 줄 알며, 늘 자기 자신만 바라보고 위축되던 사람이 이제는 변하여 다른 이들까지 격려하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주 예수를 믿은 사람은 그 사람의 인상이 달라집니다. 평안하고 기쁨이 있고 여유가 있습니다. 나눌 줄 알게 됩니다. 동료나 이웃을 기꺼이 축복해줄 줄 압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울어줄 줄 아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내면 깊은 곳이 치유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율법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복음의 교훈은 살리고 고치고 건강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그 죄를 이길 힘은 주지 못합니다. 죄를 더 심히 죄 되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엎드려 긍휼을 구하게 만드는 역할이 율법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바른 교훈, 회복시키는 살리는 교훈에 대하여 11절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함께 11절을 읽겠습니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사도는 스스로 율법 교사로 자처하는 자들이 가져온 에베소 교회의 폐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디모데를 남겨두어서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그들이 자랑하는 바 율법의 한계를 드러내줍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면서 자신을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도리어 말다툼과 끝없는 의혹의 늪으로 듣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맙니다.

그들은 율법의 선생이라고 말하지만 율법을 적법하게 쓰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본래 목적도 이해하지 못하여 율법을 지나치게 높이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사실 율법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자들을 경계하고자 세운 것입니다. 진정 사람을 살리는 참 교훈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우신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 복음 진리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율법 선생이 되어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주님처럼 섬기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죽이는 법이라고 한다면, 복음은 바른 교훈곧 건강하게 만드는 교훈입니다. 살리는 교훈입니다. 치유하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들은 자는 달라집니다. 죄를 점점 이겨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 건강한 교훈인 복음이 복스러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 자체가 지극히 큰 영광의 복음이라고 여기서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죄인들을 죄와 사탄의 자리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서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게 하는 것이니, 참으로 영광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영광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위탁해주셨노라고 지극히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로 임명받아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내려온 이 복음 진리는 이처럼 아름다운 마음의 열매를 맺는 교훈입니다. 사람의 내면이 청결해지고 선해지고 꾸밈이 없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율법이 필요 없게 되어갈 만큼 의롭고 선해집니다. 그리고 복음의 능력으로 사람이 깊은 내면에서부터 치유가 되어 건강해지게 되어 많은 이들을 살리게 됩니다. 더 나아가 복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도로부터 전해 받은 복음의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심히 귀한 줄 알고 다른 어떤 것과 바꾸지 맙시다. 거짓 교사들이 와서 우리를 흔들어놓을 때에 분별하여 그들의 열매를 잘 파악하여 물리칩시다. 세월이 가면서 복스러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통하여 지극히 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으며 우리 자신도 내면에 아름다움과 주님의 사랑이 충만해지기를 축원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