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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신약인물설교]베드로, 반석이라고 불리운 사도 3, 요한복음 21:15~19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15.12.23|조회수375 목록 댓글 0

[신약인물설교]베드로, 반석이라고 불리운 사도 3

요한복음 21:15~19

우리가 지난 주 수요일에 예수님께서 사도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었던 일까지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 날 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위하여 붙잡히기 직전의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기가 곧 붙잡혀 죽으실 것과 죽은 지 사흘 후에 다시 부활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 26:31)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앞다투어 말했습니다. 그 중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큰 소리로 장담하여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고백으로써 베드로는 다시 한번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자기의 충성됨과 헌신됨을 단호하게 표명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다른 제자들 앞에서 장담하던 베드로에게 그 얼굴을 심히 무색할 만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고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은 지극히 순수하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고, 자신이 예수님을 홀로 죽게 내버려두고 그를 부인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곧장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이렇게 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곁에서 이 말을 듣던 다른 제자들도 다들 이구동성으로 자기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덧붙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날 밤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그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피 땀 흘려 기도하실 때에 베드로는 쿨쿨 잠을 잤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자고 있는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일어나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밀려드는 잠을 이기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헤어나오질 못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기는 각오할 수 있지만, 그는 주님과 함께 한 시간 동안 기도하는 것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러 대제사장의 종들과 군사들과 함께 왔을 때에 순간적인 충동으로 칼을 꺼내어 대제사장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떨어뜨리는 용기는 내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포승줄로 묶여 끌려갈 때 제자들은 다들 도망치고 말았고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버려둔 채 달아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우리 주님을 향한 마음의 순수한 사랑은 있다 하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 신앙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를 자기 삶 속에 기꺼이 걸머지고 나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마음은 있다손치더라도 주님과 끝까지 함께 가기 위해서는 두려움, 외로움, 가난함, 멸시를 당함, 신체적인 위해도 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 북한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단지 성경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서 온갖 폭행과 배고픔과 멸시와 격리를 당하며 살아갑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다 함께 그러한 일을 당합니다. 그 강제수용소에서 그 신앙을 가진 한 절대 나올 수 없는 일을 겪습니다. 우리가 만일 저 북한에 살게 된다면 우리가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이렇게 신앙 생활하기 평안한 이 남한 땅에서 살면서, 생활 속에 좀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서 불평 원망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믿음이 식어지거나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열심히 식지 않도록 주의합시다.

그리고 마음의 순수한 결심과 의욕만 가지고는 주님과 끝까지 동행할 수 없음을 압시다. 신앙의 순례 길을 끝까지 완주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내적 힘이 있어야 함을 기억합시다. 이 힘은 내 자신의 결심과 노력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자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가까이 끝까지 따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미리 미리 기도로 무장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달려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늘의 능력으로 무장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날 밤 예수님이 잡혀가신 뒤를 멀찍이 따라가서 대제사장 집에 들어갔다가 그 집의 계집 종에 의하여 예수님과 한패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이어서 두 번에 걸쳐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그렇게 부인할 때에 안뜰에서 심문당하던 예수님이 그를 돌아보았습니다. 마주친 예수님의 눈빛을 보는 그 순간 새벽 닭이 울었고, 그 닭 울음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미리 하신 그 말씀을 기억나게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양심이 살아났고 그는 괴로워서 어두운 골목에 뛰쳐나가서 거기서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어두운 골목에서 슬피 울면서 자기 자신의 헛된 자만, 자기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예수님을 통하여 무엇인가 세상적인 것을 쟁취하려는 모든 세속적인 욕망 등이 박살이 나고 말았습니다. 자기는 그럴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너무나 못나고 겁쟁이요 위선자요 배신자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죄인 중의 괴수라는 점을 뼈저리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반석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셨지만, 도리어 자신은 모래 알갱이요 진흙덩이요 거름찌꺼이에 불과한 존재임을 철저히 자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베드로가 이렇게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 내려간 이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께서 그를 붙들어서 새롭게 빚어가시어 반석으로 재창조하시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베드로는 여전히 스스로 자신에 대한 과신과 자존심, 허영의 포로가 되어 주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무용지물로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처절한 실패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받는 시작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 후에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만지심이 이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첫날 새벽에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러 찾아간 갈릴리 여인들에게 청년의 모습을 한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해주었을 때 이렇게 말씀합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이르기를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6,7)

여기서 보면,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전하는 대상을 예수님의 제자들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베드로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 점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여전히 버리지 아니하셨음을 베드로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심히 낙심해 있었던 차에 이 소식을 듣고서 용기를 내어 요한과 함께 무덤에 달려가서 무덤 속까지 들어가 예수님의 시체는 여인들의 말처럼 사라지고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 옷과 머리를 감쌌던 수건이 그대로 놓인 것을 보고서 여인들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부활하신 날 어느 시점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개인적으로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 이하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해 들은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기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서 ‘게바’에게 보이셨다고 하였는데, ‘게바’는 시몬 베드로를 가리킨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날 예수님을 부인한 일로 인하여 부끄러움과 낙심 가운데 감히 예수님을 뵐 용기가 없는 베드로를 친히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어, 자기의 큰 죄를 고백하는 베드로를 용납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시는 은혜를 주신 줄 믿습니다. 스스로 철저하게 낮아지고 비천해진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 구멍난 손으로 어루만져주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고 안아주셨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시금 어느 정도 용기를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일은 그로 하여금 선뜻 사명의 길을 계속 갈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토록 나약한 자로서 어찌 사도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가 어찌 사도의 자격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회의와 부끄러움이 그의 양심을 때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 가버나움 근처 바닷가로 짐작되는 곳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고기 잡으러 나간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고 있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새벽까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을 때에, 예수님이 새벽 바닷가 기슭에 서서 그들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이에 그들이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요한이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 깨닫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

고 말하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서 벗었던 옷을 걸쳐입고 바다로 뛰어내려 헤엄쳐서 기슭으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을 그 위에 올려 구워 놓고 계시고 빵도 그 위에 따뜻하게 데워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잡은 생선도 좀 가져오라고 하시어 더 구워서 식사를 차려놓으시더니,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조반을 먹으라”

그리고 일일이 떡을 가져다가 그들 각자에게 손수 나눠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 발을 씻어주신 것과 같이 부활 후에도 섬기는 자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들은 섬기는 자로 살아갑시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여러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에 베드로가 여러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를 향하여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동일한 말씀을 두 번 더 반복하심으로써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금 사도의 직분을 회복시켜주시고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명예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넘어지는 것이나 세우는 것이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그의 손에 놓여있는 진흙덩이입니다. 토기장이이신 주님께서 그 원대로 우리를 빚어가시는 것이니 우리가 감히 그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느냐고 항의할 자 누구겠습니까? 그가 넘어진 자를 다시 일으켜 다시 이렇게 온전히 회복시키기로 작정하셨으니,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함으로 진흙탕 속에 쓰러진 베드로를 다시금 이렇게 일으켜 주시고 온전히 견고한 반석으로 세워가시는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동일한 일을 행하시기에 능하신 줄 믿습니다. 이는 일을 행하시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주도권이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그 후에 베드로는 참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사도의 길을 걸어갑니다. 승천 후에 베드로는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을 팔아넘겼던 배신자 가룟 유다 대신에 한 사도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서 제비뽑도록 이끌어 맛디아를 사도단에 세우는 일에 주도적인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가다락방에서 간절히 성령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던 중에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밖에 나가 오순절 명절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설교하였습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2,33,36)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서 세례를 받고 신도가 된 사람이 그 날에 삼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실 때에 “네가 이제부터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하신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 후에 베드로는 사도 요한과 함께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서 선천성 앉은뱅이 걸인이 앉아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주목한 후에,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고 명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놀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을 때 유명한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행 3:12,13)

베드로는 이제 모든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오직 자기의 구주이신 예수님께 향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고 그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심을 역설하였습니다. 그 날 설교로 또한 5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에, 반대하는 제사장들의 무리가 사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다음날 산헤드린 공회를 열고 제자들을 위협하며 심문할 때에 담대히 그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1,12)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산헤드린 공회의 위협을 듣고서도 담대하게 대답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계집 종 앞에서 그토록 무서워 벌벌 떨던 베드로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의 심장은 사자처럼 튼튼하고 담대해져서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을 도리어 영광으로 아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신뢰 주심,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겁쟁이 시몬을 배신자 시몬을 순교도 겁내지 않는 반석으로 바꾼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 후 베드로는 사도 요한과 야고보 등과 상의를 하고,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초대 감독 자리도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 야고보에게 넘겨주고 오직 복음 전도에 힘을 다하였습니다. 늘 제자들끼리 “우리 중에 누가 제일 크냐?”라고 서로 다투고 더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예수님께 청탁을 넣었던 제자들은 이제 이렇게 서로 양보하며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겸손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가 베드로의 허물을 인하여 안디옥 교회 모든 사람들 앞에서 직접 책망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고 도리어 그를 공개적으로 잘못을 책망한 사도 바울을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 베드로후서 마지막에 보면, 사도 바울이 쓴 편지가 신적 권위를 가진 것 곧 성령의 감동으로 쓴 것으로 인정할 정도로 바울을 사랑하고 추천해주는 넓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베드로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겸손해지고 복음을 위하여 목숨까지 기꺼이 내놓는 담대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어간 것입니다.

베드로는 복음 전도자로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중풍병자도 일으키고 죽은 자도 살리고 그의 그림자만 덮여도 사람들의 악귀가 떠나고 병이 낫는 기적의 사람으로 쓰임받았으며, 그는 이방 지역 선교를 위하여 고린도를 거쳐서 저 멀리 로마까지 가서 거의 10년 넘게 로마 복음화를 위하여 열심히 일했음을 보게 됩니다. 그 결과 사도 바울과 더불어 로마 제국 전체의 복음화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끝내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 예고한 대로 그의 최후를 마쳤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띄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너는 나를 따르라”(요 21:18,22)

이 말씀대로 그는 젊은 시절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기 중심의 피 끓는 열정의 사람이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그는 팔을 벌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대로 기꺼이 자기를 내어맡기는 순복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네로 황제 때에 기독교 박해의 절정기에 기꺼이 자기를 복음의 원수의 손에 내 맡기고 순교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으니까 그나마 칼로 참수를 당했지만, 그는 유대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더 흉하고 고통스러운 십자가 형벌을 당했습니다. 전설로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베드로는 “나는 주와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힐 값어치가 없으므로 제발 십자가를 거꾸로 세워 머리가 밑으로 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라고 간청했다고 합니다. 그는 영광스럽게 하늘의 부르심을 받아 순교로써 자기의 사명의 길을 영광스럽게 마무리했습니다. 주님의 맡긴 사도의 사명을 온전히 잘 감당하고 마침내 승리자로 사랑하는 예수님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모래덩어리 같았던 사람, 진흙덩어리처럼 연약함이 섞여 있었던 사람이었던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신실한 사랑과 용서, 믿어주며 기다려준 사랑, 성령의 도우심과 빚어가심을 따라 여러 시험과 연단 속에서 점점 연단되어 그 속에 찌끼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온전히 순수한 반석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이 부족한 것이 너무 많이 섞여 있는 사람이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보석처럼, 금강석처럼 보시고 기대하고 기다리시며 우리들을 붙잡아 이끌어가시며 지금도 연단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자신만을 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주님의 신실하신 사랑, 믿어주시고 용서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그 사랑의 손을 끝까지 붙잡고 우리의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갑시다. 지금보다 더욱 온전해진 모습으로 주님 앞에 점점 더 서게 될 모습을 그려보면서 날마다 믿음으로 동행하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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