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인물설교]예수께서 사랑한 제자 사도 요한
요한복음 13: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1.서론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약의 인물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 열두 제자 중에서도 자주 예수님과 가까이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려고 그 집 방에 들어갈 때 동행했던 세 제자 중 하나이며, 높은 산에 올라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변화되었을 때 동행했던 세 제자 중 하나이며,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가까이 있으면서 기도하라고 부탁을 받았던 세 제자 중 하나가 바로 이 사도 요한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상황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요한은 사도 베드로와 동행하면서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를 고쳤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받을 때에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고 선포했던 담대한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훗날 갈라디아서를 쓸 때에, 주님의 육신의 형제 야고보와 베드로와 더불어 교회의 기둥으로 여긴 사람 중 하나로 평가한 분이 바로 사도 요한이었습니다(갈 2:9). 다른 사도들은 다 순교했지만, 유일하게 주후 100년 가까이 오랫동안 살면서 초대 교회가 로마 제국 안에 정착하도록 돕고 지켜보았던 분이 바로 이 사도 요한입니다.
사도 요한이 써서 남긴 성경 책은 네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이 있고, 교회들에게 써보내거나 개인에게 써보낸 서신서인 요한일이삼서가 있고, 또 한 가지는 전혀 다른 문학 장르로 기록된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2. 인적 사항
사도 요한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사랑하신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이름 뜻대로, 요한복음에 보면 자기 이름 요한 대신에 항상 “그가 사랑하시는 자”라거나,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말로 자기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표현 속에 이미 요한이라는 이름의 속 뜻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는 세배대의 아들인데, 그 형제로서 야고보가 있습니다. 야보고도 주님의 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시대에 최초로 순교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복음서를 비교해보면, 요한의 어머니 이름은 살로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이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과 인간적인 혈통으로만 보면, 이종 사촌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에도 양가에 왕래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의 가정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에, 그 아버지 세베대와 품꾼들이 배에 함께 있었던 것을 보면 가난한 가정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아가 그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가문과 면식이 있어서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 밤에 무사히 그 집 대문을 지키는 여종에게 말하여 베드로까지 안으로 들여오게 할 정도니까, 제사장 가문과도 인척 관계나 아버지의 사업 관계가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3.사도 요한의 행적
마가복음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아버지와 형 야고보와 여러 품꾼과 함께 그물을 깁고 있는데, 예수님이 불러주셔서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물을 깁고 있는데 불러주신 것은 사도 요한의 사역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물은 복음과 교회를 상징합니다. 베드로가 그물을 던지는 중에 부르심을 받았기에 영혼들에게 복음의 그물을 던져 세상 바다에서 건져올리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했다면, 사도 요한은 그물의 찢어지고 구멍난 데를 수선하는 중에 부르심을 받았기에 교회를 지키고 가꾸고 새롭게 하고 격려하는 교회 파수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도들이 다 순교한 후에도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남아 있는 교회들을 직접 본인이 다니기도 하고, 자신이 선별한 순회 전도단을 보내어서 교회들에게 주님의 교훈과 행적을 가르쳐서 교회들이 든든히 서게 하는 일을 하였던 것이 마치 그물을 깁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4. 그렇다면 성경과 초대 교회 여러 교회 역사서를 통하여 사도 요한을 평가한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입니까?
1)사도 요한은 성격이 많이 바뀐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완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3: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듯이,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해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은 칭찬은 아닙니다. 워낙 성격이 급하고 불 같은 화도 많이 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사도 요한이 목격했습니다. 그는 득달같이 나서서 그 사람에게 강경하게 항의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말도록 막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요한은 자기 행동이 정당하다고 확신하고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하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 9:39)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편협성을 지적한 것입니다. 요한의 행동은 마치 여호수아가 그의 주군으로 섬기던 모세를 돕기 위하여 70인 장로를 세웠을 때, 그 모임에 나오지 않았던 엘닷과 메닷 두 사람이 자기의 장막에서 예언하는 것이 보고되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정색한 얼굴로 “내 주 모세여, 말리소서.”라고 청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여호수아의 편협한 태도에 대하여 책망하여 말하기를, “네가 나를 두고(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근본적인 교리에 문제가 있는 이단과 사이비를 배척하는 것이야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교파만 옳다고, 자기 교회만 옳다고 주장하는 편협한 마음은 옹졸한 것입니다. 파벌적인 경쟁심을 가지고 다른 교파를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 외에도 요한은 성격이 아주 불같은 점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자 할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자, 제자 중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일치하여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으시자, 앞서 가시던 예수님께서 돌아보시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다른 사본에서는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요한 형제에게 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눅 9:55 난하주)
한마디로 예수님은 요한의 적개심, 복수심, 그의 불같은 분노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요한의 약점을 들자면, 요한이 공명심이 컸습니다. 자기 명예심이 컸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은 예루살렘으로 예수님께서 죽으러 올라가시는 중인데, 예수님 앞에 자기 어머니 살로메까지 동원하여 “주의 영광 중에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6)고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는 고난의 쓴 잔, 피 흘려 죽는 순교의 세례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훗날 이 예언대로 야고보가 사도 중에 가장 첫 번째로 순교하는 자가 되었고, 요한도 훗날 도미티안 황제 핍박 때에 밧모 섬에 가서 귀양살이하는 고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한의 야망은 세속적인 야망이었기 때문에, 똑 같은 세상적인 권세욕과 사람들의 영광을 추구하던 다른 제자들이 요한과 야고보에게 시기 질투하며 분노했습니다. 이런 면을 볼진대, 요한도 세상적인 야망을 가졌던 다듬어지지 않는 젊은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요한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의 분노심, 그의 편협성, 그의 야심 등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온유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요한일서를 쓸 당시는 이미 나이가 많았을 때인데, 그 서신서는 온통 사랑과 평화와 온유함에 대한 권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가 쓴 복음서에 보면, 자기 이름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는 자기 이름을 숨기고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드높이기 원했던 과거의 삶에서 부드러운 사람이자, 자기 이름을 전혀 밝히지 않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레의 아들 보아너게가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 이름 중에서 사도의 이름을 딴 이름이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이름이 요한입니다. 저의 천주교 이름도 요한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이름의 주인공 요한은 과거의 성급하고 불같은 성질을 가지고 남보다 앞서려고 하고 자기가 더 영광을 차지하려고 덤벼들던 초년 모습을 완전히 버리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귀한 인품의 사람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요한처럼 세월이 갈수록 겸손과 온유, 자기가 철저히 죽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 대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한복음 13:23)
사도 요한은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종종 보면서 성장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의 자매 살로메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은 친척 집인 갈릴리 나사렛 이모 집에도 놀러가기도 하고, 명절 때는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나이 어린 요한을 사랑스럽게 보시고 아끼셨음이 분명합니다. 요한은 이후 주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이후에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 어린 막내로서 그런 예수님을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고 진정으로 사랑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예수님 곁에 더 가까이 흉허물 없이 다가갈 수 있었고 예수님을 위한 사랑도 특별하게 느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식사할 때에도 요한은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예수님의 옆자리를 늘 차지하고 그 곁에서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사할 때에 몸을 옆으로 길게 누워서 식사를 하는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품에 몸을 기댄 채 식사를 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은 예수님이 체포되던 그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른 제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을 치고 말았지만, 요한은 달아나다가 용기를 내어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 끌려가는 예수님의 뒤를 밟았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 안나스의 집에 예수님이 결박된 채 끌려 들어가자, 마침 요한의 집안이 그 대제사장 집과 왕래가 있어서 대문에서 아는 사람을 통하여 그 집에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 문밖에 베드로가 멀찌감치 요한의 뒤를 따라 왔다가 그 집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요한이 베드로가 따라온 것을 알고 다시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때 그 아는 여자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나는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 바깥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후에 밖으로 도로 나가 통곡을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요한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뒤따라가면서 예수님이 겪으신 일을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한은 예수님이 겪으시는 일들에 대하여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 명절에 올라온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도 소식을 알려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밤새껏 불법 재판을 당하여 유대인 대제사장의 무리들과 헤롯 안디바와 로마 총독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처참하게 채찍질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을 때 그 현장에서 모든 것을 목격하였으니, 이는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도저히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 십자가 위에 못박혀 매달렸을 때에 6시간 동안 그 곁에서 갈릴리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곁에 남아 있던 유일한 남자 제자가 요한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그 곁에 남아 함께 고락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의 사랑은 진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품에 누워 그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복된 특권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자기 모친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서 자기 아들의 고통을 지켜보면서 거의 혼절할 만큼 고통과 슬픔을 겪는 중에 있을 때 그 모친을 위로해주고자 하실 때에 불러서 부탁하는 특권을 사도 요한이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19:25 이하에 기록되기를,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모친 마리아와 또 이모 곧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있는 중에 마리아에게 자기 대신에 마리아를 위로하며 봉양할 사람으로 제자 요한을 지목하여 알려줍니다. 요한에게도 자기 대신에 상심하고 힘들어할 모친 마리아를 잘 돌보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이는 그만큼 요한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그토록 부탁을 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터키 남서부에 있는 고대 에베소 도시에 가면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던 집이 성지로 보존되어 성지관광코스가 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십자가 위에서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끝까지 지켰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요한이 고난 중에 계신 예수님 가까이 밀착하여 그 곁에 머물렀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다른 복음서가 기록하지 않은 말들까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이러한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선포하신 말씀들을 다른 복음서가 놓치고 있는데, 요한만이 그것을 네 번째 복음서를 기록할 때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러한 말씀들도 요한복음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사랑은 그의 노년까지 죽 이어집니다. 그의 노년에 로마에 아주 악한 황제가 등극하는데, 곧 도미티안 황제입니다. 그 동안에는 보통 황제가 죽은 뒤에 신으로 백성들에게 추앙하도록 했는데, 도미티안 황제는 자기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백성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자로서 살아 있는 사람을 신으로 경배하도록 요구하는 도미티안 황제 치하의 로마 권력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일제 말기에 신궁 숭배를 강요하면서 일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강요에 맞서 거부했다가 도미티안 황제에 의하여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서 위대한 계시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입니다.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도 요한에게 예수님은 특별한 계시와 환상으로 인류 역사 속에 교회와 성도들이 믿음을 견고하게 지켜나갈 때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과 그 나라가 참으로 영원하고 영광스러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고난과 핍박이 극심하겠지만 믿음으로 인내하며 소망 중에 거하면 반드시 세상 나라를 다 이기고 마귀의 세력을 다 멸하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 성이 도래하고 주의 진실한 백성들이 영원히 왕노릇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을 명백히 보여준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 중에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복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이름과 삶처럼 우리들도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던지, 주님을 진정 변함없이 사랑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3)요한은 예수님을 가장 잘 알며,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전하는 일에 크나큰 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다른 세 가지 복음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과 달리 예수님을 전하는 데 있어서 특별한 점을 보여줍니다. 다른 세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의 외적인 면들을 차례대로 잘 드러내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의 내적인 면들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도 7가지만 기록하였고 주로 그러한 기적들도 내적인 영적 교훈들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의 내용은 고도의 영적이고 철학적 교훈들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 등은 단지 문자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쓴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여러 모양으로 영적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다. 예수님은 참된 양식이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다. 선한 목자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라”
이러한 말씀들은 단순하지만 힘이 있는 선포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하여 다른 복음서와 달리 사도 요한은 처음부터 명백하게 증거하며 곳곳에 그러한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18)
또한 예수님이 신성의 한 속성인 만세전에 계시는 선재성도 이렇게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가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돌로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요 8:56~58)
제자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또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바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8~9)
이러한 모든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점, 하나님 아버지 품속에 계시다가 나타나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사람 중에 뛰어나신 분으로서 사람 중에서 택함을 입은 자라고만 생각하기 쉬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만세 전부터 계신 하나님으로서 계시다가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증거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사도 요한이 쓴 요한복음의 공로가 크고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참으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잘 알았고 그를 증거하는 데 열심을 내었던 목회자이자 신학자였습니다.
4)사도 요한은 진리의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이단과 단호하게 맞서 싸운 사람입니다.
사도 요한이 복음서와 요한서신들 곧 요한일이삼서를 쓸 당시는 교회들이 여기 저기 많이 서 있었는데, 그 때 교회들에 영지주의 이단이 서서히 들어올 때였습니다. 영지주의 이단이란 그리스 철학의 바탕을 둔 이단으로서, 육신은 아주 악하고 부패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신의 세계인 이데아와 타락한 인간의 세계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세계로서, 인간의 구주로 오신 구세주가 타락하고 악한 사람의 몸을 입으신다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다는 것은 사람이 아니고 그의 십자가를 진 구레네 시몬이라고 보기도 하고,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에 그 영이 이미 몸을 떠나셨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는 사람들이 영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구원받는다고 보았는데 고도의 영적 지식을 얻는 자는 타락한 몸이 아무렇게나 죄를 범해도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지금의 구원파와 같이 한번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죄를 범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애초에 타락한 육체가 범하는 것일뿐, 영혼은 아무런 더러움을 입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영지주의 이단이 교회에 들어와서 활개를 치면 교회는 복음의 진리도 크게 훼손을 당하고, 신자의 신앙 생활도 죄의 유혹으로 인하여 크게 부패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진실한 인격과 선한 양심과 순수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겨야 할 신앙 공동체가 그 시기에 영지주의 이단에 의하여 크게 흔들리고 혼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 등의 편지를 써서 교회에 영지주의 이단의 잘못을 확실하게 드러내고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요 동시에 그는 분명히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사람으로서 죽으신 분이시라는 점을 명명백백하게 자세히 증거한 것입니다.
이 기록을 한 지는 주후 70년 경이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다 썼을 때인데, 새로 쓴 목적은 그 당시에 영지주의적 이단이 판을 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영이시오 사람으로 죽지 아니하셨다고 보는 이단입니다.
요한복음을 쓸 때에도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고난을 자세히 썼는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옆구리에 찔린 창으로 물과 피를 흘렸다고 기록하면서 그는 이렇게 첨부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요 19:35)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자는 예수님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히 죽으셨지, 죽기 이전에 그 영혼만이 먼저 하늘로 떠난 것이 아니라는 거입니다. 영지주의 이단의 주장을 반박하는 뜻으로 이렇게 쓴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참 사람으로 세상에 나타났음이 분명함을 알리려고 쓴 요한일서 서두에도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을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1~3)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존재인 사람으로 오신 분이지, 구세주가 더러운 육체의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실 수 없다는 영지주의 주장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처음부터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사도 요한은 믿음의 형제들에게 심히 온유하며 사랑하라고 강조하면서, 이단에게는 매우 단호하게 선을 긋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이서 7절 이하에 보면, 이단과 사이비에 대하여 이렇게 단호하게 대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 그리스도니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요이 7~11)
사도 요한이 이단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졌는지 그에 얽힌 한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요한이 에베소의 한 공중목욕탕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안에 영지주의의 괴수 격인 게린투스(Cerinthus)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이 그 게린투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목욕탕을 튀어나오면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우리 모두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진리를 거스리는 저 원수, 게린투스 때문에 이 집이 무너질지 모르오.”
예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 형제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도 요한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기에 동시에 진리를 더럽히고 왜곡하는 이단 사이비에 대하여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도 요한의 경고와 태도에 대하여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중에 누가 사도 요한보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예수님을 더 깊이 사랑합니까? 그렇게 예수님을 더 잘 아는 사람, 더 깊이 아는 사람, 철학적, 영적 깊이를 가진 분도 이단과 사이비를 가까이 만나고 교제하는 것을 저토록 본능적으로 싫어하였거늘, 우리가 조심없이 이단과 사이비를 집에 모셔들이고 함께 어울려 토론하고 주고 받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요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자라도 이단과 사이비에 대하여 냉철할 분별력을 가지고 대했던 것은 진리를 그만큼 사랑하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의 이 근본적인 태도를 우리도 견지하여 이 시대의 여러 이단들,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 등에 대하여 처음부터 단호하게 멀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5)사도 요한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목회적 수고를 다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사도들이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부분 순교한 뒤에 교회들을 위하여 마지막 남은 사도로서 주님의 행적을 전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정성들여 보살폈습니다. 그런 중에 요한삼서에 보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 성도들은 사도 요한이 칭찬하며 축복하였습니다. 한 지역 교회의 장로였던 가이오에게 편지하기를,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가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노라”(요삼 1~4)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칭찬과 달리 어느 지역교회의 지도자에 대하여는 매우 엄격하게 책망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9~11)
여기서 보면 디오드레베라는 지역교회 지도자가 연로한 사도 요한이 보낸 순회 전도대를 영접하지 않고 교회에서 내쫓은 일이 발생한 것을 보게 됩니다. 벌써 초대 교회에도 이렇듯 지역화, 토착화되면서 교권이 변질되고 타락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된 모습을 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고 징계하겠다고 선포합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초대 교회 사도들의 순교 후에 남은 교회들을 위하여 남은 생애 최선을 다하여 순수한 신앙과 사랑을 유지하게 하려고 몸부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물을 깁을 때 주님께 부름받아서 그는 사도들이 세우고 떠난 영혼을 낚는 그물인 교회의 찢어지고 구멍 난곳을 수선하는 사명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6)사도 요한은 사랑을 강조한 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할 것을 수없이 강조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7~8)
요한복음 13:34,35 말씀에서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을 이렇게 명백하게 기록하여 남겼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의 마지막 말년의 설교도 주로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도 “형제여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많이 하시자, 한 제자가 곁에 있다가 묻기를 “왜 그 말씀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까?”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주의 명령입니다. 주의 명령만을 실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을 통하여 강조된 주의 명령인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일에 더욱 힘씁시다.
7)사도 요한은 교회의 최후 영광과 성도의 믿음의 전진을 위하여 격려했습니다.
그가 귀향살이하던 밧모 섬에서 받은 부활의 주심의 계시인 요한계시록은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계시록의 내용은 교회는 핍박을 받지만 승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왕중 왕이시기에, 그를 믿는 참 교회와 성도는 지극히 큰 영광 중에 거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과 시련 중에 끝내 인내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세가 갈수록 세상과 마귀는 교회를 핍박하고 시험하여 안으로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험과 핍박 중에 변질되거나 세상에 타협하거나 압력에 굴복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요한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들도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그러할진대 사도 요한이 본바 크고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영광 새 땅 새 하늘 새 예루살렘 성에 영원히 거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2,13)
5.결론
사도 요한은 그의 천수를 누리고 그가 그리던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우리들도 그를 통하여 드러낸 계시와 교훈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끝까지 믿음으로 승리합시다. 우리 성격에 비록 보아너게처럼 불덩이 같은 거친 성격일지라도 사도 요한처럼 점점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도 사도 요한처럼 주님 심장의 박동소리를 가까이 들으며 동행할 수 있도록 주님을 뜨겁게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그의 진리를 깊이 사랑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에 전심전력합시다. 또한 이단과 사이비에 대하여 철저하게 깨어 경계하는 성도가 됩시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 부르심받은 사명을 따라 최선을 다합시다. 그의 당부처럼 주안에서 형제를 뜨겁게 피차 사랑합시다. 핍박과 시련을 당하지만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본 바 교회의 최후 승리를 믿고 교회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싸웁시다. 그리하여 사도 요한처럼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승리자로 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