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회개가 거짓 순종보다 낫다
마 21:23~32
예수님께서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중에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 무리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 때 그들의 항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같은 당시의 종교 권력자들의 기준에서 보면 전혀 종교적 권위 근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사렛 변방 출신이요 목수의 아들이요 랍비 교육을 전혀 받지 아니한 종교적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앞에서 종교적 교훈을 가르치며 당시의 기존 종교 권위를 질책하며 이적을 나타내면서 대중적인 인기몰이를 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으키신 사사나 선지자들을 보면, 전혀 뜻밖의 사람들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사 에훗, 드보라, 입다, 기드온 등을 보면 사회적 음지에 속하였던 사람들입니다. 훌륭한 가문 출신이거나 객관적으로 존경할 만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여 그 시대를 이끌어가도록 하셨습니다. 선지자들도 뽕나무를 치는 일개 농부거나 양을 치는 목자인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지자들은 종교 기득권자들이 반발하며 대적해서 죽이곤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고 고치시고 가르치시는 방식에 대하여 항의를 하고 거부하고 오히려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행한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거부하는 부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우리를 향한 책망, 가르침, 교훈들을 향하여 거부하는 마음, 기분나빠 비난하는 마음, 고집을 피우면서 싫어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거나 책망하실 때 교회의 주의 종의 가르치는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성령의 내적 음성으로 깨우쳐주시기도 합니다. 또한 어린아이의 입술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고, 사소한 일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이 모든 가르침에 대하여 주의깊게 귀를 기울여서 항상 순종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수님을 거부하던 종교 권력자들에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왔을 때에 그의 책망과 교훈을 거부했던 것을 책망하시면서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그들의 종교적 오만과 심판에 대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입술로 순종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행하지 않았고 둘째 아들은 입술로는 안 간다고 했지만 뒤늦게 뉘우치고 포도원에 들어가 일한 이야기를 들면서 그들에게 뒤늦게라도 순종한 자가 입술로만 거짓 순종한 자보다 낫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세리와 창녀들이 둘째 아들처럼 뒤늦었지만 진실로 회개한 자로서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오히려 말만 화려하였지만 회개치 아니한 자로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행함 없는 믿음의 위험을 경고한 것입니다. 입술로는 순종할지라도 그 고백처럼 진실로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갖춘 신앙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중한다고 하였지만 실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바리새인들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렇게 위선적인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자기들은 신앙 생활 잘 하는 것으로 속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세리와 창기들은 지옥에 떨어질 자요 자기들은 당연히 천국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단단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교만은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자신의 진정한 죄인됨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 회개할 줄도 모르는 위험을 자초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스스로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등 일꾼으로 자처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당시에 세리와 창기들이 자기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하고 옛 생활을 청산하고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고 천국 백성이 되었던 것과 깊이 대조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 가운데 그러한 예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 다니니까 스스로 구원받은 자라는 착각을 하면서 실상은 하나님과 진정한 만남이 없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큰 죄는 깨닫지 않으면서 남의 죄를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자기의 죄를 씻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탕자가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의 탕자는 더 위험한 까닭은 자신이 잃어버려진 자, 탕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는 점입니다. 교회 안의 탕자의 특징은 교만입니다. 위선입니다. 영적인 냉담함, 무감각함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없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책망을 싫어합니다. 회개가 없습니다. 뜨거운 헌신을 하는 참 성도를 만나면 싫어합니다. 교회의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고 찬 물을 끼얹습니다. 교회 안에 바리새인들이 많아지면 그 교회의 참된 영성은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이 시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 가지 더 생각을 해본다면, 주님의 비유 말씀 중에서 둘째 아들이 포도원에 뒤늦게라도 들어가 일한다고 하는 점을 높이 샀다는 점입니다. 이 가르침은 회개가 아무리 늦을지라도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점입니다. 뒤늦은 회개, 뒤늦은 순종, 뒤늦은 믿음과 헌신일지라도 그것이 진실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기뻐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에 세리와 창기가 한 때 지극히 악한 행실을 범했지만, 회개하여 돌아오자 기꺼이 용서해주고 받아주시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아무리 큰 죄라도 회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오랜 죄인이었더라도 회개하기에 늦은 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늦을지라도 진실한 회개가 진실 없는 위선과 교만한 거짓 신앙보다 백번 천번 나은 것입니다. 늦은 회개가 거짓 순종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교회 문턱만 넘나드는 종교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돌이킨 자, 마음으로 온전히 돌아선 자, 행위로 그 회개를 입증하는 참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진실로 회개하여 버리면 주님은 다 용납해주십니다. 우리 교회 안에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인들이 하나도 없고, 진실로 회개한 자로 주님 앞에 모두가 서기를 소원합니다.
기도:주여, 과연 주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민감한지 점검해봅니다. 완고한 바리새인처럼 주님의 가르침과 책망을 듣지 않으려 하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늦을지라도 기꺼이 회개하는 용기를 주옵소서. 겉만 번드르한 종교인이 되어 성령을 거슬러 행하는 악한 자가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게 하옵소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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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킴이[박종욱] 작성시간 12.02.09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자 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주님이 아니 내가 있기에 더욱 힘든것 같습니다.
매 순간순간 돌아보며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강명호 목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2.09 주님 뜻대로 살려는 몸부림, 실패의 고민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거듭난 증거요 성숙해가는 증거인 것 같습니다. 부족하지만 늘 다시 도전하는 노력을 평생하겠지요. 집사님의 진보를 주님께서 후원해주고 계십니다. 평안한 저녁 되세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