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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단상

내 원대로 마옵시고 , 마태복음 26:36~46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14.08.11|조회수485 목록 댓글 0

내 원대로 마옵시고

마태복음 26:36~46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드리신 기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 올라 십자가를 대신 피 흘려 죽으시는 구속 사건을 감당하시기 전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말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다시 한 시간 후에 다시 엎드려 기도한 기도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또 다시 잠시 일어나 제자들에게 갔다 오신 후에 다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고 오늘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겟세마네의 예수님의 기도의 신비는 그 깊이를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기도가 지향하는 방향은 어느 정도 우리가 짐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를 부정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뜻과 바람을 내려놓고서 하나님 아버지의 바람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간절하였는지, 누가복음 22:44 말씀에 증거하기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고 하였습니다. 너무 간절하고 긴장하면 피부의 말초신경이 자극을 받고 실핏줄이 터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으면 피부가 터져 땀에 피가 섞일 정도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도한 기도 내용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바람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최고봉, 신앙의 최고봉은 자기의 바람과 행복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바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20세기에 숱하게 듣고 있는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가 복을 받고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잘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아끼고 자기를 최대한 존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최대한 드러내고 자랑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심리학이 가르쳐주고 있는 메시지인데, 복음을 가르치고 있는 기독교 세계 속에서도 이러한 말들을 참 많이 듣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해지고 복을 받고 이 세상에서 잘 살고 행복해진다는 것을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약속 중에 이러한 말씀의 면도 있는 것이 일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복음의 근본 핵심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더 성숙하고 더 온전하고 더 근본적인 신앙의 자리, 최고의 신앙의 자리는 겟세마네의 자리에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골고다의 언덕에 매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그 자리에 내 자아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기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때로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더해주기보다는 고난과 불행을 경험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6장 1절과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마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에스겔서 24장 15~18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가 늘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아 늘 사랑스럽게 보던 그 아내를 아침에 멀쩡했는데 저녁에 데려가버리셨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지 9년째에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의 아내를 치시고 세상에서 데려가셨으니 에스겔 선지자는 오랫동안 홀로 이 땅을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에게는 세상의 행복과 만족을 주시기는커녕 고생과 외로움과 불행을 더해주신 분과 같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스러운 일들을 허락하셨을까요? 인간에게 뿌리 깊은 자기애, 자기 행복을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시하는 것 이상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앙의 더 크고 더 높고 더 온전한 상급과 행복과 만족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적인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보존 본능입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깊은 신앙과 경지에 이르는 것에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지속적으로, 가장 치열하게 거부하는 것이 자기 사랑, 자기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자기애의 끈질긴 본능과 싸워 극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그토록 세 번씩이나 피땀 흘려 기도로 씨름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행복과 만족보다 더 우선순위로 놓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주님이 부르신 사명의 길에서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 십자가의 숭고한 책임을 짊어지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내 행복과 내 만족에 손해가 생기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버리고 말게 됩니다. 부자 청년도 천국의 입구까지 왔지만 자기 부인의 요청 앞에서 망설이다가 뒤로 물러가버리지 않았습니까? 데마 역시 결국 바울의 위대한 동역자의 아름다운 자리에서 물러가 세상으로 돌아가버리고 말았지 않습니까? 근본적으로 내 행복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높이 가치를 매기는 자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그 이름보다 내 이름, 내 명예, 내 기분, 내 자존심을 더 높이 생각하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본위로 돌아가서 자기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사정없이 팽겨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새벽에 우리의 신앙의 자리를 좀더 깊은 자리로 내려가도록 구합시다. 나의 행복보다, 정녕 하나님의 영광을 더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단의 다짐을 하도록 은혜를 구합시다. 정녕 주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내게 너무 귀하고 소중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자기 부인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합시다.

우리의 신앙이 세월이 갈수록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점을 머리로만이 아니라, 내 가슴으로 인정하고, 내 삶 속에서 행함 속에서 실천적으로 증거해가는 성숙한 신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아바 아버지여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하나이다.”

하나님, 겟세마네의 자리에 주님께서 엎드려 눈물로 피땀흘려 기도하는 그 기돗말을 생각해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 정녕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어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하여, 그 어떤 대가도 기꺼이 치를 수 있는 자기를 부인하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가도록 성령으로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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