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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단상

안일함, 잠언 1:32,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14.10.01|조회수422 목록 댓글 0

안일함

잠언 1:32,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안일함은 부족함이 없는 번영을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평화롭고 안전할 때 가장 무서운 파멸이 잉태한다는 것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안일함은 영적인 둔감함, 정신적 방심, 생활의 무질서를 초래하는 매우 위험한 악입니다. 이것은 잘 감지하지 못하는 전염병처럼 전혀 의식하지 않는 중에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에 더 무섭습니다. 이 안일함이라는 단어는 에스겔서 16:49 말씀에 소돔과 고모라의 죄였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안일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소돔은 태평함에 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순식간에 롯 가족 외에 한 사람이 피하지 못한 채 하룻밤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파멸의 때가 온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체 안일함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또 이사야 32장 9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다른 단어들이 유다 왕국 후반기에 유다의 여인들에게 경고의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너희 안일한 여인들아 일어나 내 목소리를 들을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딸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 염려없는 여자들아 일년 남짓 지나면 너희가 당황하리니 포도 수확이 없으며 열매 거두는 일이 이르지 않을 것임이라 너희 안일한 여자들아 떨지어다 너희 염려 없는 자들아 당황할지어다 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베로 허리를 동일지어다”

곧 닥칠 유다의 국가적 환난과 시련을 전혀 염려하지 않고 안일하게 물질적 풍요 속에 안심하고 있는 유다 여인들에게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지금 베로 허리를 동이고 금식하며 떨며 기도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거대한 환난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 채 하루 하루 태평함 속에서 안일함에 빠진 당시의 유다 부녀들에 대한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인 잠언 1:31 말씀에,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라고 지혜자가 우리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안일함의 늪에 빠지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요?

첫째, 진정한 목표 의식을 가질 때 안일함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우리 삶의 목표에 대하여 분명한 의식이 흐릿해질 때 안일함이 찾아옵니다. 지상적이고 단기적이고 현실적인 목표를 이루게 되면, 잠시 목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후에는 안일함의 덫에 빠져 점점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지상에서는 결코 완전히 달성될 수 없는 가장 고상하고 드높은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주님으로부터 받을 칭찬과 상급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24 말씀에서 고백하기를,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그는 로마에까지, 더 나아가 서바나까지 꼭 가려는 드높은 목표를 가지고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이렇듯 목표를 가지고 달려가곤 했기 때문에 그는 이미 충분히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도중에 안일할 짬이 없었고 도리어 시간이 늘 모자라고 아까웠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주님 앞에서 받을 상급과 칭찬을 받는 것이 최종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24 이하에서 복음 전도에 매달리는 자기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4,25)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한 가지는 자기는 다른 사도들과 달리 교회를 핍박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지은 죄가 크기에 더 많이 수고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빚이 많기에 더 많이 수고해야 갚지 않겠습니까? 또 한 가지는 다른 사도들보다 뒤늦게 사도의 직임에 뛰어들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으니, 자기는 후발주자로서 더 열심히 달려야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는 주의 일을 위하여 넘치도록 수고하고 또 수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안일할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행복만, 물질이나 지위나 소유에만 목표를 삼고 거기에 매진하면, 우리는 안일의 함정에 반드시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은 참된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지도 못하는 구멍만 전대와 같고 터진 웅덩이와 같습니다. 더 드높은 영원한 가치를 위하여 우리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를 섬기며 장차 주님 앞에 설 그 날에 받을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추구하십시오.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추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안일함의 늪에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내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 때 안일함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통합을 이루고 진정한 왕위에 올라 나라 안팎에 안정을 얻을 그 때에 그만 안일함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전쟁터에 장병들을 보내고 자기는 왕궁에 남아서 느긋하게 즐기다가 그만 안일함에 빠집니다. 낮잠도 실컷 자고 나서 왕궁 지붕에 올라 이것 저것 한가하게 바라보다가 그만 목욕하는 밧세바에 시선을 빼앗긴 후에 그만 그 일생과 나라 전체에 크나큰 재난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안일함이 화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가 왜 화를 불러들였을까요? 다윗은 잠시 자기가 누구인가를 까먹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종이요 그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어먹었습니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넉넉하고 형통하니까 그만 자기 위에 아무도 없고 자기가 나라의 주인으로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자기 백성인 줄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 네 백성의 주인도 바로 나다, 네 인생의 주인도 다름 아닌 나다, 네 시간도 내 것이요 네 청춘도 내 것이요 네 물질과 행복의 참된 주인도 바로 나다”라고 확인시켜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요 내 인생의 주인도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확실하게 깨닫는다면, 우리는 도무지 안일해질 수 없습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아는 자는 자기 인생을 함부로 낭비할 수 없습니다. 시간, 물질, 관심, 모든 것들을 주님의 뜻 안에서 사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까이 다가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강렬한 빛 가운데 전격적으로 그에게 나타나시자 그는 땅에 굴러 떨어져 엎드린 채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러자 그는 여러 말을 하지 않습니다. 즉시 그는 자기 앞에 나타난 주님 앞에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이 우리가 평생에 주인님이신 주님 앞에 자주 드려야 할 종의 질문입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항상 내게 주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내 시간과 물질과 내 인생을 사용하기 위하여 깨어 묻고 그 인도함을 받기 힘쓸 때 감히 안일함에 빠질 수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타인에 대한 긍휼과 관심이 깊어질 때 안일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안일함은 자기 중심적 태도의 결과입니다. 모든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된 사람은 모든 것이 풍요롭고 태평할 때 안일해집니다. 자기가 태평하기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만 안일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눈을 들어 다른 사람들을 살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궁핍하고 삶의 여러 가지 재난을 만나 어려움을 당하고 살아갑니다. 또한 영적으로도 많은 이들이 위태롭고 영적으로 안일하여 가파른 멸망 길로 수없이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 때문에, 미신 잡신 숭배로, 조상 숭배로, 실족하여 넘어짐으로, 세상 근심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아니함으로 주님께 돌아오지 못한 채 그 영혼이 죽어가곤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고 미안하고 괴롭습니다. 타인의 아픔과 어려움과 저들의 영혼의 위험이 마음의 짐이 되어 안타까워 하나님 앞에 기도로 씨름하며 자기의 시간과 물질과 관심을 가능한 한 나누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28,29 말씀에는 그러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서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그는 자기 자신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 하지 아니하고 교회와 성도들의 실족함과 연약함 때문에 마음에 큰 부담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애타하며 씨름하곤 했던 것입니다.

타인의 영혼과 삶에 대한 관심과 부담을 가진 사람은 안일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집중된 사람만이 안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큰 재앙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 자신을 잘 돌아볼뿐더러 거기에 머물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한 신앙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요 사람답게 잘 살아가는 길입니다.

안일함은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안일함은 그 속에 우리의 영혼과 삶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파멸의 씨앗이 발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일함에 빠지지 않도록, 앞서 말한 몇 가지를 늘 생각하며 자신을 경계합시다. 내 인생의 목표를 더 드높고 영원한 데 둡시다. 그것을 날마다 되새깁시다. 내 신분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합시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요 나는 그의 종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지 맙시다. 나만 집중하는 태도를 벗어나 이웃을 돌아보십시오. 영혼들을 돌아보십시오. 그들이 처한 생활과 영혼의 궁핍과 위험에 눈과 귀를 막지 말고 마음에 부담을 느끼고 기도하며 가능한 한도에서 기꺼이 손을 펼 수 있도록 힘쓰십시오. 그것이 안일함을 방지하는 길입니다. 내 영혼과 삶에 진정한 행복과 은총을 가져오는 길입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경계로 삼아 평생에 항상 깨어 있는 영혼과 정신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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