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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단상

심령의 통분함, 요한복음 11:33~35

작성자강명호 목사|작성시간14.12.24|조회수1,042 목록 댓글 0

심령의 통분함

요한복음 11:33~35,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베다니의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묻힌 후에 나흘 후에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왔을 때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을 몹시 기다렸다가 오시지 않고 오빠 나사로가 그만 죽고 만 그의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는 몹시 슬퍼하며 애통해하였습니다. 동시에 그 가족을 사랑하는 친척과 이웃들이 함께 울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보이신 내적인 반응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한 가지는 ‘심령의 비통함’이었고, 또 한 가지는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심령의 비통함과 연민의 정은 눈물로 표출되었고,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내시는 이적을 보이심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예수님의 ‘심령에 비통히 여기심’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원문에 보면, ‘비통히 여긴다’는 단어는 ‘엠부리마오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본래의 뜻이 ‘말이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는 행동’을 가리킵니다. 즉 화가 나서 감정이 흔들리고 분개하는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이 동사가 성경에 쓰인 용례도 ‘책망하다,’ ‘강하게 경계시키다’는 데서 쓰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11:33 말씀과 38절에서 재차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예수님의 감정의 특징이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다 마리아와 여러 사람들의 말과 눈물 속에서 예수님도 눈물을 친히 흘리시는 중에 계속 두 번이나 이 단어가 쓰인 것입니다. 이 단어를 원문적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 것은 지난번의 성경인 개역한글판 성경입니다. 거기서는 이 단어를 ‘통분히 여기다’고 번역했습니다. 통분(痛忿)이라는 단어는 ‘원통하고 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심령 깊은 곳에 이러한 분노감이 충만했을까요?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지 않아서 그런 일이 벌어졌노라고 비난하는 것이 속상해서 그렇게 원통하셨을까요? 예수님은 그렇게 속이 좁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분노감이 두 번씩이나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분명 사랑하는 이들에게 닥친 사망의 고통에 대한 거룩한 분노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은 쓰라린 것이기에 예수님조차도 함께 우셨습니다. 그들의 내면 깊은 곳에 일어난 슬픔과 비통함을 아시기에 순수한 아픔과 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에게 쓰라린 눈물을 자아내게 만든 죽음의 참상, 그러한 죽음을 가져오게 한 인간의 원죄와 자범죄, 그리고 그러한 죽음을 초래하게 한 악한 흑암의 영적 세력에 대한 거룩한 분노감이 예수님 심령 속에 끓어올라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 이래로 모든 인간들이 겪게 된 죄로 인한 저주 중에 각종 죄악들, 내면의 타락성, 인간의 수많은 질병들, 결국 죽음에 대한 굴복, 그리고 내세의 유황불에 떨어지는 영원한 고통의 저주 등은 우리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심령에 큰 고통을 겪게 한 것입니다. 지상에 육신으로 계실 때 많은 죽음을 직접 목도하셨고 때로 그 부모의 눈물을 보시고 열두살난 야이로의 딸도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장례치르러 가던 나인 성 과부의 아들도 살펴주신 바 있지만, 이번에는 예수님께 극진하게 대접하며 무척 예수님을 사랑하며 섬기던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의 죽음이었기에 이번에는 더더욱 예수님의 슬픔과 고통이 컸던 것이요 그와 더불어 사랑하는 이를 그토록 죽게 만들고, 마르다 마리아를 비롯한 사랑하는 이들을 절망과 슬픔에 빠뜨린 이 사망과 죄와 흑암의 영적 세력에 대한 분노감에 예수님을 강하게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령 속에 일어난 죄의 참상에 대한 강한 적개심과 그러한 참상에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은 진정한 성령의 내적 표지라고 생각됩니다.

죄에 끌려다니며 고통을 겪는 이들을 볼 때 죄인에 대한 불쌍히 여김과 동시에 그들을 사로잡고 넘어뜨리고 종노릇하게 만드는 악한 죄의 세력에 대한 거룩한 분노감이 있는 사람은 그 속에 거룩한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136 말씀에서 시편 기록자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이어진 139절 말씀에,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진실하지 못하고 이기주의와 냉냉함과 형식주의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을 볼 때 심령에 괴로움과 거룩한 격동함이 일어난다면 그것 역시 진정한 성령의 사람이라는 표지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휘둘러서 장사꾼들을 내쫓은 것과 같은 동일한 성령의 통분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속에 주의 법도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교회가 무력하고 조롱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통해하면서 거룩한 분노감이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역사해주시기를 기도한다면, 그것 역시 진정한 성령의 사람의 표지입니다. 시편 119:126 말씀에 보면 이 성령의 사람이,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라고 간절히 부흥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보면서, 우리는 거룩한 애통의 마음과 통분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 마땅합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한 모습을 볼 때 애통하며 통분의 마음을 가짐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에스겔서 16:30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하여 안타깝고 속이 상해서 하시는 말씀이,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지”라고 탄식하십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어찌 그리 결심이 쉽게 무너지고, 어찌 그리 세상에 약하고, 어찌 그리 자신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인 마음의 교만과 인간의 자랑과 물욕과 정욕에 약한지, 어찌 그리 나태함과 안일함에 쉽게 끌리는지, 참으로 약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심령 속에 거룩한 통분함이 임하고, 비통한 눈물과 슬픔이 임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우리 안의 완악함, 고집스러움, 인색함, 자기 중심주의 등을 깨닫고 통분함이 임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나아가 우리 사랑하는 이들의 믿음 없음과 우리 형제 자매의 믿음의 완악함과 그들의 영적 위험과 가난함을 볼 때, 큰 슬픔과 애통함과 그들이 겪을 장차의 영원한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애통하며 슬퍼하며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인하여 통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눈물로 매달림이 마땅합니다.

또한 오늘날의 쇠잔해진 한국 교회의 영적 무기력을 보면서, 저 북녘의 형제 자매들을 보면서, 세계 도처에 있는 핍박받는 교회와 성도들을 보면서 우리는 통분의 마음과 연민의 정에 이끌려 예수님처럼 눈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져서 아무런 애통함과 감동도 슬픔도 없고, 우리 마음은 심히 냉냉해져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러한 영적인 관심사보다 개인적이고 육신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관심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아서, 깨어 있지 못한 채 심령에 애통함과 눈물과 거룩한 통분함이 사라진 지 오래지 않은지 살펴봅시다.

오늘날 영적 패배주의, 영적 순응주의가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죄의 가공할 참상을 겪으면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기력한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이 참으로 가장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승리는 과연 헛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그 죄와 저주와 사망과 흑암의 세력이 가져온 슬픔과 죽음의 참상을 앞에 두고 보여주신 거룩한 분노감, 그러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연민의 깊은 정과 눈물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 역사하신 그 동일한 성령의 질투하시는 사랑과 열정을 우리가 회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이 시대 거룩한 통분함을 가지고 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힘써 나아갈 수 있게 기도합시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무덤에 갇혀 푹푹 썩은 냄새나던 나사로도 예수님은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시대에도 성령께서 그 통분함을 가지고 이 땅에서 죄와 저주와 사망과 흑암의 영적 세력과 맞서 싸우는 용기를 가집시다. 성령을 의지하고 끝까지 저항하고 기도에 힘쓸 때 반드시 연약해진 영혼들이 살아나고 힘을 얻고 교회가 능력 있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주여, 죄와 저주와 사망과 흑암의 세력이 오늘날 강력하게 앞도해오고 있는 마지막 때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갑절의 영감을 주옵소서. 성령의 통분하시는 질투하는 사랑과 열정과 연민의 마음을 부어주옵소서. 그리하여 거룩한 싸움을 힘써 싸워 하나님 나라의 임할 길을 예비하게 하시고,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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