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죄에 대한 심판
미가 1:8~16
지난 주일 저녁에 미가서 1장 1~7절 말씀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대표 성읍으로 삼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북 이스라엘의 왕도인 사마리아 성을 돌 무더기로 만들겠다는 예언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실제로 미가 선지자가 이 말씀을 한 후에 약 이삼십년 후인 주전 722년에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 성은 앗수르 왕 사르곤 왕에 의하여 최종적으로 함락되고 북 이스라엘 왕국은 완전히 멸망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미가 선지자의 이 예언의 기록은 어쩌면 북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마지막 회개의 기회로 주어진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이었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미가 선지자가 이 예언을 기록하여 남긴 것은 주전 722년 후에 남겨진 남 유다를 향하여 강력한 경고를 전하고자 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때에 미가 선지자는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심판의 예언을 했습니다. 이 일은 남 유다가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할 위기를 직면했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왕 때에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에 언급된 말입니다.
예레미야 26장에 보면, 예레미야가 성전 뜰에서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예언하기를
“내가 이 성전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이 성을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말을 들었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그를 붙잡고
“네가 반드시 죽어야 하리라”
고 말하며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담대하게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으니 너희 의견에 좋은 대로, 옳은 대로 하려니와 너희는 분명히 알아라 너희가 나를 죽이면 반드시 무죄한 피를 너희 몸과 이 성과 이 성 주민에게 돌리는 것이니라 이는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 모든 말을 너희 귀에 말하라 하셨음이라”
고 선포하면서, 오히려 의연하게 그들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백성들과 나라의 고위 관리들이 그 자리에 있다가 예레미야를 편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느니라”
그리고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서 다시 이렇게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들 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뜻을 돌이키셨지 않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예레미야 26:16~19)
그렇습니다. 미가 선지자 시대로부터 약 백오십 여년이 지난 예레미야 시대에 그들은 오래 전 히스기야 왕 때에 미가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던 메시지를 상기시키면서, 미가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왕으로부터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화를 피했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선지자의 진실한 증언을 잘 듣고 그 백성들이 회개할진대, 하나님께서 죄로 인하여 내리려고 했던 그의 진노를 거두시고 심판을 후대로 미루시곤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요나를 통하여 회개를 요청했던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예에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요나의 전도를 받고서 니느웨 성읍도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 약 150년이 지난 기원전 612년에 이르러서야 바벨론과 메디아 연합군에 의하여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는 망해야 할 나라나 성읍이나 가문이나 개인을 오랫동안 보존되어 살게 하는 놀라운 축복의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미가의 지난 주일 저녁에 이어서 미가의 심판의 예언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시대 남 유다 백성이 이 말씀을 정말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는 점을 상기합시다. 오늘 예언의 말씀은 미가 선지자의 고향인 가드 모레셋 주변의 여러 성읍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기 때문에 선지자 본인에게도 몹시 실감나는 예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의 이 예언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는 보이는 육신적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현주소를 우리가 잘 진단하여 우리의 영적 자세를 가다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장래를 예측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모든 불확실한 현실을 뚫고 각종 시험과 도전을 이기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은혜 중에 살아가는 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먼저 8절과 9절에서 선지자 미가는 오열하면서 예루살렘과 남 유다 왕국에 닥쳐올 재난을 인하여 애통해합니다. 8절과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비쳤음이니라”
미가 선지자는 앞서서 사마리아 성읍이 죄 때문에 들의 돌무더기처럼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이라는 파멸적인 예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 남쪽 왕국인 유다에게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영적으로 느낍니다. 9절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다’라고 말합니다. 동사 시제가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과거 형으로 여기서 말한 것은 그 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확정적이라고 선지자는 깨닫고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사마리아에 머물지 않고 남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미가 선지자는 지금 심령에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마치 거의 동시대의 사역자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서 애굽과 구스 민족 백성들이 옷을 발가벗겨진 채 앗수르 군대에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는 것을 경고하려고 삼년 동안이나 벗은 발과 벗은 몸으로 볼기까지 드러낸 모습으로 다니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미가 선지자도 장차 유다 백성들이 그렇게 포로로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자기가 그렇게 벗은 몸으로 행하며 애통하고 애곡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우는 소리를 들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해하겠다고 말합니다. 들개가 새끼를 잃어버린 채 구슬피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타조도 사막에서 슬피 운다고 합니다. 타조는 본래 성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을 부풀려서 그 압력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어 우는데, “욱 욱 우욱” 하면서 이상하게 웁니다. 그렇게 외로운 사막에서 들려오는 욱 우욱 하는 타조 소리 역시 슬픈 애가처럼 들리는데, 그렇게 미가 선지자가 애통하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로 받은 상처는 치유될 수 있는 정도의 상처가 아니라 도저히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라서 도저히 회복될 수 없게 될 정도라서 선지자가 그렇게 슬프게 애통하며 애곡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150년이 지나 남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멸망을 하고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울면서 쓴 애가에도 그러한 슬픔이 가득 묻어 있습니다. 예레미야 애가 2:11 말씀 한 절만 여기서 읽어드리면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서 기절함이로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나서 적군이 쳐들어와서 성읍을 다 휩쓸며 노인과 여인도 불쌍히 여기지 않고 아이들도 아끼지 않고 처참하게 죽여서 땅 바닥에 뒹글게 하고 먹을 것이 없어 기진하여 쓰러져 죽게 된 모습을 보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미가 선지자도 이러한 모습을 영적으로 미리 보기 때문에 그 일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통곡하며 벌거벗은 몸으로 행동 예언을 하면서 그 일이 닥치기 전에 회개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슬픈 애통의 마음은 옛날 다윗이 외쳤던 노래를 다시 부르게 합니다. 10절 전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가드에 알리지 말며 도무지 울지 말지어다”
이 말은 본래 다윗이 시글락 동네에 있을 때에 사울 왕이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블레셋 군대와 싸우던 중에 패전하고 사울의 큰 아들, 다윗이 심히 사랑한 요나단이 함께 길보아 산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서 너무 슬퍼서 울면서 지은 유명한 조가, ‘활 노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무엘하 1:19 이하에 보면 다윗이 슬픈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일을 가드에게 알리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사무엘하 1:19,20)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과 그 충성스러운 아들 요나단과 많은 용사들이 블레셋과 전쟁에서 패하여 죽게 되었다는 이 비보를 듣고는 너무 슬퍼서 활 노래라는 조가를 지어 부를 때에 이 소식을 저 블레셋 성읍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 블레셋의 딸들이 즐거워하며 개가를 부를까 염려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선지자 미가는 이제 다윗의 후손들이 죄 때문에 이방 나라 앗수르와 바벨론 등에 패전하여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음을 가드 사람들이 알게 될까 염려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사울 왕가의 몰락과 이스라엘의 패전 때문에 이방 나라 성읍 가드에 알리지 말라고 다윗이 슬퍼 울면서 말했거늘, 이제 다윗 왕가가 몰락하고 다윗 왕가가 이끄는 유다 왕국이 저 이방 나라 앗수르와 바벨론에 패망하게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저 가드라는 동네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역설적인 노래를 지금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 왕가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때가 되어 이렇게 비참하게 된 사실, 차마 말하지 말라고 지금 옛 다윗의 노래를 빗대어 풍자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또 다시 역사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와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를 통하여 배우지 아니하는 자는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자기의 고향도 포함된 예루살렘 남서부의 열 곳의 평야 도시들을 하나씩 예로 들면서 그들이 연쇄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을 노래합니다. 여기서 이제 미가의 집요한 ‘wordplay’라는 문학 기법이 사용됩니다. ‘wordplay’는 우리 말로 번역하면 ‘언어 유희’ 혹은 ‘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학기법은 단어들을 가지고 재치있게 활용하며 유머와 해학과 풍자를 통하여 의도를 더 강조하는 기법입니다.
이제 그 미가의 언어 유희적인 풍자적 예언을 함께 살펴봅시다.
10절 하반절을 읽겠습니다.
“내가 베들레아브라에서 티끌에 굴렀도다”
여기 ‘베들레아브라’라는 도시에 과거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는 티끌에 구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티끌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아페르’입니다. 그래서 베들레아브라의 ‘아브라’가 아페르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그 도시 베들레아브라는 티끌 아브라에 뒹글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잿더미 가운데 패망할 것을 그렇게 그 도시 이름을 가지고 풍자적으로 말한 것입니다.
11절 전반절에는 사빌이라는 도시가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빌 주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빌’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 성은 아름답다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무서운 적군에 의하여 포로로 끌려가되 다들 벗은 몸을 가지고 수치를 무릅쓰고 끌려나가게 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1절 중반절에는 ‘사아난’이라는 성읍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나안 주민은 나오지 못하고”
‘사아난’은 ‘양떼’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사나안 주민들은 양떼처럼 목자에 이끌려서 그 성읍 문을 평안히 들고 나곤 하는 성읍이었는데, 이제 적군에게 에워싸여 나올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갇혀 있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1절 하반절에는 벧에셀 성읍이 등장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벧에셀은 애곡하여 너희에게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벧에셀’이라는 성읍 이름의 뜻은 ‘뿌리 있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뽑히지도 않고 든든하여 흔들리지 않는 집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 백성들은 도리어 근본없는 사람들처럼 이제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롯 주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마롯’이라는 말은 ‘큰 근심’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 들어섰을 때에 못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물이 썼습니다. 그래서 그 못을 ‘마라’ 곧 ‘쓰다’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마롯’ 성읍은 ‘마라’라는 단어가 가진 것처럼 쓰라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그들이 쓰라림을 겪게 되느냐면 그들이 좋은 일을 기대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가장 좋은 것으로 여겨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우상 숭배적인 자세로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앙을 보내실 수밖에 없었다고 여기서 말합니다. 우리가 복을 구하기보다 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할 때에 복은 하나님과 함께 따라 오게 되는 것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는 라기스 성읍이 나옵니다. 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라기스 주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라기스는 예루살렘 남서부 지방 평야 지대에서 가장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읍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 성을 중건하여 애굽과 북 이스라엘의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방어하려고 철옹성처럼 잘 방비한 성입니다. 훗날 랍사게 앗수르 왕이 공격하여 이 성을 함락시킨 후에 그 함락 장면을 앗수르 비문에 새겨 놓을 정도로 라기스는 매우 중요한 성입니다. 그런데 그 라기스마저도 준마에 병거를 메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견고한’이라는 뜻을 가진 ‘라기스’ 성 사람들은 히브리어로 ‘라케스’ 곧 ‘준마’를 타고 도망치기 바쁠 것이라는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방어해야 할 견고한 성이 도망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입니다. 그들이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라고 한 것을 보면, 유다의 왕들이 이 성의 방어능력을 의지하고 안일하고 교만했던 것을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성을 지키는 것은 방벽의 우수함과 군사력의 탁월함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함과 그의 은혜를 힘입어야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인간적인 힘을 의지했다가 결국 이렇게 빠른 말을 타고 공격이 아니라 도망용으로 쓸 수밖에 없게 되는 신세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니, 훗날 바벨론 왕의 침공 때에 라기스를 침공하여 함락함으로 실제로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14절 전반절에는 선지자의 고향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는 가드 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가드 모레셋은 선지자 미가의 고향 모레셋을 말합니다. ‘모레셋’은 약혼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약혼을 의미하는 모레셋에게 하나님은 ‘작별하는 예물’ 곧 이혼 예물을 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나아가 14절 후반에 악십이라는 성읍도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이리라”
‘악십’이라는 단어는 ‘속이는 시내’를 의미하는 ‘아크잡’이라는 단어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악십이라는 이 성읍은 우기 때에는 물이 콸콸 흘러서 큰 시내인 줄 알았다가 건기 때에는 다 말라서 물이 없어서 가서 마실 물을 얻지 못하는 ‘아크잡’ 속이는 시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악십의 집들은 평안하고 아름답고 화려했나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다 불타고 망하고 말았으니, 물을 얻으려 갔다가 얻지 못하는 속이는 시내와 같이 사람들이 악십의 집에 피신하러 갔다가 헛물을 키게 될 것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15절에는 마레사가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마레사 주민아 내가 장차 너를 소유할 자로 네게 이르게 하리니”
‘마레사’라는 말의 뜻은 ‘상속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단어와 비슷한 단어 곧 ‘소유할 자’는 ‘하 요레쉬’인데, 그래서 그 성읍이 그 땅을 상속할 자라고 자처했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 성을 소유할 자 ‘ 하 마레쉬’ 곧 침략자들을 보내겠다고 여기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15절 하반절에 ‘아둘람’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니라”
아둘람도 한 성으로서 르호보암이 방어 성으로 지은 군사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둘람이 유명한 것은 천연 동굴이 많아서 그리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숨어 들어가고 식구들과 군사들이 다 숨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스라엘의 영광 곧 왕과 신하들이 결국 피할 곳이 없어서 아둘람 굴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을 예고한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까지 포함하여 열두 개의 성읍이 여기서 언급되면서 그 이름들을 가지고 풍자하면서 그들에게 닥칠 무서운 재앙들을 선지자는 여기서 선언합니다.
그리고 결국 16절에 이렇게 그들의 자손들까지 끌려가는 신세가 될 것을 예고합니다. 함께 16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가 크게 벗겨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라”
대머리 독수리라고 불리는 콘돌(condor)이나 벌춰(vultur) 독수리가 그 지역에 사막 주변에 썩은 시체들을 먹고 살아가는데, 그처럼 자식들을 인하여 슬픈 일을 겪어서 그들의 머리털을 스스로 밀어 다 대머리 독수리처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슬픔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자기 몸을 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머리카락을 미는 것입니다. 자기 몸에 칼을 대어 상처 냄으로써 슬픔을 표시하는데,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바벨론에 의하여 자식들이 끌려가는 일을 겪으면서 유대인 부모들이 그렇게 울었을 것입니다.
열두 개의 성읍들은 현재는 평안한 가운데 자기들의 아름답고 고귀하고 든든한 이름들을 자랑하면서 든든히 서 있습니다. 하지만 장차 그들의 성읍들은 처참하게 무너질 것이요 그 주민들은 이렇게 다 잃어버리고 빼앗기고 무너지고 수치스럽게 끌려가는 처량한 신세로 변하고 말 것이라고 선지자는 예언하고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영안이 열려 자기 고향과 모든 곳에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미리 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히스기야 왕 때에도 산헤립 왕에 의하여 그 평야 도시들이 차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버티다가 훗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하여 철저하게 하나씩 다 함락되고 파괴되고 죽임당하고 끌려가고 황폐화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무섭도록 철저하게 성취되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가 선지자의 이 지독하게 끝까지 밀어붙이는 ‘wordplay’ 기법에 의하여 현실을 비틀어 말하는 경고를 지나간 과거의 일로만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서 보아야 합니다. 세계 5위의 군사력, 세계 10위의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과연 우리는 안전한가, 우리의 미래는 과연 탄탄대로인가를 살펴본다면, 우리는 늘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습니다.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세상적인 힘과 재산과 기술력 등을 가지고 담보하려고 듭니다. 선지자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불신앙과 그들 안에 자리잡은 죄악들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닥쳐올 재앙을 예고했고, 그것들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앗수르도 유다에서 먼 지역의 나라입니다. 바벨론은 좀 더 먼 나라입니다. 멀리 있었던 그 나라들을 들어서 마치 독수리가 창공 높은 데서 배회하다가 급전직하 산양과 들염소를 덮치듯이 그렇게 내리꽂히듯 공격하므로 유다가 꼼짝없이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만을 볼 것이 아닙니다. 현실이 넉넉하고 평안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 영적인 가난함, 영적인 허약함, 영적인 어두움이 깊고,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받아들여 거짓 안전감에 안주하면 안되겠습니다. 이 시대에도 먼 장래까지 두고 볼진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선지자의 교훈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 모두 더욱 하나님을 사랑합시다. 더욱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세상의 헛된 소유의 넉넉함에 속지 맙시다. 진정한 부는 공의를 사랑하고 인애를 실천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외함에 있습니다. 이러한 복된 신앙의 길로 묵묵히 정진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