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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의 생애와 명언

작성자이태호|작성시간15.02.08|조회수1,939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쉰들러의 생애와 명언1.hwp

 

쉰들러의 생애와 명언

 

 

쉰들러(Oskar Schindler)의 생애 (1908.4.28. ~ 1974.10.9.)

 

 

1. 개요

나치 독일의 사업가.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유명하다.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오스카어 신들러’. 생전에 오스카 쉰들러는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쾌락주의자로 방탕한 성향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결혼을 여러 번 했고 정부와 애인을 여러 명 두었다.

 

 

2. 생애

 

2.1. 전반생

쉰들러는 1908년 4월 28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으며 현재는 체코에 속하는 스비타비(Svitavy) 지방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스비타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가 되었으나, 쉰들러 일가는 16세기에 빈에서 모라비아로 이주한 독일/오스트리아 계였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1935년 쉰들러는 주데텐 독일인 당(Sudetendeutsche Partei)에 들어갔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내의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이었다. 이 당에서 활동하면서 쉰들러는 독일 국방부 첩보부와 접촉하여 스파이가 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철도 정보를 독일 측에 누설했다. 이 혐의로 체코 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뮌헨 협정이 벌어져서 형벌은 중지되었다.

 

2.2.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2월 10일, 나치당에 자원 입당 하였으며 나치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한 밑천 챙겨보려는 생각으로 독일의 점령 아래 놓여진 폴란드로 간다.

 

2.3. 유태인 구출

1939년 10월, 쉰들러는 나치로부터 법랑 용기를 만들고 있던 유태인 소유의 공장을 불하받았다. 이 공장은 점점 확대되어 45,000m²부지에 8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하는 거대한 군수 공장이 되었다. 이 때부터 쉰들러는 나치당 친위대 슈츠슈타펠로부터 유태인 노동자를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강제노동의 일환으로 수용소에 간 유태인들을 공장으로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부패한 기업가 였던 쉰들러는 이 특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어린이나 여성, 대학생들을 '숙련된 금속공'으로 속여서 자신의 공장에 노동자로 데려와 보호하는 조치를 은밀히 취했다.

1944년, 소련군의 침공으로 동쪽의 수용소가 해체되자 많은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 쉰들러는 약 1,100명의 유태인 노동자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자신의 고향인 스비타비 지방에 군수공장을 세운 다음 이들을 이곳으로 모두 빼돌리는 등 1,200명을 구해낸다.[4] 그리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면서까지 약 7개월간 그들을 보호했다. 쉰들러의 활동은 초기에는 인간애보다는 탐욕스러운 모습이 더 강했다. 쉰들러는 본래 나치에 동조하던 부패 기업가였으며 이때도 그랬다. 애초에 돈을 벌려고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때부터 쉰들러는 어딘가 변하기 시작한다. 노동자로 일하게 된 유태인들을 비교적 인간적으로 대우해주었고 '보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을 보호하려는 쉰들러의 활동은 점점 더,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어갔다. 쉰들러는 마침내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써가면서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에 중심을 두고 활동하게 되었다. 쉰들러는 암시장을 이용해서 물자를 조달하거나 유태인을 우대하여 뉘른베르크 법을 위반한 혐의 등으로 게슈타포에게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돈, 보석, 예술작품 등을 뇌물로 써서 조사에서 빠져나왔다. 쉰들러는 뇌물로 바친 것들을 장부에 꼼꼼히 정리해두었는데 악명 높은 게슈타포를 매수해야 하는 만큼 어마어마한 액수의 뇌물과 선물로 게슈타포와 친위대를 구워삶았다.

 

2.4. 전후

전후 쉰들러는 몇 가지 사업을 시작했지만 파산하였다.

 

 

3. 논란

참고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쉰들러가 유태인을 구한 것이 아니라 실은 유태인을 부려먹기 위해 유태인을 빼돌린 것인데 이것이 졸지에 유태인 살린 것이 되어 영웅취급 받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와 논란이 일어났는데 그 논란은 다음과 같다.

- 쉰들러는 자기공장에 온 유태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뺏고 이를 술을 사먹었다.

- 쉰들러는 호색한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 쉰들러는 자신의 사업이익을 위해 유태인을 구한것이다.

- 쉰들러가 유태인을 탄압한 것을 본 산 증인들이 있다. 그중에는 쉰들러 부인과 내연녀도 있었다.

- 쉰들러는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태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한 뒤 자신은 그틈에 도망쳤다.

라는 식으로 내용이 나왔는데 실제 유럽에서도 이 논란이 있었으나 반박자료가 나오면서 수그러들었다.

• 쉰들러는 자기공장에 온 유태인들의 돈과 귀중품을 뺏고 이를 술을 사먹었다.

반박 : 이미 유태인들은 쉰들러에게 오기 전에 사전검사로 통해 모든 재산과 귀중품을 독일군들에게 압수되었으며 쉰들러 공장에 올 때는 낡은 수용소복 하나가 전부였다.

• 쉰들러는 호색한으로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반박 : 쉰들러가 호색한이라는 것은 이미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도 나온다. 물론, 쉰들러는 음주, 호색, 부정부패 등의 개인적인 문제를 많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으로 모든 면에서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이 살았던 '성자'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나치 독일 치하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무고한 사람들을 구해낸 세상에서 더없는 선행을 하였으며 홀로코스트라는 인간성의 타락을 보여주는 상황에서 '도덕성'을 보여준 몇 안 되는 인물인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쉰들러 뿐만 아니라 나치간부들과 독일에 협조한 부유층들도 쉰들러보다 더하면 더했지 도덕적으로 많은 타락이 있었다. 굳이 쉰들러 한사람 문제는 아니다.

• 쉰들러는 자신의 사업이익을 위해 유태인을 구한 것이다.

반박 : 쉰들러가 처음에 나치에 협력하여 부당이익을 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내용처럼 유태인들을 구한 후 일부러 불량품을 납품하였고 이로 인해 독일군들로부터 지속적인 반품으로 인하여 곧 적자상태에 빠졌다. 이에 쉰들러 지인들은 공장폐쇄와 사업을 접어 더 이상 빚을 늘리지 말라고 하였으나 쉰들러는 이 공장이 폐쇄되면 죽을 수 있는 유태인들을 위해 많은 빚까지 지면서 공장을 유지하였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 뒤 쉰들러는 빚으로 인하여 파산하였다. 비록 처음에는 이득을 위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쉰들러는 결국 자신의 재산을 희생하여 그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 쉰들러가 유태인을 탄압한 것을 본 산 증인들이 있다. 그 증인 중에는 쉰들러 부인과 내연녀도 있었다.

반박: 쉰들러 부인과 내연녀는 전후 쉰들러가 파산한 뒤 그나마 남은 재산도 모두 가져갔으며 이혼 사유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지만 심각한 성격차로 인하여 이혼한 것이며 이혼 후에는 사실상 서로 원수관계였고 쉰들러가 살아있을 때는 아무런 연락도 없다가 쉰들러 사후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쉰들러 가문에 많은 돈이 들어오자 그에 대한 배당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한 증언이라 객관성이 의심된다. 쉰들러가 유태인을 탄압했다는 것을 보았다는 쉰들러 주변 인물들도 쉰들러 증언으로 인하여 유태인학살과 나치 전쟁범죄에 참여한 것이 드러나 처벌받은 사람들로 이들의 말에 신빙성이 없다.

• 쉰들러는 전쟁이 끝나자 살아남은 유태인들을 무장시켜 소련군과 싸우게 한 뒤 자신은 그틈에 도망쳤다.

반박 : 소련군이 들어오면 자신들은 해방이라는 것을 그때 유태인들은 알고 있었고 자신들을 해방시키러 온 소련군을 유태인이 싸울 이유가 없었고 이게 사실이라면 오히려 무장한 유태인들이 쉰들러를 소련군에 넘겼을 것이다. 더구나 전범재판에서 이런 사실은 소련군이나 쉰들러에게 살아남은 유태인들 증언에 없는 이야기였고 쉰들러가 죽은 다음 당시 살아있던 유태인이나 관계자가 아닌 아마추어 역사학자들이 주장한 것이며 실제 쉰들러가 구해준 유태인들 증언에 따르면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이게 사실이라면 왜 이스라엘은 쉰들러를 처벌하지 않고 나치간부 출신이 쉰들러가 예루살렘에 묻히는 것을 허락했고 당시 생존자들이 지금도 쉰들러 묘를 참배하는 이유는 뭔가?

 

 

4. 죽음

쉰들러는 1974년 숨을 거두었고, 시신은 예루살렘 기독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는 유대인들의 성지인 시온 산에 있는데, 유일하게 시온에 묻힌 나치스 당원이다. <박해받는 1200명의 유대인들의 잊을 수 없는 생명의 은인>이라는 비문은 쉰들러의 인생을 가장 간결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쉰들러를 추모하는 유대인들이 그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1993년 이스라엘 야드바셈에서 오스카 쉰들러와 에밀리 쉰들러에게 '세계의 의인'이라는 칭호를 부여했고, 이에 앞선 1962년에 쉰들러의 이름을 딴 나무가 야드바셈 내 의인의 거리에 자리 잡았다.

오스카 쉰들러는 흔해빠진 기회주의자요 부패한 사업가였다. 그러나 거대한 악이 세상을 점령하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악에 대항해서 사람의 생명을 구한 것은 귀족도 지식인도 종교인도 아닌 부패한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였다. 그의 영혼에 안식과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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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들러의 명언

 

쉰들러리스트의 영화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말

The time when there was no kindness in the world,

세상의 친절함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을 때,

the lives were saved and generations were created.

생명은 구해지고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습니다.

And that's the essence of what this story is that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one individual can change things.

단, 한명의 인간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죠

 

쉰들러의 비석에 쓰인 글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탈무드의 구절)

한 생명을 구한자는 전세계를 구한 것이다.

 

쉰들러리스트 영화의 마지막 장면

■ 이 차면 적어도 10명을 구할 수 있었을거야.

■ 이 뱃지라면 적어도 1명은 구할 수 있었을거야, 적어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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