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李箱)의 생애와 작품 활동
1. 생애(1910년 8월 20일(음력, 서울특별시) - 1937년 4월 17일)
1910년 서울에서 이발업에 종사하던 부 김연창(金演昌)과 모 박세창(朴世昌)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김해경이다. 1912년 생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에게 입양되어 강원도 강릉에 살던 그의 집에서 장손으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을 친부로부터 떼어놓은 큰아버지도, 큰아버지에게 아들을 빼앗긴 친부도 사랑할 수 없었으며, 서울에 생부모가 따로 있는데도 백부와 백모를 부모라고 불러야 되는 점에 깊은 회의를 품고 사춘기 때는 한때 방황하기도 했다. 자기분열적인 이상은 실제로 거울을 늘 들고 다녔다. 혼자서 거울로 햇빛을 반사시키며 놀았다. 그는 후일 자신의 시 <오감도>와 그 외 여러 작품, 동료 문인들에게 자신의 유년시절을 언급하곤 했다.
그러나 집안은 부유하였으며, 그는 양아버지이기도 한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1921년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를 거쳐 1926년 동광학교(東光學校 : 뒤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병합),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였다. 그 해 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근무하면서 조선건축회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각혈로 기사의 직을 버리고 황해도 백천(白川) 온천에 요양 갔다가 기생 금홍(본명 연심)을 만난다. 요양에서 돌아온 뒤 금홍과 동거를 시작하게 되고, 종로에 다방 ‘제비’를 차려 금홍에게 주어 함께 경영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고, 이 무렵 이곳에 이태준(李泰俊), 박태원(朴泰遠), 김기림(金起林), 윤태영(尹泰榮), 조용만(趙容萬) 등이 출입하여 이상의 문단 교우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구인회에 가입하여 특히 박태원과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小說家 仇甫氏)의 1일(一日)>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였다. 그 뒤 1935년 다방을 폐업하고 카페 ‘쓰루(鶴)’, 다방 ‘무기(麥)’ 등을 개업하였으나 경영에 실패하고 1936년 구본웅(具本雄)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창문사(彰文社)에 취직하였으나 얼마 안 가서 퇴사하였다.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하여 일본 도쿄로 옮겨간 그는 1937년 사상불온 혐의로 도쿄 니시칸다 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지만, 지병인 폐병이 악화되어 향년 만 26년 7개월에 도쿄 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화장하여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같은 해에 숨진 친구 김유정과 합동영결식을 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유실되었다.
만년의 이상은 술과 여자를 즐겼다고 한다. 동료 문인이자 친구인 박태원은 “그는 그렇게 계집을 사랑하고 술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또 문학을 사랑하였으면서도 그것의 절반도 제 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면서 “이상의 죽음은 이름을 병사에 빌었을 뿐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역시 일종의 자살이 아니었든가 하는, 그러한 의혹이 농후하여진다.”고 하기도 했다.
2. 작품 활동
그의 작품 활동은 1930년 ‘조선’에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31년 처녀 시이자 일문시(日文詩) <이상한 가역반응>, <BOITEUX·BOITEUSE>, <파편의 경치>, <▽의 유희>, <공복>, <삼차각설계도 三次角設計圖> 등을 ‘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했다. 1932년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하면서 비구(比久)라는 익명을 사용했으며,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하면서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어 1933년 ‘가톨릭청년’에 시 <1933년 6월 1일>, <꽃나무>, <이런 시(詩)>, <거울> 등을, 1934년 ‘월간매신 月刊每申’에 <보통기념>, <지팽이 역사(轢死)>등을 발표하였다. 1934년 구인회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지만 난해시라는 독자들의 항의로 30회로 예정되어 있었던 분량을 15회로 중단하였다. 1935년에는 다방과 카페 경영에 실패하고 연인 금홍과도 결별하였으며, 1936년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아 1집만 낸 뒤 그만두고 ‘중앙’에 <지주회시>, ‘조광’에 <날개>를 발표하였으며 <봉별기>가 ‘여성’에 발표되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게 되는 1937년에는 ‘조광’에 <동해>를 발표하였다.
기타 시 작품으로 <소영위제 素榮爲題>(1934), <정식 正式>(1935), <명경 明鏡>(1936) 등과 소설 <종생기 終生記>(1937), 수필 <산촌여정 山村餘情>(1935), <권태 倦怠>(1937) 등이 있다. 유저로 이상의 시, 산문, 소설을 총 정리한 <이상전집> 3권이 1966년에 간행되었다.
이상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세계를 풍미하던 자의식 문학시대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자의식 문학의 선구자인 동시에 초현실주의적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문학에 스며있는 감각의 착란(錯亂), 객관적 우연의 모색 등 비상식적인 세계는 그의 시를 난해한 것으로 성격 짓는 요인으로서 그의 개인적인 기질이나 환경, 그리고 자전적인 체험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현실에 대한 그의 비극적이고 지적인 반응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적 반응은 당대의 시적 상황에 비추어볼 때 한국 시의 주지적 변화를 대변함과 동시에 현대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그러한 지적 태도는 의식의 내면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명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시세계에 도입하여 시상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였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억압된 의식과 욕구 좌절의 현실에서 새로운 대상(代償) 세계로 탈출하려 시도하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정신을 논리적 사고 과정에서 해방시키고자 함으로써 그의 문학에서는 무력한 자아가 주요한 주제로 나타나게 된다. 시 <거울>이나 소설 <날개> 등은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대표적 작품이다.
또한, 시 <오감도>는 육체적 정력의 과잉, 말하자면 발산되어야 하면서도 발산되지 못한 채 억압된 리비도(libido)의 발작으로 인한 자의식 과잉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대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고 역설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현실이 잘 드러나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역설에서 비롯되는 언어적 유희는 그의 인식 태도를 반영하고 있는 동시에 독특한 방법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억압받은 성년의 욕구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원고향인 유년 시대로 퇴행함으로써 욕구 충족을 위한 자기방어의 메커니즘을 마련하였고, 유희로서의 시작(詩作)은 그러한 욕구 충족의 한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인간 모순을 언어적 유희와 역설로 표현함으로써 시적 구제(詩的救濟)를 꾀한 시인이었다.
2-1. 언어유희의 귀재
이상은 12, 12 라는 말을 종종 했다. 이는 발음으로는 십이, 십이 가 되지만 억양을 강하게 발음하면 성기의 다른 뜻이 된다. 그는 후일 자신의 친구들 몇 명에게만 이 말의 본의미를 살짝 알려주었다.
그는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발간하는 종합전문 월간지에 큰 글씨로 12, 12 라는 제목의 소설을 연재했다. 한글과 그 발음을 전혀 모르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은 12, 12를 단순히 숫자로만 이해했고 한글 발음으로 했을 때 욕설이 된다는 점을 눈치 채지 못했다.
구본웅의 당조카이자 구본준의 아들 구광모는 후일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이상이 조선총독부를 향해 12, 12,라 욕한 것을 접하게 된다.
“‘朝鮮(조선)’ 1930년 2월호를 집어 들었을 때 나는 격렬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이 책의 목차에서 총독, 정무총감, 재무국장 등 일본인 최고위층의 정책논설과 함께 이상의 장편소설 <十二月 十二日(십이월 십이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에 요동치는 전율을 느꼈다. 오래전에 나의 아버지께서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에 대해 해괴한 욕설을 퍼부은 작품을 썼다고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12월 12일은 주인공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인 동시에 얼마간의 돈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날이며, 주인공이 죽을 날이기도 한 동시에 참으로 살아야 할 날이라고 깨닫는 날이기도 하다. 구광모는 “12, 12로 상징되는 욕설과 함께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라고 절규하는 그의 소설 속의 외침이 천둥소리처럼 나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고 평하였다.
이처럼 이상은 숫자를 이용해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료들을 골탕 먹였다. 시 ‘烏瞰圖(오감도)’에 나오는 “13人의 兒孩(아해)가…”가 그렇고, 이상이 다방 ‘제비’ 다음으로 개업하려고 간판을 붙였다가 그 의미가 탄로나 허가 취소된 '69 다방' 등도 그렇다. 그 외에도 남녀의 성교를 상징하는 33과 23(二十三, 다리 둘과 다리 셋의 합침) 및 且8(한글로 차팔 또는 조팔이라 읽음. 발기한 남성 성기 또는 18과 대칭을 나타냄) 등의 표현으로 조선총독부를 골탕 먹였다.
3. 필명의 유래
이상의 필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건축기사로 근무할 때, 현장의 일본인들이 그를 ‘이씨’란 의미로 “李さん(이상)”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시인 김기림의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림에 재주가 뛰어난 이상이 디자인한 경성고등공업학교의 졸업 앨범에 이상이라는 자필 서명이 있어, 건축기사 근무 이전에 이미 이상이란 필명을 쓰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 필명은 화가 구본웅에게 선물로 받은 화구상자(畵具箱子)에서 연유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상(李箱)’이 ‘오얏나무(자두나무) 상자’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4. 사후
그를 기려 출판사 문학사상사에서 이상문학상을 1977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8년에는 현대불교신문사와 계간 ‘시와 세계’가 이상시문학상을 제정해 역시 매년 수상자를 내고 있다. 2010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발표한 작품과 사후 발굴된 작품을 포함해 그의 문학적 세계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5. 작품
▶ 건축무한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1932)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은워어즈였다)
빈혈면포,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의향수의맞이한동양의가을
쾌청의공중에붕유하는Z백호.회충양약이라고씌어져있다.
옥상정원.원후를흉내내이고있는마드모아젤.
만곡된직선을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시계문자반에Ⅻ에내리워진일개의침수된황혼.
도어-의내부의도어-의내부의조롱의내부의카나리아의내부의감살문호의내부의인사.
식당의문깐에방금도달한자웅과같은붕우가헤어진다.
파랑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積荷)된다.
명함을짓밟는군용장화.가구를질구하는조화분연.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저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하다.(나는애련한후에애련하는나)
사각이난케이스가걷기시작이다.(소름이끼치는일이다)
라지에-타의근방에서승천하는굳빠이.
바깥은우중.발광어류의군집이동.
▶ 오감도 시제1호(烏瞰圖 詩第一號)(1934)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길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