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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작성자예촌|작성시간20.02.15|조회수1,141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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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도덕경



제3장 도(道)는 만물의 근본이다.

 

《도덕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인 ‘도(道)’란 무엇일까요?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도가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덕경》 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도를 설명하지는 않고 다짜고짜 무슨 말일까요?

 

일단 도라고 부르면 사람들은 도라는 말에 얽매이게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신이라 이름 붙이면 사람마다 신을 그려보게 되고 나름대로 신을 규정하여 자기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신을 믿게 되지요. 하지만 그것은 본래의 신이라 할 수 없지요. 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한 신에게는 이름도 붙일 수 없고 형상으로 그릴 수도 없는 것이지요. 만약 무언가를 그리고 대상을 정하여 믿는다면 절대적 존재가 아닌 상대적 존재가 되어 우상이 되고 마는 거지요.

이처럼 노자가 말하는 도는 영원히 변함없는 절대적인 진리, 우주의 근원적 실재를 가리키는 말이어서 단순하지 않지요.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변함없는 진리는 제한된 시간과 공간에 적용되는 일시적인 진리와 구별해야 하지요. 그래서 노자는 모든 시대에 항상 적용되는 진리를 상도(常道)라 했지요. 영원한 도는 형체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좀 더 노자의 설명을 들어보면서 도를 이해하기로 하지요.

노자는 도를 《도덕경》 25장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누어지지 않은 어떤 무엇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있었네.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으니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변하지도 않고

두루 편만하여 계속 움직이나

없어질 위험이 없다.

가히 세상의 어머니라 하겠다.

나는 그 이름을 모른다.

다만 억지로 도라고 불러본다.

구태여 형용하라면 크다고 하겠다.

도는 천지 만물이 분화되기 이전이라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이름도 없다는 겁니다. 도는 절대적인 표현이 아니라 무어라 형언할 수 없어서 마지못해 도라 이름 붙인 것일 뿐이고, 굳이 설명하라면 무한하게 큰 것이라고 노자는 이야기하고 있지요.

노자는 32장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했습니다.

도는 영원하지만 이름이 없다.

통나무처럼 비록 작고 초라해 보여도

감히 세상에서 신하로 삼을 자 없다.

통나무를 마름질하면 비로소 이름이 생긴다.

도가 전개되면 세계가 형성되고 비로소 만물이 이름을 갖게 된다.

도는 이름도 없고 잡을 수도 없지만 일단 전개되면

천지 만물로 형태를 갖추게 되고 이름이 생겨난다.

이런 도는 과연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말하는 순간 도는 이미 도가 아닌 것이지요. 도란 이러이러하다, 진리는 무엇이다, 모두 그렇게 설명하는 데 대해 노자는 그러한 설명들을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즉, 도에는 만물의 이치가 포함되어 있지만 형상도 소리도 없으니, 이러한 이치는 언어나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어떤 개념이 아니니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어떤 형상이 아니니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어떤 소리가 아니니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어떤 대상이 아니니 손으로 만질 수도 없어요.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고자 하는 도는, 느끼거나 생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이라 할 수 있지요.

노자는 또한 14장에서 도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잡아도 잡히지 않으니

이 셋으로도 밝힐 수 없어.

세 가지가 하나가 된다.(혼연일체)

그 위라서 더 밝은 것도 아니고

그 아래라서 더 어두운 것도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니 무어라

이름 부를 수 없다.

도는 현실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물과는 달리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사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했지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잡히지도 않는다. 또 그것을 마주 보아도 머리가 보이지 않고, 따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도는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는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과 지각능력을 초월하므로 감각과 분별로 포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름답고 추함을 분별하는 것도 본래 미(美)와 추(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지요. 분별(分別)하였으므로 미추(美醜)가 생긴 것이지요. 이해가 되었겠지요? 어렵다고요?

다시 1장을 볼까요?

이름을 지어 부르면 그것 또한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

예를 들면 홍길동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하지만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그 사람은 아니지요. 더 쉽게 설명해 볼까요?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안 좋다고 홍길수라 부른다면 길동과 길수는 다른 이름이지만 그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길동이란 이름도 길수란 이름도 진정한 그 사람이라 할 수는 없지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무한하지만 그것이 나는 아니야. 나는 그냥 나야.”

그 사람의 됨됨이는 무어라 설명하거나 이름으로 온전히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물의 본질인 도를 표현한다면 도 자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이지요.

노자는 ‘도를 모르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고, 아는 것이 오히려 모르는 것이다’라며 계속 이렇게 부정하는 형식을 취해 표현하고 있어요. 언어의 한계성, 다시 말해 논리의 한계를 최대한 극복하기 위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거지요.

천지가 시작될 때는 소리도 모습도 없었는데 이것을 무(無)라고 해요. 무는 곧 도의 본체이며, 우주의 근원이므로 완전히 없다는 무와는 구별해야 하지요. 유(有)와 대립되는 아무것도 없는 상대적 무는 유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또한 노자의 도는 시간을 초월하지요. 우리가 사고하는 바탕에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깔려 있지요. 우리 인간은 이 시공간으로 모든 사물을 파악하고 정신세계를 건설하지요. 하지만 도는 시간과 공간을 설정하기 이전의 초월적 세계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분별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노자는 도(道)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가슴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세계라고 말했어요. 도는 그 이상이어서 도저히 언어로는 표현의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1장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오지요.

무(無)는 천지의 시작이요, 유(有)는 만물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無)로 그 오묘함을, 유(有)로 그것의 드러남을 보고자 한다.

무와 유는 함께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고, 모두 현묘(玄妙)하다고 불린다.

현묘하고 현묘하니 모든 현묘의 문(門)이다.

여기서도 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가리키고 있지요. 즉, 자연계에서 최초의 원인인 셈이지요. 천지의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은 모두 도의 잠재력이 쉴새없이 창조와 발육을 하는 일종의 표현이라 할 수 있지요.

도가 창조와 생산작용을 하면 만물이 탄생하는데, 이를 유라 하며, 이 세상 자체가 바로 도의 작용이라는 것이지요. 무는 도의 본체이고 유는 도의 작용인 셈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무와 유 모두 도에서 나온 것으로 이름만 다를 뿐 같고, 우주 만물의 근원을 무라 보고, 무를 도의 본모습이라 보는 것이지요.

 

그럼 도의 작용에 대해 알아볼까요? “사물이 쓰이려면 비어 있어야 한다.”

11장 내용을 살펴보면 30개 바퀴살로 이루어진 수레바퀴도 중앙에 구멍이 없으면 바퀴축이 들어갈 수 없고 바퀴는 회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바퀴가 회전하기 위해서는 바퀴 중심에 공간이 있어야 하지요. 사물이 쓸모 있는 것은 비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유(有)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無)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릇 또한 그러한데 그릇은 그 씀씀이로 말하면 그릇으로 보이는 형태(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릇 안에 있는 빈 공간(無)에 있지요. 그런데 그릇이라 할 때 공간은 제외하고 그릇만 보지요. 이처럼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려 하는 치우침을 가지고 있어요. 따라서 그릇이라는 이름은 그릇을 온전히 다 표현한 것이 아닌 셈이지요. 노자는 그릇이라는 이름은 참되지 못하다고 봤어요.

그뿐만이 아니지요. 모든 악기는 울림통이 있어야 해요. 피리의 아름다운 소리도 빈 공간이 있기에 가능하거든요. 우리가 편히 쉬는 집도 방 안의 공간이 없고선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지요. 이러한 공간의 중요성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지요. 공기도 눈에 보이진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고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데도 우리는 공기의 은혜를 조금도 느끼지 않고 살아가지요.

이렇게 우리의 인식은 한계가 있고, 치우쳐 있으며 온전하지 못해요. 이런 이치는 작게는 세포 단위로, 크게는 우주에 대해서도 적용되지요. 우리 몸을 구성한 세포들도 빈 공간으로 가득 차고 원자를 구성하는 핵과 양성자나 중성자도 넓은 공간이 있기에 활동하여 만물을 형성하지요. 밤하늘의 별들도 허공이 있기에 아름답게 빛날 수 있고 낮의 태양도 밤의 달도 허공 없이 존재할 수 없지요.

우리의 마음도 온갖 생각으로 끊임없지만 그 배경은 비어 있지요. 비어 있지 않으면 새로운 생각이 일어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하늘의 구름은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텅빈 하늘은 본래 변함이 없어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어우러져 세계가 조화롭게 흘러갈 뿐입니다. 사실 있다 없다 구분하고 개념 지은 것도 사람의 판단일 뿐 진실로 있음과 없음은 아니지요. 그래서 노자는 도라고 할 수 없으나 도라 부른다고 한 것이지요.

이제 눈에 보인다고 있고,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고 단정할 수 없지요?

 

그러면 여기에서 이런 의문도 들 것입니다.

“그럼 도란 있는 것인가요, 없는 것인가요?”

“도는 텅 비고 깊어 분명하지 않으나 엄연히 있지요. 나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상제)보다 앞서 있었던 것 같다.”

도는 오로지 있는 듯 없는 듯 황홀할 뿐이다.

홀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있고

황은 있는 듯하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말한다.

황홀은 없는 듯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 황홀 속에 우주만상이 있고

황홀 속에 천지만물이 들어 있다. (21장)

도라는 것은 알 수 없지만 깊고 비어 있음이 뭔가 존재하는 것 같고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 없지만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노자는 말하고 있어요.

도는 깊고 그윽하여 그 안에 일체 생명의 씨앗이 깃들어 만물의 근원이 되고 자연을 깊이 바라보면 천지만물은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순환함을 알 수 있지요.

겨울이 되면 천지는 비어 고요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일어나 봄이 오면 만물이 피어나지요. 밤의 고요와 적막에서 만물이 사라졌다가 아침에 동이 트면 만물은 기지개를 켜고 활동을 시작하지요. 이와 같이 유와 무의 조화가 우주의 이치인 도라는 것이지요.

크다는 것은 끝없이 멀리 뻗어나간다는 것,

멀리 나간다는 것은 되돌아온다는 것.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고, 사람도 크다. (25장)

하여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또한 되돌아옴이 도의 움직임이지요. 노자는 멀리 우주로 펼쳐지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오는 것이 도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물은 낮은 곳을 좋아하되,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분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무심히 흐르다가 멈추고, 추우면 얼고, 더우면 증발하여 구름이 되잖아요. 물의 자유로운 모습. 그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이 도를 잘 상징하고 있지요.

 

도는 항상 하는 일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없어요.

텅 비어 있고 신묘한 도는

천지만물을 낳는데

그 작용이 무궁무진하다.

이를 신령한 계곡, 즉 곡신이라 부르고,

불가사의한 암컷, 즉 현빈이라 부른다.

천지만물이 도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도를 의지하여 천지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새로워지기를 그침이 없다.

이들을 움직이는 근본은 흐리멍덩하여

없는 듯하지만 엄연히 존재하고

무심하여 형상이 없지만 그 작용은 오묘하다.

이를 현묘라 한다. (6장)

노자는 도가 자신이 모습을 감추고 있어 검다(玄)고 했지요. 여기서 현(玄)은 깊은 연못처럼 오묘하고 그윽함을 말하지요. 헤아리기 어려운 미묘함을 뜻한다 할 수 있겠지요.

히말라야 산봉우리들이 짙은 구름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본 적 있어요?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때 그 신비하고 장엄함이란 목격하지 않으면 모르지요. 새벽 여명이 아직 탄생하기 전의 어둠은 한밤의 어둠과 달라요.

밝음과 상대적인 암흑의 어둠이 아닌 빛을 잉태한 어둠을 노자는 현(玄)이라 표현했지요. 태초의 혼돈과 같은 표현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도를 만물을 낳는 암소인 현빈(玄牝)으로 비유한 것이지요.

도는 생명을 산출하는 자궁의 문이라 (玄牝之門)

어두운 것과 같은 이치니 (是謂天地根)

아무리 써도 다하여 (綿綿若存)

없어짐이 없을 것이다. (用之不勤)

 

제4장 도(道)와 덕(德)의 관계

 

이처럼 미묘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도를 터득한 사람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지요? 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선이나 호랑이를 거느리는 산신의 모습이 떠오른다고요? 틀렸어요, 다시 생각해보아요. 아마도 옛날 도교에 대한 지식 때문에 그렇게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면 도(道)가 구체적으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주는 덕(德)에 대해서 살펴볼까요? 41장에 이런 말이 있어요.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나는 것 같고,

자유로운 도는 오히려 얽매인 것 같다.

뛰어난 덕은 골짜기 같고,

넓은 덕은 부족한 것 같다.

질박하고 진실한 것은 변하는 것 같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대기만성 大器晩成)

큰 소리는 소리가 없으며, 큰 모양은 모습이 없다.

도는 숨어 있어서 이름이 없다.

노자가 말하는 도덕은 일반적인 도리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훌륭한 것은 빛나고 우러러보이는 법인데, 도는 깊숙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형체를 볼 수 없거든요. 다시 말해 도덕의 깊은 뜻은 밖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때문에 도의 작용인 덕은 겸손하고 소박하고 부족한 것처럼 보이지요.

보통사람들은 밝지 않고 부족한 듯한 덕의 가치를 짐작할 수 없음을 비유한 것이지요. 수평선 너머를 볼 수 없다고 하여 수평선이 세상의 끝은 아니지요. 노자는 드러나지 않는 무(無)를 도(道)로, 형상으로 드러난 유(有)를 덕(德)으로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무와 유의 관계, 도와 덕의 관계는 닮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했지만 동양의 사고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지요. 도는 흑백논리로 설명할 수 없어요. 유와 무나 도와 덕도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이지요.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한 몸이면서 둘로 표현되는 거지요. 이 점을 기억하면서 《도덕경》 51장을 계속 읽어볼까요?

도는 낳고 덕은 기르며,

자라게 하고 길러 주며,

안정되게 하고 덮어 준다.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도 자랑하지 않으며,

기르고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이를 일러

그윽한 덕(현덕 玄德)이라 한다.

마치 훌륭한 어머니가 연상되지 않나요? 이처럼 도덕경의 도는 만물을 낳은 어머니예요. 서양의 창조주 개념과 비슷하지만, 내용은 다르니 잘 비교해 보도록 해요.

도와 덕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되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소유하려 하거나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는 게 특징이지요.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놓아둔다는 게 서양의 호전적인 모습과 달리 평화롭지요?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조작하여 수로를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물길을 잡아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도록 놓아두는 거지요.

훌륭한 어머니는 자식을 지배하거나 소유하려 들지 않아요. 일일이 관여하고 지배하면 아이는 반발하거나 주눅 들어요. 훌륭한 스승은 제자를 대할 때에 자신의 지시를 따르면 사랑하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처벌하지 않아요. 내가 낳았다고 자식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관여하면 자식은 반발하거나 위축되어 온전히 자랄 수 없게 되지요.

도와 덕은 자식이나 백성들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자발성과 자율성을 특징으로 해요.

노자는 도를 깨우쳐 덕을 갖춘 사람의 모습을 45장에서 이렇게도 말하고 있어요.

크게 이룬 것은 모자란 것 같지만

그 쓰임에 있어 끝이 없고,

크게 찬 것은 빈 것 같지만

그 쓰임이 다하지 않는다.

크게 곧은 것은 굽은 것 같고,

크게 교묘한 것은 서투른 것 같으며,

크게 말을 잘하는 것은 더듬는 것 같다.

시끄러우면 추위를 이기고,

고요하면 더위를 이긴다.

맑음은 천하의 정도(正道)가 된다.

이것은 노자 철학의 기본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글로, 도를 존중하고 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지요.

도를 체득한 사람의 그윽한 덕(현덕 玄德))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볼까요?

혼백을 하나로 모아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기를 모아 부드러움을 이루어 능히 갓난아기와 같을 수 있는가?

마음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어 티끌 만한 흠도 없게 할 수 있는가?

명백하게 알아 막힘이 없지만, 모르는 듯할 수 있는가?

도는 낳지만 소유하지 않고

이루지만 자랑하지 않고

기르지만 거느리지 않으니

이를 그윽한 덕이라 한다.

지극한 덕은 갓난아기와 같다고 했지요? 그럼 갓난아기는 무엇을 뜻할까요? 왜 노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갓난아기를 칭찬할까요?

55장을 보면 갓난아기가 갖추고 있는 덕을 잘 설명한 부분이 나오지요. 깊은 덕을 품은 자는 갓난아기와 같고 아기는 벌이나 독충에도 물리지 않으며, 맹수와 독수리도 잡아가지 않는다고 했어요. 뼈는 약하고 몸은 연해도 주먹을 굳게 쥐며 남녀의 성생활를 몰라도 고추가 꼿꼿한 것은 정기가 충만한 증거고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조화로움이 지극하다는 뜻이라 했지요. 마음이 억지로 기운을 부리면 강하다 하고 만물이 억지로 강하면 곧 늙으니 이것은 도가 아니라고 했지요.

노자는 약한 것에서 참으로 강함을 꿰뚫어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갓난아기를 이렇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지요.

우리가 흔히 강하다는 것은 사실 약한 것이며, 이기는 것은 사실은 지는 것이지요.

어려서 약하다가 나이 들면서 강해지는데 사실 이것은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요.

나이 들수록 갓난아기의 천진무구함을 잃고 온갖 욕심으로 마음을 어지럽히지요.

노자는 이것은 도가 아니라고 말하지요. 갓난아기의 자연스럽고 욕심없는 천진함을 배우라는 것이지요. 역설의 대가 노자의 생각은 이렇게 일반적 사고를 흔들어 놓는답니다. 우리의 가치가 뒤바뀐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보통 사람들은 노자의 역설과 반어의 가르침을 들으면 반쯤 믿다가 의문을 품지요. 혹은 말도 안 되는 소리나 뜬구름 같은 허망한 소리로 치부하여 경멸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노자의 도를 들으면 사람들은 세 가지로 반응한다고 합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 도를 들으면 힘써 실천하고, 보통사람이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 하며, 열등한 사람이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고.

도덕경을 여기까지 진지하게 읽고 있는 여러분도 보통이 아니니 긍지를 가져도 좋습니다.

어머니를 보면 그 아들을 알고,

그 아들을 앎으로써 그 어머니를 지킨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다고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하다고 한다.

그 빛을 써서 그 밝음으로 되돌아가면

몸에 재앙이 남지 않는다.

이를 일러 습상이라고 한다. (52장)

도는 만물의 어머니이고, 만물은 도의 자식인 셈이라는 것이지요. 어머니를 보면 자식을 알 수 있듯이 만물의 근본인 도를 알면 현상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고, 현상계에 너무 집착하면 근원을 잊어버리고 위태롭게 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도를 알면 위태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도의 깊은 의미를 깨우치면 살아가면서 무한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요.

35장에서도 도와 덕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어요.

대도(大道)를 지키면 천하 사람이 모두 모여든다.

오고 가는 것이 서로 다투지 않기 때문에 피차 평안하게 지낼 수 있다.

음악과 음식은 길 가는 나그네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만, 도는 담담하여 맛이 없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아무리 써도 끝이 없다.

인위적인 법이나 규정으로 다스리는 것과 달리 도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의 만족을 얻게 하지요. 좋은 음악과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지만 마음의 평화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지요. 덕의 모습은 이와 같은 도를 따른다 할 수 있지요.

그럼 38장을 보며 제대로 된 덕을 논해 볼까요?

높은 덕은 덕이라 생각하지 않으므로 덕이 있다.

낮은 덕은 덕을 잃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덕이 없다.

도를 잃은 뒤에 덕이 강조되고

덕이 사라지면 인(仁)이, 인이 사라지면 의(義)가, 의가 사라지면 예(禮)가 강조된다.

사회에서 예가 강조되면, 허위와 간사함이 나타나 어지럽게 된다.

총명한 척하는 사람은 지식으로 술수를 취하니, 실로 어리석음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덕 있는 사람은 허위와 지식에 현혹되지 않고

예의와 형식을 버리고, 도의 참된 진리를 따른다.

도에 합치된 사회는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자연스럽게 행해지나 사회를 형식과 규범으로 유지하려고 하면 허위가 곳곳에서 일어나 상상하기도 어려운 혼란이 초래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도를 체득한 덕스러움 사람의 모습은 어떠한지 《도덕경》 15장을 통해 노자의 말을 들어볼까요?

머뭇거리는 모습은 겨울에 언 강을 건너듯하고

조심하는 모습은 사방을 살피는 것 같고

의젓한 모습은 초대받은 손님 같고

포근한 모습은 겨울 얼음이 녹는 듯하고

질박한 모습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 같고

고요한 모습은 텅 빈 골짜기 같고

더불어 있는 모습은 혼탁한 것 같고

머물지 않는 모습은 마치 바람과 같다.

누가 능히 혼탁함를 고요하게 안정시켜 서서히 맑아지게 할 수 있으며

누가 안정된 것을 서서히 움직여 살아나게 할 수 있는가?

도를 터득한 사람은 항상 채우려 들지 않는다.

머뭇거림, 조심스러움, 의젓함, 포근함, 꾸미지 않음, 고요함, 더불어 함께 함, 집착하지 않음. 노자는 이러한 덕목들이 도를 따른 자의 모습이라고 했지요.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나 사회의 혼탁을 억지로 없애려 하지 말고 고요하게 놔두어 서서히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하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사회를 등지고 혼자 사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오히려 삶 속에 뛰어들어 혼탁과 더불어 살기를 강조하고 있지요. 고요하여 편안함을 즐기되 서서히 활동하여 자연스럽게 사회를 살아나게 하는 것이지요.

세상을 깊이 이해하여 자연의 도를 구하려는 노자의 태도에서 삶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지요.

 

제5장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본다

 

노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사물의 참모습을 본 게 아니고 겉과 속, 앞과 뒤 등 전체를 보아야 사물을 완전히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어서 드러난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요.

사람들은 어떤 것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여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우주와 인간을 자세히 보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서 절대자의 섭리라고 편하게 믿어버리지요. 그리고 땅은 평평하고 하늘은 둥글다고 믿어버린 나머지 땅이 둥글다고 하니까 이단이 되고 마귀가 되고 말았지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교재판을 열어 과학자들이 화형장의 재가 된 사건이 중세 때 많이 일어났지요.

선악을 구분하여 천국과 지옥을 나눴는데, 선악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노자는 거기에 의문을 던졌어요. 그래서 노자를 이해하려면 바라보는 시각을 뒤집어보지 않고서는 힘들어요.

천하가 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줄 알지만 추악한 것이며,

다 선한 것을 선한 줄 알지만 선하지 않다.

때문에 유와 무가 서로를 낳고,

어렵고 쉬운 것이 서로를 이루고,

길고 짧은 것이 서로를 나타내고,

높고 낮은 것이 서로를 채워주고 기대고,

음과 소리가 서로 조화하고,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2장)

노자가 살던 중국의 상황은 170개 나라들이 20여 개의 나라로 줄어들었다고 했었지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렇지요. 서로 전쟁을 일으켜 하나씩 집어삼켰다는 이야기입니다. 없어진 나라마다 왕이 있었으나 전쟁에 패하면 노예를 면하기 어렵지요. 그들이 찬미하며 수호하던 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말이지요. 땅에 밟히는 꽃잎처럼 보기 추한 것도 없잖아요? 승리는 아름답고, 패배는 추악하다지만, 승리 또한 언젠가 패배로 마치니 아름다움은 곧 추함이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흔히 모두가 아름답다고 하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엔 날씬한 것이 미인의 기준이 되어 다이어트가 열풍이지요. 그것도 모자라 지방흡입술과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지요. 빼빼 말랐는데도 자신은 아직 뚱뚱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먹으면 기를 쓰고 토해내곤 하지요. 아름다워지려다가 더 추하게 되거나 날씬하려다가 저체중으로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일까요? 과거의 미인은 통통했다는데 현대의 미인은 말라깽이입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변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피부색이 검은 사람이 미인이고, 어떤 나라에서는 흰 사람이 미인입니다. 어떻게 보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럼 ‘모두가 선하다고 하면 선한 것으로 여긴다’는 노자의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도 전쟁으로 해가 뜨고 달이 지던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 보아야 설명이 되겠지요. 당시 정치가들은 상벌 규정을 정해 놓고 백성들을 교묘하게 부려먹었어요. 충과 효를 이용하여 그들의 규범을 잘 따르는 것을 착하다 하며 부려먹었지요. 살인을 합법화하니 원한을 불러일으키고 보복이 꼬리를 물었어요. 복수라는 이유로 죄없는 생명들도 함께 사라졌지요. 장평대전에서 조나라의 군사들이 생매장된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진나라는 승리하여 잘된 것(善)이지만 조나라로서는 잘못된 것(惡)으로 억울하고 비통한 거지요.

악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그 나라에는 선이지만 다른 나라에겐 악이 되니 말이지요. 이 모순을 어찌 해결할 것인가요?

보석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비싼 게 무엇일까요? 그래, 맞아요.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아름다운 게 아니라 슬프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슬픈 정도를 넘어 추악하다면 더더욱 이해가 안 되겠지요? 블러드다이아몬드란 말 들어본 적이 있나요?

다이아몬드는 광산이 있는 아프리카에서 채취되어 벨기에나 런던 등에서 반지나 목걸이 등 아름다운 보석으로 세공돼 전 세계로 판매되는데 그 과정을 보면 너무 슬프고 추악해요. 식량이 부족하여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정부군과 반군이 대립하고 있지요. 정부 관료들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있고, 반군은 이에 대항하여 국민들을 위해 투쟁한다는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지요. 정부군이나 반군은 국민들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를 차지하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애꿎은 가족들이 생이별하고 부모와 자식이 총칼을 겨누는 비극이 일어나고 있지요. 유럽 강국들이 한때 아프리카인들을 지배하며 노예처럼 부리던 방식을 정부 관료들이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거지요. 아름다운 보석 다이아몬드에는 이런 슬픔이 있지요.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인간의 욕망이 추악하게 드러나는 대표적인 거라 하는 것이지요.

유와 무는 상대적(相對的)이며, 어려운 것과 쉬운 것도 상대적인 것입니다. 길고 짧은 것도 상대적이고, 높고 낮음도 상대적이지요. 악기의 소리와 음정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생기고 앞뒤는 서로 마주함으로써 생겨난 개념이요, 순서일 뿐이지요. 그래서 성인은 무위(無爲)의 태도로 세상 일을 처리하라고 해요.

아름다움과 추함, 길고 짧음, 높고 낮음, 앞과 뒤, 있음과 없음. 이러한 것들은 모두 대조되는 양극과 같은 것인데, 노자는 차이가 없다고 했지요. 이들의 차이는 모두 상대적이라는 말이지요. 겉과 속은 뒤집으면 바뀔 수 있듯이 눈에 드러나는 차이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래도 이해가 잘 안된다고요?

상대적이라는 것은 두 개념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한 몸의 양 끝과 같은 것입니다. 흔히 양 끝은 만날 수 없는 걸로 생각하지만 지구처럼 둥글면 어떨까요? 동쪽의 반대는 서쪽이어서 만나지 못할 양 끝으로 여기지만, 계속 걸어 지구를 한 바퀴 돈다고 생각해보세요. 계속 동쪽을 향해 가다보면 지나온 길이 서쪽이 된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끝까지 간다면 그 끝이 바로 처음 시작한 곳이란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동쪽도 절대적인 서쪽도 없다는 것이 상대적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노자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고 말했지요. 바다는 하나지만, 태평양 대서양 인도양 등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노자는 또 사람들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상대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분별한다는 뜻이지요. 어떤 사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분별할 때는 그보다 아름답지 못한 기억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둘을 비교하여 아름답다거나 못생겼다고 판단하는 거지요. 그래서 그냥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는 데 상대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없애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무위자연 無爲自然)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요?

예를 들어줄게요.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돌고 있다고 하는 지동설을 들어 봤을 것입니다. 중세 시대에 사람들은 별들이 움직이니 하늘이 움직이고 지구는 네모나고 편평하다고 생각했는데, 지동설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지구가 움직이고 둥글다고 주장했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과학자들은 마귀에 씌었거나 미쳤다고 생각해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했어요. 대표적인 사람으로 갈릴레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반성하고 회개하면 용서해준다는 종교지도자들의 말에 그러겠노라 해놓고 뒤돌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을 바꾼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제는 해도 달로 별들로 지구처럼 같이 움직이고, 이들이 속한 태양계도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고 태양계가 속하고 있는 우리 은하계 우주도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밝혀졌지만, 우리는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옛날에는 지구는 가만히 있고 하늘이 돌고 있다는 엉터리 같은 생각을 절대적으로 믿은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보지요. 장미꽃을 볼 때 어떤 사람은 “예쁜 곳에 웬 가시! 정말 싫어.”하면서 화를 내며 불평하지만, 어떤 사람은 “험한 줄기에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나다니 정말 놀라워!”하면서 감동하며 감탄하지요. 아름다움과 추함은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한 공간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말이 이해되지요? 행복과 불행도 마찬가지겠지요. 힘든 고난 뒤 행복이 찾아오고 행복하다 해도 위험이 닥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주위에는 명석하고 지적인 사람들이 많지요. 그들은 돈도 많이 벌고 남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어요. 그런데 그들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모두 행복하지 않아요. 왜 그럴까요? 아마 더 잘된 사람과 비교하여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능력과 재산, 지위는 마음의 평화와는 상관없지요. 실제로 미국이나 서구 선진국이 가장 행복지수가 높을 것 같지만 조사에 의하면 그렇지 않아요. 의외로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나라인 방글라데시나 네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합니다.

마음의 행복과 평화는 상대적이란 걸 알 수 있겠지요? 일시적인 행복감은 곧 외로움과 짜증으로 변하곤 합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이나 불행은 없어요.

노자는, 우리는 밝음과 어둠도 둘로 보지만 둘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하지요.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듯이 늘 맑은 날일 수 없고, 늘 비바람 몰아치는 날일 수도 없듯이 어둠이란 빛이 없는 게 아니라 빛을 등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서로 다른 여름과 겨울도 햇빛을 받는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고 북반구의 여름은 남반구의 겨울이고, 한국의 밤은 유럽의 낮이지요.

노자는 고통 속에서 희망을, 성공에서 좌절을 보라고 했지요.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할 때의 고통은 피할 수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고통으로 그치지 않지요. 극심한 산고 끝에 아기를 보는 어머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감에 젖지요.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꼭 거쳐야 될 성장통으로 알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지요. 작은 어려움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면 큰 기쁨을 맛볼 수 없지요. 정신적으로 고통을 이겨 낸 만큼 성숙한 인격을 얻게 되니까요.

세상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고정된 모습으로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매순간 변하고 있어요. 하늘도 땅도 물도 우리들이 보는 시각에 따라 변하지요.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아름다운 꽃동네로 보이고 부정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불결하고 추한 동네로 보이지요. 아름다운 것은 사실 추한 것이며, 선한 것은 사실 악한 것일 수도 있어요. 세상은 우리가 어떤 마음의 눈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지요. 그러므로 지저분한 안경을 닦듯이 얼룩진 마음을 닦아야 하지요. 노자는 모든 개념과 가치는 사람이 정한 것이며, 가치 판단은 모두 비교함으로써 생긴다고 했어요. 상대적인 관계는 항상 변하므로 가치 판단도 쉴 새 없이 변하는 것이지요. “비교하지 말고 담담히 바라봐. 자신을 괴롭히지 말고.”


《도덕경》에는 성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훌륭한 인간이라기보다 도를 깨우친 사람이지요. 성인(聖人)은 상대적 가치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움 사람을 말하지요. 만물을 성장하고 변화하는 흐름에 맡기고 일부러 손대어 고치려 하지 않아요. 만물을 성장시키고도 소유하지 않는 도를 얻어 모든 것을 성취하고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모두 이들과 같다면 참 평화롭겠지요. 노자는 도가 사라졌기에 인위적인 가르침들이 생겨났다고 말하지요. 유교의 인의예지 같은 덕목들 말이죠. 노자는 18장에서 집안에 효가 없을 때 효를 강조하고, 나라에 충이 없을 때 충을 강조한다고 말했지요. 인의를 중시하는 것도 인의가 없기 때문이지요. 매우 깨끗함을 강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불결함이 있고, 여성적인 사람은 마음속에 남성적인 부분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지요.

균형을 무시하고 한 면만을 본다면 편견이 되는 것이지요. 편견 때문에 상대를 악의 축으로 구분하고, 적과 나를 구분하여 적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기 일쑤이지요. 자신을 보지 못하면 남의 잘못과 부족함만 눈에 띄게 마련이지요. 네 탓만 있고 내 책임은 없지요. 상대적 옳음이나 아름다움은 모두 분별심의 소산이지요. 이러한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이고 자연(自然)이지요.

이로써 성인은 함이 없는 일(無爲)에 머물고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한다.

성인은 만물이 일어나도 물리치지 않고,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베풀어도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공(功)을 이루어도 높은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오직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의 업적도 떠나지 않는다.

노자는 무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러한 가치관을 가졌다고 했어요.

그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럽고 소탈하고 편하며, 어떤 가치관에 매여 있는 게 아니어서 어떤 신념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지요. 대상을 지각할 때 좋아함과 싫어함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어떤 차별도 없으니 절대 평등하고 절대 자유인이지요. 자신의 공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아서 명예욕으로부터 벗어난 사람, 부를 낳되 혼자서 가지려 하지 않는 절대 부자. 정신적인 명예건 물질적인 부이건,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니 무소유인(無所有人)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정말 멋있는 사람이지요?

 

제6장 성인은 자랑하지 않는다

 

모든 강물을 봐요. 바다로 흘러들지요? 모든 초목을 봐요.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요?

바다처럼, 대지처럼, 도는 모두의 고향입니다. 만물이 뻗어 나가되 그 뿌리로 돌아가듯이, 온갖 것과 어울리되 근본을 잃지 않는 사람,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자연의 본성으로 돌아간 사람, 노자는 이러한 사람을 성인이라 말했지요. 성인은 만물이 근원으로 돌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참된 고요을 지켜 영원한 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러므로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성인의 길이지요.

마음 비우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잘 지키면,

만물이 일어나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만물은 무성했다가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가니,

그것을 고요함이라고 하고 천명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16장)

마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마음을 흔히 창고나 집으로 비유하곤 하지요. 마음속에 들어있는 내용들이 무엇일까요? 그렇지요. 생각, 기억, 감정, 온갖 욕망이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지요. 평소 우리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러한 내용물들이 어지럽게 날뛰고 있지요.

어떤 이는 마음을 하늘에 비유하지요. 온갖 구름이 일어나 하늘을 덮으면 본래 고요하고 비어 있는 푸른 하늘을 보기가 어렵겠지요? 어떤 이는 마음을 연못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또 어떤 이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해요. 깨끗한 거울은 사물을 맑게 비춰 주지만 먼지와 때가 끼면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요?

마음을 바다에 비유할 수도 있어요. 바다에 바람이 불면 파도가 커지지요? 때론 엄청난 파도가 산더미처럼 몰려왔다가 몰려가면 바닷가 조그만 집들은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려요. 파도가 일면 바다 본래의 잔잔함은 잃어버리게 되지요. 마음도 바다와 같아서 풍랑이 일면 분노, 화가 일어나는 거지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다는 표현이 있지요?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살기가 등등하여 미쳐 버린 것 같아요. 욕망에 사로잡혀도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는 배처럼 안정을 잃어버려요. 의심, 짜증, 불안 등에 가려져도 사물을 바르게 관찰하지 못하고 평정을 잃게 되지요.

노자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마음을 닦고 비워 잔잔한 상태로 회복시켜야 하는 거지요. 그래야만 만물이 생겨나고 순환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어요.

노자는 영원한 도를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여 지혜로워지고 영원한 도를 알면 관용할 수 있고, 관용하면 공명정대 할 수 있고, 공명정대하면 온전할 수 있다고 말하지요. 온전하면 하늘에 부합하고 하늘에 부합하면 도에 부합하고, 도에 부합하면 영원하여 위태롭지 않다면서 영원한 도를 알지 못하면 태풍이나 해일 같은 재앙을 만난다고 경고하지요. 도에 부합되어야만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노자가 말하는 도에 부합되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만물의 생성과 소멸, 곧 우리의 탄생과 죽음을 열린 빈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삶을 말하지요. 그러면 우리는 지극히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거든요.

노자는 4장에서 “도는 속이 비어 있는 그릇과 같아 써도 차고 넘치는 법이 없다. 도는 깊은 연못과 같아서 모든 것의 근원이 되고, 도의 본체는 허공처럼 비어 있지만 그 작용은 다함 없이 무궁무진하다”고 했지요. 마음을 지극하게 비운 사람은 무궁무진한 창조력을 발휘하여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 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이제부터 마음 먼지와 때를 벗기고 마음을 지극하게 비우고 고요하게 하여 도와 부합되는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지요.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 중 56장에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이 있어요.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을 줄인 말로 화광(和光)이란 빛의 강함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말이고, 동진(同塵)은 티끌과 하나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럼 화광동진의 속뜻은 무엇일까요? 해를 쳐다본 적이 있나요? 너무 강렬한 빛은 눈을 다치게 할 수도 있지요. 화광(和光)이란 재능을 뽐내지 말란 뜻을 담고 있지요. 동진(同塵)은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맞추어 교만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어요.

똑똑함을 드러내지 않고 평범함과 함께 한다는 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겠지요?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으되 드러나지 않는 도처럼 성인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을 자랑하면 주위의 비난과 시샘을 받게 될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오히려 두려워하고 인정하지요.

사람을 볼 때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면 속기 쉽지요. 눈으로 멋있게 보이고 그럴듯한 언변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보고 사람 됨됨이를 보아야 하듯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외부의 날카로운 자극을 부드럽게 여과시켜서 감각적인 판단을 이성적인 판단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좀 더 쉬운 예를 들어줄께요.

실력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있으므로 겉모양에 그리 집착하지 않지요. 실력이 없는 사람은 자신감이 없으니 겉으로나마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요. 눈을 사로잡는 현란한 빛깔과 향기로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없지요. 학력과 미모로도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없어요. 평생 같이 살 배우자를 정할 때 재산이나 학벌, 용모 등을 우선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후회하지요. 가까운 예로 미모의 탤런트와 재벌 2세가 결혼해서 파경에 이르거나 인기 연예인들이 신혼 초부터 폭력문제로 갈라서는 경우를 자주 보곤 하지요.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자의 성격이라는 연구보고가 있어요. 특히 결혼생활을 오래한 중년부부들은 이구동성으로 성격을 꼽았지요. 사람됨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겠지요? 아무리 아름다운 화장품과 향수로 몸을 치장해도 그 사람의 됨됨이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은 아니지요. 화장을 하지 않고 성형수술로 얼굴을 고치지 않아도 인격의 향기는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와 사람들을 감동시키지요.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사물의 겉모습만 좇으며 온전함과 넘치기를 바라기 때문에 수많은 다툼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또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한 나머지 많은 다툼이 생기기도 하지요.

노자는 자랑하려고 억지로 노력하거나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것을 24장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어요.

“발끝으로 서는 사람은 오래 설 수 없고,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다. 제 생각대로 보는 사람은 사물에 밝을 수 없고, 제 생각대로 옳다고 하는 사람은 옳고 그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을 과시하려 하면 주위의 반발을 사게 되지요. 도는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그 안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어요. 도를 깨우친 사람은 인위적이거나 약삭빠르지 않아요. 늘 자기 이야기만 하고 남의 이야기는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래요. 그런 사람은 따돌림받거나 멸시받겠지요. 회오리바람은 한나절 이상 불지 않고, 소나기도 하루 종일 내리지 않아요. 하늘도 부자연스러운 것을 오래 지속할 수 없는데, 하물며 인간이 자연스럽지 못한 행동을 오래 하는 것은 어떨까요? 자신의 주장과 공만 내세우다 보면 오히려 비난을 받게 되지요. 재능은 갖추되 내세우지 않는 것이 도와 가깝지요.

《논어》에서 공자는 자로에게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고 했어요. 매우 훌륭한 말이지요. 그런데 노자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라”고 했지요.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는 게 사람들의 일반적 병폐이지요. 그런데 대부분 그러한 자신의 병을 모르고 있어요. 그렇지만 성인은 스스로 자신의 부족함과 알지 못함을 깨닫고 있는 것이지요. 노자의 앎은 그 앎마저 현명하지 못하다 하여 모른 척하라고까지 했지요. 그렇다고 모른 것과는 다르지요. 공부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지요. 알되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지혜롭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노자는 22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구부리면 온전하고

휘어지면 곧아지며

우묵하면 채워진다.

낡으면 새로워지고,

적으면 얻고, 많으면 어지러워진다.

이런 까닭에 성인은 하나(道)를 알고

천하의 모범이 되니,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까닭에 밝고

스스로 옳다 하지 않으므로 빛난다.

오직 다투지 않을 뿐이라 천하 사람이 그와 다툴 수 없다.

구부러지고 휘어짐은 모든 사물의 자연스런 모습이지요. 산맥이 뻗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요. 강도 직선으로 내달리는 것 같지만 휘휘 감아 굽이굽이 흘러가고, 활도 휘어야 쏠 수 있어요.

이것을 사람에 적용하면 무슨 뜻이 될까요? 휘어지고 구부러짐은 곧 부드럽고 겸손함을 말하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옳다 주장하면 다툼이 일어나니 겸손하여 스스로를 낮추면 다툼이 없어지지요. 연약한 가지는 부러지지 않는데, 강한 가지는 부러지는 것처럼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과도 연결되지요. 물은 땅이 우묵한 곳에 차듯이 욕심이 적으면 오히려 만족을 얻을 수 있지요.

노자의 반어법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위함이란 걸 알 수 있지요?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어지럽다는 뜻이지요. 48장에, ‘학문을 하는 것은 날로 보태는 것이고 도를 행하는 것은 날로 덜어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즉,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학문이라는 것이지요. 분별심과 욕심 등 마음의 장애를 덜어내고 덜어내면 마침내 본래부터 있는 성품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지혜로운 자는 말이 없다고 했지요? 말없이 가르치는 불언지교(不言之敎)는 형식적인 규범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은연중에 이끄는 것을 뜻해요.

말은 믿음과 관련이 깊지요. 믿음이란 한자는 신(信)이지요. 그건 사람의 말이란 뜻이지요. 말처럼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도 없어요. 우리 속담에도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등이 있어요.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삶에서 말은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말만 앞세우고 실천하지 않으면 식언이고 허언이라 하지요. 말을 먹어버리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되지요. 성서 잠언에도 ‘함부러 뱉는 말은 비수가 되지만 슬기로운 사람의 혀는 남의 아픔을 낫게 한다. 참된 말은 길이 남지만 거짓말하는 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잘린다.’고 하였으니 말의 위력을 알 수 있겠지요? 이러한 말을 노자는 어떻게 이야기했을까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그 날카로움을 꺾고, 그 얽힌 것을 풀고,

그 지혜의 빛을 거두어들이고, 속세에 동화하는 것.

이를 일러 현동(玄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가까이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서 가장 귀한 사람이 된다. (56장)

노자는 지혜로운 자는 행실을 귀히 여기고 말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했지요. 날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은 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사물을 완전히 초월하여 욕심이 없는 사람은 친할 수도 멀어질 수도 없고 이익을 줄 수도, 해로움을 끼칠 수도 없고 귀하게도 천하게도 만들 말이 없으면 도와 합일한다는 것이지요.

즉, 말없이 사랑하고 아무도 모르게 봉사하고 눈에 드러나지 않게 좋은 일을 하는 것. 칭찬과 격려의 말은 힘을 주지만 상처를 주는 말은 힘을 꺾는 법, 말은 적게 하고 베푸는 행동은 크게 하는 것이 자연의 도와 맞는 성인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7장 칭찬과 비난에서 자유로운 사람

 

천지가 영원한 까닭과 성인이 영원히 존경받는 까닭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도덕경》 7장에서 노자는 천지가 영원한 것은 스스로를 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지는 만물을 싣고 있지만 조금도 자신의 공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성인도 한결같이 자신을 뒤로 하고 남을 위하기에 영원하다. 모든 일에 있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음으로써 그 이득을 본다. 자신을 뒤로 함으로써 숭배를 받는다고 했지요. 천지와 성인이 영원한 까닭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도 천지를 본받아 이기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자신을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지요.

5장에서도 천지와 성인은 공평하다고 하였는데 같은 말이지요. 천지는 공평하여 세상 만물을 똑같이 여긴다. 하늘의 태양도 모든 만물을 비추어 생장시키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땅에 내리는 비도 골고루 내려 어떤 곳을 편애하지 않는 것처럼 성인도 백성을 똑같이 대한다는 거지요.

노자는 《도덕경》 13장을 통해 이렇게 말했어요. 칭찬과 비난은 모두 놀람같이 하고, 큰 재앙은 내 몸같이 여긴다.

칭찬과 비난을 놀람같이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랑받는 것을 최상으로 여기고 비난을 최하로 여겨 얻어도 잃어도 놀라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인기 연예인들은 인기가 많을 때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고 인기가 떨어질 때는 죽고 싶은 심정이 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지나치게 마음을 쏟기 때문에 칭찬이나 비난을 받게 되면 마음이 몹시 흔들리게 되죠.

그러면 칭찬과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칭찬을 높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비난은 낮은 것으로 보고 모욕을 받으면 창피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유명해지기를 좋아하고 이름이 더럽혀지는 걸 싫어하지요. 출세했다고 우쭐대지 않고 실패했다고 한탄하지 않는 사람은 보기 드물지요. 칭찬이나 비난은 좋아하고 싫어할 게 아니라 칭찬도 비난도 경계해서 늘 조심하라는 것이지요. 항상 마음을 다스려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크게 출렁이지 않게 해야 하지요.

또한 큰 재앙을 내 몸같이 여긴다고 하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가 큰 재앙을 당했다고 여기는 것은 내 몸이 있기 때문이지요. 칭찬도 비난도 받을 내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누워서 침 뱉기’라는 속담이 있지요? 그래요, 욕을 하면 그 욕이 도로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말하지요. 그래서 노자는 자신을 버려야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 것이지요.

일찍이 부정이 대긍정이 되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 노자입니다. 긍정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요. 이것은 모든 걸 긍정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지요.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고, 아무리 잘못해도 장점을 살리는 심리학이지요. 항상 웃으려 하고 항상 격려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지요. 사실 노자는 자연주의, 평화주의, 민주주의를 제창한 최초의 인물이자 긍정심리학의 대가이기도 하지요.

순간적인 만족에 머물지 않고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면 남을 위해 봉사를 해봐요. 순간적 쾌락은 많지만, 그 어느 것도 지속적일 순 없다고 했지요. 가장 은은하게 지속적으로 행복감을 주는 것은 자신보다 남의 행복을 위해 뭔가를 하는 기쁨일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보다 남의 행복을 찾고자 할 때 진정 자신을 살리고 진리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도 같은 말을 했지요. 마태복음에 이런 글귀가 있어요.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다.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할 것이다.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계산에 밝은 이기적인 자기를 죽이는 길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설명한 것이지요.

노자와 예수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공통점이 없지만 같은 말을 하고 있어요. 불교에서도 이와 같은 뜻으로 무아(無我)란 말이 있지요. 《장자》 소요유에도 ‘사사로움이 없으면 명예나 굴욕도 없다.’ 했어요. 그러자면 사람은 사리사욕과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없애야 해요. 그럼 어떤 명예나 치욕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죠.

그래서 노자는 진정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자라면 천하를 맡길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성인은 천하를 나와 함께 한 몸으로 보고 조그만 자신을 위하지 않는 까닭에 공정하다고 한 것이지요. 마치 태양이 천하 만물을 고루 비추는 것처럼 마음을 평등하게 써야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굴욕을 피하고 영화만을 추구하며,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린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얼마나 되는가?

대도(大道)는 매우 광대하고 무궁무진하여

세속과는 큰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는데,

나만 홀로 흐리멍덩한 모양이로다.

사람들은 모두 영리한데,

나만 홀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20장)

사람들은 모두 무엇을 이룬 것 같은데 나만 홀로 우둔하고 멍청하다고 노자는 독백하지만 바로 그것이 도를 체득한 자의 생활방식이라는 걸 알 수 있지요. 환경이나 대상에 끌리지 않고 안으로 평정을 지키는 성인의 삶은 물과 같다고 노자는 말하지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도와 가깝다. 머물 때는 머무는 곳을 잘 선택하고, 마음을 쓸 때는 연못처럼 깊게 하고, 남들과 함께할 때는 자애롭게 하고, 말을 할 때는 믿음 있게 하고, 다툼이 없으므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삶의 방식은 물처럼 사는 것.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도덕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지요. 노자는 도와 덕을 갖춘 참사람(성인)은 물처럼 살아간다고 강조하지요. 도를 비유하여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자연 가운데 물이지요. 그래서 《도덕경》에 물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요.

그럼 물의 어떤 점이 그러할까요? 첫째, 물은 만물을 키우는 일을 하지요. 물은 생명의 근원이지요. 사람 몸의 70%가 물이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겠지요? 모든 생명체의 바탕이라는 점에서 생명수라 할 수 있지요. 물은 만물에게 베풀면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아요. 성인도 물처럼 모든 사람에게 베풀되 보답을 바라지 않아요. 물이 만물을 키우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이예요. 무언가 베푼다고 의식하면 곧 허물이 되고, 생색을 내게 되고, 계산을 하게 되고, 마음이 불편해지게 되지요.

둘째,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죠. 산이 막히면 돌아갈 뿐이지, 산을 탓하지 않아요. 이처럼 성인도 겸손하여 자신을 높이지 않고 남과 다투지 않지요.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지면 교만해지기 쉽지요. 공을 이루면 물러설 줄 아는 자가 현명하지요. 교만하여 자신이 잘나서 그런 줄로 착각하면 철퇴를 맞기 쉽거든요. 집 안에 금과 옥이 많으면 언제 도둑이 들지 알 수 없으니 근심이 많아지지요. 지위가 높아지면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 늘 마음이 불안하죠.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제명에 죽지 못하고 독살이나 암살된 자가 많아요. 따라서 형제를 죽여야 안심하고, 측근을 믿지 못하여 수시로 추방하고,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못했겠지요. 호화로운 황실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움켜쥔 대가가 너무 비참하지요?

셋째, 물은 어떤 그릇에 담겨도 그 그릇에 순응해요.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게 되고, 네모진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지요. 어떤 상대도 거스르지 않고 밀어내지도 않아요. 성인은 마음이 늘 비어 있어 어떤 생각도 받아들이고 어떤 생각에도 사로잡히지 않아요. 성인은 고정된 신념이 아닌 유연한 사고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겠지요. 그래서 성인은 모든 걸 자연에 맡기고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것이지요.

넷째, 물은 더러움을 씻어주지요? 세수와 목욕도 물로 하고 청소도 물로 하고, 세탁도 물 없이는 못 하지요. 물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정화작용이지요. 기독교에서는 세례의식이 있고, 힌두교도들은 일생을 마칠 때 갠지스 강으로 가서 목욕하며 죄를 씻는 의식을 하지요. 새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보다 나은 새로운 삶이 되길 바라는 거지요. 그런데 잘 보면 물은 만물의 더러움을 씻어주면서도 그 더러움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눈살 한 번 찌푸리는 법이 없지요. 남의 허물, 나아가 세상 허물을 대신 진다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흉내도 못 낼 일이지요. 깊은 연못처럼 참사람은 마음을 비우고 침묵을 지키지요.

20장의 ‘도는 바다와 같다.’는 말도 같은 뜻이지요. 바다는 이 세상 모든 물이 흘러들어와도 담담하고 불평이 없지요. 좋은 물, 나쁜 물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지요. 성인도 물과 같아서 높이 있어도 남에게 위세를 부리지 않고 권위 또한 느끼지 않으니 불편할 일도 없어요. 물을 본받으면 다툼이 없어지고 남을 이롭게 하면서 허물이 없어 도와 가까워지죠. 자아(自我)를 없애고 남과 다투지 않으면 도에 부합되는 것이지요. 남을 돕되 나타내지 않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가장 훌륭한 인격도 이와 같은 심성과 행위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어요. 하여 남들이 꺼리는 곳도 자진해서 갈 줄 알며 남이 싫어하는 일도 스스로 해야 하지요. 즉, 소와 같은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지고 갖은 모욕을 견디는 성품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자기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남을 위해 일하면서 결코 공을 내세우지 않고 명예와 이득을 탐내지 않아요. 이것이 바로 노자의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툼이 없는 사상이지요.

이렇듯 도를 물에 비추어 말할 때가 많은데, 그렇다고 물이 부드럽고 겸손하기만 한 건 아니지요. 78장에서는 천하에 물보다 약한 것은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치는 데는 물을 이길 것이 없다고 했어요. 아무리 단단한 돌도 빗방울이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구멍이 뚫리지요. 바닷가 절벽의 동굴이나 아름다운 석회암 동굴도 누가 만들었지요? 맞아요, 물의 힘이지요. 물은 굳세고 강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한꺼번에 일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십 년이고 백 년이고 지루해 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성을 다한 결과이지요.

 

제8장 훌륭한 지도자

 

도를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는 만물을 낳는다고 했지요? 도는 만물의 어머니라 할 수 있어요. 이렇듯 도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어머니란 누구일까요? 과연 어머니의 덕성이라면 무엇일까요?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나를 어떻게 대했을까요? 어머니는 자나 깨나 늘 옆에 두고 갓난애를 보살피셨지요. 행여 다칠까 봐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무리 성가시게 굴어도 마다하지 않았지요. 그렇다고 무엇을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지요. 자란 후에 평생 옆에 두려 하지도 않아요. 훌륭한 어머니는 자기 욕심대로 자식을 지배하지 않지요. 자식 키운 걸 자랑하려 들지 않고 자식에게 보답을 바라지도 않지요. 자신을 버리고 자식에게 헌신하되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지요.

노자는 34장에서 어머니 같은 도의 모습을 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온갖 것이 의지하고 살아도 이를 마다하지 않고, 일을 이루고도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또한 66장에서 ‘성인은 백성들 위에 있으려 할 때는 말을 함에 있어 자신을 낮추었고 백성들의 앞자리에 있으려 할 적에는 반드시 자신을 그들 뒤로 미루었다.’고 했어요. 이 또한 어머니의 모습을 한 성인의 태도 중 하나라 하겠지요.

도는 아무런 욕심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텅 빈 모습이 이보다 작을 수 없어요. 언제나 욕심 없으니 이름 하여 ‘작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반면에 온갖 것이 모여들어도 주인 노릇 하지 않으니, 이름 하여 ‘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성인은 스스로 위대하다 하지 않아요. 그러기에 위대한 일을 이루 수 있지요. 마치 어머니처럼 말이죠. 이러한 어머니를 닮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노자는 52장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세상은 시작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의 어머니이다.

어머니를 알면 자식을 알 수 있다.

그 자식을 알고 그 어머니를 지키면

몸이 다 하는 날까지 위태로울 것이 없다.

입을 다물고 문을 닫으라.

평생 애태울 일 없을 것이다.

입을 열고 일을 벌여라.

평생 헤어나지 못랄 것이다.

작은 것을 보는 것이 밝음이다.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이 강함이다.

빛을 쓰되 밝음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몸을 망치는 일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영원을 배우는 것이다.

노자는 밝음으로 돌아가라, 도로 돌아가라, 근원으로 돌아가라고 하지요. 이 말은 현상에 머물지 말고 근본으로 돌아가란 말이지요. 《도덕경》의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되돌아감’이지요. 한 방향으로 무작정 가는 것은 발전이 아니란 말이지요. 어느 정도에서 돌아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등산을 해 본 적 있어요? 산을 오르다 보면 직선으로만 오를 순 없어요. 어느 곳에서는 돌아가야 하니까요. 구불구불 길을 오르다가 능선을 만나지요. 능선에 일단 올라도 정상까지 가는 데에는 봉우리를 수없이 넘고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하지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정상에 도달하게 되겠지요. 정상에서도 계속 오르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허공에 발을 딛는 것과 같아 불가능한 일이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욕심을 멈출 줄 몰라 하늘에 닿고자 하지요?

정점에 이르면 다시 돌아설 줄 알아야 한다는 이치는 어려울 게 없어요. 하루의 변화를 보아도 알 수 있고 달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보름달은 반달이 되더니 이윽고 그믐달이 되었다가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초승달로부터 상현달이 되더니 보름달이 되지요. 달의 변화와 같이 계절도 마찬가지이지요. 나무는 흙으로부터 물과 양분을 받아들여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잎이 무성하다가 가을에 낙엽 되어 겨울에 흙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도 그러한데, 그 이치를 실천하는 것은 어려워요. 노자는 밝음이란 도를 아는 것이고,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이라 했어요. 작은 것이란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자연의 도를 말하지요. 물은 늘 옆에 있어서 비싼 줄 모르지요. 하지만 가물어서 물이 없을 때, 논밭이 타들어갈 때 비로소 물의 귀중함과 고마움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공기도 보이지 않아 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밀폐된 공간에 갇혀서 산소 부족 상태를 겪어본 사람은 공기의 소중함을 알아요. 이처럼 작은 것을 볼 수 있어야 소중함을 느낄 수 있어요.

또한 작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컫기도 하지요. 우리는 현상의 겉모습만을 보고 안에 있는 본질은 보기 어려워해요. 도는 만물의 근원이라 모든 현상의 근원이기도 해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도를 보려면 현상을 잘 살펴야 해요. 독버섯을 예로 들면 아름다운 색깔로 눈을 유혹하는 버섯은 대개 독을 품고 있어요. 그걸 모르고 먹으면 목숨이 위태롭게 되겠지요. 그처럼 현상의 겉만 보아서는 안 되지요. 드러나지 않은 작은 것을 볼 수 있어야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겠지요.

그럼 문(門)을 닫으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사람에게는 문이 여섯 개가 있어요. 시각의 문인 눈, 청각의 문인 귀, 후각의 문인 코, 미각의 문인 혀, 촉각의 문인 몸, 생각의 문인 마음. 이렇게 여섯 문을 통해 온갖 욕망이 일어 마음이 혼란스럽지요. 이 문을 잘 다스리는 게 수양의 요점이라 할 수 있어요. 시작을 아는 것은 곧 근원을 안다는 것이고, 현상 너머 본질을 꿰뚫는다는 의미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을 다스리고 마음을 살펴 내면을 봐야 해요.

그러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노자는 5장에서 ‘말을 많이 하고 법규가 많으면 오히려 막히니 속을 비워 지킴만 못하다.’고 했지요. 그래서 노자는 성인은 무위에 자리하면서 말없는 가르침을 베푼다고 했지요.

어찌 말하지 않고 가르칠 수 있을까요? 진짜로 말하지 말라는 것과는 다르지요. 우리는 항상 자신의 총명을 믿고 자기 주장만 해요. 상대방의 의견은 인정하려 하지 않아요. 말이 많을수록 도에서 멀어지고 쓰라린 상처와 회한만 남지요. 부모와 자식의 갈등도 부당한 간섭과 잔소리에서 시작하지요. 노자는 63장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함이 없음(무위 無爲)을 실천하고

일 없음(무사 無事)을 실행하여

맛 없음(무미 無味)을 맛보도록 하라.

작은 것도 큰 것 같게 여기고

적은 것도 많은 것으로 여기며

참된 덕으로 원한에 답하라.

큰 원한은 아무리 달래도 얼마간 원한이 남아요. 그래서 성인은 물건을 빌려준 빚문서는 받아두고 독촉하지 않지요. 그래서 남에게 원한을 사는 법이 없어요. 남의 입장을 항상 헤아려 쪼들리고 있는 사람을 다그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도와 일치하는 성인의 마음이지요.

노자는 17장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에게 네 등급이 있다고 하면서 힘이 없는 정치, 말을 아끼는 정치를 가장 위에 두고 있어요. 가장 훌륭한 군왕은 백성들이 그의 존재를 느끼지 않지요. 다음은 덕과 인의로 다스리는 군왕이지요. 세 번째는 위압적으로 다스려 두렵게 하는 군왕, 네 번째는 권모술수로 백성을 속이는 군왕이지요. 군왕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이 믿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대체로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에서 많은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들만 잘사는 경우를 볼 수 있어요. ‘피의 다이아몬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외치면서 내전을 일삼아 수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아프리카의 현실이지요. 독재를 해서라도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국민들을 힘으로 지배하는 통치자도 있지요. 하지만 백성들이 불안해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훌륭한 정치이지요.

훌륭한 군왕은 말을 귀중하게 여기며 공을 이루어도 자신의 공으로 자랑하지 않아요. 모든 일을 성공시키고 뒤로 물러나도 백성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지도자.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여기게 하는 지도자야말로 자연의 도를 몸으로 터득한 가장 훌륭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를 해보지요.

어느 날 양주라는 사람이 노자를 찾아갔어요. “만약 어떤 사람이 능력이 있고 사리에 통달해 있으면 훌륭한 군왕이라 하겠습니까?” “호랑이와 표범은 무늬 때문에 사람들에게 잡히고, 원숭이는 민첩한 재주 때문에 잡히는데, 그들에게 지혜가 있다고 할 수 있겠소? 재능이 있으면 남에게 부림을 받고 얽매여 도와는 점점 멀어진다오.” “그렇다면 훌륭한 군왕은 어떠해야 합니까?” “훌륭한 군왕이 천하를 다스리면 스스로 공을 내세우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고도 백성들이 그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하오. 공기처럼, 물처럼 예측할 수 없어야만 훌륭한 군왕이라 할 수 있다오.” 이처럼 노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질 때에는 백성들이 군왕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지요. 정권의 규제와 압력이 없기 때문에 평안하고 여유 있게 살아가는 거지요.

노자는 권력의 횡포가 없고, 백성이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는 것을 으뜸으로 생각했지요. 가장 훌륭한 정치는 바로 무위로 다스리는 것이지요. 통치자는 우리 몸의 심장과 같아요. 건강한 심장은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해요. 심장이 날마다 뛰고 있다는 걸 느끼면, 그 심장은 병이 든 것이지요. 군왕이란 요즈음의 대통령이나 수상에 해당되지만, 가정에서 부모, 학교에서 교사, 회사에서 각 부서장도 군왕이라 할 수 있어요. 이처럼 군왕이란 모든 영역의 지도자를 말하지요.

또한 노자는 ‘고기는 물의 고마움을 모르고 사람은 공기의 중요성을 모른다. 도를 본받을 때에는 인의가 그 가운데 스며들어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도를 모르면 인의가 생기고, 교활한 지혜가 나타나 큰 거짓이 생긴다.’ 라고 말했어요. 즉,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자 효도와 사랑이 강조되고, 국가가 혼란하자 충신이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또한 선행과 덕행을 표창하는 것도 사회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지요. 선행과 덕행이 자연스러운 일이 못 되고, 그런 일이 매우 드문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국가가 안정되면 굳이 충신이 필요하지 않고, 가정도 화목하다면 굳이 효를 강조할 필요가 없겠지요. 노자는 그렇지 못해 충신이 나타나고 사랑과 효를 강조하는 거라고 말했지요.

노자는 인의, 지혜, 효자, 충신 등은 모두 도가 사라져서 나타난 거라고 말하지요. 금지하는 규범이 많을수록 가난해지고 무기가 많을수록 불안이 커지고 법규가 많을수록 도둑이 많아진다는 말들도 모두 같은 뜻이지요. 백성은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규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통나무(도의 상징)가 된다는 거지요.

노자는 3장에서 현명함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게 되고, 귀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도둑질을 하지 않아요. 하고자 하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 성인의 다스림은 마음을 비우고 배를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여 항상 백성들로 하여금 앎도 욕심도 없게 하며, 지혜로운 자로 하여금 감히 하지 못하게 하지요. 즉 무위란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지도자가 현명함을 좇지 않으면 백성도 서로를 내세우지 않으니 다툼이 없을 것이며,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성 또한 부와 명예 때문에 싸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노자는 나라의 때 묻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사직의 주인이라 말하고 나라의 상서롭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천하의 왕자라고 말하지요.

지도자가 명예와 이익을 탐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백성들은 서로 다투기에 정신없을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인의 정치는 백성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편안하게 배를 채우되 헛된 욕심을 비우게 하지요. 백성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지도자여야 훌륭한 지도자라 할 수 있어요. 그러려면 많이 알아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 날뛰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2장에서 성인은 무위(無爲)에 거처하여 말없는 가르침을 베푼다 하였지요.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워 말이 많으면 진실과 멀어지게 되어 있어요. 자신을 드러내고자 말을 만들기 쉽기 때문이지요. 학생들을 다스리려고 법규를 많이 제정하는 학교는 참교육과 거리가 멀지요. 독재국가에서는 법이 왕이고,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이 왕이지요. 법령이 많고 규제가 많으면 국민들의 불만이 깊어지고 도와 멀어져요. 자율적으로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게 하고 책임지게 하는 것이 자연의 도와 일치하는 것이지요.

말을 많이 하기보다 침묵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이 훌륭한 지도자의 자세라고 하겠지요. 4장에서도 ‘말을 많이 하면 자주 막히니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중심을 지키라.’고 했지요. 오늘날 정치인들이 새겨야 할 말이지요.

또한 26장에서는 통치자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어요.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시끄러움의 임금이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종일토록 행함에 있어

신중함을 떠나지 않는다.

어찌 한 나라의 임금이

경박한 행동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가벼우면 근본을 잃고, 시끄러우면 임금을 잃는다.

경박한 지도자는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모든 행동과 처신이 경솔하여 일정한 원칙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노자는 한 나라의 통치자는 신중해야 하며, 즉흥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지요.

 

제9장 진실로 현명한 자, 진실로 위대한 자

 

지금까지 도와 덕에 대해 살펴보고, 도와 덕을 갖춘 자의 모습을 공부했지요? 이제부터는 스스로 도를 어떻게 키우고 길러야 할 것인지 알아볼까요? 남을 살피기는 쉬워도 자신을 살피기는 어렵지요. 거울이 없던 시절에는 자기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었겠지요. 나르시스라는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그는 연못에 비친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매일 한없이 바라보다가 어느 날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를 만지려다가 물에 빠져 죽었지요. 물론 나르시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반한 거지요. 그래서 나르시즘을 자기애(自己愛)라고 말하지요.

이처럼 자신을 알기는 어려워요. 남의 잘못은 현미경처럼 들여다볼 수 있지만 자신의 문제는 등 뒤에 쓰인 글과 같아 알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늘 남의 허물을 가지고 화제를 삼으며 즐거워하고 남의 잘못만 보고 싸우기 일쑤이지요. 자신을 잘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노자는 개인의 수양에 대해 33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자는 밝다.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고,

자기를 이기는 자는 강하다.

만족함을 아는 자는 부자이고,

힘써 행하는 자는 뜻이 있다.

그것을 잃지 않는 자는 오래 지속되고,

죽어서도 잊히지 않는 것을 장수라 한다.

노자는 남을 아는 것은 지혜라 하고, 자기를 아는 것은 밝음이라 했어요. 노자는 지혜보다 밝음을 위에 두고 있는데, 밝음은 도를 아는 것 또는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지요.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도를 얻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흔히 ‘도통한다’는 표현을 쓰면서 남의 마음을 알거나 미래를 아는 등의 신비한 능력 또는 신선처럼 영원히 사는 것을 상상하지요. 노자는 지극히 평범하게 자신을 아는 것이 밝은 도라고 말하죠.

이와 같은 뜻을 말한 철학자가 서양에도 있었지요. “제 자신을 알라!”라고 말한 바로 서양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지요. 동서양의 성인들이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건 근본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결국 자기 자신을 모르고서 도를 이야기하거나 정치나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거지요.

남을 이기는 것은 힘 있다 하고, 자기를 이기는 것은 강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럼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영웅은 누구일까요? 헤라클레스? 힘센 그리스의 신이지요. 삼손, 항우, 알렉산더, 시황제, 칭기즈 칸, 나폴레옹이라고요? 모두 한 시대를 호령한 영웅들이지요. 그러나 가장 힘센 사람은 세상을 정복한 그들이 아니라, 자신을 정복한 사람이지요. 남을 이겼지만 자신을 이기지 못한 사람을 강하다고 할 수 없지요. 자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감정을 이기지 못한다는 거지요. 위의 영웅들이 자신을 정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남을 이기는 건 힘이 세거나, 무술을 배우거나, 공부를 잘하면 되지만 자기 자신을 이기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힘이 세거나 공부를 잘한다고 자기 자신까지 이긴다 할 순 없지요. 해야 할 일을 위해 마음을 이기고, 화가 몹시 날 때 폭발하기는 쉬워도 참기는 어려워요. 아름다운 물건을 보면 갖고 싶지만 모두 가질 수는 없지요. 아름다운 얼굴과 목소리에 홀리지 않고 마음의 고요함을 유지하는 것, 욕망과 분노를 다스리는 것이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남을 아는 것은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고, 자신을 아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워내어 도를 아는 것이지요. 《도덕경》 48장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지요(忘知). 학문을 배우면 날로 더해 가고, 도를 닦으면 날로 줄어든다(爲學日益 爲道日損).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무위에 이르러 모든 것을 하지 않음이 없다(損之又損 以至於無爲). 지식은 하루하루 늘어나 쌓이지만 도는 하루하루 덜어야 만날 수 있어요. 지식을 늘리기만 하는 학문은 욕망을 더해 주기 때문에 온갖 허위와 번뇌가 일어나지요. 지식을 덜고 욕망을 없애 마음을 비움으로써 무위에 이르러야 하지요.

그러면 마음을 비운다는 게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어려운 부분이지요. 중세 기독교 신학자들 가운데 ‘부정신학’을 주장한 무리가 있었어요. 이들은 신을 뭐라 정의하면 신이 아니라고 주장했지요. 오히려 우리가 신에 대해 가진 생각을 하나하나 부정해 가면 진정한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거지요. 이런 태도는 고대 인도 브라만 경전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말과 통해요. 절대자인 브라만은 우주의 근본원리이자 궁극적 실재로서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데 사람들이 브라만을 부르고 안다고 할 때는 브라만은 알려지지 않는다는 거지요. 오히려 브라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알려진다는 거지요.

노자는 71장에서도 진정한 앎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어요(知病).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음을 알면 훌륭하다는 것이지요.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곧 병이라 자신을 힘들게 하지요. 하지만 성인은 병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병이 없다고 하지요. 남의 장단점을 아는 것은 똑똑함에 불과하며 자신의 마음과 본성을 아는 자가 현명한 자라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남을 이기는 것은 힘이 있는 것이고, 스스로를 극복하는 것이 진정 강한 것이라는 거지요. 만족할 줄 알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면 진실로 부유하다고 할 수 있지요.

노자는 도를 깨닫고 근본으로 삼고 지키면 죽어도 오래 잊히지 않아 장수한다고 말해요. 진정 오래 사는 것은 몸으로 장수하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몸 가꾸기에만 매달리니 어리석다는 거지요. 옛부터 진시황제처럼 장생불사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은 드물 거예요. 노자는 도에 부합하는 정신적 삶을 말했는데, 후대에 노자를 교조로 한 도교를 세워 장생불사를 목표로 삼았으니 노자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지요. 사람들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어요. 욕망을 없애려면 반드시 자신을 돌아본 뒤, 맑고 깨끗한 본래의 자기를 회복해야 해요. 만약 자신을 알고 이기며, 스스로 만족하고 성실히 살아간다면 노자가 말하는 도를 얻었다고 할 수 있어요. 몸은 죽어도 정신이 살아남으면 진정한 장수라고 할 수 있어요. 욕망을 비우는 길은 학문이나 지식의 길과는 달라요.

노자는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다.’고 말해요. 무슨 뜻일까요? 번뇌의 근원인 학문과 지식을 끊으면 번뇌와 근심이 사라진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굴욕을 피하고 영화(榮華)만을 추구하며 선(善)을 택하고 악(惡)을 버리기를 원해요. 그러나 그 차이가 얼마나 될까요? 또 사람들은 뭔가 알려고 항상 밖을 열심히 바라보며 살아요. 대부분의 학문도 자연현상을 관찰하고 사회의 돌아감을 살피어 얻어낸 지식들이지요. 그러나 노자는 진정한 지식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자신의 내면에 있다면서 47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

그 나감이 멀면 그 아는 것은 더욱 적다.

이로써 성인은 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밝게 살피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모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밖에서 구하려 하나 성인은 자기 내면을 늘 살핀다는 뜻이지요. 자기성찰(自己省察)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거지요. 나를 반성하며 욕심을 없애면 문 밖에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이치를 알며 창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자연의 법칙을 알게 된다는 거지요. 즉, 모든 사물의 원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있다는 거지요. 밖만 보면 남의 잘못만 보게 되고 자신의 문제는 보지 못하게 되고 멀리 보면 지식은 늘어나나 지혜는 어두워져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려워지지요. 멀리 갈수록 자기 내면을 아는 것이 적어진다고 말하고 있는 거지요.

대부분의 학문은 ‘외적인 학문’이라고 하고 그래서 마음을 성찰하는 것을 ‘내면의 학문’이라고도 하지요. 외적 학문은 삶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 주어 물질적 행복은 얻게 하지만 마음의 평화와 연결되지는 않아요.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속 깊은 곳을 거울같이 투명하게 하여 마음을 가리고 있는 구름들을 말끔히 제거하여 바깥 사물을 보아야 해요. 이와 같은 이치는 자신의 수양에만 그치지 않아요.

이를 정치에 적용하면 성인의 정치, 도의 정치가 되지요. 정치인이 성인이 된다면 금기는 줄어들고 법규와 법령도 없앨 수 있을 거예요.

《도덕경》 57장을 보면(순풍 淳風),

내가 가만 있으면 백성들 스스로 궤도에 오른다.

내가 혼란하지 않으면 백성이 풍족해지고,

내가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백성이 풍족해지고,

내가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백성들이 곧 순박해진다.

내가 먼저 어지럽지 않고 내가 먼저 욕심을 비우면 상대방도 풍족해지고 순박해진다는 거지요.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마치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아서 생선을 구울 때 자주 뒤집으면 작은 고기는 부서져서 쓸모가 없듯이 사람들을 너무 간섭하고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그르치게 된다는 거지요. 가만 놔두고 지켜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관심을 끊고 완전히 내버려 두면 생선은 어떻게 되지요? 그래요, 다 타버려 못 먹게 되겠지요.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적절하게 끼어들라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늘 그렇듯이 노자의 말은 반어와 역설을 그대로 해석해서도 안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해요. 개인의 자율도 이런 데 한 나라를 다스릴 때도 자율성은 최대로 보장되어야 해요. 지방자치제가 바로 그래요. 중앙정부가 자치단체에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는 게 아니라 자치단체 스스로 살림을 꾸려나가는 게 지방자치제의 본뜻이지요.

도에 입각하여 천하를 다스리면 귀신도 사람을 해지치 않고 신(神)도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고 해요. 귀신이나 신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아 두려움이 없으니 따로 매달리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 없어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경찰이나 수사기관을 두려워하고 권력에 줄을 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해요. 그뿐이에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점을 보고 액운을 없앤다고 귀신에게 빌곤 하지요. 평범하면서 욕심 없이 사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에게 굽실대거나 힘 없는 사람을 경멸하지도 않아요. 자연의 도에 맞는 삶은 굳이 의지하고 용서를 빌 신이 필요 없지요. 좋은 일에도, 어려운 역경을 만나도, 늘 마음이 한결같아 흔들림 없는 것이 진정한 마음의 평화이지요.

노자는 49장에서 성인은 선입관이 없어 백성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고 했어요(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성인은 착한 사람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도 착하게 대해요. 믿음 있는 사람에게도 믿음으로 대하고, 믿음 없는 사람도 믿음으로 대해요. 성인은 좋고 싫음이 없어 한결같다는 거지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대할 때 차별하지 않고 무시하지 않아요. 성인은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 다는 뜻이지요. 억지로 꾸미지 않고 진정 자연을 닮아 무슨 일을 행함에 스스럼이 없도록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고 선해지지요. 이 모두 분별하는 마음이 없는 한결같은 성인의 마음씀이 잘 나타나 있어요.

마찬가지로 이상적인 정치가는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거나 펼치고 싶은 마음을 조심하지요. 주관적 판단으로 시비와 선악의 기준을 정하지도 않아요. 선한 자도 착하다고 하고, 선하지 않은 자도 착하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착하기 때문이예요. 진실한 자도 신실하다고 하고, 진실하지 못한 자도 진실하다는 것은, 사람이 원래 진실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본성에 맞추고 존중하는 자세는 훌륭한 정치가의 덕목이지요.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요? 《도덕경》 27장에서 유래한 말이예요. 훌륭한 사람은 부족한 사람의 스승이 되고, 부족한 사람은 훌륭한 사람의 바탕(자원)이 된다는 뜻이예요. 처음부터 훌륭한 스승이나 성인은 없어요. 노력하고 공부하여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스승도 되고 남들의 존경을 받는 성인도 되는 거지요.

미국 작가 너대니얼 호손이 쓴 《큰바위 얼굴》은 성인도 만들어진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어요.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니 잠시 살펴볼까요? 보스턴 북쪽의 어떤 마을의 산꼭대기에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하고 보살펴 줄 것만 같은 아주 인자한 사람의 옆얼굴을 한 바위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이 마을에 큰바위를 닮은 위대한 사람이 태어날 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지요. 어니스트도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으면서 자랐지요. 그는 위대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요. 마을 출신의 성공한 사람들을 모두 지켜보았지만 어니스트가 나이가 들도록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배출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큰바위 얼굴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평범하게 늙은 어니스트가 바로 큰바위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닫지요.

사람들은 흔히 밖에서 위인이나 구세주를 기대하지요.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해요. 밖에서만 구하려 한다면 자기 자신이 간직하고 있는 보물은 빛을 발할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지요. 노력도 하지 않고 신에게만 의지하거나 남이나 부모 또는 환경만 탓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곤 하지요. 이런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는 분열되고 국력은 약해져 나라를 빼앗기거나 백성이 힘들어지지요. 남의 허물만 보면 그것이 곧 자신의 허물인 줄을 모른 거지요. 내가 변해야 가정이 변하고, 가정이 변해야 사회가 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27장을 보면 잘 가는 수레는 바퀴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고 했는데, 선행을 하는 사람은 흔적이 없이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왼손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도 있잖아요. 훌륭함과 똑똑함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데도, 사람들은 서로 잘났다고 다투지요. 나라를 다스리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사람들의 행동이 이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늘 분쟁으로 나라가 시끄럽게 되고 세상은 전쟁과 테러가 반복되겠지요. 이라크와 미국,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봐요. 선악(善惡)을 나누어 자신만이 선(善)하다 하여 생기는 불행이잖아요.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행동을 늘 살피는, 자기성찰(自己省察)이 바탕이 되도록 해야 해요.

 

제10장 지나친 욕심은 위험하다

 

오늘날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의 끝에 있어요. 살벌한 경쟁만 있고, 능력만을 내세워 질서가 흔들리고 있지요. 정당한 권위와 위계질서도 무너진 지 오래예요. 사회의 불안은 과식, 과소비, 담배중독, 알코올 중독, 인터넷 중독, 마약 중독 등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자살과 이혼은 늘고 폭력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 원인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욕심을 다스려야 될까요?

노자는 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이미 가지고 있으면서 또 채우는 것은 그만두는 것만 못하다.

날카롭게 간 칼을 오래 보존할 수 없다.

금과 옥이 집 안에 가득하면 능히 지킬 수 없다.

부귀하여 교만하면 스스로 그 재앙을 남긴다.

공을 이루고 나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도이다.

물동이를 가득 채우고 두 손으로 들고 있으면 어떻게 되지요? 그렇지요, 오래 버틸 수 없지요. 그런데 더 채우려 욕심내면 물은 흘러넘칠 것이고, 마침내 쏟아 옷을 버리겠지요. 이처럼 지나친 욕심은 송두리째 뒤집어지는 재앙을 면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노자는 사람들에게 절대 넘치는 일이 없도록 자만하지 말 것을 강조해요. 한 사람이 성공을 거두어 명예를 얻으면 적당한 때에 물러설 줄 알아야 오래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거지요. 지위도 너무 올라가면 무너질 수 있다 했지요.

《주역》에 이런 말이 있어요. “정상에 오른 용은 후회한다고.” 왜 그럴까요? 보름달이 영원할 수 없듯이 인기 절정을 누리던 배우도 언젠가는 신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지요. 정상에 오르면 내려오는 것 또한 당연하겠지요. 그런데도 수많은 왕과 독재자들은 물러나지 않으려 발버둥치곤 하지요. 그러다가 암살당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어요. 정상이 좋아 내려오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떼쓰는 유치한 애 같지 않나요?

전교 일등만 하는 학생이 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시험에서 아는 걸 실수하여 틀리고 일등을 놓치자 낙심하여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지요. 그 후 자신감을 잃고 불안에 휩싸여 또 실수할까 봐 확인을 반복하는 강박증에 걸리게 되었지요. 이 학생의 문제는 뭘까요? 오르락내리락 하는 곡선이 아닌 일직선으로 뻗어가야만 안심이 되는 거지요. 삶은 산 능선이나 강줄기처럼 곡선으로 뻗어가는데 말이지요.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오르막은 성공, 내리막은 실패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사로잡히게 되요. 노자는 물처럼 유연한 사고, 꼴찌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겸손한 사고를 높이 샀어요. 일등주의를 가장 낮게 보는 거지요. 일류 학교, 일류 국가, 세계 최고, 이런 것들을 낮다고 보는 것이지요. 진정 높은 것은 낮은 것이라고 역설하지요.

《회남자(淮南子)》에서도 ‘천지의 길은 그 끝에 도달하면 반드시 돌아와야 하니 가득 차는 것은 손해다’란 말이 있어요. 이 말도 바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임을 알겠지요? 《채근담》에도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라, 술은 적당히 취했을 때 멈춰야 한다’고 했지요. 공을 세우고도 적당한 때에 물러날 줄 알아야 해요. 물러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숨어 살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를 너무 내세우지 말라는 거지요. 칼과 송곳은 쓸 수만 있으면 되지, 너무 날카롭게 갈면 날이 쉽게 상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처럼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화를 불러요. 재물이 너무 많으면 오래 지킬 수 없어요. 왜일까요? 남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방탕한 생활로 끝내 재물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람은 성공한 뒤에는 물러설 줄을 알야야만 하는 거지요. 성공에 오를 때는 힘겹게 오르더라도, 내려갈 때만큼은 몸도 마음도 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오르기도 하고 내려갈 줄도 알며, 멈출 줄 알고 물러설 줄 아는 것이 도에 부합된 삶이지요. 그것은 마치 하늘이 만물을 창조하였지만, 그것을 소유하지도 의지하지도 않고 공을 자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노자는 말했어요.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불러일으키므로, 일을 이루면 물러날 줄 알야야 한다는 거지요.

오색(五色)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오미(五味)는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실을 그르치게 한다.

이로써 성인은 배를 위하고 눈을 위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기를 멈출 줄 모르지요.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는 것처럼, 하루살이가 불빛에 뛰어드는 것처럼 관능적인 쾌락에 한번 젖어들면 수렁에 빠진 것처럼 좀체 그 유혹을 떨치기 어렵지요. 아름다운 모습에 취하고, 아름다운 소리와 향기로운 음식에 빠져들곤 하지요. 감각이 좇는 욕망의 바다는 넓고 또 넓어 모두 채울 수 없어요. 파리가 꿀단지에 빠지는 걸 본 적 있나요? 욕망을 채우려 하면 결국 감각의 바다에 빠져 익사하게 되지요. 지나친 욕망을 추구하다 보면 순간의 만족은 맛보지만 오래가지 못하지요. 그 만족을 계속 느끼려면 어떻게 되지요? 그래요, 계속 거기에 매달려야 되겠지요. 그것을 중독(中毒)이라고 해요.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거지요. 대표적으로 마약 중독을 들 수 있는데,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지요.

마약 중독자는 마약 기운이 떨이면 극심한 불안과 고통을 겪게 되고 계속해서 마약을 복용해야 되지요. 결국 마약의 노예가 되고 마는 거지요. 청소년들이 흔히 빠져드는 인터넷 중독이나 게임 중독도 마찬가지예요. 어른들은 도박에 중독되거나 술 때문에 알코올 중독에 빠지기도 하지요. 무슨 일이든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것도 습관적 폭력 중독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나치게 놀다 보면 심신이 불안해져 넋이 나가고, 자아를 잃고, 결국 덕을 해쳐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를 깨달은 성인은 검소한 생활로 끼니를 해결할 뿐 감각적인 즐거움을 바라지 않지요. 따라서 눈, 귀, 코, 혀, 몸과 같은 감관의 문을 잘 지켜 도둑이 출입하는 것을 잘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 거지요. 그럼 여기서 도둑은 무엇일까요? 그래요, 아름다운 색깔,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이지요. 욕망은 우리의 눈, 코, 입을 막아버리고 손발을 묶어버리곤 해요. 그래서 알아채지 못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데, 그중에서도 알아채기 어려운 것이 명예욕이지요. 자신의 욕망을 알면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겠지만, 알지 못한다면 자신을 망친다 해도 깨닫지 못하지요.

노자는 44장에서 이렇게 질문하고 있어요.

명예와 생명 중 어느 것이 더 친밀한가?

생명과 재물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명리(名利)와 목숨을 잃는 것,

어느 것이 더 큰 해가 되는가?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지속할 수 있다.

명예와 생명 중 어느 것이 더 친하며, 목숨과 재물 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하지요? 당연히 목숨이라 생각하지만, 어떤 사람은 명예를 잃느니 차라리 목숨을 버리기도 해요.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거지요. 지조를 꺾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 고결함을 지키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역사책에서 이러하 인물들을 많이 보았지요. 고결한 명예가 아닌 추잡한 명예를 붙잡으려는 사람도 많아요. 권력에 집착하여 장기집권을 하려는 독재자들, 일일이 이름을 대지 않아도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부끄러운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재물이 너무 많으면 반드시 큰 손실을 보게 되듯이 지나친 명예욕에는 크나큰 대가가 따르지요. 하루 아침에 사기꾼으로 몰리고 명예가 떨어지면 죽고 싶은 심정이겠지요? 재벌총수가 검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자살하는 것이나 인기 연예인이 자살하는 배경에도 이러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같은 목숨을 버리는데도 이렇게 달라요.

너무 일등만 하려 애를 쓰는 학생들도 마음이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 차면 그걸 오래 견딜 수 없게 되지요. 그 학생 뒤에는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야단치는 학부모가 있고, 등수에 연연하고 높은 점수만 좋아하는 교사가 있겠지요. 그런 사회에서 경쟁만을 부추기게 되면 어린 학생들의 마음은 멍들고 상처받은 거지요. 자연스럽게 오르고 내려가는 산 능선처럼 일등도 받아들이고 십등도 받아들이는 게 자연의 이치에 맞는 것이지요. 중간고사 시험을 잘 못쳤다고 엄마한테 야단맞아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학생도 이 이치를 몰라서 그래요. 일등도 꼴찌와 다르지 않음을 알면 될 텐데.

부와 인기를 얻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지나친 욕심 때문이겠지요? 자신의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고 비관한다면, 해가 지고 밤이 오면 하루가 끝나는 것으로만 아는 짧은 생각 때문이지요.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아름다운 별들이 수를 늫는데도 낮의 해에만 집착하면 밤의 아름다움을 알 길이 없지요. 지금 이 순간 행복이 끝났다고 해서, 불행이 찾아와 괴롭힌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영원한 행복이 없듯이 영원한 불행도 없기 때문이지요. 성적이 오르거나 내려가도 그만, 재산이 많든 적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도를 깨달은 사람이지요.

장자는 높은 지위는 본래 삶과는 관계가 없다고 했어요. 다만 한때의 부속물에 불과하다고 했지요. 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잡기 어렵고 떨치려 하면 오히려 가까이 온다는 말을 하였지요.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몸과 생명을 아낄 줄 알아야 되고 지나친 명리를 좇지 말아야 하지요. 명예와 이익만을 추구하고 생명을 잃는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손해가 되지요. 아무리 높은 명예도, 모두 부러워하는 부유함도 자신(自身)이 없다면 소용없는 것이니 자신부터 찾는 것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노자는 ‘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고 적당할 때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말했지요. 사람의 마음은 본래 비어 있고 고요하나, 자주 사리사욕에 가려져 사물을 바르게 관찰하지 못하고 영원함에서 벗어나게 되지요. 따라서 우리는 힘을 다해 마음을 비우고 잔잔한 상태로 회복시켜야 해요. 그래야만 만물이 자라나고 순환되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지요. 도를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포용하므로 광명정대하고 자연에 부합되어 결국 도에 부합되지요. 도에 부합되어야만 영원할 수 있고,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는 것이지요.

 

제11장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

 

오늘날 사회는 각종 폭력으로 신음하고 있어요. 강도나 조직폭력배들의 폭력만 무서운 게 아니지요. 가정폭력, 학교폭력, 언어폭력, 성폭력, 정치적 테러, 강대국의 약소국 침략, 전쟁 등 폭력은 여러 형태가 있지요. 무언가 원했는데 이뤄지지 않을 때 화나고 짜증난 적 있지요? 상대방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 상대를 꺾고 싶었지요? 남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더 많이 가지려는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이 분노라는 거친 감정에 휩싸이게 된대요. 그렇다면 폭력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이자 욕망의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이러한 폭력은 강함을 앞세워 강함으로 상대를 벌벌 떨게 만들어요. 그런데 강도나 조폭들도 무서워하는 게 있지요? 더 센 힘을 가진 군대나 경찰이지요. 법을 수호하는 공권력 앞에서는 아무리 힘센 자도 꼼짝 할 수 없지요. 그러나 노자는 공권력의 힘마저도 자연의 도가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어요.

그럼 노자는 전쟁과 폭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도덕경》 31장을 통해 알아볼까요?

무기란 상서롭지 못하여 군자의 물건이 아니다.

마지못해 쓸 때에는 욕심 없이 담담하게 하고

이긴 것을 아름답지 못하게 여긴다.

이긴 것을 좋아하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이고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얻을 수 없다.

죽인 사람이 많을 때에는 슬퍼하고 측은한 마음으로 임하

전쟁에서 이기면 상례(喪禮)로써 대해야 한다.

병기는 불길한 물건이어서 군자가 사용할 물건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약 어쩔 수 없이 사용할 때는 담담한 자세로 해야 한다고 했어요. 승리를 거두어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지요. 자랑하면 곧 살인을 즐기는 꼴이 되어 결국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전쟁에 이겼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라 살인을 많이 했으므로 상(喪)을 당한 것처럼 슬퍼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무력이야말로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하여 전쟁의 해로움을 지적하면서 전쟁을 반대했어요. 부득이 전쟁에 임해야 할 때는 반드시 상례로 대하고 눈물로 슬퍼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지극한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해야겠지요. 노자는 매우 인자한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노자가 살던 춘추전국시대는 무력에 의한 세계제패를 목표로 하는 제후들과 거기에 충성하는 신하들로 가득한 시절이었지요.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강한 군대를 양성하는 부국강병책이 가장 큰 관심이었지요. 이때에 노자는 힘과 폭력을 반대하고 부드러움을 강조했으니 선지자라고 할 수 있지요.

군대가 머물렀던 곳은 논밭이 황폐해지고 큰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들었어요. 백성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겨우 이어가는 참혹한 모습을 지켜본 선각자 노자는 출세의 공을 다투는 게 얼마나 잔인하고 부당한 것인지 깨닫게 된 거지요. 또한 노자는 부국강병책의 책사를 보면서 지식에 대한 환멸을 느꼈을 거에요. 지배자들이 백성들로부터 여러 명목으로 세금을 뜯어내고 자신들이 부귀공명만을 누리는 실체를 본 거지요.

그럼 왕의 기반은 무엇일까요? 바로 일반 백성이지요. 백성들이 없으면 국가도 없고 왕의 자리도 없게 되지요. 그런데도 부덕한 왕들은 ’하늘이 내린 사람(天子)‘이라고 거드름 피우며 아랫사람들의 업신여겼지요. 역사상 훌륭한 왕들은 개인적인 욕심이나 신념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 따랐지요. 백성을 하늘로 생각하고 그들의 소리를 무섭게 안 임금은 성군으로 존경 받았고, 백성 위에 군림하고 호령한 임금은 폭군으로 원성이 자자하였지요.

39장에 높음은 낮음을 근본으로 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천자는 매우 높은 자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에요. 왕이 스스로를 부를 때 과인(寡人)이라고 하는 걸 알지요? 부족한 사람, 덕이 없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노자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그 옛날 하나(一)를 얻는 것이 이러했다. 하늘이 하나를 얻자 청명하였고, 땅이 하나를 얻자 만물을 이루었다. 신이 하나를 얻자 신령함이 있었고, 골짜기가 하나를 얻자 물이 가득 찼다. 만물이 하나를 얻자 생명을 이루었고, 제후와 왕이 하나를 얻자 천하가 안정되었다. 이것은 모두 하나를 얻음으로써 있게 된 것이다. 존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높음은 낮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왕은 스스로를 고(孤)와 과(寡)와 불곡(不穀)이라고 칭한다.”

여기에서 하나(一)는 도를 일컫는다는 걸 알 수 있겠지요? 천자와 왕이 도를 배우고 깨달으라는 뜻이지요. 이상적인 통치자는 군림이 아니라 섬김으로 다스린다는 것을 알겠지요? 왕이 스스로를 낮추는 ’과인‘이란 표현도 《도덕경》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어요(自謂孤寡不穀). 빛나는 다이아몬드처럼 주목 받을 것이 아니라 빛이 없는 돌멩이처럼 몸가짐을 가지는 사람이라야 훌륭한 통치자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힘으로 가혹한 정치를 하고 있었으니, 이를 본 노자가 74장에서 다음과 같은 비판을 하게 된 거지요.

백성들이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어찌 죽음으로써 백성을 떨게 할 수 있으랴.

사람들을 죽음으로 위협하는 자를 내가 죽이면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는가?

형벌이 너무 가혹하여 죽음이 많아지면 백성들은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반발할 것이지요. 죽음보다 삶이 더 고통스럽고 잔혹하다면 역시 죽을 각오로 저항하겠지요? 이렇게 되면 아무리 무서운 법령이라 한들 힘을 잃겠지요. 춘추전국시대에는 부국강병에만 힘써 마구잡이로 세금을 거두고 노역(勞役)을 부과하여 백성들이 굶어 죽는 일이 많았어요.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세금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어요. 백성들이 쉽게 죽음으로 몰리는 것은 지도자가 살 기를 원하기 때문이었지요.

‘무릇 억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삶을 귀하게 여기는 자보다 현명하다(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는 《도덕경》 75장의 말도 이렇게 생긴 것이지요. 지금도 아프리카 곳곳에서는 아이들이 굶어 죽는 나라가 많은데, 빈부격차가 심한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또한 노자는 57장에서 ‘고기를 잡는 그물의 종류가 많을수록 고기들은 여기저기 도망친다. 사람이 지혜와 계략이 많아질수록 사기가 속임수의 수법들이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여러 법령으로 백성들을 규제하고 못살게 하는 정치를 비판하고 있는 거지요. 세상에 금기사항이 많으면 백성이 가난해지고 법령이 많으면 온갖 도적이 나타난다고 했어요. 이 말 역시 권력의 횡포를 비판하고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반대한다는 뜻이지요.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는 할 일 없는 무책임이 아니라 백성들을 여러 가지로 들볶는 행위를 멈추라는 교훈이지요. 자연 그대로 놔두라는 무위(無爲)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해결하고자 하는 노자의 정치철학이었지요. 그러나 필요한 법도 없애라는 게 아니라 법령을 남발하여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지요. 훌륭한 목수는 나무의 결을 따라 자연스럽게 나무를 깎고 대패질하지만, 서툰 목수는 결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하여 마침내 손을 다치게 되지요. 비록 힘을 가졌다고 하여 마음대로 행하면 화가 반드시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이지요. 백성을 존중하며 백성의 뜻에 따르라는 노자의 교훈이지요.

노자는 승리자보다 패자의 입장을, 권력이나 지위가 높은 자보다 힘없는 국민들 입장에 서서 바라보았지요. 부유하거나 떵떵거리거나 거들먹거리는 자들을 귀하게 보지 않고 속물적인 욕망의 포로로 가볍게 여기는 거지요. 이는 곧 국민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가 국민 여론에 귀 기울이고 국민을 존중하며 통치해야 하는 민주주의를 제창한 것이지요. 그러면 폭력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노자는 역설의 달인답게 폭력은 부드러움으로 다스리라고 말했어요.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굳센 것을 부린다는 것이지요.

천하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릴 수 있다.

무형의 힘은 틈이 없는 물체를 뚫고 들어간다.

바로 이것으로써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무언의 가르침과 무위의 장점은 천하에서 비교할 수 없다. (43장)

가장 유연한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릴 수가 있지요. 물은 부드럽지만, 단단한 땅속으로 스며들지요. 또한 바닷물은 바위를 뚫어 동굴을 만들고 날카로운 돌을 둥글게 만들어 버리곤 하지요. 이렇게 물을 닮은 통치자는 목적을 이루고자 하나 억지로 하지는 않지요. 목적을 이루고도 교만하지 않으며, 목적을 이루되 마지못해 한다고 말해요. 무력은 본디 도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지요. 만일 써야 한다면 최소로 해야 하는 것이지요. 노자는 또 46장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천하에 도가 있을 때는

모두 만족할 줄 알고

적당히 멈출 줄 알며,

나라끼리도 화평하게 지낸다.

전쟁이 자취를 감추면

군마는 논밭을 경작하는 데 쓰인다.

그러나 천하에 도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명예와 이익을 다툰다.

전쟁이 끊이지 않고,

군마는 전쟁터에서 새끼를 낳는다.

천하의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천하의 죄악은 탐욕보다 더 큰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사람들은 늘 불만에 가득 차 있지요. 그래서 늘 행복하지 않다고 투덜대고 그것도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남의 탓이라면서 말입니다. 옛말에 ‘나는 오직 만족할 줄 안다(吾唯知足).’는 말이 있어요. 만족할 줄 아는 것만이 영원한 만족이라는 뜻이지요. 모든 사람이 만족할 줄 알면 천하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재앙은 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허물은 얻고자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만족할 줄을 아는 넉넉함은 항상 풍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쟁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어요. 대부분 전쟁은 침략자의 끝없는 야심과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 때문에 일어나지요.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무고한 목숨을 해치고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주지요. 노자는 통지차가 탐욕으로 인해 백성 전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경계하며, 통치자는 담담하게 본분을 지키고 침략의 욕심을 자제할 것을 경고하지요. 무력과 분노는 침략행위이며 폭력의 표현이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사람은 무력도 쓰지 말고 성내지도 말아야 한다고 했지요. 물을 닮으라는 노자의 말을 다시 기억해 보길 바랍니다.

물은 가로막히면 다투지 않고 돌아가지요. 비켜선다는 것은 보통 사람은 실천하기 어렵지요. 무술에서도 고수는 강한 상대의 힘과 맞부딪쳐서 자신의 힘을 쓸데없이 쓰지 않지요. 힘과 힘이 맞서면 칼과 칼이 부딪치는 것처럼 불꽃이 튀지요. 바다가 모든 물의 왕인 것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낮은 곳에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마음을 낮추는 것이 다툼을 막는 길이라는 걸 알겠지요? 즉, 에고(ego)를 없애면 되겠죠.

그럼 에고란 뭘까요? 내가 잘났다는 생각, 나만을 위하려는 마음이 에고이지요. 한마디로 이기심을 없애면 마음이 낮아지겠지요. 통치자가 국민들이 권세를 주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함부로 날뛴다면 국민은 고통을 겪게 되지요. 그것은 통치자가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꽉 차 있기 때문이지요. 엘리트 의식, 권위주의가 문제이지요. 에고를 없애고 남과 다투지 않으면 자연의 도리에 부합되는 거지요.

그래서 노자는 77장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하늘의 도는 높은 것은 억누르고 낮은 것을 들어올리며, 남는 것은 덜어내고 모자라는 것은 보탠다.’

자연의 도는 욕심이 없어 자기 것으로만 만들려는 마음이 없어요. 그러나 못된 폭력에는 용서하지 않는 준엄함도 있습니다. 불의의 폭력마저 피하고 다투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요. 남으면 덜어서 나눌 줄 아는 것도 자연과 맞는 삶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낮추기는커녕 모자라는 사람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잖아요? 벼슬을 탐하는 관리들은 백성들의 가난한 살림을 짜내어 고위관리들에게 바쳐요. 사람들이 하늘을 거스르는 게 이와 같이 도와 어긋난다는 것이지요.

누가 능히 남는 것으로 천하를 봉양할 것인가?

오직 도 있는 자뿐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루고도 자랑하는 법이 없고

공을 이루고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현명함을 드러내려 하지도 않는다. (77장)

분노의 원인은 불만족, 죄악의 원인은 탐욕이며, 다툼의 원인은 교만이라는 게 《도덕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강하고 포악한 폭력에 대한 노자의 처방은 자연의 도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강한 용기보다 자애롭고 감싸고 받아들이는 부드러운 용기가 더 훌륭하지요.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낮은 겸손함은 상대를 존중하는 높임이지요. 그러면서도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 않고 머물지 않지요. 모두 자신의 욕심을 비운 무아(無我)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我)라는 생각’이 사라지면 진정한 사랑과 평화가 찾아오니 굳이 시비를 따지거나 다투지 말라고 하고 있어요. 저절로 옳음이 드러나게 된다는 거지. 이기려 하지 않아도 이기게 되니, 다툼 없이 승리하는 것(不戰勝)을 노래한 것이지요.

용맹을 내세우면 죽고, 그렇지 않으면 산다.

하늘의 도는 다투지 않아도 잘 이기며,

말하지 않아도 잘 대답하며,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오며,

느리게 해도 잘 계획한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기어도 놓치는 일이 없다. (73장)

 

제12장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배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돈, 신앙, 권력, 재능, 학문?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달리 이야기하지요. 노자는 도를 가장 귀중한 자리에 놓았지요. 착한 사람이 도를 얻으면 영원하다고 하였지요. 돈, 명예, 출세 등은 영원한 행복을 보장하지 않고 오히려 시기와 갈등의 적(敵)이 된다는 거지요. 도는 모든 사람의 보배라고 하는 노자의 말을 《도덕경》 62장(爲道)에서 찾아볼까요?

“도는 만물의 그윽한 자리이니 선한 사람의 보배이며 선하지 않는 사람에겐 보호막이다. 아름다운 말도 유익함을 주고 존귀한 행위도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거늘 하물며 사람을 함부로 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천자와 삼공을 임명할 때 보물 가득한 수레보다 꿇어앉아 이 도를 바치는 것보다 못하다. 도는 천하에서 가장 귀함이 된다.”

6장에 ‘비우기를 지극히 하고, 가운데 머물기를 독실하게 하면, 만물이 바야흐로 일어나고, 다시 만물은 근본으로 돌아감을 본다.’고 하였는데, 근본이 바로 도라는 건 기억하고 있겠지요? 비움을 지극히 한다는 것은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 자연의 성품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지요. 여러 생각과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비워서 본래의 자연스럽고 소박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지요. 또한, 가운데 머문다는 것은 태풍의 눈 중앙처럼 고요함을 지킨다는 말이지요. 고요한 가운데에서 태풍과 같은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태풍에 머물면 날려가 형체도 사라져 버리지만 가운데 머물면 만물이 생성되었다가 근원으로 돌아옴을 관찰할 수 있지요.

33장(辯德)에서 노자는 본래의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였어요.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면 집을 떠난 아이처럼 길을 잃고 헤매지요.

32장에도 ‘도는 영원히 이름이 없고 순박하다. 제후나 왕들이 그것을 간직하고 지킬 수 있다면 천하 만물이 저절로 손님으로 올 것이다. 천지가 서로 조화되어 단비를 내리고, 백성은 그것을 명하지 않아도 스스로 균형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지요. 이와 같이 노자는 도를 가장 귀하게 여겼는데, 67장에서는 세 가지 덕성으로 나누어 설명했지요.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첫째는 인자(仁慈)함이요,

둘째는 소박함이요,(儉約)

셋째는 감히 천하의 앞이 되지 않음(謙遜)이다.

인자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고,

검소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으며,

남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에 영도자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첫 번째 보물은 인자함이지요. 인자함을 버리고 용감해지려고 하고, 소박함을 버리고 넓어지려 하고, 물러섬을 버리고 앞서려고 한다면 결국 죽을 것이라고 했어요. 무릇 인자(仁慈)로 싸우면 이기고, 그것으로 지키면 견고하다고 했어요. 인자한 사람은 하늘도 장차 도울 것이나, 이는 인자함으로 스스로를 지키기 때문이지요. 노자는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보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이 부족함을 절실히 느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자를 강조한 것이지요.

두 번째 보물은 소박함이지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것은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일부 사람들이 자신들만 잘살려는 욕심을 봤기 때문이지요. 남으면 나누고, 부족하면 덜어 주는 여유 있는 마음은 자연의 도, 곧 천도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노자는 53장에 ‘조정은 거대한 누각들로 으리으리하나 논밭은 잡초가 무성하고 곳간은 텅 비었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비단옷 입고 번득이는 칼을 차고 기름진 음식에 물릴 지경이고 재산은 쓰고도 남아도니 이것이야말로 도둑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어찌 도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지요.

세 번째 보물은 겸손함이지요. 남보다 앞서고자 하는 마음이 평화를 깨뜨리고 다툼의 발단이 되곤 하지요. 노자는 다투지 않는 덕이 도의 극치라고 말했어요. 이 원리는 전쟁에 활용할 수도 있어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 가장 좋은 전략이지 않겠나요?

그래서 69장(玄用)에 내가 주동이 되지 말고 피동이 돼라. 감히 앞으로 한 치도 나가지 말고 차라리 한 자를 물러나라.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대군의 행진이고, 보이지 않는 무서운 팔뚝의 휘두름이며, 적국이 수없이 많아도 없는 듯 나아감이고, 무기를 잡지 않아도 날카로운 무기를 잡음과 같다. 화(禍)가 가장 큰 원인은 적을 얕보는 것이며, 적을 얕보면 나의 세 가지 보물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적과 맞설 때에도 사랑하는 마음(인자함)을 가지면 승리를 거둔다고 하였지요. 우리 내면에는 본래 인자함과 현명함이 있어 그것을 발견하여 키우는 게 필요하지요.

《도덕경》 70장에 나오는 ‘성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구슬을 품는다.’는 말도 역시 내면의 보물을 말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밖에서만 얻으려 하고 외부의 도움만 받으려고 하지요. 그러나 진정한 보물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 이미 있다는 거지요. 그것(인자, 검약, 겸손)을 발견하고 기르는 일이 중요하지요.

50장에서는(貴生) 삶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어요. 사람들 중 대략 열에 셋은 장수하고, 열에 셋은 단명한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적인 죽음에 속한다. 그러나 열에 셋은 원래 오래 살 수 있었지만 도중에 죽는다. 이는 좋은 것만 탐하다가 몸이 상해서 죽음으로 향하는 경우이다. 열 가운데 하나만이 자기의 생명을 아낄 줄 알아 사리사욕을 없애고 순박하고 자연에 모든 것을 맡기는 생활을 한다.

노자가 욕심을 버리고 총명함을 경계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실되고 순박하기를 바라고, 지도자 또한 진실되고 소박하길 바라는 것이지요. 도에 충실하여 자연스럽게 살면 자기 자신과 가정이 건강해지고, 나아가 국가와 세계가 평화로워진다고 말했지요.

노자는 또한 29장에서 ‘나는 천하를 차지하려고 애쓴 이들이 끝내 그것을 얻지 못함만 보았다. 천하는 신묘한 것이어서 인위적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인위적으로 도모하는 자는 패하고, 인위적으로 그것을 얻는 자는 잃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극단적인 것을 버리고, 사치함을 버리고, 교만함을 버려야 한다.’고 했지요. 이것이 가운데를 지키는 것(道)으로, 현명함과 지혜를 버리면(德) 백성들에게 큰 이득이 생겨요. 이것은 바로 통치자가 소박하고 욕심 없는 자세, 즉 꾸밈없는 순박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지요. 노자처럼 문명을 겉치레라고 말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프랑스 사상가 루소입니다. 루소는 자연 속에서 인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법령으로 백성들을 묶고 가혹한 세금으로 착취한다면 마치 폭풍과 폭우와 같은 포악한 정치가 될 것이며, 포악한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노자는 경고하고 있지요. 또 통치자가 진실과 믿음이 부족하면 백성들은 그를 믿지 않는다고 했어요.

도는 언제나 하는 것이 없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다.

제후와 왕이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생성되고 성장할 것이다.

탐욕이 일어나면,

내 장차 이름도 없는 나뭇등걸로

굴복시킬 것이다.

이름도 없는 나뭇등걸, 즉 순박한 도는

무릇 탐욕을 없앤다.

욕심이 없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천하가 안정될 것이다. (37장)

노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정치는 무위로 자연에 맡기고 간섭하지 않는 것이었지요. 사람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덕성을 발견하여 스스로 완성해 가는 것을 주시하였지요. 동시에 참되고 순박함을 양성하고 욕심은 없애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상적인 정치는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노자의 말은 정치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지요. 기업가, 교사, 학부모 등 모든 지도자들이 새겨들어야 하지요. 무위 사상의 바탕은 지배하려 들지 않는 마음, 욕심을 잠재우는 것임을 놓쳐서는 안되지요. 노자의 무위에 대해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면 63장을 볼까요?

무위를 실천하고

무사로 일하고,

무미를 맛으로 한다.

큰 것을 작게 하고 많은 것을 적게 하며

어려운 일은 쉬울 때 도모하고

큰일은 미세할 때 처리한다.

무릇 쉽게 허락하면 필시 미덥지 못하고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운 일이 많아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쉬운 일을 어렵게 여기니

그런 까닭에 끝내는 어려운 일이 없다.

어려운 일은 쉬울 때 도모하고, 큰 일은 작을 때 해결해야 쉽지요. 네덜란드에서 한 소년이 손으로 둑을 막아 나라를 지킨 이야기가 있지요? 이 소년이 막지 않았다면 둑은 무너지고 수천 대의 트럭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의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데서 일어나고 세상의 큰일을 반드시 작은 데서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작은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나중에 큰일이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지요. 무릇 가볍게 승낙하는 것은 믿음이 적고, 쉬운 일이 많으면 반드시 어려움이 따른다. 성인은 쉽고 작은 일을 오히려 어렵게 대해서 마침내 어려움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려운 일을 처리하는 데에서 반드시 쉬운 일부터 시작하라고 일깨우지요. 성인은 한 걸음 한 걸음을 소중히 여기니 결코 단숨에 큰일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오히려 담담하여 자신의 이익에 매달리지 않고,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고 원수도 용서하고 도리어 덕으로 갚는다고 했어요. 노자의 무위에는 위대한 덕을 포함하는 것임을 알 수 있어요.

또한 노자는 54장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자신을 닦으면 그 덕이 참되고

가정에서 닦으면 그 덕이 남음이 있고

마을에서 닦으면 그 덕이 길고

나라에서 닦으면 그 덕이 풍부해지고

천하가 닦으면 그 덕이 두루두루 미친다.

그러므로 나 자신을 가지고 나를 관찰해야 하고

천하를 가지고 천하를 관찰해야 한다.

세상을 잘 다스리려면 우선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고 도를 잘 닦는 게 기본임을 말하는 것이지요. 도란 우주 자연의 근본 이치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의 기본임을 알 수 있겠지요? 이러한 내용은 학문과 정치를 가릴 것 없이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들로 깊이 되새겨야 하지요. 또한 노자는 59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어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김에 아끼지(嗇) 말아라.

덕을 거듭 쌓으면 극복 못할 게 없고

그 한계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국가를 소유할 수 있다.

나라의 근본이 있으면 장구할 수 있으니

이를 일러 뿌리가 깊고 바탕이 단단하여

길이 오래 사는 도라 한다.

아낀다는 것은 절약하고 쌓는다는 뜻으로, 16장의 ‘자신의 마음을 지극히 비운다.’는 말과 같지요. 비우는 것과 쌓는 것, 이렇게 상반된 말이 노자에게는 서로 통하는 거지요. 노자의 주석가로 유명한 왕필은 ‘농사짓는 사람이 밭을 가꾸는 것을 보면 잡초를 힘써 제거하고 밭을 고른다. 위로 천명을 빋들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풀이하지요. 《맹자》에서 ‘그 마음의 본성을 아는 자는 하늘을 아는 것이니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조건이다.’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노자가 색(嗇)의 개념을 제시한 것은 물질적 절약이 아니라 정신적인 수양을 말한 것이지요.

《도덕경》 마지막 81장은 이러한 하늘의 도와 성인이 가야할 길을 잘 요약했지요(현질 顯質). 진실한 말은 듣기 거북하고, 듣기 좋은 말은 진실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선량한 사람은 교묘하게 말을 꾸미지 못하고, 교묘한 말을 잘하는 사람은 선하지 않고, 말을 잘하고 말이 많은 사람은 믿음이 부족하기 쉽고, 믿음이 가는 진실한 사람은 대개 말수가 적다고 얘기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진정으로 도를 안다고 볼 수는 없어요. 성인은 온갖 정성을 다해 남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더욱 충족되지요. 남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도 자신은 더욱 넉넉해지지요. 이것은 하늘의 도가 공평하여 만물에 유익할 뿐 해를 입히지 않는 것과 같지요. 진실함은 아름답게 꾸미지 않아도 되니, 도가 이와 같고 성인은 이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성인은 하늘의 도에 순응하며 공헌할 뿐 남과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덕경》 마지막 81장은 이러한 하늘의 도와 성인의 길을 잘 요약하고 있지요.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

선한 자는 말을 잘 못하고,

말을 잘 하는 자는 선하지 않다.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고

박식한 사람은 알지 못한다.

남을 위함으로써 내가 더욱 있게 되고,

남에게 줌으로써 내가 더욱 많아진다.

하늘의 도는 이롭게 할 뿐 해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위할 뿐 다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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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자애(서울) | 작성시간 20.02.16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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