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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멋과 향

처용가

작성자바람공자|작성시간08.05.15|조회수705 목록 댓글 0

처용가(處容歌)


   東 京 明 期 月 良                 

   夜 入 伊 遊 行 如 可

   入 良 沙 寢 矣 見 昆

   脚 烏 伊 四 是 良 羅   ⇒ 역신의 침범

   二 肹 隱 吾 下 於 叱 古

   二 肹 隱 誰 支 下 焉 古

   本 矣 吾 下 是 如 馬 於 隱

   奪 叱 良 乙 何 如 爲 理 古  ⇒ 처용의 관용


♣ 작품의 해설 

<양주동 해독>

 긔 래 / 밤드리 노니다가 / 드러 자리 보곤 / 가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 둘흔 뉘해언고 / 본 내해다마 / 아 엇디릿고


<김완진 해독>

東京 기 라라 / 밤 드리 노니다가 / 드러 자 보곤 / 가로리 네히러라.

두른 내해엇고 / 두른 누기핸고. / 돈 내해다마 / 아 엇디릿고.


<현대어>

서울 밝은 달 아래 / 밤 늦도록 노닐다가 / 들어 와 자리 보니 /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 둘은 뉘 것인고 /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 감상의 길라잡이 

   이 노래는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 처용랑이 역신(疫神)을 쫓기 위해 지어 부른 8구체 향가이다. 이 노래의 변형이 고려 시대 ‘처용가’로서, <악학궤범(樂學軌範)>과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있으므로 향찰(鄕札)로 표기된 어려운 향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민속학적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려는 견해와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 호족(豪族)의 아들로 보려는 견해, 신라 시대에는 멀리 서역(西域) 지방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민족학적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려는 견해가 우수하다. 그 까닭은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의 범주를 벗어난 무격(巫覡) 사회에만 있는 풍습이기 때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습에서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시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辟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하다. 이를 무가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 작품의 해제  

 ������ 작자  처용(處容)

 ������ 연대  신라 헌강왕(875-885)

 ������ 성격  주술적 무가(巫歌), 축사(逐邪)의 노래

 ������ 종류  8구체 향가(4․4조의 민요조로 됨)

 ������ 표현  향찰로 표기, 직서적(直敍的)인 표현

 ������ 구성 

 ������ 제재  아내, 역신(疫神)

 ������ 주제  귀신을 쫓아냄[축사(逐邪)]

 ������ 의의  ① 벽사 진경(辟邪進慶-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소박한 민요에서 형성된 무가이다.

          ② 의식무(儀式舞),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 관련 설화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東京明期月良 / 夜入伊遊行如可 / 入良沙寢矣見昆 /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 二肹隱誰支下焉古 / 本矣吾下是如馬於隱 / 奪叱乙何如爲理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 처용랑 망해사]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自京師至於海內.比屋連墻,無一草屋.笙歌不絶道路.風雨調於四時.於是大王遊開云浦.(在鶴城西南.今蔚州).王將還駕.畵曷穴於汀邊.忽雲霧冥日壹.迷失道路.怪問左右.日官秦云.此東海龍所變也.宜行勝事以解之.於是束力有司,爲龍刱佛寺近境.施令已出.雲開霧散.因名開雲浦.東海龍喜.乃率七子現於駕前.讚德獻舞秦樂.基一子隨駕入京.輔佐王政.名曰處容.王以美女妻之.欲留其意.又賜級干職.其妻甚美.疫神欽慕之.變爲人.夜至基家.竊與之宿.處容自外至其家.見寢有二人.乃唱歌作舞而退.歌曰.東京明期月良夜入 伊游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鳥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本矣 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時神現形,跪於前曰.吾羨公之妻.今犯之矣.公不見怒.感而美之.誓今已後.見畵公之形容.不入其門矣.因此,國人門巾占處容之形.以僻邪進慶.王旣還.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曰望海寺.亦名新房寺.乃爲龍而置也.又幸鮑石亭.南山神現舞於御前.左右不見.王獨見之.有人現舞於前.王自作舞.以像示之.神之名或曰祥審.故至今國人傳此舞.曰御舞祥審.或曰御舞山神.或云.旣神出舞.審象其貌.命工摹刻.以示後代.故云象審.或云霜髥舞.此乃以其形稱之.又幸於金剛嶺時.北岳神呈舞.名玉刀鈐.又同禮殿宴時,地神出舞.名地伯級干.語法集云.于時山神獻舞.唱歌云.智理多都波.都波等者,盖言以智理國者.知而多逃,都邑將破云謂也.乃地神山神知國將亡.故作舞以警之.國人不悟.謂爲現瑞.耽樂滋甚.故國終亡.

♣ 시어․시구 연구 및 분석

 #. ․ - 서울. 여기서는 경주․긔 래 - 밝은 달(밤)에․밤 드리 - 밤 들게, 밤이 늦도록  ․노니다가 - 노닐다가, 놀며 지내다가․드러  - 들어와․가리 - 다리가, 가랑이가 가[脚] + 이(주격조사)․네히어라 - 넷이로구나.․아 - 빼앗겼음을, 빼앗긴 것을.

 #.․내해엇고 - 내 것이어니와, 내 아내의 것이어니와. ‘내 것’이라는 직접소유로 표현하여 강조함.

 #.․엇디릿고 - 어찌 할 수 있으리오?

 #.․드러  자리~가리 네히어라 - 역신이 아내를 범하고 있음을 노래한 것이다.

 #.․아 엇디릿고 - 이미 다른 사람의 여인이 되어 버린 상황에 대한 체념으로 보기도 하며, 자신의 아내까지도 대상에게 바치는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요점 정리

1. 벽사 진경(辟邪進慶)의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이다.(무가-처용은 무신으로 볼 수 있다.)

 2.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의식무, 또는 연희로 계승되었다.

 3. 체념과 관용을 바탕으로 무가의 성격을 띠며, 무속적으로 전승되었다.

 4. 해가, 원가, 도솔가, 혜성가 등과 함께 주술성(呪術性)이 깃들어 있다.

 5. 귀신이 감복한 것은 처용의 관용적 태도 때문이다.

♣ 생각해 봅시다. 

 1. 이 작품에서 화자의 태도가 가장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구절을 찾아보자.

  ▶ 아 엇디릿고 - 처용의 관용이 드러나 있다.

 2. 이 작품이 전래 민요나 무가(巫歌)의 정착이라고 보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 4․4조의 대립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 비교해 봅시다. 

 1.

  ▶

♣ 이것만은 알아야  

 1. 이 작품에서 체념적인 어조가 드러나는 곳을 찾아보자.

 ▶ 아 엇디릿고

◈ 참고 사항

 ◇ 처용희(處容戱)

   신라․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계속 전승되어 온 구나 의식무(驅儺儀式舞)이면서 연극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가면을 쓰고 잡귀를 물리치는 것은 구나 의식의 보편적인 방식의 하나이며, 부락 굿에서도 그러한 예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처용은 신(神)인 동시에 인간이며,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역신(疫神)과 대결한다는 점에서는 처용희를 연극이라고 말한다. 긋에서 연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처용희의 근본적 성격이겠으나,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이 복합되어 실제 공연하던 처용희를 이루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처용희는 용신(龍神), 산신, 불교 의식의 복합이고,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희는 처용이 오방(五方) 처용으로 되어 연화무학무(蓮花舞鶴舞)와 복합되어 있으며, 여기(女妓)가 처용가에 있어서 봉황음 삼진작(鳳凰吟三眞勺) 등의 다른 노래를 하도록 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의 처용희는 주로 궁중에서 거행되는 세말(歲末)의 나례(儺禮)에서 공연되었으나, 민간의 처용희도 있었다. 의식무(儀式舞)로서의 기능이 유지되기는 했으나, 놀이로서의 성격이 확대되었다. 영조 이후에는 중단되었다가 1920년대에 <악학궤범>에 의거해서 다시 시작해 오늘날에 전한다.

 ◇ 「처용가」의 주술성

  「처용가」는 「구지가」에서 「해가」로 이어지는 주술 시가의 맥을 계승하고 있으며, 고려 속요 「처용가」의 모태가 된 작품이다.

  향가 「처용가」는 배경 설화에서 독립시켜 놓고 보면 노래 자체에는 주사적(呪辭的)인 성격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 노래와 더불어 춤을 춤으로써 역신을 몰아냈다고 한 것으로 보나, 그 뒤에 처용의 화상(畵像)은 역신을 내모는 기능을 하여 문신(門神)이 되었고, 처용의 이야기가 cjdydan, 처용희 등으로 전승되어 나례(儺禮 ; 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에 결부되어 역시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니, 「처용가」는 애초부터 어느 정도 주술적 능력을 발휘했던 노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노래를 남녀 사이의 치정(癡情) 관계를 담은 노래가 아니라 처용의 아내가 병이 들었다가 그 병을 치료한 것을 비유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처용이 동해 용왕의 아들이었다는 말은 그가 동해 용왕을 모신 무당이었다는 뜻이고, 무당이었던 처용은 아내가 병이 들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 내고, 이 노래를 불러 아내의 병을 치료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향가 「처용가」와 고려 속요 「처용가」의 비교

  신라의 향가 「처용가」는 고려에 와서 궁중의 나례와 결부되어 ‘처용희(處容戱)’, ‘처용무(處容舞)’로 발전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섣달 그믐에 구나 의식을 행한 뒤, 내당에서 지당구(池塘具)를 설치하고 노는 놀이 중에 불렀다.

  고려 속요 「처용가」 역시 처용이 역신을 몰아 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향가 「처용가」와는 달리 처용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고, 역신에 대한 분노가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 가무와 노래가 질병을 몰아 내는 주술적 양식으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변모는 향가 「처용가」가 주술적 효력을 발휘해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그것을 전승시킨 무당들이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쳤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편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한글로 수록되어 있어서 향찰을 해독하는 열쇠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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