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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후발제인(後發制人)

작성자goldj|작성시간20.04.25|조회수404 목록 댓글 1



후발제인(後發制人)

 

뒤에 손을 써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적을 상대할 때 한 걸음 양보하여 그 우열을 살핀 뒤에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단번에 적을 제압하는 전략을 말한다.


: 뒤 후(彳-6)

: 필 발(癶-7)

: 절제할 제(刂-6)

: 사람 인(人-0)



뒤에 손을 써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뜻으로, 적을 상대할 때 한 걸음 양보하여 그 우열을 살핀 뒤에 약점을 공격함으로써 단번에 적을 제압하는 전략을 말한다. 순자(荀子)에서 유래되었다.


순자의 의병(議兵) 편에 "뒤에 출발하여 먼저 도달하는 것이 용병의 중요한 술책이다(後之發, 先之至, 此用兵之要術也)"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전투에 임하여서는 적이 전열을 정비하여 그 기세가 날카로울 때는 정면으로 상대하지 말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다렸다가, 적의 전열과 기세가 흐트러진 틈을 타서 공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용병술을 말하는 것이다.


전국책(戰國策)의 제책(齊策) 편에 "천리마라도 오래 달려 피로해진 뒤에는 평범한 말도 그보다 빨리 달릴 수 있고, 맹분(孟賁)과 같은 뛰어난 용사라도 피곤해져 힘이 빠지고 난 뒤에는 평범한 여자라도 그를 이길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평범한 말이 천리마를 이길 수 있고, 평범한 여자가 맹분 같은 용사를 이길 수 있는 것은 후발제인, 곧 상대방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제압하는 전략을 활용하면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국방 전략은 '남이 나를 침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침범하지 않으며, 남이 나를 침범하면 반드시 나도 남을 침범한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는 것이데, 이 역시 후발제인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공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전략인 선발제인(先發制人)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후발제인(後發制人)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관망하는 것이 좋을까미리 대비하는 것이 좋을까.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말을 즐겨 쓰는 사람들은 당연히 후자(後者).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먼저 배 탄 놈이 나중에 내린다'는 속담이 내려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먼저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남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고 서두르다 도리어 뒤떨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뒤에 출발해서 앞서 나가는 사람을 이겨낸다는(制人)이 성어도 전장에서는 적의 허점을 간파한 후에 공략한다는 의미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먼저 공격하여 적을 제압하는 전략인 선발제인(先發制人)과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의 유학자 순자(洵子)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비판하여 성악설(性惡說)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책 순자(洵子) 의병편(議兵篇)에 나오는 뒤에 출발하여 먼저 도달하는 것이 용병의 중요한 술책이라(後之發, 先之至, 此用兵之要術也)는 말에서 유래했다. 


전장에 나갔을 때 적이 전열을 정비하여 그 기세가 올랐을 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기다렸다가 적이 흐트러진 틈을 타서 공격하여 제압하라는 용병술을 말한다.

 

전국시대란 말을 낳게 한 전한시대 학자 유향(劉向)전국책(戰國策)에도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천리마라도 피로해진 뒤에는 평범한 말이 그보다 빨리 달릴 수 있고, 맹분 같은 뛰어난 용사라도힘이 빠지고 난 뒤에는 평범한 여자가 그를 이길 수 있다(麒驥之衰也 駑馬先之 孟糞之倦也 女子勝之).


맹분(孟糞)은 춘추시대 ()나라 장사 이름으로 물속의 교룡도 흉포한 호랑이도 피하지 않았고 고함을 지르면 그 소리에 하늘이 움직였다고 한다.

 

적과 대치했을 때 빈틈이 보일 때까지 무작정 기다린다면 때가 오지 않는다. 그 사이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실력을 닦아놓아야 환난에 즉각 대응할 수 있다.

 

지난 달 북한이 지뢰 도발을 해 왔을 때 GP의 병사들이 적극 대응하고 이후 대북 확성기 방송과대응 포격으로 남북 고위급 회담까지 이어진 것은 뒤에 나서 제압한 전형이다.

 

일본 아베정권이 안보법안을 강행처리, 전쟁 가능한 국가로 됨으로써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우리로서는 조그만 불상사 가능성에도 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후발제인(後發制人)


나중에 출발하여 제압한다.


천리마도 피곤하면 보통 말에 뒤지며, 고대의 용사인 맹분(孟賁)도 힘이 빠지면 여자에게 진다. 무릇 열등한 말과 여자는 힘이라는 면에서 천리마나 맹분을 결코 따르지 못한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럴 수 있다는 건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늦게 출발하는 조건을 잘 활용하는 덕분이다.


무릇 전투에서 적이 전열을 제대로 정비하여 날카로울 때는 싸우지 말고 단단한 벽처럼 버티고 기다렸다가 그 전열과 기가 쇠퇴한 다음 공격하면 필승이다. 이를 남보다 뒤처졌을 때는 상대가 쇠퇴하기를 기다리는 법이라 한다.


후발제인과 선발제인은 상대되는 개념으로, 정치‧군사적으로 흔히 사용되는 계략이다. 정치 모략을 계획할 때 주동성은 지극히 중요하다. 정치상의 주동성은 정확한 도의(道義)에서 나온다. 상대와 각축을 벌일 때, 적이 먼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은 나중에 나서서 적이 자기를 충분히 들어내면 적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이용하여 민심을 얻음으로써 정치‧도의상 불패의 위치에 올라서는 것이다.


아득한 상고시대의 헌원씨(軒轅氏)는 판천(阪泉) 전투에서 이 후발제인의 전략을 사용했다. 당시 헌원씨 부족은 막 유목 경제에서 농업 경제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목 생활에 익숙해 있어 행동이 민첩하고, 먼 길을 출정할 대 소와 양을 끌고 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기에 후방에서 식량 등의 물자를 운반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을 갖고 있었다.


이 씨족과 맞붙은 유망(揄罔; 신농씨神農氏 부족의 제8대 왕)이 이끄는 부족은 농업 생활에 익숙했기 때문에 병마가 움직이려면 양식을 먼저 운반해야 했다. 그런데 일단 농작물을 심을 수 없는 유목 지구인황야로 진입하면서 후방으로 부터의 물자 수송이 끊어졌고 '적지에서 양식을 얻는다'는 '인량우적(因糧于敵)'의 계략도 이런 황야에서는 통할 수 없어 주도권을 잃고 만다.


지략이 뛰어난 헌원씨는 상대의 이러한 약점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기동성 있게 후퇴하는 전술을 운용했다. 그들은 하남(河南; 지금의 개봉과 정주 사이)에서 싸우다 물러나고 다시 하북에서 싸우면서 판천(阪泉; 지금의 하북성 청원현)까지 후퇴하여, 지형‧생활 조건 등이 자기에게 유리하고 적에게 불리한 장소를 마지막 전투지로 택했다. 헌원씨는 이런 탄탄한 기반 위에서 결전을 벌여 단숨에 승리를 낚아챘다.


기원전 625년, 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했다. 송은 진(晉)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 문공(文公)은 얼마 전 초나라에 굴복한 조(曺)‧위(衛) 두 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송에 대한 초의 포위를 풀기로 했다.


초나라 성왕(成王)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즉시 대장 성자옥(成子玉)에게 빨리 송나라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자신만만하고 교만한 성자옥은 송에 대한 진격을 멈춘 후 군대를 진나라 쪽으로 돌려 진격해 들어갔다.


진 문공은 이전에 약속한 대로 세 번 싸움을 피하며 후퇴를 명령하여 성복(城濮)에까지 물러나 주둔했다. 계속 후퇴만 하자 진나라 장수와 병사들은 불만을 품으며 싸우고 싶은 의욕으로 불탔다. 진 문공 중이(重耳)는 강력한 초나라 군대를 맞아 승부를 점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몄다.


대신 호언(狐偃)은 장수와 병사들에게 조급해 하지 말라며, '세 차례 물러나는' 것은 우선 지난날 우리 왕이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고, 또 초나라군의 예봉을 피해 투지가 느슨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싸우면 승리하기가 더욱 쉽다고 설득했다. 진나라 군대는 상하 모두가 합심하여 삼엄하게 진을 치고 기다렸다. 장수와 병사들의 드높은 사기는 진 문공의 자신감을 더욱 굳혀주었다.


정자옥은 초나라 군대와 진(陳)과 채(蔡) 두 나라 군대를 셋으로 나눈 뒤 기세 등등하게 호령했다. "자! 진나라 군대를 공격하자. 진이 망할 때가 왔다!"


양군은 마침내 서로 대치했다. 여기서 진나라 군은 '약한 쪽을 먼저 치고 강한 쪽은 나중에 친다'는 '선약후강(先弱後强)'의 전법으로, 먼저 하군(下軍)의 부장 서신(胥臣)으로 하여금 초군의 우익으로부터 공격해 들어가도록 했다. 초군의 우익은 진‧채 연합군으로 구성되어 있어 전투력이 비교적 약한 편이었다. 진군의 기병과 보병이 벼락처럼 달려들자 진‧채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여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망가고 말았다.


진나라 상군(上軍)의 주장 호모(狐毛)는 거짓으로 중군(中軍)을 꾸미고 양면 깃발(당시에는 중군만이 양면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을 치켜든 채 못 이겨 도망가는 척 했다. 하군(下軍)의 주장 난지(欒枝)도 전차 위에 나뭇가지를 얹고 땅에 끌리게 하여 자욱하게 먼지를 내며 도망치는 것처럼 꾸몄다.


초나라 군은 진나라의 장수들이 정말로 못 이겨 도망가는 줄 알고는 수레를 몰아 추격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중군(中軍)의 주장 선진(先軫)의 기습으로 병력이 절단 당했다. 좌군도 호모와 호언이 지휘하는 상군에게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성자옥은 그제 서야 서둘러 병사를 수습하려 했으나 전군은 완전 궤멸되고 말았다. 성자옥은 연곡(連谷; 하남성 서화현)까지 물러나 자살했다.


작전 중에 사용하는 '후발제인'의 모략은 전략적 각도에서 출발한 것으로 원래 군사적인 개념이었지만, 역량과 태세라는 방면의 요소를 가짐으로써 정치 방면의 의의도 적지 않게 되었다. 전략상 '후발제인'의 정치적 의의는 때때로 군사적 의의보다 크다.


정치상 '후발제인'은 민심을 얻고 군중을 동원하고 주위의 동정과 원조를 얻기 쉽다. 동시에 군사상으로는 지구전에 유리한데, 불리한 조건에서 섣부른 결정을 피하여 시간을 벌고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할 수 있다.



▣ 웅크리고 있다가 유리할 때 승리를 낚아채라



후발제인(後發制人)이란 성어를 아는가? 상대방이 공격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유리할 때 기회를 잡아 반격해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혁명전쟁전략문제(中國革命戰爭的戰略問題)'라는 책의 제 5장 3절에서 "초나라와 한나라의 성고의 전쟁, 신한(新漢)의 곤양의 전쟁,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비수의 전쟁 등 유명한 대전은 모두 쌍방의 강약(强弱)이 달랐는데, 약자가 먼저 한 걸음 양보하였다가 나중에 발동시켜 적을 제압해 전쟁의 승리를 낚아챘던 것이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마오쩌둥의 말은 그가 전쟁터에서도 늘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는 '손자병법'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전쟁이란 속이는 도이다.

兵者, 詭道也.


따라서 능력이 있는데 적에게는 능력이 없는 것처럼 하며, (군대를) 쓰되 적에게는 (군대를)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 적에게는 먼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 적에게는 가까운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故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 近而視之遠, 遠而示之近.



이롭게 하면서 적을 꾀어내고, (내부를) 어지럽게 하여 적을 습격한다.

利而誘之, 亂而取之.



(적이) 충실하면 적을 방비하고 (적이) 강하면 적을 피하고, 분노하면 그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적이) 낮추려 들면 적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적이) 편안해 하면 그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친하게 지내면 그들을 이간질하라.

實而備之, 强而避之, 怒而撓之, 卑而驕之, 佚而勞之, 親而離之.



그들이 방비하지 않을 곳을 공격하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라.

攻其無備, 出其不意.



이것은 병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니, 정말로 미리 전수해서는 안된다.

此兵家之勝, 不可先傳也.

(孫子兵法 計)


손자가 말하고자 하는 병법의 거의 모든 것이 이 문장에 담겨있다. 아군의 동태를 살피러 온 적의 탐색병에게 오인하고 돌아가 잘못된 보고를 만들게 하면 틈이 보이고, 단순히 적을 속이고 나를 감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적극적으로 미끼를 던져 혼란스럽게 해 보라는 것이다. 화친도 해보고, 이간질도 해 보고, 때로는 비굴하게 굴어 적의 자만심을 충족시켜 주기도 해야 결국 마지막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맨 마지막 말처럼 이런 전술을 결코 남이 알지 못하도록 유의하라는 손자의 당부다. '이퇴이진(以退爲進)' 즉 물러나는 것으로 전진하는 것으로 삼거나, '이퇴위공(以退爲攻)' 즉 물러나는 것을 공격으로 삼는다는 전략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마오쩌둥이 상당한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에게 승리를 거머쥔 것도 상대의 교만심을 잔뜩 부풀게 하고 자신은 밑바닥 민심을 다지는 작업을 하면서 궁극적인 승리를 하겠다는 치밀한 계략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관세 전쟁을 선포하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중국이 맞대응하면서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있다. 수출비중을 확 줄이고 내수(內需) 기반을 단단히 구축한 중국은 미국에게는 약자로 행세해 오면서 세계 1위의 외환보유고 등 탄약도 많이 준비해 두었다.


이번의 중국의 대응 방식은 중화 패권주의를 내세우면서 이제부터는 미국에 밀리지 않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부강한 중국몽(中國夢) 건설과도 맥을 함께 하고 있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오히려 선제 공격한 미국보다 반격을 가하겠다는 중국의 승리에 오히려 꽤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낙관론이나 허장성세보다도 우리를 숨기고 흩어진 민심을 모으면서 여야가 합심해 치밀한 전략을 세워 길고도 험난한 무역전쟁에 임해야 한다. 혹여 불필요하거나 덜 중요한 문제들에 매달려 무역 강국의 위상이 흔들릴 빌미 제공을 하지 않도록 모두들 자제력을 발휘할 때다.



▣ 선즉제인 vs 후발제인


선즉제인(先則制人)이라고 했다. 싸움을 할 때는 선수를 치는 게 유리하다는 말이다. 그래야 기선을 잡고,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 초나라 항우가 선수를 쳐서 회계태수 은통(殷通)을 제압한 데서 유래된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수를 쳐야 이길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할 때도 있다. 늦게 시작하고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 후발제인(後發制人) 전략이다. 삼국지의 조조가 써먹은 전략이다. 그것도 원소(袁紹)라는 강적과 싸워 이긴 전략이다.


원소는 이른바 사세삼공(四世三公)의 명문 집안 출신이었다. 4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명문 중에서도 명문이었다. 명문인 만큼 원소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많은 인재를 확보한 원소는 야심이 생겼다. 공손찬을 깨더니, 내친 김에 임금자리까지 노리게 되었다. 압도적인 군사를 이끌고 조조가 임금을 모시고 있는 허도를 향해 진격했다. 선수를 친 것이다.


조조는 고민에 빠졌다. 한참 열세였다. 그렇다고 싸움을 앞두고 기가 죽을 수도 없었다. 우선 부하들을 안심시켰다. "원소는 야심은 크지만, 지모가 부족하다. 기세는 등등하지만, 내심은 생쥐다. 군사는 많지만, 책임 분담이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대단할 것 없다."


하지만 원소의 대군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조그만 전투를 치른 후, 조조는 관도로 물러나 방어해야 했다. 관도까지 따라온 원소군은 조조군에게 화살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조조의 병사들은 방패 뒤에 숨어서 기어다녀야 할 정도였다.


조조는 군량마저 바닥나기 시작했다. 작전상 후퇴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참모 순욱은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쩔쩔매고 있는 조조에게 마침 원소의 장수 몇 명이 투항해왔다. 그 가운데 한 장수가 중요한 군사기밀을 털어놨다. 원소는 오소라는 곳에 1만 수레의 식량을 쌓아놓고도, 소수의 경계병만 배치하고 있다는 제보였다. 조조는 재빨리 원소의 군량창고를 불태워 버렸다.


군량이 떨어져 다급해진 원소는 조조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군량이 부족한 것은 조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침착하게 버텼다. 원소는 7만이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조조는 이렇게 이길 수 있었다. 늦게 시작하고도 승리한 후발제인이었다. 조조는 작은 전투를 치른 후 관도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병력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원소를 관도까지 따라오도록 유인하는 효과도 거뒀다. 정면대결을 피하고, 적의 후방에 있는 군량창고를 태웠다. 이런 유연한 전술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강한 상대를 무너뜨렸던 것이다.



▣ 후발제인(後發制人)


춘추시대 동방의 강국 제와의 장작(長勺)전투에서 활약한 노의 조귀(曹劌)는 평민이었다. 강국으로 부상하려던 제는 이 전투에서 패하여 기가 꺾였으며, 쇠약해가던 노는 망국의 시기를 뒤로 늦출 수 있었다.


BC 685년, 제의 군주로 즉위한 환공은 노가 라이벌 규(糾)를 지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장공도 친히 대군을 이끌고 국경까지 진출했지만, 대패하고 간신히 도망쳤다. 전후에 장공은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군사력을 증강하고 각종 병기를 갖추어 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이때 조귀가 등장하여 제와의 필승책을 제시했다. 처음 그가 장공을 만나려고 하자, 친구가 그런 말은 높은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니 하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조귀는 높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원대한 생각이 없다고 주장했다.


조귀가 어떻게 싸울 것이냐고 묻자 장공은 이렇게 대답했다.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골고루 나누어 주겠네."

"작은 은혜에 불과하여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지 않으므로 백성들이 따르겠습니까?"

"제사를 올릴 때 검소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작은 믿음에 불과하므로 신(神)이 복을 내리겠습니까?"

"소송을 공정하게 하면 어떤가?"

"충실한 방법입니다. 저도 따라 싸우겠습니다."


장공은 조귀와 함께 수레를 타고 출전했다. BC 684년, 제군이 국경을 침범하자 장공은 곡부시의 북쪽 교외인 장작까지 적을 유인했다. 오판한 제군은 엄청난 기세로 노군을 추격했다. 노군은 제군의 2차례 공격을 막아냈다. 두 차례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적진으로 진입하지 못한 제군은 사기를 잃고 잠시 퇴각했다.


노군이 추격을 하지 않자 제군은 노군이 겁을 먹고 응전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다시 한 번 공격했다. 찬스라고 판단한 조귀는 반격하자고 건의했다. 장공은 직접 북을 치며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제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잃고 무너졌다.


장공이 추격하려고 하자 조귀는 매복의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장공은 추격을 중지했다. 조귀는 직접 제군의 동향을 확인한 후 추격해도 좋다고 건의했다. 장공은 제군을 추격하여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장작 전투는 제후국끼리의 전쟁에 불과했다. 그러나 정략과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고대의 군사적 사상이 체현된 전쟁이라는 의의가 있다. 제와 노 사이에 벌어졌던 두 차례의 전쟁은 정의와 불의가 싸우면 병력과 무기의 우수성보다는 정의의 군대가 최후의 승리를 얻는다는 일종의 원칙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첫 번째 전쟁에서는 노의 장공이 제를 침공했지만, 신하를 희생양으로 삼아 간신히 탈출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나라의 자존심과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제는 승세를 몰아 노를 침공했다가 대패하고 말았다. 장공은 1차전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철저한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또한 전례를 무시하고 평민 조귀를 과감하게 등용하여 그가 필승의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장공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조귀의 건의를 받아들여 반공과 추격을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후대의 모택동(毛澤東)까지도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에 관한 문제'라는 논문을 통해 장작전투에서 노가 적이 피로했을 때가 아군이 공격할 기회라는 작전원칙을 잘 지켜서 제군을 격파함으로써 중국의 전쟁사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긴 좋은 사례라고 높이 평가했다.


조귀가 주장한 전쟁의 원칙과 장작전투의 사례는 후대 중국의 '후발제인(後發制人)'이라는 방어 전략의 모델이 되었다. 북의 잦은 도발은 우리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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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자애(서울) | 작성시간 20.04.26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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