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80년대 미 육군에서 특전단 장교로
성장해 3특전단장으로 복무한 장교의 이야기로,
초기 특전단 생활과 함께, 아프간에 파병된 3특전
단장의 글로 전장 상황보다는 전체적인 그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많이 축약했습니다.
즐거운 일주일 되십시오.
잇빨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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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conventional Warrior
아프간 특수작전 지휘관의 기억
포켓의 패치 오른쪽은 HALO.
왼쪽은 특전단 스쿠버 패치. 잠수부 헬멧 모양.
미 육군 특전단 퇴역, 대령 완터 모리스 허드
여러 해 동안 전사해 쓰러진 동료들을 위해.
자유의 대가는 높았고, 그 선택이 참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조 그래드제위츠 특전단 상사 1990년 7월 27일
채드 듀발 특전단 하사 1996년 1월 20일
조 수폰식 특전단 하사 1999년 12월 15일 (코소보)
브라이언 룩 특전단 중사 2001년 3월 3일
폴 스위니 특전단 하사 2003년 10월 30일 (아프간)
로이 우드 특전단 병장 2004년 1월 10일 (아프간)
애담 킨스너 심리전단 상병 2004년 1월 29일 (아프간)
부르스 프라이스 특전단 준사관 2004년 5월 19일 (아프간)
댄 에거스 특전단 대위 2004년 5월 29일 (아프간)
로버트 모겐슨 특전단 하사 2004년 5월 29일 (아프간)
조셉 제프리스 심리전단 일병 2004년 5월 29일 (아프간)
브라이언 오울테 네이비씰 부사관 2004년 5월 29일 (아프간)
Six Generations of American Patriots
The Young British Soldier
by Rudyard Kipling
당신이 다쳐 아프가니스탄 평원에 홀로 남겨졌을 때
어떤 여자가 내 남을 것을 잘라서 가져가려 다가올 때
소총 총구가 당신의 뇌를 날려버리려고 할 때
신에게 가려거든 병사처럼 가라.
Go, go, go like a soldier,
Go, go, go like a soldier,
Go, go, go like a soldier,
So-ldier of the Queen!
사람들은 자유가 없는 국가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걸 배우고 존중하며 유지하려고 하고 그 행동
의 일부가 된다. 미국의 여러 세대들이 그렇게
살아왔다. 이 이야기들은 내 경험들이다.
군 복무 20년 4개월이 되었을 때, 난 아프가니스탄
연합특수작전 태스크포스로 발령을 받았다. 이 부대
는 총 4천 명으로 7개국 병력으로 맹렬한 무슬림과
아프가니스탄을 상대했다. 난 낡은 사막화와 사막패턴
위장복을 챙겼고 머리에는 미 육군 대령 계급장이 달린
야전 patrol cap을 썼다.
입대 전과 기초훈련
내 조조 할아버지는 남북전쟁 당시 남군 보병으로 싸우셨고,
아버지는 학군장교로 2차대전에 참전해 84사단 소속으로 독일
에 있었고 벌지전투에서 다치셨다. 아버지가 다쳐서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원래 소대 소대장으로 돌아왔는데, 아버지를 대신
했던 소대장은 교전 중에 전사했다. 난 1983년 임관했는데 아버
지가 임관한지 정확히 40년 뒤였다. 포병장교로 임관했다. 그리
고 난 그 이후 단 한 번도 군생활 동안 다치지 않았다.
적과 싸우면서도.
고등학교 졸업 후 켄터키 댄빌의 센터 칼리지에 입학해 ROTC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했다. 이어 장교
기본반을 오클라호마 포트 스틸에서 받았고 난 8인치 자주포 주특
기 훈련을 했다. 이 기초반이 끝나자 레인저 훈련에 가려고 했다.
난 레인저 겨울반에 입교했다. 포트 베닝에서 1984년 4월 레인저를
수료했다. 정말 너무 추웠고 모든 게 정말로 힘들었다. 레인저 훈련
마지막에 고무보트를 저어 해안의 목표물을 타격하고 12마일 복귀
행군을 했는데, 엄청난 실탄과 보급품이 든 군장을 짊어지고 한 이
행군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길고 고통스런 12마일이었다. 수료식에서
이후 내 아내가 될 앤이 레인저 견장을 부착시켜줬고 부모님은 나를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복무 시작
불행히도, 레인저 교육을 통과한다고 무조건 레인저대대로 가는 건
아니었다. 그 대신 난 조지아 캠프 스튜어트 보병 24사단으로 갔다.
그때 사단장이 노만 슈왈츠코프 장군이었다. 그때 사단급 대규모
훈련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거기서 차량 후미등이 나간
것 가지고 문제가 되는 등 남은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포트 스튜어트에서 제1레인저대대가 있는 헌터 육군비행장은 차로
45분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레인저대대는 미 육군 최고의 경보병
부대로, 2대대는 워싱턴 포트 루이스 3대대는 포트 베닝에 있었다.
당시 내가 있던 포병대대에 레인저 수료 장교는 나 포함 2명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레인저1대대에서 시험적으로 박격포를 운영하면서 화력
지원장교로 훈련에 포병장교가 필요해 공문이 내려왔다. 결국 레인저
1대대로 찾아가 대대장과 면담까지 했는데, 우리 포병대대장은 후임
이 올 때까지 보내줄 수 없으니 대체자를 찾아서 박아놓고 가라고 한다.
결국 2주 만에 허가를 받았다. 야전훈련 도중 나는 레인저 대원 몇 명
을 봤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임시배속을 가자마자 난 온두라스 훈련
을 떠났고, 온두라스-니카라과 국경 몇 킬로미터 근처에 전 대대갸 낙
하산으로 점프했다. 레인저대대는 전 세계적으로 최고의 trained killers
였다. 결국 이 과정 속에서 나는 레인저로 완전히 전출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레인저로 전출가려면 공수자격이 필요했고, 포트베닝의 3주
공수훈련을 통과해야 했다. 사실 나는 레인저 입교 3주 전 점프스쿨
에 들어가 수료했었다. 레인저대대에서는 중위를 달고 점프마스터
과정을 들어갔다. 레인저에서 정말 여러 곳에서 점프했다. 캐나다의
눈밭에도 온두라스의 정글에도 텍사스 사막에도 점프했다.
Time to Move On
1레인저대대에서 2년을 근무하고 나는 대위로 진급했다. 불행히도,
나는 이때 다른 부대로 가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제대하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 상태를 PCS 상태라고 부르는데 군생활 24년 동안
총 열네 번이 있었다. 이럴 때는 보통 교육 더 받고 다음 근무나 제대
를 고려한다. 난 포트 스틸의 포병학교로 갔다. 레인저를 떠날 때 내
신체 상태는 최상급이었다. 그래서 나는 혹시 특수작전 쪽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미 육군 안에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특전단에 관심을 가졌다.
Earning the Green Beret
아프간 특수작전 지휘관으로 가기 몇 년 전에 난 특전단 6개월 자격
코스를 맡았었다. 내가 특전단 코스에 입교한 것은 1989년 1월이다.
난 그걸 즐겼고 꽤 잘했으며 통과했다. 내 인생 전체에서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팀 스포츠를 경험했고 어려운 독도법을 해야 했다. 좋은
시절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했다.
1단계는 30일로 테스트 단계였다. 내 기억에 이 기간 동안 75%가
떨어져 나갔다. 아픈 사람도 있었고 퇴출된 사람도 있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못 버틴 사람도 있었다. 매 2시간마다 우리는 떠나는
동료들을 봐야 했다. 그들은 막사에서 짐을 끌고 나와 트럭 타고
떠났다. 첫 달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소부대 전술 - 독도
법 - 숲 지대 정찰 등등. 12명이 팀으로 팀하우스에서 기거하면서
코스를 수행했고 야전작전에서도 서로 협동하며 해야 했다. 우리
팀에 외국인 장교 두 명도 있었다.
첫 단계 2주가 종료될 무렵, 우린 15킬로미터 야간 독도법을 했다.
정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는 완전군장 독도법으로 숲/늪지에서
5개의 포인트를 찾아서 통과해야 했다. 불빛은 절대로 사용할 수 없
다. 이날 중동에서 온 외국인 장교는 길을 잃고 있다가 새벽 1시에
나와 만났다. “날 죽여줘, 도대체 내가 지금 어디야?” 난 딜레마에
빠졌다. 규칙에 따라 특전단 후보생끼리 말도 하면 안 되고 후레쉬
도 사용할 수 없었다. 두고 갈 것인가 이 불쌍한 아랍 장교를 도울
것인가.
SFQC 코스 “phase one” 첫 달이 끝났다. 나는 정찰진지에 있다가
아침에 교관이 나를 무전기로 호출했다. “Instructor bravo 27, 훈련
통제기지다. 허드 대위는 모든 군장과 장비를 꾸려 트럭 타고 와서
보고하라. 보고할 지점의 좌표는......”
왜 나만 오라는지 난 이해를 못 했다. 당시 과정에서 난 A-team 팀장
역할을 하고 있었고 부팀장은 레인저 3대대 출신 대단한 부사관이었다.
난 부팀장에게 말했다. “무슨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네. 장비 챙겨서
복귀하라는데. 자네가 지휘권을 맡아. 행운을 빌어.”
거기 도착하자 교관이 나에게 말한다. “지금 자네 집에 불났어.
자네 아내는 괜찮아. 페이테빌로 빨리 가 봐. 걱정 말고. 자네는
1단계를 통과했어. 정말 잘 했어. 일단 가서 아내를 보고 연락한
다음, 월요일에 돌아와.”
내 아내 앤과는 고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데이트하던 사이다.
테네시 대학을 다니던 아내는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때였고
특전단 코스 때문에 포트 브레그 근처로 이사와 있었다. 불이
났을 때 앤은 창문을 깨고 밖으로 기어 나왔다. 집은 일부분만
탔다. 아내를 인단 부대 막사로 데려왔다. 난 한 달을 떠나 있
었기에 더럽고 배고팠고 피곤했다. 근 한 달간 매일 걸어다녔
고 군화를 벗자 왼발이 거의 두 배로 부어 있었다. 아내가 유리
를 깰 때 약간 자상을 입어 의무병에게 내 발과 아내의 상처를
같이 보였다.
발은 상태가 심각해서 의무병이 전문치료를 하라고 했으나 난
다음 과정을 위해 병원에서 일주일 정도만 치료했다. 이날 난
찾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차가운 맥주에 계란 베이컨
소시지 팬케이크 와플 오렌지주스와 커피를 먹었다. 과정 동료
한 명이 찾아왔다. 난 끝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특전단 “Coin”의 역사
내가 어렸을 때 특전단이 창설되었고, 사실 어린 시절 내 주변에는
중부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동독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중 많은 수가 특전단에 들어와 독일에
주둔하는 제10특전단으로 갔다. 당시 그곳에서는 비정규전에 매우
필요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육군 안의 이 10특전단은 참 독특한
존재였고 트러블도 많았다. 10특전단 안에 제각각 여러 언어들이
난무했다.
그래서 우리는 메달처럼 큰 동전을 상호 식별로 사용했다. 잘 모르
는 상대를 만나면 탁자에 그 동전을 내놓고, 상대가 내놓으면 우린
같은 연대 소속이라는 걸 깨닫고 금방 친해졌으나, 만약 내가 내놓
았는데 상대가 안 내놓으면 소련 스파이로 간주되어 심하면 죽일
수도 있었다. 이 전통이 쌓이면서 모든 부대들이 기념 동전을 만들
기 시작했다. 나중에 군 생활 도중 얻게 된 동전이 100개가 넘었다.
10특전단에서 시작된 이 코인들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미 육군 특전단이 베레모를 쓰게 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포트 브레그에 와서 보기 전까지, 10
특전단의 중부 유럽 출신들에게는 베레모가 자연스러웠다. 특
히나 프랑스 출신들은 전통적으로 베레모를 선호했다.
Special Forces Training
운도 좋게 나는 SF Qualification Course를 끝내고 포트 브레그의
Military Freefall (MFF) course에 들어갔다. 레인저에서 특전단 선발
코스까지 난 점프 50회를 했고 모두 생명줄강하였다. MFF School
은 전의 점프와 낙하산을 포함해 전혀 달랐다. 시속 120마일의 속도
로 자유낙하를 해야 하고 보통 17,000피트 이상을 올라가며 작은
산소통도 사용한다. 보통은 HALO라고 부르며 HAHO도 있었다.
이 할로 과정에는 매년 특전단 오퍼레이터 100명이 수료하고 가끔
레인저도 있고, 미 공군도 교환교육이 체결되어 소수 공군대원도
들어오는데 보통은 특수작전사령부 소속 대원들이고 파라레스큐
대원들도 있었다. 당시는 네이비씰 대원들도 소수 들어왔다. 내가
입교했을 때는 할로스쿨이 대기와 조건 때문에 애리조나 유마로
이동한 상태였다. 유마는 바람도 구름도 거의 없고 항상 하늘이 맑
다. 그 다음 교육은 전투스쿠버 과정으로 이는 필요한 소수만
입교했다.
이 전투 스쿠버 과정은 해군에서 하던 것으로, 특전단 씰 해병정찰대
등이 입교했고 가끔은 파라레스큐 대원들도 입교했다. 입교자 대부분
은 네이비씰과 육군 특전단이었다. 나 같은 대위가 스쿠버 제대에 들
어가면 여기 입교해야 한다. 사실 난 이 스쿠버 학교에 지원했으나
“수영 잘 해? 넌 점프마스터도 나왔고 HALO에 들어가면 되는데 왜
거기 가려고 해?”란 말을 들었다. 결국 할로 과정에 들어갔다.
내가 독일 10특전단에 도착해서 곧바로 말을 듣는다.
“이봐, HALO guy. 대단하네. 그러나 우리는 HALO 대위는
필요 없어. 우리가 지금 전투-스쿠버팀을 만들고 있거든.
어떻게 생각해?”
“좋습니다! 갑니다!”
당시 특전단 장교로 할로와 스쿠버를 둘 다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퇴역할 때 특전단 대령 중에서 둘 다 수료한 사람
이 12명 정도가 전부였다. 당시는 할로가 거의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 민간인 친구들이 광적인 질문을 퍼부었다.
할로스쿨 첫 몇 번의 점프는 12,000~13,000 피트에서 했고, 10초당
300미터 떨어진다. 낙하산은 보통 4천 피트에서 개방한다. 평형상태
가 가장 중요하다. 항공기 이탈 후 스핀을 먹어 위험에 빠지는 경우
가 많았는데,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핀도 흔들림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다. 이탈 첫 5초 동안에는 시속 120마일(193km)를 경험
한다. 그 속도로 떨어지면 작은 조각이나 요동에 따라서 스핀을 먹거
나 최악의 상황을 경험할 수도 있다.
12,500피트 이상에서는 산소통을 사용했다. 할로 강하는 160-180노트
까지 경험할 수 있다. 생명줄 강하는 낙하산 비행에 보통 110노트 정도
만 경험할 수 있다. 산소마스크에 군장까지 달면 평형 유지가 상당히
힘들어진다. 생명줄강하와 할로 강하를 통해서 난 거의 모든 항공기를
경험했다. C-130, C-17, C-5, MC-130, UH-60, CH 47, UH-1, 그리고
구형 러시아제 MI-8 (HIP)에서도 점프했다. MFF 스쿨에서는 후문강하
와 측문강하 모두를 훈련시캰다. 측문강하가 좀 더 까다롭다. 측면으로
바람을 받아 스핀을 먹기 쉽기 때문이다.
그 외의 다음 기술은 HAHO로 고고도 이탈 즉시 낙하산을 개방해 20-
30-40마일까지 낙하산으로 비행이 가능하다. 풍향과 풍속과 상공독도
법이 잘 이뤄져야 원하는 드롭존에 들어갈 수 있다. 야간강하에서는
야광 고도계와 함께 시가 크기의 지라이트를 달아 서로를 식별한다.
이탈을 하면 평형 유지하고 고도계를 본다, 고도계가 가끔 얼어버릴
수 있는데 이때는 모골이 송연하다. 이런 문제가 생길 때는 아무 것도
안 떠오르고 생각이 멍해진다. 이럴 때는 침착하게 먼저 립코드를 한
번 보고 위치를 확인한다. 이런 경우를 나도 한 번 겪었고 결국 안전
시간/고도 안에 낙하산을 개방했다. 이런 작은 실수들이 무섭다. 낙하
산이 펴지면 그 다음은 대기의 풍향과 풍속이다.
자유낙하 시는 계속 고도계를 보며 자신의 하강률을 알아야 한다.
매 500피트 마다 확인한다. 내가 어디에 있고 지금 무얼하는지 자
각해야 한다. 수송기에서 뛰면 수송기 동체를 보면서 수평을 유지
한다. 내 경우는 100번도 넘게 전개되는 낙하산이 군화에 걸리는
일이 일어나면서 몸이 뒤집어지곤 했다. (잇빨 주: 키가 상당히 커
서 그런 것 같다) 개방 후에는 DZ를 지나치거나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한다.
한 번은 개방했는데 낙하산 측면에 구멍이 나 있었고, 이게 점차
커기지 시작했다. 곧바로 “cut away(주낙하산 분리)”가 떠올랐다.
분리 스위치는 립코드 위치에 있고 이걸 뽑으면 라이자에서 핀이
빠져 주낙하산이 분리된다. 그 다음에 또 중요한 것은 내 위에 있
는 다른 사람 낙하산이다. 보통 위는 잘 안 보인다. 밑의 강하자는
내가 피해주어야 하나 위는 내가 못 본다. DZ에 다가설수록 다른
강하자를 더 살펴야 한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맞바람이라도
시도해야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돌아갔을 때, 미 육군은 이 특전단을 1개
여단으로 구성하면서 지원파트에 병사와 장교들이 들어왔다.
휘하 3개 대대에 올림픽 크래스의 미 육군 저격팀이 포트베닝에
서 선발되어 추가되었다. 이 3대대에 바로 미 육군 강하시범팀
Golden Knights가 소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상당한 고수들이었
으나 끔찍한 여러 사고도 겪었다. 난 그들과 마지막 할로 점프를
했다. 생명줄 강하는 보통 풋볼경기장 크기 안에 들어가야 하는
수준이지만 할로팀은 50야드 안에 들어가야 한다. 고공낙하산은
생명줄강하 낙하산에 비하면 거의 페라리 스포츠카다.
내 친구 하나는 할로스쿨 강하 동안 평형을 못 잡고 심하게 스핀을
먹었다. 이럴 경우 피가 뇌로 몰리면서 눈 검은자가 확장되고 시야
가 black out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떨어지다 자동산계
기가 2,500피트에서 때려줘 낙하산이 펴졌다. 그때 안 펴졌다면 아마
죽었을 거다. 그 자산기가 목숨을 구했지만, 그 친구 아마 영원히 스
카이다이빙은 안 했으리라. 그 친구는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졸업 못하고 퇴교되었다.
한 친구는 강한 바람 속에서 접지하다 정강이뼈가 부러졌다. 그 친구
가 접지할 당시는 시속 40킬로미터 정도로 떨어졌다. 누구나 항상 귀
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다. “항상 얼굴로 바람을 맞아라.”
처음으로 야간에 포트 브레그 상공 12,500피트에 올라가 점프하기
직전에는 내 정신 일부가 거의 미쳐 있었다. 이미 20회 할로 점프가
있었지만 정말 무서웠고 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군장과 소총
과 산소통을 장착한 상태.
특전단 전입
할로스쿨을 수료하고 메사추세츠 포트 데븐스에 있는 10특전단
3대대로 가서 전입보고를 했다. 새롭게 관급된 베레모를 썼다.
거기 있는 게 행복했고 난 Special Forces A-team 팀장이 되었다.
A-팀은 특전단의 뼈대다. 총 12명으로 대위가 팀장이고 준사관이
부팀장이며 보통 중사가 작전하사관을 했고 정보하사관도 겸했다.
그리고 신형 장거리 무전기를 다루는 통신하사관 두 명, 공병/폭파
하사관 두 명, 화기하사관 두 명이 있는데 이들은 소부대 전술도
책임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무하사관 두 명이 있다.
모두 특전단 선발과정에서 상위 25%에 속해 통과한 사람들이다.
최고 중의 최고였다. 내 팀은 ODA-092로 정말 최고의 하사관들
을 만난 건 정말 은총이었다. A-팀 위는 B-팀 혹은 중대다. 팀명
에서 ‘0’은 10특전단을 의미하고 이 10특전단은 1950년대부터 유럽
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했다. ODA-092는 10특전단 3대대 찰리중대
2팀을 의미했다.
팀에 갔더니 고맙게도 아는 친구가 있었다! 정말 행복했다!
우린 부대 안에서나 훈련에서나 같이 다녔다. 팀 안에서는
각 주특기가 다른 팀원에게 자기 주특기를 가르쳐주는 cross
-train을 했다. 의무는 다양한 지혈법과 링커 주사법을 가르쳐
주었고 살 꿰메는 방법도 배웠다.
어느 날 중대본부에 모든 팀장이 모였더니 지휘관인 소령님이
이제 특전단이 다섯 개로 증설되며 각 중대에는 고공침투팀과
스쿠버 침투팀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난 이미 할로 자격이 있어
할로팀 팀장으로 유력했다. 난 스쿠버팀 팀장으로 자원하겠다고
했다.
이는 플로리다 키웨스트의 막중한 특전단 수중작전코스(SFUWO)
입교를 의미했다. 난 팀으로 돌아가 팀원을 모아 말했다. “대단한
뉴스가 있다. 우리 092팀은 이제 스쿠버팀이 된다. 난 키 웨스트
스쿠버 교육에 들어간다.”
나와 팀원 반은 너무 흥분했으나,
나머지 반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대위님이 손들었죠?
이런 우라질 생각을 어떻게 혼자서 하신 겁니까?”
이 특전단 Scuba school은 미 육군 안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힘든
교육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먼저 30일 동안 가차 없는 수중환경
체력훈련을 통과해야 한다. 보통 한 반에 50명이 입교하고 레인저
나 해병대도 소수 입교한다. 일단 각종 체력측정과 2마일 달리기를
제한시간 안에 들어와야 한다. 당시 내 2마일(3.2km) 달리기 최고
기록은 11분 5초였다. 이 측정에서 나는 중간 정도였고 내 앞에
20-25명 정도가 더 빨리 들어갔다.
입교자는 먼저 플로리다의 pre-scuba training course로 들어가야
하고 난 수영과 함께 75미터 잠영(중간에 한 번도 숨 쉬지 않는)을
연습했다. 세 길이 넘는 25미터 수영장을 세 번 숨 안 쉬고 왔다갔다
해야 한다. 첫 주는 pool week로 군복에 군화와 기본군장을 착용한
상태에서 렁을 메고 가상 익사환경 훈련을 한다. 침착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해내는 게 중요하다. 그 몇 초 만에 익사와 생존을 결정
한다.
정말 힘든 훈련으로 bobbing이라 불렸다. 하나에 10파운드 무게
렁 두 개를 착용하고 오리발과 호흡기를 물고 실시한다. 군장까지
모두 착용하면 몸에 100파운드가 부과된다. 손에 소총만 없다. 오
리발은 착용하지 않고 손에 든 상태로 물에 그냥 던져진다. 렁에
산소는 없이 비어 있다. “bob”은 2분 동안 수행하는데, 물에 던져
지고 나면 알아서 수영장 바닥으로 발로 차 수면으로 올라와 숨을
쉬고 다시 내려가 어떻게 해서든지 2분 안에 수중에서 장비를 해체
하고 탈출해야 한다. 타이밍이 모든 것이다. 약간만 늦어도 숨을 쉬
려고 벌린 입에 물이 들어온다. 0.5초 차이로 호흡에 실패할 수 있다.
2주차는 렁을 메고 700-1500미터 수중 독도법을 한다. 보트에서
바닷물로 뛰어내려 수중 나침반으로 방향을 찾는 것이다. 모든
수중독도법 목표물을 20미터 안에서 통과해야 한다. 계속 반복
해서 측정하며 시간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다. 속도와 정확도가
관건이다. 이 측정에는 폐쇄회로 Drager LAR 5를 사용했다. 이
드래거는 앞가슴에 착용하며 기포가 발생하지 않아 은밀히
적진에 침투할 수 있다.
이것을 모두 통과한 훈련생들은 플로리타 키웨스트에서 4주간
전술훈련에 들어간다. scuba course는 진심으로 말해 정말 대단
했다. 그런 기회를 가지고 통과할 수 있었던 게 각별하게 행복했다.
내가 경험한 중 가장 최고의 육체적 인내력이 필요한 코스였다.
학교 풋볼 훈련, 레인저, 공수, 특전단 과정 모두 여기에 비교할
수 없는 용서가 없는 훈련이다.
유럽에서의 비정규전 훈련
내가 10특전단 ODA 팀장일 당시 베를린 장벽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내 후반 군생활까지 거의 내내. 우린 유럽작전을 준비했는
데 대상은 소련이었다. 유럽에 있으면 몇 년마다 각국이 참가하는
연합훈련 JCET를 해야 했다. 난 스쿠버팀 팀장으로 덴마크 군대와
같이 했고 덴마크 전투정찰수영학교에도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서
하는 대단한 코스였다. 수료하려면 10km 수영에 합격해야 한다. 10
킬로미터 수영하려면 거의 하루 종일 걸린다. 아침에 늪지대에 낙하
산으로 점프해 저녁 때까지 목표에 도달해야 한다.
수면 수영이지만 정말 길었다. 이는 장비를 갖춘 침투훈련이다. 이
훈련이 끝나고 내 팀원이 나를 보며 말한다. “팀장님, 내 기관단총
이 익사했습니다.” 이런 무거운 총기는 유사시 바로 풀기 위해 가볍
게 결속하는데 그게 물에 빠진 거다. 하루 종일 물에서 허우적거리
다 일어난 일. 그 총은 2차대전 식 9밀리 스텐 기관단총이었다. 덴마
크군은 그때 그걸 사용했었다. 정말 구조도 간단하고 관리도 쉬운
총이라 물에서 썼다. 본인도 3월의 바다에서 뭍에 오르고 나서 기관
단총이 없어진 걸 알았다.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우리 팀은
일단 해안에서 200미터 구역을 뒤졌다. 결국 교관에게 보고했으나
결국 팀원이 잠영으로 찾아냈다. “I got it!”
한 가지 각별한 훈련이 있었는데, 수면 20미터에서 꽤 깊은 물에서
점프해 들어가 바닥의 해조류를 짚어 올라오는 거였다. 고막을 조심
해야 한다. 한 대원이 고막이 아프다고 교관에게 말했는데, 우리 의무
하사관이 보니 고막이 심하게 다쳤다. 이 고막 손상은 평생을 따라간
다. 그래서 훈련에 빠지게 하려고 했더니 계속 할 수 있다고 대원은
항의했다. 난 이틀 동안 기다려보자고 했다. 결국 그 대원은 덴마크
정찰잠수병 과정을 수료했다. 고막은 괜찮았다. 나는 내 목숨도 잘
간수해야하지만 대원들도 간수해야 한다.
봄이 오자 덴마크 정찰수병 코스에서는 보트훈련을 시작했다. 해상
침투훈련이다. 트롤선 같은 어선에 견인되어 바다로 나갔다가 밤에
가상 적 해안으로 침투한다. 비상시 군장 상태에서 물에 들어가도 큰
물보라를 일으키면 안 된다. 여러 다른 물과 유속에서 여러 번 훈련
했다. 그 외에 해안 몇 백 미터 부근 헬기에서 물로 점프해 들어가
기도비닉으로 침투하는 훈련도 했다.
이 덴마크 수영정찰병 학교 교장은 덴마크 해군장교로 선임교관이
기도 한 ‘타잔’이었다. 숙련된 덴마크 잠수대원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 수료식 아침 9시에 타잔 대위를 찾아가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9시 직전에 문 앞에 가서 우리는 시계를 보고 5-4-3-2-1- 카운트를
하고 노크했다. 그건 덴마크군 문화였다. 1분도 늦거나 빨라도 안
된다. 그들은 우리를 존중했고 또한 모든 것을 규정에 딱 맞게 한다.
참 즐거운 시간이었다.
PT와 달리기는 근처 숲에 있는 바이킹 무덤에서 했다. 내가 보기에
덴마크 잠수대원들은 바로 마지막 바이킹들이었다. 우린 그들 환경
에서 중요한 것들을 배웠다. 그들 규율은 정말 엄격했고 우리 10특
전단은 유럽이 작전권이라 그 경험은 중요했다. 유럽의 산악과 추운
날씨에 적응해야 한다. 10특전단에서 4년을 근무했는데 1-2-3월에
는 캐나다에서 매년 동계훈련도 했다.
난 남부 켄터키 출신으로 그런 게 처음이었다. 캐나다에는 낙하산
으로 눈밭에 무거운 군장을 달고 점프해 들어갔고 정말 얼음덩어리
들이 많았다. 접지해 사방을 보니 세상 모든 게 얼어 있다. 나와 팀원
들은 얼음 동굴에서 자면서 작전했다. 매일 일정 거리를 이동하고
작전하고 통신했다. 거의 영하 40도 가까운 곳에서 우린 완벽한
전술훈련을 했다. 난 이런 것을 통해 특전단 장교로 성장했다.
The First Desert War
1991년 1차 이라크전쟁이 터졌고 10특전단은 이라크 북부 크루드
족과 함께 협조하는 임무를 맡았다. CH-47 뒤에 앉아서 바라 본
쿠리디스탄이란 곳 북부가 잊혀지지 않는다. 엄청나 탄약과 함께
맥주가 가득 실려 있었고 난 M-4 카빈과 9밀리 베레타 권총을 휴대
했다. 헬기를 타고 가면서 1천 년 전의 과거로 가는 것 같았다. 산
정상들이 보이고 문명의 흔적은 없었다.
우린 최신식 기술을 통해 날았지만 땅에서는 현지민들이 말을 타고
다녔다. 우린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끔찍한 피해를 입은 쿠루드족을
도왔다. 전쟁 전에 후세인은 독가스를 사용해 쿠르드족 1만 명을 살
상했고 개전 후에도 사용했다. 사람들은 산악으로 집단적으로 탈출
했다. 필사적인 도주였다. 길에는 부서진 차량과 놓고 간 소지품들이
널려 있었다. 우리는 쿠르드족을 도와 현 주거지로 돌아오도록 만드
는 거였다. 그들은 물과 식량을 비롯해 모든 게 모자랐다. 그렇게 깊
은 절망과 슬픔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직도 망각되지 않는다.
이것도 비정규전의 일환이었다.
왜 특전단 A-team이 존재하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 10특전단은 뉴잉글랜드에서 터키 인크릭 기지로 날아가 이라크
로 들어갔다. 우리 대대는 3개의 연합특수작전구역(JSOA)으로 나눴다.
대대의 각 중대는 30-40킬로미터 정도 떨어졌고 우린 포병도 기갑도
없이 알아서 유연하게 작전해야 했다. 각자 맡은 구역을 평정하는 것.
우린 쿠르드족 민병대와 같이 활동했다. 나는 관측진지를 만들고
정찰을 나섰다. 텐트를 치고 외곽에 참호선을 판 정도였다.
당시 10특전단장은 빌 태그니 대령으로 대단한 그린베레였고 또한
좋은 사람이었다. 난 이후로도 몇 년간 연락했다 나중에 중장까지
진급해 특수작전사령부 부사령관까지 하셨다. 당시 그린베레 출신
장교로 최고 계급까지 올라간 사람이다. 이라크에서 우리가 한 작전
은 10년 후 아프가니스탄 작전과 유사했다.
우리 3대대가 1991년 이라크에 전개할 때 나는 대대 부-작전장교였다.
나는 쿠르드족과 소통하려고 무던히 애썼다. 대대 작전장교는 내 친구
로 정말 소통으로 힘들어했다. 이 단계는 인도주의 임무였다. 이라크
1차 전쟁은 정말 빨리 끝났고 위에서는 지역의 안정을 원했다. 쿠르드
족과의 자연스런 협주가 관건이었다. 일가족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우
린 몇 갤런의 신선한 물을 주었고 아버지 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었
지만 AK-47은 가지고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 정말 다른 사회였다. 우리 미국에서는 가장이 먹을
것과 기타를 벌어서 집에 가져오지만, 이라크와 쿠르드족 지역은 오
히려 여성과 아이들이 이런 걸 다 한다. 아버지는 그냥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는데, 단, AK-47은 가지고 있다. 점차 사람들이 주거지역으로
돌아왔다.
직업군인은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알아채야 한다. 내가 이라크 북부
크루드족 수용소 부근에서 M-151 지프를 몰고 가는데 길을 따라
쿠르드족 병사 몇 명이 AK-47을 들고 가는 게 보인다. 그래서 이들
을 뒤에 태워줬는데 AK를 그냥 바닥에 마구 놓는다. 어떤 총은 자물
쇠가 automatic으로 되어 있다. 우리 미군은 교전 직전에만 스위치
를 자동으로 돌린다. 그러나 쿠루드족이나 이라크인이나 아프간이
나 모두 항상 총 자물쇠를 자동 상태로 두고 다닌다. 항상 언제라도
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는 듯하다.
우리와 쿠루드족은 관계가 정말로 좋아졌다.
Staff Time
A-team 팀장을 끝낸 직후 난 대대 부작전장교로 갔다. 그 이유로
포트 리븐워스의 연합지원학교(CAS3)에 두 달간 갔다왔다. 이는
대위급 장교가 참모로 가기 위한 기초학교였다. 참 작전과 실행에
관한 많은 것을 거기서 배웠다. 우리는 유사시 독일로 파병해 독일
(서독)의 방어를 일부 부담하는 임무가 있었고 그걸 퓰다 갭(Fulda
Gap)이라 불렀다. 이것은 2-30년 전 소련이 탱크를 내세워 서구
유럽을 침공한다는 가정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에 이 학교에 갔는데, 놀랍게도
아직도 그 계획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대위였던 나는 중령 교관
에게 물었다. 이제 유럽의 위험은 사라지고 이제 사막전이 일어
나고 있지 않느냐는 것. 난 처음으로 후방제대로 왔는데 교육생
동료 상당수는 처음부터 사무직 주특기란 걸 깨달았다. 결국 입
을 닫았다. 그 안에는 레인저도 공수도 참전기장도 특전단 출신
도 없었다.
학교를 수료하고 대대로 돌아오자 나는 3대대 지원중대장이
되었다. 기술이나 취사나 보급이나 모두를 담당한다. A-team
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매주 금요일 아침이면 중대원 전
체가 모여 숲을 뛰었다. 이들은 공수자격만 가지고 있는 비-
특전수료자 대원들로 이들을 지휘하려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심지어 공수자격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 보급소대 선임
하사는 중대에서 경력이 가장 많이 12년 정도 근무했는데
비-공수자격자로 공수교육 입교를 권했더니 거부했다.
“선임하사, 여긴 airborne company라고.”
결국 다른 사무직으로 옮겼다. 지원중대 대부분은 흑인병사였고
백인은 서너 명 정도 밖에 없었고 아시아인과 라틴도 약간 있었다.
난 분대장 이상급의 비-공수자격자를 모두 찾아내 공수교육 입교
를 권고했다. 선임하사 자체가 약간 우둔했다. 지원중대장은 장비
구입 등 상당한 돈을 결제했다. 각 개개인 장비와 차량까지 모두
포함하기에 액수는 어마어마했다. 결국 후임이 도착해 임무를
교대했다.
아프간의 지휘관 임무를 받을 때까지, 난 특전대대의 모든 장비
와 정비 구입 유통에 완전히 숙달되었다. 이 능력은 나중에 현지
에서 도움을 받는다. 여러 나라 특전부대들이 섞여 있었기에 이
에 대한 장비와 총기의 관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부임에는
부대가 모두 특전대원이 아니었고 다양한 배속인원이 있었다.
이 지원중대장은 1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길고 긴 1년이었다.
내 탁자 바로 옆에 민간인 여성 군무원이 있었는데 매일 “피곤
하다 피곤하다”를 입에 달고 살았고,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
다. 미 육군은 두 종류였다. 적과 싸우는 육군과 책상에 앉아 있는
사무직이다. 난 군생활 24년 내내 싸우는 보직이었다. 난 지원
중대장을 떠난 직후 소령으로 진급했고 앤과의 첫 아이가 생겼다.
나는 포트 브레그 ‘그린 램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전개했다.
지구상의 테러와의 전쟁에서 대원들을 이끌 명예심으로 가슴이
들떴다. 그날 그린 램프는 슬펐다. 앤과 내 두 딸이 날 보러 나왔
다. 두 딸아이는 이 상황이 뭔지 아직 몰랐다. 가족을 떠나는 내
가 미웠고 안녕을 고하며 손을 흔드는데 그처럼 가슴 아픈 적은
없었다.
비행은 36시간이 걸렸고 두 번 멈춰 재급유를 했다. 공중재급유
할 때는 조종석으로 가서 재급유작전을 지켜봤다. 만월이 뜬 (국가)
조지아 어느 지역 상공 3만 피트였다. KC-135 재급유기가 내려오는
게 C-17 조종석 창문으로 보인다. 비행속도는 시간당 300마일, 재
급유기는 알래스카 주방위군 소속. 수송기 내부에는 그린베레 대원
들이 가득했다. 미국인으로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에는 많은 특전단 A-캠프가 흩어져 있었다. 아프간은
크기로 보면 독일과 비슷하고 약간 작다. 24,000피트 힌두커쉬 산맥
이 있고, 주요 도로망은 보통 지역에 하나다. 이 주요도로도 보통 1
차선으로 매우 가난하게 산다. 아프간에서 전쟁은 이제 25년째다.
현재 ‘민주주의’란 걸 정착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아프간의 가장 최근의 역사는 소련이 큰 역할을 했다. 꼭두각시
정권을 소련이 만들어 1979-1999년 동안 지속시켰다. 나라는 조
직적으로 황폐화되었고 1천 3백 만 명이 이 과정에서 죽었다.
1989년 소련이 퇴각하자 아프간 정부 안에는 탈레반 소속이
가득 들어차게 된다. 탈레반은 ‘student’란 뜻이다. 탈레반
정권은 소련의 대우에 분노했으나 더 이상 개량도 교육도
중단시켰다. 탈레반 정권 아래서 여성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혼자서 길을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여성은 취직도 못했고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실제로 아프간
성인여성을 길에서 쉽게 볼 수가 없다.
The Lware Campaign
아프가니스탄 미 육군 특전단의 주요 역할은 A-camp로 전국에
걸쳐 주둔했다. 먼저 이 Special Forces A-camp를 설명하면 ODA
한 팀이 주둔한다. 팀 자체는 비정규전에서 현지민에 대한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쉽게 세 단어로 표현하면 ‘너, 우리, 함께’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린베레 팀 진지는 화력이 충분하지 않기에 fire base
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통은 ‘정찰진지’라고 불린다.
그 A-camp 중 하나가 Lware인데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지대에 있었
다. 내가 가기 1년 전부터 이런 진지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국경지역
은 탈레반이나 알카에다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는다. 그로 인해 상부
는 그린베레 주둔 거점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그 르웨어 지방이 알카에다의 성소와 다름없다는 상황인식
(SA)을 하고 있었고 지형은 국경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산악
과 능선들이 즐비했다. 파키스탄에서 사람들이 그냥 걸어서 아프간
중부로 들어오는 곳이다. 르웨어에는 항상 일정한 알카에다의 흐름
이 있었다.
우리 연합특수작전 태스크포스의 주된 전략은 현지민을 통해서 하는
것으로, 이들은 외부와 관련없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문제를 해결한
다. 우린 거기에 학교를 짓고 길을 닦으면서 정보를 모았고 궁극적으
로는 테러리스트를 위한 군사작전을 준비했다. 모든 것을 아프간 식으
로 해야 한다. 르웨어가 알카에다의 주 본거지 중 하나라는 걸 우리는
깨달았고 나는 그곳으로 가는 특전단 A-팀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르웨어로 갔으면 한다. 그곳에 안정을 되찾게 해야 돼.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보고를 해.”
젊은 팀장과 팀원 11명은 2-3주 동안 정보를 모으려 계획을 짰다.
이 팀은 아프간 정부군의 중화기반을 같이 데려가고 현지민 전사
도 운영할 계획이었다. 중화기는 정말 오래된 구형 소련제 60밀리
와 82밀리 박격포였다. 미군 약간명과 약 2백 명의 아프간 병사들
이 전부였고 그곳 국경에 검문소를 설치할 계획이었다. 검문소는
아프간 깃발을 세우고 아프간 정부군과 아프간 경찰이 운영한다.
팀장은 전개 전에 몇 차례 이곳을 정찰했다. 결국 모든 준비를
갖춘 이들은 50기관총과 M240B 기관총을 장착한 무장트럭에
자랑스럽게 국기를 꼽고 이동했다. 트럭에 탄 그린베레 대원들
은 아무런 도움 없이 다가오는 상황에 알아서 적응해 비정규전
을 수행해야 하며 물물교환과 일종의 트릭도 사용한다. 차량이
정지하게 되면 대원 두 명은 재빨리 양쪽 능선으로 올라간다.
탈레반이 매복할 가능성이 있었고 모든 것은 팀 단독작전이
된다. 이들은 새롭게 진지(캠프)를 구성할 곳으로 계속 이동
했다.
장소에 도착한 이들은 장비와 경계를 구성하고 드디어 Lware
A-camp를 시작했고 국경 검문소도 설치했다. 이들과 같이 도
착한 아프간 정부군 보병중대는 진지 중간에 아프간 국기를
게양했다. 이는 분명히 일대 적에게 시선을 끄는 것으로, 의도
를 명백하게 밝힌 것이기도 했다.
이들은 텐트를 치고 참호와 개인호를 팠고 이어 HESCO란
울타리 장애물을 쳤다. HESCO Barrier는 폭탄 방호벽의 개념
으로 1991년 걸프전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이 울타리 장벽은
6입방미터의 비어진 철조망 주머니 같은 것으로 거기에 흙과
자갈을 채워 벽처럼 세운다.
연합특수작전 태스크포스(CJSOTF)는 약 4천 명 구성으로, 원래
는 대위나 소령이 지휘하던 구조였으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서
중령/대령으로 지휘관을 부임시켰다. 난 이 진지에 직접 가서 봐
야한다고 생각해 주임상사와 통신하사관 한 명을 준비시켰다. 당
시 아프간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 전개였고 비정규전 개념도 확인
할 필요가 있었다.
내 밑의 주임상사는 톰 리즈였고 내 통신하사관으로 (Big Jim)
해드독 상사가 활동해줬다. 난 블랙호크 헬기를 타고 다녔는데
이때는 AH-64 한 대가 건쉽으로 따라다녔다. 내가 바그람의 본
부를 떠날 때면 헬기도 이용했지만 SUV나 랜드로버나 픽업트럭
등을 사용했고 캐딜락 Cadillac SUV—ll도 사용했다.
본부와 비행장이 같은 구역에 있었고 나 역시 개인 방탄장비를
착용하고 나와 같이 다니는 통신부사관은 위성통신기를 휴대했다.
개인적으로 생존무전기를 하나씩 포켓에 넣고 다녔다.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개인 총은 5,56밀리 M-4와 30
발 탄창 여섯 개를 휴대했고 M-9 베레타와 탄창 5개도 가지고 다
녔다. 방탄조끼 외에도 야간용 고글이 달린 케블라 헬멧도 휴대
했고 생존 나이프도 벨트에 걸어 항상 전투준비 태세로 다른 곳
을 다녔다.
아프간에서 총은 항상 한 발을 약실에 삽탄하고 스위치를 안전에
두고 다닌다. 전장에서 적과 마주하면 1초가 몇 개로 달라질 정도
로 대처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순간 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한
다. 이곳은 기지 정문을 나설 때부터 위험하다. 진지나 기지의 정
문은 항상 적의 공격 중요 목표로 간주된다.
나와 같이 다닌 상급 부사관 두 명도 매번 똑같이 무장하고 다닌다.
우리는 이동시 군장에 침낭과 이틀치 비상 레이션을 넣고 다녔다.
통신부사관은 위성무전기 예비 배터리를 꼭 챙겼고, 이로 인해 군장
이 거의 100파운드는 나갈 정도로 내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방탄조
끼는 서로 제조사가 다양하게 달랐으나 앞뒤에 강철판을 넣는 형태
는 같았다. 이 방탄조끼는 마치 티셔츠를 입듯이 항상 입고 거기에
파우치를 달아 실탄과 탄창 수통 등을 단다.
블랙호크 헬기는 일주일에 2-3회 정도 1년 동안이나 탔다. 타면
조종사와 대화할 수 있도록 이어폰을 착용했고 아파치 헬기가
항상 따라다닌다. 아파치가 추락할 경우는 블랙호크가 즉각 착륙
해 승무원을 구조한다. 건쉽헬기는 수송헬기가 추락할 경우 구조
할 공간이 없다. 대신 다른 수송헬기가 올 때까지 주변을 돌며
화력지원으로 엄호를 해준다.
헬기가 이륙하면 기내 모든 사람들은 총에 실탄을 장전한다. 블랙
호크 기총수는 60기관총을 장전하고 탑승자도 개인화기를 모두 장전
한다. 당시 내가 이동한 거리는 직선으로 따지면 워싱턴에서 아틀란타
까지 날아가는 거리다. 게다가 산악들이 있어 헬기가 무척 높은 고도
로 비행한다. 힌두커쉬 산맥의 높은 봉우리들을 헬기가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지대가 높으면 블랙호크보다 치누크를 이용한다. 르웨어 계곡
도 보통 치누크를 이용했다.
비행 중에는 항상 지도와 창문 밖 풍경을 보며 현재 위치를 판독했다.
만약 우리가 격추되거나 추락할 경우 현 위치를 알아두는 건 필요하
다. 언제 이 사나운 산악 속에 떨어질지 모른다. 연기와 폭발은 적의
주목을 끌게 되고 유사시를 대비해야 한다.
나는 나침반과 내 군화에 사막색 천으로 도포한 군번을 달고 다녔다.
경험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어떤 경우 전투에서 죽을 경우 목이 날아
갈 경우가 있다. 발이 날아가면 얼굴을 보고 누군지 알지만 머리가 날
아갈 때를 대비하는 것이다. 목에 건 군번줄은 폭발 등에 쉽게 날아가
버릴 수 있다. 요즘에도 농장을 나설 때 작업화에 군번을 달고 다닌다.
우리가 바그람을 떠날 때면 국적불명의 군복에 마크나 계급장 등
아무 것도 달지 않는다. 내 대령 계급장은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유사시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게 해야 한다. 지역민을 만날 때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계급과 이름을 노출시키지 않는다.
르웨어 진지에 착륙할 때마다 난 조종사와 대화하면서 랜딩존 가는
길에 이상징후는 없나 살폈다. 먼 거리 능선은 눈으로 관측하는데 가
끔 봉우리들에게 신호용 거울이 반짝일 때가 있다. 그렇다고 멈출 수
도 없는데, 이 14,00피트 산악에서 이들이 정상에서 거울로 신호하는
건 근 천 년은 된 방법이다. 반짝이는 것은 분명 그들끼리 헬기가
오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먼 능선에 보면 키가 180정도의 사람이 꼭대기에 서 있는 게 보인다.
소련과의 전쟁 때부터 탈레반들은 교묘한 기술들을 습득했다. 그 뒤
에는 로켓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일단 이들은 시각 관측을 기본으
로 한다. 현대문명이 진보한 이 시대에 꼭대기에는 소년 몇 명이 있
다가 거울을 사용하기도 하며 가끔은 창의적인 방법도 쓴다. 우리 진
지에서 300미터 거리에 있는 르웨어 마을 상공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국경까지는 3-4km다. 우리 미군은 적을 쫓아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 국제적인 사고가 된다. 넘어가면
파키스탄군이 우릴 쏴도 합법이다.
그들도 국경을 지키고 있고 우린 국경을 넘지 않을까 항상 조심스
럽다. 정규군의 경우는 허가를 얻어 국경을 잠시 넘을 수는 있으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국경을 넘어 탈레반을 따라가면 도주하던 그들
도 등을 돌려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다. 보통 완충지대 개념을 10
km 정도 두는데 우리는 적에게 좀 더 가까우려고 완충지역을 반
정도로 줄였다.
교전
르웨어에 블랙호크가 랜딩할 때는 아파치 헬기가 원을 그리며
랜딩존을 돌고 이륙할 때까지 그렇게 한다. AH-64 아파치는
1킬로미터 반경 사방으로 돌면서 엄호하는데, 착륙 2분 전부터
30초 간격으로 빠른 일대 정찰을 수행하고 항상 쏠 준비상태로
대기한다.
내 조종사 ‘부쉬매스터 6’는 2100 Zulu로 랜딩시간을 정했다.
우리는 보통 그리니치 천문대 표준시를 따르는데, 대부분의
국가들은 표준시간대가 다르다. 내가 처음 아프간에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다. “9시? 그러니까 이곳 시간으로 10시?” 그
러면 보통 “그냥 9시 반으로 해”라고 말한다. 아프간은 정말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다.
헬기가 A-camp에 착륙해 내리자 ODA 팀장이 우릴 반긴다.
팀장은 준사관이었다. 팀장을 맡을 자격 있는 대위급 자원이
대대에 부족해 그에게 맡겼다. 팀장이 없을 경우는 자동적으
로 준사관인 부팀장이 대리한다. 이 A-team은 플로리다 주
방위군 소속으로 상당히 인상적인 친구들이다. 지휘력도 훌
륭하고 능력도 매우 좋고 대원 모두가 우수하다. 사실 예비군
특전단 팀을 쓸 때는 상당한 실험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과는
우리 생각과 많이 달랐다.
오후 한 낮에 도착해 난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우린
진지 외곽을 걸었고 관측/청음초 2개를 지났다. 그 초소들은 위치
가 높아 진지 내부는 물론 파키스탄 쪽도 잘 보였다. 한 시간 정도
순찰하는데 거의 등반 수준이다. 캠프 자체는 해발 7-8천 피트 고도
였고 관측/청음초는 약 1천 피트 정도 더 높았다. 모든 군장과 장비
를 착용한 상태라 힘들었다. 아프간 병사들은 AK 소총을 들고 탄창
을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개인당 보통 140발을 휴대했다.
3월 5일인데 꽤나 더웠고 적당히 땀에 젖는다. 이런 전장상황
분석은 20년 넘게 항상 해오던 것이다. 난 병사들과 분대장 등
에게 질문을 하고 올바른 질문을 기다린다. 육군의 질문은 간
단하다: 자네 사격구역이 어딘가? 야간에 좌우측 초소는 어디
인가. 그러면 “저는 저 고지가 사격방향입니다” 같은 대답이
나온다. 이런 질문을 천 번은 더 했다. 그러나 아프간은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다. 적은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
포인트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 포인트의 좌우 초소의 연계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전술적으로는 많이 개입하지 않는다. 팀장과 화기
부사관 작전부사관이 알아서 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정규전의
모든 전략과 전술에 능통하며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
히 안다. 다양한 병기와 함께 크레모어 대인지뢰도 사용된다.
미군병사들은 이 크레모어를 정말로 귀중하게 생각한다. 모든
관측초와 청음초에는 크레모어 두 발이 깔려 있다. HESCO 2~
3백 개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그 안에 팀 본부가 있고 외곽에는
참호와 포좌가 축성되어 있다.
진지 자체는 고지대와 저지대가 섞여 있는 작은 둔덕에 위치하고
있고 마을과는 2-300미터 거리이며 파키스탄은 동쪽이다. 거기서
위험이 다가온다는 걸 모두 안다. 난 르웨어 진지에서 거의 모든
병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조망과 의견을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또한 아프간 사람들은 자신들의 보스를 정확히 파악하
고 여과 없이 의견을 말한다. 이 르웨어 진지는 병력이 중대와
대대급 중간이다. 여기선 나도 MRE를 먹는다.
이 르웨어 진지는 전략적으로 적을 향해 뾰족하고 튀어 나와 있는
존재로, 깃발은 아프간 국기가 꼽혀 있다. 나는 제리 캔이라 불리는
실탄통을 깔고 앉아 이 팀에 배속된 심리/민사팀 대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들은 잠재적인 위협에 대해 사실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저녁 때가 되어 우린 다시 MRE를 먹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데 그때.... 갑자기 커다란 폭발음이 들리면서 치열한 교전 45분이
이어지게 된다. 전투 45분은 꽤 긴 시간이다.
관측/청음초에서 파키스탄에서 아프간으로 넘어와 르웨어로 도보
로 들어오는 알카에다 혹은 탈레반을 발견했고 특전단 저격수와
대원들이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총과 크레모어를 준비했다. 적은
규율이 잡힌 병력 약 24명으로 르웨어 진지를 향해 정확히 걸어왔
다. 이들은 신체도 건장했고 V-자 대형으로 다가왔다. 거총한 상태
로 무전기와 수기신호를 주고받았는데 이는 알카에다 훈련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들은 몸을 수그리고 다가왔다. 일부 탈레반도 섞여
있는 듯했다. 이런 규율은 분명 알카에다 훈련병력이다.
V-자 대형의 두 선봉 대열이 계곡을 내려와 그 중 한 끝의 선두가
팔을 들더니 대열을 정지시켰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아래에 땅
에 보이는 전선을 내려다봤다. 알겠지만 그건 크레모어 지뢰 도전
선이었다. 그는 전선을 손으로 들어 보더니 시선을 들어 높은 곳을
봤고 그때 금발에 푸른눈의 그린베레 부사관과 눈이 마주쳤다. 부
사관은 ‘크랙커’ 혹은 격발기를 들고 있었다. 부사관은 격발기를 눌
렀고, 선두에 있던 적 두 명이 날아갔다. 10분간 격렬한 교전이
이어졌고 소총과 권총 수류탄이 교환되었다.
두 부사관이 기지 안에는 아프간 보병중대에서 소대급 정찰대를
편성했다. 알카에다 병력을 추격하려고 용감하게 나선 것. 소총에
이어 박격포반도 포격을 시작했다. 총알들이 날기 시작하자 내 통
신부사관 짐 해드독 상사는 박격포반 옆의 욕조 크기 참호로 뛰어
들었는데, 바로 옆에서 아프간 병사 두 명이 소련제 M1942 60밀리
박격포를 쏘기 시작했다. 이 박격포는 최초 설계가 1942년이라 명칭
도 그렇다. 오래된 박격포지만 꽤 단순하자 잘 작동한다. 그러나 미
군은 이 박격포가 정확한 지점 포격이 힘들어 사용하지 않았다.
익숙하지도 않다. 당시 박격포는 1,500미터 최대사거리로 쐈다.
45분 교전 후에 우리는 근접항공지원을 불렀고 상공에 전투항공
정찰(CAP)로 떠 있던 공군 B-52들이 이에 응했다. 이 폭격은 크고
강력하며 한마디로 해서 그냥 가루로 만든다. 당시 아프간 보병은
아프간 지휘관의 말을 들었다. 이들은 미군과 같지 않아서 어느 날
갑자기 장비를 챙겨 집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아프간 사
람들은 전투를 벌이는 것에 명예심 같은 자부심이 있다. 탈레반에
서 탈주한 사람이 그렇게 중언하며, 이기면 더욱 명예로운 것이나
교전 그 자체를 자부심의 일부로 본다.
크레모어는 터져도 유효사거리가 200미터 정도로 사람의 혼을 빼
지는 않는다. 전형적인 것은 IED로 요즘 전쟁에서 병사들이 공통적
인 관심사이며 폭발의 크기가 대부분 상당하다. 또한 이동 타깃을
대상하는 것도 생겼다. 우린 기지 밖에 아군이나 우호적인 사람들
이 없고 크레모어보다는 로켓이 더 강하다. 로켓 폭발음은 내가
정말 많이 들었고 소리가 다르다.
난 훈련에서 크레모어 폭발을 정말 많이 들었지만 전투에서는 이날
처음 들었다. 크레모어 폭발에 이어 총격이 뒤따랐고 총격은 두 가지
로 특징있게 다르게 들린다. 일단 AK-47이 있고 미군의 5.56밀리와
7.62밀리가 있다. 적과 거리가 2-300미터였기에 총소리가 들리고 나
면 머리 위로 날아가는 총알 소리가 들린다.
우린 수천 년 계속된 행동을 했다. 먼저 MRE를 떨어트리고 헬멧을
쓰고 바로 방탄조끼를 입는다. 그 다음 장비를 잡고 상황판단을 한
다. 어두워지고 있었고 아마 오후 7시 정도로 생각하는데 ODA 팀장
이 옆에 앉아 있었다. 우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진지는 근 한 달
동안 주변에 정찰을 나갔었다.
이 경우 2-300미터의 가파른 산악이었고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소리
는 들렸다. 다중적인 교전음이 들린다. 첫 교전이 폭발한 건 MRE를
먹고 3분이 지나서였고 우리가 장비를 착용하자 총성이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밖에서 쏘는 총성이 대부분이었다가 곧 안에서 쏘는 총성
도 들려왔다. 이어 보고들이 올라오고 아프간 보병들은 모두 (하루
전날 판) 참호에 모두 들어갔고 참호는 충분하지 않았다.
특전단 화기주특기들이 험비에 올랐다. ODA 팀장과 그의 사수도
M2 50기관총을 잡았다. 이 M2 기관총의 병사들 슬랭은 “Ma Deuce”
로 이것은 1차대전 당시 설계가 시작된 것으로 조작이 간단하고 최대
2킬로미터까지도 사거리로 꽤 정확한 놀라운 기관총이다. 관측/청음
초에도 50과 함께 7.62밀리 M-240 기관총이 있었다. 교전과 동시에
2인팀이 들어가 있는 관측/청음초에 화력지원이 필요해졌다.
우린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엄호사격을 시작해 적이 고개를 숙이고
활동이 줄어들도록 만들었다. 아프간 병사들은 아무도 박격포를 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총알이 우리 사방에 날아다니고 있었고 총
알이 땅을 때리면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높은 곳 한 500미터
거리에서 탈레반 병사 두 명이 기관총을 운영하며 우리를 향해 쐈다.
그때 팝콘 같은 소리들이 팡팡팡 들렸고 우리 50기관총도 잘 쏘고
있었다. 아프간 병사들도 응사를 시작했는데 이는 제압사격(suppre
ssive fire)이라 정확히 보고 쏘는 건 아니었다. 주임상사와 내 통신
부사관도 자신들의 M-4를 쏘고 있었다. 둘 다 정직한 사람이고 머리
회전이 빠르고 한마디로 America’s best였다. 그런데 여전히 아프간
박격포반은 쏘지 않고 있었고 핸콕상사와 나는 서로 시선을 맞췄다.
난 위관시절 꽤 훈련된 박격포반이었다. 이론도 간단하다. 조준하고
포탄만 포구에 넣으면 되니까. 우리는 참호로 기어올랐고 핸콕상사
에게 “짐, 포탄도 나에게 넘겨. 박스 채로 나에게 줘”라고 말했다.
포좌는 작은 봉우리 위에 있었는데 깊이가 깊지 않아 웅크리고 있
어야 했다. 당시 나에겐 통역관이 없었다.
짐이 넘긴 포탄박스를 뜯는데 과거 소련군의 유물 같은 포장이다.
짐이 뜯은 박스에서 최대장약(max charge)으로 된 포탄을 나에게
넘기기 시작했다. 60밀리미터 박격포. 포탄은 1-2-3-4단계 장약으
로 되어 슬라이스 치즈 같은 추진장약을 포탄 날개 앞에 보통 부사
수가 장착한다. 추진장약은 짐 핸콕 상사가 했다. 내가 사수 입장이
됐다. 난 조준경을 직접사로 놓고 조준했다. 거리 측정기로 보니 거
리는 정확히 1,427미터에 방위각 93. 나는 거리를 1,400미터로 놓고
발포 제원을 구령했다.
제원까지 산출할 포반은 없었기에 우린 눈으로 보고 쏴야 했다.
“상사, 목표 왼쪽에 우리 관측/청음초가 있고 오른쪽 앞에도 아군
전열이 있어. 거긴 넘어가야 돼. 최대장약 한 발 줘.” 난 한 발을
포구에 넣었고 공이가 판을 때리면서 쾅! 하고 공중으로 날아갔
는데, 정확한 방향으로 날아가 1,500미터 정도 거리에 떨어졌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특수전부대는 거의 모든 병기를 훈련
해야 한다. 글쓴이 대령도 포병 출신이지만 이 핸콕 상사도 분명
전에 박격포 사격을 교육받은 것으로 보인다. 나도 박격포와 야포
를 배우기는 했는데 그리 전문적이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여간 여단장이 포격하디니. 잇빨 주]
난 약간 앞으로 당겼다. 이 1942년형 박격포는 고도지시가 없고
약간 짧게 날아간다. 그러므로 조금 짧게 알아서 조준해야 하는
데 아군이 맞을까 걱정된다. 그래서 적어도 아군 2-300미터 앞
에는 떨어지게 해야 했다. 적이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안 보였고
그래서 난 300-400야드 폭을 적의 기동구역으로 설정했다.
짐 상사는 최대한 빨리 탄약 포장을 풀었다. 그 포탄들은 생산일자
가 내 나이보다 많았다. 박격포 사격 시에는 정말 정확하게 사격절
차를 지켜야 한다. 특히 불발탄 발생시는 정말로 미 육군 절차에 따
라야 한다. 이 불발탄 처리절차는 포열이 뜨거울 때와 차가울 때가
다르다. 뜨거울 때는 처리 과정에서 포탄이 뜨거운 포열 때문에 작
렬할 가능성이 있어 포열에서 포탄을 빠르게 빼내야 한다. 터지지
않아도 추가장약이 타버릴 수도 있다.
바로 이때 포구에 포탄을 넣고 웅크렸는데 하나가 안 터졌다. 물론
난 안전절차를 정확히 안다. 포구를 밑으로 하고 포탄을 미끄러지
듯이 내려 손으로 받았는데, 알고 보니 짐 상사가 안전핀을 제거하
질 않았다. 결국 안전핀을 제거하고 다시 포격에 성공해 25발 정도
더 포격했다. 그러나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기에 잡고 있기 너무 뜨거웠다. 그때 난 조준경으로 다시 아군
전방의 남쪽으로 조준했고 좀 나아지자 다시 포격을 재개했다.
몇 분간 더 쐈고 우린 다시 험비의 50기관총으로 이동해 하향
으로 사격했다. 아프간군의 응사는 꽤 격렬해졌고 적의 생각은
두 가지였을 거다. “더 이상은 힘들겠는 걸. 저녁 먹기 전에 끝
내기는 힘들어.” 우린 미군과 아프간군 2-300명이 있었고 우리
응사는 꽤 사나웠다.
교전은 45분 정도 지속됐다. 팀의 화기하사관은 나싼 달라스
중사였는데, 우연히도 내가 포트 카슨에서 레인저 대대장을
할 때 대대원이었다. 그는 정규군을 떠나 내셔널 가이드였다
가 나와 다시 만나게 된 거다. 어두워지자 자신의 주특기인
소련제 박격포에 위치해 상공에 조명탄을 쏘기 시작했다.
적의 사격은 사라졌다. 우린 사격을 중지하고 상황을
지켜봤다.
짐 해독 상사는 위성무전기로 상황보고를 송신했다. 이로써
이 르웨어에 왜 우리 진지를 만들었는지 이유가 명확해졌다.
짐 상사가 송수화기를 나에게 건넸다. 난 이미 생도 시절에
무전기 상황보고를 배웠다. 다만 무전기가 디지털로 바뀌었
을 뿐. 난 SALUTE report를 보냈다. 이것은 미 육군의 표준
절차로 위치-부대-시간-장비 등을 보고하는 것이다.
이 전문은 디지털 송신기로 보낸다.
관측초의 특전단 대원 두 명이 돌아와 보고했다. 둘은 위장을
충분히 한 상태로 그 쪽에서 적이 올 수 있다고 이미 조망하고
있다가 조우했다. 이 두 대원은 훈련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 증
명해주었다. 둘은 의사를 수기신호로 교환하면서 사격과 수류
탄을 사용했고 적은 이 두 명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둘
은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첫 적이 정지했을 때 대원들은 먼저 격발기를 들어 작동 램프를
확인하고 수풀 속에 숨겨 놓은 크레모어를 격발했다. 이 관측/
청음초에는 야간조준 기능이 있는 M-24 저격소총이 있었고 한
명은 M-4 소총이었다. 그리고 각자 베레타 권총과 수류탄이 있
었다. 이들은 교전 시작과 동시에 저격총으로 적 2-3명 이상을
정확히 저격했다. 이날 저격총과 다른 화기로 적 10명 정도를
사살했고 적은 관측초에 한 50미터까지 접근했었다. 결국 적
은 능선을 넘어 도주했다.
이 상황보고는 아주 자세하게 적 병기까지 보고한다. 적은
도주하면서 군장과 침낭과 식량도 버리고 갔다. 내 호출부호
는 Bushmaster 6였는데 이 ‘6’은 항상 지휘관을 뜻한다. 여기
서 부쉬마스터는 아프리카 독사인데 이는 미 육군 제3특전단
을 뜻하고 ‘6’까지 더해지면 제3특전단장을 의미한다. 내 밑에
1은 인사장교 2는 정보장교 3은 작전장교 4는 보급장교 5는
계획장교다. 난 3인 작전장교 조엘 우드워드 중령에게 상황
을 전달했다.
ODA 팀장은 전폭기 근접항공을 이미 요청했고 진지에는 전투
항공통제관이 있었다. 매일 밤 상공에는 여러 종류 미군 항공기
가 돌면서 언제라도 지원요청을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 B
-52가 상공에 떴으나 아무리 현대전이라고 해도 적 12명을 잡겠
다고 그 엄청난 폭격기를 요청할 수는 없었다. 밤에는 1/3 경계
취침으로 보냈고 아침에 되자 정찰을 나갔다. 그러나 무슬림은
전사자 사체를 고향으로 데려가는 전통적인 풍습이 있어 전사
자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24시간 안에 사체를
운반할지 매장할지를 결정한다.
돌아와 아침을 먹는데 핸독 상사가 나를 보며 말했다. “대령님,
여기 박격포에 총알구멍이 있습니다.” “진짜야?” 박격포 삼각대
에 총알이 맞은 흔적이 있었다. 그때는 우리 둘 다 몰랐었다. 르
웨어는 이미 적에게 알려졌고 24시간 주변에 적이 있다고 봐야
했다. 게다가 우린 12명 중에서 10명 정도를 죽였고 적이 망각할
리가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은 우리 진지보다 높은 곳을 점
거한 후에 공격할 생각이었다. 하여간 관측초 두 대원이 진지 전
체를 구한 것은 맞다. 그러나 교전수칙이 있기에 이들도 함부로
마구 쏠 수는 없다. 확실한 위협을 관측해야 사격이 가능하다.
Fire Support
포트 브레그의 비밀훈련시설에서 난 이미 특수작전 화력지원에
대해 배웠다. 레인저에 있을 당시 야간 화력지원 요청으로 105밀
리 야포와 AC-130 건쉽 사용법을 훈련했었다. 당시 난 레인저
화력지원장교였다.
“Spector Gunship, this is Ranger Forward Observer”이라 무전
으로 호출하고 화력을 유도한다. 이 훈련내용은 고위 관계자들
이 무전으로 듣고 있었다. AC-130 승무원 사격수들은 컴퓨터
화면으로 보고 목표를 식별하고 방아쇠를 당긴다. 보통 2천 피트
이상 고도에서 대기하다 요청하면 내려와 왼쪽으로 돌면서 지상
을 향해 쏜다. 위관 시절 직접 여기 타고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2천 피트 상공에서 105밀리 포를 발사하는데 컴퓨터 화면에 십
자선이 보이고 20밀리 40밀리 105밀리 중에서 선택할 수가 있다.
이 건쉽의 장점은 높은 곳에서 목표를 정확히 내려다본다는 것이
고, 단점은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탈레반 전사들이 모
닥불을 피우고 차와 밥을 먹는 도중 갑자기 AC-130의 적외선 카
메라에 잡히면 여지없이 당한다. 비정규전에서 이 수송기 건쉽은
정말 선호하는 화력지원이다.
스펙트러는 소수의 그린베레의 경우 매우 중요하다. 지상의 그린베레
대원들은 무전기로 “I just made contact. They ran off to the north”
이라고 말만 하면 된다. 그러면 AC-130 관측하고 오히려 자세하게 설
명해준다. “북쪽으로 뛰어가는 두 명이 보인다. 그들은 냇가를 건넜고
북동쪽 나무들에 세 명이 더 보인다. 당신들 남쪽의 건물 뒤에 세 명이
더 있다. 그들은 당신들의 소총으로도 해결이 가능하다. 그리고 북쪽
에 소총사거리 밖에 하나 더 보인다.”
이것이 AC-130이 하는 일이다.
아프간 참전 당시의 허드 대령
Returning Fire
이 A-camp에는 흙바닥으로 된 아주 짧은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장이
있었고 C-130이 거기 착륙이륙하는 일은 못 봤다. 착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나 난 항상 헬기를 타고 갔다. 우리가 사용하는 아프간의 거
의 모든 비행장은 과거 소련군이 사용했던 곳이다. 그 비행장도 소련
군이 만들었으나 2-30년 동안 방치됐고 버려진 소련군 항공기도 있었
고 거기에는 큰 빨간색 별이 그려져 있다. 소련 항공기들은 날개가
땅에 떨어지고 무너져 있었다.
비행장에는 벽돌로 지은 건물 두 개가 있었으나 건물 반은 빗물에
씻겨 나가고 없었다. 비행장 지역은 50에이커 크기로 활주로는 비
포장이며 전체 기지를 우리가 접수했다. 여기에 특전단 중대와 A-
팀 두 개가 자리를 잡아 총 25명 정도가 거주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 음향 정보 수집도 가능한 아주 대단한 전투작전
기지. 둘: 근처에 국경 검문소 거점이 서너 개 있다.
소련군이 철수할 때 122밀리 로켓 10만 발과 발사기를 방치하고 떠
났다. 그러나 아프간 정부는 이 병기들을 해체시킬 프로그램을 할
능력이 없었다. 그로 인해 마음만 먹으면 그런 탄약고에 손을 누구
나 댈 수 있었고, 미군이 들어오자 그것들을 민간인들이 수중에 넣
었다.
우린 평화정착을 위해 필요 없었지만 탈레반은 그런 것들을 아주 많이
모았고 상당수가 아직 일대에 남아 있다. 그들은 그걸 돈으로 사지 못
한다. 그러므로 “저 친구 로켓 100발 가지고 있어”란 말이 나온다. 열
받으면 그걸 쏘는 거다. 120밀리 로켓은 소련제 BM-21 발사기로 쏘는
데 발사기도 여전히 돌아다닌다. 탈레반은 보통 두 발 쏘고 도주한다.
전기로 작동하고 사거리는 1킬로미터인데 그렇게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사용이 간편하다. 이 비행장의 기지를 공격하는 데 적격이다.
로켓 공격을 기지가 몇 번 받았다.
2-3주 뒤에는 아주 강력한 로켓공격을 받았는데, 수제로 만든 조준기
를 사용했다. 꽤 정확했다. 어떤 것은 A-캠프 정문 75미터 부근에 떨
어졌다. 그 다음 일제 로켓포격은 정오에 일어났다. 중대장은 곧바로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했다. 그날 밤 공군 B-52들이 J-DAM 폭탄 6-8발
을 투하했다. 그 가격만 10만 달러다. 어떤 경우 어린 탈레반 2-3명을
잡기 위해 수백 만 달러짜리 폭탄을 사용하는 일이 산악지대에서 발생
했다. 공군 장성에게 말했지만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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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람의 내 연합작전사령부 작전실에는 대형 지도와 함께 텔레
비전 스크린이 여러 개 달려 있고 전투는 리얼타임으로 무전을
들으며 볼 수 있다. 만약 지원요청이 들어오면 우리 자신이 결정
하거나 예하 지휘관의 의견을 참고한다.
기억나는 어느 날 밤 새벽 2시 반, 산악지역에서 노새 6-8마리가
무거운 짐을 지고 연달아 가고 있다는 보고를 정찰기가 해왔다.
우리에게는 알카에다의 보급으로 여겨졌고, 약간의 상의 끝에
특전단 중대장이 이 대열을 매복하고 AC-130이 지원하기로 결정
했다. 결국 매복에 걸린 이 대열의 모든 동물과 사람이 건쉽항공
기에 의해 죽었다. 다음 날, 정찰대가 나가 보니 죽은 노새들만
있고 노새가 싣고 있던 짐이 모두 사라졌으며, 이상하게 마을사람
들도 노새를 물어달라는 항의가 없었다. 교전 중에 죽은 염소까지
도 돈으로 물어줬었다. 이 경우 마을사람들이 일언반구 말이 없
었다. 테러리스트들의 물품이 틀림없었다.
'연합' 환경에서의 비정규전 구상
내 직위는 연합특수작전태스크포스(CJSOTF) 지휘관으로 바그람
공군기지가 본부였다. 그 상위에 연합태스크포스(JTF)들이 있고
내 경우는 JTF18을 위해 일했고 주역은 10산악사단이었고 그 사단
의 상부는 18공수군단이다. 지휘관은 10산악사단 사단장 로이드
오스틴 소장이었다. 그 예하는 여단으로 갈라지고 예하 항공여단
이 작전을 돕는다.
지휘관은 한 가지 갈래는 아니었고, 엄밀하게 말하면 아프간 주둔
한 미 육군 제3특전단의 지휘관이다. 우리 특전단 안에는 예비군
특전단 1개 대대가 추가로 배속되었다. 그 외에 해병 2개 중대가
A-캠프 경계를 위해 배속되어 있었고, 네이비씰 1개 소대도 배속
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대급의 외국인 부대도 일부다. 모두 합하면
내 CJSOTF는 4천 명으로 총 6개국이 참가한다.
아프간에서 네이비씰 소대장은 내 친구였고 그 위에 척 울프 소령
이 지휘관이었다. 척 울프 소령은 나와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에
서 국재분쟁 매니저 과정에서 같이 공부한 사람이다. 네이비씰 지
휘관은 매우 능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특수전은 군 소속이 달라도
매우 좁은 사회다.
무인항공기는 여러 번 사용해서 특수작전 목표를 직접 보고, 흑백
이지만 작전을 리얼타임 비디오로 보면서 지휘한다. 그런 화면을
리얼타임으로 보면서 요청이 없어도 우리가 지원을 준비하기도 한
다. 교전발발(in contact) 보고가 들어오면 이 시스템이 작동한다.
이 직위를 수행하면서 나는 탁월한 대위들을 본다. 바로 A-팀 팀장
들로 이들은 결국 소령이 된다.
중요한 직위 중에 하나가 또 재정장교다. 돈을 쓰려면 2-3군데 허락
을 나는 받아야 한다. 지역 민병대에 지출되는 돈도 있고 우린 크게
지출범위를 계획해야 한다. 정보 분야에도 돈이 드는데 나는 엄격하
게 제한했다. 돈들이 마약을 사거나 매춘부를 사는데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재정장교는 아예 마크부터 재정 쪽 부대마크를 달고 다
닌다. 여성이었는데 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911 이후 현역으로 입대한
장교였다. 그런 능력의 열정적인 인력이 있다는 건 미국의 축복이다.
모든 일을 정말 잘 처리해주었다.
체코군 공수부대
체코슬로바키아는 전 소련의 위성국이었고 나라가 둘로
갈라져 있었다. 슬로바키아와 체코공화국. 체코공화국은
내 지휘권 안에 들어온 6개 국가 군대 중 하나였다. 내가
부임한 직후에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왔고 이는 체코공화국
의 첫 번째 해외파병 군사작전이었다.
체코는 구 소비에트연합에서 이탈하고 나토에 합류한 나라다.
체코 병사들을 만나고 10분 만에 난 체코가 나토에 준비된 국가
임을 명백하게 알았다. 모든 병사가 영민하고 말이 분명하며
신체적으로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를 돕는다는
것에 명예를 가지고 있었고 난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들은 훈련도 장비도 훌륭했고 전투철학과 통신이 양호
했고 일련의 탈레반 장악지역 깊숙한 곳까지 소규모 팀을 정찰로
내보냈다. 정찰팀들은 고지 정상 등에 침투해 관측으로 알카에다
를 수색했다. 포병 사거리 밖까지 나갔기 때문에 이들이 타격을
원하면 미 공군이 지원했다.
이 체코 정찰대는 전에 미군이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아프간
북동부 끝까지 들어갔고 이들의 관측활동은 아프간 나토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정말 거친 지역이다. 그들이 정찰하기 전까
지는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몰랐었다. 그들은
그 춥고 어두운 산악에서 적을 만나면 먼저 쏘고 나중에 보고
하는 특성이 있었고, 정말 위험한 작전들이었다.
어느 날 바그람에서 작전에 관한 브리핑이 있었고 태스크포스
상관 오스틴 장군도 참석했다. 정찰임무에 대한 보고회의. 이때
체코군 대대장도 한 명 참석했다. 이때 세 명이 주차장에 동시에
도착해서 만나게 되었다. 체코군 공수부대 대령과 내가 먼저 만나
걷다가 오스틴 소장을 만났다. 그래서 내가 오스틴 장군에게 그랬
다. “중앙아시아에서 양쪽 공수부대 대령을 세워둔 건 소장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오스틴 장군은 “그래? 무슨 뜻이지?”
냉전 시기, 나는 제10특전단 3대대 A-팀장 대위로 있었고 내 ODA
mission은 유사시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형 호수가 모든 곳에 점프
하는 거였고, 수영으로 호수를 건너 교량을 폭파시키는 거였다. 이
는 체코를 통해 소련군의 진주를 지연시키는 작전인데, 이는 유럽
전체를 보호하려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교량과 댐의 파괴. 당시 우
리 계획은 침투해서 체코 게릴라와 만나 공산주의에 대해 게릴라
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그때 나는 10특전단 3대대 알파 중대장으로 취임
했다. 나는 중대본부와 함께 A-팀 여섯 개를 휘하에 두었다. 이때
나는 평화우정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새롭게 만들어진 체코공화국
에 부하들을 이끌고 들어가 미군과 체코군 공수연대와 연합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난 젊은 소령이었고 내 휘하에 다른 특전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소련의 꼭두각시 시절 구 체코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전력
이 있었다. 프라하에서 태어나 체코군에 2년간 복무했고 이후 서
독으로 스키를 타고 탈출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와 육군에 입대
했다가 다시 특전단 과정을 통과했고 이제 모국으로 들어가는
작전을 수령한 것이다. 모두가 좋아했던 사람이고 같이 체코로
들어갔다.
어느 날 같이 프라하 거리를 걷는데,
그 친구가 한 현대식 건물을 보고
“저게 우리 부모님 건물입니다”라고 말했다.
“부모님은 자네가 온 걸 아시나?” 내가 물었다.
“모릅니다.”
“그럼 만나 뵈야지. 살아서 여기 돌아온 걸 알려 드려.”
참 대단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체코 공수부대와 연합훈련을 하면서, 민주적으로 선거로
공정하게 선출하는 것을 토론도 하면서 같이 공수작전을 준비했
다. 내 팀원과 나는 체코 낙하산으로 체코 MI-8 헬기에서 점프했
다. 점프 전날 상의와 준비를 하고 그날 밤 체코 공수부대원들이
우릴 방문해 근처 술집에서 한 잔 했다. 보드카를 마시고 헤어졌
다. 그들은 영어를 하는 미국인들과 이야기하는 자체를 몹시 즐
거워했다. 그들은 미국의 쇼를 통해서만 미국을 알고 있었다.
그때 내가 “체코는 재입대를 병사들에게 고무시키기 위해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가?” 물었다. 특히나 그들은 엘리트 공수부대원
들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재입대를 합니까? 체코에서는 재입대
하는 사람이 전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강제로 징집되어 2년
복무하고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라고 했다.
“대대에 부사관들이 얼마나 있는 거죠?”
라고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두 명”이라고 답하고 "대대는 위관급들이 움직
인다. 상급장교가 있기는 하나 주로 본부에서 참모를 하고, 병사
들 대부분은 일-이병이다“라고 했다. 당시 체코의 한 대대에는
대다수가 입대 2년도 안 된 일-이병이었고, 대학을 나온 소위
들이 곧바로 분대장을 하고 그 다음 소대장과 참모를 한다고
했다. 소련과 비슷한 체계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은
훌륭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린 DZ로 갔고 헬기가 왔다. 우리 점프마스터가
개인검사(JMPI)를 하고 체코 낙하산이 이상 없음을 확인했고 나
역시 안전고리를 위주로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러나 헬기는 불
안했다. 유압의 오일이 뚝뚝 떨어지고 그 전의 정비(분해정비)가
10년도 넘었으나 우린 어쨌든 헬기에 올랐다. 그런데 조종사가
군복도 안 입고 운동복 차림이라 놀랐다. 자리에 앉아 체코 점프
마스터를 봤는데, 전날 밤에 보드카 많이 마시기 콘테스트를 주
도한 사람이었다. 눈은 충혈된 채로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점프 직전에 그를 보니 한 쪽 눈은 감고 있었다. 헬기 문이 열
리자 나를 지시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면서 “You go.”
한다.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고 헬기 골조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우리 측 점프마스터가 그를 대신해 임무를 맡았는데
체코 병사들이 못마땅해 했다. 6분전-2분전-30초-15초가 지
나고 “go” 구령이 나왔다. 우린 뭐 숙달된 공수자격자들이라
안전하게 점프했다. 그런데 그날 우리는 세 번이나 점프했고
정말 대단했다. 낙하산과 생명줄은 우리 것과 매우 비슷했으
나, 내 가슴의 결속고리가 점프 직전에 갑자기 풀러졌다. 25년
간 점프했지만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내가 아프간에 도착했을 때, 체코군 공수부대는 내가 받은
체코군 수훈십자훈장 때문에 나를 존중했다. 내가 아프간에
서 지휘관이 끝나고 이취임식 후 귀국준비를 할 때, 난 체코
라디오 방송국과 인터뷰를 했다. 시간이 없었지만 당시 휘하
에 있었던 체코군 공수부대는 대단했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
을 냈다. 그게 미국 언론에도 기사로 났었다.
Fallen Comrades
몇 년 전, 내가 대대장이었을 때, 난 한밤중에도 일어나 대원
이름과 현재 위치를 암송하곤 했다. 짧은 시간이어야 했으나
불행히도 그건 길어졌다. 전사한 대원들의 명판에 있는 이름
과 전사에 관한 걸 나도 모르게 암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훈련 중이건 전투 중이었건 사망한 병사들은 영웅이다. 모두
가 그러하다.
본토에서 부하가 사망했을 경우, 우리는 가능한 사망통보를 사전
연락 없이 병사의 미망인에게 가서 직접 해야 했고, 이는 실패해
서는 안 되는 임무다. 첫 번째 경험은 내 중대 부하가 낙하산 점프
사고로 사망했고 토요일 아침에 들었다. 나는 우리 대대 주임상사
와 군목으로 family support group을 만들었다. 사무실에서 통보
를 받은 지 두 시간 후에 그 미망인의 집 현관에 도착했다.
나와 내 훌륭한 친구이기도 한 데이브 파머 주임상사와 군목은
빠르게 리허설을 했고, 우리는 현관에 도착해 오전 11시 미망인
앞에 섰다. 그녀는 이미 우리가 온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나는 미망인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걸 봤다. 우리가 머문 건 5분
정도였다. 그 동안 우리 대대 다른 군인 부인이 와서 서 주었다.
우리가 통보 행동을 하는 동안 3-4세 정도의 어린 딸이 거실에서
텔레비전으로 만화를 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나도 목이
막히고 눈물이 흘렀다.
내가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만 3년 기간 동안에, 내 부하 한 명이
코소보에서 죽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비전투 사망이라고 생각했
지만, 사실 그건 교전 중 전사였다. 대단히 훌륭했던 하사였고 우
린 그를 ‘수퍼’라고 불렀다. 정말 수퍼맨 같은 대원이었고 레인저
를 거쳐 그린베레를 쓴 대원이다. 코소보 북쪽 코미니치란 곳에서
폭발물 매복으로 전사했다.
하사가 탄 험비가 지뢰 위를 지나가자 적이 격발기를 눌러 폭발
되어 하사가 죽고 같은 A-팀 대원이 다쳤다. 당시 나는 미국에
있었다. 우리는 전과 같은 통보절차를 수행했고 이번에는 하사
의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여자친구였다. 사실 여자친구를 가족
으로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최초에는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를 해보니 아내와 다름 없는 사실혼 관계였다.
1천 년 동안, 군대는 장례식에서 21발의 총을 쏜다. 이도 준비와
리허설을 무척 해야 하며 정복의 모든 장구를 빛나게 닦아야 한
다. 아프간에서 병사들을 잃었을 때는 내가 통보절차를 할 수 없
었고, 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아픔은 동등했다.
2004년 나는 주임상사와 통신부사관과 함께 한 A-캠프를 방문했다.
그 ODA 팀장은 댄 에거스 대위였는데 주둔 2달 째였다. 대위는 비정
규전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내가 뭔가 물어보면 나보다 훨씬
더 알고 있었고 모든 대답에 결점이 없었다. 내가 방문한 그날 에거스
대위는 지역 장로들을 만나 탈레반과의 전투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후
대위는 적 활동지역에 팀원을 이끌고 정찰을 나갔다.
적은 소련제 구형 120밀리 로켓의 탄두만 여러 개 떼어내 땅에
폭발물로 묻었다. 폭발물에 도전선을 연결한 다음 형광 빛 스위
치를 연결했고 그 전선을 다시 자동차 배터리에 연결해 누르기
만 하면 터지게 되어 있었다.
그것이 터진 날은 전몰자 추념 주간인 5월 29일이었고 팀원 4명
이 전사했으며 그 안에 에거스 대위도 포함된다. 난 본부에 있다
위성전화기로 보고를 받았다. 3특전단 2대대 소속으로 대대장과
도 교신했다. 대대장은 상황을 설명하고 반격 계획을 만들고 있었
다. 이 계획으로 대대장은 적 12명 정도를 사살했다. 아프간에서
그런다고 미군의 유혈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아프간전쟁의 승리: 문화의 이해
비정규전을 수행하면서 나를 포함해서 대원들은 빠르게 깨달았다:
만약 텔레반이 유럽을 지배한다면 우리 중 대다수는 죽을 것이다.
하느님 감사하게도 그렇게 될 수 없다. 간단히 표현하면 그들은 총
을 못 쏜다. 사격술이 조악한 특징이 있다. 그들 마음에 이런 게 있
나 보다. [알라신에 맞추게 하신다면 맞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조준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유럽인들과 문화가 다르다.
그들에게 총을 쥐고 조준하는 것과 그런 눈을 갖게 하는 것 모두
알라신의 뜻이다. 우린 그들이 유럽인이 아닌게 행복하다.
소련군이 1989년 아프간을 떠날 때, 소련군이 만든 아프간 정부군
사단과 여단과 탱크와 헬기와 제트기와 기타 현대적 장비를 주고
갔다. 떠날 당시는 아프간 정부군이 완벽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그
게 유지되지 않았고 특히나 기계적인 정비는 없어졌다. 결국 가동
할 힘을 잃었다. 아프간은 기원전 1천 년의 문화에 정체되어 있다.
그들은 헬기의 유압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프
간에는 기준이나 표준이란 게 없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AK-47을 들고 싸우는데 사단이나 기계화 같은
게 없는 그냥 전사다. 그들에게는 탱크여단이나 F-15 같은 게 승리
에 필요가 없다. 소대 단위가 전형적이고 가끔 무전기와 중형 기관
총도 사용한다. 도로는 그냥 토착적인 비포장도로다. 대통령궁에
가봤는데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도 구형 군장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정부군도 부대가 떠나거나 이동하면 가지고 있던 무기를
넘겨달라고 주장한다. 나 역시도 항상 권총과 소총, 대검과 실탄을
가지고 다녔고 침실에 들어야만 무장을 풀었다.
아프간 문화 중에 저녁을 먹을 때도 다른 예절이 있었다. 난 켄터키
에서 문화적으로 성장한 사람이고, 아프간 마을의 노인들과 처음 식
사했던 기억을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다. 내 부하 두 명이 같이 있
었다. 이슬람 문화에서 왼손은 깨끗하지 못하다. 먹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프간 사람들은 밥을 먹을 때
왼손은 보통 뒤로 빼거나 호주머니에 넣는다. 음식은 오른손으로 먹
어야 한다. 무슬림 문화에서 한쪽 발이나 한쪽 신발만 보여주는 것은
무례한 것이고 시비를 거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아프간 시골에는 의자
가 없기에 양반다리로 앉아야 하는데 서양인들은 이게 무릎도 아프고
힘든 자세다. 나 같은 경우 그렇게 앉으면 관절이 아프다. 그렇게 셀
수 없이 저녁을 먹어야 했다.
두 가지 점을 기억해야 한다: 난 한 번도 여성과 밥을 같이 먹은 적이
없고, 아이들 또한 그렇다. 젊거나 중년여성은 거의 볼 수 없었고, 본
것은 어린아이와 할머니들 뿐이다. 아프간 마을로 들어가면 마치 구약
성서로 걸어들어가는 기분이 들고, 모세가 저 구석에서 나타날 것 같
다. 통역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마을의 가장 연로한 사람과 말할
수 있고, 이 노인들은 탈레반과도 알고 있으며, 모든 외국인도 그 읍장
을 거쳐야 한다.
둘째: 식사는 바닥에 식탁보나 모포를 깔고 공통의 대형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는다. 접시는 약 60cm로 큰데 거기에 쌀밥과 염소고기, 닭,
그리고 야채 접시가 두 개 정도 중앙에 놓인다. 부드러운 빵과 물이나
가끔 펩시나 세븐업 등이 있어야 세팅 끝이다. 난 항상 소다수를 같이
먹곤 했다. 차려지면 같이 양반자세로 둘러앉는데 오른손으로 쌀과
기타를 집어서 먹는다. 가끔은 빵으로 샌드위치처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먹으면서 높이 치솟은 산들을 보니 참 모진 곳의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 특전대원들은 그렇게 손으로 집어먹다 쌀이 얼굴에 한줌씩
묻곤 했다. ‘어머니가 지금 나를 보면 뭐라 그럴까?’ 그런 생각도
든다. 손을 씻는 사람을 거의 못 봤다. 그래서 이런 척박한 곳에
이런 음식이 있다는 게 신의 놀라운 은총이다. 그러나 대화를 해
보면 그들은 탈레반이 다시 돌아와 아프간 사회에서 활동하기를
바라는 전통적인 입장이었다.
이들 산악의 경우 어떤 건 24,000피트나 되어 헬기로는 소련군이나
미군이나 이를 넘어 날 수가 없다. 그래서 보통 계곡을 통해 날아야
하는데, 과거 무자히딘들은 이 점을 이용해 다닐만한 계곡에서 기다
리다 소련 헬기를 격추시키곤 했다. 계곡에서 기다리던 무자히딘 백
여 명이 소총과 RPG를 헬기를 향해 쏜다. RPG는 2차대전 시절 정교
하지 않은 기술로 만든 것이나, 매우 간단하다. 그냥 공중에 날아다
니는 수류탄으로 보면 된다. 능숙하지 않은 사수도 100미터 이내에
서는 목표를 맞출 수 있다. 그러나 공중을 나는 헬기는 이런 간단한
탄두에도 엄청나게 위험하다. 소련과 전쟁 시절 3일 동안 헬기 30대
를 격추시킨 일도 있었다.
탈레반이나 알카에다나 그 시절 무자히딘의 기술을 사용한다.
다행히 무자히딘과 같이 대규모 병력이 모이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처음으로 아프간에서 10산악사단의 치누크 헬기를 탔던 비행
을 기억한다. 밤에 한 캠프에 착륙해 헬기 좌측에서 머리를 내밀었
고 M-60기관총 사수는 창문에 거총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땅을 보려고 하는데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RPG가 발사되어 우리
에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날아온 로켓은 마치 어린시절
본 7월 4일 불꽃놀이처럼 스파크가 일면서 날아왔다. 다행히 빗나
갔다. 원래 수십 년 전 무자히딘은 헬기를 향해 로켓 3-4백 발을
동시에 발사하는 전술을 썼었다. 이게 효과가 컸었다. 이 전술은
무자히딘을 지원하고 지도했던 마독 장군이 지휘하며 가르친 것
이었고 매복전술로 소련군에 큰 전상자를 선사했다.
이런 고지대에서 적은 낮은 지역 물가를 따라 이동하는 게 보통이
었다. 이런 길은 소련군도 이용하기가 수월했고, 무자히딘은 높은
곳에 백여 명을 배치해 소련군을 매복했다. 이들은 RPG로 첫 차량
을 파괴하고 그 다음 맨 마지막 차량을 파괴한 다음 하나씩 끝까지
죽였고 3백 명이 이런 식으로 몰살당한 적도 있었다. 이 소련군 기
갑부대는 하루 전투 동안 무자히딘이 단 1명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죽였다.
과거 무자히딘의 지도자였던 마독 장군이 화려한 집에 식사초대를
했을 때, 술을 마시겠냐고 물었는데 난 근 1년간 참은 금주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아프간에서 지휘하는 동안 규율문제가 서너 건
있었다. 내가 아무리 지휘방침을 내려고 1년 동안 4천 명을 모두 감시
할 수는 없다. 나도 규율을 그렇게 포괄적으로 죄지는 않았다. 마독
장군은 소련군과도 싸웠고 현재는 국경 양쪽에 친족이 살고 있고 일
대 군벌 12명 정도를 휘하에 두고 있었다. 그래서 국경 근처 작전에
민감했다.
그 국경은 ‘듀런드 라인’이라고 불렀고 총 길이가 2,640킬로미터다.
이 국경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도에 선만 그어진 것으로 일대 종족
의 분포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이는 1893년 영국과 아프간이 듀
런드 라인 협정으로 통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인도 주둔군 장군 헨리
듀런드의 이름을 딴 것이다. 듀런드는 당시 식민지 인도의 외무부
장관을 하고 있었다.
마독 장군과 저녁을 먹고 카불로 밤에 돌아오면서 이곳은 상식적
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내 밑에 작전참모
로는 보기 중령이 있었는데, 중령은 내가 1년 더 하면 안 되겠냐고
묻자 곧바로 그렇게 하겠다고 답변했다. 즉각. 잠시 휴가를 받아
집에 갔다가 돌아와 아프간 참전을 연장한 참모다. 나와 보기 중령
과 마독 장군은 아프간의 정부군과 지역방위군 창설을 논의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당시 Afghan Security Force는 AK-47 공격소총과 분대 당 PKM
경기관총 1정이 전부였다. 모병과 훈련은 우리가 맡아야 했다. 이
는 아프간 정부군과는 또 다른 조직이고 우리가 운영할 현지민
병력이었다. 아프간은 만약 한 명만 끌어드리면 그의 형제와
사촌과 처가 쪽 식구 등도 같이 동참시킬 수 있다. 나는 이를
상의한 후에 상관에게 파워포인트로 보고회를 가졌다.
내 상관은 그 지역을 맡은 사단장이다. 25사단장 에릭 올센 소장
이었다가 나중에 르로이드 오스틴 장군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내
파병기간의 반은 25사단 반은 10산악사단이 상급부대였다. 내가
가직 직권은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훈련시킨 현지민 병력
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대 자금은 작전에만 가용했기 때문에 현
지민 부대원 고용은 A-캠프 자금에서 쪼개 써야 했다.
그로 인해 특전단 화기부사관들은 노획한 무기 중에서 사용이
가능한 것을 골라 재활용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 부사관은
소련제 M60 82mm 무반동총을 자신의 화기로 사용했다. 대전
차용이었기만 사거리가 긴 장점이 있다. 그래서 특전단 팀원
들이 산악에서 AK-47을 가지고 적과 상대하는 일도 일어났다.
아사다바드의 북부 도시 중에 있는 한 A-팀은 육군과 해병대
병력이 다수가 있는 곳에 B-팀이 본부를 차렸고 A-팀 둘을
작전시켰다. B팀 중대장은 젭 스타우드 소령으로 현역 지속
근무자(a full-timer)로 휘하에 내셔널가이드 특전단 중대를
지휘했다. 원래 중대장을 내 참모로 돌리고 직접 스타우트
소령을 적임자로 임명했다.
그들이 어느 비 오는 날 한 탄약저장고를 수색했다. 소련군이
남긴 것인데 탈레반이 이용하고 있었다. 그걸 노획해 아프간
군에 넘기기 위해서. 그럴 수 없으면 C4 등으로 파괴한다. 결
국 그날 우리는 수 톤의 실탄을 폭파시켰다. 이 소령은 고용할
현지민 병력을 직접 훈련시켰고 각 병사들에게 AK-47을 한 정
씩 지급했고 군복과 실탄도 보급했다. 어깨에는 전갈 모양의
부대마크를 만들어 부착한다. 소령은 기본사격술과 소부대
전술 등 2주간 교육시켰다.
이들은 혈연지연으로 근처 계곡 주민과 연결이 되어 우리는
직접 “탈레반은 어디 있는가?” “누가 알카에다를 돕는가?”
그냥 물어본다. 그런 적들이 사실은 이 병사들의 이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추적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인간을
통한 정보와 무기고 노획, 심문까지 가능해졌다. 이것은 특
전단이 현지민들을 고용해 작전에 이용한 오랜 전통이다.
이들이 고용되면서 오지의 A-캠프 규모가 커졌다.
비정규전에 대한 도전
미국인들은 특수전부대에 열광하고 마치 전투에서 신체 특정
부위에 외과수술을 한다는 개념으로 보곤 한다. 또한 모든 특
수전에서 전투상황에만 집중하기도 한다. 그래서 레인저, 네
이비씰, 미 공군 특전단, 160특수항공연대 등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특전단은 비정규전을 위해 선발되고 훈련
을 받아 현지민들과 같이 싸우는 방식을 택한다.
1986년 미 의회는 눈-코헨 법을 만들어 미 특수작전사령부를
4성장군급으로 승격시켜, 미 유럽사령부와 미 중부사령부와
동등한 지위가 되었다. 이 법에 따라 미 육군 특전단은 하나의
병과로 분류되면서 자체적인 진급과 진행의 룰이 생겼다. 그
러나 불행히도 이것이 꼬여버린다.
이 눈-코헨 협정법에는 모든 것이 명문화되어 있어, 특전단의
훈련과 선발, 대위-소령-중령-대령의 진급과 보직절차가 명시
되어 있다. 그러나 특전단 장교가 장군이 될 경우는 10조에 따
라 정규전 전투부대로 가게 되어 있는데, 더 깊숙이 들어가면
보병 전투부대의 참모로만 갈 수 있고 지휘관 보직은 제한되게
되어 있으며, 특히 전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양편의 중간
에서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생겼다.
모든 육군 특전단들을 지휘하는 특전단 본부는 포트 브레그에
있고, 이 사령부는 전쟁터에 가지 않는다. 눈-코헨법에 따라
대령까지 진급한 특전단 장교는 보통 특전단에 남아서 전술발전
이나 훈련을 담당한다. 특전단 장교는 아이젠하워처럼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장군이 된 사람들은 포트 브레그에서 각 특전단
대위-소령-중령-대령 양성과정을 맡는다. 지휘관은 맡지 못해
도 비정규전과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특수작전 사회는 특전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모두 비정규전
부대만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즘은 정규전과 카운터-테
러리즘이 주류다. 모두 애국심을 가진 전사들로 그 중에 일부가
특전단일 뿐이고 특전단의 경우 비정규전 경험이 다른 곳을 넘어
선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특전단은 오히려 인내심이 강하고, 지역
에 다가서 빠른 방법을 택하고, 격렬한 전투도 하며, 한 국가를 변
화시키는 것까지 가능하다. 이는 이라크 같은 곳에서 필요하고
워싱턴은 특전단 장교들을 많이 파병시킨다.
특전단의 전략은 현지민들이 영구적으로 변화하게 만드는 것이다.
현지민을 훈련시키고 문제를 해결해주며 그들이 변화할 수 있는
tool들을 준다. 또한 그러면서 그들을 보호한다. 불행히도 정규전
군사 지휘관들은 이를 종종 까먹는다. 정규전 부대는 전쟁터를 떠
날 때 파괴하고 사라지지만 비정규전 부대는 협력했던 사람들을
그곳에 두고 가는 것을 염려한다.
이 Afghan National Guard 컨셉을 상부에 올렸을 때, 대답은 No
였다. 우리가 그 병사들에게 매일 5달러를 지불할 수는 없었다.
사실 아프간 정부군(ANA)은 하루 일당이 5달러가 한참 되지 않
았다. 내 임무는 적어도 아프간에 알카에다가 활동하지 못하도
록 방지시키고 결국 아프간을 테러에 반대하는 중립국으로 만
드는 거였다. 특수작전부대의 목표도 같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와 레인저, 네이비씰 160특수항공단 등은
전술이 다를 뿐이다. 한 방법은 현지민과 함께 적과 싸우는 것
이고, 다른 한 방법은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핵심 참모, 그리
고 적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것이다. 서방에서 가장 관심이
큰 것은 역시 빈 라덴으로 최고 순위 대상이었다.
빈 라덴은 아프간-파키스탄의 국경지대인 와지리스탄 서쪽에
있다고 우린 확신하고 있었다. 그쪽은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만의 작은 영토와 같은 곳이며 아프간이나 파키스
탄 모두 영향권 바깥이었다. 그들에게 빈 라덴은 영웅이었고
야전지휘관으로 생각되고 있었으나, 이미 작전지휘를 놓은
지는 이미 몇 년 된 상태였다.
내가 아프간에 부임했을 때, 우린 그를 잘 알지도 미래도 몰랐다.
그래서 우린 동굴에서 독사에 물려 죽거나 해서 결국 아무도 진짜
모르는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파키스탄 영토에서 우리 네이비씰
이 빈 라덴을 잡은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그는 너무 상징적이
었으니까. 우린 마을들을 방문해서 사람들에게 “빈 라덴이나 그의
참모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당시 미국 정부는 산 채로 잡
거나 사살하거나 2천 5백만 달러에서 5천만 달러로 현상금을 올렸다.
미국 달러로 5천만 달러였지 외국환으로 환율을 계산하면 아프간
같은 곳에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그러나 난 아프간 군부에게
이를 말하지 않았다. ‘5천만 달러면 염소가 몇 마리인가?’ 물을 수
도 있었다. 아프간은 식량-물-쉼터가 거래의 기준이었고 5천만 달
러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 척박한 땅에서는 5천만 달러보다는
염소 200마리를 준다고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다.
내가 특전단 훈련 초기에 1937년 발간된 마오쩌뚱의 게릴라전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이는 주로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게릴라
전 전술이었다. 게릴라는 총을 휴대한 무장전사로 야전에서 기거
하며 항상 작전의 범주에 있게 된다. 가장 중요한 확인은 ‘적 식별’
이다. 탈레반의 경우는 이 게릴라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10% 정도
였다. 나머지는 그냥 인생에서 선택을 통해 총을 든 농부였다. 그것
이 첫 번째 레벨 게릴라이고, 두 번째 레벨은 좀 사치스러운 지원을
받는 전사들인데, 이들은 전략적으로 보급품과 총을 지원받으며
행동한다. 이들은 매복과 습격도 하고 작전 결과에도 신경쓴다.
그 다음 레벨이 underground member다. 이들은 주로 식량과 돈과
정보를 목표로 한다. 이들은 농부들의 식량을 게릴라들 은거지에
전달하고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나토의 작전도 주시한다.
이는 지역적이기도 하고 개인적이기도 하는 등 다양하다. 게릴라들
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도 있고, 일대의 조력을 받는다. 이들은 신분
증도 없고 명단도 작성되어 있지 않으며 그냥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
이다. 이 세 레벨을 우리는 GAU(Guerrillas, Auxiliary, Underground)
로 분류했고 한 지역이 어떤 레벨의 상태인가를 고려한다. 보조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민사활동에 참여시킬만큼 매우 방대
한 사회다.
그러나 가장 가치가 있었던 일은, 먼저 탈레반을 몰아내고 아프간에
민주주의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한 일이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한 일이다. 대부분의 A-탬프 특전단 의무주특기들은 지역민
을 치료하면서 급하면 헬기후송까지 시켰다. 아프간을 보면 6-8세
이하 어린이들은 모두 누나나 언니가 엄마처럼 데리고 다닌다. 그런
어린 소녀들은 아주 컬러풀한 옷을 입고 다닌다. 우린 총상부터 자동
차 사고와 다친 당나귀까지 돌봤다. 아프간의 의료는 잔인하다고 할만
큼 열악했고, 그저 아스피린 한 알로 모든 걸 해결하는, 거의 500년간
의료술이 정체된 상태였다.
코나르 지역의 19특전단 역시 오두막에서 이런 의료지원을 했고
한 의무병은 그곳 고등학교에서 과학 선생님까지 했다. 그가 선생
님을 하기 전까지 1년 동안 선생님 자리는 공석이었었다. 그 자신
이 유타주에서 과학 선생님을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침, 한 아버지와 5-6세 되는 소녀가 지역 의료지원 건물
로 급하게 왔다. 자동차 두 대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엄지와 집게손
가락이 절단된 상태였다. 불과 몇 분 전의 사고였다. A-캠프의 오두
막에서 의무주특기는 몇 시간 동안의 외과수술을 시작했고 팀 동료
들이 그의 집도를 도왔다. 결국 집게손가락을 다시 연결하는데 성공
했고, 엄지손가락은 근육과 신경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으깨어져 있
었다. 결국 소녀는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상황까지 호전되었다.
특전단 의무주특기는 굉장히 난이도 높은 훈련을 받았고 군대 의무병
이상의 능력이 있다. 가끔은 의무주특기들이 시술한 것을 보고 군의관
들이 놀라기도 한다. 이 일로 소녀의 아버지는 미군을 매우 신뢰하게
되었다. 이런 일들은 미국에 알려지지 않는다. 일부 주민들은 미군을
‘부자 러시아인들’이라고 비하해서 부르기도 했었다. 이런 일은 작전
에 매우 좋다. 탈레반은 지역민들에게 미군이 러시아인들과 같다고
선전했다. 어찌 보면 그들이 보기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러시아인들에 비하여 훨씬 더 돈을 많이 쓴다. 아프간인들은 아직도
러시아를 미워하고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련군과 전혀 다르
다는 걸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내심
이다.
모든 비정규전의 키워드는 현지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지역민과
게릴라들은 분리시켜야 한다. 들어온 외국군이 게릴라들을 죽이는
데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게릴라와 지역민의 분리는 물리적인 격리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철학적으로 분리되
어야 한다. 대-비정규전은 물에 물고기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다. 물
의 온도와 환경을 바꿔 테러리스트들이 서식 못하도록 해야 한다.
Power in the Modern Era
힘을 갖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외교. 정보.
군사. 경제... 이 네 가지에 의해서 모든 국가는 그 레벨이
정해지고 그것이 역사의 진행으로 이어진다. 모든 분쟁은
이 네 가지 요소 별 조합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2차대전은
군사가 해결책이었고 이후는 외교가 중요해졌다. 요즘은
군사가 2차 요소가 되고 그 이전에 외교가 우선으로 선행
된다. 유럽도 외교를 통해 지난 60년 동안 평형을 유지했
다. 그러나 이 전쟁을 진짜 이해하려면 이 전쟁에 해당되
는 다른 전쟁과 다른 이유들을 알아야 한다.
앞서 물에서 물고기가 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적을 분쇄하려고 공격한다. 그러나 이 완전한 격파
는 징후가 아닌 진짜가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총
을 쏘고 급조폭발물로 공격하면 마음이 좋지 않다. 그러나
더욱 깊숙이 보면 이 과정은 좀 더 오래 걸리며 매우 복잡
하다. 적을 더 죽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는
적이 계속 갱생되고 우린 힘들어진다. 물을 얼려서 박테리
아를 죽이는 것이 오히려 빨리 끝나고 떠나는 방법이다.
군사를 제외한 경제-정보-외교의 요소는 그들에게 매우 제한
적이다. 우리 농업부와 노동부와 연방정부는 아프간에 가서
힘들게 일하고 있다. 어떻게 땅을 경작하고 밀을 재배하는가
를 지도하고 있다. 어떻게 지역사회의 소통을 세우고 관개수
로를 터주는가 노력하고 있다. 상업거래 통상과 법률을 정착
시키려고 노력한다.
타락한 아프간 정부의 문제 중 하나는 의료시설의 부족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돈이 없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며, 교육
이 부실하다. 군대와 외교도 너무 부실하며, 앞서 말한 네 가지
요소가 모두 부실하다. 이런 좌절의 징후들이 서방국을 공격하
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요점은 간단하다: 우리를 쏠 수
있는 적을 먼저 죽이는 것이며, 그 다음 길게 보면 그런 나쁜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사회를 지속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앞의 적을 제압하는 것은 꽤 쉽다.
마을을 방문해보면 10-12세 어린이들이 우리 차량 옆을 달리며
반기는데, 이 어린이들이 청년으로 성장하는 것은 매우 힘든 생
존의 과정이다. 우리의 작전은 전격전(blitzkrieg) 같은 것이 아니
다. 전혀 다른 것이다. 전격전은 글짜 그대로 “lightning war”다.
우린 적을 식별하고 죽일 수 있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 각별한 문제
들이 존재하고 푸는 방식도 지금까지 미군이 경험한 것과는 다르다.
경제력과 정보는 스파크처럼 촉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랍세계의
이슬람은 기본적으로 과거에 정체된 종교적 문화에 살고 있다. 기원
후 7세기에 머물러 있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가 지구를 걷던
시기. 그것에서 벗어나면 알라의 뜻을 벗어나는 것이 된다. 그들의
문화가 침범당하면 절대로 관대하지 않다.
우리는 힘이 없고 돌아가지 않는 정부의 각 요소를 완벽하게 변화
시키려 군사력을 쓴다. 군사력은 한정적이며 최후의 방법이고 지배
하는 것은 가능하나 최선의 것이 아니다. 외부의 힘에 아프간 정부
가 의존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빨리 끝낼 수가 없고 이건
비정규전이고 인내심이 필요하다. 미국은 전격전이 중추인 군대인
데 불행히도 이 전쟁은 비정규전이다. 우리가 승리를 얻으려면 몇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s
내가 아프간에 있을 때 PRT라는 새로운 컨셉이 시도되기 시작했
는데 이는 지역재건팀(Provincial Reconstruction Team)이란 뜻
으로, 소수 미국인 팀이 들어가 소규모 지역사회를 돕고 보다 실
용적인 지역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일이다.
여기서도 앞서 말한 네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한다. 농업작물 전문가,
교육 전문가, 사업 전문가와 군사고문관이 한 팀으로 구성된다. 대단
한 개념이었지만 우린 명칭 때문에 처음엔 웃었다. 또한 지역사회를
재건하는 게 그리 쉬워보이지도 않았다. 재건보다는 그냥 다시 세우
는 게 더 쉬울 거란 생각. 그러나 여기서 군사 부문이 제외되면서 그
들에 대한 지원도 없어지게 된다. 분명 제한적인 상황이 되었다.
미국은 너무 빠르게 결과를 원했으나, 이곳은 우리의 맥도날드
사회처럼 금방 올바로 일이 진행되는 곳이 아니다. 중동이나 아
시아나 문화적으로 무언가를 그렇게 짧은 기간에 하려는 곳이
아니다. 미국은 전격전처럼 거대한 정규전을 항상 염두에 둔다.
그러나 아프간은 기동조차 쉽지 않고 밀고 들어갈 건물조차
없다. 그러니 성공은 제한적이고 좌절을 맛본다.
911 이후, 우리 마음 속의 전통적인 전격전 개념은 아프간에서
쓰라린 좌절만 맛보았다. 911 이후 전개된 우리 3특전단은 작은
비정규전 부대로써 포트 캠벨에서 나와 아프간으로 가 신뢰를
쌓고 작전하고 훈련시켰다. 이후 우린 기동해 적을 죽이기 시작
했으나 줄어들지도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 정규전과 화력으로
결정을 짓는다는 생각은 끝난지 오래다. 그리고 50년간 지속되
어온 특전단은 이미 이 현실을 깨달은지 오래다. 오히려 정규전
부대가 비정규전부대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돕는 형편이
되었다. 우리의 목표를 성취하고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미국은 아주 빠르게 결정적인 승리를 원한다. 그러나 여긴 빨리 할
수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을 수도 없다. 수십 년 혹은 수세기 동안
산적한 문제들이 보인다. (대)비정규전은 인내심이 바탕이다. 그러
나 이런 인내에 미국인들은 역으로 스트레스를 느낀다. 기술과 자금
은 충분하지만 바로 그것이 우리의 약점이다. 인내심이 없는 게 우리
의 위험성이다. 그러나 적들 사이에는 이러한 인내심이 중심으로 자
리잡고 있다. 우리는 공격하려 하고 상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
이게 가장 나쁜 시나리오다. 이러한 행동이 결과와 이어지는 건 매우
불확실하다.
적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반격한다. 우리 정치인들은 너무
좌불안석이다. 그러면 적이 이긴다. 우린 카불을 점령하고 미국 대사
관에 깃발을 몇 달 만에 올렸으나, 오히려 하강하는 국면을 맞고 있다.
적은 부실한 무장으로 산악에 들어가 말한다. “좋아, 이제 올 때까지
기다리자.” 요즘 적이 그렇게 하고 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
상대의 전술을 보자. 계속해서. 역사를 통해서 한 국가가 아주 잘
돌아가고 있고 미래를 지향한다. 영국은 지역에서 일을 수행하는
데 대단했고, 언급할 수 없는 힘을 통해서 환경을 바꾸려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가 바로 해가 지지 않는다는 대영제국 시절이
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작은 섬나라가 지구의 반을 손에
넣었었다.
영국군은 최상의 지휘관들이 있었고, 바로 영국군 장교들이다.
그들이 인도와 파키스탄과 식민지 미국에서 중간 매니저 역할
을 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과 독일도 식민지를 확장했지만,
이들 식민세력이 떠났을 때 공통적인 특징이 생겼다. 식민정부
를 대체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다르다. 식민정부가 떠
나게 되었을 때, 미약하나마 그 시스템을 이어받을 중간 매니저
를 남겨놓았다.
짐바브웨 국방부장관과 만났던 것이 기억난다. 난 당시 전 국토에
급격히 늘어난 대인지뢰 제거 문제로 그를 만났다. 오후에 차를 마
시며 만났는데, 그 역시 매우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혈통이었다.
장관은 풀을 먹인 군복에 별 세 개를 어깨에 달고 있는 장군이었다.
대영제국의 계급장과 똑같았다. 영국은 아주 오래전에 짐바브웨를
떠났지만 말이다. 그는 속삭이듯이 나에게 말했다. “비공식적으로
말하면, 우린 다시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싶답니다.” 내가 무슨
소리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왜냐하면 말이죠. 그들이 여길 떠날
때 그들은 지역에 middle manager들을 공고히 하고 떠났어요. 그리
고 그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젊은 특전단 장교였던 나는 큰 교훈을 얻었다. 바로 우리가 전 세계
에서 그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근본적으로 외교다: 그
들에게 힘을 준 것은 근본적으로 노예상태에서 발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장관은 유럽이나 미국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중국제
도자기에 차를 마시면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것을 감사해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비정규전의 성공적인 전략이다.
[이 내용은 필자 한 개인의 고유한 생각이며,
번역자 생각과 같지는 않습니다. 잇빨 주]
코스트에서 아베드까지 파키스탄 국경의 검문소들을 다니며 파키
스탄 사람들을 만났고, 내가 만난 파키스탄 장교들은 어두운 피부
에 콧수염을 길렀고 농작물과 왕관이 장식된 마크를 달고 있었는
데 영국 것과 비슷했다. 영국은 파키스탄에서 오래 전에 떠났다.
그러나 파키스탄에 남긴 여파는 적지 않아 보인다. 대영제국의
국경선은 아프간 국경까지였고, 마지막 영국인들은 펀잡 지역에
사각형을 그려 넣었고 4방으로 총구를 들고 경계했다. 이 전술은
요즘에도 쓰이는데 이 사각형 구역은 기병이든 보병이든 난공불낙
이었다. 근처 카이버 협곡에서 영국군이 마지막으로 패배하고
떠났다.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에서 파키스탄 장교들과 만나는 허드 대령
아프간 병사들은 토굴에 사는 사람들과 같다. 아마 평생 목욕을
열 번 정도 할 걸로 생각한다. 게다가 의사도 없고 치과도 없다.
전혀 없다. 그래도 대령 정도면 읽을 수는 있다. 아프간과 파키
스탄은 서로가 10마일 씩 물러나 있다. 한 쪽은 영국의 영향을
받은 곳이고 한 쪽은 아니다.
요즘까지도 영국군은 구르카연대를 편성해 운영하고 있다. 영국군
장교들이 전통에 따라 구르카 중대를 지휘한다. 그들도 이 전통을
받아들인다. 영국은 우리 켄터키주 정도 크기에 지형도 거칠다. 인
적자원도 크게 나오지 않는데 어떻게 세계를 지배한 것일까? 대영
제국은 2차대전을 끝으로 종료되었지만 여전히 세계 전략의 키 플
레이어 역할을 한다. 어째서 그럴까? 영국은 일종의 대리인들
(surrogates)을 보유하고 있고 이들은 영국의 영향에서 여전히
해가 지지 않고 있다.
우린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고 미군 전상자도 소수이며, 상대도
우리가 꽤 길게 여기 있을 걸 안다. 결국 협력국들이 많아지지
적이 많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이 없다. 이 전쟁은 911로 촉발된 것이고 짧게 개입하려고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나 처음 전쟁을 시작할 때의 전략을
정확히 수행해야 할 시간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10년이 지났고
우리 정부는 이제 이 전쟁에 지쳤으며 철수할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현지민들이 이 평형상태를 유지할 능력을 만
들어주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 식의 자유를 줄 수 없고
그들이 바라지도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삶을 방어하는데
주력한다. 그들도 테러리스트 훈련소를 떠나 아이들이 있는
안전한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Final Thoughts
난 꽤 이른 시기에 내 재능과 능력을 알았고, 그들이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이 능력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가
질문이었다. 난 그들의 능력을 먼저 알고 싶어 노력했고, 귀국
을 하더라도 그것을 마스터하고 싶었다. 뒤늦게 느끼지만 내
능력과 그들은 좋은 결합이 되어 능력을 발휘했다는 것은
은총이었다. 신은 나에게 모자란 것을 빌려주셨다.
평범한 사람들인 우리는 그렇게 많은 재능이 없고 사회가
그것을 판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
을 연구해서 확실히 알아야 한다. 우린 아프간 재건을 모든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했고, 다른 외국과 외교도 보호해야
한다. 특전단의 모토는 “de oppresso liber”이며 ‘압제로
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우린 우리 전우를 돕기 위해 죽는다. 이런 개념은 다른 어떤
것보다 우월하다. 우리의 자유를 위해 우린 우리를 지불한다.
미군병사들은 그렇게 기꺼이 죽으며, 싸우다 죽는다. 그게
우리가 군대에 복무하는 이유다. 내가 군에서 경력을 쌓은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미국의 자유를 보호하고,
우리 어린아이들을 도와 그들이 계속해서 자유를 누리게
하기 위해 싸운다. 그 거대한 정의를 위해 우리의 재능을
사용한다. 그거다. 그게 전부다. That was our mission.
That was my mission.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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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대구야비군 작성시간 14.06.24 영국군에 대한 설명 중에 사각형이란 아마도 방진(square)을 말하는 듯 합니다.
이 방진대형의 효과에 대해서는 '카르툼'이란 책에 잘 나와있지요. -
작성자지구정복군단. 작성시간 14.06.27 덕분에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몇가지 소소한 것들이 해소되었습니다.
좋은 글 협찬해 주신 P226님과 번역을 해주신 여단장님께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청허 작성시간 14.06.28 감사합니다..평소 궁금했던 그린베레의 운용철학을 사실적으로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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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엠알이 작성시간 15.10.13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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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숀튼국장 작성시간 21.09.05 부하들의 위치를 매일 암송한다는 부분은 인상적이었습니다.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