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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들의 수기

CIB도 없는 진짜 전투 DMZ...

작성자잇빨중사|작성시간12.10.31|조회수7,425 목록 댓글 21

 

이 글은

한국전도 아닌 한국 전투 이야기입니다.

 

제가 번역한 글 중에서, 이전과는 또 다른

새로운 글이군요. 한 번 읽어보십시오. 우

리의 생각보다 60년대 비무장지대 정말

살벌했습니다.

 

      잇빨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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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e Arthur Patton

 

 

                Rowlett, TX

 

 

 

 

 

"교전 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른 동료 얼굴에 공포가

 보이고, 나도 공포를 느끼고, 정말로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용기란 그걸 밀어내는 능력이다, 그리고 일어서, 필요

 한 것을 말하거나 그걸 해내는 능력이다."  - Dale A. Patton

 

 

[2006년 리니타 브라운이 전화로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입대 전]

 

내 이름은 데일 아서 패튼이고 텍사스 로렛에 살고 있다.

나는 1950년 2월 24일 미시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 때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내가 열한 살

때 자살하셨다.

 

아버지는 목수셨고 어머니는 근처 공장에서 일하셨다. 형 클

포드는 육군에서 4년간 근무했고 일찍 세상을 떴다. 다른

형 도날드는 내가 태어나기 전인 1948년 물에 빠져 죽었다.

난 미시건 주의 감독 하에 성장했고 주로 삼촌 집에서 지냈다.

 

고등학교는 졸업하지 못 했고 난 1967년 미 육군에 입대했다.

 

 

[입대]

 

1967년 7월에 입대할 때 내 나이는 열일곱이었다. 난 미시건 주의

보호관찰과 미시건 북부에서 탈출하고 싶어 입대했다. 난 내 인생

의 길을 가고 싶었다. 어렸을 때 삼촌한테 2차대전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삼촌과 친구들은 우리 할머니 집에 모여서 전쟁 경험을 나

누곤 했고 난 조용히 곁에 앉아서 이야기를 경청했다. 삼촌과 친구

들이 모두 육군이라 나도 육군으로 정했다. 삼촌 중 하나는 클럽 삼

촌은 해군으로 참전해 산호해 해전에서 전사했다. 우리 할머니는

three-star mother(자식이 세 명 참전한)이었고 하나는

gold star(전사자)였다.

 

디트로이트의 포트 웨인에서 150명이 모여 있는데 해병대 지원할

사람 없냐고 물었고 세 명이 손을 들었다. 입대 전 검사에서 점수

가 높아서 다른 주특기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난 보병을 택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행정병이 나를 쳐다보면서 눈알을 굴렸다.

누가 그랬다. “뭐 나라를 위해서 죽겠다 이런 거냐?”

 

 

[기초훈련]

 

사실 내 군 복무는 전에 이미 한번 있었다. 난 그 2년 전에 가출해

영원히 사라지고 싶었다. 데이빗 필립 레나드란 사람의 생년월일

과 사회보장카드를 손에 넣었다. 서류는 18세였지만 당시 난 15세

였다.

 

난 켄터키 루이지빌에서 입대신청을 하고 기초훈련은 포트 녹스

에서 받았고 난 앨러바마 레드스톤 병기창으로 발령받았다. 기

훈련 뒤에 난 집으로 돌아가 잠시 숨었고 결국 안트림 카운티 보

안관에게 잡혀 감옥에 갔다. 이야기를 했지만 잘 안 믿었고 결국

근처 헌병에 연락해 신원을 확인했다. 결국 불명예제대(허위입대

경력 취소)를 했고 다시 미시건 보호관찰로 돌아갔다.

 

결국 난 두 번째로 기초군사훈련을 받으러 켄터키, 포트 녹스로

갔다. 이번에는 착실히 했다. 훈련은 처음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이 당시 해병대 DI나 육군 교관들이나 대부분

베트남 참전자들이었고 정말 숙달된 사람들이었다. 체구도 좋았

고 아무 이유 없이 그냥 퍽 치거나 엉덩이를 걷어찼다. 매일 수

도 없이 팔굽혀펴기를 했다.

 

식기에 음식을 담으면 2-3분 안에 다 먹고 모두 나가야 했다. 그러

므로 앉자마자 무조건 마구 먹는다. 어느 날 옆 동료와 낮은 소리로

잡담을 하다가 DI 셋이 몰려오더니 우리를 식당 옆 쓰레기장으로 데

리고 가 거기서 먹게 했다. 다 먹자 그대로 쓰레기 더미에 우릴 던져

버렸다. 막사 밖 집합 명령이 떨어지면 교관이 문 앞에 서 있다가 맨

마지막에 나가는 사람 엉덩이를 정말 심하게 걷어찬다. 어느 날 내가

마지막으로 나가다 걷어차였는데, 그때 이빨 두 개에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규율은 강했고 모두 전쟁(베트남)을 위한 훈련이었다. 이에 저항하는

훈련생은 훈련소 외곽의 군기소대로 보내지는데 갔다 온 사람 모두가

너무 끔찍한 곳이라고 했고 우린 절대로 거기 안 가려고 했다. 취침박

탈도 훈련의 일부였다. 밤에 3-4시간 이상을 못 자게 했다. 정말 힘들

었다.

 

훈련소를 수료하자 루이지애나의 포트 폴크 보병학교로 가라고 명령

받았다. 거긴 베트남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뉴저지 포트 딕스로 가는

사람은 베트남을 안 간다. 난 베트남이 정말 싫었다. 난 항의했다. 사

실상 1968년 2월이 되어야 정식 18세가 되어야 파병이 가능하다는 것

을. 결국 포트 딕스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고등군사훈련 AIT]

 

포트 딕스의 고등군사훈련은 너무 거칠고 너무 벅찼다. 그러나

난 그걸 정말 즐겼다. 다른 병기를 훈련했고 기본훈련은 M-14

를 썼는데 난 아주 잘 쐈다. 최선을 다했다. 이 후반기 훈련장은

전술을 배우고 팀웍을 배우고 병기를 다루는 곳이고 동기들과

잘 협조해야 한다. 훈련은 8주로 강렬했다 이 훈련 동안 보병이

란 다른 인간을 죽이는 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기 죽지 않았다.

잘 했다.

 

그 훈련이 끝나자 난 일병이었고 다시 포트 베닝으로 가서 공수

교육을 받으라고 했다. 난 대신 정찰학교로 갔다. AIT보다 한 단

계 높았고, 독도법, 매복, 소부대 전술을 배웠다. 여기도 군기가

강했다. 우리 크래스는 101사단에 속해 베트남으로 가라는 명령

이 떨어졌다. 그래 좋다... 이제 전투를 경험하는 거다... 그랬지

만 난 좀 두려웠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우린 보충대로 가서

대기했다.

 

그런데 우리 크래스 대다수가 발령한 곳은 한국이었다.

 

“뭐? 한국? 왜?”

 

내가 한국에 관해 알고 있는 건, 내가 태어난 해에 전쟁이 일어났

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춥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성장한 미

시건은 그냥 추위 그 자체인 곳이다. (미시건, 미국 중북부 캐나다

와 국경을 마주한 5대호가 있는 주) 뭐하러 훈련을 받았나 싶었다.

내 삼촌 모두 2차대전과 한국전을 모두 경험한 참전자들이었다.

 

그래서 난 또 항의했다. 그러자 돌아온 말은 “입 닥쳐. 뭔 소리

하는 줄 너 알어?” 그가 설명했다. 베트남 대신에 한국에 떨어진

거라고. 베트남에 안 간다는 걸 알고 좋아서 난리 난 놈들도 있었

다. 난 한국에 가자마자 베트남에 곧장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3년간 복무에 서명했고 베트남에 정말 가보고 싶었다.

 

 

[Morning Calm]

 

한국으로 떠난 건 1967년 11월 말로 기억한다. 정말 오래 13-14

시간을 민간 제트기를 타고 날았다. 난 여전히 베트남에 갈 생각

뿐이었다. 그런 말을 하면 반응은 같았다. “병신.”

 

김포공항에 내렸다. 이런, 춥다. 제일 먼저 한 건 간염 예방주사

다. 그런데 당시 시험적인 주사였고 들것에 들려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왜 저러지?) 한 놈이 나오는데 눈이 쑥 들어갔다. 내가

들어가 보니 주사액이 골프공 부피다. 의무 관계자들이 모두 웃

는다. 그걸 맞자 현기증이 일어났다.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도 있다. 나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Z로 간다,"라고 웃으며 말하곤 걸어가 버린다.

 

“Z이 뭐야?” 우린 곧 그게 DMZ이란 걸 알았다. 난 뭐 상관

없었다. 중대에 배치받자마자 난 베트남을 자원할 생각만

했다.

 

보충대에서 며칠 있었다. 한국은 냄새가 났고 추웠다. 그러나

냄새는 여름이 최악이었다. 농부 모두가 빈곤층이었다. 한국전

의 여파는 안 보였다. 한국은 사방에 군인 천지다. 그때는 한국

인이 모두 군인 아니면 도둑놈이라고 생각했다. 두 경우 다

부합하는 경우도 있고.

 

2사단 23연대 3대대 C중대 3소대였다. 자대로 갈 시간이 되자

철모와 방탄조끼 소총과 실탄 한 클립을 준다. 흥미로웠다. 가

보면 알 거라 생각했다. 문산리에 있는 C중대 막사에 한밤중에

도착했다. 정말 수상했다. 누군가에게 우리가 지금 ‘Z’에 있냐

고 물으니 아무 말도 없이 웃으며 지나갔다. 우린 여전히 임진

강 남쪽이었다. 우리 중대는 이미 로테이션으로 전방에서 빠졌

고 몇 달 뒤에 다시 들어갈 예정이었다.

 

난 3소대 소총수였다. 소대선임하사는 보그스 중사로, 전투보병

기장(CIB)에 별이 두 개였다. 다시 말해, 2차대전 한국전 베트남

전을 모두 참전했다는 뜻이다. 모두 보병으로. 임진강 남쪽에 내

려온 중대는 정말 많이 걷고 파고 야전에서 지냈다. 언제나 북한

군이 내려온다는 그런 개념이다.

 

우리 소대는 임진강을 따라 수도 없이 야간정찰을 나갔다. 그걸

S.C.O.S.I.정찰이라 불렀는데, 임진강 남쪽 방첩정찰이란 뜻이다.

비무장지대는 강 건너 북쪽 아주 가깝다. 매일 진흙에 군화를 찍

으며 건너 온 나쁜 놈이 없나 살폈다. 야간 소등 이후 강가에 왔던

민간인 두 명이 거의 총에 맞을 뻔했다. 당시 한국에서 통행금지

이후 걸어 다니면 안 된다. 한국 전체가 밤 12시가 되면 불을 끈다.

 

이 시절에 저 북쪽 밤하늘에 예광탄이 날아다니고 폭발음이 들렸

다. 우린 ‘적’이란 통보를 아주 많이 받았다. 이들은 잘 훈련된 침

투자들이었다. 정보에 의하면 이들이 남으로 내려오기 전에 훈련

만 3년을 한다고 한다. 이들 중 31명이 청와대습격(Blue House R

aid)을 한 장본인들이다. 우린 그들이 침투했던 Blue Lancer 계곡

을 자주 수색했다. 그 청와대습격은 실패했고 모두 죽었다. 난

진짜 전쟁에 가기 위한 서류작업을 했다.

 

부대의 다른 임무는 DMZ 남방한계선의 벙커에 들어가 서는 근무

다. 많지는 않았으나 벙커에 들어가면 밤새 있어야 한다. 거기서

보면 또 북쪽하늘에 조명탄이 터지고 예광탄이 날아다닌다. 비무

장지대 안쪽 같았다. 그 철책은 낮에도 근무를 선다.

 

내 중대는 4월에 북쪽으로 올라갔다. 강의 북쪽은 민간인이 없다.

트럭과 지프에 지붕도 없고 지프 앞쪽에는 커터 같은 장치가 있어

달리다 인계철선이 걸리면 잘려져버린다. 막사는 남쪽과 비슷하다.

다만, 북쪽 막사는 얇은 양철판 오두막 같고 철조망이 매우 많으며

고가초소가 있다.

 

위에 날씨를 언급하지 않았는데, 음, 정말 겨울에는 비참하고 춥고,

여름에는 정말 비참하게 덥다. 비가 한번 오면 계속 내린다. 이 군대

시절 경험으로 하나 얻은 교훈이 있다 : 정말 추워도 날 괴롭히지 못

한다. 난 곧 따뜻해진다. 정말 길고 긴 밤을 추위와 싸워야 한다. 여름

에도 똑같으나 덥고 비가 온다. 참으면 곧 선선하고 건조해진다.

 

우린 DMZ을 정찰 섹터로 받았고, 그 일대는 우리 작전구역(AO)이다.

정찰은 25명이 나가는데 3일 밤낮을 작전하고, 그 다음 우리 중대 다

른 25명이 교대한다. 낮에는 다섯 명이 한 조가 되어 분산한 다음 우리

가 "Snoop'n and Poop'n"라 부른 주간매복을 하고 hammer and anvil

sweep을 한다. (차단조를 만들고 일대를 수색하는 것이다)

 

북한의 대형 스피커는 밤낮으로 울려 퍼진다. 우리 신경을 긁는 일도

한다. 스피커 방송에서는 특정 병사 이름을 부르고 가족 이름도 거명

한다. 한 명은 우리 중대였는데 내용이 이러했다 : "피츠버그에서 온

해롤드 로스 일병, 이런 여름밤에는 고향에 있는 아내 에블린과 아들

지미와 함께 같이 있고 싶지?"

 

이 정보는 매춘부나 다른 인물이 보충대에 있는 신상명세서를 훔친

것 같다. "찰리중대 로스 일병, 우린 당신이 DMZ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Tonight you die." 그 다음에 ‘죽음의 행진’에 관련된 노

래를 틀어준다. 오르간으로 연주되는 진짜 우울한 분위기의 노래다.

그런 시간이 흐르다 갑자기 비무장지대에서 교전이 발생한다.

 

푸에블로 호의 선장의 목소리가 밤마다 스피커에서 나온다. 그들은

미 해군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다 나포되었다고

말한다. 그와 승무원들은 구금된 지 꽤 된 상태였다. 내가 떠난 뒤에

풀려난 것으로 안다. 스피커는 선장이 스파이였다고 주장한다. 북한

군의 심리전이다. 우리가 모두 죽을 거라고 말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방송은 북한군 침투부대의 이동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역소음도

이유 중 하나였다. 꼭 한밤중에 그런 관심을 끄는 방송을 튼다. 우리

를 최대한 자극하려고 혈안이었다.

 

돌아보면, 참 초현실적인 곳이었다. 우린 사람을 사냥했으나 그건

전쟁은 또 아니었다. 나쁜 놈들은 원하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우린

오히려 DMZ을 제외하곤 좁은 공간에 묶여 있었다. 이건 마치 Old

West 같다. 내가 인디언을 찾아 죽이는 거다. 우리 정찰도 실제

이름은 hunter/killer patrol이었다.

 

우리 정찰은 Guard Post(GP)에서 시작한다. GP는 25-30명이 들어

가는 비무장지대 안의 강화된 요새 거점이다. GP들은 JSA(판문점)

을 제외하면 아군의 가장 앞쪽에 있는 거점이다. 필요하면 우린 추

가 탄약, 물, 증강병력을 GP에서 받는다. 추가적으로 말하면 GP는

우리가 원할 경우 북으로 도주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가깝다.

 

위장모를 쓰고 위장복에 많은 탄약을 최대한 가져가고, 모두 방탄

조끼를 입는다. 철책(Barrier Fence)이나 GP 그레디스(Gladys) 부

근부터는 반드시 그렇게 착용한다. GP는 성가신 일을 하고 우린

그나마 좀 돌아다닐 수 있다. 기본군장으로 따지면, 물이 든 수통

세 개, 3일치 C-레이션, 소총탄 기본 200발, 수류탄 4-6개, 크레모

어 2-3개, M-72 LAW와 M-60 예비탄약 등등.

 

정전협상에 따라서 비무장지대 안에서는 원래 자동화기나 포반원

이 운영하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 북한은 결코 이 규정을 따르지

않았고 이에 따라서 우리도 수칙을 엄수하지 않는다.

 

야간매복을 준비하면 우린 불필요한 장비를 그레디스 GP에 모두

내려놓고 추가 탄약만 더 휴대하고 위장을 한다. 그때가 되면 아드

레날린이 나오기 시작한다. 매복장소가 정해지면 팀을 쪼개 위장

매복장소로 이동한다.

 

어두워지면 원래 지정한 매복장소로 발길을 돌려 자리를 잡는다.

사소한 군기위반은 불가능한 장소다. 자리를 잡으면 시야를 조정

하고, 크레모어 깔고 매복지점 후방에는 조명지뢰를 설치한다. 가

장 위험한 시간이다. 모두 각자가 조심하고 준비해야 한다. 땀이

비 오듯 한다. 모든 게 끝나면 최대한 정숙을 유지한다. 완전한

준비가 끝나면 우린 기다리고, 보고, 듣는다.

 

모기의 습격이 시작된다. 군용 방충제를 사용하지만 오히려 거기

모기는 그걸 좋아하는 듯하다. 땀을 닦고 기다리며, 모기들이 몰려

와 윙윙거리다 물어뜯기 시작하면 정말 미칠 지경이다. 손바닥으로

몸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고 모두가 같은 상황이다. 매복에서, 우린

정숙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백여 마리 모기가 내 생살로 달려들

던 기억이 난다.

 

난 비가 오길 기도한다. 폭우가 내리면 그래도 모기는 좀 줄어든다.

비가 한번 내리면 정말 많이 온다... 진짜 많이 온다. 그러면 시야와

청음력이 떨어진다. 비가 오면 소변 보기가 편해진다. 우린 일어설

수 없고 잠깐의 휴식도 없다. 우리는 원하는 장소에 들어왔다. 비속

에서는 모든 게 씻겨 내려간다.

 

갑자기 우린 뭘 봤다고 생각하고 그게 뭔가 주시한다. 우린 우리

밖에 없다. 매복팀 동료들뿐이다. 무슨 소리 들은 사람 없어? 우

린 계속해서 어둠을 주시한다. 뭔가 움직인다. 우린 긴장한다. 스

타라이트 야간투시경을 가져왔으나 모두가 가진 게 아니다. 그러

므로 우린 기다린다. 우리 쪽으로 돌이 날아올 때도 있다. 그들은

가까이서 우릴 찾으려고 한다. 우린 그들을 씹어버리려고 수류탄

을 던지기도 한다. 기다린다, 기다린다, 계속 기다린다. 크레모어

격발기를 들고 인내한다. 누가 쏘면 그게 시작이다. 그러나 사격

군기는 정말로 중요하다.

 

어느 날 밤 우린 크레모어를 앞에 설치하고 그 밑에 (안전핀 빼고)

수류탄을 깔았다. 북한군은 우리 매복조의 이 크레모어를 잘 알며

‘훔쳐’가기도 한다. 설명을 하자면, 크레모어는 C4 폭약과 함께 강

철구슬 700개가 들어 있고 휘어 있다. Front라고 쓰인 곳을 적방향

으로 놓는다. (이 글자가 난 항상 웃겼다) 뇌관을 삽입하고 도전선

을 끌어와 격발기를 병사가 가지고 대기한다. 병사가 격발기를 누

르려면 격발기의 안전크립을 제끼고 눌러야 한다. 그러면 뇌관에

전기가 흘러 폭발한다. 쾅! 전방 50-60미터 안의 모든 게 죽는다.

후방도 20미터는 똑같다.

 

크레모어 조작자는 항상 도전선을 확인해야 한다. 누군가 크레모어

에 손을 대면 도전선 장력에 이상이 생긴다. 그러면 뭔가 이상함을

느끼게 된다. 하여간 그날 밤, 우리 왼쪽에서 움직임이 있었고 돌이

수도 없이 날아왔다. 그러나 우린 볼 수가 없다. 결국 밤은 지나가고

새벽이 되어 크레모어를 회수하러 나간 병사는 크레모어 방향이 우리

쪽으로 돌려져 있는 걸 발견했다. 설치한 수류탄은 그 옆에 안전손잡

이와 함께 놓여 있었다. 만약 크레모어를 눌렀다면 피해는 우리가 입

었을 거다.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 친구는 도전선 장력이 밤새 팽팽

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정말 은밀한 작은 놈들이다.

 

 

  한국 근무 당시의 글쓴이 사진... [1967년 임진강 남쪽 막사 3소대 막사(Hooche) 앞]

 

 

[The Zone]

 

철책은 말뚝을 박고 철조망을 원형으로 말아 쌓은 매우 높은 상태

인데,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에 쭉 설치되어 있다. 그 철책 남쪽

바로 아래에는 강화된 벙커와 참호선들이 철책을 따라 이어지고

24시간 지킨다. 각각의 부대가 자기 구역 철책을 매일 점검한다.

 

발자국을 잡기 위해 철책 인근 땅에는 갈퀴로 평평하게 갈아놓는

다. 벙커와 참호들 뒤에는 고가초소들이 있다. 그 뒤에 철책선 도

로가 철책과 평행으로 나 있다. 도로에는 주야로 무장지프가 순찰

한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반응군(QRF)이 철책문을 통해

비무장지대 안으로 빠르게 증원된다.

 

밤이면 서치라이트 지프와 탱크들, 4.2인치 박격포가 탑재된 장갑

차가 철책의 숲 지역을 순찰한다. 4.2인치는 화력지원과 함께 조명

탄을 쏴 준다. 사건이 생기면 서치라이트 지프도 사고지역을 비춰

준다. 벙커와 각 참호의 병사도 휴대용 조명탄을 모두 휴대하고 있

다. 철책경계는 정말 지루하다. 우린 다양한 섹터의 교전을 구경했

고 적색 녹색 백색 예광탄들이 난무했는데, 나 개인적으로는 정말

멋있었다. 여름에 철책 부근은 정말 환장할 정도로 덥다. 주간에는

참호에 50%가 들어가고 밤에는 100% 들어간다.

 

두 사건이 기억난다. 어느 비가 미치도록 쏟아지던 밤, 번개가

우리 오른쪽 크레모어 두 발을 격발시켰다. 정말 놀랐다. 한 번

은 내 오른쪽 벙커에서 카투사 병사가 M-60을 점검하는데 약실

에 한 발이 들어 있던 걸 몰랐다. 빵! 그 총알이 앞으로 나가 크

레모어를 설치하던 GI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그 GI는 벙커로 돌

아와 카투사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내 기억에 통신선으로

카투사를 묶어서 호송했다.

 

우린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우리를 Imjin Scouts라고

렀다. 비무장지대 임무 20회를 하자 Imjin Scout 마크를 줬

다. 누구나 그렇게 작전하면 마크를 준다. 상부에서 허락한

공식 마크는 아니다. 그러나 비무장지대는 넘나드는 우리에

게는 각별한 거였다. 우리가 ‘거기’ 있었다는 증표가 된다.

 

 

[Ambush on Mortar Hill]

 

1968년 7월 30일 00:48, 매복정찰조 25명에 포함되어 난 그레디스

GP에서 나왔다. 우리 중대장은 켈리 대위였는데, 이때 우리 남쪽

으로 침투하는 적을 발견해 죽이거나 사로잡는 게 임무였다. 우린

보통 주간에 5명으로 나누어 활동하며 침투로에서 매복을 한다. 그

날 밤 5인팀 두 개가 이른바 박격포 고지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속한 5인조는 박격포 고지 남동쪽에서 작전하고 자리 잡았다.

우린 Mayor's House 약간 북동쪽에 나가 있었다. 이는 우리 매복

팀의 퇴출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두 팀이 더 근처에 자리를 깔았다.

 

자정이 지난 직후, 박격포 고지에서 매복하던 팀에서 교전이 일어

났다. 총소리와 예광탄, 폭발음이 들렸다. 몇 분 만에 박격포 고지

에서 증원을 요청했다. 아군 부상자가 생겼고 북한군은 퇴각한 듯

했다.

 

우린 매복을 중단하고 다른 팀들과 무전으로 교신하고  박격포 고지

에서 모두 만나기로 했다. 우린 조는 박격포고지로 가는 남쪽 교차로

에서 다른 두 팀을 만났다. 내가 첨병을 맡았고 약 400미터를 더 가서

다른 두 팀을 만났는데, 이때 우린 교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너무 조심하지 않고 이동한 까닭이다. 북한군은 고지 측면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고, 그래서 증원을 요청했다.

 

우린 교전 팀 후방에 도착해 측면의 접근을 차단했다. 고프 일병이

우리를 고지 위로 인도했다. 강렬한 사격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었

고 북한군도 증원한 듯 보였다. 박격포고지에서 매복한 팀 부근에

도달했을 때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두 번의 폭발 충격으로 난

쓰러졌고 그때 난 그 폭발이 북한군 박격포가 아닌가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북한군은 우리에게 대전차화기를 사용했다. 그

은 낙하산으로 떨어지면서 코로 떨어지며 폭발하는 형태였다.

이게 몇 발 떨어졌다. 아침에 불발탄을 발견하고 알게 된 것이다.

 

적이 쏘면 우리는 최대한 강력한 집단 발포로 위력 응사를 한다. 북

한군이 곧바로 떠나지 않은 걸 보니 그 쪽에 부상자나 전사자가 발생

한 것 같았다. 평상시와 달랐다. 일단 교전을 시작한 최초 매복조를

향해 앞으로 나가 부상자와 전사자를 빼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이 매복지점 앞 10미터 정도를 나가서 북한군을

밀어내고 부상자를 끌어내려고 했다. 그게 북한군을 놀라게 한 것

같다. 우리는 수류탄을 던지고 엎드려 자동으로 놓고 좌우와 전방

을 향해 갈겼다.

 

그 전투 동안 정말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고 1분이 한 시간

같았다. 같이 간 두 명(길리암 일병과 노튼 일병)과 나는 이제 뒤로

이동해서 돌아가야 한다고 느꼈다. 우린 뒤로 물러나면서도 북한

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계속 쐈다. 어디선가 날아오는 적 총알은

아들었고 또한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난 매복지점 후방 풀밭에 누군가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KIA!...였다. 고지에서 매복하던 매복조 팀원인

리마르죽 (릭스) 상병이었고 내 친구기도 했다. 친구는 심하게

찢겨진 상태였다. 난 노튼을 고함 쳐 불러 릭스를 고지 남쪽 밑

으로 끌기 시작했다. 그 동안 릭스의 하의가 내려와 무릎에

걸려 버렸다.

 

그때 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난 정지해서 노튼에게 엄호하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튼은 서두르자고 응답했다. 난 릭스의 바지를

치켜 버클을 조여줬다. 바로 그때 우리 앞에서 어떤 자동화기가

발포해 우릴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북한군은 우리 최초 매

복지점까지 들어와 우릴 추격하는 것 같았다. 노튼은 나무 뒤에

숨었고 난 릭스 뒤에 엎드렸다.

 

보기에 북한군 몇 명이 우리 측면 가까운 곳까지 와서 쏘고 있었다.

난 릭스의 몸을 방패물로 응사했다. 사방에 총알이 난무하는 가운데,

난 총알이 릭스의 몸을 때리는 걸 느꼈다. 갑자기, 그레디스 GP의

로이스 스팍스 병장이 몇 명을 데리고 우리 후방에 나타났고, 엎드려

엄호사격을 했다. 이를 틈타 우리는 릭스를 후방으로 끌어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레디스 GP 안으로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동이 트자 매복지점을 수색했는데, 수도 없는 핏자국이 북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고지에 있던 5인팀 모두 당한 것 같았다. 북한군과

조우했을 때 우리 매복조는 측면에 위치한 상태에서 교전이 시작

됐다. 매복조 나머지는 다음 날 정오가 되어도 모두 발견되지 않았

다. (일단 확인한 건 KIA 1, WIA 2였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우린

매복조가 버린 장비를 수거해 비무장지대에서 나왔다.

 

사건 얼마 뒤, 난 육군공훈장 V device를 받았다. 주한미군사령관

직접 와서 세 명에게 훈장을 핀으로 꼽아주었다. 사령관은 매우

했다고 하면서 국가는 우릴 자랑스러워한다고 말했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었다. 그때 길리암이 느린 남부 사투리로 대답했다.

"More cold beer wouldn't hurt, Sir." 곧 병사 클럽에 추가적인

맥주 박스가 도착했다.

 

훈장? 왜 주지? 난 그저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사실 말은 동성훈장을 받아야 한다고들 했다. 그러

나 거긴 베트남이 아니라 비무장지대였다.

 

난 잠시 고민에 빠졌었다.

 

 

[Ever Alert]

 

그 박격포고지 매복 사건은 1968년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 중

하나였을 뿐이다. 난 박격포고지 교전 전에 이미 작은 사건 두

개를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런 강력한 교전은 처음이었다. 정말

진짜였다. 우린 더욱 조심했다. “서로 정말 잘 뭉쳐야 돼.” 

에서 꿈꿔왔던 영웅적인 상상은 자취조차 없었고 난 그저 진짜

전투에 발가벗겨진 상태였음을 알았다.

 

난 영웅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용기가 뭔지는 배웠다.

그 ‘용기’란 어떠한 처절하고 끔찍한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극복

하고 자신의 일을 할 줄 아는 거였다. 어떤 친구는 이렇게 말하

기도 했다. “Enough of this shit. This has got to stop."

 

한국전 당시 최고훈장을 받은 제임스 스톤 대령의 훈장 상신문구

이런 말이 있었다. “염병, 누가 저기 가야 한다면, 내가 간다.”

그때 난 그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내가 나를 영웅으로 봤냐고?

 

Absolutely not. 내가 안 죽은 건 하느님의 계획이 아직 거기까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달 동안 난 하느님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냥 오는 대로 받기로 믿었다. ‘참호 안에 무신론

자는 없다’... 정말 진실이다.

 

교전 동안 많은 게 일어났다. 다른 사람의 표정에서 공포를 읽었다.

나도 공포를 느끼고, 정말로 공포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용기란

일어서서 뭘 하는 것이다. 그걸 "Tombstone Courage"라고 말한다.

경험한 사람들은 안다. 그러한 영웅들은 죽거나 아니면 기적을 바라

야 한다는 걸. 모두 영웅을 꿈꿀 거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딴 거 버려

야 한다. 그냥 정신을 차리고 그 정신을 사용해야 한다.

 

[Tombstone Courage : 묘비 용기. 죽을 걸 알면서 나서는 용기]

 

 

1968년 여름이 최고조였을 때 우리 섹터에서는 적들이 우리 속을

뒤집어 놨다. 한 야간작전에서는 우리 팀과 5인인가 10인 팀이 같

이 들어갔다. 우린 가매복 진지로 갔다가 설정한 매복지점으로 방

향을 틀었다. 북한군은 물론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정

확한 위치를 몰랐다. 돌을 던지며 우릴 탐색해온다. 그 외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수상한 곳에서 매복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돌이 날아와 쿵 떨어진다. 바로 떠오르는 생각은 수류탄이나, 소

리를 내면 안 된다. 만약 위치가 발각되면 곧바로 총을 쏘고 원을

그리며 돌아 뒤에서도 칠 수 있다. 그냥 수류탄 핀을 뽑고 앞의 어

둠을 향해 던지면 될 것 아니냐... 하겠지만, 실제로는 어디로 던져

야 할지를 알 수 없다. 어디서 돌이 날아온 줄 파악할 수가 없다. 가

끔은 우리도 매복지점에 돌 모아놓고 같이 투석할 준비를 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이상한 곳이다.

 

[잇빨 주: 북한군 특수전부대원들이 냄새로 미군을 탐지했다...에 한 표]

 

그럼 얼마나 이상한건가 의문이 들 것이다. 1968년 9월에 우린 주간

에 정찰작전을 나갔다. 그런데 지프를 타고 가던 후커 소위가 갑자기

정지했다. 두 명이 더 타고 있었다. 그곳은 우리가 "Ambush Alley"

고 부르던 길로, 소위는 과거 전쟁 시절 파괴된 기관차를 배경으로 사

진을 찍으려는 거였다. 원래는 부산으로 가는 철도인데 끊겼고 그 철

도 양쪽을 우린 "road"라 불렀다. 그곳은 풀이 완전히 없거나 매우

적었다.

 

비무장지대는 한국전이 종료된 곳이다. 생각해보면 거긴 정말 아름

다웠다. 그 철도를 넘어서 더 가면 다 부서진 콘크리트 건물이 나오

는데 우린 "the Mayor's House"라 불렀다. 우리 작전지역 안이다.

그레디스 GP는 ‘십자로’라고 하는 곳 근처에 있다. 건물은 웅장하게

지으려고 했으나 한국전 당시 포탄에 의해 부서지고 골격만 남았다.

그리고 우리 그건 우리 독도법 참고점이었다.

 

그 Ambush Alley는 누구도 걸어서 횡단하지 않는다. 양쪽에 고지가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그레디스 GP에 차량으로 재보급도 하고 사람

도 타고 들어가고 나온다. 그럴 때는 작은 차량 행렬이 구성되는데

천천히 움직인다. 맨 앞에서 병사 두 명이 지뢰를 탐지하면서 나가

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차량행렬이 GP까지 들어가거나

나와서 비무장지대를 나갈 때까지 길 양편에서 엄호경계를 서주는

것이다.

 

우린 거기서 매복을 당한 적은 없지만 최적의 장소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후커 소위는 안전을 무시하고 두 명과 함께 행동했다. 그

행동은 오래 가지 못 했다. 무전 교신을 한 지 15분 정도 지났을 때,

갑자기 총성과 함께 폭발음이 들렸다. 우리가 그리로 달려갔을 때,

우린 지프와 사망한 GI 둘을 발견했고 둘의 철모와 총은 없어졌다.

우린 북한군을 추격했으나 - 아마도 세 명일 것-  결국 군사분계선

에서 정지했다.

 

우리가 강 북쪽에 들어가 비무장지대 작전을 하면 정말 시간이

없다. 자고 정찰하고 다시 정찰하고. 우린 3일간 주야로 정찰작

전을 하고 4일차에 철책 중앙통문으로 나온다. 그러면 트럭을

타고 막사로 간다. 이어 병기를 모두 닦고 몸을 씻고 잔다. 한 24

시간 정도 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정찰을 준비한다. 이어 트럭

을 타고 철책 중앙통문으로 가서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 강 북쪽

의 작전은 정말 진지한 임무다.

 

적을 지칭하는 말은 다음 중 하나다 : UI (미확인 인원), Joe Chink,

Joe, Gooks. 적은 3-5인 팀으로 나타나는데 적어도 3년 이상 훈련

을 받고 남으로 내려오는 작전에 나온다. 장비는 정말 최소화해서

휴대하고, 가끔 잡아서 보면 그냥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검은색

이다. (군장 안에 민간인 옷을 휴대하고 있다) 군인 신분이 될 만

한 건 하나도 없고, 남한 쪽 민간인 신분증이 여러 개 발견되기도

한다. 총은 주로 작은 기관단총을 주로 휴대한다 (PPS or PPSH).

 

검은색 조끼를 입고 거기에 예비탄약과 수류탄 등을 담으며, 모자

는 산악모 같은 걸(watch cap) 쓰거나 두건을 쓰기도 한다. 보통

한 30대로 보이나 나이를 판가름하기 힘들다. 화폐도 휴대하는데

한국 돈, 달러, 미군 군표도 가지고 있고 달러는 위조화폐도 있다.

잠이 오지 않게 하는 암페타민 계열 각성제 알약도 있고, 하여간

어떤 목적으로 남쪽에 가는지 가진 걸로는 판단이 안 된다. 그러

나 그들의 신체의 상태는 굉장히 훌륭하다.

 

비무장지대 기간이 끝나면 우린 그걸 ‘졸업’이라고 부르며 남쪽

으로 이동한다. 지프차 매복도 있었다. 운전병과 탑승자 모두가

사망했고 M-14 소총들과 철모는 그들이 가져갔다. 그건 그들이

기념품으로 가져가는 게 아니다. 고도로 훈련된 자들이라서

가져가는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추정하기에 적 작전조는 3-5명이 이지만 안전 호위조가

한 10명 정도 붙는 것 같다. 박격포 고지 교진 이후 우리는 알게

됐다. 보통 교전이 일어나면 그들은 쏘고 곧 퇴각한다. 그런데

그 때는 안 그랬고 교전이 너무 길었다. 전사자와 부상자를 데

리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게 확실하다. 뭐 그렇다면 성공이었다.

 

우리 측 전사자를 JSA로 운반해 갔는데, 한 장교가 말했다. "봐,

우린 남으로 내려오려는 한 명을 죽였다. 그들은 어떻게 했겠나?"

우린 시체를 끌고 갔을 거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흔적

은 없다. 나중에 한 명이 서울에서 잡혔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 간첩에 의하면 나머지 대부분은 총에 맞아 죽었거나

자살했다고 했다. 우리 미군이 잡은 건 없다. 그들은 정말 잘한

다. 우리가 그들은 존경할까? No. 우리가 무서워할까? Yes. 그

러나 그건 건강한 두려움이다. 그들은 한번 교전하면 마법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다시 총격전이 벌어지

고, 그때 동료 몸들을 끌고 간다. 우리가 느끼는 건 그들도 우리

와 같은 사람이라는 거다. 그러나 어떤 동기 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높다.

 

북한군과 친구가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난 남한 한국군과

도 친구가 된 적 역시 한 번도 없다. 우린 막사를 청소하고 세탁

을 해주는 하우스보이는 너그럽게 대했고, 우리에게 배속된 카

투사에게도 관대했다. 그건 우리 경험에 의한 것인데 한국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때 그들은 우리가 자기나라 땅에 있는 걸

바라지 않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염병할, 우린 한국 여성이라고는 돈을 주고 매매춘을

한 것뿐이고, 그렇게 우리 돈을 날렸으며, 그들은 우릴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리고 그 여성들을 연장자나 사람들이 모욕적

으로 대했다.

 

카투사로 온 병사들은 넉넉한 한국 가정 출신이다. 한국군은

그냥 하나의 거친 덩어리 같고 생활 자체가 험하다. 카투사 한

명이 우리와 정찰작전 도중 죽은 일이 있었다. 성이 최인가 그

렇다.

 

우린 적이 나타날만한 다양한 지형에 매복을 까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레디스 GP 남서쪽에서 15명이 table ambush를

했다. table ambush란 옆에서 보면 전방과(top) 양쪽 측면(legs)

를 모두 까는 매복이다. 이런 매복은 주로 도로나 산길을 매복

하면서 측면의 경계도 하는 형태다. 이 매복은 최소한의 숫자가

충족되어야 한다. 10명이 최상으로, 다섯 명이 전방, 좌우에

두 명씩, 그리고 후방을 한 명이 맡는다.

 

자정에 돌 던지기 탐침이 나타났고 이들은 수류탄 몇 발을 던져

대응했다. 그런데 이후는 조용했다. 새벽 4시경에 갑자기 우리

오른쪽에서 총격이 폭발했다. 난 테이블 매복에서 left leg에 속

북쪽으로 보고 있었고 그 왼쪽 leg의 3번이었다. 총격 후에

다시 조용해졌다. 날이 밝자 중앙을 맡고 있던 카투사 최가 쓰

러져 있는 게 발견되었다. 죽었다.

 

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매복선에서 앞으로 기어 나갔다. (아무

에게 말도 없이) 그런데 그가 다시 선 채로 걸어서 매복선 안으

로 걸어 들어왔다. 클리브랜드 출신 우리 아군 동료가 최를 쐈다.

 

기억해 보면 이렇다: (1) 매복 장소를 절대로 떠나서는 안 되며

만약 그러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알아야 한다. (2) 서서 돌아와서

는 안 되는 것이다.

 

비참한 일이 일어났다. 왜 그가 앞으로 나갔는지는 이해가 불가능

했다. 우린 북한군이 가까이서 우릴 탐색한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거기 있었다. 아마도 최는 적이 있을 거라고 나갔다가 발견을 못한

것 같다. 소변을 보러 나갔을 수도 있다. 우린 보통 엎드린 상태에서

몸만 돌려 싼다.

 

정찰에서 난 아주 많이 풀에 소변이 묻어 있는 걸 봤다. 왜 그가 앞

으로 나갔는지는 미스터리다. 우리가 그레디스 GP에 KIA를 하나 들

고 나간다고 했더니 그들은 북한군 시체라고 오인했다. 판초에 싸인

시체를 보고 GP에서는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였다. 그러나 안의 사람

을 보자 분위기는 돌변했다. 조사 결과 클리브랜드 출신 동료가 쏜 것

이 확실시되었다. 그는 감정이 씁쓸했다. 우리 육군에서 유족에게

보상금을 만들어줬다고 들었다.

 

 

비무장지대에서의 어느 날 - 1968년 8월로 기억한다 - 우리 10인

팀은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자리를 잡았다. 매우 쿨한 엘리스 병장

이 같이 있었다. 엘리스 병장은 베트남전 참전자로 야전에서 대단

한 지휘력이 있다. 그날 북한군 스피커는 또한 시끄러웠다. 난 엘

리스 병장에게 가서 대니 우리치(Urich)와 내가 가서 저 스피커 좀

잠깐 안 나오게 하고 싶다고 했다. 병장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난 아무 것도 모르는 걸로 하겠다.”

 

그래서 나와 대니는 군장을 가볍게 하고 부무장과 M-79를 들었다.

그리고 우린 이른바 Speaker Hill이란 곳으로 향했는데, 이는 잘못

하면 군사분계선을 넘는 거였다. 그 일대를 Twilight Zone이라 불렀

고, 그 Zone은 우리 작전구역에서 약 800미터 폭이었다. 거길 들어

간다는 건 사실 부대 내 위규행위다. 일대는 일종의 완충지대.

 

우린 스피커가 있는 건물과 스피커 무리가 있는 곳으로 약 300미터

기어가 M-79 세 발을 발사했다. 탄은 모두 대형 스피커에 명중했다.

우리 위치는 정확히 군사분계선 약간 남쪽이었다. 우린 정말 빠르게

거길 떠났고, 순간 양쪽에서 폭발적인 총격이 교환되기 시작했다. 적

은 우릴 쐈으나 정확히 어디 있는지 몰랐다. 우리가 돌아오자 팀에서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우린 그냥 또다른 하루였을 뿐이다. 스피커는

네 시간 정도 조용했다. 판문점에서 북한 대표가 이 문제를 꺼냈

다고 들었다.

 

[이 정도로 실탄을 소모하고 문책을 안 받을 정도라면, 당시

 비무장지대는 정말 준-전쟁 수준이었던 같다. 잇빨 주]

 

우리 중대장 켈리 대위는 베트남전에 두 번을 참전한 장교다.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우리가 비무장지대에서 교전이 발

생했다는 말을 무전기로 들으면 대위는 다음과 같이 송신한다:

 

"This Charlie 6, actual I WANT A BODY."

 

교전이 일어나면 중대자은 적 시체, 혹은 적 장비,

아니면 핏자국이라도 남기기를 바랐다.

 

한번은 중대장이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나에게 장비를 챙기고

약간의 주의사항을 말했다. 남쪽막사에 있다가 켈리 대위와 함

께 임진강으로 갔다. 난 무장상태였다. 지프는 임진강에 걸린

자유의 다리를 북으로 건넌 다음 강을 따라 서쪽으로 튼다.

그때는 무슨 일인지도 몰랐고 그냥 방향만 받았다.

 

우리가 정지한 곳은 이른바 게 섬(Crab Island)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였다. 그 섬은 임진강에 있는 진흙과 풀이 무성한 작은

섬인데 우리 작전구역 안에 있다. 우린 남쪽으로 가는 적 특수

부대원들이 가끔 거기 들어간다는 걸 느낀다. 가끔 들어가 보면

발자국도 찍혀 있고 그렇다. 그래서 우린 그 섬에 주야로 불시에

포격을 날리곤 했다. 포를 쏘면 강변 정찰대가 포탄 떨어지는 걸

관측한다.

 

밤에 보니 참 산뜻했다. 우린 거기서 앉아서 섬을 몇 분간

바라봤고 중대장은 시계를 계속 봤다. 늦은 오후였다. 중

대장이 말했다. “이제 곧.”

 

그리고 순간 쾅! 소리가 나더니 그 섬에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우린 섬에서 너무 가까웠다.

켈리 대위는 시가를 물고 있었다.

 

“패튼, 어때? 정말 아름답지 않아?”

 

"Yep, beautiful Sir. Beautiful."

 

어두워졌고 우린 라이트를 끈 채 빠르게 달려 돌아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참 이상하고 두려운 경험이었는데

아무 사고도 없었다. 중대장은 정말 어찌나 편안하던지.

포탄이 터지는데 중대장은 정말 편안하게 관람했다.

 

계산해보면 난 비무장지대에 총 네 달 며칠을 있었다. 로테

이션은 강 북에서 네 달, 남에서 네 달이다. 우리 한국 근무

13개월 내내 그랬다. 난 남쪽 강변에서 정찰을 하며 내 18세

생일을 맞았다. 67년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68년 추수감사

절까지 거기서 보냈다. 강변은 심지어 휴일에도 순찰을 한다.

휴일도 보통 날과 같았다. 고향 생각 많이 안하려고 했다.

 

가끔은 그레디스 GP 벙커와 철책 근무도 했다. 목재로 구조를

만들고 샌드백으로 보강한 벙커들이고 그 안에는 탄약 등 아무

것도 비치하지 않는다. 모두 병사가 휴대한다. 북한군은 정말

공격적이다. 철이 되면 벙커 라인에 있는 우리도 바짝 긴장하고

쏠 준비를 한다. 우리는 그들이 만든 미끼를 물고, 그러면 게임

의 시간이다. 참으로, 그건 게임 같은 거였다.

 

한국에서 비가 내리면, 그냥 계속 내린다.

 

[미국은 비가 어떻게 내립니까? 잇빨 첨언]

 

벙커는 배수로가 있어 좋고 바닥에 나무판이 깔려 있다. 그러나

벙커 라인 중간의 참호는 천장이 없다. GP는 관망탑 하나만 빼고

모두 지하로 내려가 있다. 우리가 이동을 해도 2미터 깊이의 샌드

백으로 보강된 참호선을 따라 이동한다.

 

한번은 다른 친구와 관망탑 근무를 섰는데 같이 바라보던 북한군

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상대는 자유의 마을 타워. 선전

에 많이 나오는 곳이다. 트랙터도 보이고 집들은 잘 지어졌는데

아무도 안 살고 소련제 차량만 원을 그리며 돌아다닌다. GP 근무

자는 매우 특별하게 선발된 사람들이다. 군사분계선을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정찰 때는 레이션만 먹는다. Red Cloud나 ASCOM 같은 큰 캠프에

들어가면 치즈버거와 프라이에 차가운 맥주를 먹을 수 있다. 한국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어떤 음식인지도 잘 모른다. Yo

ckomondoo(야끼만두 같네요. 혹은 송편. 잇빨 주)는 먹어 본 적

있다. 그건 맛있었다. 물론 우린 알콜과 같이 먹는다.

 

내 할머니는 나에게 항상 후르츠케이크를 보내주셨는데 난 그게

정말 싫었다. 우리 소대 카투사들에게 다 줬다. 우편은 최고였다.

내 인생에 쓸 편지는 군대에서 다 썼다. 밥 호프 쇼가 왔다는 소리

는 들었지만 우린 너무 북쪽에 있어 그림의 떡이다.

 

가끔 2-3일 휴가가 떨어지면 서울로 가서 이태원이란 구역을 간다.

기본적으로 거긴 참 좋고 재미있는 사람도 많이 만났다. 거기서 펜

탁스 스포트매틱 35밀리 카메라도 샀다. 당시 최고 카메라였다. 그

런데 business girl과 하룻밤 잤더니 카메라가 사라졌고 아무도 몰

랐다.

 

이태원의 양복점들은 훌륭했다. 이태원만 가도 재미있었다. 이런

생각이 든다. "country boy goes to the city." 서울에 갈 때는 civvies

(civilian clothes)를 입는다. 한번은 서울의 ASCOM 대형 막사에서

하루 이틀 머무는데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고등학교 동창 마브

월러였다. 이런!... 부상자 상태였는데 이후는 모른다.

 

한국의 가장 큰 사업은 매춘이었다. 임진강 북쪽엔 민간인이 없다.

그러나 강 남쪽에는 많은 매춘부들이 있었다. 남쪽 막사 정문으로

걸어 나가면 꽤 많은 숫자가 거기 서 있다. 거기 정문에 같이 근무

서는 한국군 헌병이 포주다. 우린 정문에서 손가락으로 여자 하나

를 선택한다. 그 여성들은 막사로 데려갈 수 없으나 병사/부사관

클럽은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 1인당 3-5달러다.

 

한국에 도착해 받은 교육에서 매춘부로부터 각종 끔찍한 질병을

얻을 수 있다고 배운다. 우리 중에 임질 매독의 경험자는 없었다.

일부는 정상적인 한국여성을 사귀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그 매춘

부들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정말 슬픈 일이다. 일부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데려가기도 했다.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한다.

 

난 한국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 갑 정도 피웠다.

(1972년 끊었다)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담배 맛이 죽인다. 맥주

마시고 말보로를 피웠다. 포커는 전혀 안 했고 그냥 지켜보는 게

았다. 그때 막사에서 마약을 하는 친구들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비무장지대에서는 불가능하다.

 

문산리에 있는 고아원에 종종 가곤 했다.

 

하루는 길리암이란 친구와 같이 걸어서 가는데, 한 어머니가 달려

나왔다. 거기 상태는 끔찍했고 아이들을 보는 건 슬펐다. 난 당시

많은 돈을 줄 수도 없었고, 트럭이 달려가면 아이들이 뛰어와 사탕

이나 그런 걸 던져주곤 했고 아이들이 싸우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가 왜 그 고아원에 걸어 들어가게 되었는지 모른다.

길리암과 난 그 고아원에 많이 신경을 쓰게 됐다.

 

난 아이들을 진심으로 돌봤다. 가장 나이 많은 아이가 열넷이었고,

일부는 우릴 무서워했다. 그때 고아원에서 느낀 충격은 젊은 시절

충격 중에서 가장 컸다.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었더니, 그 어머니

(원장님)가 옷이 필요하다고 했다. 난 미시건에서 8학년 선생님을

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 설명했다. 옷 22박스가 도착했다. 크기도

다양했다.

 

트럭으로 실어다 고아원에 주었다. 크리스마스 같았다. 정말 마음이

따뜻해지는 광경이었다. "cold infantry heart"를 흔들었다. 미시건 주

로고가 박힌 스웨터를 입은 아이와 찍은 사진이 지역 신문에 났다. 그

때 난 다시는 트럭에서 아이들에게 뭘 던지지 않기로 했다. 난 내가

떠날 때까지 도우려고 노력했다.

 

 

공포의 표정은 매복에서 동료 리즈가 다쳤을 때가 떠오른다. 새벽

2-3시 경에 갑자기 교전이 폭발했다. 전형적으로, 우리 앞에 움직임

이 있었고 크레모어를 터트린 다음 1분 동안 mad minute으로 퍼부

었다. 그때 난 나무들 사이에 한 그림자를 봤고 그들은 응사와 함께

수류탄들도 우리에게 투척했다. 적은 잠시 왔다 갔다 했고 탈출하려

하는 것 같았다. 우린 그레디스 GP에 차단병력을 북쪽으로 깔아달

라고 했고 리즈를 후송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리즈는 머리 오른쪽에 파편상을 당했다. 상처는 커 보이지 않았

으나 피가 엄청 흘렀다. 갑자기 모든 게 정말 조용해졌고 동이

터왔다.

 

그때 문득 오른쪽을 보니 전입 온 지 얼마 안 된 신병이 엄청나게

겁이 난 표정으로 엎드려 있었고 손에는 수류탄을 잡고 있었다. 핀

은 뽑혀 있고 안전손잡이(spoon)는 같이 쥐고 있었다. 내가 “야!”

하고 불렀으나 아무 말도 없다. 그래서 내가 기어가 “이리 내!”라고

말했으나, 녀석은 마치 외국어라도 듣는 것처럼 이해를 못 하는 듯

멍했다. 공포로 완전히 굳어 몸이 꿈쩍을 안했다. 난 수류탄을 그의

손에서 꺼내 앞으로 던져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녀석은 교전이 시작될 때 수류탄을 꺼내 그렇게

내내 들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지금도 기억난다. (입은 벌어지고,

눈을 크게 뜬) 그는 보병 체질이 결코 아니었고 소대에서 내보내져,

그레디스 GP에서 통신병으로 무전기와 유선을 점검하는 일로 전환

되었다. GP 장도 처음에는 정찰에 데려나갔을 것이다. 그의 상태를

보고 아마 뺀 것 같다.

 

한국에서의 근무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전쟁

을 제외한 모든 해외파견지 중에는 가장 힘든 곳이었다. 거긴 에어

컨도 없고, 차를 몰 수도 없고, 미국 소녀(round eyes)들도 없고,

어디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잠을 충분히 잘

수 없었다. 난 정말 자고 싶었다. 다시 미국(The World)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다른 당시 말로 표현하면 미국은 ‘The Land of the

Big PX’였다. 게다가 진짜 여자들도 사방에 깔려 있고.

 

 

[Going Home]

 

내 소대선임하사 보그스 중사는 전투보병휘장에 별이 두 개로

2차대전/한국전/베트남전을 경험한 사람이다. 중사가 군대 경력

을 쌓고 싶냐고 나에게 물었고 난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말했다.

 

"그럼 이 염병할 보병에서 나가서, 니가 원하는 걸 찾아봐.

민간사회에선 자동화기를 든 미친놈을 바라는 곳이 많지 않아."

 

그의 말이 옳았다. 이 비무장지대의 경험을 통해서

처음으로 난 군대를 나갈 생각을 하게 됐다.

 

1968년 12월 본토 순환근무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때 난 남쪽

막사에 있었다. 로테이션이 30일로 짧아졌다. 모든 귀국예정자

(short-timer)들 달력은 - 주로 여자 달력 - 날짜를 매일 펜으로

긋는다. 이때 며칠 정도 남은 귀국자들은 short-timer stick이란

걸 짚고 다녔다. 막대기 한쪽 끝에는 50실탄 탄피를 끼고 다른

한쪽에는 50탄두를 박은 지팡이다. 그때 내 다음 명령지는 헌병

학교 입교였다. 떠나는 날 눈보라가 몰아쳤다. 당시 베트남 참전

요구서는 반려된 상태. 마지막으로 의료 검사를 했다.

 

동료들과는 맥주와 악수로 끝냈다. 그리고 떠났다. 트럭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가서 노스웨스트 오리엔탈을 타고 시애틀로 날아

갔다. 집에 돌아와 1968년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그리고 몸이 정

말 아팠다. 그 이후로 마시고 여자친구와 놀면서 지내며 가까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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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난 데일 패튼은 이후 조지아 주의 헌병학교를 수료하고

버지니아 기지에서 근무했고, 단기 임무로 베트남 사이공으로 가

몇 달간 헌병으로 근무했고, 이후 다시 한국으로 발령이 나서 헌병

주특기로 서울 주변 산에 있는 호크 미사일 기지 방호 임무를 수행

했다. 1971년 12월에 육군에서 제대 해 루이지애나 유전에서 일하

다, 1977년 경찰 사관학교에 들어가 졸업하고 1997년 은퇴할 때까

지 교통사고 감식반에서 일했다. 그 동안 두 번의 결혼을 해서 각

처에게 아들과 딸을 두었다.

==================================================

 

 

[Final Reflections]

 

- 주로 한국의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

 

나는 PTSD 증상이 있었고, 1998년 의사는 정확히

그 증상이 있음을 선언하고 육군에 통보했다. 그

증상은 각 개인마다 다르다.

 

한국은 베트남과는 스케일이 다르지만, 전투는 전투였다.

내 베트남 경험은 말해줄 것이 없다. 의사도 모두 베트남

만 질문한다. 한국은 물어보지도 않는다. 임진강 스카우트

시절에 나 자신은 몰랐지만 정신적인 내상을 입었다.

 

한국은 전투보병참전기장(CIB)도 안 나온다. 내가 갖고

싶던 기장이다. 한국에 관련된 군 단체들은 대부분 한국

전 참전자 단체다. 이 한국과 비무장지대 작전은 거기

있었던 사람 외에는 거의 모르고 관심을 가질 수조차 없다.

 

난 우리 소대이자 친구였던 릭스 상병을 여전히 기억한다.

릭스 상병은 한국에서 아이가 태어났으나 이후 그 여성을

보지 못 했다. 1980년대에 난 DMZ veteran들을 찾기 시작

했다.

 

많은 GI들이 하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뭘 하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다."

 

릭스 상병, 다시 말해 마이클 리마죽 상병은 1968년 7월

30일 박격포 고지 매복작전에서 전사했다. 난 그와 가까

운 친구였다. 한국에서 릭스의 딸이 태어났으나 여성과

딸은 어떻게 됐는지 몰랐다. 혹시 딸을 만난다면 아버지

를 자랑스러워해도 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죽을 당시

24세 정도였다. 상병의 사체는 고향인 필라델피아로 보

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나 결국 내 동료 데이빗 벤보우가

상병의 딸 미키를 찾아냈다.

 

2006년 워싱턴의 DMZ Vets 행사에서 릭스 상병의 딸

미키를 만나 전투보병배지, 2사단 마크 임진강 스카우

트 마크, 23연대 흉장을 전달했다. 우리 모두 릭스 상병

딸을 보자 감정적으로 흔들렸다. 미키는 이제 세 명

의 ‘삼촌’을 얻었다. 헤어질 때 우린 미키가 사라질 때까

지 계속 쳐다봤다. 릭스가 봤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나에게 밀려들었다. 우린 모두

눈물을 흘리며 미키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공유했다.

미키의 아버지이며, 남자였고, 군인이었던 그를 기억한다.

 

사람들이 예상도 못 하고 추측도 못 하는

상황과 장소에서 잊혀진 그를 말이다.

 

 

 

아래는 글쓴이와 임진강 스카우트 동료들이 릭스 상병의 딸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양복이 글쓴이.

 

 

글쓴이와 손자손녀들. 글쓴이는 두 번 결혼했다. 한국 근무가 초혼 실패의 원인이었다.

 

 

    

 

 뭐 군사 지식이란 게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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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올드보이 | 작성시간 12.10.31 적이 설치해 놓은 크레모아의 방향을 바꿔 놓기나 적진을 향해 돌을 던져서 위치를 파악하는 은밀한 작은 놈들? 대단했네요... 한국군 작전지역에서도 베트남에서 실전을 경험한 병사들이 휴전선에 투입되면서 부터 완전하게 은밀한 작은 놈들을 제압할수 있었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 답댓글 작성자엠쥬 | 작성시간 12.11.01 베트남 참전이라는것이 전술 교리 전략전인면에서 큰 역활을 한것같습니다
    어릴적 기억입니다 당시 5특전단 출신 미군인데 베트남에서 macv-sog출신입니다 사진속에
    가슴흉장에 베레모해골을 봤는데 이제 보니 sog출신였던것같아요 그래서 소그에 관심을갖게됬죠 그후
    한국 지오피에서 근무했는데.. 우리동네 합기도장에서 무술배우더군요
    어떻게 알았냐면 여단장님 월남전관련 정보에서 마크를보면 당시 휘장들과 우리집에서 월세살았는데
    당시 저에게 사진을 무척많이 보여주시고 아버님과 대화를 많이 나누셨답니다
  • 작성자대구야비군 | 작성시간 12.11.01 그동안 비밀로 취급되어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사실상의 교전상태였다는...
    내무반에서 자던 병사들이 목이 따였다는 것은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50년대 말의 국회 국방위원회 회의록에서도 등장하더라는...
    어쩌면 휴전협정은 제대로 지켜진 날이 단 하루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신간코너의 '군사분계선과 남북한 갈등' 참고하시라는...
  • 작성자이글 | 작성시간 12.11.07 전 이사람과 시간만 달리해서(전 83년~85년)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사람입니다.(미2사단 23연대 1대대 CSC(combat support company) ReconTeam(수색소대)에 있었습니다.
    저때도 DMZ에 순환근무(2월부터 4월)가 있었고 수색, 매복도 했었죠. GP이름은 생각이 않나는데 GP도 들어가고
    했었습니다. 물론 저때랑은 양상이 많이 다르지만 어느정도 긴장감은 있었습니다.
    한국에 파병된 미군입장에서 본 시각이 저로서는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전 현재 미국에서 사는대 여기에선 군대에 있었다고 하면 매우 존중해 주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콜로라도라 그런가...
  • 작성자도처리 | 작성시간 16.02.02 67년이면제가 초딩4학년때, 68년 1월 김신조가 미군과 한국군 경계 지역으로 남파했지요. 그시절 기억은 비가 오면
    군인들이 밤에 길옆에 매복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무장공비가 넘어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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