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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전쟁

FROM KOREA TO VIETNAM, WEST POINTER

작성자잇빨중사|작성시간24.07.21|조회수484 목록 댓글 1

 

 

FROM KOREA TO VIETNAM,

WEST POINTER

 

 

 

by 존 하워드

 

 

West Point Military Academy에서 도열한 생도들 모습

 

찰스 루이스 버틀러는 웨스트포인트를 195066일 졸업했다. 버틀러가 졸업한 기수의 보병 주특기는 197명으로, 보병 동기 모두 한국과 베트남에 참전하게 된다.

 

1972330, 게릴라 전술로 일관하던 북베트남은 처음으로 전통적인 침공으로 남베트남을 노린다. 4월 중순이 되자 북베트남이 남베트남 침공에 동원한 규모는 14개 사단, 26개 독립 보병연대, 탱크 1,200대에 달했고, 포병연대와 공병대대들도 부속으로 붙어 나타났다. 전례가 없는 공격.

 

이 침공의 북베트남군은 베트남에서 볼 수 없었던 대규모 T-54 탱크를 동원했고, 소련이 이스라엘과 전쟁에 중동 국가를 지원했던 AT-3 Sagger 대전차미사일까지 보급되었으며, 어깨에 견착해 발사하는 열추적 SA-7 미사일까지 등장한다.

 

DMZ에서 가까운 꽝 트리 지역에 격전이 불타올랐고, 사이공에서 약 100km 떨어진 중부 고원지대 안 록에서도 일어나 도시 콘텀(Kontum)을 위협한다. 미국 언론은 이 북베트남 침공을 성스러운 부활절 첫날 벌어졌다 하여 부활절 공세로 언급한다. 이 부활절은 남베트남 인구에 상당한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성스러운 날이었다.

 

내 베트남 기억으로, 1960년대 초에는 지상에서 싸우는 미군이 월남군 고문관인 소수였다. 이후 미 지상군의 대대적 파병이 있었고, 베트남 자력화 정책에 미군 지상군이 철수하면서 베트남 지상에 미군은 고문관들만 남았다. 그 고문관 중 한 명이 월남군 21사단 31보병연대 고문관인 찰스 버틀러 중령으로, 나는 그를 19725월 둘째 주에 만났다.

 

소령이었던 나는 베트남 공수사단 6공수대대 고문관이었다. 내 소속 공수대대와 버틀러 중령의 31연대는 안 록에서 크게 당하면서 병력이 재편성되어 붙었고, 안 록은 빈 롱 주의 주도로, 우린 안 록 남쪽 25km 거리에 있었다.

 

나는 고문관 이전에 101공수사단 소속으로 베트남에 1년 참전했고, 고문관 훈련을 받지 않았다. 19721월에 명령을 수령해 4월 남베트남에 다시 들어간다. 나는 명령을 받고 포트 브레그의 월남어 과정과 고문단 훈련을 요청했지만, 워싱턴의 인사장교는 두 다 거절하고 그냥 베트남으로 가란다.

 

사이공 MACV 소속으로 되어 있어. 일단 가!”

 

그때 생각했다 : 어떻게 인사 배치 장교가 베트남을 이렇게 모르지? (미 지상군 철수로) 내가 소령으로 지휘할 부대도 없고, 이건 당연히 고문관이란 소리 아냐? 내가 무슨 참모 경력이 있냐고!’

 

찰스 루이스 버틀러는 1963년 월남군  9사단 고문관으로 임무를 수행했고,  그 시기 남베트남 대통령 느고 딘 디엠 대통령 암살과 케네디 대통령 암살을 경험하며 베트남전이 격랑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목격했다. 버틀러는 군에서 은퇴하는 대신  1971년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걸 선택한다 .

 

찰스 버틀러는 참전경력이 상당한 군인이다. 한국전쟁에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하고 1963~64년 동안 베트남에서 군사고문관을 했다. 생각의 원천인 지식이 풍부하고 전쟁의 큰 그림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버틀러 중령과 논의하면서 배운 게 참 많고, 그로 인해 내가 아직도 땅을 딛고 서있는 것 같다. 겸손한 성격이라 한국전쟁에서 뭘 했는지도 몰랐다.

 

찰스 루이스 버틀러는 육군사관학교 1950년 졸업반으로, 졸업생 670명이 506월 졸업했다. 당시는 평시였던 관계로 보병 주특기 임관 소위는 버틀러 포함 197명이다.

 

그런데 졸업식 19일 뒤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고, 미국은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전쟁에 끌려간다. 2차대전 끝나고 국방성은 대규모 축소되어 파리가 날리다 날벼락을 맞는다. 당시 부대들은 빠르게 해체되었고 군대 예산도 급격히 삭감되어 군대가 빈 깡통이었다. 그래도 북한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일단 보내야 했다. 예상치 못하게 1950년 웨스트포인트 졸업생 다수가 한국 파병군으로 급파된다. 버틀러도 그 무리에 있었다.

 

신혼이었던 버틀러 소위는 아내 조안과 이별하고 820일 수송선에 오른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밑을 지나고, 버틀러 소위는 보병 3사단 7연대 F중대를 받았다. 사단이라곤 하나 전투력이 심각할 정도로 사단급 이하였고, 보병 위관장교도 모자랐다. 웨스트포인트 졸업생들은 사관학교에서 받은 군사훈련이 고작인 상태에서 전장으로 간다.

 

인천 상륙과 반전까지는 다들 아는 것, 195011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2단계 한국전쟁이 된다. 엄청난 중공군에 놀란 맥아더 장군은 38도선 이하로 전 병력 신속하게 퇴각을 명령한다. 이때 3사단은 장진호에서 나오는 미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 퇴각을 엄호한다. 장진호에서 흥남 항구로 오는 축선을 맡은 것이 버틀러 소위의 3사단이다.

 

(: 유명한 장진호의 해병 1사단은 남하하다 미 육군 3사단을 만나면서 비로써 탈출에 성공했단 걸 실감했다.)

 

버틀러 중령은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의 사단이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해병 1사단과 육군 7사단을 엄호했고, 소속된 태크스포스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본인이 두 번이나 직접 탱크 포탑에 올라 기관총을 쏴 엄호사격했고, 이 공으로 (최고훈장 바로 아래인) 수훈십자장을 받았다.

 

기록을 보면 : 19501215, 버틀러 소위의 소대와 탱크 다섯 대로 구성한 긴급 편성부대로 포위된 아군부대 구출에 나섰다. 이 소 구출부대 이야기는 중령이 어쩌다 조금 말했었다. “갑자기 앞에 S-자 급커브가 나타났는데, 도로 양쪽 산에 중공군으로 정말 버글버글해. 첫 총알은 팔에 맞았고 두 번째는 사타구니 맞았어.”

 

총에 맞았지만 걸을 수 있었던 버틀러 소위는 부상자를 탱크 위에 얻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선도 탱크에 올랐다. 아군 구출 작전은 고사하고 자신 태스크포스의 생존 문제로 변했다. 개미 떼 같은 중공군을 뚫고 아군에게 돌아가야 했다. 소위의 부상도 만만치 않았지만, 버틀러는 탱크 포탑의 기관총을 잡아 엄호사격하기 시작한다.

 

탈출에 성공한 버틀러 소위는 일본으로 후송되었고, 3개월 치료 후 한국으로 복귀한다. 그때 수훈십자장이 내려왔다.

 

(잇빨 주 : 셔먼 탱크 포탑 위에 마운트로 세운 기관총은 탱크병이 해치에서 몸만 내밀고 쏠 수가 없다. 해치에서 몸만 내밀어선 팔이 닫지도 않는다. 셔먼 탱크 포탑의 50기관총은 누가 포탑 뒤에 서서 잡고 쏴야 한다. 포탑이 작은 구조상 어쩔 수 없다. 포수와 조종수가 쏘는 30기관총에 더해 화력 강화용 50기관총 장착이다. 탱크가 이목을 끄는 전장에서 셔먼 탱크 포탑 위 기관총 사격은 무서운 일이었는데, 꼭 필요할 때 전차장이나 장전수가 나가서 쏘거나, 보전으로 작전할 때는 보병부대에서 기관총 사격이 가능한 사람이 지휘관 지시로 탱크 뒤에 붙어 따라가곤 했다.)

 

 

TO VIETNAM

 

12년 후인 1963년 가을, 버틀러는 월남군 9사단 고문관으로 베트남에 간다. 작전구역은 메콩강 삼각주. 이 삼각주는 남베트남의 엄청난 쌀이 나오는 심장 같은 농업지역으로, 이 일대에서 당시 남베트남 쌀의 2/3가 나왔다.

 

1953년 남베트남은 엄청난 소용돌이였다. 느고 딘 디엠 대통령은 늘어나는 공산주의 폭동을 못 막았고, 정권의 대중 지지가 늘지도 않았다. 가톨릭 신자였던 디엠 대통령은 종교의 자유를 박해해 위기를 자처했고, 불교도들도 폭동을 일으켜 백주대낮 도로에서 승려가 자기 몸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벌어졌다. 폭동의 요구를 거부한 디엠 대통령은 더 강한 저항에 직면하면서 케네디 대통령과 비슷한 운명으로 함께한다. 미국 정부의 전적인 지원을 받던 디엠은 미국 정황에 불안했고, 이때 사이공에서 ‘JFK 정권이 교체될 것이다.’ 조용히 말이 돌았다.

 

장군들은 공산당과 싸우는 것보다 폭동 진압하는데 시간을 더 썼고, 공산당을 막으려 배치했던 월남군 병력을 데모 막으려고 빼 온다. 월남군은 주둔지에서 나가지 않아 지역 공산당 세포들이 더 위력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버틀러 소령은 좌절했을 것이다. 소령은 적과 상대하려고 베트남에 온 사람이다. 월남군에게 열심히 군사고문을 해도 효과가 미미하다. 그동안 디엠 정권은 미국 정부로부터 돈과 군사원조를 받았는데, 하루에 1백만 5천 달러가 베트남으로 들어갔다. (현재 환율로 하면 하루에 1,500만 달러다.)

 

캐네디 대통령이 텍사스에서 암살당하고 부통령인 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19631122일 텍사스 달라스 Air Force One 기내에서 제36대 대통령 선서를 했다.

 

린든 존슨 오른쪽에 재클린 케네디 영부인이 서 있다.

 

1963111, 월남군 총사령관 두옹 반 민 장군이 사이공 대통령궁을 공격한다. 디엠 대통령과 동생 누는 탈출해 사이공 중심 중국인 구역에 숨었다. 다음 날 쿠데타군에게 투항했고, 반 민 장군은 즉결 처형을 명령한다.

 

디엠 대통령이 살해되고 3주 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고,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불투명해진다. 그러나 곧 존슨은 명확해졌다. 동남아시아를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 1949년 마오쩌뚱이 중국을 공산화하면서 확산하고 남하하는 ‘lost Vietnam’을 막겠다는 의지. 월남 장군들은 안도의 숨을 뱉었다.

 

쿠데타에 성공한 반 민 장군과 군사혁명위원회는 포고령을 내리지만, 정권 장악에 집중하면서 공산당 반군 규합과 추세에 신경을 못 쓴다. 그러자 군사혁명위원회를 무너트리겠다는 취지의 폭동이 1964년 훨씬 강하게 나온다.

 

버틀러 소령은 메콩강 삼각주 월남군을 군사고문 하면서 명성이 높았다. 소부대 지휘관부터 다양한 경험이 컸다.

 

 

이 시기 버틀러 소령은 사이공의 회전문이 거칠게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주목한다. 월남 정치인과 부유층 가문들이 군부와 밀접해지기 시작하고,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진급과 지휘관 자리를 얻는다. 버틀러 입장에선 이런 두 가지 부류 장교들이 부대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두 부류 모두 군대를 질적으로 하락시킨다. 19649월 버틀러의 참전이 끝났을 때 월남군 하향화 소용돌이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고, 그 결과 미 지상군이 1965년 봄부터 여름까지 들어오게 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버틀러는 중령까지 진급하고 은퇴를 고민한다. 나머지 옵션이 있다면 베트남에 다시 가는 것. 버틀러 중령은 19719월 베트남으로 돌아온다. 다시 메콩강 삼각주의 월남군 21사단 고문관. 사단은 메콩 삼각주 최남단 책임인데, U Minh 숲이라고 베트콩들 해방구 같은 곳이 있었다. 그래도 월남군은 일대를 잘 틀어막고 있었고, 개량된 월남군 모습에 버틀러 중령도 기뻤다.

 

21사단 고문단장인 로스 프랭클린 대령은 학자이면서 전설적인 전사로 베트남 참전을 여러 번 했다. 미국 대학교에서 국제관계로 박사까지 받은 사람이며 프랑스어도 유창했다. 프랭클린과 버틀러는 웨스트포인트 동기였고 서로가 깎듯이 존중했다. 둘 다 한국전쟁에서 수훈십자장을 받았고, 한국전쟁 후에는 포트 베닝 보병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다. 프랭클린 대령은 버틀러 중령을 부지휘관처럼 생각하면서 월남 사단의 정보참모와 작전참모를 각별히 교육해 주길 바랐다.

 

21사단 전투지원팀 소속 버틀러 중령은 초급장교들의 멘토가 되어 명성이 자자했다. 에드 디보스 대위는 첫 파병으로 33연대 보조 고문관으로 베트남에 왔는데, 다행히 시야에 버틀러 중령이 있었다. 디보스 대위는 7112월 도착하자마자 버틀러 중령을 찾아가 무수한 질문을 퍼부었다. 버틀러 중령은 철저한 충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디보스 대위는 부활절 공세 전투에서 은성훈장을 2개나 탄다. 디보스는 나중에 쓴 책에서도 버틀러 중령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버틀러는 놀라운 능력을 전수한 사람이다.

 

필자. 소령으로 광 트리에 있는 월남군 공수사단  6공수대대 고문관을 했다 . 1972 년 .

월남군 21사단 임무는 197247일 돌연 변화한다. 느구옌 반 티우 대통령은 군사 상황 회의를 끝낸 후 남베트남 중부 국경 도시 록 닌이 공산군에게 넘어가기 직전이었고, 다음 북베트남군 목표는 안 록이 분명했다. 안 록까지 넘어가면 사이공으로 오는 길 100km에 막을 병력이 없다. 결국 티우 대통령은 메콩의 21사단을 이곳 빈 롱 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베트남 자주-전력화 프로그램으로 미군은 철수하고, 거대한 북베트남군이 전면전 공세로 내려온다. 표준 미군 고문단 숫자도 부족했다. 연대 고문관 지원팀은 원래 중령을 단장으로 대위 3, 부사관 2명이었는데, 당시는 월남군 연대에 미군 고문관이 많아야 둘이었다. 당시 미군의 인력 조달 자체가 힘들었다. 미군의 보충 병력 페이스가 참전자의 전투 전상, 의무 치료를 따라가지 못했다. 질병까지 포함해 1년 참전을 못 끝내는 사람이 많았고, 결원 즉시 보내줄 사람이 모자란다.

 

자신 군 경력의 나머지를 적당히 공백으로 놔둬도 되는 상황에서, 버틀러 중령은 프랭클린 대령에게 31연대 고문관으로 자원한다. 버클러는 항상 총소리가 들리는 곳을 원했고, 프랭클린 대령은 버틀러 중령이 자신의 공백이 생겼을 때 사단 고문단을 인수할 차권자로 가장 신뢰했다. 월남군 사단의 모든 복잡한 문제에 대처할 버틀러만한 사람은 구할 수 없었다.

 

412, 21사단은 과거 미 보병 1사단의 주둔지였던 라이 케에 집결해 안 록으로 가는 13번 국도를 개통해 이동하려 한다. 북베트남군 7사단이 이 안 록을 고립시키기 위해 도로를 차단한 상황이고, 안 록은 북베트남군 5사단 9사단이 포위하고 있었다.

 

21사단은 야전에서 사단급으로 작전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메콩강 삼각주는 연대와 대대로 갈라져 작전하고 사단본부는 감독만 했다. 사단급 작전 능력은 검증되지 않았고 참모와 대규모 보급지원이 겉으로 구성만 돼 있을 뿐 능력이 불투명했다. 각 부대의 협동작전 능력도 부족하다. 월남 지휘관들은 미군 화력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고, 특히 이 B-52 폭격 없이는 부대 이동을 주저했다.

 

 

FACING HARDCORE NVA FORCES

 

게다가 21사단은 이전에 거대한 대규모 북베트남군과 만난 적이 없었는데, 그 적이 회피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강한 포병까지 전개한 상태다. 특히 북베트남군 130mm 152mm 곡사포들은 아군에게 major killer로 떠오른다. 21사단 병사들은 ‘go to ground’란 미군의 말을 ‘야전 출동이 아닌 글자 그대로 벙커를 제대로 축성해 땅 밑으로 들어가는 정도로 인식했고, 이런 품행은 지휘관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버틀러 중령이 가족에게 보낸 편지는 연대 지휘소 벙커에서 밖으로 나가 야전을 살피는 사람이 버틀러의 업무관계인 옥산 중령 한 명이라고 썼다. 오히려 버틀러 중령이 야전으로 병력을 점검하러 나갔고, 사격을 받는 중에 점검하는 일도 잦았다. 버틀러의 용감한 행동으로 은성훈장까지 받았는데, 월남군 지휘관이 할 일을 본인이 하니 병력에게 주는 효과는 적었다. 옥산 중령이 정상적인 작전하는 장교였다.

 

21사단이 13번 국도를 뚫고 가려고 발버둥 쳤고, 나도 비슷한 이유로 6공수대대장 딘 중령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중령이 날 유용하게 보는 이유는 내가 미군 항공기를 부르는 매개체여서다. 나를 중량 초과 수화물 정도로 여겼다. 그것 외에는 미군이 충고하는 전술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버틀러 중령은 이러한 월남군 태도가 베트남 자주 전력화(Vietnamization) 프로그램을 이유로 봤다. 딘 중령 같은 많은 월남군은 궁극적으로 미국이 베트남을 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베트남에 참전한 미군들보다 돌아가는 상황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21사단의 DIVISION FIGHTS ON

 

중령은 그랬다.미군이 너무 급하게 떠나면서 튼튼하게 구성해 놓은 보급 시스템도 질이 떨어지고 반미 감정만 양산했어. 그러나 소신 있는 사람들까지 지나치게 비판하진 말자고.” 상대가 미국의 지적인 엘리트/아이비리그 대학생 수준만 됐어도 미국의 정책 입안자와 현지가 일치하여 효과를 나타냈을 것이나, 그런 관점이 거기엔 존재하지 않았기에 우릴 놀랄 이유가 없었다. 중령의 관찰력으로 내가 상대할 월남군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법을 배웠다.

 

내가 경솔했던 시절, 버틀러 중령은 할 수 있다!’ 태도를 동등하게 실천했다.우리가 하려고 마음먹는 게 중요해. 아무리 올바른 소리해봤자 감탄하는 사람도 있고 욕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우리는 월남군을 개량하려 힘들게 노력했고, 노력의 효과가 크지 않아서 죄책감도 느꼈다. 만났다 헤어질 때 중령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나에게 전했다.

 

우리가 힘겹게 노력한 것에 너무 상심하지 마.

 닭똥을 완전히 제거하고 치킨 샐러드를 만들지 못할 때도 있는 거야.”

 

 

베트남전쟁의 최종 국면에 대규모 월맹군 기갑이 나타난다. 사진은  1972년 부활절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  T-54 탱크들. 공산군의 화력이 강해졌고,  버틀러와 미군 고문관들은 어쩔 줄 모르는 월남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지치고 지친다 .

 

725월 말 6공수대대는 재편성과 재훈련을 종료했고, 빈 롱 지역 전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됐다. 이곳 전투에 투입된다는 건 북베트남군 7사단 방어를 뚫고 들어가는 것이자 안 록의 남쪽 방어선 연결을 끊는 것이었다. 197268, 6공수대대가 방어선을 뚫고 도시 포위선 안으로 들어간 첫 번째 월남군이 된다. 이 공으로 베트남전쟁 사상 6공수대대는 미 합참의장 표창을 받는다. 이 작전으로 딘 중령과 나의 관계도 빠르게 개선되었고, 이때 버틀러 중령의 슬기로운 충고가 컸고, 이때는 내가 미군 공중폭격을 표적과 연결하는 능력이 숙달되었었다.

 

618, 월남정부는 안 록의 적 포위망이 깨졌다고 선언했고, (6공수대대를 포함하는 3개 공수대대로 된) 1공수여단을 북쪽 비무장지대 전투로 전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안 록 포위가 끝났다고 발표했지만 전투가 끝난 건 아니었다. 공수부대원들은 안 록에서 10km 남쪽 탄 카이를 향해 길을 뚫으며 4일간 계속 전투한다. 탄 카이에는 안 록으로 포병 화력을 제공했던 화력지원진지가 있었고 이 진지는 31연대가 방어해 주고 있었다. 이 화력지원진지가 북베트남군 측면을 찢고 21사단 전진을 가능케 했다.

 

1공수여단을 13번 국도를 넘어 기동하기 위해 미군 헬리콥터들이 동원되었고, 북베트남군 화력이 아군 화력지원진지를 파괴하려 집중되기 시작했다.

 

 

THE LAST TIME I SAW BUTLER

 

헬기들이 도착하기 전 잠잠하던 시간, 난 연대지휘소로 버틀러 중령으로 보러 갔다. 우리의 짧은 만남은 뉴스가 하나 도착하면서 기가 꺾인다. 32연대 고문관인 부르 윌리 중령이 북베트남군 사격에 맞아 전사했단 소식이었다. 1972619. 버틀러 중령은 미군 헬기들이 나타나자 포병 전방관측소를 겸하는 북베트남군 사수들이 역동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들로 근심이 늘어나자 버틀러 중령은 조심스런 농담조로 나에게 말했다.

 

자애로운 신이 자네를 보살피지만, 적 포격 근처에 어슬렁거리면 신도 못 보살핀다는 거 잊지 말아.”

 

우리의 짧은 만남은 무전기에서 헬기들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중단되었다.

난 중령에게 행운을 빌고 꼭 다시 보자고 말했다.

 

탄 카이에서 라이 케까지 21사단 지휘소는 헬기로 15분 거리였다. 거기 도착해 로스 프랭클린 대령을 만났는데, 대령을 눈에 보이도록 몸이 떨리고 있었고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소령. 버틀러 중령이 있던 벙커가 포탄에 직격 되었어.”

 

그럼?”

 

전사했어. 130mm였던 것 같아.”

 

나는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중령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았습니다!”

 

버틀러 중령이 마지막으로 만난 미국인이 자네인 셈이군.”

 

필자는 버틀러 중령이 살아서 마지막으로 본 미국인이다. 필자와 만난 지 30분도 되지 않아 북베트남군 포격에 44세로 전사했다. 아내와 세 아이를 남겼다. 필자는 버틀러 중령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안식처가 된 웨스트포인드 교내 묘비에 선 필자. 2023년.

 

찰스 루이스 버틀러는 44세로 사망했다. 군 생활 22년 차였다. 아내 조안과 자녀 셋, 두 딸과 아들을 남겼다. 중령은 197275일 웨스트포인트에 안장되었고, 그 몇 년 전에 자신이 사망하면 웨스트포인트에 묻히고 싶다고 서약서를 작성한 때문이다. 웨스트포인트에 안장된 졸업생이자 베트남전 전사자 333인 중 하나가 되었다.

 

미 육군 사관학교 모토는 [Duty, Honor, Country.]

 

버틀러 중령이 전사한 지 50년가량 지났다. 1972621일이 나에게는 어제처럼 느낀다. 그를 생각하면 생각이 결코 멀어지지 않는다. 고문관으로 들어가서 초기에 정말 도움을 주었고, 그 감사를 직접적으로 표하지 않은 것이 내 평생의 후회다. 난 걸출한 병사이자 지혜로운 전쟁영웅이자 친구였던 사람이 갔음에 지금도 애통하다.

 

 

- 1972년 북베트남의 Easter Offensive 동안 존 하워드는

 월남 공수사단 6공수대대와 11공수대대 고문관으로 참전했다.

 이 글이 기고되는 Vietnam magazine의 자문위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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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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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군 | 작성시간 24.07.23 자체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다들 떠남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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