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떠드는 너희는 못 버틴다
제임스 주니어 볼포네
난 5기갑사단 군악대로 1948년부터 1950년 2월까지 근무하고 제대했다. 그런데 50년 11월 1일 다시 징집되어 한국으로 가 2사단 38연대 보병을 받았다. 그리고 난 현재 여든셋, 아직도 살고 있다. 한국의 전투를 그렇게 멀게 느끼지 않는다. 죽어간 한국의 dead warrior들이 기억난다.
난 1929년생으로 양친이 이탈리아 이주민이다. 아버지는 프로 권투선수이자 Bar를 경영했다. 오하이오주 밴텀급 챔피언을 시작으로, 아마추어로 미국/캐나다 통합 챔피언을 했었다.
형은 해병으로 2차대전에 참전했다. 난 2차대전이 끝난 1948년 육군에 자원입대했고, 훈련소에서 복싱팀에 들어갔다. 복싱을 한 번도 안 했었는데, 우리 훈련중대에 플로리다 골든글러브 출신이 었었고, 나와 붙었다. 난 스트리트 파이터였을 뿐이었지만 안 밀렸다. 오히려 그 친구가 나에게 안 통했다. 점수는 그 친구가 이겼다. 난 내가 그 정도인 줄 몰랐다.
훈련소 수료 때 군악대 오디션을 강제로 보라고 했다. 난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불 줄 알았다. “너 합격이다. 내일 오전 옮겨라.”
그렇게 2년 2개월 근무하고 제대했다. 더 할 수도 있었으나 군이 순회 악단을 해체했다. 재입대 권유가 있었지만 “집에 갈랍니다.” 포기했다. 그게 Big mistake였다!
믿기는가? 난 6개월 뒤 징병된다! 군악대로 다시 갈 줄 알았다. 사회에서 사실 짜증도 났었다. 당시 이탈리아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있어서 2차대전 중 이탈리아계 집안들은 창문에 Gold Star를 달아놨었다. (주 : 골드스타 – 참전자 집안. 전사자 집안)
다시 강제로 입대, 군악대도 아니고 한국 참전이다. 전의 계급도 인정되지 않아서 다시 훈련병 된다.
비행기로 한국에 도착했다. “원래 기차 타기로 했는데, 어젯밤 철로에서 전투가 있어 장교가 죽었다.” 정신없었다. 제대와 강제 징집, 비행기 타고 갑자기 한국에 떨어졌다. 너무 번개처럼 흘렀다.
트럭 타고 전선에 도착. 트럭에서 내리니 이름을 불러 중대로 데려간다. 우린 행복하지 않은 징집 신병 무리였다.
그 시기에 부대는 정찰을 두 번 나갔고, 횡성 근처 고지에서 처음으로 첨병을 섰다. 첨병 서던 사람이 정찰 중 나이프로 목을 베였고, 내가 보충병으로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나도 그냥 소모품이었을 것이다. 내가 선두로 고지에 올라가는데 정말 길었고, 그게 내가 한국에 온 첫 주다. 내가 그렇게 출중했냐?!
횡성 학살(Hoengsong Massacre) : 중공군이 새말이란 마을과 횡성 사이 도로를 차단했고, 난 거기서 중국 공산군에 포로로 잡힌다. 그 전투를 ‘횡성 (대량)학살’이라 알려지게 된다. 역사에 부끄러운 전투로 장식된다. 내 생각으론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처음 접해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내가 귀국하고도 횡성 학살이란 말조차 몰랐고, 그 말은 1951년 2월 12일 신문에 나면서 쓰이게 되었다.
측면의 한국군이 돌파해 퇴각함으로써 우리 2사단 38연대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지평리에서 미군이 포위되었으나, 그날 전투 자체는 유엔군이 이겼다. 그러나 모든 언론에 나온 횡성 학살은 50년이나 쓰인다.
우리 8명은 퇴각 명령을 듣기 전까지 그 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우리 아래쪽에 병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난 모른다. 고지는 풀만 좀 난 상태. 고지 올라갈 때 움직이는 그들을 본 것 같고, 두 번 정도 쏠 뻔했다. 내가 M-1을 쏠 줄은 알지만 잘 훈련된 상태가 아니었다. 색소폰 군악병에서 보병으로 가면서 M1으로 바뀌었다. 사방에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할 때, 난 좀 빠르게 고참이 되었다.
고지에서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고 거기 밤새 있었다. 새벽 4시, 나이 많은 고참이 “이거, 뭐가 잘못된 것 같다.” 말하는데 지시나 통보가 일절 없다. 횡성 전투는 퇴각이라 말할 틈도 없이 빠르게 벌어졌다. 중공군이 공격했을 때 우린 병사 한 명당 100명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조용해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만 고지를 올라오는 개미 떼를 눈으로 본다.
난 고지 위에서 경계 서고 있었고, 우리 분대 한 명이 나에게 내려오라고 휘파람을 분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분대는 이미 떠났다. 따라잡으려고 했으나 너무 빨리 간다.
새벽 5시, 본대는 더 멀리 내려가고 난 따잡으려고 최대한 속도를 높인다. 내가 거의 따라잡았을 때 오른쪽에서 중공군이 쐈고, 난 엎드리며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탱크부대 부사관과 한국 병사 한 명도 뒤따라 들어온다. 나더러 어디로 가냐고 묻는다. “저 아래로 내려가면 안 돼. 중공군이 일대를 포위했어” 새말과 횡성 사이가 차단되었고, 보기에 산악을 통해 포위됐다는 말이었다.
“우린 산을 넘어서 시도하자고.”
“가시죠. 부사관님이 선임입니다.”
거기서 일어나 45분 정도 갔다. 너무 피곤했다. 중공군이 하나도 안 보여서 탈출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잠깐 쉬시죠?” 우린 담배를 물었고,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니 담배라도 피우고 싶었다. 부사관과 나는 포로로 잡히지 말자고 했고, 그때 난 신과 만날 준비를 했다. 철모를 벗고 소총 내려놓고 기다렸다.
1분 뒤 6~7명이 나타난다. 지프가 나타나더니 장교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No kill, no kill.” 우리에게 죽이지 않는다고 전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학창 시절과 가족들... 몇 초 동안 그 모든 게 스쳤다.
Prisoner of War : 우릴 산 위로 데려가 알몸으로 벗긴다. 군번표까지 다 가져갔다. 특히 내 시계를 좋아했다. 다시 옷을 입으라 했는데, 내 모자는 소총 놔둔 곳에 있어서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운은 약간 남아 있었다. 상의 포켓에 양말 두 켤레를 넣어두고 있었다. 내 발은 젖어서 곧 추워지고, 양말을 갈아신었다. 머리가 추웠으나 우린 하루하루 생존이었다. 포로 생활 921일의 시작이다.
조금 웃기기도 했다. 난 죽었다고 생각했고 또 무서웠다. 그러나 막상 닥치니 공포가 없다. 난 준비가 돼 있었다.
중공군이 여기저기서 포로를 데려오고 우리 전투기들은 고지에 네이팜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갈긴다. 와중에 난 살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우릴 죽이지 않아도 아군기에 죽을 것 같다. 아군의 그 기총소사가 마지막이 아니다. 북으로 가는 동안 포로 다섯이 맞았다. 처음 잡히고 이틀은 매분 매초 아군기 공격이 위험했고, 압록강에 도착할 때까지 사실상 매일 그랬다. 심지어 수용소도 기총소사를 받았다. 중공군에게 던져진 개고기라고 느꼈다. ‘해리 (트루먼) 오늘 밤도 백악관에서 칵테일 파티하냐?’
처음 문제는 전혀 다른 언어란 거다. 우리가 가축 같다. 줄 세우고 걸으라 한다. 첫 하루는 먹을 거 아무것도 안 줬다. 모이라고 줄을 세울 때마다 총살당하는 기분이다.
물도 음식도 없이 걷는다. 사람들이 쓰러져 죽기 시작한다. 밤이면 가옥에 꾸역꾸역 집어넣는데, 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포로가 되었어도 계급으로 지시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중공군에게 꼼짝도 못 하면서 말이다.
그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가옥 방에 빽빽하게 들어갔는데, 포로들이 날 밖으로 밀어낸 거다. 왜 동료 포로들로부터 배척받는지 어리둥절했다. 눈밭을 걸으며 생각했다. ‘지금 한국에서 중공군 포로가 되었고, 미국인들은 날 밀어냈다. 난 세상 혼자다.’ 눈밭에 엎어져 얼어 죽는 걸 최선으로 어겼다. 잠들면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죽었던 인디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그들은 지는 해를 향해 가다가 쓰러져 죽었다.
괜찮은 곳을 발견하고 눈밭에 누워 마음을 편안히 먹는다... 그때 한 보초가 날 보고 있었다. 15분 보더니 나에게 소리 지른다. 손가락을 자기 관자놀이에 대고 말한다. "Are you crazy?" 보초는 날 그 방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내가 들어가자 아무도 말 안 한다. 나 자신에게 그랬다. ‘이렇게 된 바에야 내 성격으로 살지 뭐.’
일의 시작은 상사였다. 그 상사는 이(lice)가 방에 있다며 난리 쳤다. 그 상사, 나중에 죽는다. 그때 우린 ‘저 사람은 죽는다, 저 사람은 산다.’ 감이 생겼다. 상사는 어리석게도 쌀과 채소를 담는 가마니를 깔고 누웠는데, 우린 알고 있었다. 그 가마니들에 이가 더 많다는 거.
평양에 도달, 이질 걸린 장교 두 명이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방에서 내쫓겼다. 우리 중 누가 명령했고, 둘은 밖에서 얼어 죽었다. 귀국했을 때 둘을 나가라고 명령했던 사람들이 영창에 들어가 살인죄로 기소되었다. 내가 그날 밤 죽었다면 그 상사도 기소됐을 거다.
좋은 친구가 생겼다. K중대 내 분대원 얼 베일리. 내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유일하게 반긴 친구다. 나에게 와서 상사가 날 내쫓은 일은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휴식 시간이 되면 같이 있으며 친해졌다. 그러나 콩 수용소(Bean Camp)를 떠날 때 베일리가 죽었다. 갑자기 쓰러졌고, 난 베일리가 죽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귀국해서 베일리의 죽음을 증언했다.
우리 국방성은 압록강로 가는 행군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10년 뒤 베일리의 혈연들이 나와 접촉해 온갖 질문을 했다. “얼이 무슨 위스키를 마셨어요?” “무슨 담배를 피웠어요?” "벽에 무슨 사진을 꽂아 놓았었나요?" 나를 미치게 하는 질문들이었는데, 사람들이 2차대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다 빼앗겼는데 벽에 사진을 달아 놔?
너무 추워서 양말을 교대로 갈아신고 젖은 걸 가슴에 넣고 말린다. 귀에 걸어도 꽤 마른다. 쉬었다가 걸으면 또 발이 젖는다. 방한화 신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래봤자 발은 얼고 젖는다.
밤새 걷고 낮에 쉰다. 중공군 보초는 호각으로 통제한다. 어느 낮에 쉬는데 아군기들이 상공에 나타나 기총소사했고, 포로 셋이 죽었다. 마을에 세워두었던 트럭이 눈에 띈 것 같다. 그래도 다시 걷는다. 쌀을 약간 먹었고, 통조림을 받은 동료도 많았으나 난 못 받았다.
걷는다. 춥고 배고프다. 사람들이 줄어든다. 어떤 포로는 아프고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 대열에서 떨어진다. 쓰러지면 쐈다. 우린 아파도 서로 끌고 간다. 우리가 포기하면 그 사람 죽는다. 계속 걸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죽을 걸 뻔히 알면서 쓰러진 사람을 돕지 못한다.
걷는데 너무 컴컴하다. 출발하면 안 멈춘다. 동료가 동상 안 걸리게 단추를 잠가준다. 이젠 마을에서 멈추지 않는다. 눈밭에서 매일 잤다. 너무 추웠다. 서로를 껴안고 잤다.
Suan Bean Camp : 수안이란 큰 마을에 도착한다. 초가집과 건물 40채. 우린 1,200명까지 늘었다. 두 줄로 서서 가옥으로 들어간다. 초가집 방에 열 명씩 들어간다. 거기 51년 3월 6일부터 4월 28일까지 있었다.
그냥 땅바닥에 잤다. 북한은 봄도 여전히 춥다. 그런데 한국 사람이 부엌에 불을 피우니 방이 따뜻해진다. 거기서 콩을 주로 먹었기에 우린 ‘콩 수용소’라고 부르게 된다. 좋게 들릴지 몰라도 요리된 콩이 아니라 생콩을 먹었다. 반만 익혀 주기도 했다. 그렇게 먹으니 이질 걸리고, 바깥에 구덩이 파고 쏟아낸다. 구덩이 하나에 포로 20명이 썼는데 사람들이 계속 나가서 설사한다. 몇은 거기서 죽었다. 정말 비참했고, 콩 수용소의 주된 사망 원인이다. 나 자신에게 물었다. ‘왜 우리가 여기서 수난을 당하지? 사람이 사람한테 이럴 수 있어? 정말 이렇게 할 수는 없는 거다.’
콩 외에 수수와 도정이 제대로 안 된 쌀도 먹었다. 중공군은 양동이에 퍼오고 우린 서로 차지하려 싸운다. 그때 배틀스란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요즘 생각이 많이 난다. 배틀스는 미식축구 선수 출신의 거구 흑인으로, 나에게 음식을 나눠 줬다.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고 생존한 것에 아직도 배틀스에게 고맙다. 몸이 부풀기 시작하는 포로들이 생기고, 다리와 음낭이 부푼 사람들은 죽었다. 같은 포로였어도 이거 못 본 사람은 안 믿을 거다. 서구사회의 중년들이나 겪을 병을 앓는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저들에게 내가 인간이 아닌가? 생각했다.
High Death Rate : 약, 치료, 구경도 못 했다. 우리 중에 의무병도 없었다. 중공군은 포로가 죽어도 관심 없고 돕지도 않는다. 압록강 수용소에 도달해서야 그나마 치료가 생긴다. 사람들이 사방 마구 쓰러지고 죽어간다. 너무 빨리 죽어서 묻을 시간도 없었다. 나는, 돕지 않으려는 우방군들에 정말 실망했다. 뭔가 했어야 한다.
미군끼리 묻었다. 매일 힘겹게 묻는다. 힘이 남은 무리가 매일 아침 사망자를 끌어내 땅 파고 묻었다. Day after day 매일 죽고 묻는다. 날씨가 추워 멀리 묻을 수도 없다. 다 수용소 근처에 묻었다. 중공군은 우리 사망자를 가축처럼 방에서 질질 끌고 나간다.
여러 이유로 죽었다 : 굶주림, 물 부족, 오염된 물, 구더기와 파리, 파리가 입과 직장까지 들어간다. 영양실조, 벌레 감염, 폐렴, 무시무시한 이질, 각기병, 거기에 신만 알 이상한 죽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죽었다. 어느 날 넷이 얘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 명이 숨이 막힌다. 우린 입을 열어 숨쉬게 하려는데, 얼굴이 회색으로 변하더니, 죽었다. 요즘도 그 생각 떠오르면 밤에 잠 못 잔다.
콩 수용소에서 다 죽고 500명 남았다. 식량 부족과 치료 부재로 많이 죽었다. 나도 아팠으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계속 중얼거렸다. "Keep going. Don't quit." 배고팠다. 몸이 아팠다. 설사병에 걸렸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1951년 4월 10일, 여느 아침처럼 쌀 익힐 물을 준비하는데, 하늘에서 불쑥 아군기들이 나타나더니 지옥처럼 폭탄을 투하하고 기관총을 쐈다. 모두 안전한 곳을 찾아 뛰었고, 구덩이가 보여 거기 다이빙하고 1초도 되지 않아 금속 파편이 공중에 뜬 내 발 옆을 스쳐 날아간다. 공습은 영원처럼 보였으나 15분. 콩 수용소가 공격받은 이유는 중공군 주 보급도로에 붙어 있어 항공 감시에 걸린 거다. 그때 몇 명이 죽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한 100명 될 거다. 어떤 사람은 폭탄으로 포로들이 조각이 났기에 200명이 넘는다고 했다. 내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신문을 보니 아군기 공습으로 미군 포로 50명이 날아가 버렸다는 기사가 나왔다. 모르고 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결국 4월 28일 우린 콩 수용소를 떠난다.
탈출 시도 : 거기서 떠나 3일 후 휴식으로 멈췄는데, 근처 두 명이 출발 호각이 불면 탈출하겠다는 대화를 나눈다. 나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하니, 그러자고 했다. 다시 걸으라고 호각을 불 때 우리 셋은 논의 도랑으로 굴러 들어갔다. 대열이 떠나자 일어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생각하는데, 병장이 결정했다.
한 8km 어딘 줄 모르고 걸었다. 춥고 배고프고 힘도 없지만 멈출 수가 없다. 새벽 4시 지평선에 지붕이 보인다. 한국 집이었고, 조심스레 다가가니 할아버지 한 분만 있다. 우린 사람 죽일 생각이 없었고, 뭐 필요한 거 없나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술병을 마시다 놓고 자고 있었고, 우린 가옥을 뒤져 생선, 쌀, 김치를 발견해 잠시 먹고 쉬기로 한다.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가 많은 고함에 깼다. 중공군 여섯이 나타나서 둘러쌌다.
우리를 산의 벙커로 데려갔고, 코너에 몰아넣고 “No talk.” 경고했다. 우린 누워서 어떻게 될 건지 기다렸다. 벙커는 북한 경찰서였고, 한국인들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빌어먹을, 왜 저러지? 그곳 마을은 매일 폭격과 기총소사를 받았다.
경찰 두 명이 있었는데, 우리가 조종사 복장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난 우리가 어디 있는 건지 물으려 노력했는데, 대답 대신 소총 개머리판으로 날 때렸다. 중공군이나 한국인이나 개머리판으로 미군 때리는 걸 좋아한다. 행군 동안 그렇게 맞은 사람이 매일 무수하다. 이제 한국인까지 걱정해야 한다.
온종일 한국인들이 현관에 돈을 두고 간다. 한 번은 나이 먹은 여성이 내 앞까지 오더니 빵 두 덩어리를 내려놨다. 보초가 보고 재빨리 왔고, 내가 빨리 숨겼지만 결국 빼앗긴다. 그 여성이 누구였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우리가 잡혔던 집의 그 할아버지 부인이 아닌가 싶다. 우린 할아버지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 여성이 가져온 빵을 좀 떼어서 먹으라고 주기에 세 조각으로 나눴다.
우리가 위협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한국인들은 우릴 잊은 듯 보였다. 우릴 그냥 놔뒀는데, 그러다가 지나칠 때면 발로 걷어차는 건 빼고.
다음 날 무척 놀란다. 한국인들이 어디로 데려갔고, 우린 어리둥절 불안하다. 식당이었고 탁자에 앉으라 한다. 그 식당에 먹으러 오는 사람은 모두 장교 군복이다. 우릴 지나치면서 웃는다. 포로가 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밥을 먹었다. 수프, 두부, 생선과 채소. 모두 맛있었다. 그날은 우리에게 잘 대해줬다.
백인 다섯이 벙커로 들어온다. 처음에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러시아인으로 밝혀진다. 그날 밤 보초가 한 명씩 데려갔고, 내가 마지막이다. 둘이 꽤 오래 있다가 돌아왔는데, 러시아인들에게 뭐라고 했는지 몰랐다. 나를 다른 벙커로 데려가 던지듯 의자에 앉혔다. 러시아인 다섯과 중공군 열 명. 러시아인은 정보를 캐려 했으나 내가 뭘 알아야지 말이다. 그들은 내가 학교에서 전쟁을 가르친다고 자백하길 바랐고, 돌이켜보면 ROTC 프로그램을 말한 것 같다.
러시아인들은 서울까지 퇴각했을 때 우리 부대 상황과 어디서 왔는지 알려 했다. 나는 더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이 아파서 포로 대열에서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방한화 신은 발에 물집이 심하게 잡힌다. 그러자 군화를 벗어보란다. 내 발의 면적 반이 1.5cm 두께 물집이 잡혀 있었다. 내 발을 유심히 살피더니 군화 다시 신고 돌아가라고 한다.
내가 벙커를 떠날 때 “내일 아침 총살이다.” 했다. 그 시기에 난 상관 안 했다. 돌아와서 물으니 둘도 별로 말한 것이 없다. Nobody wanted to talk. 난 러시아인이 내일 아침 총살한다고 알렸다. 아침이 오는데, 난 편하게 잘 잤다. I ready to die again. 그런데 한국 보초가 와서 물과 먹을 걸 약간 주더니 포로수용소로 돌아간다고 한다.
걸어서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 또 놀랐다. 아군기 두 대가 뭘 봤는지 마을에 로켓을 쏘고 기총소사를 쐈다. 그 공격으로 거기 있던 민간인이 거의 다 죽었는데, 우리 셋과 보초 둘은 운 좋게 멀쩡했다. 마을을 지나가는데 화난 사람들이 우리에게 돌을 던진다. 한 러시아인이 나타나 내 얼굴에 침을 뱉고 son-of-a-bitch라고 했다. 난 그들의 화를 나무랄 수 없다. 우리 비행기가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를 죽였으니까. 전쟁은 무고한 사람이 많이 죽는 문제를 동반한다.
한국 보초 둘이 우릴 압송했고, 내 발 상태가 끔찍해서 좀 쉬라고 했다. 난 마을 사람들에게 내 가죽 군화와 한국인 고무 샌들을 바꾸지 않겠냐고 물었고, 한 명의 동의해서 군화를 벗어서 교환했다. 발이 공기에 노출되니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데, 걷는 걸음마다 작은 돌에도 너무 아파서 비명이 나온다.
보초들은 좀 어렸는데, 한 명은 어머니가 일본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우릴 좋아하니 걱정말라고도 한다. 공기가 약이라도 되는 듯 발이 낫기 시작했다. 다른 마을까지 걸어갔더니 어느 한국인이 영국군 군화 두 켤레를 가지고 있다. 그게 어디서 났는지 신만이 안다. 군인들은 죽은 군인에게서 뭘 가져가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 그러는 사람도 있지만, 난 죽은 사람을 모욕하고 싶지 않았다.
난 그 한국인에게 영국군 군화를 물물교환하려 했다. 그는 내 샌들을 보더니 no! 했다. 날씨는 따뜻해지고 난 야전상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군화와 바꾸자고 했더니 okay. 신이 나에게 보냈다고 생각한다. 샌들이 얇아서 걸을 때 발이 죽도록 아프다. 걸음마다 작은 돌에 비명을 지르며 하루 25km씩 걸었다. 그래도 두 보초가 한국인과 얘기하도록 허락했다. 군화는 약간 빡빡했으나 괜찮았다.
마을을 지나 계속 걸었고, 두 보초가 우릴 먹이고 휴식시켰다. 그러다 트럭이 오더니 보초에게 다음 마을까지 타겠냐고 묻는다. 트럭에 올랐다. 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마을에 도착해 내렸더니 운전병이 내려서 드문드문 영어로 자기 친구가 텍사스에 살고 있다고 한다. 내 생각에, 우리 해병대가 중국에 간 일이 있고, 아마도 그 사람에게 잘해준 것 같다. 내 형이 해병대로 칭따오에 갔었기에 안다. 어쨌거나 운전병은 “Americans No. 1.” 하면서 돼지고기 약간과 한 양동이 쌀을 주고 떠났다. 보초도 상관 안 해서 우린 먹었다. 내 발은 빠르게 회복하고 몸에 힘도 생겼다. 두 친구도 똑같았다.
마을과 들판을 지나며 걸었다. 어쩌면 보초도 정확한 우리 위치를 몰랐다. 두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대공포도 봤다. 그들은 우릴 보고 웃더니 오라고 한다. 분명 모르는 말이지만 오라는 소리였다. 모르는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게 참 신기한 거다. 하느님 감사하게도, 러시아인이 막대 비누와 수건을 주고 잘 가라 한다. 우리 셋은 잘 먹고 쉬면서 힘이 강해졌다.
다른 마을에서도 러시아인을 봤다. 우리만 보면 다가왔다. 비슷한 상황이면 미국인도 그러지 않을까? 러시아인은 쌀과 돼지고기를 줬고, 우린 세상에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알았다. 엿 같은 정부들이 양 국민을 적대시하게 한다. 배불리 먹고 다시 걸었고, 대충 목적지를 알게 된다. 한국 보초가 우릴 중공군 보초에게 인계한다. 우리의 새로운 도전, 새로 도착한 목적지 ‘광산 수용소’다. 풍경은 평화로웠으나, 거기서 포로 수백이 죽는다.
Suan Mining Camp : 우릴 산 높은 곳으로 데려갔고 두 건물이 있다. 알고 보니 학교다.
콩 수용소나 광산 수용소나 하루 15~20명 죽는다. 수안 광산이 더 최악이었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더 죽었다. 날 큰 방에 데려갔을 때 눈을 의심했다. 포로 50명이 땅바닥에 누워 있다. 아파서 움직일 수 없고 죽어가는 미군 포로들이다. 일어나 씻질 못하니 자신이 배설한 똥으로 범벅이다. 거대한 녹색 파리들이 온 천지 날아다닌다. 불쌍했다. 거기서 나오고도 잊을 수가 없다. 중공군은 우릴 던져두고 죽도록 방치한다.
그걸 보니 음식이 목으로 안 넘어간다. 너무 애처로웠다. 다수가 비타민 부족으로 체중이 확 줄었고 피부병에 걸렸다. 이질과 피부염으로 치매 증상까지 보이다 죽는다. 영양실조 각기병은 당연하다. 파리가 사람 입들에 알을 까고 구더기가 사람을 덮는다. 먹을 것도 부족하지만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불결하다. 서로 도울 수가 없다.
귀국했을 때 그걸 묘사할 수가 없다. 누가 믿겠는가. 돌아왔을 때 우리를 한국전쟁 ‘포기한 놈들’로 간주했다. 무슨 개 같은 소리냐. 광산 수용소에서 살려고 발버둥 친 걸 해보라고 권한다. 가서 살아보라고 하고 싶다. 사람이 얼마나 버티는지 알아? 우릴 비난하는 인간들 단 한 명도 못 버틸 거다. 그래도 우린 전우를 도우려 노력했다. 미국은 우릴 한국에 던져버렸고, 귀국하니 다시 버렸다. 그래도 난 아직 국가를 사랑한다.
여건이 열악해 도착한 사람들도 아프기 시작했다. 모두 아팠다. 어떤 도움도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다. 이제 내 차례라고 생각한다. 새 포로들이 왔는데 흑인 두 명이 있었고, 아파서 들판에 누운 날 보러 왔다. “이 친구 물 마시고 뭘 먹어야 해.” 난 죽도 못 삼킨다고 대답했다. 둘은 내려가서 물과 쌀겨를 구해왔고, 난 그들이 보살핀다는 것에 기분이 나아졌다. 이름도 모르지만 다시 만나길 바랐다. 그날 그 도움이 아니었다면 난 광산 수용소에 묻혔다. They saved my life.
당시는 이름을 모르는 흑인을 Woodie나 Speedie로 불렸는데, 나중에 흑인 포로는 백인으로부터 격리된다. 세뇌가 이유 같다. 흑인 수용소가 생겼다. 난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흑인들과 학교 다녀서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흑인을 대하는 잔인한 태도도 목격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주 : 자기 몸에서 나온 기다란 회충에 충격받은 이야기를 건전한 식사 시간을 위하여 생략합니다.)
다시 이동 : 더 추워지고 겨울이 오는데 다시 북쪽으로 이동이란다. 수안 광산 수용소에 무수히 죽은 포로들을 두고 떠난다. 무덤들을 뒤돌아보니 섬뜩하다. 최종 목적지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때 나는 아팠고 해낼 수 있을지 몰랐으나, 새롭게 친구가 된 (흑인) 스피디와 우디가 날 돕고 있었다. 중공군은 포로끼리 조력하는 걸 금지했다.
행군은 똑같았다. 사람들은 아프고, 걷다가 대열에서 이탈한다. 우디와 스피디가 돌아와서 내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부축한다. 풀려나는 날이 오면 연락해서 꼭 보답하리라 바랐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흑인 포로는 우리보다 먼저 풀려났다. 전쟁 끝나고 수용소를 지나치는 트럭에 탄 흑인 포로들 속의 둘을 본 것이 마지막이다. 우린 서로 손을 흔들었다. 난 우디와 스피디를 분명히 봤다고 생각한다.
Camp 1 : 1호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산에 가옥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 산은 겨울에 난방 취사를 위해 나무하러 다니는 곳이 된다.
‘가옥’들은 사실상 초가집 10개 연결한 것. 푸에르토리칸도 있고 터키군과 미군이 들어왔다. 방은 10명이 들어가는데, 사지를 펼 만큼 넓었다. 창문과 출입구 모두 나무 틀에 종이를 발랐다. 수용소 오른쪽에 강이 가까워서 세탁 목욕이 가능했으나 탈출은 불가능하다. 미군은 너무 눈에 띈다.
Hospital? : 그때부터 가혹했던 중간 수용소를 겪지 않은 포로들이 1호로 들어온다. 콩 수용소와 광산 수용소를 모르는 새 포로들이다. 1호에 가니 아픈 포로를 ‘병원’이란 곳에 격리했고, 까놓고 말하면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병원’이나 막사나 똑같다.
“풀려나면 팬케이크 30개와 햄버거 10개, 파이 20개 먹을 거야.” 음식 대화를 많이 했다. 탈출에 성공해 집에서 어머니가 푸짐한 음식을 내놓는 꿈을 꿨는데, 꿈의 마지막에 수용소로 다시 잡혀온다. 음식 생각에 시간을 너무 소모했다.
마리화나 : 우린 자본주의 미국을 비판하는 강의에 참석 안 했다. 기회만 오면 미국인을 울리려고 노력한다. 뉴욕 데일리 워커와 (공산당 신문) 샹하이 뉴스를 읽으라고 줬으나 화장실에 썼다. 개중 공산주의에 관심을 보인 포로가 생겼다.
숲에 나무하러 갔다가 마리화나를 발견했고, 그 신문으로 담배처럼 말아 피웠다. (나는 아니지만) 포로들이 숲에 갔다가 마리화나를 다리에 묶어 수용소로 숨겨 들어왔다. 오후 5시가 되면 고약한 연기 냄새가 난다. 난 상관 안 하고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연기가 내 폐로 들어갈까 봐 두려웠다. 문제가 생기면 ‘병원’으로 간다.
통나무를 옮긴다. 한 사람이 최소 150파운드(68kg)나 되는 걸 옮겨야 한다. 그러나 그게 날 강하게 했다. 난 특히 그랬다.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 질질 끌고 온다. 나도 어깨에 질 힘이 없을 때 끌었다.
Dog Fights in the Sky : 중공군이 밤에 수용소 주변을 서치라이트들로 비춰서 최악이었다. 그걸 켜면 우리 폭격기들이 온다. 기총소사라도 당하면 중공군은 선전에 이용하는 거 같다. 만약 아군기가 격추되면 항공기 부품을 들고 수용소를 지나간다.
러시아인과 미국인의 공중전도 봤다. 풋볼 게임처럼 아군기를 속으로 응원한다. 미그기들은 숫자가 유엔군기를 압도할 때만 싸운다. 아군기 숫자가 많으면 만주 쪽으로 도망친다. 아군기들은 중국 땅에 안 들어가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그런다. “미군 전투기가 우리 우편기를 격추시켰다.” 편지를 보니 불에 그을린 흔적이 없으나 뜯지도 않은 편지지는 타 있다. (주 : 내용 흑칠) 하루는 50대나 날개 끝을 붙이고 촘촘히 날아왔고, 이 아래 수용소를 알고 있었다. 전기가 나갔다. 그 폭격대는 수력발전소를 끝장낸 것 같다.
1호 수용소에 도착하자 추워진다. 동상 안 걸린 포로가 없다. 문 열고 나가면 눈, 발이 눈에 들어가면 진통제처럼 덜 아픈데, 그러다 발가락 10개 다 잃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 터무니없는 고통을 참으려 했으나 가슴에 폐렴까지 온다. 51년 12월부터 52년 4월까지 폐렴을 앓았다. 중공군은 날 ‘병원’에 넣었다.
중공군은 아픈 포로들을 3열로 정렬했다. 난 1번 열이었는데, 2번 열은 아프긴 해도 살 가능성이 있는 열이고, 3번 열은 죽을 사람들이었다. 그 마지막 열을 Death Row라고 했는데, 나도 3번 열로 들어간다.
낮 동안 말랐던 담요가 밤이면 젖는다. 가슴이 파열하는 것처럼 24시간 아프고 발은 불타는 것 같다. 마침내 의식을 잃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아무도 안 돕는다. 거기서 조금만 갔으면 난 못 깨어났다.
한밤중에 우리 방에서 누가 죽자 밖에서 땅 파던 소리가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아침 깨어나니 내 양옆의 둘이 죽었다. 중공군이 끌고 나가는데 죽은 사람 머리가 바닥에 통통 튕긴다. 현관에서 크게 튕기고 나갔다. 전날 이상한 꿈을 꿨었다. 내가 열차 타고 가는데 빨간 등 두 개가 켜있었다.
누워 앓는 동안 이따만한 녹색 파리들이 내 입과 항문에서 윙윙거린다. 사람 몸에다 알을 낳는다. 구더기들이 누운 포로들을 먹어 치운다. 구더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너무 많다. 내가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있자 파리떼가 내 주변에 모인다. 두 사람이 날 매장하려 끌려고 한다. 내가 신음했다. “야, 살아 있어. 내일 가려나 보다.” 나처럼 산 채로 매장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게 한두 번이 아닐 게다. 내가 직접 경험했으므로.
4월에 드디어 병에서 벗어났다. 날씨는 따뜻해지고 일어나려 노력했으나 힘이 없어서 안 된다. 밖으로 기었다. 동료가 소리친다. “Volpone is up!” 다시 죽음을 이겨냈다. 난 어머니와 비슷했다. 강한 사람이다. 아버지도 그리 약하지 않았다. 이제 병원에서 나왔으나 걸을 힘은 없다. 오하이오 출신 케네스 코나처가 나뭇가지를 잘라서 목발을 두 개 만들어줬다. 나무로 바벨을 만들어 들게 했다. 그렇게 난 기력을 회복했다.
중공군은 자꾸 불러다 ‘자백’하란다. 탈출을 준비했다고 자백하란다. 뭐라도 자백하란다. 난 뭐라든 니미 좆이다. ‘자백’이란 ‘죄’를 인정하는 뜻 아닌가? 웃기는 소리. 세뇌의 일환이었다. 모이게 하더니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공산주의를 강의한다. (미군 포로 20명이 세뇌/변절했다) 중국인들은 미국을 생각하는 관점을 바꾸려 노력했다.
리차드 텐니슨이 세뇌당해 공산주의 변절자가 되었다. 우리들 눈치 안 봤다. “나와 대화하면 담배 줄게.” 어느 날 나에게도 다가왔다. “니가 생각하는 대로 해. 하지만 난 내버려 둬.” 어떤 사람은 우리가 풀려날 때까지 배신자인 줄도 몰랐다. 모리스 윌스가 그렇다. 10년 뒤에 미국으로 돌아와서 책을 썼다. 그나마 미국으로 돌아온 건 모리스 윌스가 희귀하다. 나중에 중공에서 결혼하고 미국을 방문한 포로가 있었는데, 미국 정부는 그 사람에게 아무 말도 안 했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주 : 중공에서 결혼하고 돌아온 포로 – 여기서 언급한 포로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인 아내까지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온 포로의 책을 본 잇빨중사가 읽었음. 글을 아주 잘 쓰는 사람이라 무슨 상까지 받은 자서전이었다. 그렇게 중국으로 건너간 세뇌 포로 거의 다 미국으로 돌아갔음. 수십 년 걸린 사람도 여러 명. 미국은 큰 처벌을 하지 않고, 대부분 군사 법정에 세운 다음 불명예제대 시켰다.)
Back to the USA : 어느 날 스피커가 전쟁은 끝났다고 선언한다. 너무 기뻐 환호했다. 우리가 1호 수용소를 떠나던 날, 판문점 가려고 준비하는데 보초가 와서 제럴드 그레이서를 데려간다. 본부에서 무슨 일이 있나 싶었으나, 우리는 떠나면서 잊었다. 그런데 귀국해 보니 그레이서가 MIA 명단에 올라 있는 걸 발견했다. 같은 방을 썼는데? 이유를 아무도 현재까지도 모른다. 상당수 포로가 러시아와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들었다.
우린 판문점 근처로 가서 호명을 기다린다. 시간이 좀 걸렸는데, 내 생일에 결국 내 이름이 나왔다. 중공군 장교와 미군 장교들이 날 확인하고 통과시킨다. 난 (자유의) 다리를 건너다 쓰러졌고, 마지막에는 손과 무릎으로 기었다. 소령이 날 포옹하며 담뱃갑을 준다. 거기서 첫 식사 시간에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맛볼 수 있었다.
Not All Glory : 이 모든 게 영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판문점에서 일어난 일들은 날 격노케 했다. 석방 이틀 뒤에 심문을 받았는데, 그런 시기에 꼭 그래야 했나? 감정이 역류하는 포로들의 커다란 눈과 울음을 보고 그럴 생각이 드나? 우린 불안한 상태였지만 상부는 바로 심문했다. 판문점에서 장교 세 명과 한 번 하고 귀국선 안에서도 심문장교와 또 했다.
난 질문하고 답했던 서류를 가지고 있다. 두께가 손가락 한 마디가 넘는다 : “00 때부터 00 때까지 중공군 움직임이 어땠나?” “공산주의를 공부한 포로는 누구인가?” “누가 중공군에게 우호적이었는가.” 질문이 끝도 없었다. “공산주의를 공부한 포로들 이름을 대라.” 내가 만난 러시아인들도 자세히 물었다. (이 심문은 다른 포로들 것과 비교/확인한다) “소련인이 수용소에 몇 번 방문했는가.” “마을 위치와 산업시설 본 걸 말하라.” “수력발전소가 얼마나 파괴되었는지 들었는가?” “미국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는가?”
질문 정말 많았다. 심문 과정에서 내가 약해지는 기분이 들고 조금 아팠다. 8시간이나 의자에 앉아서 그럴 상태가 아니었다. 대답 못 할 질문도 있었다. 심문이 지속되자 “I don't know”가 많아졌다.
선박 General Pope을 타고 22일 걸렸다. 귀국하는 GI로 가득했다. 그들은 선박 앞과 뒤 섹터를 받았고 우리 포로들은 선박 중앙을 받아서 북적이지 않았다. 포로 출신이란 표식 같은 건 없었다. 왜 우리를 더 대우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통 병사들도 한국에서 똑같이 고통을 분담했다고 생각했다. 커피 마시고 좋은 음식을 먹는 포로들은 행복했지만, 불안감이 있었다. 내가 말하는 불안감은 정말 컸다. 다수가 그랬다. 집으로 돌아가고, 영원히 연락이 끊긴 사람 너무 많다.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지만 기다리는 가족은 많지 않았다. 요즘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가족이 대륙을 횡단하고 방을 잡고 숙박 등등 상당한 부담이었다. 우린 급료를 받고 30일 휴가를 받았다.
중서부 출신이 많아 같은 기차 탄 사람이 많다. 나는 동생 도날드가 열차역에 픽업하러 왔다. 열차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건 정말 감격스러웠다. 동생은 운전하면서 말이 많지 않았다. 날 기다리던 부모님은 울면서 포옹했다. 친구들도 와 있었다.
고향에 왔으나 모든 것이 평화롭지 않았다. 난 평균적인 한국전 참전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mad였고, 부모님은 당신들만의 정치적 아젠다가 있었다. 모든 게 최악으로 향한다. 난 전쟁포로 경험을 전혀 말하지 않았다. 뭔가 숨기기 시작했다. 전직 포로로 생존했다는 사실이 더는 자랑스럽지 않았다. 나는 한국전쟁에 관해 말 안 했고, 실제로도 경험한 전투가 적었다. 한국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잡혔다.
나는 포로 동안 진급이 없었다. 휴가 후에 새로운 부대로 가면 진급이 될 거라고 했다. 휴가 끝나고 받은 보직은 배치가 아니라 일리노이 5대호 해군병원이었다. 내 폐가 안 좋고 PTSD가 있었다. 난 1953년 11월 17일 명예롭게 제대했다. 나의 제대 이유는 발 동상, 폐렴, 야간 시력 상실 등이다.
Life After Korea : 나라는 맥카시 의원 주도로 공산당 사냥 최고조였다. 저 사람 공산당이다! 하면 공산당이 되는 악용이 범람한다. 1950년대 미국인은 공산당 공포로 떨었다. 요즘처럼 교육받은 세대가 아니다. 거대한 국가를 파괴하는 아젠다가 있었다. 공산주의가 미국을 공격해 점령한다는 공포가 휩쓸었다.
처음에는 포로 귀국을 환영했지만 나라 공기가 변한다. 우리 포로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공산당 군대에 잡혔던 사람들이다. 대중은 우리가 중공군에게 세뇌당했다고 말하면서 온갖 공산당 거짓말을 들었다고 간주한다. 사람들이 우릴 걱정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이 세뇌를 시도한 건 맞지만 성공적이지 않았다. 인종을 분리하면 흑인 병사들은 쉬울 걸로 생각했으나 역시 아니었다. 공산주의 세뇌는 미군 20명과 영국군 1명만 성공해서 거기 남았다. 배신자 21명이 언론에 나오면서 미국은 수치로 생각했다.
고향 신문에서 내 이름이 알려졌으나, 아무도 관심 없다. 보통 참전자와 다른 것도 없었다. 폐 문제로 직장을 잡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불구도 아니다. 난 평균적인 이탈리아 가족의 자녀로 돌아왔다. 시에서 나에게 자동차를 줬다. 차를 몰고 식당에 도착했는데 “Hey, here comes a Boy Scout.” 소리를 들었다. 내 손으로 어떻게 하고 싶었으나 못 들은 척했다. 말해봤자 이해할 사람도 없었다. 중공군 아래 포로 생활로 내 인생 초반부터 지장을 받은 건 나밖에 모른다.
우린 2차대전 끝나고 참전자들이 귀국했을 때 어땠는지 봤다. 모두 명예롭게 대접받았다. 바에서 군인들에게 술을 샀다. 나는 고작 들은 소리가, 시에서 자동차 주니 좋지? 난감했다. 내가 귀향하기 전에 사람들은 날 어떻게 대할까 의논했었고 신문에도 냈다. But No one did anything.
난 54년 결혼해서 아들 넷을 낳고 58년간 해로하고 있다.
제대한 첫해에 장인 집에 있었는데, 정부에서 날 다시 심문하기 위해 왔다. 들여서 커피 대접하는데 판문점/귀국선에서 받은 똑같은 질문이 시작된다. 난 화가 났고, 대체 뭘 원하냐고 했다. “일이니 어쩔 수 없어요.” 그들은 기소된 포로 출신 몇의 유죄를 입증하는 증언을 바랐다. 내가 있던 수용소는 변절자 20명 중에 리차드 텐니슨과 모리스 윌스가 있었다. 정부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 이름도 나왔고, 난 그들의 혐의를 확신할 수 없었다. “기소하고 싶으면 하세요. 난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나에게 전쟁은 끝났습니다. 풀려났을 때 할 말 이미 다 했습니다.” 그들은 “Thank you for your information.”하고 떠나서 다시 오지 않았다. 난 전쟁을 자꾸 파내는 것이 싫었다.
난 결혼하고 서부로 이사해 아이도 낳았지만 신경 안정제를 먹어야 했다. 그걸 먹으면 사람이 무기력해진다. 전쟁포로 출신을 돕는 단체와 2차대전/한국전 포로 출신도 만났다. 그들과 육체적 정신적 문제의 공유로 연대감을 느꼈다.
내가 병원을 떠나 제대할 때 군의관은 100% 불구 판정을 해줄 테니 병원에 더 있으라 했다. 하지만 난 일하고 싶었다. 몇 년 동안 최악으로 갔고, 돌연한 공포가 날 공격한다. 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직장을 그만뒀다. 사람을 때리기까지 했었다.
병원은 재입원을 권유했지만 난 거절했다. 발가락 다섯 개 10% 불구 판정도 받았다. 지팡이를 짚고 걸었다. 현재도 한국전쟁 여파와 함께 산다. 악몽을 꾼다. 중공군과 싸우고 걷어차고, 깨어 보면 침대에서 떨어져 있다. 중공군에게 포위되는 꿈을 꾸며 아내와 아이들을 적으로 보고 싸우기도 했다. 미친 악몽 때문에 가족들은 무서워했다. 아내가 특히 두려워했다. 한국으로 돌아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깬다. 암 때문에 입원했는데 중공군 목소리가 들려 밤새 떨었다.
난 내 몸을 국가에게 줬고 현재 83세다.
Fighting for Our Honor : 몇 년 전 이라크에서 미군 세 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때 CNN 앵커 애론 브라운이 전 나토 사령관이자 군사 고문인 웨슬리 클라크에게 질문했다. 클라크 전 장군은 2차대전에서 포로들이 학대받았지만 2%만 구금 중 사망했고, 베트남전 포로에 관해 묻자 – 역시 학대가 있었지만 2%만 사망했다고 대답했다. (잘 대접해준다며 베트콩이 존 맥케인에게 음식 먹이는 장면을 난 텔레비전으로 봤다) 그런데 애론 브라운이 한국전쟁 포로에 대해 묻자, 클라크는 보안으로 묶여 있어서 답변 못 한다고 했다. 내가 꼭지가 돌았고, 난 컴퓨터로 가서 둘에게 이메일을 썼다. 아래는 클라크에게 보낸 것이다 :
[장군, 계급은 존중하지만 전적으로 틀렸습니다. 한국전쟁 포로 문제는 보안 사항이 아닙니다. 한국전쟁이 끝나면서 미국과 중국은 ‘자발적인 귀국자’란 이름으로 서로 송환했습니다. 미국인들은 거기 남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군 20명과 영국군 1명이 변절해 남았습니다.
기록된 한국전쟁 포로는 7,450명이고, 그중 40%가 구금 중 사망했습니다. 더군다나 아직도 실종이 8,100명입니다. 클라크 장군, 내 말 들려요? 40%가 포로 상태에서 죽었다구요. 2%, 2%? 한국은 40% 이상입니다. 한국 수용소는 미국 적십자사도 없었고 국가의 도움도 없었습니다. 사실도 모르면서 비방하고 명예 훼손합니까? 가서 한국전쟁 기록이나 좀 보세요. 포로 상태에서 기아, 물 부족, 치료 부재로 죽은 3,500명 이상과 그 가족들에게 사과하십시오. 그리고 실종자 8,100명 중 다수가 포로 상태에서 행군하다 죽었을 겁니다. 왜 미국이 치른 전쟁 결과물을 완전히 무시하고 감춥니까? 한국전쟁 포로에 관하여 이 국가는 반드시 부끄러워해야 하고, 모든 전쟁에서 싸운 전사들에게 창피한 줄 아십시오.]
다음 날, 애론 브라운은 웃으면서 클라크에게 말했다. “이봐요 장군님, 어제 이메일을 보고 나니 이제 이런 데 나오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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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빨 주) 필자는 지금 정확한 통계/기록으로 말하고 있다. 본인이 연구/공부한 분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간과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많은 포로가 잡혔고 엄청난 숫자가 북으로 걸어가는 와중에 사망했다. 태평양전쟁도 아닌데 포로 40%가 걸어가다 죽었다는 게 쉽게 수용할 내용일까? 2차대전 전사에서 연합군 포로들의 ‘바탄, 죽음의 행진’은 뜨거운 태양 아래 무시무시하게 느끼지만, 그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6.25 당시 미군 포로들의 참혹한 죽음도 진실이다.
특히 51년 중공군 춘계공세에 잡힌 대규모 미군들은 추웠다. 북으로 걸어가면서 상당히 추운 기온이었다. 1950~51년 한국 겨울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추웠다. 말이 춘계지 겨울 마지막 자락이었다. 포로들은 북상하며 추위 기아 부상으로 걷다가 죽었다. 뜨거워서 목이 타던 바탄보다 못한 건지 덜한 건지는 각자 느낌에 다를 것이다. 한국전쟁 미군포로 대규모 사망은 전쟁사의 심각한 사건이다. 그래서 ‘잊혀진 전쟁’이라 잊혀진 느낌이다.
했던 짓은 일본군이나 중공군이나 똑같다. 못 걸으면 쏴 죽였다. 기록상으로만 3,500명이 그렇게 사망했다. 여기서 ‘기록’이란 포로 명부에 등재되었거나 ‘생존 포로의 목격’으로 증언된 숫자다. 증언할 사람도 죽었다면 열 명 스무 명 포로가 되었다가 죽었어도 아무도 모르는 경우가 된다. 결론은 미군 실종자 명단에 ‘전투 중이었는지 포로 중이었는지 모를 숫자’에 있다. 최소 5천 명 이상 포로가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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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회상 : 잊혀진 전쟁인데 미군 36,000명이 죽고 8,000명이 실종 상태다. 이게 ‘냉전’의 일부로 보고 잊을 정도인가?
해리 트루먼은 너무 서둘렀고 한국을 너무 몰랐다. 적이 누군지 몰랐다. 그렇게 산이 많고 추울지 몰랐다. 일병인 나도 그보다는 똑똑해겠다. 분석하고도 그렇게 입혀서 보냈나? 국가가 창피한 일이다.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백악관이 잊혀지길 바랐다. 정부는 병사를 방치했다. 사과해야 한다. 포로들이 아무 도움 없이 죽어갔다. 우리를 잡은 중공군도 식량과 의료품이 없었다. 미국은 포로를 잊었다. 4천 명 죽고 실종이 8천이다. 귀국한 포로는 정말 운 좋았다. 그러니 잊혀지길 바라는 거다.
정부가 포로수용소에서 끔찍하게 죽도록 방치한 걸 아는 미국인이 얼마나 되나? 거기 수용소가 다 죽음의 수용소였다. 염병할! 홀로코스트에서 죽은 사람들은 미국인이 아니었지만 계속 화제가 된다. 그러면서 자국인이 죽은 건 모른 체 한다. 책임진 사람 아무도 없다.
한국에서 미국 젊은이 죽음을 무수히 봤다. 동물이 죽어도 그렇게는 안 했을 거다. It was inhumane. 1호 수용소, 광산 수용소, 콩 수용소에서 군번표도 없이 많은 동료를 묻었다. 그래도 1호 수용소는 미국이 인지했었다. Bean Camp, Mining Camp는 계산에 없다. 거기서 더 많이 죽었는데 말이다.
누구도 점검하러 안 왔고, 적십자사도 못 들어왔다. 만약 들어왔다면 조금 덜 죽었을 거다. 안 되면 비행기로 식량을 투하라도 했어야지 않아? 이유는 모르지만 우릴 버렸다. 포로 40%가 죽었고 실종이 8천, 정부에 있던 그 자식들이 정말 몰랐어? 전쟁포로는 오직 2차대전 얘기뿐이다.
이후의 나 : 전쟁에서 돌아와 내향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방에만 있었다. 고등학교 때 풋볼선수였고 악기도 연주했었다. 사회생활은 물론, 음악과 예술에도 관심을 잃었다. 한국전쟁이 내 인생을 바꿨다. 종종 혼자서 눈물 흘린다. 사람 모이는 곳을 피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전쟁포로 기억을 안 떠올리기 정말 어렵다.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생각이 시작된다. 내가 못 막는다. 아내가 심리학자들을 많이 소개했는데 같이 있기 힘들었다. 신경 안정제(Valium)만 받았다. 나를 유일하게 차분하게 만드는 약이다. 누구든 어떤 약이든 날 완전히 치료할 수 없다.
아내가 소개한 의사 외에 아무도 안 만나곤 했다. 의사가 더 집중할 수 있는 다른 의사를 소개했고, 그 와중에 암 치료도 받았다. 대학에서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내가 원래 음악과 그림에 천부적인 재질이 있었다. Looking back, I am proud to have served my country, and would go back if called. God Bless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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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추가 내용]
제임스 볼포네의 손자 저스틴 볼포네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병사들은 영웅으로 생각하나, 관심 없이 지나가는 사람도 있다. 유명 방송사 CNN은 Top 10 biggest heroes를 선정했고, 그중 한 명이 타린 데이비스다. 다른 나라 끔찍한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을 도운 사람이다. 내 할머니는 그 비슷한 걸 60년 겪었다. 나에게도 가까운 어느 영웅이 한국에서 전쟁포로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제임스 볼페네가 영웅인 이유는 국가를 위해 봉사했고, 한국의 포로수용소에서 위험 속에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웅은 악의적인 상황에서 타인을 돕는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다. 태생부터 영웅은 없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경험의 여정 속에서 영웅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영웅도 각자가 만난 멘토와 정신적 육체적 조건에 따라 다르다. 공통점이라면 신념, 진실, 정직, 힘과 결단력이다. 영웅도 그 사람이 속한 사회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다. 모든 것이 혼자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인생에서 영웅이라 부를 가까운 사람은 할아버지다. 한국에서 전쟁포로로 살아남고 83세에 여전히 잘 살고 계신다. 할아버지는 정확히 1년을 기간으로 징집되어 한국 새말에서 포로가 되었다. ‘콩 수용소’ ‘죽음의 행군’을 버텨냈다. 행군 동안 두 명과 탈출을 시도했다가 다시 잡혀 ‘광산 수용소’로 갔다. 다시 잡혀서 북으로 걷는 동안 발에 동상, 각기병, 이질에 시달렸다. 할아버지는 1953년 8월 21일 풀려났다.
돌아온 직후 결핵이 있음을 진단받았다. 포로가 된 건 21세, 2차대전 나치 수용소 같은 곳에서 31개월간 고통받았다. 거기서 폐렴을 앓고 나중에 폐암까지 걸렸지만 83세까지 사신다. 한국의 고통을 버티고 현재까지 걷고 생활하는 걸 보면 내 눈에 영웅 다름 아니다. 굉장히 독립적인 분이다. 도움이 필요한 분이지만 결코 바라지 않는다. 멈출 수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형과 나를 보살피려 하신다. 한국에서 싸운 것이 아니라도 나에게는 원래 진정한 영웅이었다.
세상에는 날 싫어하고 불친절한 사람이 항상 있다. 그들 눈에는 영웅이 아닐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훈장이 다섯 개다 : 유엔 참전장, 한국전 참전장, Good Conduct Medal(전시 1년 이상 참전훈장), 국가 방위 훈장, 그리고 Prisoner of War Medal.
내 팔에 해병대 문신이 있다. 국가에 봉사했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문신에 여러 문구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 할아버지가 달성한 것에 대한 존경이다. 제임스 할아버지는 모든 전쟁 영웅이 한 걸 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우리 할머니와 58년 해로하고 있다.
사람들이 끔찍했던 한국 이야기에 더 관심 기울이길 바란다. 전력을 다한 하나의 전쟁이었다는 걸 모르고 지나가는 사람이 많다. 제임스 J. 볼포네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한국 포로수용소에서 신념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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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볼포네의 의견을 통한
Bring Home POW Remains From Korea
- 라스베가스 저널
지난 44년간 매해 미국은 7월 27일 성조기를 게양한다. 한국전쟁 휴전을 기념하는 것이며 북한의 중공군 수용소에서 미군 포로들이 풀려난 의미도 있다. 난 30개월 동안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석방 2년 후, 다른 미군 석방자들을 만나면서 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최근 2년 전 아이젠하워 대통령 도서관에서 기밀이 해제된 펜타곤 문서를 읽었다. 휴전이 조인되면서 중공군과 북한군의 수중에도 돌아오지 못한 미군 포로가 910명이라 쓰여 있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끔찍한 대가 아닌가? 그걸 읽고 내 몸이 앓았으며, 정부가 포로들을 방치한 것이 아닌가 메스꺼웠다. 수용소는 물론 죽음의 행군에서도 무수한 사람이 기아, 이질, 부상, 각기병과 동상 등으로 죽었다. 산 사람은 압록강에 도달해 전쟁 끝날 때까지 있었다.
사람들이 한국전쟁이 ‘잊혀진 전쟁’이라 부르는데,
'엄청나게 숨긴 전쟁’으로 불러야하지 않을까?
아직도 실종자가 8,000 이상이다. 서류에는 2천 명의 매장 장소가 표기되어 있고, 대부분 포로수용소 인근이다. 묘비도 없이 수천이 묻혔다. 나도 11개월간 실종 상태로 있었다. 나도 죽었다면 현재 MIA나 전사 추정으로 돼 있을 거다. 압록강에 도달해 11개월이 지나 내 이름이 포로 명단에 올랐다.
우리 정치인들은 한 입으로 유해를 송환해야 한다고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안 했다. 언론도 침묵하여 사람들이 잊었다. 정부가 무슨 일을 이렇게 하나.
북한에 화도 나지만 지난 44년간 지구 저편의 그곳은 강력한 군사력을 형성하고, 지금은 굶어 죽는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은 도울 준비가 돼 있다. 우리 전사자와 포로 유해 송환을 협상 조건으로 걸 좋은 기회다.
중국은 다른 이야기다. 백악관은 정치인들과 함께 일단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중국을 통해서 북한을 압박해 유해를 송환하고, 혹시나 중국이 아직도 잡아둔 포로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전쟁은 더러운 일이고 무고한 사람이 죽는다, 젊은이들을 잃고, 가는 우리도 전상을 예상한다. 버려진 (미송환 명단 포로) 육군 610명과 공군 300명은 걱정할 정도로 너무 많다. 지금도 그날이 되면 성조기를 올린다. 어쩌면 뒤에 두고 돌아오지 못한 포로 910명을 위함이다.
Memorial Day가 되면 너무 많은 기억이 돌아온다. 젊은이가 한국에서 너무 많이 죽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너를 안 것은 기쁘고 신의 가호 아래 보살펴주길 바란다.”
텔레비전으로 알링턴 국립묘지 기념식을 보니 들판과 도랑에서 외로이 죽은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런 친구들은 내가 이름도 모르고 그 친구도 내 이름을 몰랐을 거다. 그러나 얼굴은 기억한다. 그 상황에서 서로 “너 어디 부대냐” 묻지 않았다. 말도 거의 못 나눴다. 그냥 자동으로 친구가 된다. 우린 함께 계속 가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내가 참전자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말하도록 내버려 둬라.”
우리 이제 늙어간다.
말하도록 놔둬라.
듣거든, 뭐라도 선의를 베풀어라.
내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넌 그게 어떤 고통인지 모른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걸 아무도 이해 못 한다.
내 발과 가슴이 너무 아파서 가끔은 정신을 잃었다.
배가 고팠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난 오늘날에도 참전자 가족에게 말하고 싶다.
“Stop and think how they suffered. Listen to them.”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