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렬한 전투 이야기는 아니나,
기고자의 군대 생활과 시대상,
항공 조종사로 온갖 위험/사고가 기록되었다.
어느 게시판이 어울리는지 고민되는 글이었다.
자기 목숨이 달아날 수준의 사고들을 자세하게
쓰지도 않았다. 차분하고 대범한 성격으로 보인다.
좀 긴데, 나눠 읽으시기 바랍니다.
세 자녀와 아홉 손주를 위해 얘기를 쓴다
제임스 일버트 비티토
[주] 기고자 제임스 비티토는 1994년 7월 25일 영면했다. 제임스 비티토 가족은 삼형제가 해병대로 입대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고, 둘은 한국전쟁도 참전했다. 아내 자넷 비비토의 허락을 받아 수기가 공개되었다. 삼형제 막내인 클리어렌스 헤이건 비티토는 본 잇빨중사 카페 한국전 게시판에 [두 개의 전쟁과 인천 상륙]이란 글이 있다.
뚜렷한 기억은 희미하지만,
나는 1920~30년대 대공황 시절에 성장한 사람이고,
이어 1940~50년은 전쟁의 시절이었다.
나는 50년 동안 항공업에 종사했다. 조종사로 20,000시간 기록했고, 50~60개 종류 항공기와 헬리콥터를 조종했다. 심각한 공포의 순간도 있었으나 변한 건 없다. 사람들은 자기 일을 하다가 은퇴 당하는 걸 혐오할 뿐이다. 다가오는 은퇴를 기다리는 게 힘겨웠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 인생에서 무엇을 하건, 먹고 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즐겨라.
어린 시절 : 켄터키 중부 작은 철도역 마을에 살았다. 살던 동네는 거대한 가톨릭 공통체였고, 부모님은 형제 중 하나는 신부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셨다. 과거 켄터키에서 수천 노예를 부리던 조부는 11자녀로 농장을 꾸렸다. 아버지 형제 중 보안관도 있었고, 지역 살롱의 총격전에서 사망한 분도 있었으며, 철도 교량에서 열차 사고로 두 분이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 시절 열차에 치여 죽은 어린이가 은근히 있었다.
부모님은 1919년 결혼하셔 내가 1920년에 태어나고, 동생 리로이가 23년, 헤이건(주 : 두 개의 전쟁과 인천 상륙)이 1925년 태어났다. 우린 같은 방에 모여 잤는데, 아버지가 떠나있을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베개 밑에 아버지 권총을 넣어두고 자셨다.
내가 여섯 살일 때 아버지가 철도에서 일하다 머리를 다쳤다. 입원했다 나온 뒤로 간질 발작 같은 증상이 생겼다. 지금이면 의료적으로 은퇴할 질병이었으나, 1920년대는 가난하고 대공황이라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린 70세 할아버지 농장으로 갔다. 할아버지 땅은 숲을 포함한 30에이커로, 내가 여기서 사냥을 배운다. 특히 알버트 삼촌이 대단한 사냥꾼으로 22구경 소총을 가르쳐줬다. 난 여덟 살에 소총을 배웠다.
15km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걸어서 학교에 갔는데, 이 시골 학교는 그냥 방 하나다. 교사 한 명이 8학년까지 가르쳤다.
1929년 아름다운 가을의 오후, 내 인생에 극적인 영향을 줄 일이 발생한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본 거다. 빨간 복엽기가 학교 상공을 돌더니 근처 비행장에 착륙했다. 마침 수업을 파하자 달려가 그 아름다운 비행 기계를 봤다. 20대 젊은 조종사가 내렸는데, 부츠에 가족 자켓과 헬멧, 고글을 착용했다. 놀랍게도 조종사는 근처 농장의 딸인 여자친구를 보러 날아왔다.
비행기는 우리가 사는 곳 밖의 다른 세상을 의미했다. 조종사와 잠시 얘기했는데, 5년간 비행했고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난 그때부터 비행을 꿈꾸기 시작한다!
1930년 봄, 우리 삼형제는 방치되다시피 살고 있었다. 그때 일꾼이 나이 먹은 노새를 쏴버리는 걸 본다. 암반염을 싣고 가던 노새가 아무 데나 막 가자 일꾼이 샷건을 장전해서 노새의 귀에 대고 쏴 죽였다.
1940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모두가 떠나고 싶어 했다. 대부분 가장 가까운 대도시 신시내티로 간다.
여기저기 일거리를 전전하던 중, 1941년 2월 잡지에서 해병대 푸른 정복을 보았다. 친구와 난 모병 사무실에 찾아갔는데, 어떻게 할 수 없는 결정적인 말을 듣는다. “훈련소로 가는 다음 기차 탈래?” “지금요?” “그래. 결정해.”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모병관은 신병 1명 입대에 1달러 수당이 있었다.
진가를 발휘한 건 훈련소 후반부 사격이었다. 60명 중에 특등사수 2명이 나왔고, 난 어렸을 때 사냥 실력이 있었다. 난 해외 임무를 원했지만 플로리다 기지 근위중대를 받았다. DI에게 다른 데 가고 싶다고 했지만 “닥치고, 잭슨빌로 가는 다음 버스를 타!” 41년 5월부터 난 물탱크를 지켰다.
그때 젊은 소위가 왔고, 날 좋게 봐서 정문 근무를 맡겼는데, 그거 하다가 거의 죽을 뻔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근무에서 둘이 권총을 닦았는데, 톰 맥가티란 친구가 청소 과정에서 슬라이드를 젖혔다가 문득 방아쇠를 당겼고, 그때 총구는 내 배를 향하고 있었다. 탄창에 총알이 있다는 걸 까먹은 거다. 벽에 구멍이 났다. 소위는 맥카티를 2주간 영창 보냈다.
그 기지는 항공생도들이 훈련하는 곳이기도 했는데, 많은 시간 그걸 지켜봤다. 거길 찾아가서 정비장과 친분을 맺어 비행기 정비하는 걸 도왔다. 그때 소위가 날 일병으로 진급시켰다. 이병 3~4년 차야 진급하던 시절이다.
Pearl Harbor is Attacked : 41년 10월 소위는 내가 바라던 비행학교 지원서를 상부에 올렸다. 그러던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실제로 기지에 도착한 12월 13일에 비행기가 한 대도 없다. 전쟁 발발로 모든 비행기가 서부 해안으로 이동한 것이다. 난 막사 청소나 하면서 비행정비학교 입교를 기다렸는데, 그 기지가 폐쇄된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신형 비행기가 사용하기에 활주로가 짧았다.
기지 세 곳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난 미네아폴리스 기지를 택하고 갔는데, 그곳은 캐나다 해군생도 훈련장이기도 했다. 훈련기는 노란색으로 칠한 개방형 칵픽 복엽기. 정비일을 3개월 했고, 점검을 이유로 조종사 뒤에 타는 경험을 한다.
3천 피트까지 올라가 스핀과 날카로운 측면 기동을 했다. 여기서 조종사가 뭐라고 소리쳤고 난 못 알아들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상승이다. 난 손잡이를 잡고 버텼고, 다른 손이 낙하한 립코드를 잡았다. 그렇게 떨어졌다. 난 D-형 금속 손잡이를 반대편까지 당겼고, 어느 순간 내 머리 위에 하얀 실크 천을 본다. 가슴 벨트가 턱까지 올라와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난 양손을 올려 라이자를 잡았고, 점차 낮아지던 난 30m 물탱크 바로 위였다.
라이자를 당겨 방향을 바꾸려고 했으나 물탱크로 떨어진다. 그 물탱크에는 고압 전선에 세 개 달려 있는데, 난 전력선 중간으로 들어가야 사는 거다. 낙하산은 전력선에 걸리고 난 땅에 떨어졌다. 그 비행기에 문제가 있었다. 조종사는 비행기를 철도역 근처에 착륙시켰고 자동차 일곱 대가 파손되었다. 철도역 사람들이 이 사고를 목격했는데, 내 낙하산이 150m 상공에서 펴졌다고 했다.
우린 의무대에 가서 몸 체크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오른쪽 종아리가 죽도록 아프다. 복엽기에서 나올 때 꼬리를 때리고 떨어진 거다. 그날 밤 디트로이트 신문에서 우리 사고를 ‘전설적인 추락’이라며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해군 비행사 두 명이 시내 주거지역을 피해 착륙을 시도했다는 것인데 참, 말이 좋다.
(주 : 조종사가 비행기에 이상을 느껴 고함을 질렀고, 최소 착륙 고도를 획득하기 위해 상승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Flight Program : 그 직후, 해병대 병사에게도 비행 과정에 응시할 수 있단 소식을 듣는다. 지휘관 찰스 아담스 소령을 찾아가 응시하겠다고 요청했다. “넌 비행기에서 탈출해 낙하산으로 산 놈이다. 방법을 찾아보겠다. 대신 (통과 과목인) 모스 신호를 연습해서 점검받아라.” 결국 1942년 11월 나는 조지아주 pre-flight school 입교를 명 받았고 학교로 가 13대대로 입소했다.
당시 난 병장으로 진급했고, 기초 비행학교 입교 생도는 45명, 그 안에 해군 4명 해병 부사관 1명이다. 밤 10시나 돼야 막사로 돌아갈 정도로 바빴다. 첫 비행은 1943년 3월, 거기서 비행 100시간을 기록하고 플로리다 펜사콜라로 떠난다.
펜사콜라에서 난 하사로 진급했다. 편대비행을 위해 6인씩 묶었는데, 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소위 넷이 있는 조로 편성되었다. 나는 사병 조종사였기에 계속 충돌했다. 장교 임관 조종사가 되려면 잘하라는 압박을 받았고, 실제로 두 명이 장교로 임관했다. 이 과정은 목숨 걸고 하는 수준이었다. [조종사가 최고 수준으로 오르려면 작전비행 500시간은 돼야 한다. 그때까지 살아 있어야 하지만.]
멜버른 : 1943년 9월 14일 난 상사로 펜사콜라 과정을 졸업했다. 동기 중엔 소위로 임관한 사람도 있었다. 난 플로리다 멜버른으로 가라고 해서 이유를 몰랐다. 대부분 해병 조종사는 잭슨빌로 가서 작전비행을 훈련했다. 게다가 멜버른에서 내가 유일한 병사/부사관 pilot이었다. (주 : 아무리 병사 조종사라고 하지만, 병장 이상은 되어야 하기에 비행학교 수료로 조기 진급된 것으로 보입니다.)
멜버른에는 와일드캣 F4F와 신형인 헬캣 F6F도 있었다. 해군은 헬캣, 해병대 조종사는 F4U/콜세어로 떨어진다. 그렇게 훈련하다 9월 30일 드디어 소위로 임관했다. 재개된 훈련은 와일드캣으로 시작했고, 그렇게 1년간 작전비행 훈련을 수료한다. 이때 또 황당하게 다 떠나고 나만 콜세어를 몰면서 남태평양으로 갈 준비를 하란다.
43년 12월 캘리포니아 엘 토로 기지에 도착했고, 그동안 동생 리로이드가 해병대로 입대해 1사단 과달카날에 들어갔단 사실을 알았다. 막내 헤이건도 해병대로 입대해 패리스 아일랜드 훈련소에 있었다. 어머니는 건강도 안 좋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엘 토로에서 콜세어 4대 편대비행을 훈련한다.
참전 : 44년 3월 15일 수송선에 올랐다. 일본 전함과 잠수함을 피해 지그재그로 30일간 항해, 도착한 곳은 에파테 섬으로 파병 전투기 조종사들 보충대 같은 곳이다. 이곳도 전투기지이면서 여러 전대에서 조종사 전사가 생기면 공급하는 식이다.
거기서 한 번은 급강하폭격기 36대 작전에 콜세어 12대가 엄호로 떴다. 항법은 폭격기들이 하고 우린 따라가면서 보호했다. 그런데 목표 상공에 구름이 끼고 폭격기들이 항법을 잃었다. 우리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땅이 하나도 보인다. 보충대 기지 지휘관은 최대 터닝포인트(복귀 한계)를 넘었다고 걱정했고, 우린 기지 무선병이 송신하는 걸 잡았다. “(기지 방향) 각도 070으로 복귀하라.”
폭격기들은 연료가 꽤 있었으나 콜세어들은 바닥을 쳤다. 콜세어 한 명이 캐노피를 열고 추락을 준비했다. 그때 땅이 보였고 우린 두 비행장 사이에 있었다. 하나는 일명 ‘하바나 항구’, 하나는 우리 기지인 ‘코인 힐’ 비행장. 하나를 택해 해안으로 향할 때 내 계기판은 연료 10갤론 남았다고 지시. 난 수평판을 내렸고, 비행기 앞을 들면서 수면 착륙을 대비, 날개 한쪽이 물에 먼저 닿으면서 물로 치고 들어갔다. 비행기 기수가 수면 아래 산호를 때리면서 걸렸다.
다행히 뒤집어지지 않고 섰다. 무전기가 작동하고 있어 기지를 불러 내 위치를 알린다. 활주로에서 3km 해변. 두 명이 해안선 나무를 때려 사망했다. 한 대가 하바나 활주로에 착륙해 안 다쳤으나 비행기가 고철 됐다. 시계 보니 4시간 15분 비행했다. 46년 뒤 애들을 데리고 여길 방문했다.
난 솔로몬군도 부겐빌 북쪽의 그린아일랜드 212전투기전대로 발령받았다. 비행장은 폭격기 활주로와 전투기 활주로가 3km 거리로 따로 있었다. 그린아일랜드에는 전투기전대가 셋 (212. 213. 214). 우리 주 목표는 뉴브리튼에 있는 라바울[Raboul]. 커다란 뉴기니섬 동부의 일본군 기지로, 남태평양에서 가장 큰 일본군 기지 - 항구와 비행장이 붙어 있다.
당시 라바울은 일본군의 강력한 항공기지였지만, 내가 도착하던 때에는 감히 우리와 상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행기를 활주로에 주기해 놓고 우리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태평양에서 거기만큼 대공화기가 집중된 곳도 없었다. 적기보다 대공포가 무서웠다.
처음 라바울에 가던 날 편대장 윌슨 중위가 나 바로 옆에 붙었고, 누드센 중위가 선두, 알 셈브 중위가 후미 경계다. 라바울에서 생각만큼 강한 화력을 상대하진 않았고, 우린 맞지 않고 빠져나왔다.
뉴브리튼섬 동쪽 15km에 뉴아일랜드란 섬 남쪽에 세인트 조지 곶이 있었고, 거기 일본군 대공포 사수들이 남태평양에서 최고였다. 거긴 대공포 포상 빼고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편대장은 프레스트리지 중위로, 거기다 폭탄과 기총소사를 하자고 한다. 콜세어가 한 대씩 연달아 내려가 공격했다.
이 모든 과정이 이륙부터 착륙까지 너무 무섭다.
그 이유는 바다만 보이기 때문이다.
전투기가 남태평양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피탄되어 불타는 비행기에서 조종사가 수면에 탈출하는 것이긴 하나, 비행기가 뜰 정도로 약한 피해를 당했더라도 연료통을 맞으면 정말 위험하다. 바다밖에 안 보이는 상공에서 연료통 총알구멍에서 연료가 죽죽 빠진다. 바다 위를 날다가 바다 위로 떨어지는데, 낙하산으로 탈출할 건지 동체 수면 착륙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수영 못 하는 조종사들도 있었다. 어떻게 비행학교를 수료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급하니 수상탈출훈련을 제대로 못 해도 비행기만 잘 몰면 수료해 보낸 거 같다.
그렇게 길고 지루하고 바다만 보이는 불안한 비행을 하다가 전투까지 하는 거다. 혼자 날면 정신병 걸린다. 편대와 요기 없이 날면 사람 이상해진다. 하늘인 줄 알고 바다로 뛰어드는 현상이 정말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8월이 되자 첫 전투 참전(first tour)이 끝나서 휴가를 시드니로 갔다. 첫 참전 동안 우리 전대는 비행기 15대와 조종사 6명을 잃었다. 전투기 참전은 6개월로, 참전이 한 번 끝나면 점수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쉬었다가 연장 참전을 택해야 한다. 우린 시드니에서 잠시 휴가를 즐기고 그린아일랜드로 복귀했다.
(주 : 전투 조종사는 극한 피로 누적 때문에 병사가 1년 참전일 경우 보통 6개월이다. 베트남전도 똑같다. 태평양전쟁 조종사들의 스트레스는 심각했다. 죽는 것을 떠나 발견도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행장에 안 돌아오면 죽은 것이다. 항모에 안 돌아오면 죽은 것이다. 최악은 수면 비상착륙에 성공하고도 혼자 외로이 익사로 죽는 것.)
그때 어머니 편지를 받아 두 동생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리로이드는 팔에 수류탄 파편상을 입었고, 막내 호건은 팔라우에 상륙했다고 한다. 우리 형제들은 비슷한 시기 같은 남태평양에 있었다.
내 second tour 이전과 동일했는데, 내 편대장이었던 누드센은 상위 지휘관으로 가고 내가 편대장이 되었다. 내 요기(wing man)로 밥 라이트가 붙었다. 주로 한 일은 폭격기를 엄호하다가 폭탄 투하하기 전에 먼저 내려가 기총소사하는 것. 그런 임무 동안 내 전투기에는 총알구멍 하나 없었는지 난 아직도 모르겠다. 내가 기총소사 루틴에 들어가면 나에게 날아오는 예광탄 총알들이 보인다. 내 조종석 양쪽으로 지나가는 것도 경험했다.
(주 : 전쟁터의 전투기 조종사는 목표가 부여되지 않아도 일단 이륙하고, 그걸 보통 ‘정찰’이라고 부른다. 전장은 전투기가 그날 임무가 없다고 쉬는 게 아니다. 말로 치면 임무 없는 날도 완전무장 초계비행으로 상공에 대기한다. 총력을 다하는 전쟁에서 전투기는 쉬지 않는다. 못한다.)
가장 기억 나는 정찰비행은 연료를 가득 실은 바지선 다섯 척을 발견한 것. 그거 쏴서 불태우는 거 대단했다!
우리 모두 56회 임무 달성으로 수훈비행십자훈장을 받았으나 일본기 격추는 없었다. 그게 영화처럼 쉬운 게 아니다. 일단 만나야 격추할 것 아닌가. 한 번은 C-47 수송기 한 대를 엄호 비행하는데 해안을 벗어나는 제로기를 하나 봤다. 저거 잡자! 내려가려는데 C-47 조종사가 무전기로 고함을 지른다. “야 이 자식들아, 날 떠나면 모두 군법에 회부할 거야!” 우린 C-47에 붙어 있어야 했다. 내 편대원 한 명이 며칠 뒤 제로기 하나 잡았다. 전투기 조종사의 최종 목적은 공중전으로 제로기 격추다. 그다음 목표가 격추 에이스. 정말 어려운 거다.
이제 나의 second tour는 딱 한 번의 비행만 남았고, 그날은 어둠이 내리는 그린아일랜드 상공 정찰이었다. 완전무장으로 이륙했고 누드센 중위 선도로 1만 피트까지 상승, 교전 없이 모든 것이 느리게 흘렀다. 누드센 중위는 바로 다음 날 귀국 아니면 시드니 휴가였는데 누드센이 무전기로 선언한다. [루프로 돌 테니까 따라 와.] 그러나 당시 loop로 돌기에 하중과 고도 때문에 속도가 모자랐다. 내가 루프의 최고 정점에 이르렀을 때 정말 아슬아슬했다...
그때 나는 밥 라이트는 못 할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밥의 상태를 보니 스핀을 먹는다. 첫 스핀을 잡아서 수정했으나 다시 오른쪽 반대로 돈다. 우리 모두 밥이 물을 때리기 전에 스핀을 잡고 벗어나길 바라며 지켜보는데, 죽는 줄 알았다. 그 속도에서 하강하며 기체가 도는데, 수면 60m 아래 상공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수장을 막았다. 다음 날 시드니 휴가를 떠났는데, 밥이 우리를 영영 못 볼까 두려웠다고 자백했다. 두 번째 참전에서 전대는 조종사 넷을 잃었다.
(주 : 누드센 중위가 특별한 일도 없이 루프 기동, 하늘로 올라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내려오는 기동을 시킨 게 무리 같아 보이나, 이 기본적인 루프 기동이 당시 적 전투기에게 뒤를 잡혔을 때 기본적인 회피법, 즉 생존법이었다. 기고자가 특별히 이걸 기억하는 이유는 어둠이 내리는 속에서 했다는 거다. 당시 2차대전 후반부는 핼켓이나 콜세어나 미군 전투기 엔진/성능이 제로기를 압도했고 제로기 분석도 끝났기에, 제로기 기습을 받았을 때 반드시 해야 할 전술기동으로 여겨진다.)
1944년 11월 8일, 두 번째로 시드니로 향한다. 두 소위가 조종하는 육군항공 DC-3를 타고 부겐빌에서 타운스빌로 날아가는 6시간 비행. 비행은 순조로웠으나 중간에 거대한 폭풍을 마주하는데, 두 촌놈이 직진해서 돌파하기로 한다. 아무리 기종이 달라도 전투기 조종사 15~20명이 뒤에 타고 있는데 누굴 짱구로 아나, 분명 실수하고 있었다. 우린 아무도 안전벨트 안 했고, 기내에서 사방 날아가고 던져진다. 폭풍 측면으로 나왔을 때, 소령 한 명과 대위가 문밖으로 날아갈 뻔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린 타운스빌에서 시드니로 가는 걸 포기하고 거기서 놀았다.
휴가에서 돌아오니 전대가 필리핀으로 향한다. 이것이 나의 last tour가 되면서 편대장에서 division leader로 올라갔다. 그때 내 요기는 윌더 중위로, 세부 도심 위를 날다가 지상 사격에 맞아 전사했다. 그때 톰 무니가 같이 콜세어를 몰았고, 나중에 한국에선 공군으로 전환하여 F-86을 조종한다. 퇴역한 후에는 콜세어 전투기 영화 ‘검은 양떼’에 조종사로 출연했는데, 두 전쟁에서 살아남은 무니는 1987년 카리브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는 수상비행기를 몰다가 산악과 충돌해 사망한다.
(division leader : 편대 2개 이상을 지휘하는 일. 그래도 핵심은 그 아래 편대장들이고, 대형 작전에서 주로 역할을 한다.)
우린 창설된 222전투기전대로 옮겼고, 1944년 12월 9일 그린아일랜드를 이륙해 필리핀으로 향한다. 우리 비행기를 선박에 얹고 수상비행기 타고 200마일 정도씩 이 섬 저 섬 거쳐 레이테를 향하다 남태평양 폭풍도 만났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10m 앞이 안 보였다. 나중에는 폭격기 선도로 콜세어 15대씩 필리핀으로 이동한다. 심각한 기상 속에서 B-25를 따라가는데 우리가 어디 있는 줄도 모르겠다. 그 2주간의 여정에서 항공기와 조종사 심각하게 잃고 45년 2월 필리핀 기지에 도착했다. 비전투손실이 너무 많은 게 태평양 전선이다.
첫 임무는 이틀 뒤, 보급품 실은 DC-3 두 대를 민다나오까지 엄호했다. DC-3는 활주로가 짧아 힘겨워하고, 콜세어 8대가 붙었다. 수송기가 착륙해 보급품을 내릴 때 우린 상공으로 돌았다. 동체에 300갤론 추가 연료통을 달아서 총 7시간 날았다. 복귀에서 나는 기지로 근접해 다섯 대 착륙을 선도하고, 나도 엔진 끄고 동력을 줄여 착륙하는데 활주로에 공간이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착륙한 두 비행기 사이를 비집고 착륙하는 데 성공하는데,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다른 콜세어 꼬리와 충돌했고, 브레이크를 잡느라 콜세어 앞이 들렸다. 다친 사람은 없지만 두 콜세어 모두 수리 부속이 필요했다.
주 임무는 해군 수송단을 하늘에서 인수인계해 엄호하는 것인데 기회만 되면 때릴 표적을 찾는다. 그런 임무는 즐거운 수준이다. 수통을 들고 타서 마시며 졸음을 막는다. 필리핀은 뜨겁고 습도가 높다. 어느 날 레이테만을 비행하는데 엔진에 결함이 생겨서 기지로 돌렸는데, 그때 비행장 해안에서 맥아더가 필리핀으로 돌아오는 그 유명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맥아더 때문에 우린 장장 200마일 구역을 수색하며 엄호했다.
해 뜨기 두 시간 전에 이륙해 동이 틀 때 수송선단 상공에 도달하고, 어두워질 때까지 다른 전대와 교대로 선단을 방어한다. 이 과정에도 조종사 몇을 잃었다. 기상 브리핑도 없이 무조건 선단을 엄호하며 죽도록 난다. 가끔은 무선-침묵 시간에 조종사가 사라지고, 동트고 나면 비행기가 사라진 걸 안다. 바다 전투가 그런 식이다. 안 돌아오면 전사다. 무전기 대답 없으면 전사다.
사마르 비행장에서 큰 사고가 세 건 있었다. 동트기 전 이륙하는데 부전대장이 이륙선에 서고 다른 콜세어가 활주로로 이동하고 있었다. 관제탑이 [활주로 이륙!] 경고했지만 이동하던 콜세어를 들이받아 둘 다 심한 화상을 입었다.
두 번째 사고는 B-24. B-24 전대가 활주로를 같이 쓰고 있었고, 사마르에서 이륙해 오키나와 폭격하러 갔다. 좁은 활주로에서 선도 B-24가 달리며 거의 뜨는데 주기장 근처를 지났고, 이때 주기장을 돌던 콜세어 꼬리 수직판이 폭격기 날개 끝을 쳤다. B-24는 활주로 끝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 사망했다.
세 번째는 전대 전체를 날려버릴 뻔했다. 그날 난 당직장교로 모든 비행기 이륙을 기록하고 있었다. 안전 지시로 조종사들은 옹벽으로 갔고, 정비장교와 난 텐트들 중앙에 서서 이륙기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륙 2파 첫 비행기가 이륙하고 2호기가 막 뜨는데, 바퀴가 활주로 노면의 구멍을 때리면서 펑크가 났고, 비행기가 돌더니 우리를 향해 질주한다. 달려오는 콜세어를 보고 우리 둘은 목숨 걸고 달렸다. 콜세어 바퀴가 첫 번째 텐트 세 개를 연달아 밟았고, 멈춰 돌아서서 상황을 봤는데, 콜세어가 옹벽 근처에서 폭발했다. 조종사가 의식을 잃은 걸 정비반이 달려가 꺼냈지만, 총 14명 사망하고 많이 다쳤으며 비행기도 여러 대 부서졌다.
1945년 4월 세 번째 참전이 끝나고 우린 마리아나제도로 가서 일본에 가까워졌다. 1년 동안 임무를 111개 했고, 걸출한 조종사들을 잃었으며 위험한 임무에 직면하여 주저한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 모두 젊은 나이에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고졸이었고 어떤 사람은 박사 학위자였는데, 서로 그딴 거 말하지 않았다. 엄청난 수준의 군인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귀국 : 우리가 미국에 도착하던 시기에 새로 조직된 유엔이 첫 회의를 가졌다. 군은 조종사들에게 세 가지 선택권을 줬다 : East Coast, West Coast, ferry duty. 난 ferry를 택해서 펜실베이니아를 받았다. 다양한 비행기가 있었지만 전투기 조종사는 선택이 별로 없다. F4U, F6F인데, F6F는 콜세어보다 한참 느렸으나 해군 운영 기종이었다.
거기서 45년 7월 뉴욕의 간호사학교를 다니던 아내 자넷을 만났다. ferry duty는 비행기를 이 기지에서 저 기지로 운반하는 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행기를 나르고 호텔에서 자곤 했다. 그렇게 짬짬이 데이트하다 일본 항복 소식을 들었다.
이 항공기 배달 일은 기상이 문제였는데, 내가 뉴욕에 배달하고 호텔에 숙박하다 B-25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82층과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10월 말이 되자 모든 해병대 조종사는 롱비치에 모여 필요한 항공기를 전국 기지에 배달하는 일을 한다. 서부 해안으로 몰렸던 비행기들을 전국에 분포시켜 드리는 거다.
1946년이 되자 사람들이 군에서 나가기 시작하고 나도 3월 제대를 결정했다. 나는 정식 임관이 아니라 임시 임관 장교였고, 실제 계급은 상사였다. 제대하고 예비군으로 들어가자 소위로 인정되었다. 나는 GI Bill로 진학해 민간인 비행교관 자격을 따려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헤이건은 제대하지 않고 중국에 가 있었다. 이때 다시 군대에서 비행이 하고 싶어졌고, 제대 90일 만에 모병소를 찾아가 재입대에 서명해 상사 계급을 다시 받아 버지니아 콴티코 기지를 받는다. 내가 속한 전대장은 존 스미스 대령으로 최고훈장까지 탄 해병대 탑 에이스 조종사다. 스미스 대령은 장교가 아닌 상사 조종사로 나타난 날 보고 놀랐다. 내 이력서에는 항상 이 문구가 있었다. [이 사람을 장교 임관에 추천할 것인가?] 스미스 대령은 거절했고 나도 임관을 거부했다. 이 질문을 여러 번 받자 스미스 대령은 보고서에 써넣었다. [추천한다. 우리 부대 장교들 다수보다 끝내주는 사람이다.]
이곳 12전대는 학생 조종사를 위한 항공기를 유지하는 임무였고, 신형 로켓과 폭탄을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 우린 또 비행기를 몰고 와야 했다. 나도 해체 정비한 콜세어를 몰고 왔다. 필요하면 스미스 대령도 비행기를 몰았다.
(주 : 군용뿐 아니라 민간까지 모든 선박 잠수함 비행기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100% 완전 해체 수리가 규정되어 있다. 이 완전분해 수리는 감춰졌던 어지간한 부품을 새로 교체하기에, 운영 불가 시간 + 돈 장난 아니다. 돈이 너무 드니까 선박사들이 생략하고 최대한 굴리고 고철로 팔려다 사고 난다. 대표적인 방법이 규정이 느슨한 국가로 되팔면서 국적을 바꿔 운영하는 거다. 항공사는 제조사부터 눈깔을 부라려 얄짤 없다. 완전 분해 수리 비용을 감당 못 해서 팔아버리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추락하는 거다.)
자넷은 1947년 8월 간호학교를 졸업했고, 우린 1947년 11월 결혼했다.
기억에 남는 비행들 : 샌디에이고에서 분해 수리한 콜세어 4대를 가져오는 비행 : 오닐 대위, 콜세어 조종 시간이 부족한 댄 스티스 중위, 기술부사관 우디 윌리엄스와 나.
지도와 기상을 보며 비행 루트를 연구했다. 기상이 안 좋아서 1만 피트로 정했고, 세인트루이스 지역은 무전이 안 된다. 구름의 하단 고도를 몰랐는데, 스티스 중위 고향이 공교롭게 세인트루이스였다. 이 비행은 간신히 끝냈는데, 낮게 깔린 구름 속을 내려오면서 세인트루이스 근처 산악에 충돌할 뻔했다.
두 번째는 혼자 했던 펜사콜라 배달이었다. 기상이 정말 안 좋았는데, 리치몬드 상공에서 강력한 눈 폭풍을 만났다. 내가 안 도착하자 당직장교가 스미스 대령에게 보고했고, 난 당시 어디 상공인 줄 몰랐는데, 문득 철로를 봤다. 철도는 기지에서 150m로 가까웠던 걸 기억하고, 결국 기지에 안착할 수 있었다. 얼마나 눈이 내렸는지 비행기 날개와 동체가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관제탑은 내가 착륙하는 줄도 몰랐다. 스미스 대령이 차를 몰고 나왔다. 그때 생각은? ‘제기랄, 월요일에 무척 깨지겠네.’
세 번째는 1948년 해리 트루먼 취임식에 비행기 100대가 행사 비행한 것. 콜세어와 F7F 타이거캣 50대가 참가했다. 타이거캣 두 대가 편대비행 중 날개가 충돌했다. 타이거캣 탑승자 두 명은 또 공교롭게 모두 최고훈장 수여자였다.
네 번째는 내가 쌍발엔진 타이거캣에 자넷을 태운 일이다. 후방석에 단단히 결속하고 움직이지 말라고 하고 비행했는데, 풍경을 관람하다가 자넷에게 루프 기동 경험하겠냐 물었고, 자넷은 no 했으나 – 내가 해버렸다. 이혼할 뻔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비행기만 보면 자넷의 복부가 딴딴해지는 증상이 일어난다.
다섯 번째는 콴티코에서 오하이오 데이톤. 좋은 친구였던 립 하우스 상사의 고향이 데이톤이고, 어머니를 보러 가고 싶으니 태워달라고 한다. 서류작업하고 기상을 보니 남쪽에 폭풍이 있다. 찰스톤 상공에서 무전기 끊겨 낮게 내려가도 소통되지 않았고, 난 또다시 내가 어딘 줄 모른다.
30분 뒤, 난 고속도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다 산이 하나 보였고, 구름 아래 비행장이 보인다. 그런데 비행장 깃발을 보니 활주로 구멍들 때문에 폐쇄 상태다. 찰스톤 남쪽 50마일 웨스트버지니아 버클리 비행장임을 깨달았다. 두 시간 뒤 찰스톤 관제탑과 무전이 됐고, [날씨 때문에 대기하고 있는데, 활주로를 남향으로 이륙한 비행기가 한 대만 조심하면 된다] 통보.
그러나 날씨는 나아질 기미가 없고, 웨스트버지니아 산악을 돌고 있는데, 이제 버클리 공항도 안 보인다. 난 립 상사에게 구름 위로 올르겠다 했는데, 상사는 오히려 맑은 날 비행하는 걸 안 좋아하는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종석 창문에 얼음이 끼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한다.
“낙하산으로 비상탈출할 수도 있어.”
“No way.”
구름 위로 만 피트 이상 올라갔는데, 신시내티 쪽은 아주 맑다. 결국 데이톤에 착륙하기로 해서 성공한다. 착륙해서 하루 쉬고 급유하는데 공군 소령이 오더니 나와 상사를 물끄러미, 비행 계획과 번갈아 본다. 아마도 헌병 같았다. “추가 탑승자는 불법이야. 군용 비행기로 뭐 하는 짓이야! 하여간 해병대는 안 돼!” 산악은 여전히 기상이 안 좋고 립 상사는 후방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건다. 이때 처음 남이 보기에 해병대가 이상하구나 생각이 들었다.
1949년 난 캘리포니아 엘 토로 기지로 전근한다. 당시 엘 토로는 신형 F-80 슈팅스타를 수령하고 있었다. 다행히 전대장은 해병대 최고 에이스 출신이고 사병 조종사가 셋이나 있었다. 그런데 콜세어는 위관장교 이상만 몰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결국 난 542전대, 타이거캣 야간전투기전대로 간다.
1947년부터 해군과 해병대는 병사/부사관의 비행학교 입교를 중지했다. 기지에서 1년 근무하던 1950년 초 한국에서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는다.
Korean War : 1950년 6월 한국이 뜨거워지면서 해병대가 갈 것 같았다. 비행이 가능할 것 같은 33지원전대로 전출했다. 난 비행단에서 거의 모든 기종을 조종할 수 있는 소수였다. 한국으로 급파한다는 경계가 발령되었다.
난 자넷과 집 구하고 가전을 들여놓은 다음, 1950년 7월 30일 항공모함에 항공기와 장비를 싣고 롱비치를 떠난다. 자넷이 임신 8개월이었다.
오사카 근처 이타미 기지에 일단 자리를 잡았고, 벌써 콜세어들이 항공모함 이착함 훈련을 시작한다. 확실한 건 알고 있었다 : 전투기 조종사는 가장 먼저 투입되고 가장 먼저 귀국한다! 난 오랜 친구인 대령의 사무실로 가서 날 전투기전대에 넣어달라고 했다. “비비토, 이미 보직 받았잖아. 돌아가서 그거 해!”
9월에 인천 상륙이 일어나면서 우리 33지원전대는 한국으로 건너가 김포(K-14)에 주둔한다. 난 작전 전대로 들어갈 비행기 시험비행을 했다. 그때 비행학교 동기를 만나서 F-7F 항공촬영 비행에 동참했고, 콜세어 한 대가 엄호로 붙었다. 촬영지는 원산 항구. 이유를 몰랐으나 나중에 해병대가 상륙하는 곳이었다.
적십자사를 통해서 9월 24일에 아들 크레이그가 태어나고 산모도 건강하단 전보를 받았는데, 이때 다른 소식을 듣는다. 막내 헤이건이 또 한국에 와서 해병 1사단으로 인천 상륙 중 다쳤단 거다. 알고 보니 헤이건은 부산방어선부터 (해병 임시여단으로) 싸웠고, 인천에 상륙하다 총알이 중지와 손바닥을 때리고 소총 개머리판을 때리면서 나무 파편으로 손을 다쳤다. 총알보다 나무 파편에 다친 게 컸다. 그러나 영구 손상 없이 치료되었다.
당시 북한군 작은 비행기가 밤에 김포로 날아와서 소형 폭탄을 투하했다. 피해는 적어도 밤에 그러니까 효과가 작지 않다. 이걸 지켜보면 아군 야간전투기 조종사들이 근 한 달이 지나 격추시켜 버렸다.
11월 말에 원산으로 날아가 착륙했는데, 33전대는 이타미 기지로 복귀명령을 받는다. 당시는 크리스마스면 이 작은 전쟁이 끝날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타미에 자리 잡기도 전에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왔고, 갑자기 전혀 다른 전쟁이 된다.
12월 초, 내 친구이자 참모인 아트 스테인크로스 대령이 나 포함 조종사 여섯을 아침 10시 사무실로 호출한다. 짐 꾸려서 흥남으로 가는 수송기를 타란다. 거기 6전대 조종사 여섯과 교대하란 거다. 6전대는 정찰기 OY-5와 헬기를 운영했는데, 당시 헬기든 비행기든 조종사 부족이었다. 헬기 도입 초기에는 고정익 출신이 헬기를 배워서 보직을 바꿨으나, 그때부터 헬기만 배운 조종사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대령이 정오에 다시 날 부르더니 이타미에 있는 타이거캣을 몰고 흥남으로 가란다. 비행기가 모자란단다. 난 타이거캣을 몰고 오후 3시 흥남에 착륙했고, 6전대 작전 텐트로 걸어갔다. 거기서, 그렇게 더러운 조종사들을 태어나 처음 봤다. 거기서 2차대전 때 봤던 조종사들도 만났다. 허브 발렌타인과 별명이 ‘방탄’인 M. D. 힐을 만났다. 힐은 2차대전 때 엄청난 총알구멍에도 복귀에 성공해 방탄이란 별명을 얻었었다. 그때 한국 비행장을 가면 2차대전 참전 조종사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난 처음으로 OY 정찰기 비행을 맛보았다. 체중 90kg 관측장교와 함께 해병 1사단 포병 관측기가 된 것이다. 중공군이 나타나 밀어대며 해병대가 문제에 빠졌다. 우린 흥남에서 이륙해 고지대 하갈우리란 곳으로 날아갔고, 5천 피트 상공에서 OY는 엔진 소리가 작아 땅에서 잘 안 보인다.
포를 쏘고 있는 포병부대 위를 낮게 지나갔는데, 기체가 작아서 진동 충격이 꽤 있었다. 포 쏠 때 너무 낮게 내려가면 위험한 걸 알았다. 그날 OY 정찰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와 관측장교를 잃었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소식이 달라졌다. 지상부대가 추락한 정찰기에서 둘을 끌어내 항구의 병원선까지 데리고 가는 데 성공했단다. 둘 상태는 아주 안 좋았지만 살아 있었다. 그때 해병대는 중공군에 밀려 하갈우리에서 남하하고 있었다.
우린 1950년 크리스마스 전에 흥남에서 나왔다. 못 가져가는 비행기는 모두 파괴하고 남겨질 장비와 건물도 폭파했다. 우린 처음 시작했던 부산으로 내려와 재편성하고 반도에서 작전을 재개한다.
우리가 간 기지는 부산 북쪽의 오래된 한국 비행장 K-3였다. 거기서 난 TBM(어벤저 수뢰기)를 몰았는데, 전대에서 어벤저를 몰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나였다. 나도 미국 Ferry Command에서 한 시간 몰아본 게 전부였다. 이 TBM은 안에 뭐든 쑤려 넣을 수 있었다. 나는 무선 중계도 했고, 우편물도 날랐으며 장비도 운송했다. (주 : 어벤저는 후방 기총수 좌석이 있는 2인승이다. 거기 물건을 채우고 비행한 것으로 보인다.) 잡다한 기종에 문제가 생기면 “2차대전 출신 누구 있지?!” 2차대전 후 군에 남은 조종사들이 이 배송비행 임무를 했기에 별의별 기종을 다 몰아볼 수 있었다. 전투기 조종사가 어쩔 수 없이 수송기를 배송하려면 그래도 공부는 해야하는 거다.
이 어벤저는 함공모함 용도라 평평하기만 하면 강변이나 풀밭 어디나 착륙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외딴 벌판에 착륙해 사단 우편낭을 실었는데, 곧 귀국할 병사 셋이 타겠다고 한다. 공간이 없다고 했으나 사단장 명령이라고 우기며 태워달라고 한다. 난 낙하산이 하나밖에 없는데 상관없냐 물었고, 그래도 타겠다기에 우편낭 밑으로 엎드리고 우겨 탔고, 이륙해 K-3로 돌아왔다. 어벤저에 사람 넷이 탄 건 기네스 아닌가 싶다.
1951년 2월 다시 이동해 한국 중부 원주로 올라갔고, 난 K-3 기지 TBM에서 OY 정찰기로 돌아간다. 맨땅 활주로였는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땅이 얼어 있어 이륙과 착륙이 도전이었다.
한번은 관측장교 칼버트 대위를 태우고 포병 관측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는데 중공군과 북한군이 능선에 참호 파고 들어가 있고 해병 1개 중대가 올라가는 걸 봤다. 칼버트 대위가 저 위로 좀 날아달래더니 연막 수류탄들을 까서 적 참호선에 투하한다. 능선 상공을 세 번째 돌 때 모든 화력이 우릴 쏜다. 무전기가 나가서 항공폭격을 부를 수도 없었다. 우린 모든 수류탄을 사용해 공격하는 해병대에게 진지화된 적을 알리고 경고했고, 기지로 돌아가 그곳에 항공폭격을 요청했다. 그때 모든 총을 들어 쐈는데 멍청이들이 우릴 왜 못 맞췄는지 모르겠다. 정찰기에는 총알구멍 3개가 전부였고, 두 발은 날개, 한 발은 칼버트 대위 뒤쪽이었다. 이 행동으로 많은 해병대 목숨을 구했다.
3월에 귀국 명령이 떨어졌고, 한국을 떠날 때까지 6개월 동안 목욕을 못 했다. 일본에서 일생 최대로 긴 샤워를 했다. 난 지구에서 한국처럼 추운 곳은 처음이었다. 정찰기로 두세 시간 비행하면 얼마나 껴입었던 간에 돌아와서 몸 녹는 데 한 시간은 걸렸다.
51년 3월 말 미국에 도착했고, 아들 크레이그는 6개월이었다. 자넷은 집에서 혼자 대단한 일을 해냈다. 요즘도 해병대 와이프들은 그런 고생을 혼자 감당하고 불평하지 않는다. 파병 때문에 출산하고 신생아 키우는 것이 얼마나 미치고 환장하는 일인 줄 그때는 몰랐다.
El Toro Again : 난 캘리포니아 엘 토로 해병항공단의 정비장이자 시험 비행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R4D(DC-3)를 매일 비행했다. 어느 날 작전장교가 R4D 점검이 가능하냐고 묻기에 당연하죠! 그렇게 부조종석에 앉아 비행에 동참했다. 뒤로 그 수송기를 자꾸 맡긴다. 수송기가 가까운 기지로 매일 비행했기 때문이다. 난 다기능 상사였다. “이거 어쩌지? 2차대전 조종사 불러!”
엘 토로에서 신형 엔진을 장착한 콜세어를 시험 비행했고, 꼬리가 밑으로 쳐지는 것 외에 나쁘지 않았다. 난 시험비행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 콜세어는 좀 위험했다. 엔진 출력이 이전보다 상당히 컸는데,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RPM이 통제가 안 되고 계속 올라간다. 엔진을 끌 수도 없어서 엔진이 미친 상태로 착륙했다. 내 시험비행으로 밝혀진 이유는 엔진오일 유압선 불량이었다. 오랜 친구 같은 콜세어에서 벌어진 일이라 많이 놀랐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더러 죽을 때까지 비행하라는 거야?’
헬리콥터 : 1952년 초, 최고 정비병 3명을 헬리콥터학교에 보낸다는 소리를 듣는다. 6주 후에 세 명을 더 보낸다기에 내 이름을 맨 위에 올렸다. 다시 콴티코 헬기 훈련장을 향해 이삿짐과 자넷과 크레이그를 싣고 동부로 간다.
1952년 3월, 나는 876번째 해군/해병 헬기 조종사로 졸업하고, 다시 아내와 아들을 싣고 서부 162헬기전대로 온다. 전대의 헬기 조종사들은 예비군 출신으로 현역이 되었는데, 콜세어라면 거부할 사람들이 헬기라니 현역으로 복귀해 교육을 수료했던 거다.
훈련은 전투기보다 힘들었다. 병력과 물자를 나르고 산악 비행도 있고 라스베가스 사막 훈련도 있었다. 헬기 20대가 병사 다섯씩 태우고 15km 거리 원자폭탄 시험장으로 날랐다. 카운트 10을 남기고 실제 눈으로 봤다. 주기한 헬기들이 후폭풍으로 밀리고, 상상할 수 없었던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사방이 하얗게 변하면서 지상이 평평해졌다. 버섯 모양 구름이 무지개색으로 빛나면서 여기가 천국인가 싶었다. 폭풍 직후 헬기로 병사들을 태우고 날아 그 장소에 랜딩시켰다. 선인장이 마른 목재처럼 불타고 있었다.
다시 돌아와 재급유하고 헬기 20대가 대형을 형성해 나는데 내 왼쪽 헬기가 대형에서 이탈해 떨어진다. 엔진 결함인데, 조종사가 연료탱크 전환 스위칭을 까먹었다. 헬기가 평지에 떨어져 구르면서 두 조종사와 승무원장이 다쳤다.
난 가까운 능선에 착륙했는데, 로터 RPM을 살피며 바퀴 닿을 곳을 찾으라 애먹었다. 부조종사가 바로 소화기 들고 뛰어나갔고, 승무원장도 추락 장소로 뛰었다. 난 버티고 있다가 부조종사가 손 흔드는 걸 보고 그리로 갔다. 그렇게 추락 상태를 정확히 보았다. 골짜기에 추락해 내가 앉을 수는 없었고, 둘은 소화기로 불을 끄며 부상자를 찾았는데, 헬기의 화재로 온 산 수목까지 옮겨붙는다. 부조종사가 부상자를 골짜기 위 도로로 끌고 올라왔고, 어깨높이에서 부상자를 헬기에 올리는데 죽을 똥을 쌌다. 당국은 근처 농장에서 일하던 죄수들까지 불러서 산불을 껐다. 헬기 추락 때 38구경 권총 20정이 든 상자가 있었는데, 권총 하나가 실종된다.
훈련은 계속되고 신형 헬기를 수령하려 동부도 여러 번 갔다 왔다. 워낙 먼 비행이라 고속도로 트럭 휴게소에 착륙해 아침 점심을 먹기도 했다. 주차장에 트럭들 옆으로 헬기 여섯 대가 착륙해서 밥 먹은 기억이 난다.
1952년 9월에 난 다시 소위로 임관했다.
대체 임관을 몇 번이나 하는 거냐.
정확히 말하면 세 번째다.
이 시기에 자넷과 나는 둘째를 갖기로 했고, 한국전쟁도 휴전회담이 진행하면서 우리 생활도 안정되고 있었다. 그러던 1953년 6월, 휴전회담 백업으로 나더러 해병 16항공단으로 가란다. 다시 일본, 자넷은 둘째 임신 8개월이다.
16항공단에는 헬기전대 161, 162, 163에 각 전대 헬기가 15대. 혼신과 이타미 중간의 구 제로기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었다. 한 달 후 둘째 게일이 태어났다. 그때 일본에 폭풍이 닥쳤고, 우린 헬기로 10만 명이나 대피시켰다.
혼신 기지는 끔찍했다. 텐트에 살면서 춥고 축축했다. 오전 6시 야전전화기로 날 찾는다. 가면서 온갖 고민이 들었고, 전화를 받아보니 크레이그가 아프고 게일도 아프단다. 아내 자신도 아프단다. 그때부터 난 너무 동정적으로 받아줘도 힘들단 걸 알았다. 12월에는 아버지 부고 전보가 날아왔다. 도착해보니 아버지는 이미 땅속으로 들어가셨고, 집으로 가는 내내 추웠고, 그때 4개월 된 게일을 처음 봤다.
일본으로 돌아오니 도쿄 근처로 이동해 드디어 막사 거주가 되었다. 그 직후, 난 도피/탈출학교(escape and evasion school)에 입교하러 한국으로 간다. 그 시기 한국은 냉기와 광기가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그 교육 받고 9월 미국으로 돌아와 노스캐롤라이나 해병 26(헬기)항공단으로 발령 난다. 54년 말이 되자 예비군 조종사들이 모두 방출되었고, 해병대는 그동안 수고했다며 혹시 다른 일(전쟁)이 있으면 보자고 이별을 고했다. 장난하냐? 나는 정규군 신분으로 남아서 계속 비행시간을 채우고 있었는데, 우리 지휘관은 진급이 필요했고 우리 조종사들은 그걸 도와야 한다. 그분은 소장까지 올라갔다.
(주 : 이런 내용에 본 잇빨중사가 공감이 가는 것이, 나도 부대 공기가 변하는 걸 6년간 두 번 경험했다. 그 ‘변하는 공기’는 허탈하고 낯설다. 군대 개판이란 기분도 들었다. 군대는 그렇게 공기가 여러 번 변하면서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는 것 같다. 그렇게 분위기가 바뀔 때 정말 군대에 정 떨어지고 내가 초라해진다. 내 제대에 영향을 준 것 중 하나가 대대 팀 통폐합 개편이었다. 원사로 면역하는 건 그런 허탈을 한 10번 이상 경험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갑자기 판을 엎거나 이해하기 힘든 지휘관 부임은 서비스팩이다. 나 역시 2년 전에 공기가 바뀐 상태로 입대한 것이 맞다. 그렇게 공기가 변할 때 군 생활 단순해 보이고 허무하다. 본인 입대 2년 전의 사라진 공기는 1년에 천리행군 두 번과 24km 도피탈출 달리기가 상징적.)
자넷과 나는 (다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셋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토드는 55년 2월 태어났다.
1956년에는 플로리다 펜사콜라 헬기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때는 대위가 되었고, 나이 먹은 내 조종사 친구가 헬기훈련 받으러 들어왔다. “필요한 편람 좀 넘기고, 나 너무 갈구지 마.” 난 경고했다. “니가 헬기훈련을 수료하면 내가 술 한 병 주고, 못 하면 니가 나한테 줘.”
그곳에 T-28 전투기/훈련기가 있어 고정익도 몰았다. 기회만 오면 그걸 몰고 올라가 아크로바틱 곡예를 했다. 지휘관으로 오는 사람들은 거의 내가 알던 사람들이었고, 나는 표준 조종사 중 하나로 간주되었다. 같이 근무하다가 몇 년 뒤 내 지휘관으로 온다. 난 병사 계급과 장교 계급을 오르락내리락해서 쉽게 못 올라간다.
1958년, 2년간 교관 생활을 끝낼 때, 한 훈련생이 단독비행 하다가 엔진이 꺼졌으나 헬리콥터 피해 없이 착륙에 성공했다. 교관으로 뿌듯했다. 난 무사고 1천 시간 기록을 남기고 펜사콜라를 떠났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것인 탠덤 로터 헬리콥터, 앞뒤로 로터가 달린 헬리콥터다. 기초 훈련 온 어느 훈련생을 받아보니 트윈 로터 헬기 주특기가 생겼다.
가족들 데리고 또 서부로 이사. 펜사콜라에서 또 친구로 지내던 켄 무스가 중령이 되어 전대장으로 부임했고, 해병대에 처음 도입된 신형 탠덤 로터 HR-2S 전대다. 무스가 전대 정비장교하라고 나에게 물었고, 대체 군에서 쉬운 일은 영원히 없어 보였다. HR-2S 정비는 악몽이었다. 대단한 정비장인 상사가 있었는데, 그 상사가 부사관 클럽에서 사이가 껄끄러운 승무원장을 만났고, 승무원장이 맥주를 마시다 45구경 권총을 꺼내서 쏴, 정비장이 사망했다. 그 승무원장은 종신형 받았다.
1960년 무스 중령이 떠나고 중령이 왔는데, 역시 펜사콜라에서 같이 근무하던 사람이다. 해안경비대 기지가 있는 섬에 7천 파운드 물탱크를 교체하는 비행도 같이했다. 그때 공군 F-100 전투기가 사막에 추락했고, 엔진을 분해해 가져오란 명령을 받는다. 사고 조종사 이름이 익숙했는데, 20년 전 켄터키에서 마지막으로 본 친구인 샘 그레이 소령이었다. 이제 해병항공단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물어서 날 모르는 고급장교가 없다.
1961년이 되자 해병대는 임시로 임관하고 20년 근속한 장교들을 퇴출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난 3월에 20년이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나가자 사령부는 장교가 확 줄어드는 걸 늦게 깨달았다. 다시 명령을 수정해 예비군이나 현역 근무를 바라는 사람은 신청하라고 한다. 난 소령 진급 예정자였으나,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진급 때문에 1~2년 더 근무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1961년 9월 20일 미합중국 해병대에서 퇴역했다.
난 민간 항공사 시험 비행사로 취직했다. 새로 생산된 헬기를 시험하는 일이다. 프로토 타입 (실험용 1호기) 모델 비행도 했다. 이런 비행은 항공사 사장과 구입자도 관람한다. 위험했지만 보수가 셌다. 1978년까지 이런 비행을 하다 은퇴하려 했으나 사장이 공장 제조업무를 제의했고, 그렇게 일하다 1983년 은퇴했다.
에파테로 돌아가기 : 나는 1944년 5월 2일 남태평양 에파테 섬 비행장에 도착했다. 정말 아름다운 섬으로, 1942년 2월 일본군에게 밀려난 뒤 해병대가 처음으로 만든 항공기지였다. 과달카날이 북서쪽 1,000km.
그때는 전투기 조종사의 반에서 75%가 태평양전쟁 초반을 모르던 신입들로, 전투에 들어가기도 전에 일본 전투기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감추고 싶지만 정말 무서웠다. 그러나 임무 111회를 하고도 적기를 딱 한 번 봤다. 에이스를 꿈꿨다면 항공모함 조종사거나 1년 일찍 조종사가 돼야 했다.
가장 많이 본 것은 지상 대공사격과 대공포화. 그러나 우린 젊었고, 전투는 궁극의 진짜 훈련이었다. 우린 적기나 대공포에 맞아 전사하는 걸 걱정하진 않았다. 우리가 전투기전대로 전입해 작전을 뛰지만 여전히 훈련 중이란 느낌이 있었다. 솔로몬 군도로 가면서 전투가 가열된다.
거기 도착하고 3일 만에 직강하폭격기 36대에 대한 콜세어 호위기 12대 안에 내가 들어갔다. 항법은 폭격기가 하고 우린 폭격기보다 약 1km 위쪽에서 쇠사슬처럼 중간에 교차하며 좌우를 교대하는 바구니 짜기(Thatch Weave) 전술로 엄호했다. 적기로부터 폭격기들을 방어하고 우리 편대 자신도 방어하는 전술. 전투기에 앉아서 바쁘게 기동해야 한다.
두 번째 참전부터 뭐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폭격기가 목표를 못 찾으면 우리도 미아가 된다. 푸른 태평양 외에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때 눈은 연료 잔유량으로 레이저를 뿜는다. 그러다 진짜 태평양전선을 만난 그날.
전대장 그레고리 중령은 시간이 지나도 우리가 돌아오지 않자 radio homing device 전파를 쏴서 기지로 유도하라고 한다. 그때 각도가 070도. 이때는 각자 남은 연료로 알아서 도달해야 했고, 폭격기들은 자기들 기지로 모두 복귀했다. 우리만 태평양의 고아가 되었다. 난 콜세어 프로펠러 회전을 혁명적인 최저로 낮추고 고도를 유지하기 위해 온갖 잡다한 조작을 했다.
우리 눈에 에파테 섬이 보였을 때, 우리 기지인 ‘퀴온 힐’이나 ‘하바나 항’ 중 택해야 했다. 퀴온 힐 기지가 보였을 때 내 고도는 약 300m에 해안까지 2.5km – 연료는 10갤론. 그때 엔진을 껐다. 난 왼쪽으로 틀어 해안선과 수평으로 하여 맞바람으로 들어가면서 물로 내려간다. 바퀴는 안 내리고 양날개 수평판만 내려 활공했다. 수면/해상 착륙 때 바퀴를 내렸다가 어디 걸려서 뒤집어질 수 있다.
물에 닿기 직전 오른쪽 수평판의 유압이 사라지면서 멈추고, 이제 방향타로만 수평을 유지하고, 수평이 잡힌 상태에서 프로펠러와 엔진이 산호를 때렸고, 그 순간 뒤가 들리면서 반쯤 물에 잠긴 상태로 모래톱에 멈췄다.
두 원주민이 물을 거슬러 와 내 낙하산을 가져갔고, 난 가슴 깊이 물에서 그들을 따라갔다. 이 불시착에서 조종사 두 명이 죽었다. 두 콜세어는 활주로와 해안 사이 수목지대에 떨어졌다.
1990년 4월 2일, 46년 1개월이 지나서 난 에파테로 갔다. 아내, 장남 크레이그와 며느리 수잔네가 동행했다. 크레이그가 자랄 때 이 불시착을 얘기했었다. 크레이그와 수잔네가 호주로 여행 갔다가 우리와 피지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때 난 나의 콜세어를 찾아보기로 했다. (F4U-1 S/N 02270. 1944년 5월 5일. 4시간 14분 비행하고 떨어진)
항상 가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난 에파테 지도를 입수해 위치를 찍었다. 어느 200m 안에 비행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헤브리디스 제도에 있는 바누아투 공화국 국제공항에 내렸고, 터미널에서 여행사 직원과 가는 방법을 상의한다.
젊은 여직원은 퀴온 힐 근처 마을에서 살았고, 내가 말하는 콜세어 비슷한 걸 해안과 비행장 사이에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때 조종사들이 모두 죽었다고도 말했고, 난 “전부는 아니고.” 했다. 여성이 보고 자란 콜세어 유해가 내 것인지는 몰랐다.
“퀴온 힐 비행장이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입구의 보초 건물은 아직 있어요. 근처에 식당이 있으니 가보면 헨리란 사람이 길을 안내해 줄 겁니다.”
3시간에 걸쳐 그리로 가서 결국 헨리를 찾았다. 헨리는 근처 마을로 데려갔고, 내 말은 들은 원주민들은 어디인 줄 아는 것 같다면서, 걸어서는 너무 오래 걸리니 카누를 타고 가자고 한다.
오,
내 비행기(she)는 놀랍게도 46년을 버티고 제법 멀쩡했다.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많은 기억을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보면 엄청난 시간들이었다.
비상착륙에 멋지게 성공해 걸어서 나왔다.
돌아보면, 그때는 내가 인지하지 못했으나
위험한 순간이 너무너무 많았다. 나뿐 아니라
모든 비행사가 그랬고, 수병도 그랬고, 사실
모든 병사가 그러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나의 오래된 콜세어를 보여주는 것이 기뻤다.
내 콜세어는 아직도 맹그로브 숲에 완벽하게 감춰져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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