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까지 소치 올림픽 봤는데
오늘 결과가 좀 안타깝군요.
이제 우리도 그렇게 배고픈
나라는 아니니 즐기는 마음이
되었으면 합니다.
잇빨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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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al of Honor Recipients
Korean War
1.아래 한국전 최고훈장 수여자는 약 114명 정도 되는데
3년간 좁은 전장으로 생각하면 이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과연 한국전을 ‘conflict’로 분류할 수 있는지 최고훈장
수여자 숫자만 봐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론은 미국이
승리하지 못한 전쟁이란 오명에 대한 반대급부인 것 같다.
2. 이 최고훈장 수여의 약 반 정도는 미 해병대 수여자다.
이 최고훈장 수여는 3차까지 아주 면밀한 조사가 진행 된 뒤에
수여된다. 수여 후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조사된다.
3. 병사가 전사했더라도 미 최고훈장 상훈에는 직접적으로
‘사망했다’라고 잘 쓰지 않으며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란 용어는 전사한 것과 같은 뜻이다. 미 의회 최고훈장 수여자
과반수는 전사자이며 생존자에게 주는 최고훈장은 희소하다.
글을 짧게 기술하려 곳곳에 본인이 그냥 ‘전사’로 기술했다.
4. 상병 심지어 일병의 지휘권을 인수하는 경우가 나오는데
상황이 급박할 경우 계급이 낮아도 2차대전 참전자인 경우가
있다. 장교를 제외하고는 경험자가 우선되는 것 같다.
5. 내용이 길어 나중에 다시 읽을 경우를 대비해 파트를 나눔.
6. 수여자 순서는 날짜/부대가 아닌 퍼스트 네임 순서.
7. 기존 기록 이외에도 전공이 수십 년 후에 인정되어
수여된 경우들이 있어 위 114명이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8. 수상자 사진을 각 내용에 첨부하는데 한 글에 50장이
한계이고 링크를 걸었다가 엑박 나는 게 싫어 전사한 분들
위주로 올립니다. 전사자는 최고훈장을 목에 건 기념사진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잇빨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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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1
찰스 G. 아브렐 상병
해병1사단 1연대 2대대 E중대 : 1951년 6월 10일 한녕(Hangnyong) :
아브렐의 소대는 고지를 향해 올라가던 중 적의 강화된 진지와 면했다.
fire team leader였던 아브렐은 위험을 무릅쓰고 앞에 돈좌된 첨병을
향해 자동화기를 쏘면서 돌진했고 적 벙커를 향해 매우 정확히 사격
했다. 앞서 수류탄 파편상이 있었는데, 아브렐 상병은 단독으로 적 벙커
를 향해 돌격했고 이어 동료들이 뒤따랐다. 두 번을 더 맞았지만 상병은
계속 돌격했다. 벙커에 들어가 안의 모든 적을 사살했을 때 상병은 희미
하게 숨을 쉬고 있었으나 곧 전사했다.
스탠리 T. 애덤스 상사
보병19연대 A중대 : 1951년 2월 4일 세심리 근처. 새벽 1시 경,
애덤스 상사는 자신의 소대를 이끌고 중대에서 200미터 떨어진 전초에
나가 있었다. 이때 적 250명이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다. 적은 3면에서
소총 기관총 박격포를 쏘며 공격했다. 공제선상에 적 그림자 약 150명이
보이자 상사는 일어나 병사들에게 착검을 명령했다. 이어 상사는 본인
외에 13명을 이끌고 적을 향해 돌격했다. 적과 50미터 거리에서 상사는
다리에 총을 맞아 쓰러졌으나, 다시 일어나 적을 향해 나아갔다. 그 동안
적 충격수류탄이 네 번이나 터지면서 그때마다 상사의 몸이 공중으로 들
렸다. 그러나 상사는 돌격을 격려하면서 계속 병사들을 고무시켰다. 약 한
시간 동안 끔직한 백병전이 일어났고 서로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쓰러져
갔다. 이 백병전으로 애덤스 상사와 동료들은 적 50명을 넘게 죽였고 나머지
는 퇴각했다. 대대의 엄호사격을 통해 앞으로 나갔던 애덤스 상사와 부하
들은 아군 전선으로 북귀했다.
윌리엄 E. 바버 대위
해병1사단 7연대 F중대 중대장. 장진호 일대 11월 28일에서 12월 2일.
중대장으로써 사단의 유일한 보급선인 3마일 길이 방어선을 지켜냈다.
이는 유담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유일한 도로였다. 방어를 명령받은 대위
는 중대를 이끌고 가 도로 근처 능선에 언 땅에 참호를 파고 적을 기다렸
다. 야간에 적 1개 연대급기 공격한다. 이후 7시간 동안 비참한 전투가
이어졌고 대위는 적을 격퇴했다. 대위는 자청해서 공중재보급만 해주면
고개를 지키겠다고 건의했다. 적은 계속 공격했고 F중대는 고개에 단독
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유담리에 고립된 해병 8천 명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대위 자신도 다리에 중상을 입은 해 29일 아침이 되자 퇴각을 하고
싶었으나 걷지 못하는 부상자를 두고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계속 방어를 결정
한다. 이후 계속해서 미친 듯한 중공군의 공격을 계속 되었다. 이 쓰라린 추위
속에서 중공군 약 1천 명이 F중대 앞에 쓰러져 죽었다. 중대는 최초 220명에서
82명 만 구조되었다. 이 F중대의 사수로 인해 해병1사단의 퇴각을 가능해졌다.
찰스 H. 바버 일병
보병17연대 K중대. 1953년 6월 4일, 속고개 근처.
일병은 "Pork-Chop Outpost"에서 정찰을 나갔다가 동료들과 함께 경사
면에 한 적 무리가 참호 파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엄폐
물을 찾을 시간도 없이 적은 발포했고, 정찰대 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유
리한 고지대로 이동하라고 명령했으나, 바커 일병은 개활지로 나가 총을
쏘고 수류탄을 적에게 던졌다. 박격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실탄이 바닥날
것을 우려한 소대장은 전초 방어선으로 퇴각명령을 내렸다. 아군이 퇴각
하는 가운데 이를 엄호하던 바커 일병의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은 적과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일병의 분투로 소대는 전초로 복귀했다.
윌리엄 B 바우(BAUGH) 일병.
해병1사단 1연대 3대대 G중대. 고토리와 하갈우리를 잇는 도로상에서
1950년 11월 29일. 이날 밤 G중대에 배속 중이던 일병의 대전차분대는
행열 이동 중에 적의 공격을 받았다. 이대 바우 일병이 타고 있던 트럭
안으로 수류탄이 하나 날아 들어왔고, 일병은 다른 분대원들에게 고함
을 쳐서 밖으로 점프하게 하고 슈류탄은 밖으로 되던지려다 수류탄이
폭발했고, 바우 일병은 조금 지나 전사했다.
에드워드 C. 벤폴드
미 해군 의무병으로 해병1사단 한 중대에 배속되었다.
1952년 9월 5일, 엄청난 포탄과 박격포탄이 중대에게 떨어졌고 곧 공격이
이어질 것으로 보였고 적은 대대급이었다. 벤폴드 의무병은 자신의 안전한
참호를 벗어나 적의 강력한 사격에도 여기저기를 기어다니며 부상자를 치료
했다. 적은 앞 뒤로 공격했고 벤폴드는 전방 폭탄구덩이에 쓰러진 해병 두 명
을 구하려 능선에 몸을 노출해 나갔다. 구덩이에 도착했을 때 적의 수류탄 두
개가 날아왔고, 벤폴드는 두 수류탄을 양손으로 쥐고는 수류탄을 안은 채 적을
향해 돌격했다. 결국 벤폴드는 수류탄을 던진 적과 같이 폭사했고 대신 두 명
의 해병을 구했다.
에모리 L. 베넷 일병
보병3사단 15연대 B중대. 1951년 6월 24일 소방산 근처.
새벽 2시 경 적 약 2개 대대가 능선으로 벌떼처럼 몰려와 돌격했다. 강력한
사격에도 적은 미친 듯이 돌격해왔고 베넷 일병의 중대는 뒤로 밀리기 시작
했다. 이때 베넷 일병은 주저 없이 자기 참호에서 나와 적이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 지점에 가자 올라오는 적들이 한 눈에 다 내려다보였고 일병은
거기 서서 자동화기를 그 무리에 대고 탄창을 바꿔가면서 사격했다. 적은 엄청
난 피해를 입었고 베넷 일병 한 명에 막혀 적의 공격은 일시 중지되었고 일병도
부상을 입었다. 이 틈을 이용해 중대는 재편성해서 반격을 했고 곧 퇴각했던
방어선까지 들어가 복구했다. 그 동안 베넷 일병은 역시 퇴각하는 적을 추격
하며 계속 사격하다가 중상을 입었다.
데이빗 B. 브릭(BLEAK) 병장.
보병40사단 223연대 의무중대. 1952년 6월 14일 한국 미나리골 근처.
원래 규정상 나가지 않아도 되었지만 병장은 정찰대에 동참해 정찰을
나갔다. 한 산을 오르다 정찰대는 소총과 자동화기의 강력한 사격을 받아
몇몇 부상자가 생겼다. 부상자를 돌보고 정찰대는 다시 앞으로 나가 한 산
정상에 도착하자 참호를 은밀히 파고 있던 적 소규모 무리의 사격을 십자
사격을 받았다. 이때 브릭 병장은 적 참호에 들어가 맨손으로 적 두 명을
때려죽이고 세 번째 적은 대검으로 죽이고 나서 참호선을 따라 이동했다.
이때 충격수류탄 하나가 동료들 앞에 떨어진 걸 보고 되던져 동료를 구했다.
병장은 몸에 총알을 맞았지만 부상자 후송에 기꺼이 나섰다. 산을 따라 내려
가다가 병장은 착검한 적 병사 두 명과 조우했다. 병장은 두의 목을 동시에
잡고 적 병사 두 머리를 충돌시켜 쓰러트리고 놔두면 가망이 없는 아군
부상자를 끝까지 데리고 밑으로 내려왔다.
넬슨 브리틴 중사
보병19연대 I중대. 1951년 3월 7일 용공리 부근.
고지 공격에서 엄폐할 곳도 거의 없고 엄청난 총알이 쏟아지는 가운데 자진해
선두에 서서 분대를 이끌었다. 중사는 분대원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고 적 거점
에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고 분대원들에게 돌아와 수류탄 충격으로 기절했다.
다시 깨어는 그는 의료치료를 거절하고 오히려 뒤로 내려가 수류탄을 모아온
다음 전투를 계속했다. 그러다 중사의 총이 고장이 났는데 그러자 즉시 뛰어
일어나 곧장 적 참호로 달려가 개머리판과 대검으로 적들을 죽였다. 그 참호를
무력화시켰을 때 중사의 분대는 사격에 돈좌되어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고 있
었다. 그러자 중사는 적 기관총좌 뒤편으로 뛰어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고 앞으로
뛰어 앞서 3명을 죽인 참호로 돌아왔다. 다시 분대가 위로 전진하려는데 이번에는
위장하고 샌드백까지 쌓은 적 기관총좌가 나타났고 기관총좌 양 옆에는 적 소총수
들이 있었다. 이때 다시 중사는 기관총좌를 향해 혼자 돌격했는데 기관총에 정면
으로 맞아 결국 전사했다. 중사는 적 총 20명을 혼자 죽였고 자동화기 4개를
파괴했다.
멜빈 L. 브라운 일병
제8공병대대 D중대. 1950년 9월 4일 개산 근처.
그의 소대가 755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동안 적은 소총과 자동화기를 들고
반격해왔다. 당시 그곳에는 15미터 높이의 벽(wall)이 있었고 브라운 일병은
그 벽을 통해서 소총으로 적에게 엄청나게 사격했다. 일병은 곧 부상을 당했
으나 그 자리를 계속 지키면서 수류탄을 적에게 던져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브라운 일병의 수류탄이 다 소모되자 가까운 참호에 있던 동료들이 브라운에게
수류탄을 던져줬다. 수류탄이 조금 왼쪽에 떨어지자 일병은 싸락눈 같은 적 사격
을 무시하고 달려가 수류탄을 적에게 투척했다. 브라운 일병은 이제 아무런 무기
가 없었고 그러자 군장에서 야전삽을 꺼내 나타나는 적을 한 명씩 야전삽으로 쳐
죽였다. 그렇게 벽에서 야전삽으로 죽인 적이 10-12명이다. 이에 고무된 브라운
의 소대가 반격을 가해 물러났던 방어선을 수복했다.
로이드 L. 버커 중위
1기병사단 5기병연대 G중대. 1951년 10월 28일 총동 근처.
중대의 선도 소대로 진출하다가 적의 강력한 사격에 소대가 돈좌되었다.
이때 소대 지휘부와 같이 있던 버커 중위는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자신을
따르라고 소리쳤다. 앞에 적 벙커 3개가 있었다. 중위는 몸을 노출하면서
과감히 전진해 벙커들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이어 중위는 M1 소총을 하나
받아 단독으로 돌격해 기관총좌 안에 있던 적 모두를 사살했다. 벙커 안에
적 수류탄을 노획해 다른 벙커에 투척했고 이어 그 벙커로 달려가 권총으로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세 명을 또 사살했다.
소대원들에 따르라 명령하고 중위는 세 번째 벙커로 향했다. 이때 중위는
날아오는 적 수류탄을 공중에서 직접 손으로 캐치해 여러 발 되던졌다. 소
대장의 이런 행동을 본 소대원들은 전체가 앞으로 폭풍처럼 돌격해 적 거점
을 월경했다. 그러나 직후 사격이 또 늘어나면서 소대는 다시 돈좌된다. 버커
중위는 경기관총과 실탄 세 박스를 들고 앞의 둔덕으로 뛰어가 기관총을 거치
하고 적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이때 이 사격으로 적 75명 정도가 죽었다. 중위
는 다쳤지만 실탄을 더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후 정확한 기관총사격으로 적
박격포좌 두 개와 기관총좌 하나를 무력화시켰다. 이후 다시 공격해 퇴각하는
적 25명 정도 더 사살하고 목표를 획득했다. 중위와 소대 35명으로는 획득이
불가능한 목표였다.
버리스 토니 K 중사
보병 2사단 38연대 L중대. 문동리 부근 51년 10월 8-9일.
10월 8일 중대는 강력한 적 사격에 직면했고 이때 버리스 중사는 단독으로
앞을 향해 돌격하고 수류탄을 던져 적 거점의 적 15명 정도를 사살했다. 다음
날 건너 능선을 공격하다 중사는 기관총에 맞아 다쳤지만 선두에 서서 능선
정상까지 도달했고 두 번째 부상에도 불구하고 지휘하며 57밀리 무반동총을
불렀다. 버리스 중사는 무반동총이 적 기관총좌를 조준하도록 몸을 노출해
뛰면서 적 기관총 사격을 유도했다. 결국 기관총좌를 파괴하고 다시 다음 능선
공격에 들어갔다. 버리스 중사는 후송을 거부하고 응급처치만 받은 채 공격에
동참했고 중대는 적 강화거점을 만나 정지했다. 중사는 다시 혼자 앞으로 돌격
해 첫 번째 적 중기관총 총좌를 파괴하고 적 6명을 죽였다. 다시 다음 거점으로
돌격해 마지막 수류탄으로 격파했다. 이후 적 사격에 치명적으로 맞아 쓰러졌다.
이때 중대가 점령한 고지는 605고지로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다.
헥터 카페라타 A. 주니어
미 해병대 예비군 일병. 해병1사단 7연대 2대대 F중대. 1950년 11월 28일.
카페라타의 fire team이 모두 쓰러지자 방어선 틈이 벌어졌고 적은 중대급
고지 방어선에 연대급이 광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카페라타 일병은 혼자서
수류탄과 소총으로 거점을 지켰는데, 만약 그 지점이 뚫리면 중대 전체가 위험
해지는 장소였다. 카페라타 일병이 있는 장소에 자동화기 수류탄 박격포가 집중
되었는데, 일병은 오히려 참호에서 나와 아래로 내려가 정확하게 조준사격을
시작해 적 약 15명을 사살했고 적 부상자는 더 있었다. 적은 재집결지점으로 퇴각
하기 시작했다. 아침까지 전투가 이어지는데 한 다친 해병이 있는 참호로 수류탄
이 날아다는 걸 카페라타 일병이 보고 질주해 점프해 수류탄을 짚어 되던지는 과정
에서 폭발해 손가락 하나가 날아가고 오른손과 팔에 중상을 입었다. 부상의 고통을
무릅쓰고 일병은 완고하게 계속 싸우다 결국 적 저격수 총알에 맞아 후송되었다.
데이빗 B. 챔페이진 상병
해병1사단 7연대 1대대 A중대. 1952년 5월 28일.
중대는 강력하게 진지화 된 적 고지에 공격을 시작했다. 챔페이진 상병은
그의 fire team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적에게 강력한 소총과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상병과 팀은 적 참호선을 넘어섰고 결국 난공불낙으로 여겨지던
정상에 섰고 이어 방어를 준비했다. 상병은 다리에 고통스런 부상을 입었으나
적 반격을 준비해야 했다. 곧 적 박격포와 포탄이 수 없이 떨어졌고 상병은
후송을 거부하고 자신의 팀과 같이 있었다. 적의 반격은 점차 가중되었고 그
와중에 적 수류탄 한 발이 상병의 fire team 중간에 떨어졌다. 챔페이진 상병이
몸을 날려 수류탄을 짚고 되던지려는데 폭발해 한쪽 손이 날아가고 몸은 참호로
나가 떨어졌다. 중상과 박격포화 가운데 상병은 끝까지 지휘하다 전사했다.
윌리엄 R. 채레테
해병 소총중대에 배속된 미 해군의무병 3급. 1953년 3월 27일.
해병중대는 주 방어선에서 앞으로 나온 지점에서 잘 은익 되고 참호화된
적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채레테 의무병은 격렬한 탄막 속에서 주저
없이 돌아다니며 동료 부상자를 치료했다. 치료 도중 한 수류탄이 날아오자
채레테는 즉각 들어 되던지려고 했으나 폭발을 온 몸으로 받았다. 철모가
쪼개지고 의무낭이 터졌고 채레테는 본인이 응급붕대로 자신을 처치하고
계속해서 돌아다니며 부상자를 돌봤다. 그러던 중 다시 포탄이 터져 충격을
받았으나 채레테는 오히려 방탄조끼를 벗고 도움이 필요한 부상자에게로
갔다. 채레테는 다리에 심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후 자신의 고통을 참
으면서 한 움직일 수 없는 부상자를 일어서서 끌기 시작했고 일어서자 적의
사격은 집중되었다. 결국 채레테는 그 부상자를 안전한 곳까지 끌고 왔다.
코넬리우스 H. 찰톤 병장
25사단 24연대 C중대. 1951년 6월 2일 지포리 근처.
찰톤 병장의 소대는 강력하게 축성된 적 거점을 공격하다 소대장이 다쳐
후송된다. 찰톤 병장은 지휘권을 인수하고 병사들 선두에 서서 공격을 이
끌었다. 병장은 소총으로 적 6명을 사살하고 올라갔는데 소대 피해가 매우
엄청났고 결국 돈좌된다. 병장은 병력을 재편성해 다시 전진하는데 갑자기
수류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졌고 병장은 가슴을 다쳤다. 병장은 의무치료를
거부하고 능선 정상을 향해 세 번째 공격일 선도했다. 한 총좌가 소대를 막자
찰톤 병장은 반대 경사면으로 돌아가 혼자서 돌격했다. 이때 병장은 다시
수류탄에 다쳤으나 결국 올라가 거점의 적을 전부 사살했다.
스탠리 R. 크리스찬센 일병
해병 1사단 1연대 2대대 E중대. 1950년 9월 29일.
312고지 근처에 크리스찬센을 포함한 몇 명이 청음초로 나가 있던 새벽에
이들은 자신들 소대 방향으로 다가서는 적 공격대를 발견했다. 크리스찬센
은 한 해병을 소대에 알리러 보냈고 결국 다른 한 명도 소대로 경계를 전파
하러 보냈다. 크리스찬센은 명령도 없었는데 혼자서 청음초에 남아 탈출할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적은 크리스찬센의 존재를 알아채고 소총 자동화기
소이수류탄을 던지며 맹렬하게 공격했고 크리스찬센은 혼자서 맞서 싸웠다.
크리스찬센은 숙명적으로 전사를 맞았고 그의 참호 근처에는 적 7명이 죽어
있었다. 크리스찬센의 소대는 적 공격 정보를 받아 견고하게 방어해 지켰고
적 사살 확인 41구와 포로도 3명을 잡았다.
길버트 G. 콜리너 병장
미 육군 40사단 223연대 F중대. 53년 7월 19-20일 한국 Tutayon.
콜리너 병장은 첨병이자 전투정찰대 부지휘관으로 정찰하다 적과 조우했다.
어둠 속에서 정찰하다 정찰 지휘 장교가 18미터 벼랑에서 미끄러져 다쳤다.
발목을 심하게 다친 지휘장교는 아군진영으로 복귀를 명령했다. 콜리너 병장
역시 등을 다쳐 고통스러웠으나 장교 곁을 떠나지 않고 남아 낮이 되기 전까지
산악에서 장교를 끌고 포복했고 동이 트자 밤까지 수풀에 숨어 기다렸다. 어둠
이 내린 직후 중대를 향해 다시 출발했으나 매복에 걸려 교전이 일어났다. 콜리너
병장은 적 2명을 사살하고 자신도 고통스런 부상을 입었다. 이어 실탄이 떨어졌고
콜리너 병장은 적 4명과 백병전을 벌여 대검으로 적을 모두 죽거나 다치게 했다.
이 백병전에서 병장은 중상을 입었으나 다친 장교를 필사적으로 보호해 결국
장교를 데리고 아군진영으로 복귀했다.
존 W. 콜리너 상병
미 육군 25보병연대 C중대. 50년 9월 19일 진동리.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고 있는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능선을 콜리너 상병의
중대가 공격했다. 자동화기와 수류탄을 받으며 콜리너 상병은 중대 선두에서
공격을 선도했다. 중대가 돈좌되자 콜리너와 동료 3명은 앞의 기관총좌 공격
특공조에 자원했다. 그러나 두 번을 실패했고 세 번째 시도에서 콜리너 병장은
엄폐물 없는 곳에 몸을 노출해 기관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혼자 돌격해 기관
총좌를 파괴하고 적 적어도 4명을 사살했다. 고지를 점령하고 자신의 분대와
합류하는데 갑자기 수류탄이 날아왔고 콜리너 상병은 동료들에게 고함을 지
르고 주저 없이 수류탄에 몸을 날렸고 수류탄은 상병 몸 밑에서 폭발했다.
헨리 A. 코미스키 중위
해병1사단 1연대 1대대 C중대. 50년 9월 20일 영등포. C중대 소대장으로
85고지의 참호를 적을 향해 소대를 선도했다. 중위는 공격 선봉에 서서 적
중기관총과 소총이 쏘는 가운데 경사면을 뛰어 올라갔고 고지 정상에 맨
처음 도달했다. 중위는 권총 한 자루만 들고 적 기관총좌를 향해 돌격해 적
5명을 자동권총으로 사살했고 다섯 번째 적과 격투를 벌여 쓰러트려 다른
아군병사가 총을 쏴 사살했다. 다시 중위는 다음 총좌에 대해 대담한 공격을
재개했고 다시 적 2명을 죽였으며 소대를 이끌어 나머지 거점을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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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2
사무엘 S. 카우센 중위
미 육군 5기병연대. 50년 10월 12일.
C중대가 174고지를 공격하는 동안 강력한 소총사격을 지근거리에서
받았고 소대는 응사하며 전진했다. 이때 부하 한 명이 잘 은폐된 적
총좌를 공격하다 다쳤고 누구도 앞으로 나가 그 부상 병사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이때 카우센 중위는 부상 병사를 죽이려 하는 바로 위
적 거점으로 달려가 백병전을 벌였고 그럼으로써 부상 병사를 보호
했다. 중위는 적과 백병전을 벌이다 전사했으며 사체를 회수하는 과정
에서 중위 근처에 죽은 적 7명이 발견되었다. 그중 적 몇 명은 중위의
소총 개머리판에 의해 두개골이 으깨어져 있었다.
고든 M. 크레이그 상병
미 육군 1기병사단 정찰중대. 50년 9월 10일.
크레이그 상병은 16정찰중대 소속으로 적이 점령한 고지를 중대와 함께
공격하고 있었다. 강력한 박격포와 소총탄이 날아왔고 상병과 4명이 앞
으로 공격해 중대를 가로 막던 적 기관총좌를 격파해 모두 사살했다. 이때
그 위의 다른 기관총좌의 적이 올라가는 미군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고 상병
은 주저 없이 몸으로 수류탄을 막아 충격을 자기 몸으로 받았다. 전사한 상병
의 행동을 본 동료들은 그 기관총좌에 돌격해 몰살시켰다.
제리 K. 클럼프 상병
미 육군 3사단 7연대 L중대. 51년 9월 7일.
클럼프 상병의 소대가 방어하는 284 고지를 향해 압도적인 숫자의 적이
야간공격을 가해왔다. 아군진영 일부가 뚫리고 적은 벌떼처럼 몰려들었
고, 이때 클럼프 상병은 자기 몸을 노출해 공격대열에 사격을 가해 상당수
가 쓰러졌다. 이때 적 2명이 아군 기관총을 노획해 가져가려는 것이 보였고
상병은 돌격해 대검으로 둘을 모두 참살했다. 원래 자리로 돌아오니 동료
4명은 모두 다쳤고 상병은 거기서 정확한 조준사격을 계속했다. 적은 클럼프
상병의 거점을 포위해 제압하려고 했고 이때 수류탄이 하나 정확하게 날아
왔고 상병은 주저 없이 몸으로 수류탄을 막아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
클럼프 상병의 행동을 목격한 동료들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방어선을 복구했다.
잭 A. 데븐포트 상병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 G중대. 51년 9월 21일 송내동 근처.
적은 새벽에 공격했고 데븐포트 상병은 분대장이었다. 상병은 분대를
효과적으로 지휘해 관통하려는 적을 막았고 이때 적 수류탄 하나가 참호
에 떨어졌다. 상병은 그 참호로 뛰어들어 참호 안에 있던 해병을 밖으로
던져내고 수류탄을 막아 동료를 구하고 전사했다.
조지 앤드류 데이비스 주니어, 미 공군 소령
5공군 4전투기비행단 334전투기전대. 52년 1월 10일 신의주-압록강 근처.
소령은 F-86 세이버 4대의 편대장으로 만주 국경선 근처에 전투정찰을 하고
있었다. 이때 한 전투기의 산소가 바닥 나 결국 전열에서 이탈해 복귀했다.
데이비스 소령은 기내에 남아 계속 임무를 수행했고 이때 적 미그-15 12대가
남서쪽의 아군 폭격기를 향해 날아가는 걸 봤다. 당시 폭격기들은 저고도로
날며 적 통신망을 파괴하려 작전하고 있었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소령
은 다른 2 대와 함께 미그기 대형으로 직진했다. 소령은 조준기에 들어온 미그
-15 한 대를 기총으로 쏴 격파했고 이때부터 적기가 소령의 전투기 뒤에 붙어
지속적으로 사격을 가해왔다. 이 와중에 소령은 다시 한 대를 기총으로 쏴 적중
시켜 그 미그기는 불덩어리가 되면서 수직으로 추락했다. 소령은 최고속도로
높여 자신에게 집중된 추적자들을 회피하면서 다시 속도를 줄여 미그-15 한 대
를 목표로 잡았다. 이 마지막 공격에서 소령의 전투기는 direct hit를 맞아 통제
를 상실했고 압록강 남쪽 30마일 지점에 추락했다. 소령의 대담한 공격으로
미그기 대열은 흩어졌고 이에 아군 폭격기들은 폭격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레이몬드 G. 데이비스 중령
해병1연대 7연대 1대대장. 50년 12월 4일 하갈우리. 대대는 적에게 포위된
채 8마일의 얼음으로 덮인 도로를 따라 결연하고 야만적인 적의 공격을 받
으며 진행했다. 적 중대급 거점을 만난 중령은 그 가파른 산악지형 도로에서
막히면 다른 2개 대대의 퇴출에 위험을 느껴 거점 공격을 명령하고 선도했다.
목표는 흥남항구까지의 도달과 재편성이었다. 적은 높은 고지에서 도로를 향
해 쏘며 미군의 진행을 막았다. 중령은 가파른 경사면을 통해 선봉부대를 내
세워 거점을 공격시켰다. 공격 선봉은 적과 백병전을 벌였고 중령은 이 공격
에 개인적으로 선봉에 서서 백병전까지 벌였다. 결국 거점을 제압하고 길은
개통되었다.
이런 식으로 데이비스 중령의 대대는 가파른 능선 3개를 공격해 모두 성공적
으로 제압했고, 야간에는 대대를 격려하며 돌아다녔고 낮에는 1.500야드 거리
에 고립된 자신의 소총중대를 구하러 직접 나섰다. 이때 포탄이 터지면서 파편
이 철모를 때려 쓰러지고 총알 두 발이 그의 군복을 관통해 지나갔다. 그러나
중령은 다시 일어나 자신의 소총소대를 향해 전진해 결국 도달했다. 다음 날에는
매우 위험한 산악 고개 근처에 참호를 파고 막는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향해
대대를 이끌고 공격했고 휘하의 모든 부상자를 데리고 내려왔다. 부상자를 내려
보낸 후 야만적이고 광신적인 적의 공격을 사단의 2개 연대가 통과할 때까지
막아냈다. 12월 4일 중령은 대대를 이끌고 내려와 마지막으로 고개를 넘어
하갈우리에 도착했다.
윌리엄 F. 딘 소장
미 보병 24사단장. 50년 7월 20-21일 대전.
24사단장으로 사단은 일본 점령임무에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한국전에
투입되어 과감하고 결연하며 훈련이 잘 되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과 마주했
다. 딘 소장은 과거 군 경력 경험으로 볼 때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딘 소장
은 개인적으로 혼자서 유일한 무기인 수류탄을 들고 적 탱크를 공격했다. 노
출된 상태에서 공격한 탱크에 화재가 일어났다. 대전은 이미 적이 들어왔고
딘 소장은 자신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은 채 사단 최전방 제대와 같이 있으면
서 사단의 후퇴를 명령했다. 혼전 가운데 딘 소장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한 부상자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었다. 딘 소장은 결연한 의지와
용기로 사단의 맨 앞에서 싸우며 지휘했다. 딘 소장은 사단장인 자신이 뒤로
빠질 경우 사단의 전방제대가 붕괴될 위험을 막으려고 했다.
레기네일 B. 데시데리오 대위
미 육군 25사단 27연대 E중대장. 50년 11월 27일 Ipsok 근처.
적이 아군을 돌파하려는 시점에서 E중대장인 대위가 맡은 임무는 지휘소
방어였다. 방어선을 야간에 점검하다 적의 강력한 사격을 받았고 대위는
제 위치로 들어가 적 공격을 격퇴시켰다. 전투 초기에 부상을 당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적이 쏘는 가운데 방어선으로 계속 돌아다니며 점검하고
다음 공격에을 대비시켰다. 재차 다쳤으나 대위는 여전히 중대원을 고무
시키며 전투를 지휘했고 이에 중대원들은 결연하게 방어에 임했다. 결국
수적인 열세를 못 이기고 방어선이 돌파되었을 때 대위는 카빈총/소총/
수류탄을 들고 단독으로 적에게 돌격했다. 대위는 중상을 입고 쓰러지기
전까지 많은 적에게 피해를 입혔고, 대위가 쓰러지자 부하들은 이에 놀라
면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중대장을 따라 다시 격전을 벌여 적을 방어선
에서 몰아냈다.
리차드 데이비스 드워트
해병1사단 보병중대에 배속된 미 해군의무병. 51년 4월 5일.
적의 치명적인 자동화기 탄막에 중대가 돈좌되었고 드워트는 선두소대
한 fire team과 같이 있었고 전상이 매우 컸다. 드워트는 한 부상자를
응급처치하고 한 중상자를 한 명 더 발견하고 자신의 다리 부상 고통에도
불구하고 안전한 지역으로 해병을 끌고 왔다. 그는 다른 치료를 거부하고
자기 몸을 자기가 처치한 뒤에 다시 앞에서 부상자가 생기자 싸락눈 같은
사격 속에서 앞으로 세 번 째로 나갔다. 다시 한 부상자가 있는 걸 보고 드
워트는 거의 죽어가는 한 명은 어깨에 걸치고 한 명은 손으로 끌고 돌아왔다.
드워트는 다시 응급처치를 거부하고 치명상을 입은 해병을 치료했다.
듀엔 E. 드위 상병
해병 예비군 상병. 해병1사단 5연대 2대대 E중대. 52년 4월 16일 판문점 근처.
드위 상병은 E중대 기관총소대 사수였다. 수적으로 엄청난 적은 중대를 향해
공격해왔고 기관총을 쏘는 동안 수류탄이 떨어져 부사수가 다쳐 혼자 기관총
을 사격했다. 이때 총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드위 상병을 의무병이 뒤로 끌어
냈을 때 수류탄이 하나 떨어졌고 상병은 근처 다른 해병들에게 조심하라고 고함
을 지르고 나서 수류탄을 자신의 몸으로 막았다. 이 수류탄 폭발에서 동료를
구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칼 H. 닷드 중위
미 육군 24사단 5연대 E중대. 51년 1월 30-31일 한국 수복 근처.
닷드 중위의 소대는 256고지 공격 선봉의 책임이 주어졌다. 반드시 필요한
고지였고 적은 잘 무장하고 몇 번의 공격을 막아냈다. 선도 소대로 올라가다
위험한 지형에서 소대는 소총과 박격포와 야포 포격을 받았고 적의 총좌는
잘 은폐되어 보이지 않았고 중위의 소대는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중위는
소대원 사이를 돌아다니며 고무시켰고 맨 앞의 적 기관총좌에 혼자 돌격해
그 안에 모든 적을 죽이고 전상시켰다.
소대장의 행동에 영감을 받은 소대원들이 착검을 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공격
했고 가까운 적 거점을 모두 쓸어버렸다. 목표를 향한 적 1선을 제압하고 공격
을 다시 재개했고 중위는 256고지로 올라가는 좁은 능선을 따라 소대원을 이
끌었다. 중위가 앞서 나가며 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자 적 사격이 집중되었
고 목표 200미터 거리를 남겼을 때 중위는 적 박격포좌를 발견하고 공격해 모두
사살했다. 어둠이 내려 공격은 중단되었고 다시 아침이 오자 닷드 중위는 대담
하게 소대를 이끌고 다시 올라갔고 중위부터 착검하고 앞으로 나가며 수류탄을
던져 공격했고 결국 소대는 적의 강력한 방어거점을 무너트리고 최종 목표를
탈취했다.
레이 E. 듀크 중사
미 육군 24사단 21연대 C중대. 51년 4월 26일 무곡 근처.
소대가 후퇴명령을 받고 퇴각하는 가운데 소대원 일부가 고립되어 전투를
벌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듀크 중사는 소대를 이끌고 고립된 병력 구출에
나섰고 같이 고립되어 싸우는 상태가 된다. 상당수가 전상을 당했고 중사는
박격포 파편에 다쳤으나 차분히 소대를 지휘하며 적을 물리쳐 위치를 고수
했다. 다시 또 다쳤으나 중사는 응급치료만 받고 위치로 돌아왔다. 동이 트고
적은 다시 공격했고 중사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방어를 지휘했다.
전상이 급격히 늘어 전멸할 지경에 이르러 소대는 다시 후퇴명령을 받았다.
듀크 중사는 세 번째로 다리를 다쳐 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데려가려면
두 병의 병사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사는 자신을 두고 내려가라고
하면서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중사의 모습은
그 위치를 공격하는 적 대열에 치명적인 사격을 퍼붓는 장면이었다.
주니어 D. 에드워즈 중사
미 육군 2사단 23연대 E중대. 51년 1월 2일 창봉리 근처.
중사의 소대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 방어를 조력하고 있었고 갑자기
높은 곳에서 쏘는 적 기관총에 직면했다. 에드워즈 중사는 혼자서 적 기관
총좌를 향해 돌격하면서 수류탄을 던졌고 탈취가 힘들자 퇴각하면서 적
에게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격렬하게 사격했다. 내려와 실탄과 수류탄을
받은 중사는 다시 한 번 기관총좌를 향해 돌격했다. 결국 기관총좌를 제압
하고 적 기관총반을 모두 죽였으나 적 소총 사격이 치열해 다시 밑으로 내
려왔다. 그러자 적의 다른 기관총반이 그 자리에 들어와 쏘기 시작했다.
에드워즈 중사는 수류탄과 실탄을 받고 다시 세 번째로 기관총좌를 향해
공격했고 엄청난 사격 속에 두 번째로 다시 기관총좌를 침묵시키고 본인
역시 치명상을 당했다.
존 에세바거 주니어 상병
미 육군 3사단 7연대 A중대. 51년 4월 25일 밥수동 근처.
당시 상병의 A중대는 대대가 퇴각하면서 적을 지연시키는 작전을 하고
있었다. 대대는 A중대 거점을 통과해 퇴각했다. 에세바거 상병은 1/2 분대
를 이끌고 중요한 지형에서 방어하고 있었고 중대 방어선 오른쪽 측면이었다.
상병은 무수한 적 공격을 격퇴시켰다. 적은 엄청난 숫자로 광란의 banzai
돌격을 감행했고 그 작은 방어력으로 계획된 퇴각로를 지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심하게 떠는 가운데, 상병은 이제 곧 그 거점이 적에게 넘어갈 위험
을 직감했다. 그러나 상병은 후퇴하지 않고 아군 퇴각로를 최대한 지키기로
결심했다. 상병은 점차 적과 가까워진 상태에서 사격전을 벌였고 그러자 상병
은 안전한 참호에서 나와 앞으로 나가 엄청난 숫자의 적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쐈다. 그러자 적은 당황했고 상병은 그 공백시간을 이용해 분대원을
이끌고 보다 방어에 유리한 지형으로 퇴각을 시작했다. 포탄이 작렬하는 가운
데 적이 추격하자 분대를 퇴각시키고 에세바거 상병은 발길을 돌려 적을 향해
나가 치명상을 당할 때까지 적과 단독으로 맞서 싸웠다.
돈 C. 페이스 주니어 중령
[대위 시절 사진]
미 육군 7사단 32연대 1대대장. 50년 11월 27일 - 12월 1일.
페이스 중령은 장진호 부근에서 귀감이 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적이
자신의 대대를 포위하고 광란의 공격을 시작해 적 중화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중령은 주저 없이 즉각 몸을 노출해 돌아다니며 대대 전투를 지휘했다. 방어선
한 곳이 뚫리자 중령은 자신이 몸소 병력을 이끌고 반격을 선도해 방어를 수복
했다. 교전 동안 중령의 대대는 다른 미군부대와 접촉했고 직접 얼음이 덮인
기동로 정찰에 나서며 선두에서 지휘했다.
또한 자신의 차량에 부상자를 태우고 적 사격 속을 통과했다. 중령은 쓰라린
추위와 피로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재편성해 적을 공격했으나 곧 적 사격으로
인해 중단된다. 그러자 중령은 소총과 자동화기를 들고 직접 부하들과 함께
공격했다. U-자 형 도로에서 차단물로 인해 다시 기동이 막히자 중령은 병력
을 적 거점 오른쪽으로 돌아 우회공격을 지휘했고 적 거점에 직접 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부하들을 격려했다. 중령은 항상 자신의 안전은 고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 5일 동안 전투를 지휘했고 전투장비를 직접 앞쪽으로 들어다
주기도 했다. 효율적이고 저돌적이며 자기 헌신적인 전투지휘의 공으로
최고훈장을 수여한다.
페르디난도 루이스 가르시아 일병
해병1사단 5연대 1대대 I중대. 52년 9월 5일.
주 전선에서 1마일 앞으로 나간 전초에 적은 광란의 공격을 시도하며 박격포
와 야포까지 사용했다. 가르시아 일병은 강력한 적 사격 속에서 고통스런 부상
을 입었으나 아픔을 참고 수류탄을 방어선으로 계속 날랐다. 그러던 중 근처에
수류탄이 떨어지자 다른 해병을 구하기 위해 몸으로 막아 충격을 홀로 받았다.
찰스 조지 일병
미 육군 45사단 279연대 C중대. 52년 11월 30일 송내동.
조지 일병은 심문을 위한 포로를 잡기 위한 습격대에 합류해 험난한 지형을
이동했고, 습격대는 강력한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을 받아 여러 명이 다쳤고,
이때 싸우던 조지 일병은 근처 봉우리로 뛰어 올라가 참호로 들어가 적과
백병전을 벌였다. 이때 습격대의 퇴각명령이 내려왔고 조지 일병은 두 명과
함께 습격대의 퇴각을 엄호했다. 조지 일병과 두 명이 있던 적 참호에서 나와
나가려는데 갑자기 수류탄이 세 명 중간에 날아왔고 조지 일병은 조심하라고
고함을 지른 후에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막았다. 두 병사는 조지 치명상을 당한
조지 일병을 부축해 퇴각해 의무대에 넘겼으나 곧 숨졌다.
찰스 L. 길리랜드 상병
보병3사단 7연대 I중대. 51년 4월 25일 통망리 근처.
길리랜드 상병의 중대에 엄청난 적이 공격을 해왔다. 이때 은폐해 있던
길리랜드 상병은 자동화기를 난사하기 시작했고 옆의 부사수는 적 사격
에 맞아 전사했다. 상병은 혼자서 계속 엄청난 적 공격대와 마주했으나
침착하게 도살하듯이 적에게 사격을 가했다. 다가오던 적 2명이 도주하
려고 하자 상병은 참호로 뛰어들어 거기 있던 권총으로 두 명을 모두 사살
했다. 이 과정에서 머리에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를 거부하고 참호로 돌아
가서 계속 방어에 임했다. 중대는 새로운 방어점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때 길리랜드 상병은 자진해서 퇴각을 엄호하러 남겠다고 했고
다가오는 적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길리랜드로 인해 다가오던 적은 일시
막혀 중대는 안전하게 퇴각했다.
에드워즈 고메즈 일병
해병 1사단 1연대 2대대 E중대. 51년 9월 14일 749고지.
고메즈 일병은 중대의 탄약운반병이었고, 고메즈의 분대는 요새화된
749고지를 공격하는 공격대의 조력이었다. 일병은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기관총 실탄을 들고 뛰어다니며 보급했고 이어 분대는 적 반격
과 마주했다. 이때 고메즈 일병과 한 해병이 사격 위치를 잡으려고 비어
진 참호에 뛰어 들어갔고 그때 수류탄이 참호에 떨어졌다. 일병은 동료
해병에게 경고하는 고함을 지르고 수류탄을 재빨리 쥐어 되던지려다
폭발해 전우를 구하고 전사했다.
클레어 굿브러드 상병
보병 7연대 D중대. 51년 4월 25일 파수동.
상병의 부대는 중요 지형에 들어가 있었고 엄청난 숫자의 적이 무자비하게
공격해 방어선을 관통하려고 했다. 방어선이 힘들자 퇴각명령이 내려왔고
굿브러드 상병은 퇴각하는 부대의 후위 엄호사격을 맡아 지속적으로 적에게
치명적인 사격을 가해 적 공격대가 주춤할 정도로 큰 전상을 일으켰다. 이때
수류탄이 날아오자 옆의 기관총 부사수를 밀어내고 되던지려다 터져 둘 모두
다쳤다. 상병은 치료를 거부하고 탄약운반병에게 부상자를 데리고 후송시키
라고 명령하고 본인은 1인 단독으로 방어로 남았다. 상병은 반자이 돌격하는
적들이 고지를 점령할 때까지 사격했고, 어느 순간 사격소리는 사라지고 조용
해졌다. 아군이 다시 그 자리로 들어갔을 대 굿브러드 상병은 기관총 옆에
쓰러져 있었고 근처에 적 시체가 100구가 넘게 쓰러져 있었다.
[기관총반 가. 사수 나. 부사수 다. 탄약운반병 1-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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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3
앰브로시오 길리안 하사
해병1사단 7연대 2대대 F중대 소대 선임하사. 52년 7월 25일.
중대는 주 방어선 앞의 전초에 나가 있다가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
길리안 하사는 익숙하지 않은 지형으로 소대를 기동시키다가 적 사격에
직면해 돈좌되었고 그곳에 방어를 형성했다. 어둠을 이용해 적은 박격포
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약 2개 대대를 동원해 공격하고 있었다. 하사는
몸을 노출시키면서 소대원의 방어점을 모두 점검하고 부상자를 후송했다.
선임하사의 이러한 용감한 행동을 본 소대원들은 적과 잔인한 백병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하사는 중상을 당했다. 하사는 치료를 거부하고 계속
돌아다니면 전투를 지휘했고 곧 적은 흩어져 퇴각했다.
프랜시스 C. 해몬드 의무병
해병1사단에 배속된 의무병. 주 저항선에서 앞으로 나온 진지형 전초에
수적으로 월등한 적에 대하여 아군이 반격을 하는 동안, 해몬드 의무병이
배속된 소대는 박격포와 야포에 의해 많은 전상자가 생겼고 이어 적은
많은 숫자로 공격을 가해왔다. 해몬드는 치명적인 사격 속에 움직이며
다친 동료들을 돌보다 그 역시 다치고도 응급처치를 계속 수행했다. 위
에서 소대 퇴각명령이 내려왔고 해몬드는 기술적으로 효과적으로 부상
자들을 후송했는데, 그러기를 네 시간이 흘러 해몬드는 체력이 바닥났다.
그때 박격포탄이 떨어져 터지면서 해몬드는 쓰러져 중상을 입었다.
레스터 해몬드 주니어 상병
187공수연대 A중대. 52년 8월 14일 금화 지구.
해몬드 상병은 6인 정찰대의 일원으로 적 장악지역으로 3.5킬로미터 정찰
을 나갔다가 갑자기 사격을 받았고 정찰대원들은 좁은 협곡에서 재빨리
엄폐물을 찾았다. 서로 근접거리에서 사격을 주고받았으나 적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이내 돌파해 들어왔다. 해몬드 상병은 몸을 노출시킨 상태에서
포병 화력을 유도했고 정확하게 공격하는 적을 향해 포격을 퍼부어 큰 피해
를 입혔다. 몇 번의 적 공격을 이런 식으로 물리쳤고 이 과정에서 상병은 두
번 다쳤으나 확고부동하게 임무를 수행하다 결국 치명상을 당했다. 해몬드
상병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다른 정찰대원들은 맹렬하게 돌파공격으로
아군진영으로의 탈출을 시도해 결국 성공했다.
멜빈 O. 핸드리치 상사
보병5연대 C중대. 50년 8월 26일 소북산 근처.
상사가 소속된 중대는 방어선을 붕괴시키려는 약 150명의 적 공격을 물리쳤다.
25일 자정이 되자 적 100명 정도가 다시 중대 방어선을 관통하려고 했고, 이때
핸드리치 상사는 강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자진해서 안전한 참호에서 나와 앞
으로 나가 다가오는 적에게 박격포와 포병 포격을 유도했다. 이렇게 총 8시간을
그 자리를 지켰고 본인의 앞 15미터까지도 포격을 유도했다. 26일 아침이 되자
적은 다시 대규모로 중대 방어선을 공격했고 핸드리치 상사는 안전을 무시하고
직립으로 서서 소총을 쏘며 포격을 또 유도했다. 이 시점에서 중대는 퇴각을 준비
하고 있었고 상사는 예상 퇴각로에 평정 사격을 시키고 병력을 재편성해 전투를
지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상사도 중상을 입었으나 후송이나 엄폐를 거부했고 다
시 계속 앞으로 나가 포격과 중대 사격을 지휘했다. 결국 핸드리치 상사가 있던
곳은 적에게 월경 당했고 상사는 중상을 당한 상태로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그
위치를 다시 재탈환했을 때 상사 근처에는 적 70명이 넘게 쓰러져 있었고 상사는
끝까지 대담무쌍한 방어를 계속하다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잭 G. 핸슨 일병
육군 31연대 F중대. 51년 6월 7일 파치동 근처.
중대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지에 방어선을 구성했는데 이 산은 두
개의 봉우리로 갈라진 안장 같은 모양이었다. 새벽 3시 적은 무자비한 공격
을 감행했고 그 갈라진 중앙에 핸슨 일병이 잡은 기관총이 있었다. 첫 교전
에서 소총수 4명이 다쳐 후송되었고 적은 숫자가 월등하게 많았으며 어둠을
이용해 다가와 곧 화기소대와 중대지휘소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되었다. 중대
가 퇴각을 결정하자 유리한 거점의 핸슨 일병은 자진해서 퇴각 엄호사격으로
남겠다고 자원했다. 중대는 유리한 지형으로 약간 후퇴해 계속 방어할 생각
이었다. 기관총반의 부사수와 소총수 3명이 모두 다쳐 뒤로 빠진 상황에서
핸슨 일병은 1인 방어에 들어갔다. 얼마 뒤 1소대가 재편성해 반격에 나서
원래 위치를 탈환한 것은 새벽 5시 30분이었는데, 핸슨 일병은 원래 그 기관
총좌 앞에 전사해 있었고 기관총 실탄은 모두 소모된 상태였으며 전사한 핸슨
일병은 오른손에 권총을 쥐고 있었고 왼손에는 피가 묻은 만도(machete)가
쥐어져 있었다. 핸슨 일병은 기관총좌 일대에서 약 22명의 적을 죽이고 전사
한 것으로 보인다.
리 R. 하텔 중위
보병2사단 제15야전포병대대 A포대. 51년 8월 27일 고방산.
하텔 중위는 보병 9연대 B중대에 배속된 포병 전방 관측장교였다. 27일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적은 울퉁불둥한 산악지역의 아군 방어선에
가차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하텔 중위는 재빨리 관측에 유리하지만 노출
된 능선으로 이동해 먼저 조명탄을 요청하고 이어 미친 듯이 공격하는 적
에게 포병 화력을 유도했고, 이 포격에 적은 공격파가 두 갈래로 나뉘며
흩어져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적은 중위 3미터 앞까지 들어왔고 그러자
중위는 한손에 포대경 한 손에는 포대경 삼각대를 들고 적과 백병전을 벌였
다. 위치는 중대 방어선 왼쪽 가장자리로 적은 아군의 포격으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 포격으로 적이 일시 멈추면서 시간이 생기자 중위는
무전기로 마지막 요청을 보냈는데, 이는 진내 포격이었고 무전을 들은
2개 포대는 계속해서 포격을 실시했다.
레이몬드 하비 대위
보병17연대 C중대. 51년 3월 9일 태미동 근처.
하비 대위의 중대는 참호를 판 적의 거점을 만나 자동화기로 인해 돈좌
되었고 임무완수는 위태로워보였다. 하비 대위는 적 기관총과 수류탄이
날아오는 가운데 용감히 혼자 첫 기관총좌를 향해 질주해 수류탄으로
격파하고 다시 다른 기관총좌를 향해 뛰어가 카빈총으로 적 기관총반원을
사살했다. 다시 1소대와 함께 전진하는데 또 다시 강화진지를 만나 자동
화기에 정지되었고 그러자 대위는 또 다시 1인 돌격으로 세 번째 기관총좌
를 격파했다. 이후 집중된 적의 십자사격에도 대위는 탈출해 내려와 다시
중대 공격을 지휘했다. 다시 통나무로 위장된 적 토치카를 만나자 가까이
이동해 접안구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카빈총을 난사해 토치카 안의 적 5명
을 모두 죽였다. 이어 뒤돌아 중대 전진 명령을 내렸다. 이때 대위는 몸에
통증으로 인해 신음했으나 계속해서 공격을 지휘했고 적은 점차 하강세를
맞았으며 결국 목표를 탈취했다.
프레드릭 F. 헨리 중위
보병35연대 F중대 소대장. 50년 9월 1일.
헨리 중위의 소대는 도시 근처의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능선에 방어선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때 박격포와 야포의 지원을 받는 수적으로 월등한 적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위의 소대는 군기가 문란해지면서 붕괴할 것 같
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자 중위는 참호에서 나와 돌아다니며 소대원들에게
자리를 고수하고 계속 싸우라고 격려했다. 소대장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소
대원들은 방어를 약간 재조정하고 적에게 참화적인 사격을 비처럼 퍼부었다.
적의 사격/포격으로 소대의 모든 통신수단은 박살이 났고 헨리 중위는 이런
강력한 적의 공격에 계속 방어할 것인지 퇴각할 것인지 결정을 내리기 어려
웠다. 중위는 몇 번 다친 상태였지만 소대 방어선을 최대한 고수하기로 마음
먹고 부상자를 뒤로 빼고 부상자 병기와 탄약을 자신에게 모두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소대장인 헨리 중위는 부상을 무시하고 자신을 1인 방어로 하고
소대원들에게 철수명령을 내리며 소대 퇴각을 엄호하겠다고 선언했다. 소대장
헨리 중위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은 단독으로 여러 총을 바꿔가며 적 50명
을 사살한 장면이었고, 결국 중위는 실탄을 모두 소모했고 위치는 적에게 탈취
당했다. 헨리 중위는 자신의 소대가 아군의 주방어선으로 퇴각할 때까지 엄호
사격을 하며 적을 막다 전사했다.
로돌포 P. 헤르난데즈 상병
187공수연대 G중대. 51년 3월 31일 강원도 원통.
상병이 속한 소대는 420고지에서 방어선을 구성하고 있었고 수적으로
월등한 적에게 가차 없는 공격을 당했다. 적은 기관총과 함께 박격포와
야포의 지원을 받았고 이로 인해 헤르난데즈 상병의 소대는 굉장히 큰
전상을 입었다. 동료들은 실탄 부족으로 퇴각하려고 했지만 헤르난데즈
상병은 다친 상태에서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으로 조준사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상병의 소총 약실에 실탄이 걸리면서 파열해 총이 고장 났다. 그
러자 상병은 소총에 대검을 착검하고 적을 향해 질주해 백병전을 벌여
적 6명을 죽이고 수류탄 폭발로 의식을 잃었다. 상병의 영웅적인 행동
으로 적 공격은 주춤했고 이때 상병의 부대는 반격을 시도해 잃었던
방어선을 탈환했다.
토마스 제롬 허드너 중위
미 해군 제32전투기전대 - 항공모함 레이테 소속 조종사.
50년 12월 4일 장진호 지역. 헤드너 중위는 추락한 동료조종사를 엄호하기
위해 일대를 돌다 적 대공포에 기체를 맞아 화재가 발생하고 연기가 나는
가운데 적 지역에 먼저 추락한 동료가 있는 곳을 향해 원을 그리며 재빨리
기동해 이동했다. 당시 먼저 추락한 동료 조종사는 불시착한 기체에 걸려
나오지 못한 상태에서 부상을 당했고 추락이 명백 시 되자 동료 조종사를
지상에서 돕기로 작정한 것이다. 산악지역이라 불시착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허드너 중위는 알고 있었고 게다가 혹한지역에서 생존 자체도 극단적
으로 위험했다. 적 지역에 기술적으로 불시착한 허드너 중위는 곧바로 동료
조종사를 향해 맨손으로 달려갔고 화재가 난 기체에서 동료를 꺼내려고 노력
했다. 성공하지 못하자 중위는 자신의 불시착한 기체로 뛰어가 무전기로 헬기
와 함께 불을 끌 수 있는 소화기를 같이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적이 득실대
는 가운데 중위는 애쓰며 동료 조종사를 구출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간과 화염
과 추위로 인해 결국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에이나 H. 잉맨 주니어 병장
미 7사단 17연대 E중대. 51년 2월 26일 말타리 근처.
중대가 전진하는 가운데 주니어 병장의 소대는 선도 공격소대였고 앞으로
나가던 2개 분대는 축성된 방어진지가 방어하는 교량을 공격하다 괴멸적인
사격으로 인해 돈좌되었다. 두 분대장과 여러 명이 다쳤고 그러자 잉맨 병장
은 두 분대를 연합해 재편성했고 자신이 지휘를 시작해 총알이 난무하는 벌판
을 이동하며 부하들을 격려하고 고무시켰다. 적 기관총좌를 만나자 상병은
혼자 돌격해 수류탄을 던지고 적 기관총반을 소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나 아주
가까운 곳의 다른 적 기관총이 쏘기 시작했고 두 분대도 추가적인 피해를 입고
공격이 정지된다. 잉맨 병장은 이 두 번째 기관총좌를 향해 돌격하다 수류탄
폭발과 싸락눈 같은 사격으로 인해 얼굴과 목에 맞아 땅에 쓰러졌다. 그런데
놀랄만한 잉맨 병장의 용기와 스테미너로 병장은 다시 일어나 소총을 들어
전체 기관총반을 사살하고 다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잉맨 병장의 단독 행동
으로 적 방어는 무너졌고 잉맨 병장의 분대는 목표를 탈취했고 이어 퇴각하는
적을 향해 사격을 퍼 붓고 100정이 넘는 버려진 적 병기를 노획했다.
윌리엄 R. 제세린 병장
보병25사단 35연대 C중대. 50년 9월 19일 Saga 근처.
제세린 병장의 중대는 적의 진지화 된 방어선이 지키는 톱니 모양의 교량을
공격하게 되었다. 정면과 측면을 동시에 노린 첫 공격은 적의 강력한 사격과
포격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병장은 논과 바위지형을 통해 능선으로 소대
재공격을 선도했다. 소대는 전면으로 공격하다 벼랑을 만났고 적의 정확한
사격으로 인해 공격은 중단된다. 이때 공격만이 살 길이란 것을 깨달은 제세린
병장은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쏘면서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다. 적의
강력한 사격에도 불구하고 소대는 능선의 정상을 넘어섰고 교량은 목전에 들어
왔다. 병장은 다시 적 거점을 향해 공격을 이끌었고 적은 대전차포를 쐈다. 이에
병장과 소대원들은 착검하고 돌격해 백병전이 일어났고 치고 박는 전투에 이어
소대는 전방의 교량을 향해 기동하다 적 자주포를 만나 모두 엄폐했다. 병장은
겁먹지 않고 새로운 공격을 선도했고, 이때 가까운 곳의 잘 은폐된 참호에서 적
이 수류탄을 던졌다. 병장은 즉각 달려가 몸으로 수류탄을 덮었다. 이 행동으로
근처에 있던 소대원들을 살리고 병장은 전사했다.
제임스 E. 존슨 병장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J중대. 50년 12월 2일 유담리 근처 실종(MIA).
병장은 임시로 구성된 임시소대의 분대장으로 J중대에서 진출하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은밀하게 참호화 된 적과 조우했는데, 일부 적병은 미 해병대 복장
을 착용까지 하고 있었다. 이때 개활지에서 적의 공격을 받아 돈좌되었고 이
때 존슨 병장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뛰어가 전사한 소대장 대신 지휘권을 인수
하고 냉정을 유지하며 부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고함을 지르며 용기를 주고
고무시키면서 효과적으로 사격을 지휘했다. 이때 다른 소대가 앞으로 나가고
존슨 병장의 소대는 뒤로 빠지라는 명령을 내려왔고, 병장은 극단적으로 위험
한 지형과 상황에서 소대의 퇴각을 엄호했다.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적에게
포로가 될 상황이었다. 존슨 병장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은 한 손을 쓰지
못한 상태에서 적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이었으며, 병장
은 소대의 퇴각을 안전하게 엄호하고 실종되었다.
맥 A. 조나단 일병
보병24사단 21연대 K중대. 51년 11월 15일 금송 근처.
3소대 분대장으로 일대의 중요한 지형을 향해 야간공격을 하던 중 격렬한
적 자동화기와 소총 수류탄으로 인해 공격이 중단되자 소대는 퇴각해 재편
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나단 일병은 자원해서 퇴각 엄호를 맡았고 은밀
히 적 기관총좌에 기어가 수류탄 세 발을 던져 침묵시키고 맹렬한 사격을 받
으며 기관총좌에 뛰어가 적 여러 명을 사살했고, 그 틈을 이용해 자신의 소대
는 뒤로 빠져 새로운 거점을 형성했다. 이때 조나단 일병은 새로운 적 기관
총좌를 공격하다 무언가 터져 양 다리를 다치면서 밑으로 굴러 떨어졌는데
그 상태에서도 계속 적에게 총을 난사하면서 소대의 퇴각을 끝까지 도왔다.
빌리 G. 케이넬 이병
보병25사단 35연대 I중대. 51년 9월 7일 평양 근처.
엄청난 숫자의 적이 박격포와 야포의 지원을 받으며 아군진영을 공격해왔다.
케이넬 일병은 참호에서 일어나 적을 정확히 보면서 조준사격을 가했고 적
수류탄이 날아와 떨어지자 몸으로 막아 동료 2명을 구하고 중상을 입었다.
그런데 몇 초 후에 또 다시 수류탄이 날아왔고 케이넬 병장은 조심하라고
말한 뒤에 다시 몸을 굴려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전우들을 구하고 전사했다.
로렌 r. 카우프만 중사
보병9연대 G중대. 50년 9월 4-5일 용산 부근.
9월 4일 밤, 중사의 중대는 두 개의 고지가 연결되는 곳에 방어선을 구성했고
이는 2마일에 걸친 대대 방어선의 측면으로 매우 중요한 포인트였다. 5일 새벽
카우프만 중사의 중대는 적 대대급의 공격을 받았고 중사의 중대는 중대방어선
을 보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중사는 소대를 이끌고 능선을 따라 이동하다 포위
공격을 하려는 적과 조우했다. 카우프만 중사는 착검하고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적 대열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쐈다. 이 중사의 공격에 적은 놀라 혼란 속에
후퇴했고 곧 이어 소대는 중대와 합류했는데 적이 이미 들어와 일부를 점령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중사는 주저 없이 혼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쏘면서 돌격
했고 적 2명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적 기관총 1정을 고스란히 노획하고 적에게
난사했다. 중대는 재편성해서 들어온 적에 대해 공격을 시작했다. 중사는 이 공격
에 선두에 서서 능선에 있던 적 기관총좌 하나를 격파하고 계속 적을 향해 나갔다.
도주하는 적을 쫓던 중사는 두 명을 총검으로 더 찔러 죽이고 적 박격포좌에 뛰어
들어 적 포반을 사살했다.
우드로 W. 키블 상사
51년 10월 20일 상산리 근처.
키블 상사는 당시 실질적인 소대장으로 765고지를 공격하는 보병19연대
G중대를 지원하고 있었다. 가파르고 험난한 지형에 적이 방어선을 잘 구
축한 고지였고 키블 상사는 공격 선두제대가 경사면에서 강력한 사격을
받아 점차 돈좌되기 시작하는 걸 봤다. 상사는 자원해서 돈좌된 선두소대
를 향해 질주했다. 도착한 상사는 근처의 한 적 기관총좌를 향해 앞으로
기어갔고 적 사격은 상사를 따라 쏟아졌다. 상사는 수류탄 핀을 뽑고 투척
했는데 너무나도 정확하게 들어가 기과총좌를 완벽하게 파괴했다. 상사는
1인 돌격을 지속해 두 번째 기관총좌를 수류탄으로 또 격파했고, 적은 키블
상사를 향해 집중적으로 쏘기 시작했고 수류탄이 다발로 상사를 향해 날아
왔다. 그러나 상사는 다시 전진해 세 번째 기관총좌를 기술적으로 격파하고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아군이 상사에게 도달하자 상사는 근처 참호에 정확
한 조준사격으로 적에게 피해를 입혔고 결국 상사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G중대는 성공적으로 전진해 그 중요한 고지를 손에 넣었다.
존 D. 켈리 일병
해병1사단 7연대 1대대 C중대. 52년 5월 28.
켈리 일병은 중대 통신병으로 박격포와 야포의 지원받는 적의 자동화기와
소총에 자신의 소대가 돈좌되자 지휘관에게 무전기를 떠나 적 공격이 집중
되는 곳으로 가서 다른 사람을 보살피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겁이 없는 켈리
일병은 기관총이 난무하고 수류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적을 향해 앞으로 돌격
해 적의 완고한 거점 하나에 진입해 적 두 명을 죽이고 제압했다. 이후 다시
다른 기관총 벙커에 혼자서 전진해 다치면서도 끝까지 도달해 벙커를 격파
하고 적 세 명을 죽였다. 일병은 또 다시 단독으로 돌격해 세 번째 벙커를
쓸어버렸고 기거서 대담하게 적 거점을 향해 정확한 수평 조준사격을 적
에게 가했다. 사격에 중상을 입고 켈리 일병은 쓰러졌다.
잭 윌리엄 켈소 일병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I중대. 52년 10월 2일.
일병은 중대 소총수로, 전초에서 야간에 수적으로 월등한 적의 공격에
소대장과 소대선임하사가 모두 다쳐 쓰러지자 강력한 사격 속에서 몸을
노출하면 소대를 재편성해 적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 해병 4명이 있는
벙커가 공격당하자 주저 없이 달려가 떨어진 적 수류탄을 짚어 앞 개활
지로 달려가 되던졌고 또 날아온 수류탄 폭발로 왼손을 크게 다치면서
적 사격이 일병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일병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안전
한 곳을 다시 떠나 적에게 강력하게 응사했다. 이 난사 동안 고립된 벙커
의 해병 네 명이 탈출했고 일병은 엄호사격을 하다 치명상을 입었다.
로버트 S. 케네모어 하사
해병1사단 7연대 2대대 E중대. 50년 11월 28일 유담리 근처.
하사는 중대 기관총반의 반장으로 유담리 북쪽의 중대 방어선에서
야간에 수적으로 월등한 적과 야만적인 야간전투가 일어났고, 적은
중대 방어선을 관통했다. 당시 소대장은 중상을 입었고 하사는 지체
없이 지휘권을 인수한 다음 방어를 합병해 재편성했다. 이때 적 수류
탄이 기관총반 중간에 떨어졌고 하사는 수류탄을 걷어 차내려다 폭발
해 동료를 구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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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4
존 E. 킬머 의무병
해병1사단 소충중대에 배속된 미 해군 의무병. 52년 8월 13일.
킬머 의무병이 소속된 중대는 한 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 고지는
주방어선에서 앞으로 튀어 나온 지형으로 거대한 적 병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킬머는 적 박격포화와 야포 저격수가 강렬하게 쏘는 가운데
용감하게 부상자들을 돌아다니며 치료하고 필요한 후송을 시켰다. 그리
고 부상자를 돕다가 고통스러운 부상을 킬머가 당하게 되고 사방에는 적
포탄이 무수히 낙하했다. 킬머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해병들에 대한 치료
를 계속 했다. 그러는 도중 포탄 파편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노아 O. 나이트 일병
보병3사단 7연대 F중대. 51년 11월 23-24일 고왕산 부근.
적의 박격포와 포탄이 떨어지는 가운데 적 공격파가 나이트 일병의 방어선
으로 몰려들었고 일병의 위치는 방어선에서 매우 중요한 키포인트였다. 적
포탄에 나이트 일병의 벙커가 맞아 붕괴되고 본인도 다쳤으나, 일병은 잔해
에서 기어 나와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적 공격파 전열에 대고 계속
해서 총을 쐈다. 일병의 사격에 수 많은 적이 쓰러졌고 적 공격은 순간적으로
주춤했다. 이후 적 공격 2파가 몰려왔고 일병은 자기 위치로 적 1개 분대가
방어선을 넘어오는 걸 목격하고 혼자 반격해 그 분대 전체를 죽거나 다치게
했다. 총알 다 써버린 시점에서 일병은 적병 3명이 폭발물을 들고 방어선 안
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게 터지면 방어선이 완전히 뚫린다는 걸 깨달았다.
일병은 앞으로 뛰어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두 명을 무력화시키고 폭약을 든
세 번째 병사까지 죽였고 나이트 일병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존 켈빈 코엘쉬 중위
미 해군 헬리콥터 구출부대. 51년 7월 3일 북한 지역.
해병대 전투기 조종사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적 수중에서 꼼짝을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중위의 헬기는 어둠 속에서 빠르게 조종사를 향해 날아갔다. 지역은
적 장악지역 깊숙한 산악이었다. 정확한 좌표는 받았지만 구름이 산 정상들 아래
로 잔뜩 낀 상태였고 그대로 산악을 향해 비무장 헬기가 호위도 없이 하강하는 것
은 너무 위험했고 체계적인 수색도 힘들었다. 적 사격이 가중되어 동체가 피탄 되
는 가운데 중위는 조종사 구조를 고집했고 조종사는 팔과 다리에 3도화상을 입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결국 조종사를 발견해 케이블을 내려 조종사를 매달아
올리던 도중 오히려 적 사격에 표적이 되어 크게 피탄되어 헬리콥더는 산 측면에
크게 충돌하면 불시착했다. 코엘쉬 중위는 빠르게 조종사와 승무원을 잔해에서
끌어낸 뒤 적 병력을 피해 회피를 시작했다. 중위는 총 9일간 적을 피해 도피탈출
을 했고 모두 적에게 잡힐 때까지 심각한 화상으로 고통을 받았다. 포로로 잡힌
코엘쉬 중위는 굳건하게 취조에 아무런 정보도 협조하지 않았고 동료들에게
불굴의 정신을 선사했다.
어네스트 R. 카우마 상사
미 육군 제72탱크대대 A중대. 50년 9월 1일 낙동강 전선 애곡.
상사는 보병부대 지원용으로 낙동강전선에 있었다. 8월 31일 밤 자정 근처
에 적 약 500명이 낙동강을 도하해 미군보병 거점에 격렬한 공격을 해왔다.
이 공격에 미군이 큰 피해를 입자 상부는 후퇴해서 새로운 방어점을 만들
라고 명령했고 기갑부대는 이 퇴각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적은 미군
탱크 두 대에 다가와 한 대를 파괴했고 한 대는 후퇴했다.
그때 갑자기 카우마 상사는 적의 맹돌격의 입구에서 자신의 탱크가 적에게
유일한 장애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상사는 후퇴하지 않고 승무원들에게
사격/포격 명령을 내리면서 밤 동안 자리를 고수하여 여러 차례 적과 충돌
했다. 적이 상사의 탱크를 둘러싸자 상사는 포탄에서 튀어나와 몸을 노출한
상태로 탱크 뒤쪽의 50기관총을 잡아 적에게 난사하기 시작했다. 한 탄통을
모두 다 쏘자 그는 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며 적을 탱크에서 쫓아냈다.
상사의 탱크는 총 9시간을 싸웠고 아군 방어선은 9마일 후방으로 후퇴해
새로운 방어선을 구성했다. 상사의 탱크는 적 공격대에 매우 큰 피해를 입
혔고 실탄은 거의 다 소모했으며 적 기관총좌 세 개를 격파했고 적 약 250명
을 죽였다. 그 동안 아군의 후퇴 방어선은 공고해졌고 상사는 재보급을 위해
탱크를 돌려 자신의 탱크중대와 합류했다. 당시 부상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도 전선으로 돌아가겠다는 상사를 극구 만류해 의무대로 후송시킬 수 있었다.
에드워드 C. 리조브스키 대위
보병2사단 9연대 B중대. 51년 8월 31일 - 9월 3일 Tondul 근처.
리조브스키 대위는 B중대장으로써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700고지 공격의
선봉에 섰다. 대위의 중대는 적 벙커에서 날아오는 십사사격과 수류탄 공격
을 받아 돈좌되었고 그러자 대위는 혼자 앞으로 기어가 벙커 하나를 수류탄
으로 격파하고 두 번째 벙커는 카빈총으로 격파했다. 밤이 오자 공격에 견딜
수 있는 유리한 지점으로 후퇴해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동이 트자 다시 공격을
재개했으나 중대에 수 없는 전상자가 발생했다. 적의 사격은 압도적이었고
대위는 부상자를 후방으로 빼라고 지시했다. 부상자 후송을 위해 엄호사격을
하던 중 수류탄이 터져 다쳤으나 대위는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지휘했다. 9월
3일 대위는 부대를 용감하게 공격시켜 중요한 적 거점 몇 개를 파괴하고 전진
했으나 다시 살인적인 사격에 돈좌된다. 대위는 혼자 용감하게 엄폐물이 없는
둔덕으로 전진해 적 박격포좌에 사격을 하다 적 저격수가 쏜 총알에 맞아 곧
전사했다.
다윈 K. 키레 소위
보병3사단 7연대 K중대. 51년 2월 16일 가밀리 근처.
강력하게 참호화 된 185고지를 공격하던 중 소위의 소대는 적 사격에 돈좌
되었고 소위는 몸을 노출하고 소대원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격려하고 전진
을 고무시켰다. 소대장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소대원들이 다시 일어나 전진
했으나 적 기관총에 막혀 다시 돈좌되면서 아군 6명이 부상당했다. 이에 키레
소위는 즉각 기관총좌로 홀로 돌격해 백병전을 벌여 적 세 명을 모두 죽였고
목표를 향해 계속 전진했다. 그러던 중 소대는 오른쪽의 잘 은폐된 적 거점에서
자동화기를 갑자기 받게 되었고 소위는 착검하고 다시 혼자 돌격해 수류탄을
던지고 카빈총을 쏘면서 적 4명을 죽였으나 이 과정에서 적 기관단총을 맞고
전사했다.
허버트 L. 리 상사
보병2사단 23연대 I중대. 51년 2월 1일 이포리 근처.
한 거점을 방어하던 상사의 소대는 수적으로 월등한 적에게 공격당했고
소대장은 다쳤다. 리 상사는 지휘권을 인수하고 소대를 재편성 한 다음
거점을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공격했다. 목표 25미터를 남기고 수류탄
파편에 리 상사는 다리를 다쳤지만 지원을 거부하고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공격은 다섯 번이나 실패했고 그때마다 상사는 재편성해서 새롭게
다시 공격을 이끌었다. 다섯 번째 공격에서 적이 사격하는 가운데 수류탄이
터져 상사는 기절해 땅에 쓰러졌으며 양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깨어난 상사
는 이번에도 후송을 거절하고 앞으로 기면서 총을 쏘고 소대원들에게 자신
을 따르라고 말했다. 마지막 최후 공격에서 상사는 소총탄에 의해 세 번째
부상을 입었으나 상사는 계속 앞으로 기었다. 결국 적은 83구의 시체를 남
기고 퇴각했으며 소대는 귀중한 거점을 다시 탈환했다. 그 곳은 적 공격을
막기에 천혜의 거점이었다.
조지 D. 리비 병장
24보병사단 3전투공병대대 C중대. 1950년 대전 근처.
적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돌파하기 위해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적의
도로차단점과 조우했다. 적이 무차별로 사격해 차량은 못 쓰게 되었고
차량에 탑승한 모든 병사는 죽거나 다쳤는데 리비 병장만 무사했다. 리비
병장은 도랑에 엄폐해 응사하면서 두 번이나 차량으로 가 다친 동료를 도
왔다. 병장은 M-5 트랙터를 발견하고 부상자를 거기 실었고 그러자 적은
트랙터 운전병을 향해 사격을 집중했다. 아무도 트랙터를 몰 사람이 없다고
깨달은 병장은 트랙터 운전석에 올라 응사하면서 트랙터를 몰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리비 병장은 여러 번 몸과 양팔에 총알을 맞았고 그러면서
트랙터를 몰았다. 트랙터를 몰면서 부상자를 발견하면 정지해서 싣고 계속
갔고 총으로 응사도 했다. 그러다 또 다른 적 도로차단점을 만났고 병장은
다시 총에 맞았으나 병장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 트랙터를 몰았다.
병장의 영웅적인 분투로 트랙터에 탄 아군 부상자들은 결국 아군 진영에
도달했다.
허버트 A. 리틀톤 일병
해병1사단 7연대 1대대 C중대. 51년 4월 22일 춘천 근처.
리틀톤 일병은 중대에 배속된 포병관측반 무전병이었다. 야간에 엄청난
적이 격렬한 공격을 시작할 때 일병은 불침번으로 깨어 있었다. 일병은
관측반을 모두 깨웠고 관측팀은 적을 잘 관측할 수 있는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했다. 관측반이 그 위치에 마지막 인원이 도달할 무렵 적 수류탄 하나
가 팀 중간에 떨어졌고 일병은 주저 없이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관측반
동료를 구하고 전사했다. 일병의 희생으로 관측팀은 적 공격파에 포격을
퍼부어 적 공격을 물리칠 수 있었다.
찰스 R. 롱 병장
보병2사단 38연대 M중대. 51년 2월 12일 횡성 부근.
이날 대규모의 적이 중대가 방어하고 있는 300고지를 새벽 3시 공격했고
결국 퇴각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중대 박격포의 사격지시관측을 위해 앞쪽
에 있던 롱 병장은 적에게 박격포를 계속 포격하기 위해 물러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박격포를 유도했다. 두려운 상황에서 롱 병장은 아주 차분
하게 무전기로 박격포를 유도해 적 공격파에게 적중시켰다. 이어 롱 병장은
자신의 카빈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면서 치명상을 입고 쓰러질 때까지 적과
싸웠다. 이 포격 유도로 적은 큰 피해를 입었고 롱 병장의 중대는 안전하게
퇴각해 재편성한 다음 반격해 고지를 재탈환했고 이 고지는 여전히 강력한
유엔군의 거점으로 남았다.
발도로메오 로페즈 중위
해병1사단 5연대 1대대 A중대. 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중위는 해안 상륙 공격 1파로 해안에 들어갔고 적의 저항은 줄어들고
있었다. 상륙해 적 벙커에서 사격을 받아 해병들이 전진하지 못하자
앞으로 나가 수류탄을 투척해 파괴했으나 다음 토치카로 인해 병력은
다시 돈좌된다. 다시 수류탄을 던지려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적 자동
화기가 불을 뿜어 던지려던 자세의 중위 오른쪽 어깨와 가슴에 총알을
맞아 뒤로 쓰러졌다. 이때 안전핀을 뽑아 진행되고 있는 자기 수류탄을
보았다. 출혈과 부상의 고통으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지만 수류탄이
아군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한 중위는 팔을 뻗어 수류탄을 짚은 다음 자기
몸 밑으로 수류탄을 넣고 충격을 혼자 받았다.
찰스 J. 롱 소령
미 공군 8전투기비행단 80전투폭격전대.
52년 11월 22일 북한 Sniper Ridge 근처.
야간에 근접항공지원 임무를 받은 소령은 F-80 전투기 네 대로 된 편대를
이끌었다. 소령은 아군 지상군을 괴롭히던 적 포좌를 향해 직강하 다이빙
폭격을 준비했다. 위치를 정확히 확인한 다음 소령은 직강하에 들어갔는데
지상에서 쏘는 대공사격이 극도로 정밀하게 날아왔다. 그러나 소령은 기체가
맞기 전까지 과감하게 폭격 하강을 계속했고 약 4천 피트 상공에서 동료 전투
기들에게 무전으로 목표가 능선 북서쪽에 포대가 집중되어 있다는 정보를 음성
으로 전하고, 왼쪽으로 45도 꺾으려 했으나 되지 않자, 탈출하지 않고 그대로
적 포좌가 집중된 구역으로 기체를 몰고 가 지상에 충돌공격해 폭발시켰다.
윌리엄 F. 라이엘 상병
보병7사단 17연대 F중대. 51년 8월 31일 추파리 근처.
소대장이 전사하자 라이엘 상병은 지휘권을 인수하고 소대공격을 이끌었다.
공격 목표는 일대를 모두 조망하는 중요한 곳으로 적은 거기에 강력한 방어망
요채처럼 구축하고 미군을 방어했다. 전진하다 적 사격으로 인해 소대가 정지
하자 상병은 57밀리 무반동총을 들고 나가 주저 없이 적 사격 거점을 향해 발사
했는데, 이 사격은 정말로 정확하게 들어가 적 벙커는 파괴되고 안에 있던 적은
모두 죽었다. 소대로 돌아온 상병은 다시 공격을 이끌었고 이어 다시 두 번째
벙커를 만나 치열한 사격을 받았고, 그러자 상병은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수류탄
들을 던졌으나 본인도 고통스런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벙커는 파괴되었고 안에
있던 적 6명도 죽었다. 다시 진출하다 또 세 번째 벙커를 만나자 다시 뛰면서 수
류탄을 투척했고 적 4명을 죽였다. 상병이 이끄는 소대는 고지 북쪽 경사면에
들어갔고 적 사격은 정확하게 날아왔다. 그러나 올라가지 않으면 다른 아군
공격파가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상병은 대담하게 사격에 몸이 노출된
상태로 적정을 향해 기면서 소대원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고무시키다 박격포탄
이 터져 치명상을 입었다.
베니토 마르티네즈 상병
보병25사단 27연대 A중대. 52년 9월 6일 사태리 근처.
야간에 방어선 앞쪽에 청음초를 나갔다가 증강된 중대급의 공격을 받았다.
이 적은 아군 중대급 방어선을 공격하기 위해 가던 중으로 보였다. 이 적들
은 곧 아군 방어선을 관통했고 곧 중대 진지가 포위될 위험에 놓였다. 마르
티네즈 상병은 자신의 거점에서 물러서지 않고 적의 맹공격을 막기로 결심
했다. 결연한 위치고수에서 맹렬한 사격을 공격하는 적에게 퍼부어 굉장히
큰 타격을 입혔다. 옆에 있던 유선전화기가 울렸지만 그걸 잡을 틈조차 없었
다. 그러자 곧 적은 마르티네즈 상병의 거점에 병력을 집중하기 시작했고
상병은 이제 물러설 수도 없었고 자신의 자동화기와 권총만으로 버텨야 했다.
이렇게 상병은 6시간을 버텨 싸웠고 곧 동이 터올 시간이었다. 상병은 마지막
으로 유선전화기를 들어 적이 자신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은
이곳을 지킬 테니 아군은 재편성해서 반격해 탈환하라고 말했다.
다니엘 P. 매튜스 병장
해병1사단 7연대 2대대 F중대. 53년 3월 28일 전초 Vegas Hill.
병장은 F중대 분대장으로, 3월 28일 적에게 전초가 넘어가자 중대는 잘
구축된 진지에 들어선 적을 향해 위험한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반격은
6회나 실패했고 이 전초는 주방어선에서 앞으로 나온 매우 중요한 거점
이었다. 매튜스 병장은 분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나 적의 압도적인
사격으로 인해 돈좌되었고 일대를 휩쓰는 전초 최정상의 기관총좌가 문제
였다. 그 정상 기관총좌는 시야가 좋아 공격자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했다.
정확히 보고 쏘기 때문에 의무병도 접근할 수가 없었다. 이 기관총좌는
바위로 들러싸여 있어 사격에도 끄떡없었다. 매튜스 병장은 혼자 은밀히
기관총좌를 향해 기어가 바위에 뛰어 올랐고 적은 크게 당황했다. 병장은
총 하나 들고 혼자 돌격해오자 적은 총좌에서 물러나면서 모든 사격을 병장
을 향해 퍼부어 병장은 여러 번 총에 맞았다. 그러나 병장은 돌격을 계속 했고
소총으로 적 셋을 정확하게 쏴 죽이고 기관총좌를 침묵시켰다. 그러나 병장도
크게 다쳤고 동료 해병들이 후송시켜 의무대에 도착했으나 부상에 굴복했다.
프레드릭 W. 마우서트 3세 병장
해병1사단 7연대 1대대 B중대. 51년 9월 12일 송납영 부근.
병장은 B중대의 분대장이었다. 중대는 적과 강력한 교전을 벌여 돈좌되고
큰 전상이 났다. 적은 기관총은 물론 포병과 박격포로 압도했다. 바로 진지
화 참호화 된 673고지의 적이었다. 마우서트 병장은 주저 없이 엄폐물에서
나와 맹렬한 사격 속에 다친 해병 두 명을 향해 달려가 안전하게 아군 진영
으로 끌고 왔다. 병장은 머리를 다쳤으나 후송을 거부했고 잠시 후 소대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병장은 소대원에게 착검을 명령하고 난공불낙의 벙커들
을 향해 돌격을 소리치고 본인이 선두에 섰다. 이때 다른 총알이 철모를 때리
면서 병장은 정신이 멍해서 쓰러졌으나 다시 일어나 섰고 다시 달려 기관총
하나를 침묵시키고 적 여러 명을 죽였다. 병장은 병력을 재편성해 능선 최종
목표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명령했고 본인은 과감하게 총알이 난무하는 가운
데 기관총좌를 향해 정면으로 혼자 돌격했다. 그러자 소대원들도 돌격에 동참
하기 시작했다. 표적이 된 병장은 총알을 여러 발 맞았으나 여전히 의무치료를
거부하고 기관총망과 벙커들을 향해 계속 돌격했다. 마지막 남은 보루에서 적
은 맹렬하게 저항했고 병장은 뛰어 일어나 한 기관총좌를 제압하고 수류탄을
던지다 적이 던진 수류탄 폭발과 기관총탄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로버트 M. 맥거번 중위
1기병사단 5기병연대 A중대. 51년 1월 30일 감양잔리 근처.
맥거번 중위는 토치카 형 벙커와 참호선으로 연결된 적이 점령한 고지에
경사면을 통해 공격해 올라가고 있었고, 고지 정상에서는 중기관총이 쏘고
있었다. 정상을 75미터 정도 남겼을 때 적은 압도적인 사격을 가해왔고 중위
는 소대원들에게 계속 올라가라고 지휘했다. 경사가 급한 바위산 경사면에서
목표로 계속 접근했고 중위가 일어서 정상에 수류탄을 던지자 적은 엄청난
수류탄을 투척했고 소대는 정지했다. 적의 사격은 늘어나고 강렬해졌으며
중위는 소대 전상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중위는 적이 던진
수류탄을 터지기 전에 몇 개 되던졌고 부상의 고통과 바닥난 체력에도 불구
하고 소대를 갈기갈기 찢고 있던 기관총좌를 향해 돌격했다. 10미터를 남기고
중위는 불굴의 의지로 일어나 카빈총을 쏘면서 단독으로 돌격했고 수류탄도
던져 적 7명을 사살한 뒤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기관총좌는 격파했고 소대장
의 전사를 본 소대원들은 수류탄을 던지고 착검한 다음 돌격해 적 진지로 돌격
했다. 고지는 점령되었고 적은 남은 적은 도주했다.
알포드 L. 맥라우린 일병
[상사 시절]
해병1사단 5연대 3대대 L중대. 52년 9월 4-5일.
맥라우린 일병은 중대의 기관총 사수였다. 9월 4-5일 밤 주방어선에서 앞
으로 나간 전초에서 일병은 두 번째 경계병으로 자원했는데, 밤이 되자 적의
격렬한 박격포와 포탄 탄막이 떨어졌다. 당시 일병의 위치는 전초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포격에 이어 적 대대급이 공격해왔고 상병은 기관총 2정
과 카빈총과 수류탄으로 적에게 참화적인 사격을 퍼부었다. 부상의 고통 속
에서 일병은 기관총을 들고 일어나 허리에 놓고 쐈는데 맨손으로 총열을 잡아
극도의 뜨거움을 견뎌야 했고 결국 왼손은 화상과 물집으로 가득 찼다. 총열이
너무 뜨거워지자 식히는 동안 카빈총과 수류탄으로 적과 싸웠다. 일병은 일어
서서 서서쏴를 하며 동료들을 고무시키는 고함을 질렀다. 광란의 공격을 하는
적에게 일병의 사격은 매우 정확하고 강력했다. 일병은 적 약 150명을 죽이고
50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의 공격은 일병의 공으로 막아
냈고 전초는 지켜졌다.
레로이 A. 멘돈사 병장
보병3사단 7연대 B중대. 51년 7월 4일 치촌 근처.
병장의 소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586고지를 점령했고 거기서 야간에 대규모
병력의 공격을 받았다. 1소대 구역에 적에게 허를 찔렸고 큰 압력을 받은 소대
는 2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멘돈사 병장은 몸을 노출하며 원래
위치에서 소대의 퇴각을 엄호했다. 병장은 다가오는 적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고 가진 모든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적을 막았다. 이후 병장은 소총 개머리
판을 휘두르고 착검한 총검으로 치명상을 당할 때까지 적과 싸웠다. 전투 후에
조사해 보니 멘돈사 병장은 적 총 37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고 소대는 안전하게
후퇴했으며 중대는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반격해 고지를 탈환했다.
루이스 L. 밀렛 대위
보병27연대 E중대장. 51년 2월 7일 소암리 근처.
대위의 중대는 강력한 적의 거점을 공격 중이었는데 휘하 1소대가 소총 자동
화기 대전차포에 막혀 돈좌되자 3소대에 진출명령을 내렸고 본인은 2소대의
선두와 같이 했다. 밀렛 대위는 착검하고 공격일 이끌었고 적병 두 명을 총검
으로 찔러 죽이고 계속 전진하면서 수류탄을 던지고 개머리판을 적에게 휘두
르며 부하들에게 용기를 돋는 고함을 질렀다. 적의 사격을 뚫고 중대는 정상
부근에 도달해 격노한 백병전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대위도 총검을 들고 적과
싸우면서 중대원들에게 싸워 이기라는 고함을 질렀고 크게 당황한 적은 흩어
지면서 도주했다. 밀렛 대위는 수류탄 파편에 다쳤지만 후송을 거부했고 결국
목표 고지를 점령하고 완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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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5
프랭크 N. 미첼 중위
해병1사단 7연대 1대대 A중대. 50년 11월 26일 한산리 근처.
미첼 중위는 A중대 소대장으로, 당시 한산리 근처 중대급 정찰로 미첼 중위
의 소대가 선두소대로 눈 덮이고 빽빽한 수목지대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미첼 중위는 적 보급부대를 지근거리에서 조우하고 즉각 발포했고 적의 응사
로 인해 소대는 돈좌되고 큰 전상이 발생했다. 중위는 적이 자동화기와 소총
을 마구 발포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뛰어 나가 다친 아군 자동화기를 들어 실탄
이 떨어질 때까지 다가오는 적에게 쐈다. 실탄이 떨어지자 수류탄을 들어 정말
정확히 투척했고 이와 동시에 부하들에게 고함을 쳐 고무시키면서 급조방어를
구성시켰다. 적은 정면과 왼쪽에서 격렬하게 반격해왔다. 중위는 초기 행동에서
이미 다쳤으나 소대가 강력한 사격에 전상이 늘고 있어 오히려 앞으로 나가 적과
백병전을 벌여 적을 물러나게 했다. 이에 부상자 후송 자원자를 나오라고 한 뒤에
자신도 한 들것부대를 선도했다. 점차 어두워지는 가운데 소대는 적 포위선을 뚫
고 돌파해야 했고 중위 자신도 다중 부상으로 고통을 참으며 전진했다. 중간에 적
이 나타나자 중위는 혼자 적과 맞서 싸우며 소대원을 엄호에 나서, 소대는 안전
하게 빠졌지만 중위는 소총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히로시 H. 미야무라 상병
보병3사단 7연대 H중대. 51년 4월 24-25일 대전 부근.
24일 밤 H중대 방어선을 뚫으려는 적이 공격해왔다. 미야무라 상병은 기관
총반 분대장으로 즉각 위험을 감지하고 주저 없이 대피호에서 나와 소총에
착검하고 백병전을 벌여 적 약 10명을 죽이고 원래 위치로 돌아와 부상자
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후송을 지시했다. 다른 공격파가 다시 방어선을 때리
자 상병은 기관총을 잡아 실탄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사격하고 자신의 분대
에 퇴각을 명령하면서 소총에 착검하고 적들로 가득 찬 곳을 통과해 두 번째
기관총좌로 가 기관총 조수를 했다. 적의 강렬한 공격으로 인해 중대 퇴각명령
이 떨어지자 미야무라 상병은 모두 퇴각하라고 하고 자신은 퇴각 엄호를 맡겠
다고 자원했다. 상병은 실탄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약 50명의 적을 죽이고 여러
번 다당쳤다. 부상의 고통 속에서도 상병은 장엄하게 버티면서 적을 물리쳤으나
결국 상병의 위치는 적에게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상병의 모습은 거대한
숫자의 적과 마주해 잔인한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었다.
오라 l. 미즈 상사
[특전단으로 전출 가신 모양입니다]
보병3사단 15연대 k중대. 53년 6월 10-11일 수랑리 근처.
k중대는 당시 "Outpost Harry" 방어를 맡고 있었고 이는 지정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거점이었다. 적이 강력한 공격을 시작했고 미즈 상사는 앞에 내보낸
청음초 병사들이 다쳐서 꼼짝을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이에 미즈 상사는 구
출대를 이끌어 청음초에 도달해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오는데 이미 적 공격에
전초의 일부 방어선이 뚫렸다는 걸 알게 된다. 이에 상사는 포탄이 터지고 수
류탄이 근처에서 세 번이나 터졌으나 원래 위치로 돌아가 적 공격을 완강하게
방어해 결국 적 공격은 물러났다. 적은 재차 공격해왔고 상사는 벙커와 벙커
사이를 이동하며 적이 점령한 벙커에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쏴 제압했다.
한 중대원 뒤로 접근하는 적을 발견하고 상사가 쏴 죽이기도 했다. 상사는
자신의 소대로 복귀해 돌아다니면서 실탄을 분배하고 고함을 질러 격려했다.
이때 아군 기관총좌 하나가 적에게 넘어갔고 상사는 즉각 그곳으로 달려가 적
10명을 사살했고 나머지는 달아났다. 상사는 지휘벙커로 돌아가던 중 몇몇
아군 부상자를 발견하고 그들을 보호했고 무전기를 이용해 적 공격파에 포격
을 유도했다. 동이 틀 무렵 상사는 병력을 재편성해 반격했고 결국 전초의
적을 모두 몰아냈다.
왈터 C. 모네건 주니어 일병
해병1사단 1연대 2대대 F중대 로켓발사기 사수. 50년 9월 20일 소라리.
서울로 가는 중요 국도가 내려다보이는 고지에서 참호를 파고 있던 중,
9월 17일 동이 틀 무렵 적 탱크 6대가 대대 방어선을 돌파하려 시도했다.
모네건 일병은 재빨리 바주카를 들고 나가 로켓을 선두 탱크를 향해 50
미터 거리에서 발사했고, 로켓을 탱크에 적중했고 해치를 열고 탈출하려
는 적 탱크병을 일병은 휴대한 카빈총으로 사살하고, 이어 다른 탱크를
향해 대담하게 두 발을 더 발사했다. 그러자 아군 탱크 한 대가 90밀리
주포를 발사하며 대항했다. 당시 중대 방어선은 적 탱크와 보병으로 압도
되어 전멸할 위기에 놓여 방어선을 조정했으나 적은 중대 방어선을 뚫고
넘어가 9월 20일 이른 아침 2대대 지휘소를 향해 밀려왔다. 어두운 가운데
모네건 일병은 로켓발사기를 들고 고지 아래로 내려가 탱크들이 통과하는
곳으로 향했다. 이때 상공에 조명탄이 터지자 일병은 이를 이용해 지근거리
에서 자동화기를 난사하는 적 탱크 한 대를 정확히 적중시켰고, 다시 자신을
노출하면서 다른 탱크 하나를 또 적중시켜 격파했다. 이에 뒤쪽 적 탱크들은
방향을 돌려 후퇴했다.
위트 L. 모어랜드 일병
해병1사단 5연대 1대대 C중대 배속 정보 정찰병. 51년 5월 29일 광치동.
중대는 적이 강력하게 방어하는 한 고지를 향해 격렬한 공격을 하고 있었고
일병도 적 총좌에 정확한 사격을 가하며 올라가고 있었다. 총좌가 점령되지
일병은 지체 없이 400미터 앞 벙커를 향해 대담하게 전진했다. 그런데 벙커
에 도달할 무렵 적이 엄청난 수류탄을 모어랜드 일병 무리에 투척했고 일병
은 대담하게 몇 개를 발로 차냈고 그러다 하나가 가까이 떨어졌고 일병은
동료들에게 조심하라고 고함을 지른 뒤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동료를
구하고 전사했다.
도날드 R. 모이어 중사
보병35연대 E중대. 51년 5월 20일 서울 부근.
모이어 중사의 소대는 수적으로 우세하고 잘 축성된 강화된 진지로 방어하는
적 점령 주요 고지를 공격했다. 험난한 바위지형을 공격하다 소대는 적 소총
자동화기 수류탄에 피해를 입고 소대장과 소대 선임하사 모두 다쳤다. 모이어
중사는 소대 목표가 위태롭다고 생각해 앞으로 뛰어나와 비틀거리는 소대 지
휘권을 인수하고 앞으로 전진하라고 외쳤다. 중사의 선도에 용기를 얻은 소대
는 결국 공격해 고지 정상까지 올라갔다. 적 사격은 더욱 강렬해지고 수류탄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용감한 선두 무리가 정상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수류탄이
그들 중간에 떨어졌고 모이어 중사는 몸으로 수류탄을 막아 부하들을 보호하고
전사했다.
레이몬드 G. 머피 소위
해병1사단 5연대 1대대 A중대 소대장.
53년 2월 3일. 중요한 거점에 참호화 되고 능숙하게 잘 은익 된 적을 공격하던
중 머피 소위는 적 박격포탄에 파편상을 입었다. 머피 소위는 의무치료를 거부
하고 계속 소대를 고지로 이끌면서 적 박격포와 소총 자동화기 사격을 받았다.
적 사격이 너무 강력해서 전상자가 속출하자 소위는 부상자 후송을 위해 몇 번
을 조력해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고 소위 개인적으로도 다친 해병을
직접 운반했다. 이 과정에서 소위는 권총으로 적 2명을 사살했고 부상자 후송
을 통해 공격부대의 부담을 경감시켰다. 이후 카빈총을 들고 계속 전진하는
아군을 엄호했고, 이전 부상으로 고통스러웠으나 공격부대가 적 자동화기에
직면하자 소위는 직접 자동화기를 하나 잡아 엄호사격을 했다. 고지 중심에
도착해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자 소위는 정찰대를 구성해 낙오해 다친 해병
들을 수색했고 다친 기관총반 해병을 밑으로 운반했다. 적의 강력한 포/총기
사격 속에서 소위는 의료치료를 거부하면서 모든 소대원들을 데리고 내려
왔고 병력을 통솔해 아군 주방어선으로 복귀시켰다.
레지네일드 R. 마이어스 소령
해병1사단 1연대 3대대. 50년 11월 29일 하갈우리 근처.
마이어스 중령은 육군과 해병대로 연합된 약 250명의 대윈을 지휘하며 북쪽
으로 올라간 사단 주력의 후방기지인 하갈우리 진지를 위기의 순간에 효과적
으로 방어했다. 이 과정에서 하갈우리 진지를 위협하는 적 4천 명으로 추산
되는 참호화 된 진지에 반격을 가해 거점을 무력화시켰다. 주간에 전투훈련이
부족한 이 병력들을 최대의 전투력을 발휘하도록 소령은 진취적이고 용감하게
이 혼성부대를 이끌었다. 적의 공격과 강력한 사격 속에서 자신을 노출시키며
사격을 지휘하고 방어선 전개를 점검하고 병사들에게 용기와 사기를 북돋았다.
거의 극복할 수 없는 가혹한 적 거점을 향해 경사면에서 공격을 선도했고, 포병
화력을 유도하면서 소령은 총 14시간의 전투 가혹한 영하 기온에서 치러냈다.
소령 휘하 250명 중에서 170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소령은 오히려 재편성해 적
에게 역습을 가하는 등 적 약 600명을 죽이고 500명 정도의 부상자 피해를 입
히며 하갈우리 베이스를 방어했다.
유진 아놀드 오브레곤 일병
해병1사단 5연대 3대대 G중대. 50년 9월 26일.
오브레곤 일병은 기관총반의 탄약운반수였다. 그때 중대는 적 사격 때문에
순간 돈좌된 상태였고, 상병은 해병 전우가 쓰러지는 걸 보고 권총 한 자루
를 들고 쏘면서 앞으로 질주해 부상자 옆에 엄폐했다. 이어 일병은 한손으로
권총을 쏘면서 다친 동료를 다른 손으로 도로 옆으로 끌어다 놓았고 전우에게
붕대를 감아주었다. 이때 적 소대 병력이 일병이 있는 위치로 전진하기 시작
했고 그러자 일병은 재빨리 부상 전투의 카빈총을 들었고 자기 몸으로 다친
전우 몸을 가려 자기 몸을 방패처럼 만든 뒤에 정확한 조준사격을 시작했다.
일병은 기관총에 치명상을 입고 전사할 때까지 그렇게 전우를 보호하며
싸웠다.
조지 H. 오브라이언 주니어 소위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H중대 소대장. 52년 10월 27일.
중대는 주방어선의 한 거점을 공격하려 준비하는 동안 적 야포와 박격포의
강한 포격을 받았고 이어 대규모 병력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다. 오브
라이언 소위는 참호에서 나와 일어나 적을 향해 공격명령을 내리며 자신을
따르라고 소리쳤다. 소위는 몸을 노출하고 적 점령 고지를 향해 강력한 사격
속에 뛰었다. 그때 은폐된 적 참호에서 쏜 적 자동화기에 팔을 맞았으나 소위
는 다시 일어나 병사들을 앞으로 이끌었다. 이 공격으로 부상 해병들에게 손
길을 줄 수가 있었고, 소위는 적과 지근거리에서 조우해 벙커에 수류탄을 던
지고 카빈총을 쏘고 처절한 백병전을 벌여 적 적어도 세 명을 죽였다. 이때
적 충격 수류탄 세 발이 폭발해 쓰러졌으나 소위는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소대를 4시간 동안 이끌었다. 소위는 소대원들에게 용기를 북돋고 각 대원을
점검했으며 공격이 중지되자 방어를 준비시켰다. 다른 부대와 교대되어 소대
가 뒤로 빠질 때는 소위가 뒤에 남아 직접 엄호사격을 했다.
조셉 R. 오레트 일병
보병2사단 9연대 H중대. 50년 8월 31-9월 3일 용산 부근.
강변에서 갑자기 나타난 적의 거점으로 인한 강력한 사격으로 피해를 입자,
오레트 일병은 적 거점의 병력 크기와 거점의 형태를 알기 위해 자진해서
정찰에 나섰다. 적정을 파악한 일병은 쏟아지는 사격 속에서 부대로 복귀
했다. 나중에 항공기에서 물이 투하되었는데, 일병은 전우들을 위해 방어선
밖으로 뛰어가 식수를 회수해오기도 했다. 오레트 일병의 행동으로 중대의
사기가 올라갔으며, 실탄과 수류탄이 부족해지자 일병은 방어선 앞으로 기
어가 전사한 적군의 시체에서 필요한 것을 수집해 돌아왔다. 이렇게 기고
있는데 적병이 수류탄을 던지자 일병은 그 적병에게 달려들어 육박전으로
적을 죽이고 실탄을 모아 복귀했다. 9월 3일 적이 공격했을 때 적은 수류탄
을 계속 던졌는데 오레트 상병의 참호에 수류탄이 여섯 번이나 떨어졌지만
그때마다 점프해 나와 수류탄 폭발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적이 다가오자
일병은 소총을 들고 적과 마주해 싸우다가 전사했다.
존 U. D. 페이지 중령
미 9군단 포병 제52트럭수송대대. 장진호 근처 50년 11월 29일 - 12월 10일.
11월 29일 페이지 중령은 함흥의 9군단 본부를 떠나 해병 1사단을 향한 주
보급선을 운영했고 장진호 근처의 일부 육군부대도 보급대상이었다. 한번
보급하고 안전하게 함흥으로 돌아온 페이지 중령은 해병사단과 차단되어
고립된 통신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고 가기로 결정한다. 지프차 운전
병과 함께 가던 중령은 파괴된 다리 근처에서 적에게 매복을 당했다. 그러나
페이지 중령은 고토리 근처의 포위된 해병 주둔지에 도착했다. 중령은 해병대
병력과 남아 있던 육군 병력을 통합해 제대를 구성하고 전술적으로 대처해
지휘하기 시작했다. 적은 지속적으로 적은 공격하고 있던 상황에서 중령은
부상자 후송을 결정하고 동토가 되어 버린 활주로 보수작업에 시키고 활주로
방어선을 구성했다.
두 번의 적 공격 동안 중령은 활주로에서 몸을 노출하며 적에게 사격을 가했고
또한 두 번이나 탱크 뒤에 올라타 기관총을 잡고 적에게 응사했다. 12월 3일 중
령은 적정을 관찰하기 위해 정찰기를 타고 저공으로 날면서 중공군 진영에 수류
탄을 투하했고 카빈총으로 적 참호를 향해 자동으로 난사했다. 이후 10일 동안
해병과 육군은 장진호 근처 평원 가장자리에 확고한 거점을 만들었고, 이후 중령
은 함흥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돌파를 위한 포병지원을 요청했다.
안전을 위해 돌아가지 말라는 충고를 무시하고 중령은 다시 고토리의 동료들
에게 돌아왔다. 점차 (고토리에 돌아온 해병1사단과 일부 육군) 병력들이 남쪽
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와중에 중령은 후위제대와 같이 했고 좁은 협곡 고개를
통과하다 적에게 양쪽에서 공격을 받았다. 중령은 차량이 모두 통과할 때까지
기관총으로 용감하게 응사했고 자신의 위험은 무시했다. 다시 한 번 산 고개
중간에서 차량행렬이 공격을 받자 다시 기관총을 잡아 산 측면에 효과적인
응사를 가했다. 이때 중령은 몸을 노출하면서 대담하게 행동했다.
12월 10일 밤, 차량대는 고개의 맨 아래에 도달해 적의 강력한 사격을 받고
다시 정지했다. 적은 정면과 양 측면 모두에서 공격해 소총으로 미친 듯이 쏴
댔다. 그 대로 멈춰 있다가는 더 위험해질 거란 생각이 든 중령은 차량행열 앞
으로 나가 동승해 싸우면서 길을 뚫었다. 중령의 돌연한 행동에 놀란 적은 사기
를 잃고 점차 흩어졌고 큰 피해를 입었다. 10일 동안 페이지 중령은 자신의 안전
을 무시하고 항상 선두에 섰으며 중상을 입고 쓰러질 때까지 용감한 행동은
계속되었다.
찰스 F. 펜들톤 상병
보병3사단 15연대 D중대. 53년 7월 16-17일 추궁동 부근.
펜들톤 상병의 부대는 한 중요한 고지에 방어선을 구성하고 있다가 대규모
적의 공격을 받았다. 일병은 다가오는 적에게 정확한 조준사격을 적 15명을
사살하고 수류탄을 던져 나머지 적은 물러났다. 상병의 위치는 방어의 한쪽
측면으로 좁은 참호망이 구성되어 있었고 상병은 기관총을 삼각대와 함께
가져다 유리한 위치에서 적을 향해 손으로 들어 무릎을 꿇고 사격했다. 상병
의 위치를 점령하려는 적은 상병의 전우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질 목적으로
접근했고 상병은 기관총으로 적을 죽이고 큰 피해를 입혔다. 적은 결국 퇴각
했다 재편성해 2차 공격을 가해왔고 상병의 위치부터 점령하려고 했다. 상병
에게 수류탄이 날아오자 상병은 재빨리 잡아 다시 되던졌고, 포탄 파편이 총기
를 때리고 수류탄이 터져 상병은 다쳤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적에게 계속 사격
했다. 그러나 적은 계속 증가했고 수류탄에 기관총이 파괴되자 상병은 카빈을
들어 맞서며 박격포탄에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리 H. 필립스 상병
해병1사단 7연대 2대대 E중대. 50년 11월 4일.
(필립스 병장은 50년 11월 27일 전사했다) 필립스 병장은 E중대 분대장으로
지형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공격했다. 이 고지는 참호화 된 다수의 적이 고수
하는 곳으로 해병대와 다른 아군 공격은 다섯 번이나 실패했다. 적의 박격포
와 기관총이 난무하는 가운데 필립스 상병은 경사면에서 착검하고 돌격을
선도했다. 그러나 앞서 가던 상병의 분대는 적 박격포 사격에 다시 돈좌되
었고 분대는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았다. 이 다섯 명은 고지 정상에 근접했으나
곧 적이 반격해왔고 상병이 앞으로 나가며 수류탄과 소총으로 맞서 싸우자
다른 해병들도 동참해 적을 압도했다. 이제 분대는 3명만 남았으나 상병은
공격을 지속했다. 마지막 남은 적의 강한 거점은 적 4명이 지키고 있었고
바위산이라 거의 난공불낙으로 보였다. 상병과 두 명은 수류탄을 던지며
돌격해 적 4명을 모두 사살했으나 곧 적 분대가 반격해왔다. 그러나 상병
은 매우 효과적으로 사격을 지시해 수적으로 우세한 적 반격을 물리쳤다.
허버트 K. 필라라우 일병
보병2사단 23연대 C중대. 51년 9월 17일 피아리 근처.
필라라우 일병의 중대는 이른바 ‘단장의 능선(Heartbreak Ridge)’이란
중요 고지에서 방어하는 동안 광란의 적 공격을 받았다. 중대는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적 공격을 막아냈으나 점차 지쳤고 새로운 거점으로의
퇴각명령을 받았다. 일병은 자진해서 후위 엄호를 맡았고 자동화기로
다가오는 적을 향해 사격하면서 가진 모든 수류탄을 던지고 실탄이 떨
어질 때까지 싸웠으며, 결국 백병전이 일어나 자신의 trench knife를
들고 치명상을 입을 때까지 싸웠다. 일병은 적 40명 이상을 죽이고
전사했다.
존 A. 피트맨 병장
보병2사단 23연대 C중대. 50년 11월 26일 구장동 부근.
병장은 전토 초기에 잃어버린 거점을 되찾기 위한 반격에 자원해 자신의
분대를 이끌었다. 적의 대포와 박격포와 소총이 맹렬하게 날아오는 가운데
병장은 박격포 파편에 맞다 다쳤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부하들을 이끌어 적
진지를 향해 전진했다. 이 대담한 전진 중에 적 수류탄 하나가 분대 중앙에
떨어졌고 병장은 주저 없이 수류탄을 향해 몸을 날려 동료를 구하고 전사
했다. 죽기 직전 의무반이 다가가자 병장은 먼저 “내 부하는 얼마나 다쳤나?”
라고 물었다.
랄프 E. 포메로이 일병
보병7사단 31연대 E중대. 52년 10월 15일 금화 지구.
포메로이 일병의 중대는 일대의 중요한 지형 고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가 적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일병은 기관총 사수로 일병의 위치는
통신 참호선 앞쪽 끝으로 소대 측면을 맡고 있었다. 일병의 위치는 적이
공격할 경우 맨 처음 만나는 거점이었다. 적은 협곡을 통해서 일병의 위치
로 공격해왔다. 포메로이 일병은 적 공격파에 기관총으로 직접사 해 큰 피해
를 주었고 적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이에 적은 야포와 박격포로 일병의 기관
총좌를 격파하려고 시도했다. 엄청난 포격과 사격에도 불구하고 일병은 그
자리를 지키며 재차 공격하는 적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박격포로 여러 번 다
쳤고 기관총이 너무 열을 받자 재빨리 기관총을 삼각대에서 해체한 다음 양
팔로 안고 앞으로 나가면서 적에게 난사했다. 두 번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일병은 실탄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적과 3미터 앞까지 다가서며 사격했고
총알이 떨어지자 기관총을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백병전을 벌여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돈 F. 포터 병장
보병25사단 14연대 G중대. 52년 9월 7일 문동리 부근.
포병과 박격포의 지원 아래 적 2개 소대가 포터 병장이 지휘하는 아군 전투
전초를 향해 전진해왔다. 통신은 파괴되었고 부하 3명 중 1명은 전사했으나
그는 계속 전초에서 적과 싸웠다. 병장은 적 공격파에 치명적인 사격을 가해
적 15명을 사살했고 나머지는 물러났다. 적은 다시 맹렬한 사격과 함께 이 전
초를 점령하려고 재차 공격했다. 병장은 주저 없이 소총에 착검하고 거점에서
뛰어 나와 다가오는 적과 백병전을 벌여 적 6명을 사살하고 적 공격을 지체시
켰다. 병장은 백병전 후에 전초로 뛰어 돌아오다 포탄 폭발로 전사했다. 아군
주 전선에 기습을 가하려던 적은 이 전초의 전투로 인해 공격이 노출되었다.
제임스 I. 포인터 병장
해병1사단 7연대 1대대 A중대. 50년 11월 4일 수동 고개.
병장은 소총소대 분대장으로 수동 고개 남쪽 532고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수적으로 우월하고 잘 위장한 적인 갑자기 기습을 가해오자 소대는 급조
방어를 구성했고, 병장은 탁월한 지휘력과 전투기술로 분대 방어를 지휘
하고 효과적인 사격을 돌격하는 적에게 가했다. 분대원들이 쓰러지는 가
운데 병장도 치명상을 입었고 순간 적 사격에 분대는 포위되면서 압도되
었다. 그러자 병장은 착검하고 백병전을 하면서 분대 돌파를 시도했고, 적
기관총 3정이 25미터 거리에서 쏴 대자 병장은 다친 해병들에게서 수류탄
을 얻어 혼자 돌격해 투척하고 달려가 적 2명을 죽이고 본인도 치명상을
다시 입고 쓰러질 때까지 혼자서 싸웠다. 분대장의 용감한 행동으로 본
분대원들은 힘을 합쳐 적 공격에 맞서 싸워 적은 사기를 잃고 흩어져 물러
났다. 이후 분대는 덫에서 나와 전술적으로 더 유리한 지점으로 이동했다.
조지 H. 램머 소위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I중대 소대장. 51년 9월 12일.
적이 점령한 참호화 된 고지를 공격하면서 램머 소위는 두려움없이 가파른
경사면을 통해 소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오르는 동안 소대장 림머 소위를
포함한 다수 소대원이 다쳤다. 소위는 대담하게 계속 공격을 선도했으나
정상 부근에서 지형은 더욱 가팔라졌고 적 수류탄이 무수히 떨어져 진출하기
힘들어졌다. 그러나 소위는 신념을 가지고 정상을 공격했고 혼자서 적 벙커
하나를 수류탄으로 격파하며 카빈총으로 안에 있던 적 3명을 사살하고 남아
있던 적 8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곧 적의 압도적인 반격이 시작되었고,
소위는 소대에게 퇴각명령을 내린 후에 혼자서 소대 엄호로 남아 싸웠다.
당시 소위는 후송이 불가능한 중상 해병 세 명을 곁에서 지키면서 싸우다
두 번째 부상을 당했고, 그것을 본 부하가 도우려 다가오자 오지 말고
엄폐물을 찾으라고 명령한 뒤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질 때까지 적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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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6
마이클 레드 크라우드 주니어 상병
[아메리카 인디언 혈통]
보병24사단 19연대 E중대. 50년 11월 5일 Chonghyon 부근.
클라우드 상병은 중대 지휘소 앞 능선 입구에 거점에 있었는데, 중공군이
수풀로 위장한 채 다가온 사실을 30미터 부근에서 목격하고 중대에 이를
알렸다. 상병은 지근거리에서 정확한 사격으로 적 선두에 대해 격렬하게
사격했다. 상병의 이 정확하고 강렬한 사격으로 중대 방어선은 방어를 준
비할 시간을 얻게 해주었고, 상병은 그 위치에서 겁 없이 과감하게 맞서
싸웠다. 적 사격에 중상을 입게 되자 상병은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 뒤에 일어서 한 나무에 기대어 계속 적을 향해 쐈다. 그렇게
사격을 하다 상병은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상병이 시간을 끄는 동안
중대는 부상자를 후송하고 중대를 재편성해서 방어해 적은 중대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로버트 데일 림 소위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H중대 소대장. 50년 11월 6일 진동리 근처.
아군 지휘소가 잘 위장되고 잘 축성된 적 진지에 의해 내려다보여 위험에
처해 있었다. 림 소위는 소대를 이끌고 천천히 산 측면으로 접근했으나
소총과‘수류탄 기관총 사격을 치열하게 받았다. 세 번이나 공격을 시도했
으나 실패하고 림 소위의 소대는 사격에 돈좌되었다. 소위는 소대를 재편
성해 네 번째 공격을 시도했고, 목표에 거의 다 접근했을 때 적 수류탄 하
나가 소대원 중앙에 떨어졌다. 소위는 주저 없이 몸을 날려 수류탄을 덮어
소대원을 구하고 전사했다.
조셉 C. 로드리게즈 병장
보병7사단 17연대 F중대. 51년 5월 21일 문예리 부근.
병장은 2소대 부분대장으로 거친 지형에 완고하게 방어하는 일대를 조망하는
고지의 적 축성진지에 공격을 이끌고 있었다. 병장의 분대는 사격에 의해 전진
이 중지되었는데 적 기관총좌 5개와 더불어 소총으로 전면과 좌우 3면에서 사
격을 가해왔다. 게다가 전진하는 아군을 향해 수류탄으로 밑으로 굴렸다. 그러
자 로드리게즈 병장은 혼자 일어나 경사면 약 60미터를 뛰어 첫 적 참호에 정말
로 정확하게 수류탄을 던져 격파하고 다시 왼쪽으로 뛰어가 수류탄 두 개로 적
자동화기를 침묵시키고 고지 정상으로 공격했다. 적 참호 두 개를 더 격파하고
다시 오른쪽으로 뛰어가 수류탄을 적 벙커에 던져 모두 죽였다. 결과적으로
병장은 적 약 15명을 혼자서 죽이고 고지 점령을 선도했다.
로날드 E. 로써 상병 [본 카페에 한국전 기고 글]
보병2사단 38연대 중박격포중대. 52년 1월 12일 봉길리 근처.
적의 요새화된 강화진지가 있는 고지를 38연대 L중대가 공격하는 가운데
아군은 소총 자동화기 야포와 박격포 사격을 강력하게 받았다. 로써 상병은
L중대 박격포 관측병으로 배속되어 같이 공격하고 있었다. 상병은 양 방향
에서 사격을 받는 가운데 무전기로 적 거점에 대한 박격포 포격을 유도했고,
이어 상병은 카빈총과 수류탄을 들고 직접공격을 시도했다. 첫 번째 적 벙커
에서 상병은 소총으로 안의 적을 모두 침묵시키고 다시 정상으로 향해 적 2명
을 다시 사살하고, 참호선으로 내려와 전진하면서 다시 적 5명을 죽였다. 이어
벙커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도주해 나오는 적 2명을 또 사살했다. 실탄이 떨어
지자 그는 적 사격 속에서 내려와 실탄과 수류탄을 받은 뒤에 다시 고지로 돌격
했고 이때 아군 몇 명이 따랐고 로써 상병은 다시 적 벙커 2개를 공격해 파괴
했다. 다시 실탄이 떨어진 상병은 아군 부상자를 데리고 밑으로 내려와 실탄을
구해 다시 고지 정상으로 세 번째 공격을 시작해 벙커에 수류탄을 던지고 공격
했다. 로써 상병은 혼자서 적 13명을 죽였고 3회 공격 후에는 아군 소대 퇴각을
엄호했다. 퇴각 시 자신도 다쳤으나 돌아다니며 자기보다 더 심각한 부상자들을
여러 번 데리고 내려왔다.
타이버 루빈 상병
1기병사단 8기병연대 I중대. 50년 7월 23일 / 53년 4월 20일.
부대가 부산방어선으로 후퇴하는 동안 루빈 상병은 매우 중요한 대구-부산
간 도로에서 아군이 퇴각할 때까지 후위를 맡으라는 제대에 속해 있었다. 이
때 루빈 상병은 도로 옆 한 고지에 혼자서 지키고 있었고 이곳에 대규모 북한
군이 공격해왔다. 루빈 상병은 거기서 24시간을 버티면서 적에게 상당한 피해
를 입혔고 8기병연대가 모두 후퇴할 때까지 북한군을 저지해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 이후 8기병연대가 부산방어선을 돌파해 북한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을 때
북한군 수백 명을 포로로 잡는 일에 관여했고, 50년 10월 30일 중공군이 나타
나 북한 운산에서 상병의 부대를 공격했다. 밤에서 다음 날까지 루빈 상병은
방어선 남쪽에서 30기관총을 잡고 사격했다. 상병 앞에 기관총 사수 세 명이
이미 쓰러진 뒤였다. 상병은 기관총 실탄이 모두 소모될 때까지 총좌를 지키며
사격을 계속 했다. 상병은 기관총으로 다가오는 적의 속도를 느리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혼자 방어했다. 그래야 남쪽으로 퇴각하는 자신의 부대가 안전할 수
있었다.
루빈 상병은 격렬한 전투 동안 여러 번 다쳤고 결국 중공군에 포로가 되었다.
루빈 상병은 변절하면 곧바로 중공으로 갔다가 원래 고향인 헝가리로 보내
주겠다는 중공 측의 제안을 거절하고 수용소에 남았다. 루빈 상병은 동료들을
위해 밤에 나가서 은밀히 기어 다니며 중공군 식량창고와 정원에서 먹을 걸
훔쳐 돌아오곤 했다. 발각되면 총살될 행동이었다. 루빈 상병은 식량 뿐 아니
라 아픈 동료들을 돕는데도 물질적 정신적으로 헌신했다. 루빈 상병이 헌신적
으로 도와 생명을 건진 동료 포로는 최대 40명에 달한다.
댄 D. 스쿠노버 상병
보병7사단 제13전투공병대대 A중대. 53년 7월 8-10일 속고개 근처.
상병은 폭파분대 분대장으로 보병중대에 배속되어 중요한 고지공격에 동참
했다. 이때 상병은 적의 격렬한 사격과 강렬한 전투로 인해 자기 임무를 수행
하기 힘들단 것을 깨달았다. 상병은 보병분대에 자원해서 동참해 풀이 없는
가파른 경사면을 올라갔다. 이어 고지를 공격하던 중 적 벙커 지붕에 포탄이
적중하는 걸 보고 달려가 적 1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 다시 진행
하다 한 벙커를 만나 꼼짝을 못하자 총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앞으로 뛰어가 수
류탄들을 던지고 벙커 출입구로 뛰어가 권총으로 안의 적을 모두 사살했다. 스
쿠노버 상병의 행동으로 부대는 고지 정상을 향해 올라갈 수 있었다. 적이 반격
을 해오자 상병은 몸을 일으켜 아군의 포격을 유도했다. 다음 날 아침 배속된
중대가 교대해 내려갔으나 상병은 자원해서 거기 남아 기관총을 잡아 몇 시간
동안 싸웠고 적 거점에 대한 공격에도 동참했다. 상병의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은 자동화기로 적에게 치명적인 사격을 하다 포탄이 터져 중상을 입고
쓰러진 모습이었다.
에드워드 R. 스콜왈터 주니어 중위
보병7사단 31연대 A중대. 52년 10월 14일 금화 지구.
중대가 중요 지형을 장악하려고 올라가던 중 앞의 1소대가 적의 강력한 거점
50미터 앞에서 박격포와 소총 수류탄으로 강한 공격을 받아 정지되고 전상자
가 여럿 났다. 당시 스콜왈터 중위의 2소대는 예비대였다 앞으로 나가 중위가
돌격을 선도했다. 수류탄 파편으로 여러 번 부상을 입었지만 중위는 의무치료
를 거부하고 수류탄을 쓰며 소대원들과 참호선과 벙커의 적 소탕을 계속 했다.
이때 갑자기 숨어 있던 적이 총을 난사해 중위가 또 다쳤으나 지휘권 포기를
거절하고 계속해서 진지 소탕을 끝내고 후송되었다.
루이스 J. 세빌레 소령
미 공군 18전투폭격단 67전투폭격전대. 50년 8월 5일 한창 부근.
포병과 차량 기갑 병력이 집중된 위장된 구역에 소령은 F-51을 타고 공격
하다 여러 번 대공포탄에 피탄 되었다. 소령은 전투기가 제대로 말을 듣지
않자 침착하게 잠시 생각했고, 낙하산으로 탈출하거나 불시착하는 방법은
개인적으로 부정했다. 결국 소령은 아군을 위협하는 적을 계속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맥시멈 타격을 가하겠다고 결정했다.
세빌레 소령은 적 포병 포대를 향해 수직으로 다이빙해 충돌해 죽음으로써
마지막 타격을 가했다.
리차드 T. SHEA 주니어 중위
보병7사단 17연대 A중대. 53년 7월 6-8일 속고개 근처.
7월 6일 밤, 중위가 책임지고 있던 방어거점에 대규모의 적이 공격해왔다.
방어 거점이 크게 위협을 당하자 중위는 반격을 이끌어 격렬한 전투를 벌
였고 본인도 trench knife로 적 2명을 죽였다. 중위는 차분하게 병사들 사
이를 돌아다니며 각 위치를 점검하고 계속 단단하게 자리를 지키라고 부하
들을 격려했다. 밤 동안 적이 오는 대로 중위는 계속 싸웠다. 적은 피해가
컸지만 결연하게 다시 공격해왔고 동이 틀 무렵 가진 병력으로 총공격을
해왔다. 이때 중위와 한 대담한 병사 단 둘이서 적 공격을 끝내 물리쳤다.
7월 7일이 되자 G중대 일부 병력이 이 방어거점에 합류했고 중위 병력의
전상도 상당히 컸다. 중위는 부하 20명으로 적과 계속 맞섰다. 중위는 다
쳤으나 후송을 거부했고 계속 반격을 지휘했다. 반격이 적 기관총 때문에
돈좌되자 혼자서 수류탄을 던지고 매우 정확히 카빈총을 쏘면서 돌격해
적 기관총반 세 명을 모두 죽였다. 8일 아침 적이 다시 공격했으나 중위는
결연하게 오히려 반격에 나섰다. 중위가 적과 근접 백병전을 벌이는 장면
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모습이었다.
윌리엄 E. 슈크 주니어 하사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G중대. 52년 7월 3일.
미군 주방어선 앞의 진지화 된 강력한 적의 고지를 공격하던 도중 슈크 하사
의 소대는 적 야포 박격포 기관총 등에 크게 피해를 입었다. 슈크 하사도 고통
스런 부상을 입었으나 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기관총분대 공격을 계속 이끌
었다. 이때 한 소총분대 분대장이 다치자 하사가 지휘권을 인수하고 적 거점에
두 번 이상의 효과적인 공격을 가했다. 하사는 두 번째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선봉 병력과 같이 했고, 이때 적의 강력한 사격으로 상당수가 죽거나
후송되었고 전멸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하사는 마지막 부상자까지 뒤로 빼내는
도중 적 저격수의 총알을 맞아 전사했다.
로버트 E. 사이메넥 일병
해병1사단 5연대 2대대 F중대. 52년 8월 17일.
주방어선 앞의 전투전초에 있던 사이메넥 일병의 부대는 전방으로 정찰을
나갔다. 정찰 중 집중적인 적 박격포와 소총 사격으로 정찰대에 큰 사상자가
발생했고, 일병은 전우들을 구하기 위해 다른 해병들이 근처 참호선으로 들
어가는 동안 엄호사격을 했다. 그렇게 싸우던 중 적 수류탄이 해병들 사이로
떨어지자 지체 없이 몸으로 덮어 동료 해병들을 구하고 전사했다.
윌리엄 S. 시트맨 일병
보병2사단 23연대 M중대 지평리 부근. 51년 2월 14일.
시트맨 일병은 원래 M중대 기관총반 반장으로 I중대에 배속된 상태였고,
I중대는 수적으로 월등한 적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적 수류탄으로 인해
자신의 기관총이 박살나자 시트맨 일병은 경기관총을 하나 잡아 사격을
계속 했다. 참호에 들어가 있는 동안 적 수류탄이 날아와 떨어지자 동료
5명을 구하고 수류탄을 자기 몸으로 막아 전사했다.
칼 L. 시터 대위
해병1사단 1연대 3대대 G중대 중대장. 50년 11월 29-30일 하갈우리.
11월 29일 적 지역에서 돌파하라는 명령을 아침에 받았고 시터 대위는
적 사격 속에 중대의 적진 돌파작전을 지휘해 전진했다. 이 치열한 전투
로 중대 25% 전상이 났으나 결국 목표에 도달했다. 이후 시터 대위의 중대
는 아군 사단이 그곳을 지나 퇴각할 때까지 그곳을 고수하는 임무로 전환
했다. 그 고지는 하갈우리 남동쪽 눈으로 뒤덮인 계곡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주요 지형으로 그곳에는 적 연대급이 깊은 참호를 파고 있었다. 중대는
밤 동안 방어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남쪽을 향해 대담한 돌파작전을 수행
해야 했다.
지형은 땅이 얼고 가팔랐고 고지 측면에서는 적이 쏘고 있었다. 밤 동안 적은
박격포와 자동화기 지원 아래 대규모 병력으로 계속 공격했고 G중대도 피해가
늘어났다. 밤 동안 대위는 각 참호를 방문하며 냉정하게 방어선을 보강하고 익
숙하지 않은 적 전술에 대비해 일종의 전투 팀처럼 방어선 구역을 묶고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막으라고 당부했다. 적은 계속해서 반복해 공격해 백병전
까지 일어났으며 한 순간 방어선을 돌파한 적이 중대지휘소까지 수류탄을 들고
도달했으나 시터 대위와 병사들은 이를 격퇴해 사살했다. 대위는 수류탄 폭발로
얼굴과 양팔과 가슴에 고통스런 상처를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중대는 50%가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었다.
셔로드 E. 스키너 주니어 소위
해병1사단 11연대 2대대 F포대 전방관측장교.
52년 10월 26일. 10월 26일 밤 스키너 소위가 관측장교로 있는 방어선에 적이
공격해왔다. 이 위치는 미군 주방어선에서 매우 중요한 길목으로 적은 야포와
박격포 지원 아래 공격해왔고 포격으로 인해 포대들에서 전초로 들어오는 모든
통신선이 절단된다. 피해가 컸던 전초 안에서 스키너 소위는 즉시 생존자들을
모아 방어를 재편성하고 망가졌던 본인의 무전기를 수리해 포격유도를 재개한
다. 공격하는 적에게 포격을 정확히 유도하고 기관총 사격지시를 위해 두 번이
나 벙커를 떠나 뛰었으며, 이후 실탄과 수류탄을 재보급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들고 뛰었다. 여러 번 다쳤지만 치료를 거절하고 다른 병사부터 치료하고 나면
치료하겠다고 했다. 전투에 정점에서 소위는 실탄과 수류탄 떨어진 곳에 보급
했으나 곧 적은 전초 안으로 밀려들었다. 새벽 3시 전초는 적의 손에 넘어갔다.
소위와 몇 명 남은 소대원들은 이제 수동적인 방어 외에는 불가능했고, 소위는
생존자들에게 벙커로 들어가 죽은 것처럼 위장하라고 지시하고 다른 병사도
찾아보라고 했다. 직후 적이 던진 수류탄이 생존자 2명 앞에 떨어지자 소위는
부하를 보호하고 수류탄을 몸으로 덮어 전사했다.
데이빗 M. 스미스 일병
보병2사단 9연대 E중대. 50년 9월 1일 용산 부근.
스미스 일병은 E중대 박격포반 기관총 사수로 울퉁불퉁한 산악지형에서
중대는 수적으로 월등한 적의 공격을 받았다. 쓰라린 전투와 함께 적이
아군 선두소대를 휩쓸었고 방어선 안으로 돌파해 들어오자 박격포반은
퇴각명령을 받았다. 그러자 적은 아군을 포위하고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때 포상에 수류탄이 떨어지자 동료들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포반 전우 5명을 구하고 전사했다.
클리프톤 T. 스피처 상병
보병40사단 223연대 F중대. 52년 6월 14일 미나리골 근처. 중대는 일대의
중요한 지형을 공격하고 있었고 스피처 상병의 분대가 적의 박격포와 기관총
등의 격렬한 사격에 돈좌되자 엄폐물에서 뛰어나와 사격을 뚫고 기관총좌를
향해 혼자 돌격했다. 약 10미터를 남기고 적 소총사격에 여러 발 맞아 다쳤으나
상병은 계속 전진해 벙커 안으로 들어가 소총으로 적 2명을 사살하고 한 명은
총검으로 찔러 죽이며 기관총좌를 침묵시켰다. 이후 상병은 몸을 떨고 현기증
을 느끼며 고지를 걸어서 내려오다 쓰러져 전사했다.
제임스 L. 스톤 중위
1기병사단 8기병연대 E중대 소대장. 51년 11월 21-22일 속개리 부근.
스톤 중위의 소대는 매우 중요한 전초에서 방어하고 있었고 이날 밤
대규모 중공군이 공격해왔다. 스톤 중위는 자기 몸을 노출해가며 똑바로
서서 침착하게 방어를 지휘했고, 방어용 화염방사기가 고장 나자 그곳
으로 뛰어가 화염방사기를 고쳐 주었다. 두 번째 적 공격에서 중위는
고통스런 부상을 당했으나 직접 남은 경기관총 2정을 중공군 공격방향
으로 재배치하는 걸 도왔다. 방어는 위험했지만 중위는 계속 지휘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다시 한 번 다쳤으나 중위는 몸을 노출하며
카빈총을 계속 사격했고 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려고 했다. 곧 전초에
적이 들이닥쳤으나 소위는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희미한 소리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하며 싸웠다.
루터 H. 스토리 일병
보병2사단 9연대 A중대. 50년 9월 1일 애곡 근처.
주간에 9연대 방어선을 돌파하려 적 3개 사단이 공격했고 무차별한 돌격까지
하며 중공군은 일부 방어선을 돌파하고, 이로 인해 스토리 일병의 A중대는 다
른 부대와 차단되어 포위된 상황이 되었다. 스토리 일병은 화기분대장으로
낙동강에 대규모 적이 도하해 A중대로 향하는 걸 발견하고 그리고 분대를 이동
시켜 막으려 시도했다. 일병은 기관총 사수 한 명이 쓰러지자 그 기관총을 잡아
정확히 사격해 적 100명이 쓰러지는 능력을 발휘했고, 중대장은 중대가 포위
되자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 동안 스토리 일병은 트럭에 적이 가득 타고 오는
걸 목격하고 동료들과 도로 중간으로 가 트럭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돌아온 뒤,
기어가 동료 수류탄을 모아 차량에 다시 수류탄을 투척했다. 중대 퇴각 동안
수적으로 월등한 적이 공격해오자 중대장은 논에 중대원을 산개시켰고 스토리
일병은 다쳤지만 계속해서 분대원을 격려하며 같이 적을 막아냈다. 이후 자신
의 부상이 데려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스토리 일병은 중대 퇴각의 엄호를 맡겠
다고 자원했고, 여러 총을 앞에 놓은 다음 두 번째 적 공격에서 맞서 총을 바꿔
가며 싸우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
제롬 A. 슈터트 소위
보병25사단 27연대 B중대. 51년 9월 12일 금화 지구.
슈터트 소위의 소대는 강력한 강화진지로 구성된 적 거점을 공격하고 있었다.
공격 도중 여러 지점의 벙커에서 쏘는 강력한 사격으로 소대는 진출이 중단
되었다. 소위는 혼자 한 벙커로 공격해 적 3명을 사살했고 남은 적은 도주했다.
소위는 다쳤지만 소대로 돌아와 소대를 재편성하고 후송은 거부한 채 새로운
공격을 이끌었다. 그러자 적은 소위가 물러난 벙커와 참호로 돌아와 슈터트
소위 소대에 참화적인 사격을 퍼부어 소대를 다시 정지시켰다. 소위는 소대원
에게 자동화기를 하나 받아 다시 돌격해 거점의 적을 모두 사살했다. 이후 한
소총수가 다치자 그 소총을 받아 적 3-4명을 더 사살하고 소위는 중상을 당하고
실탄도 떨어졌다. 그러자 소위는 거점에 남은 적을 trench knife를 뽑아 죽였고,
이를 본 소대원들이 용기를 내어 계속 공격해 적을 몰아내고 목표를 탈취했다.
윌리엄 톰프슨 일병
보병25사단 24연대 M중대. 50년 8월 6일 하남 근처.
대규모 적이 톰프슨 일병의 소대를 기습공격했고 소대는 재편성해 방어를
계속 했다. 톰프슨 일병은 기관총을 잡아 적 공격파에 사격했으나 점차 수세
에 몰려 소대는 보다 방어에 유리한 곳으로 후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때
톰프슨 일병은 기관총좌에 남아 소대 퇴각을 엄호하겠다고 자원했고, 소대가
퇴각하는 동안 수류탄 파편상과 총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관총좌에서 적
을 향해 사격하다 수류탄 폭발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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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7
찰스 W. 터너 중사
보병2사단 제2정찰중대. 50년 9월 1일 용산 부근.
박격포와 자동화기로 무장한 대규모의 적이 터너 중사의 다시 소대를 공격
했다. 소대를 임시 지휘하고 있던 터너 중사는 소대를 재편성하고 적 공격
을 관측하며 지휘하다가, 약 100미터 거리에 아군 탱크가 하나 있는 걸 발견
한다. 터너 중사는 방어점 위치를 떠나 싸락눈 같은 적 사격 속에 탱크로 뛰
어가 포탄에 걸린 기관총을 잡았다. 이후 중사는 침착하게 공격하는 적에게
매우 정확한 사격을 적에게 참화적으로 선사했고 탱크 안의 승무원에게 75
밀리 주포 포격에 목표를 지시했다. 중사의 행동으로 적 기관총좌 7개가 격
파되었고 여러 번 부상을 당하면서도 소대원들에게 격려의 함성을 지르고
고무시켰다. 탱크에는 총(혹은 포탄)알이 50발이 넘게 날아와 때렸고 탱크
조준경과 안테나가 날아갔고 중사의 기관총좌에도 세 발이 넘게 때렸다.
중사는 적의 총알에 목숨을 잃을 때까지 포탄 기관총좌를 지키며 적에게
사격했다.
아치 반 윙클 병장
해병 1사단 7연대 1대대 B중대 - 알래스카 출신 병사.
50년 11월 2일. 윙클 병장은 B중대 소대 선임하사였다. 중대 방어선으로
대규모 적이 어둠을 이용해 광신적인 공격을 가해왔고, 윙클 병장의 소대
는 적의 자동화기와 수류탄 공격으로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 윙클 병장은 부상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적을 향해 사격을 뚫고
대담하게 공격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서 전투의 주도권을 소대로 가져와
재편성할 시간을 벌었다. 당시 왼쪽 측면 약 40미터 거리의 분대가 고립될
위험에 처하자 적 사격을 뚫고 질주해 아군 쪽으로 연결시켰으나 병장은
팔꿈치에 부상을 입어 한 팔은 완전히 쓸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다시 수류탄
폭발로 가슴에 파편을 맞아 고통스런 중상을 입었으나 병장은 후송을 거부
하고 계속 명령을 내리며 힘겨운 상황의 소대원들을 고취시켰다. 병장은
자기 위치를 지키려 계속 지휘하다 과다출혈 쇼크로 정신을 잃었다.
조셉 비토리 상병
해병1사단 1연대 2대대 F중대 자동화기 사수. 51년 9월 15-16일 749고지.
요새화 된 적 749고지를 공격하던 상병의 선도 소대는 적의 반격으로 큰
전상자가 발생했다. 소대가 퇴각하던 가운데 비토리 상병과 2명은 과감히
역으로 적정을 향해 돌격해 처절한 백병전을 벌였다. 그러는 가운데 중대는
적의 다음 맹반격을 막을 수 있는 위치로 이동했다. 중대장은 중대 방어거점
최북단 끝에서 중기관총을 운영할 대원을 긴급으로 자원하기를 바랐다. 그
곳은 중대 본진과 떨어져 고립된 지형이었고 밤 동안 공격받을 것이 분명했다.
당시 그 기관총 사수는 격렬한 포화로 인해 다쳐 쓰러져 있었고 실탄 재보급
도 필요했다. 비토리 상병과 1명은 마주치는 적과 단독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아군 기관총좌로 향했다. 중대를 증원할 병력은 후방에서 적 사격에 돈좌되어
올라오지 못해 극히 위험한 상황이었고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기면서 100미터
거리에서 접근을 못하고 있었다. 비토리 상병은 기관총좌에서 계속 버텼고 적
은 그곳을 돌파하려고 1미터까지 접근하다 상병에게 사살 당했다. 상병은 그
위치가 적에게 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각오했다. 상병은 적 기관총과 소총
에 치명상을 입으면서도 밤 동안 계속해서 싸웠다. 아침이 되어 아군이 가보니
전사한 상병의 기관총좌 부근에 적 시체 200구가 쓰러져 있었다.
존 S. 웜슬리 대위
미 공군 제3폭격단 제8폭격전대. 51년 9월 14일 양독 근처.
대위는 을 타고 새로운 전술로 비행하던 중 열차를 발견했고 이는 최고 우선
순위 목표였다. [B-26은 야간용 중형 폭격기입니다. 잇빨 주]대위는 즉각 공
격해 열차를 파괴했고 이때 다른 아군 항공기로부터 목표를 완벽하게 파괴
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무전을 받았다. 대위는 기체의 서치라이트를 켜서
다른 B-26으로부터 목표지역으로 인도 받았는데, 이때 적 사격에 노출되었다.
다른 B-26 조종사의 요청으로 대위는 목표 일대를 서치라이트로 비춰주었고
다른 폭격기는 공격을 준비했다. 대위는 계곡으로 하강하면서 목표를 비췄고
그러자 적 대공포는 불빛을 보고 격렬하게 올라왔다. 다른 조종사가 적 대공
포화 맥시멈 거리로 피하라고 했지만 대위는 거절하고 폭격이 끝날 때까지
목표를 비춰주었다. 용감히 비행하던 웜슬리 대위의 폭격기는 산 중턱을
때리며 충돌해 폭발했다.
루이스 G. 왓킨스 하사
해병1사단 7연대 3대대 I중대. 52년 10월 7일.
52년 10월 7일 아침 아직 어둠이 물러나지 않은 시각. 왓킨스 하사의 소대는
전날 밤에 적에게 빼앗긴 전초를 탈환하기 위해 준비했고 왓킨스 하사는 능
숙하게 부대를 고지로 이끌었다. 그러나 잘 축성된 참호선에 들어간 적은 소
대를 향해 소총과 수류탄으로 공격했고 하사는 계속 소대를 선도했다. 당시
자동화기와 기관총에 소대원 한 명이 쓰러지고 소대는 꼼짝 못하고 공격을
중단했다. 이때 적이 던진 수류탄이 왓킨스 하사와 다른 해병들 중간에 떨어
졌고 당시는 소대원들이 참호선까지 들어와 고지 정상으로 향하던 시점이었
다. 하사는 즉시 부하들을 옆으로 밀치고 수류탄을 참호선 밖으로 되던지려다
폭발했다. 손에서 폭발한 수류탄으로 왓킨스 하사는 동료를 구하고 위독한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목숨을 건진 소대원들은 계속 공격해 임무를
완성했다.
트래비스 E 왓킨스 상사
보병2사단 9연대 H중대. 50년 9월 3일 용산 근처.
고립된 아군 30명이 있는 곳으로 적이 압도적인 숫자로 공격해오자 왓킨스
상사는 지휘권을 잡고 방어를 편성해 적을 여러 번 격퇴시켰다. 병력이 아군
과 완전히 차단된 상태에서 상사는 총알을 무시하고 참호와 참호를 오가며
병사들의 사기를 고취시켰다. 실탄과 수류탄이 필요하자 상사는 혼자 방어선
50미터 앞으로 나가 실탄과 병기를 가지러 갔고 그 과정에서 적 2명을 소총
으로 사살했다. 총기와 탄약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상사는 적 3명의 공격을
받아 다쳤으나 응사로 세 명을 모두 사살했다. 적 다섯 명을 죽인 상사가 이후
실탄과 병기를 들고 오자 부하들은 경악했다.
적은 마지막 공격을 시작했고 적 6명이 가까이 다가와 은폐한 상태에서 수류탄
들을 던졌고,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한 상사는 참호에서 일어나 서서 그들
에게 소총을 쐈다. 그러자 적 기관총이 상사를 향해 쐈으나 상사는 피하지 않고
계속 사격해 수류탄을 던진 6명을 모두 사살했다. 전멸의 상황에서 상사는 허리
가 앞으로 구부러지면서 무너졌고 그러면서도 부하들에게 끝까지 지키라고 사기
를 고무시켰다. 상사는 먹을 것도 거절한 채 점차 제 시간에 아군이 도달하지 못
할 거란 사실을 깨닫고 부하들에게 아군진영으로 탈출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부하들이 자신을 데리고 가려고 하자 자신은 너희들에게 짐만 될 뿐이라고 말
하면서 거기 남겠다고 말하고, 기분 좋게 웃으면서 부하들의 행운을 빌었다.
상사는 이후 실종되었고 상사가 지휘한 이 30명은 적 총 500명을 죽인 것으로
밝혀졌다.
어네스트 E. 웨스트 일병
보병25사단 14연대 l중대. 52년 10월 12일 사태리 근처.
웨스트 일병은 보고된 적 전초를 정찰-파괴하는 임무에 자원했다. 목표에
근접할 무렵 정찰대는 적의 매복공격을 받아 큰 전상자가 발생했다. 정찰
대 지휘관이 노출된 위치에 쓰러진 것을 보고 웨스트 일병은 정찰대에게
퇴각하라고 명령(order)하고 본인은 과감하게 앞으로 사격을 뚫고 나가
지휘관에게 접근해 끌어내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적 3명이 나타나 수류탄
을 던지고 총을 쏘자 즉각 지휘관을 옆으로 밀어놓고 소총으로 모두 쏴 죽
였다. 이어 지휘관을 안전한 곳까지 끌고 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웨스트
병장은 이 과정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 웨스트 일병은 아군 부상자 두 명을
끌어내고 적 세 명 이상을 사살했다.
벤자민 F. 윌슨 중위
보병7사단 31연대 I중대. 51년 6월 5일 화천면.
I중대는 참호화된 보강진지로 지키고 있는 일대 중요 고지 공격을 명령
받았다. 공격 선봉이 적 사격에 돈좌되자 중위는 혼자 앞으로 돌격하며
수류탄을 던지고 소총을 사격했고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있던 한 거점
의 적 4명을 사살하고, 소대가 뒤따라 올라오자 중위는 착검 돌격을 선도
해 남은 적 약 27명을 사살하고 고지 정상 앞까지 점령했다.
적은 다시 반격해왔고 중위는 곧 점령당할 위험을 느꼈고, 중위 혼자 앞
으로 돌격해 적 7명을 죽이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그러자 적은 퇴각
했다. 중위는 계속 공격을 지휘해 적의 마지막 거점 15미터 지점에서 적
사격으로 인해 공격을 일단 중단했다. 더 이상 공격이 힘들자 중위는 소
대원들에게 퇴각을 명령하고 본인이 직접 엄호사격을 맡았다. 이때 적이
공격해 와 전투가 일어났고 중대장과 1소대장이 다쳤다. 그러자 윌슨 중위
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계속 싸웠다. 중위는 앞에 나타난 적 3명을 소총으로
사살하고 이후 몸싸움과 함께 야전삽을 들어 적 4명을 더 죽이고 중대에
퇴각명령을 하달했다. 중위는 두 번째 부상을 당했으나 충실히 중대 퇴각
을 안전하게 이끌었다.
해롤드 E. 윌슨 기술하사관
해병1사단 1연대 3대대 G중대. 51년 4월 23-24일.
하사는 G중대에 배속된 소총소대 소대 선임하사였다. 중대가 전초에 들어
가 있을 때, 적은 야포와 박격포를 동원해 포격하면서 어둠을 이용해 고지
대를 통해서 기관총과 소총 수류탄으로 공격해왔다. 윌슨 하사관은 생존자
를 위해 맹렬한 사격을 하면서 아군 부상자를 조력했다. 그 동안 윌슨은 두
번 총알에 왼쪽 다리와 오른쪽 팔에 맞았다. 윌슨은 치료를 거절하고 부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전투구호를 외쳤다.
적 공격이 가중되면서 윌슨은 머리와 어깨를 또 다시 다쳤으나 뒤로 빠지지
않고 부하들과 같이 있었다. 양팔을 들어 총을 쏠 수 없게 되자 윌슨은 부상자
들의 총과 탄약을 부하들에게 날라주었다. 그 중간에 중대장에게 두 번을 가서
다음 공격 전에 자신의 거점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적 박격포탄이 터지면서
윌슨이 한쪽 발이 날아갔고 얼굴에도 상처를 입었다. 충격에서 벗어나 혼미한
가운데 윌슨은 다시 치료를 거부하고 부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사격을 지시
하고 실탄을 날랐으며 다른 부상자를 치료까지 했으나 출혈이 많아 점차 약해
졌고 거의 죽은 것과 비슷한 상태였다. 윌슨은 그 상황에서도 부하들을 격려
하고 적을 막아내라고 고무시켰으며 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윌슨
과 부하들은 번번이 적 공격을 격퇴했다. 동이 틀 무렵 마지막 공격이 격퇴되자,
윌슨은 각 소대원들을 격려하고 아무런 조력 없이 800미터 정도를 하산하고
걸어 본인이 직접 의무대에 도착했다.
리차드 G. 윌슨 일병
187공수연대 의무병. 50년 10월 21일 오파리.
윌슨 일병은 187공수연대 I중대 배속 의무병으로 정찰대에 합류해 오파리
근처의 고지군을 정찰하고 있었다. 중대 본 병력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좁은 계곡을 통해 이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 박격포 자동화기 소총이
폭발했다. 중대는 적의 매복공격으로 인해 큰 전상자가 났고, 윌슨 일병은
엄청난 사격의 위험 속에서도 동료들을 돌아다니며 치료했다. 중대장은
퇴각명령을 내렸으나 적은 둘러싸면서 중대를 고립시켰다. 중대장의 퇴각
명령에 윌슨 일병은 일대를 돌며 남은 아군이 없나 살핀 후에 마지막으로
부상자를 부축해 이동을 시작했다. 적에게 둘러싸여 기듯이 퇴각하고 있던
윌슨은 부상자를 놔두고 앞길을 살피러 비무장 상태로 나갔다가 순간 한
적병과 조우했다. 윌슨은 재빨리 부상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이틀
뒤에 아군 정찰대가 나가서 수색해보니 두 명은 모두 죽어 있었는데 윌슨
일병은 총에 여러 방 맞은 상태로 부상자를 보호하며 엄폐물을 만들려고
노력하다 죽은 장면을 보았다.
윌리엄 G. 윈드리치 하사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 I중대. 50년 12월 1일 유담리 부근.
윈드리치 하는 소대 선임하사로 12월 1일 밤, 적에게 공격당하던 중 분대
병력을 이끌고 적에게 맹렬한 기습 반격을 시도해 중대 방어선 안쪽의 전
우들에게 도달하려고 했다. 하사는 둔덕을 카빈총을 들고 돌격했고 앞에
엄청난 숫자의 적과 조우했고 이어 기관단총과 박격포 수류탄이 날아왔다.
결국 하사는 돌격하던 병력을 다시 이끌고 퇴각을 지휘했고 격렬한 전투로
해병 7명이 쓰러졌다. 하사 본인도 수류탄 폭발로 머리를 다쳤으나 중대
구역으로 가 다시 자원자를 모집해 작은 공격대를 편성했다. 돌아온 그는
치료를 거부하고 언 땅의 산 측면에서 부상자와 전사자들을 끌고 돌아왔다.
하사는 이어 중대 구역 왼쪽 측면 방어를 맡았고 곧 적은 공격해왔다. 이때
하사는 다리를 또 다쳤으나 계속 싸우면서 부하들을 격려하고 사격을 지시
했다. 결국 적은 물러났다. 하사는 발로 서 있을 수도 없었지만 후송을 거부
하고 자신의 소대 방어선에 남았다. 그러나 쓰라린 추위와 출혈로 인해 점차
기력이 약해졌고 의식을 잃어 곧 사망했다.
브리엔트 E. 워맥 일병
육군 25사단 14연대 의무중대. 52년 3월 12일. 속소리 근처.
워맥 일병은 야간정찰대에 소속되어 정찰을 나갔고 정찰대는 수적으로
월등한 적과 마주쳐 큰 전상자가 났다. 일병은 싸락눈 같은 적 사격 속
에서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본인도 중상을 당했으나 의무
치료를 거부하고 동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계속 도왔다. 부상자를 치료
하던 중 박격포탄이 터져 일병의 오른팔이 날아갔다. 자신의 상태를 진단한
일병은 자신은 해내기 힘드니 놔두고 다른 사람먼저 치료하라고 말했다.
비록 본인이 치료행위는 하지 못했지만 전투병들에게 부상자 치료방법을
알려주고 지도하면서 의무행동을 지속했다. 퇴각하는 정찰대의 마지막을
따라 일어서 잠깐 걸었으나 일병은 과다출혈로 인해 쓰러졌다. 결국 두 명
이 부축하며 이동하던 중 사망했다.
로버트 H. 영 일병
미 육군 1기병사단 8기병연대 E중대. 50년 10월 9일 개성 부근.
영 일병의 중대는 대대의 선봉중대로 진출하다 강력한 박격포화와 자동화기
로 십자포화를 받았다. 많은 전상자들이 생겼고 영 일병도 얼굴과 어깨를 다
쳤다. 영 일병은 후송을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두 번째 부상을 입을 때까지
적에게 사격하며 싸웠다. 영 일병이 대대지휘소 근처의 의무대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적은 포위공격을 시도했다. 일병은 의무대에서 총을 들고 나와
정확하게 사격해 적 5명을 사살했고 그때 다시 적 사격에 맞아 철모가 부서
지면서 기절해 땅에 쓰러졌다. 지원을 위해 아군 탱크가 앞으로 나오자 영
일병은 혼자서 나서 탱크에게 적 거점으로 탱크포 포격을 유도해 적 포좌
3개를 파괴하여 아군이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다친 동료들을 돌보던 도중
일병은 박격포탄에 또 다시 다쳤다. 그러나 본인은 맨 나중에 나가겠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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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의해 수여된 한국전 최고훈장
2013년 7월 31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전 가톨릭 군목이자 포로
였던 에밀 J. Kapaun 대위의 유적에게 의회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군목
카파운은 1951년 5월 포로 상태에서 사망했다. 1950년 11월 군목이 소속
된 8기병연대 3대대가 북한 운산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자, 총알이 난무
하는 가운데 병사들을 도왔고 이때 군목과 같이 있던 라미레즈 상병은
“공기 중에 틈이 없을 정도로 총알이 날아다녔다. 총알과 포탄이 모든
방향에서 날아왔다”라고 기억했다. 군목은 부상자들을 뒤로 끌어내 의
무병이 올 때까지 본인이 응급처치를 했다. 라미레즈 상병은 군목의
행동을 보고 하느님께 저 분을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중공군에 포로가 된 뒤에 이른바 북쪽 수용소를 향한 death marchrk 시작
되었고 대열에서 낙오하면 중곤군은 바로 총으로 쏴 죽였다. [동료 도위 씨
의 증언] 군목은 이때 걷지 못하는 전우를 살리려 항상 여기저기 돌아다녔고
들것도 들었다. 라미레즈 상병의 증언. “군목은 병사를 등에 업고 2-3마일
이나 걸었다. 우리가 보는 군목도 매우 지쳐 있었다.”
도위와 라미레즈가 말하는 수용소는 끔찍한 환경이었고 포로들은 굶어죽고
질병으로 죽었고 기온은 너무 낮았다. 군목은 병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했다. 카파운 군목은 목숨을 걸고 수용소 주변을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 굶주린 병사에게 주었고, 사망한 포로의 의복을 세탁해 추위
에 약한 전우에게 주었다. 포로 1/3이 여타 이유로 사망했다. “우리는 포로
끼리 연합해 정신을 가다듬고 적에게 저항하려 노력했다. 군목은 사실 평범한
사람이고 자신도 자기가 각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영하 20도가 넘는데 군목이 먼저 일어나 물을 데우려 불을 피우고 병사들을
깨웠다.”
중공군은 포로들의 저항을 부수고 미국과 자기 종교에 배반하도록 부추겼고,
군목을 다른 포로들과 분리시켰다. 군목은 포로들이 "death house"라고 부르
던 곳에 갇혔고 그건 벌레와 해충이 우글거리는 3미터 곱하기 3미터 급조 가옥
이었다. 그 와중에도 군목은 “날 걱정하지 마라, 도위. 마음 편하게 먹어. 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갈 것이다. 내가 거기에 가면, 자네들을 위해 기도하겠다”
라고 말했다 한다.
중공군은 군목에게 먹을 걸 주지 않았고 카파운 군목은 그렇게 1951년 5월
23일 사망했다. 이틀 동안 아무 것도 주지 않았지만 군목이 굴복을 거부하자
직접 죽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미군포로들은 정신을 차리고 고양시키며
은밀히 포로 서로 돕기 시작했다. 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격려하며 힘을 모
았다.
라미레즈와 도위는 군목의 도움으로 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카파운 신부님은 군목의 전설이다.
최고훈장을 받아 마땅한 분이다.
난 카파운 군목처럼 정의롭게 살지 못한다.
그 분의 이야기는 전해져야한다.
오늘날까지 그분은 내 마음 속에 있다.”
[끝]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gopark59 작성시간 14.02.11 일동 차렷!!
경롓!!
잇빨!! -
작성자빤스지기 작성시간 14.02.11 역시 최고훈장은 아무나 받는게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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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써전트김 작성시간 14.02.11 개인주의가 만연해가는 현실에서 전우를 위해 이타심을 발휘하는 전우애가 느껴집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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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민석아빠 작성시간 14.02.19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사망..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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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칼리 작성시간 14.02.21 주한 미군 기지 이름 들이 이 분들이 근처에서 죽었을 경우 이름을 딴 것들이었군요. 생소한 영어 지명으로도 대충 짐작이 가네요. 꽤나 많아서 좀 놀랬어요. 우리도 이런 형태로 따라가는 것 같던데 요즘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