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우리 씬만 드문드문이야!”
오늘도 아침부터 걍 그렇게, 선배라고 직접 부르기도 뭣 한 사람의 비계 로드. 오늘도 댓바람부터 거들먹거리네. 덩어리가 전형적인 너털걸음에 어깨 딱 힘주고 손모가지 금 메끼에 미치겠네. 옛날 깡패 모습 카피인데, 진짜 저런가 요즘? 어디 족보를 파는 것도 같은데. 진짜야? 그려 그려. 알아서 뭐 하겠냐. 근데 저 몸으로 로드매니저 본업인 운전이나 제대로 하겄어? 운전석에 구겨 넣어지긴 하나?
“각자 세상 사는 거지 뭐. 신경 끄자.”
내 입에서 실제 말이 나올 정도면 화가 나긴 난 거다.
나는 뭐 저런 모습 없었나?
내 일이나 살자.
가뜩이나 중심이 모호해진 인생,
고칠 시간도 없다.
고치다가 남은 인생만 고달프다.
고치려다가 세상에 조련만 더 당한다.
내 마음에 맞게만 살려고 노력하자.
그다음 방문지는 의상과 분장.
“죄송합니다.”
“보세요.”
“저야 뭐. 네. 좋습니다.”
“튀는 거 아니라서 피디님이 뭐라진 않을 거예요.”
내 배역이 튀는 배역이 아니라서겠죠.
“두 개 중 하나 고르실래요?”
“제가 부탁했는데 의상 선생님이 미는 거 입겠습니다.”
“네. 그럼 이거?”
“저야 뭐 괜찮습니다.”
“혹시 피디님이 뭐라 하시면 2번으로 가고, 3번도 만들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의상은 아무리 일일드라마 수준이라도 봉고차 한 대 의상을 싣고 다닌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현장에서 펑크 났는데 옷 가지러 갔다 올 시간 없다. 배우도 자가용에 일정하게 싣고 다니고 의상도 넘치게 가지고 다닌다. 셔츠 같은 건 색깔 별로 다 있다. 한 컷 한 컷 공들이는 광고 쪽 의상은 훨씬 다채롭게 들고 오고 구입도 상당하다. 1개 소대를 위한 의상을 중대 분량 가지고 다닌다면 적절할 거다. 중화기소대용 모자 구두 신발 시계 선그래스 소품도 싣고 다닌다. 그러면서 작품/배우 협찬 의상도 관여한다.
의상 직원들은 다림질하느라 바쁘다. 야외 급조 다림질의 달인들. 양복도 편다. 다림질 다이 없이 펴는 거 구경할 수 있다.
“조심해 입을 게요.”
“아이 뭐.”
“누차 감사합니다.”
최대한 땀 묻히지 말자. 드라이할 때 내 얼굴 생각날라.
촬영하면서 조명 때문에 진땀이 나서인지 찝찝한데 의상에 냄새가 안 날 리가 없다. 언급하기 죄송하지만, 여름에 대선배님과 촬영하고 냄새가 심각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매일 샤워 안 하는 중년이 있다는 걸 안다. 매일 씻던 세대가 아닌 거다. 그분들은 아침에 세수하는 것, 저녁에 세수와 발만 닦고 자던 부모님 세대. 자기 냄새를 모르신다. 안 씻은 냄새를 노인 냄새라고 치부한다.
나도 담배 피우지만, 촬영 있는 날은 샤워 깔끔히 하고 나온다. 귀가해서도 당연히 샤워한다. 이게 아닌 세대가 있다. 우리 세대도 반반인 사람 있다. 나처럼 촌사람! 나도 냄새가 날 것이고, 의상 반납할 때 특히 분장한테 미안하다. 겨울에는 그나마 덜 미안하다. 그렇게 씻어도 조명 마사지 당하면 진땀이 나와서 나도 냄새 날 거다.
나도 이 일 계속하면 나이 먹고 냄새가 강해지기 시작할 것이고, 절대로 그런 냄새 풍기는 중년 배우가 되지 않으리라 유념한다. 분장 전에 가그린으로 확실히 입 헹구고 받는다. 여름에 땀 많이 찰 때 야외 촬영하면 냄새날까 부담이다. 스튜디오 촬영은 에어컨 빵빵하게 나와서 냄새 크게 없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노인 냄새는 원래 없는 거다. 매일 샤워를 안 해서 나는 냄새다. 어차피 늙으면 냄새는 심해진다.
로케나 스튜디오나 분장은 배역 높은 순.
나 같은 사람은 눈치 보다가 분장사들 앞 의자가 비면 눈을 맞춘다.
대선배들 옆 의자는 최대한 피한다.
“왔니?”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늘따라 갸름하다.”
“네? 제가요?”
“그래. 어제 좋은 일 있었나 봐. 생기가 돌아.”
“아니 무슨.”
“갑자기 사랑이 온 사람은 얼굴이 달라져.”
아이고 뜨끔, 선배님 사랑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문자 띵동.
[촬영 잘해.]
자, 나도.
[오늘은 잘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고마워요.]
띵동.
[양말 새 거 신고 가라니까 참^^]
“오세요.”
“저요?”
“네. 오세요.”
서 있는 나에게 말한다. 한참 뒤에 받을 걸로 생각했는데.
“다음, 없어요? 선생님들.”
둘러본다.
“여자 선생님들은 거의 다 하고 오세요. 오늘 거의 다 여자 씬.”
“아. (지금) 내가 해도 되는군요.”
로케는 간이 의자에 앉아서 하는데, 주연 조연은 분장 오야 선생님이 해주고, 우리는 그 아래 분장사들이 해준다. 우린 주연 조연보다 오래 안 걸린다. 좋은 배역에 당연히 신경 더 쓴다.
“입으신 거예요? 의상 착용하신 건가요?”
배우는 단추나 지퍼가 있는 걸 입는다. 뒤집어쓰는 스웨터 같은 거 입고 분장하면 의상 갈아입을 때 분장한 얼굴과 목이 옷에 묻는다. 어떨 때는 얼굴과 색상을 맞추기 위해 목에도 바른다. 그래서 단추 지퍼 없는 상의는 분장 받을 때 안 좋다. 다 이렇게 배우는 거다. 스튜디오 첫날 정장 입고 갔다가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어르신들까지 반바지에 운동화 신고 왔다. 정장은 내가 신인임을 고백하는 구경거리였다. 스튜디오는 온종일 지루한 겨루기임을 첫날 알았다. 로케 분장은 스튜디오보다 처음 한 분장의 유지가 분장 선생님들에게 중요하다.
“담배 피워요. 죄송합니다.”
“하하. 사과까지 하는 분 처음이네.”
“내가 그런 놈입니다.”
“네. 하하. 오늘은 많이 안 나오셨어요.”
“저희 연수 끝났죠. 새 기수 들어왔는데.”
“아참 그렇지.”
촬영의 색다른 맛(?)이 있다면 한 여성이 내 얼굴을 잡고 10분 20분 거의 키스할 거리에서 문지른다는 것. 꼭 젊은 여성 아니라도 신인은 기분 이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성끼리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붙잡고 있는 경험은 연인에나 해당한다. 가끔 미묘한 기분이 들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정신 차린다. 분장사분들도 그런 경향 알고 조심한다. 서로의 코가 말없이 30cm 15분 20분, 연기자 연령대가 높은 사극은 노 샤워 골초 만나 이분들 어쩌냐. 특수분장하면 한 시간도 약과다.
- 놀랄 것도 없이 의상 분장 중에 모델 배우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분들이 있다. 직업 때문이라도 기본적인 꾸밈 스타일들이 좋으시다. 실제로 모델 배우 하다가 전업한 분도 있다. 경험해 봐서 아는 분야니까. 주로 여성이 하는 분장 의상 보고 놀란 적 여러 번이다. 남자는 분명 외모를 참고하여 우연적 첫눈에 반하려고 365일 24시간 준비 중인 동물이다. 어디 책에 보면 남자가 여성 외모 스타일 평가하는 건 2초도 충분하단다. 초 스피드 스캔으로 우연을 가장한 수색섬멸작전의 동물. 내 얘기니까 광분하지 마시라 -
여름에 사극 찍으면 의상 분장이 죽는다. 사극 의상은 볼륨을 만들기 위해 몇 겹을 입는데, 가장 안쪽이 땀으로 절면 체취 습격이다. 촬영 끝나고 밤을 새워서라도 드라이 안 하면 여름에 악취 된다. 그래서 대형 사극은 방송사 의상팀이 무조건 붙는다. 과거 제작한 사극 특수의상이 500벌은 충분히 넘는다. 처음 연수 때 들어간 방송국 의상실에 주로 사극으로 꽉 차 있었다. 돈 들여 제작했기에 팔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재봉틀에 앉아 수정해서 새 사극에 넣는다.
“배우분들 체취는 우리 업무의 일부예요.”
분장하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은 스타급이다. 나이 먹은 분들은 골초에 분장 받으면서 또 떠든다. 자기 구취를 자기는 모르지. 겨울이면 이분들이 마스크라도 쓰지. 배우 최대의 적 중 하나는 감기니까.
나는 초반에 동기들이 말해줘서 깨달았다. ‘분장, 가그린하고 가.’ 샤워와 구취. 중년 냄새 노인 냄새, 절대로 난 그러지 말자. 그때까지 할 지도 사실 모르겠지만. 내가 선생님급과 의상 갈아입다가 맡은 냄새가 정말 낯설고, 싫었다. 정말 힘들었다. 원래 각자 땀 냄새는 힘든 거다. 음식 술 흡연 포함, 체취에 각자 인생이 있다.
“턱 들고 (눈은) 위로 (보세요).”
분장도 연극과 방송은 매우 다르다. 여기서 분장 코디님들은 함부로 건드릴 사람들 아니고 (소문 문화권) 처음 분장이 끝이 아니라 슛 들어가기 직전과 중간, 끝날 때까지 계속 만져준다. 진땀 나서 얼굴에 개기름이 흐를 때 부드러운 걸로 눌러서 찍어낸다. 바로 그럴 때 배우가 대접받는 기분도 든다. 아무리 짧은 장면을 찍는 와중에도 내가 주인공 대접처럼 느낀다. 현재 찍는 나에게 온통 신경 써준다.
모두의 목표는 뭐다? : 오늘 빨리 무리 없이 찍는 거. 스케줄 잘 흐르는 거.
대접을 특히 강하게 느끼는 건 광고 촬영이다. 작은 배역도 정말 신경 써준다. 그들은 모든 배역을 주인공처럼 간주하고 예의를 다한다. 배역만 있어도 감독이 인사 똑같이 하고, 아무리 엑스트라 뒷그림이라도 인사하면 똑같이 인사한다. 배우가 편하고 호의적으로 느껴야 광고 작품이 잘 나온다는 기본 정서. 광고 조연출들은 바닥부터 수련해서 그런지 바로 감독해도 될 정도로 지식 풍부하고 똑똑하다. 좀 나가는 광고 감독 옆에는 (밑에는 이 아니라 옆에는) 똑똑한 조감독이 둘은 있고, 그 조감독도 기회 되면 바로 찍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다 배워도 프로덕션 차릴 기회를 봐요. 궁극적으로 독립하려고 사부 감독님에게 배우는 거죠. 독립 안 하면 돈이 안 됩니다. 돈도 작품 찍어야 나오니 부정기적이고 힘듭니다. 나 이미 감독으로 두 편 찍었어요. 사부 때문에 이 작품 조연출로 붙은 거죠. 이 작품이 커서 총괄 조연출이죠. 우리에게 중요한 건 프로모션에서 날 믿고 광고를 주느냐 예요. 사부님이 스폰서 인맥을 나눠주셔야 시작하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온다.
’그걸 떠나서 전 감독님 존경합니다.‘
정말로 그래 보인다. 인품 이상한 광고 감독 별로 못 봤다. 감독이 마음 불편할 조연출을 쓸 이유도 없다. 방송국은 가끔 그 반대되는 일이 있었다. 자기가 고르지도 않은 공채 AD를 CP가 쓰라고 보내기도 한다. 세상일이 굽히기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스타일 안 맞으면 서로 힘들다.
연극만 맨땅의 헤딩인가. 가끔은 초반에만 분장 선생님이 해주고 배우들이 해결하는 공연도 있다. 제작비가 적어서 애초에 줄 돈이 부족한 거다. 적어도 매일 극장에 오는 분장사들 일당은 줘야 하니까. 내 손으로도 많이 했다. 연극영화과는 무대 분장 수업이 있다. 연극 분장이 훨씬 강하고 두껍다. 학교 때는 동기가 분장을 맡아도 이상하건 말건 우리들끼리 했고, 내가 소질은 있었는지,
‘오빠만 따로 멋있어. 우리만 뭐야. 우리도 해줘. 전에 배웠어? 오빠만 주말의 명화 분장이야!’
‘어쩌라고. 그렇다고 내가 분장이 안 좋도록 일부러 죽이냐?’
'하여간 오빠만 너무 멋있어. 짜증 나.‘
학교는 어린 나이라 화장도 제대로 못 하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학교 분장 수업 첫날, 한 시간 강의하고 실습하는데 얼굴 이상하게 발라서 ‘오빠 나 어떡해!’ 울던 애가 생각난다. 내가 다 지우고 또랑(파운데이션) 새로 발라서 해줬다. ‘이거 뭐가 반대인 거 같다?’
분장은 방송이건 연극이건 나처럼 젊은? 사람이 보면 분위기 똑같다.
잠시 착각이라도 얼마나 친밀한 느낌이 드냐면, 얼굴을 돌려야 할 때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쓱 민다. 이발소 미장원보다 부드럽다. 그런 관계가 세상 어딨나. 입술 바를 때는 두 사람이 키스하기 직전 모양이다. 어떤 분은 입술 발라주고 아래위 쩝쩝쩝 눌러서 펴라며 본인이 쩝쩝이신다.
’입술 아래위 눌러서 쩝쩝하세요. 쩝쩝.‘
분장 코디네이터는 일종의 디자인을 배워서인지 본인들 외모 분위기가 훌륭한 분들도 있다. 촬영장에서 처음 보고 배우인 줄 알았던 분도 있다. 광고 쪽도 더 그랬다. 아니 이분은 배우 해도 될 인상? 넓게 봐서 광고 쪽 의상 분장 멋진 분들 많다. 실제로 모델 하다가 의상 분장을 택한 분도 봤다. 어떤 의상 오야는 키 크고 너무 예쁘셨는데, 그 광고 감독님 아내셨다. 물어보니 정말 모델 출신이다.
처음 분장 받으면서 설레기도 했다. 의상 코디나 분장사와 연애하고 결혼한 배우가 있는데 난 충분히 이해한다. 잠시 붙지만 친밀한 느낌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일로 만나지만 의상 분장도 맘에 드는 사람이 없을 리가 있나. 오히려 이분들은 사적 감정 배제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턱 약간만. 오른쪽. 오른쪽 위를 보듯이.”
“선생님을 보면 너무 황홀해서 힘들어요.”
“닥치시고. 턱. 턱.”
“결혼하면 담배 끊어야죠?”
“왜 이러실까. 턱!!!”
이렇게 얼굴 바르니 떠오른다. 추억도 돈이 필요하다. 연극은 분장 구하기 좀 어렵다. 여기와 똑같이 연극 분장도 굵직한 선생님들이 있다. 연극 분장사가 더 피곤하다. 공연 기간에 극장으로 매일 출근하기 때문이다. 분장 회사 대표인 선생님은 초반에 배역 별로 잡아준 다음 안 나온다. 방송 분장과 연극 분장을 동시에 하는 회사도 있다. 연극 분장은 한 달 이상 장기 공연과 지방공연까지 따라가는데, 가끔은 돈 못 받는 걸 본다. 연극은 흥행 파산 나는 작품이 너무 많다. 코미디/뮤지컬/세미 뮤지컬 아니면 대학로에서 장기 공연 버티기 힘들다. 극장 대관료도 다 못 내고 튀어서 추적당하기도 한다. ‘잡히기만 해봐라.’ 기획자(극단 대표) 잠수 탄다. 대망의 꿈을 품고 대학로 왔다가 전세금 날리고 원형 탈모 난 연출자/극단 대표를 봤다.
‘이번에 안 내면 마지막 스케줄, 극장 안 줄 수도 있어요.’
진짜로 그러진 않는다. 갑자기 들어오는 팀은 없다.
‘뭘 그 정도로 그래. 자살 시도한 사람도 있었어.’
이 분은 극단 ㅁㅎ의 극단 대표 사모님.
‘아무리 그래도 이번 주까지 안 내면 스케줄 취소야.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아니라 미수가 정말 많아. 합하면 억 단위야. 사정 봐주다 우리도 파산해.’
그런 일들은 대관 마지막 주말이나 마지막 공연에 터진다. 극장주가 잔금 안 내면 공연 안 된다는 거지. 내가 보기에 다수 채권자 중에서 돈 회수하기 힘든 게 분장이다. 무대장치와 조명은 처음 세팅해 주면 며칠 공연 보면서 손보다가 세팅 수정 끝! 안 나온다. 분장은 인력이 매일 나온다. 모르는 극단, 정말 친한 사이 아니면 선금도 요구한다. 분장은 현실적으로 극단/배우와 한 팀으로 지내야 한다. 그런데 의리를 지켜 돈을 입금해도 최종 후 순위로 생각하는 경향. 부도로 건물이 넘어갈 때 법적인 배당 후 순위와 비슷하다. 분장 선생님(대표)들은 대부분 성격 차분해서 더 그런가?
농담 장난도 치며 친하게 지낸 분장사들이 있다. 처음에는 선생님(사장님)이 와서 분장을 잡아주고, 무리가 없으면 짬밥 낮은 분장사들만 매일 출근한다. 우리와 비슷한 나이도 있다. 관리자가 없으니 공연 끝나고 같이 술 먹고 그랬다.
“눈 감으세요.”
얼굴 바르면서 다른 얼굴들이 떠오른다. 추억도 돈이 필요하다. 가난했던 추억을 굳이 입으로 말할 건 아니다. 나도 누추한 언행 일삼던 놈이니까. 없으면 말만 는다.
어느 대극장 공연 때 젊은 배우 네 명과 나이 비슷하거나 그리 많지 않은 네 명이 공연 끝나고 자주 마셨다. 공연 끝나면 관계자들 모두 마음이 허하다. 마지막으로 텅 빈 객석을 볼 때 마음이 야리야리하다. 술 잔뜩 먹고 여덟 명이 한 여관방에서 잔 일도 있었다. 방이 좁아서 빡빡하게 붙어 저마다 파트너처럼 끌어안고 잤다. 모텔도 아니고 방, 서울 시내 대로에서 골목으로 한참 들어간 여관방. 돌이키면 창피한 일 추잡한 일 많았다. 나도 자유롭지 않다. 그 시절 난감할 때가 아침에 나올 때다. 서로 부스스하고 창피하다. 공연 끝나면 서로 연락도 끊어지는 그런 경우다. 떼로 콩나물국밥 먹는데 얼굴 보기 창피했던 기억...
여러 이유 포함 내가 힘든 건 누추한 환경. 사실 우리도 받는 게 거의 없었다. 매일 밤 극장에 나가 연기하고 폼잡고 가난했다. 가난했다기보다 그나마 줄 돈을 안 준다. 최저 생활비도 안 되는 돈. 그것도 안 주는 거다.
나는 다른 선배들처럼 길게 한 것도 아니다. 어떻게 찾았는지 모를 누추한 술집에서 마시고 놀았다. 소정의 출연료조차 떼였을 때 비참했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의도 시험을 보기 시작한 실마리였다. 6개월 공연, 기획자 잠수 타고 우리는 붕 떴다.
모든 걸 떠나,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시점, 공연 끝나고 분장 지울 때. 공연 잘 끝났으면 당연히 기분 좋게 크림 발라서 지우는데, 기뻐도 어째도 ’나 지금 뭐 하는 건가‘ 이상하곤 했다. 해지면 화장하고 손님 받는 직업이란 농담하지만, 큰 거울 앞에서 내 얼굴 보며 분장 지울 때가 좀 그렇다. 크림으로 또랑을 녹여 캐러멜 마키아토처럼 떡이 된 얼굴을 화장지로 벅벅 문지르고. 어떨 때는 크림도 없어서 비누로 세수해 지웠다.
안 좋다. 사람이란 벌이 안 되는 걸 해도 본능이 만족해야 지속한다. 큰돈을 벌건 남이 우러러보건 그나마 위안이다. 어떤 공연에선 우리 학교 영화과 졸업생이 붙었는데 애들이 다른 계급 같았다. 원래 잘사는지 고급 차에 옷도 다르고, 그중 하나에 마음을 품었지만 대쉬가 곧 창피 같았다. 우리와 안 놀고 공연 끝나면 총총 사라졌다. 행동거지 방식을 비교하면 우리가 너무 너절했다. ‘사람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말이야.’ 영화과 애들 도도하고 프라이드 있었다. 우린 눈 뜨고 아무거나 주워 입고 나오고.
공연 끝나고 분장 지우며 호주머니에 동전밖에 없는 나.
갑자기 뜻 모를 외로움이 밀려오곤 했다.
내가 잘못 선택한 걸까?
지금보다 어려서는 대학로에서 분장 지우면 바로 술! 휘파람 불곤 했다. 오늘 누가 보러왔지?...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술 사곤 했다. 아니면 보러 와주신 지인에게 대표가 사거나, 우린 안 낸다. 못 낸다. 그리고 왕창 숙취로 깨어난 아침, 남들은 출근하고 남을 시간인데 내가 누워서 뭐 하고 있나...
그런데 그것도 적응된다. 그게 문제다. 우리들 문제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한량 비슷한 생활. 바쁘다면서 실제 생활은 게으르다. 게을러진다. 그렇게 되자 내가 방송국 원서를 받아온 거지. 남들에게는 6개월 넘게 이어진 공연을 한 푼도 못 받고 자빠졌을 때라고 했지만, 나의 깊은 곳을 보면 불만족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러고 있다. 내가 해답으로 택한 길이다. 정신 차리라.
“턱 살짝만 내려보세요.”
“네!”
스타일리스트에게 분장 받을 때처럼만 연애하고 결혼 생활하면 무난할 텐데.
자기가 스타급이라 생각하고 막대하다가 좋은 여자 놓친다.
"더! 더!"
"아잉."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