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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공수부대)

10일 간의 기억.....(공수여단)

작성자잇빨중사|작성시간07.08.08|조회수1,871 목록 댓글 1

마켓가든 참전자....

 

영화 '머나먼 다리'의 여러 중요 장면들의 와중에 있던 병사.....

 

 

Fred Moore (영국 1공수사단 1낙하산 대대)

 

 

1944년 9월 17일. (일요일)-난 네덜란드의 조그만 나무가 있는 곳에 랜딩했다. 주변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이것은 거대한 침공인데도 말이다. 난 시실리에서 점프로 투입되어 부유교를 탈취하는 작전을 한 적이 있다. (프리모졸레 교량 탈취작전-여기서 영국군 공수부대와 독일군 팔쉬름예거가 전투를 벌였다. 굉장히 고참이라는 말이 된다.)

 

형식에 구애됨이 없는 공수작전이었다. 낙하산 부대의 작전이란 것이 항상 그러한 돌변하는 상황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실리와 비교해서 이 작전의 시작은 너무도 평온했다. 난 수습하는 부대들 속에서 내가 속한 기관총 소대를 찾아서 차후 이동명령을 기다렸다. 우리는 쵸코릿을 먹으면서 나무에 걸린 낙하산들을 봤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면서 다음 주가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우리는 원거리에서 들리는 총소리를 들으면서 전투의욕에 불탔고, 성급히 빨리 이동명령을 기다렸다. 마침내 소총소대를 선두로 부대가 진출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시민들은  격리되어 낙하산으로 떨어진 연합군에게 병력 집결지를 알려주어 집결에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자기일처럼 우리를 도왔다.

 

우리는 갑자기 우리의 전방 어디에선가 들리는 날카로운 총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그것이 독일군 저격수란 것을 알았다. 우리는 총소리가 난 곳을 향해서 사격을 집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무 위에서 자리잡고 있던 독일군의 시체를 보았다. 우리는 진출하면서 급작스럽게 숨어서 사격하거나 울리는 총소리에 놀라곤 했다. 그러나 앞으로 진출할수록 그러한 위험과 방어가 가중된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결국 아른헴으로 향하는 선도 소대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도로가로 벗어나서는 방어형태를 취했다. 점점 우리는 평온을 잃고 있었다. 무언가 작전계획과 빗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빨리 도시의 와곽에 도달해야만 했다. 다리를 차지해야 했다. 2대대와 3대대가 우리의 옆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지도 못하고 우리 대대 자신은 우리의 전력을 단독으로 소모하고 있었다. 다른 대대와는 연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전진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18일 월요일-날이 새기 얼마 전, 지프차가 우리를 태우고 아른헴의 외곽으로 이동시켜줬다. 대대는 아른헴의 대대와 연결하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터였다. 우리는 2대대가 목표인 아른헴의 다리에 도착했고, 그 북단을 점령하고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즐거운 뉴스였다. 곧 작전이 끝날 것 같았다. 우리 뒤에는 어마어마한 기갑부대가 있으니까 올 것이까 말이다....

 

우리의 소총소대는 밤 동안 아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약간을 진출한 후, 우리는 집과 정원이 있는 주택가로 들어섰다. 그 때 네덜란드 거주민들이 물결치듯이 나와서 환호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과일과 음료수를 우리에게 먹으라고 권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유를 찾았다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행복감은 잠시였다. 어디선가 히틀러의 전기톱이 주변을 긁기 시작한 것이다.

 

주변에 있는 나이든 여성이 등에 총을 맞았다. 우리는 커다란 위협을 느꼈다. 그 시골 마을은 우리가 엄폐 은폐를 하면서 전진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독일군 저격수들의 강력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전진은 속도가 줄어들었고, 선도 중대는 엄청난 화력권 안에 놓였다. 우리는 엄청난 손실을 맛보았고, 독일군 쪽으로 진출하는 것이 현재로써 소용없는 것이란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해가 뜨기 전에 목표에 도달해야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방어거점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사방에 피가 흐르는 치열한 전투였다. 동료들이 쓰러지고 있었고 우리는 눈물을 흘릴 틈도 없었다.....우리는 해가 뜰 때까지 집들 주변에서 고정되어 휴식하고 있었다. 난 점차 무언가 이동하는 소리를 들었고, 우리의 배후에도 독일군들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소음을 줄이고 소리를 청음했다. 그 와중에도 내 옆의 동료는 코를 골면서 자고 있었다. 난 동료를 깨웠다. 무언가 우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19일 화요일-아직도 우리는 아른헴 다리에서 약 2마일(3.2킬로미터) 거리에서 진출할 수 있다는 사기에 찬 정신력으로 아침을 맞았다. 어느 정도 휴식도 취했다. 해가 뜨기 전 두 시간 동안 원래의 진출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속도를 내어 전진했다. 독일군의 방어가 완고했으므로 우리는 건물들로 은폐 엄폐를 하면서 전진했다. 우리는 강 쪽을 향해서 끊임없이 전진했다.

 

그러나, 해가 뜨면서 우리는 경악하고 말았다.

 

강변을 위시해서 모든 지역이 참호가 파여진 강력한 독일군의 수비태세에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독일군 포병의 포탄들이 소사로 날아왔고 주변은 섬광과 폭음 연기가 뒤덮혔다. 포격은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리는 주변으로 산개해서 기관총과 박격포로 반격을 시도했다. 난 기관총사수의 3번째 옆에 있었고, 사수는 강을 향해서 사격을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기관총수인 두 명이 푹하고 쓰러지면서 옆으로 굴렀다. 그리고 일어나지 않았다. 

 

난 그 자리로 가서 무차별 사격을 했다. 조준을 못한 비효과적인 사격이었다. 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뒤에서는 퇴각의 징후가 있었다. 우리는 아주 급하게 다시 뒤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우리만 남을 뻔 했다. 우리는 다리를 1마일 남겨두고 눈물을 머금고 후퇴했다. 우린 본대와 다시 만났지만 전체적으로 혼돈스러운 상태였다. 우리의 진출 전면에는 기갑으로 보강된 독일군 1개 대대 정도가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좌절됐다.

 

도로를 건너서 동료 에니 밀바운이 뛰어 왔다. 그의 손은 부서져 있었고 얼굴을 피가 낭자했다. 그 가운데도 그는 돌아서서 자신의 기관총을 거취하고 우리의 퇴각을 엄호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기관총을 쏘다가 다시 총을 맞고 즉사했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뒤로 뛰어야 했다. 퇴각하는 동안 우리의 명령체계는 무너졌다. 병력들이 섞였으며 퇴각하는 방향도 불분명했다. 우리의 사단 본 병력을 만나고서야 다시 재 규합할 수가 있었다. 


난 퇴각의 과정에서 오래된 친구를 추월하다가 만났다. 그는 제리 커티스였다. 그는 우리 제대의 상병이었고, 과거 1941년 11-SAS에서 같이 근무한 바 있었다. 우리는 당시 친구가 되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같이 싸웠다. 제리는 거기서 2계급 특진을 했었다. 제리는 자신의 동료가 한 명 죽었고, 현 시점에서 같이 행동하자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우리는 도로의 접합점에서 이 작전계획이 엉망으로 만들어졌다고 푸념했다. 거기다 많은 수의 독일군 탱크가 등장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전에 진출 시작지점이었던 오스터르베크(Oosterbeck: 마켓가든 당시 영국군 1공수사단 거점)의 방어선을 향해서 미친 듯이 뛰었다.

 

나와 제리와 어느 틈엔가 섞인 한 명의 대전차포수, 이렇게 셋이서 같이 뛰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몰랐다. 적어도 15분 가량 전력 질주했다. 난 속으로 시간을 세면서 우리가 얼마나 왔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리가 말했다. “충분히 온 것 같다.”라고. 주변을 보니 아직도 도로 부근에서 방어점을 구성하고 있는 아군들이 보였다. 50야드 앞에서는 두 명이 대전차포를 사격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탱크의 캐터필더 소리가 공포스럽게 울렸다. 탱크의 캐터필더 소리는 군말 없이 우리를 침묵시키고 기도를 하게 만들었다. 대 전차포수들이 발포준비를 했다. 누군가는 피아트 로켓포를 조준하고 있었다. 언덕 쪽으로 탱크가 보이는가 싶더니 포수가 대전차포를 발사했다. 그 선도 탱크는 분명히 대미지를 입었다. 탱크가 길의 노견에 서버렸다. 두 번째 탱크가 선도 전차와 똑같이 등장하고 있었다. 포수는 다시 조준하고 있었다. 다시 또 다른 대전차포가 발사됐다. 그리고 다시 전차에 적중했고, 전차는 폭발을 일으켰다. 

 

다시 하루가 지나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주변의 가옥들을 보면서 방어에 적합한 곳을 고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집들의 마당에 그리 깊지 않은 깊이의 참호를 파고 전술 거점을 만들었다.  다리까지 간다는 생각은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20일 수요일-해가 뜨자마자 우리가 구축한 참호와 방어점들을 향해서 피할수 없는 맹폭이 날아들었다. 우리는 영국 2군의 엄호 같은 것은 너무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우리를 돕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강 건너편에서 소리는 들렸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강북은 완전히 지옥이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마음은 허기도 잊어버렸다. 허기는 안전을 느낄 때나 가능했다.

 

가까운 곳에 동료인 빅터가 있었는데 그는 담 밑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참호에서 움직일 수 없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라인강에 걸친 철도교량이 파괴되었다고 했다.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자의 포효같은 폭발음들이 우리를 압도했다. 탱크가 접근하기 시작했다. 탱크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우리가 숨거나 엄폐한 건물들을 전차포로 주저앉치고 있었다. 건물을 쏘고 움직이고를 반복했다. 숨어서 전차포나 로킷을 쏘지 못하도록 아주 지능적으로 움직였다. 전투경험이 없는 전차들이 아니었다. 주변에는 사상자들이 늘어났다. 다시 탱크가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시 건물들을 향해서 포격을 가해왔고, 우리는 치명적인 상태에 빠졌다.

 

독일군 보병들이 우리의 방어라인으로 침투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조직적인 침투로 보아, 어디선가 높은 곳에서 저격수가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정보를 주는 것 같았다. 일대는 불타는 가옥과 건물들로 인해서 황폐해졌다. 우리는 파괴되지 않은 가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창문에 가구를 넘어트려서 사격준비를 했다. 이것은 완전히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망갈 곳도 피할 곳도 이제는 없었다.

 

갑자기, 어떤 머룬베레(maroon beret: 아마도 영국군 코만도)를 쓴 대원이 도로를 건너왔다. 그러나 그는 도로 중간에 쓰러졌다. 독일군 저격수가 맞춘 것이다. 그를 구하려고 공수부대원 한 사람이 도달하다가 또 다시 총에 맞았다. 도로에는 두 명이 누워있었으나 우리는 도울 수 없었다. 제리는 갑자기 다른 인원들에게 방어사격을 하는 요령을 주지시키고는 가옥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나 제리가 다가가기 전에 이미 둘은 다시 확인사살을 당했고 완전히 전사한 것으로 보였다.

 

다시 우리 가옥의 출입구에 총탄이 쏟아졌다. 우리는 죽거나, 가능한 빨리 포로가 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죽는 것이었다. 우리는 가옥의 후문을 통해서 탈출하기로 맘을 먹었다. 밖에 있던 빅터가 엄호사격을 해주겠노라고 했다. 난 가옥에서 시거를 하나 찾았는데, 난 그것을 피우면서 탈출할 방향을 고려했다.

 

우리는 공수1여단 1대대 3중대와 공수4여단 11대대 원들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단단히 결속하고 탈출을 시작했다. 군목 님도 한 분 있었다. 난 기관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행동에 남보다 더 힘들었다. 한발한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군목은 나를 격려했다.  그 순간에도 전투 소음은 계속 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총소리와 박격포 포격음, 그리고 가끔씩 대구경 독일군 포병의 포탄이 간헐적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노출된 초원 위를 뛰고 있었다. 우리는 선두가 기관총 사격을 받아서 멈출 때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거기서 멈춘다면 오히려 위험했다. 우리는 어딘가 가까운 곳은 본대와 접촉을 해야만 했다. 우리는 몇몇 혹은 개인적으로 알아서 이동했다. 교차적으로 이동을 했다.

 

우리는 결국 견고한 서로간의 방어선의 아군측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서 빅터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우리는 론스데일 소령이 지휘하는 공수4여단 11대대에 도착한 것이다. 소령은 이제부터 자기의 지휘권 아래 전투를 하라고 말했다. 제대를 찾아가서 규합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이동을 할 경우, 독일군의 공격을 즉시로 받았다. 

 

(영국군 1공수사단은 완편 사단이 아니다. 휘하에 1낙하산여단, 4낙하산여단 이 두개로 편성되어 있다. 그리고 편입생으로 폴란드 낙하산여단이 있었다. 이들 용감한 폴란드 낙하산여단은 영국군 공수사단의 강 건너편에 작전 후기에 점프해서 들어갔다가 굉장한 피해를 보았다.)

 


21일 목요일-새벽에 우리는 도로와 인접한 곳에 우리의 참호를 팠다. 기관총과 병력이 약간 증원됐다. 우리는 독일군의 향하여 사격을 시작했다. 공중으로부터 새로운 소음이 들렸다. 항공기의 소음이 들렸고 하늘에는 다코다 수송기가 보였다. 우리는 환호했다.....그런데 다코다 기가 떨어트리는 보급품은 우리와 너무도 떨어져있었다. 독일군 진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아군이 이미 그 정도까지는 진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수송기 한 대가 피격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수송기는 바로 독일군의 바로 위 상공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독일군의 박격포가 우리 진지 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발 포격이 끝날 때까지 숲의 가장자리에 있는 도랑에 몸을 숨겼다. 집중 포격이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 근처에서 두 발이 폭발했다. 하나는 전면에 하나는 우리 후미에 떨어졌다. 세 번째 발이 우리 선임하사와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 명중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 세 번째 발이 불발된 것이다. 우리는 기뻐할 틈 조차 없었다......자리에 묶여서 다가오는 포탄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은 슬픔 그 자체였다.밤이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는 매우 처량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탄약도 거의 없었고, 굶었으며, 거의 잠도 자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의 박격포반이 있는 인근 가옥으로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 거기에도 약간의 독일군의 활동이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붙잡은 채, 약간의 수면을 취했다. 

 

 


22일 금요일-아른헴의 2대대에 독일군 공격이 집중되면서 유린당하고 있었다. 프로스트 대대장이 있는 2대대가 고립되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는 모두 추측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바로 우리였다. 박격포 공격은 점차 강력해졌고, 그에 못지 않게 독일군의 저격수는 우리에게 상당한 피해를 주었다.

 

우리는 우리의 방어선을 아침까지 고수했다. 정오가 되자 포격은 약간 뜸해졌고, 우리는 소수의 대원을 전방으로 정찰 보냈다. 고요한 가운데 우리 주변에 보이는 것은 시체들과 살덩어리, 그리고 구조물들이 파괴되어 날린 조각들만이 어디에나 널려 있었다. 아마겟돈이었다.

 

다시 경고 없이 포탄들이 날아들었다. 지긋지긋했다. 갑자기 내 옆의 한 명이 푹하고 쓰러졌다. 겉으로 들어 난 부상의 징후는 없었지만, 그는 즉사했다. 아마도 그는 포탄의 폭풍으로 충격 받아 전사한 것 같았다. 포탄은 여러가지 이유로 병사를 죽인다. 몸이 찢어져 죽고, 머리나 복부가 폭파압력으로 터져 죽고.....가끔은 죽었다고 생각해서 죽기도 한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다시 공격은 줄어들었다. 우리는 그때 알았다. 독일군은 야간전투를 별로 원하지 않았다. 이상할 만큼 어둠이 찾아오면 그들의 공격은 줄어들었다. 그래서 해가 지면, 우리도 무사히 하루가 지나갔구나 라고 생각했다. 해가 지면 안도의 한숨이 나도 모르게 휴우 하고 터져나왔다. 어쩌면 곧바로 증원병력과 구조가 이루어 질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들은 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기운을 돋았다. 그러나 사실상 그럴 확률이 없다는 것은 바로가 아닌 이상 다 알고 있었다. 강이 막고 있는 것이다. 

 


23일 토요일-해가 뜰 무렵, 선임하사를 지휘자로 하는 소그룹이 전방의 도로 교차점에 고립된 약간명의 아군을 구출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들은 건물에 고립되어 있었다. 우리가 접근해보니, 건물 뒤의 정원의 문은 울타리로 둘러 쌓여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약간 넘어트리고 문이 아닌 곳으로 우회해서 들어갔다. 문은 분명히 독일군 저격수가 조준할 것으로 예상됐다. 비슷한 종류의 집들이 도로에 평행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각 독일군이 탱크와 보병의 합동으로 주변을 공격하고 있었다. 우리가 한 가옥에 진입했을 때, 선임하사는 도로상의 전면 어딘가에 우리의 병력과 글라이더 조종수들이 숨어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싸우스 스태포드 병력들이 분산되어 근처에 고립되어 있었다. 내가 두 개의 정원을 가로질러서 정찰을 하면서 느낀 것은, 아직은 그곳이 파괴되지 않은 비 전투상태의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곳은 아직 우리 수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도로를 가로질렀다. 아주 길고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도로였다. 그 도로에 파괴된 독일군 타이거 탱크가 한 대 보였다. 내가 생존자가 있나 하고 조종수 해치를 열어보니 죽은 독일군의 머리가 푹 하고 떨어졌다. 거의 머리가 박살나 있었다. 다른 병력에게 싸인을 보내지 않고 200야드 정도를 더 진출해서 소리를 질렀다.

 

“여기 혹시 싸우스 스태포드 병력, 있습니까?”

 

응답이 없었다.

 

난 조심스럽게 50야드 정도를 더 앞으로 나갔다. 전방에서 무언가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서 벽돌 더미와 작은 담을 점프해서 넘은 다음 우리가 왔다고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그런데....그게 아니었다. 그 곳은 독일군이 점거하고 있었다.

 

“여기 혹시...싸우스......어?.....이런 염병할......독일군 새끼들이다!!!!”

 

독일군 한 놈이 참호에 기관총을 거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가 놀랐다. 독일군이 독일말로 뭐라고 고함을 쳤으나 놀라서 기관총을 쏘지 못하고 있었다. 난 참호로 뛰어 들어가서 재빨리 군화로 기관총을 걷어차고는 다시 뛰었다. 그리고 담을 다시 거꾸로 넘어서 지그재그로 미친 듯이 달렸다. 총알은 날아오지 않았다.

 

선임하사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자, 선임하사는 서너 명과 다시 그 근처로 가서 주시하라고 명령했다. 선임하사는 우리의 경-포병에게 연락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오가 될 즈음 우리는 좀 더 다가가서 정원에 있던 독일군의 거점을 관측했다. 우리가 돌격하면서 총을 발사하자, 거기에 있던 독일군들은 점거하고 있던 가옥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러나 추적은 포기했다. 대신 독일군의 거점인 그 가옥을 파괴했다.

 

해가 질 무렵 우린 다시 접근했다. 난 가옥의 후문 쪽으로 접근했다. 우리는 가옥을 둘러싸고 독일군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총을 장전한 우리 장교가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러자 난 가옥의 후문에 대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독일군이 그제서야 손을 들고 나왔다. 우리는 테니스 코트로 가려진 곳으로 독일군 포로들을 몰고 갔다. 그리고 주변을 정찰했다. 잠시 독일군들을 내가 가둬두고 있었다.

 

그때 무언가 폭발했다.

 

멍했다.

 

난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난 동료에게 물었다.

 

“분명히 나지? 맞은 건 나지?...어때 나 죽을 정도야?"

 

난 고통을 못 느꼈다. 팔과 다리와 손에 파편이 박혔다. 난 옆의 가옥에 들어가서 임시로 응급처지를 했다. 그때에 피가 마구 나오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날 붕대로 지혈처리 해줬다. 이후 저녁에 난 Mrs. Kate가 치료해주는 오스테르베크 근처의 교회로 옮겨졌다.

 


24일 일요일-내가 치료를 받던 교회는 우리 방어선에 독일군 공격 목표로 부각됐다. 교회의 높은 탑이 관측용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대가 너무 잘 보였다. 그 곳에서 포병 관측장교가 우리의 경 포병의 사격을 유도하는 OP로 쓰고 있었고, 강 건너의 영국군 2군의 대구경 포도 유도하고 있었다. 우리의 대전차포와 박격포도 끊임없이 독일군을 향해서 포격을 날렸다.

 

우리를 돕던 Mrs ter Horst와 그 자녀들도 꼼짝없이 독일군의 포화에 갖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고 부상자들의 붕대 감는 것을 도와주었고, 부상자들을 위로했다. 그것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환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줬다. 토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난 그곳의 마루에 누워 있었다. 나보다 심한 중상자들이 마루어디나 널려 있었다. 전투 소음이 집의 앞과 뒤를 가릴 것 없이 울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그 교회도 크게 포격을 받기 시작했다. 엄청난 포탄의 명중이 있었고, 그로 인해서 부상자가 다시 생겼다. 포격으로 벽면의 회반죽이 마구 떨어졌다. 모든 유리들이 박살났다. 우리는 그곳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을 맞았다. 일요일 밤 우리는 사단 본부 쪽으로 후퇴를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상급자는 영국군 2군과 근위 기갑사단이 다리를 장악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곧 아침에 구조될 것으로 기대가 부풀었다. 밤새도록 발작적으로 기관총이 자주 난사됐다. 

 


26일 화요일-구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Mrs ter Horst가 와서 말했다.

 

“이런 소식을 전하기가 저 자신부터 두렵습니다.

어젯밤 영국군들이 탈출해서 강을 건너 후퇴

했습니다. 우리 집 역시 독일군에게 포위된

상태입니다. 밖에서 독일군 지휘관이 대화를

위해서 걸을 수 있는 사람을 나오라고 합니다.”

 

난 자원해서 나갔다.

 

거기에는 정말로 독일군 장교가 서있었다.

 

그는 거의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말했다.

 

"당신의 부대는 이미 전선을 넘어서 후퇴했습니다.

당신들이 노력했던 전투력에 경의를 표하며, 이제

당신들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상자들에게

이것을 나눠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그는, 담배와

쵸코렛 바를 나눠주었다.

 

원래 우리가 받아야 할 공중에서 떨어진 재보급품이었다.

 

그제서야 서러움의 눈물이 내 뺨을 타고 흘렀다....

 

곧 이동차량이 도착했고,

우리는 Apeldoorn에 있는 병원으로 수송됐다.

 

그리고 이틀 정도 치료를 받은 후,

 

우리는 기차를 이용해서 11b라는 명칭의

Fallingbostal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수감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 즈음에 나는 해방이 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다.

 

눈으로 목격한 쓰러진 동료들보다는

 

훨씬 더 나았으니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켓 가든 장시 영국군의 전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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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성용11321 | 작성시간 07.08.09 머나먼다리를 군입대전인...아마...19살인가할때 케이블티비에서 봤습니다 처음엔 그리 진지하게 보지않고 여기저기 돌리면서 봤다가 대규모 침투장면부터 조금 진지하게 봤던기억이 납니다 영화가 오래된것이라 컴퓨터그래픽이 아닌 실제로 강하장면을 찍기위해 700여명이 동원됐다는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건 레드데빌에 숀커러니였던가가..무전기로 보급품을 제보급해달라고 요청했더니 수송기로 제보급을 해줬는데 독일군에게 포위 당해 보급품을 못가지러가자 어느한병사가 목숨을 걸구 보급품을 하나 들고 아군진영으로 다와서 총에 맞아죽었던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그 병사가 목숨과 바꾼건 레드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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