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티엣(Phan Thieat), 무이 네(Muoi Neu) 기행
글 : 주호치민총영사관 이철희 영사.
판 티엣(Phan Thieat)과 무이 네(Muoi Neu)는 이미 베트남에서 발간되는 각종 언론매체에 자주 소개되는 곳이다. 그런 만큼 이곳에 대해 기행문을 쓴다는 것이 어느 정도 부담으로 다가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가 7년을 기다려 방문한 곳이고, 단순한 관광지로만 알고 있었던 이곳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인물과 역사가 숨쉬고 있었다. 적어도 이런 부분만큼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전하고 싶었고, 또한 다른 각도에서 나름대로 정리한 여행정보를 제공하고자 펜을 들어본다.
독자들은 이 글의 제목에 나온 “칠 년의 기다림”의 정체가 무척이나 궁금할 것이다. 필자가 하노이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99년도에 냐짱(Nha Trang)을 방문했다가 폭우로 인해서 하노이행 비행기가 결항하는 바람에, 호찌민으로 행로를 바꾸어 가던 길목에 판 티엣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흐른 2006년 8월 아이들의 방학기간에 가족여행으로 판 티엣을 다시 찾은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7년 전, 필자가 예기치 않게 투숙했던 곳은 판티엣의 노보텔(Novotel)호텔이었다. 노보텔호텔 앞 해변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산언덕의 끝 자락에 하늘을 배경으로 신비로움을 내뿜는 탑들이 서 있다. 한눈에 보아도 짬파(Champa)왕국 시대에 세워진 유서 깊은 탑들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필자는 탑들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위용과 자태에 매료되었으나 오후 늦게 판 티엣에 도착했고, 일행들은 역사유적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직접 가서 보고 싶은 마음을 접어야만 했다. 저 멀리 산 언덕을 향해 손을 뻗으면 탑들이 잡힐 것 같은 아련한 느낌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안타까움의 표현이었을까---.
빈 투언(Binh Thuaan, 平順)성은 이웃 닌 투언(Ninh Thuaan, 寧順)성과 함께 과거 짬파왕국의 최후 영역이었던 판두랑가(Panduranga)지역이었다. 짬파왕국은 판두랑가(Panduranga) 외에도 인드라푸라(Indrapura), 아마라바티(Amaravati), 비자야(Vijaya), 카우타라(Kauthara)등의 인도식 지명을 사용했다. 비엣(Viet, 越)족에게 북부영역을 빼앗기면서 쇠락의 길을 걷던 짬파왕국은 1692년부터 왕의 지위를 상실하고 판두랑가에 거주하는 짬족을 다스리는 일개 지방영주인 쩐 브엉(Traan Voong, 鎭王)으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판두랑가란 지명도 쩐 투언 타인(Traan Thuaan Thaønh, 順城鎭)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빈 투언(Binh Thuaan)과 닌 투언(Ninh Thuaan)의 ‘투언(Thuaan, 順)’은 투언 타인(Thuaan Thaønh, 順城)의 ‘투언(順)’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판 티엣(Phan Thieat), 판 장(Phan Rang), 판 지(Phan Ri) 등의 지명에서 ‘판(Phan)’은 판두랑가(Panduranga)의 첫 음절 ‘판(Pan)’에서 유래되었다.
판 티엣의 원래 이름은 하무 리팃(Hamu Lithit)이었다. 하무(Hamu)는 ‘논’, 리팃(Lithit)은 ‘해안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무 리팃은 ‘해안지역의 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말엽부터 베트남인들이 내려와 정착하면서 판두랑가에서 판을 따와 ‘판 리팃(Phan Lithit)’이라 불렀고, 시간이 지나면서 ‘리팃(Lithit)’이 ‘티엣(Thieat)’으로 바뀌어 현재의 ‘판 티엣(Phan Thieat)’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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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투언성은 베트남에 있는 리조트의 60%가 모여있는 휴양관광지의 대명사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판 티엣시에 속해 있는 무이 네(Muoi Neu)는 단일지역으로는 리조트가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연중 베트남 관광객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호찌민에서 200Km거리에 있는 판 티엣은 최근 베트남에서 손꼽히는 관광지로 발전함에 따라, 1999년 도시등급이 티 사(Tho Xao, 市社)에서 타인 포(Thaønh Phoa, 城鋪)로 승격되었다. 판 티엣은 빈 투언성의 수도로 낀(Kinh, 京)족, 호아(Hoa, 華)족, 짬(Chaøm)족 등 2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며,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까 띠(Caø Ty, 과거에는 Phan Thieat)강을 따라 양편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길다랗게 바다에 면해있어서 예부터 어업이 성했다. 이러한 자연적 입지로 인해 도이 즈엉(Noai Doong), 무이 네(Muoi Neu), 케 가(Khea Gaø) 등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이름난 관광지가 되었다. 오늘날 리조트가 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무이 네(Muoi Neu)란 지명도 어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이(Muoi)’는 ‘반도’, ‘네(Neu)’는 ‘피신하는’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즉 폭풍이 불 때 어선들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는 반도란 의미다.
판 티엣의 전통적인 산업은 어업으로 인근바다에서 100종이 넘는 다양한 어종이 잡히고 있으며, 연간 어획고는 약 7만 톤에 이른다. 판 티엣이 베트남에서 생산되는 생선소스인 느억 맘(Noouc Maem)중 최고 품질의 산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것도 다 이러한 어업적 기반 덕분이다. 느억 맘은 생선을 재료로 만들어지는 조미료인 어장(漁醬)이다. 어장은 벼농사를 짓는 동남아지역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에 전해져서 생선 대신 곡물을 원료로 한 곡장(穀醬)으로 발전하였다. 한국은 곡장과 어장이 발달한 아주 특별한 조미료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액젓과 유사한 느억 맘은 베트남 사람들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아마도 신이 베트남 사람들에게서 느억 맘을 빼앗아간다면, 수많은 베트남인은 음식 맛과 함께 세상 살아가는 맛도 함께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늑억 맘은 생선 비린내가 풍기는 투명한 붉은 갈색을 띠며, 보통 원액에 물을 타 희석한 후 여기에 설탕과 식초, 잘게 썬 파, 고추, 후추 등을 넣어서 느억 쩜(Noouc Chaam)형태로 만든 것을 먹는다. 느억 쩜은 얼큰하면서도 시큼한 여운이 진하게 느껴지는 오묘한 맛을 지니고 있다.
느억 맘은 우기 끝 무렵인 11월에 많이 잡히는 생선과 동일한 양의 소금을 섞어서 8개월 정도 방치하여 발효시킨 후 액체를 분리하여 만든 것이다. 8개월 동안 숙성 용기 속에서 생선단백질이 가수분해 된 액체를 모아서 1차로 거른 것이 가장 질이 좋은 늑억 맘이 된다. 남은 생선찌꺼기에 소금을 섞고 30일간 발효시킨 후 다시 2차로 거른다. 또 남은 생선찌꺼기에 소금물을 넣고 큰 솥에서 끓여 3차로 거르고, 마지막까지 남은 생선찌꺼기는 가축의 먹이나 비료로 사용한다. 늑억 맘은 생산공정에서 버리는 것 한 가지 없이 생선의 진까지 몽땅 쏙 빼먹는 지독한 구두쇠다. 느억 맘 중에서 멸치를 재료로 써서 생산된 것은 한국인들도 거부감 없이 쉽게 먹을 수가 있다. 판 티엣에서는 연간 16백만 내지 17백만 리터의 늑억 맘을 생산해 베트남 전국각지에 공급하고 있다.
판 티엣에서 전통 산업인 어업과 관계가 깊은 역사유적을 꼽으라면 응으 옹(Ngo OAng, 어부라는 뜻)거리에 있는 반 투이 뚜(Vain Thuuy Tuu, 萬水秀, 실제 현판은 한자를 모르는 사람의 실수였는지 ‘萬’자의 좌측에 삼수변이 붙어있는 알 수 없는 한자와 ‘水’와 ‘秀’의 순서가 바뀌어 표기되어 있음.)사당을 들 수 있다. ‘반(Vain)’은 어부협회를 뜻하는 ‘반 짜이(Vain Chaøi)’에서 온 것으로 어부협회에서 이 사당을 건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이 뚜(Thuuy Tuu, 水秀)’는 아름다운 바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또한 어부의 생활과 관련이 깊다. 이 사당은 까 옹(Cau OAng, 고래)을 모시기 위해 1762년에 세워졌는데, 고래는 어부들에게 고기가 많은 곳과 태풍이 오는 것을 알려주는 영물로 인식되어 남 하이(Nam Haui, 南海)신으로 숭배를 받고 있다. 현재 100개 이상의 고래 해골들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중 절반이상이 100년에서 150년 정도 된 것들이고, 가장 큰 고래 해골은 특별한 숭배대상으로 200년 정도 된 것이라고 한다. 응우옌왕조에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 사당을 지원했었다. 그 이유는 떠이 썬(Taay Son, 西山) 농민반란 때 응우옌왕조의 장수와 군사들이 바다에서 고래로부터 수 차례 구조를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유물 중에는 1872년 응우옌왕조의 뚜 득(Toi Nouc, 嗣德) 황제 때 주조된 동종도 있고 티에우 찌(Thieau Tro, 紹治), 뚜 득, 동 카인(Noang Khaunh, 同慶), 주이 떤(Duy Taan, 維新), 카이 딘(Khaui Nonh, 啓定) 등 여러 황제들이 발행한 24건의 칙령들도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가치로 인해 1996년 베트남 문화공보부는 반 투이 뚜사당을 국가보호 유적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 사당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두 차례 지역 어민들이 모여 한국의 동제(洞祭)와 유사한 레 호이(Lea Hoai, 禮會)를 개최하고 있다. 빈 투언성에는 짬족들의 고래숭배 풍습에서 유래된 바 짜오(Bau Trauo, Noa Linh이라고도 함.)라고 하는 전통극도 전해지고 있다.
판 티엣에 비엣(Viet, 越)족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693년 응우옌 정권의 장군, 응우옌 흐우 까인(Nguyean Hoou Caunh, 阮有耿)이 군사들을 이끌고 남정하던 과정에서 주둔한 이후부터였다. 판 티엣이 농업과 어업을 통해 생산된 풍부한 물자들을 팔기 위해 항구로 발전하게 되자 18세기경에는 중국인들이 상업활동을 목적으로 이 지역에 도래하였다. 중국인 이주민들이 1770년에 세운 쯔아 옹(Chuøa OAng)사당은 빈 투언성에 있는 중국사원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이다. 쯔아 옹은 쯔아 꾸안 꽁(Chuøa Quan Coang, 關帝廟)으로도 불린다. 그 이유는 이 사당에서는 관우(關羽)를 숭배하고 아주 커다란 관우상(關羽像)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에 있는 호찌민, 호이 안(Hoai An), 판 장(Phan Rang) 등 중국인 집단 거주지역에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들이 있다. 왜 해외로 진출한 중국상인들이 의리의 신인 관우를 숭배하게 되었을까? 관우의 고향은 중국 산서성 하동에 있는 해현(解縣)이라는 곳으로 이곳에는 해지(解池)라고 하는 아주 큰 염호(鹽湖)가 있다. 전근대 시대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금에 필적하는 아주 귀중한 물품이었다. 이 해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팔면서 상업계에 화려하게 등장한 이들이 그 유명한 산서상인(山西商人)이었다. 달리 진상(晉商)이라고도 불리는 산서상인은 자신들의 고향 출신 관우를 특별히 보호신으로 숭배했는데, 이러한 관우숭배 풍습이 다른 중국상인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관우가 상인들에게 숭배된 또 다른 이유는 관우의 칼이 아주 날카로웠는데, 날카로울 ‘이(利)’자는 이익 또는 이윤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관우는 ‘의리의 신’뿐만 아니라 ‘재부의 신’으로도 숭배되었다. 쯔아 옹에는 중국 광동에서 주조된 오래된 종이 보관되어 있으며, 구정(Teat) 때는 인근지역 중국계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가족과 친척들의 복을 기원한다.
판 티엣에는 꽝 동회관(Hoai Quaun Quaung Noang, 廣東會館, 1885년에 건립), 찌에우 쩌우회관(Hoai Quaun Trieau Chaau, 潮州會館, 1845년에 건립), 꾸인 푸회관(Hoai Quaun Quyønh Phuu, 瓊府會館, 19세기에 건립) 등 중국상인들이 역동적으로 활동한 자취가 남아있다. 이들 중 꽝 동회관과 찌에우 쩌우회관은 광동지방 출신 상인들이 세운 것이고 꾸인 푸회관은 해남지방 출신 상인들이 세운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베트남에서 중국상인들이 상업활동으로 명성을 날렸던 호이 안, 호찌민, 판 티엣 등에 “ㅇㅇ회관” 형식의 사당이 많이 존재하는 것을 무척 궁금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중국상인들이 1970년대 한국에서처럼 새마을운동을 벌여 “ㅇㅇ회관”을 건립한 것은 분명 아닐 테니 말이다. 대개 “ㅇㅇ회관”은 객지에 거주하는 ㅇㅇ출신 동향인들이 건립하여 동향인의 집회와 투숙에 이용되는 장소였다. 또한 자기업종의 보호신, 조사(祖師) 또는 출신지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판 티엣에서 소개하려는 곳이 한 곳 더 있으나 순서를 바꾸어 먼저 무이 네지역을 둘러보고 이 글 말미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무이 네는 판 티엣에 속해 있으나 그 곳에 가려면 판 티엣에서 북동쪽으로 다시 22Km를 더 가야 한다. 판 티엣에서 무이 네 방향으로 7Km를 가면 바다를 배경으로 시원한 자태를 드러내는 꼬(Co)산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7년 전 필자에게 꼭 가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던 짬탑이 서 있던 바로 그 산자락이다. 꼬산에서 흘러내린 바 나이(Baø Naøi) 언덕일대는 러우 옹 호앙(Laau OAng Hoaøng) 즉 왕자의 성(Prince’s Castle)이라 불린다.
1911년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후손인 드 몽펭시에(De Montpensier)가 관광과 사냥을 목적으로 이 지역을 찾았다가 수려한 산세와 아름다운 풍광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는 빈 투언성 행정당국을 졸라 약 180평의 땅을 구입해 1911년 2월 21일 공사를 시작하여 1년 뒤에 13개 방을 가진 멋진 빌라를 완공하였다. 당시 이 빌라는 빈 투언성에서 가장 신식의 서양식 건축물이었다. 판 티엣 사람들은 이 때부터 빌라가 있는 언덕을 왕자의 성이라 불렀다. 드 몽펭시에의 빌라는 건축되는 과정에서 식민제국주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 빌라는 포 샤 누(Po Sha Nu) 짬탑과 100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빌라건축에 소요되는 자재들을 운반하기 위해 포 샤 누탑을 둘러싸고 있던 담장과 정문을 헐어버린 것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침략에 격렬하게 저항했던 애국시인, 응우옌 통(Nguyean Thoang)이 잠들어 있는 곳에 프랑스 왕손이 빌라를 짓고 왕자의 성이란 지명이 붙여졌다는 것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응우옌 통은 1827년 5월 28일 현재 롱 안(Long An)성 지역인 쟈 딘(Gia Nonh)성 빈 타인(Binh Thainh)현에서 태어났다. 1849년 약관인 22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응우옌 왕조의 관리가 되었다. 1859년 프랑스 군대의 코친차이나(Cochinchina) 동부 3성 점령시에는 똔 텃 티엡(Toan Thaat Thieap)의 참모로 자원하여 대불항쟁에 적극 참여했다. 1862년에는 빈 롱(Vonh Long)성의 시학관으로 재직하면서 빈 롱성 반 미에우(Vaen Mieau, 文廟) 재건사업을 추진하는 일방, 당시 프랑스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을 펼치고 있던 쯔엉 꽁 딘(Troong Coang Nonh) 등 민족주의자들과 연계를 구축하여 반불활동을 계속 펼쳤다. 프랑스군이 그의 반불활동을 빌미로 스승인 보 쯔엉 또안(Voo Trooøng Toaun)의 묘를 더럽힐 것을 우려해서 스승의 묘를 쟈 딘에서 벤 쩨(Bean Tre)로 옮겼다. 마침내 1867년 코친차이나 서부 3성마저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응우옌 통과 민족주의적 유학자들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협조를 거부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응우옌왕조의 관할지역인 빈 투언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빈 투언에 머물던 그는 응우옌 왕조 조정의 부름을 받아 훼(Huea)의 꾸억 뜨 지암(Quoac Tou Giaum, 國子監)에서 부이 으억(Buøi Oouc), 호앙 주이 떤(Hoaøng Duy Taan) 등과 함께 베트남 역사적 기원부터 허우 레(Haau Lea, 後黎) 말까지 편년체 역사서인 ≪컴 딘 비엣 쓰 통 지암 끄엉 묵(Khaam Nonh Vieat Sou Thoang Giaum Coong Muic, 欽定越史統監綱目)≫ 편찬에 참여했다. 응우옌 통은 프랑스가 베트남 전역에 식민지 지배체제를 구축한 그 이듬해인 1884년 7월 7일 57세를 일기로 빈 투언에서 사망했다. 대쪽 같은 민족주의자요 유교지식인이었던 그에게 프랑스의 식민지배라는 현실은 받아들이기에 너무 가혹했을 것이다.
응우옌 통의 무덤이 있는 바 나이(Baø Naøi)언덕에 서 있는 3개의 짬탑은 천공(天空)을 향한 노스탤지어(Nostalgia)를 간직한 채 지난 일천수백년간의 모진 풍파를 견디며 인간사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봐 왔다. 이 3개의 짬탑을 포 샤 누(Po Sha Nu)탑이라고 부르며, 달리 푸 하이(Phuu Haøi)탑이라고도 한다. 짬언어로 ‘포(Po)’는 왕 또는 지배자를 의미하며, ‘포’는 짬파왕, 짬탑, 숭배하는 신 등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었다. 빈 투언성과 닌 투언성 등에 거주하는 짬족들의 신앙과 전승에 의하면 포 나가르(Po Nagar 또는 Po Yang Inu Nugar)여신이 최고 신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아마도 짬족사회가 모계적인 요소가 강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포 나가르여신의 딸인 포 샤 누(Po Sha Nu)는 달리 포 카 아나이(Po Cah Anaih)라고도 불리는데, ‘샤(Sha 또는 Cah)공주’란 의미다. 원래 푸 하이탑에서 주민들이 숭배하던 대상은 포 나가르, 포 샤 누 그리고 역시 포 나가르여신의 딸로 ‘쥐의 신’인 포 비아 티쿠(Po Bia Tikuh) 3명의 여신이었다. 푸 하이탑은 짬파왕국이 지배했던 영역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푸 하이탑을 구성하고 있는 3개의 탑은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양식으로 건축된 것으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건축물이다. 8세기경에 세워진 푸 하이탑은 크메르왕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있어서인지 크메르(Khmer)탑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푸 하이탑은 현존하는 짬탑 중에서도 아주 이른 시기에 건축된 것으로 미 썬(Myo Son)에 있는 일부 짬탑 유적과 판 장(Phan Rang)에 있는 호아 라이(Hoøa Lai)탑이 거의 같은 시기의 것이다. 짬탑의 건축양식 분류에서 이 탑들을 ‘호아 라이(Hoøa Lai)’양식이라고 명명하였다. 3기의 푸 하이탑 중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한 탑 내부에는 시바(Shiva)신의 상징인 리가(Liga)와 요니(Yoni)가 모셔져 있으며, 인근지역에서 많은 주민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최근 푸 하이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벽돌공장 유적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생산된 벽돌을 사용해서 푸 하이탑을 세운 것으로 공장에서 생산된 벽돌을 운반했던 수로로 추정되는 유구도 발견되었다. 이 벽돌공장 유적의 발견으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한 가지가 해결되었다. 일부 학자들이 주장한 굽지 않은 상태의 흙 벽돌로 먼저 탑을 세운 후 마른 나무를 쌓아 불태워 탑 구조물을 단단하게 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짬탑을 건축할 때 이미 구워진 흙 벽돌을 사용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무이 네는 최근 한국 TV에 여러 차례 소개된 덕분에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국인뿐 아니라 한국에서 직접 무이 네를 찾는 관광객들도 꽤 많은 편이다. 손을 담그면 금방이라도 비취색이 묻어날 것 같은 바다, 너무 고와서 발 디디기가 두려운 모래사장, 적당히 그을린 건강미 넘치는 아가씨의 싱그러운 미소---. 아마 이런 상상을 하면서 무이 네에 왔다면 실망할 것이 틀림없다. 솔직하게 말해서 무이 네는 모두가 꿈꾸는 영화 속에 나오는 그런 조건을 갖춘 휴양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이 네에는 도심생활에 찌든 때와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씻어주는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야자수는 너무 질서정연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무질서하지도 않다. 자연 그대로의 적당한 균형과 긴장, 그것이 무이 네 해변의 독특한 매력이 아닐까 한다. 무공해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무이 네 사람들 역시 순수하기만 하다. 영원과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의 깊은 눈빛은 아니지만 그 눈 속에는 삶과 자연에 대한 때묻지 않은 사랑이 담겨있다.
무이 네에는 해변과 도로 사이에 위치한 리조트들이 입구에서부터 혼 점(Hoøn Rom)까지 꿰어진 구슬처럼 계속 이어진다. 리조트들의 분포도를 보면 많은 구슬들이 꿰어진 기다란 목걸이가 연상된다. 관광객들은 무이 네에 있는 어느 리조트에 묵든 도심지에 있는 오성호텔에 투숙한 것보다 더 큰 만족을 얻을 것이 틀림없다. 무이 네를 감싼 밤의 장막이 거두어질 무렵 밀려오는 파도소리 때문에 새벽잠에서 깨어 해변에 나가보았다. 검붉은 구름 덩어리를 머리에 이고 수평선 저 멀리 바구니 배들이 점점이 떠 있다. 갈매기는 배들 사이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날개짓을 하고, 세찬 바람에 등을 떠밀린 파도는 몸을 사리지 않고 해안가의 암석에 부딪쳐 흰 포말로 노래하고 있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룹사운드 썰물의 ‘밀려오는 파도소리’란 곡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무이 네는 매력적인 해변으로도 유명하지만 주변에 모래언덕들이 마치 사막처럼 펼쳐져 있어서 관광객들뿐만 아니라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도이 깟(Noai Caut)이라 불리는 무이 네의 사막지형은 연강우량이 판 티엣의 절반 정도인 건조한 기후와 세월의 피곤함을 잊고 줄기차게 모래를 실어 나른 세찬 바람 덕분에 생성되었다. 혼 점(Hoøn Rom)리조트 가까이 위치한 모래언덕을 향해 접근하자 마대포대 같은 것을 든 어린 모래썰매 도우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아이들 숫자와 같은 3명의 도우미를 선정하자 나머지는 실망스러운 눈초리를 하면서 손님을 찾으러 다른 곳으로 갔다. 평지에서보다 몇 곱절의 체력을 소모하면서 벌 꿀 같은 태양빛이 내리쬐는 모래언덕의 능선 몇 개를 숨차하면서 겨우 올랐다. 뒤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양 옆으로는 붉은 모래언덕이 타클라마칸 사막처럼 연이어져 있다. 일찌기 보지 못했던 장관에 모래능선을 오르던 피곤함은 느낄 겨를조차 없다. 가파른 모래능선에서 모래썰매 도우미들의 마대자루 운전에 몸을 맡긴 아이들은 색다른 경험에 신이 나 있다. 모래썰매 타기를 마치고 내려오다 모래썰매 도우미와 열정적으로 가격을 흥정하는 서양 사람들을 목격하였다. 아마도 이들은 베트남에서 사전 흥정의 중요성을 충분히 체득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이 네를 둘러싼 사막지대에서 꼭 방문해야 할 또 다른 명소는 쑤오이 띠엔(Suoai Tiean, 선녀 샘)이다. 아주 독특하고 신비로운 형상의 모래언덕과 바위절벽 사이로 맑은 물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아담한 계곡 지형이다. 특히 바다에서 발원지까지 아름다운 물길이 이어지는데 동행자들끼리 정답게 얘기하면서 걸어가면 꽤나 운치가 있는 곳이다.
무이 네에서 다시 판 티엣으로 넘어가는 왕자의 성 고갯마루에 서서 바람결에 실려오는 한 막 뜨(Haøn Maec Tou)와 몽 껌(Moang Caam, 또는 Moang Huyean)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대어본다. 베트남 현대 낭만시의 개척자인 한 막 뜨는 본명이 응우옌 쫑 찌(Nguyean Troing Tri)로 1912년 9월 22일 꽝 빈(Quaung Binh)성 동 호이(Noang Houi)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판 보이 쩌우(Phain Boai Chaau, 潘佩珠)를 만나고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 막 뜨는 베트남 현대문학사에서 낭만적인 시풍을 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터 디엔(Tho Niean, Tho는 시를 Niean은 癲, 즉 미친 것을 의미)’이란 시파(詩派)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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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 디엔’파는 끝없는 고통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뇌의 소리와 두려움에 대한 이미지를 새로운 시적 언어로 재구성해 암울한 세계를 표현하였다. 중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베트남 사람들에게 널리 애송되는 한 막 뜨의 빼어난 낭만적 시어들은 많은 여인들과의 사랑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사랑한 여인들 중 일부는 직접 만나보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편지만 서로 주고받으며 한번도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해 이름만 알고 있는 경우였다. 청년시절에 프랑스 유학을 갈망했으나 식민당국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사이공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한 막 뜨 외에도 레 타인(Lea Thanh), 퐁 쩐(Phong Traan), 민 주에 티(Minh Duea Tho) 등의 필명으로 글과 시를 썼다. 가혹한 운명의 소용돌이는 예기치 않게 그를 찾아와 1936년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 한 막 뜨가 질병요양을 위해 무이 네에 왔을 때 몽 껌이란 여인을 운명적으로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바다와 달의 자태를 감상하면서 몽 껌을 기다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한 막 뜨가 사랑한 여인들은 여러 명이 있지만 그의 인생과 시에서 몽 껌만큼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여인은 없을 것이다. 음악가 쩐 티엔 타인(Traan Thiean Thanh)은 “한 막 뜨의 마음속 이야기(Tieang Loøng Haøn Maec Tou)”란 작품에서 한 막 뜨의 몽 껌에 대한 사랑을 “오! 몽 껌, 우리 사랑에 대해 너무 비탄하지 마오. 우리에게 더 이상 행복은 없기에, 나는 우리가 다음 세상에서 함께 살 것을 약조할 뿐이오. 외로움과 나의 이 흉한 몰골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구려!”라고 절절하게 묘사했다. 한 막 뜨는 몽 껌과의 사랑을 현실에서 완성하지 못한 채 1940년 10월 11일 카인 호아(Khaunh Hoøa)성 꾸이 호아(Quy Hoøa)병원에서 28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 막 뜨는 천형의 슬픔과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보리피리’, ‘파랑새’, ‘전라도 길’ 등으로 그 한을 토해낸 비운의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을 연상케 한다. 호찌민TV에서 2005년 한 막 뜨의 비극적 생애와 예술혼을 조명하는 드라마를 제작, 방영하였고, 2006년에는 하노이 청년극단(Youth Theatre)이 ‘한 막 뜨의 마지막 100분(100 Phuut Cuoai Cuøng Cuua Haøn Maec Tou)’이란 연극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그밖에 한 막 뜨에 관한 대중가요 여러 곡과 영화도 있다. 한 막 뜨가 죽은 지 한 갑자(甲子)가 지났음에도 베트남 사람들의 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호찌민으로 귀환하는 길에 방문한 둑 타인(Duic Thanh)학교를 마지막으로 소개하면서 어느 정도 길이가 있다고 느껴지는 이 기행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늑억 맘 냄새가 코끝을 타고 흐르는 판 티엣의 중심지 까 띠 강변에 둑 타인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앞에서 소개했던 반 투이 뚜사당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둑 타인학교는 판 쭈 찐(Phan Chu Trinh, 潘周楨) 등에 의해 세워진 하노이의 ‘동 낀 응이아 툭(Noang Kinh Nghoa Thuic, 東京義塾)’을 본떠서 1907년에 애국시인 응우옌 통의 두 아들, 응우옌 쫑 로이(Nguyean Troing Loai)와 응우옌 꾸이 아인(Nguyean Quyu Anh)이 설립한 학교다. 둑 타인학교는 당시 베트남 중부지역에서 훼(Huea)의 꾸옥 학(Quoac Hoic)을 제외하면 첫 번째로 세워진 근대식 학교였다. 베트남의 국부로 죽어서도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청빈한 삶의 대명사 호찌민(Hoa Chi Minh, 胡志明) 주석은 항불투쟁에 적극 참여하다 1908년 꾸옥 학에서 퇴학을 당했다. 호 주석은 그 후 계속 남쪽으로 쫓기다 1910년부터 1911까지 약 8개월간 둑 타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둑 타인학교 재직할 때 호 주석은 응우옌 땃 타인(Nguyean Taat Thaønh)이란 이름을 썼었다. 1910년 당시 둑 타인학교에는 응우옌 땃 타인을 비롯한 7명의 교사와 약 6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응우옌 땃 타인은 학생들에게 한문과 꾸옥 응으(Quoac Ngoo)를 가르쳤으며, 둑 타인학교에서 가장 젊다는 이유로 무술교사와 다른 잡무도 맡았다. 응우옌 땃 타인은 1911년 초 둑 타인학교를 그만두고 사이공으로 떠났다. 그가 사이공으로 간 것은 프랑스 식민당국에 의해 관직에서 해임된 부친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응우옌 땃 타인이 둑 타인학교를 떠나고 얼마 후 프랑스 관헌이 와서 학교를 잠정 폐쇄하였고 결국 1912년에 이르러서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둑 타인학교는 오랫동안 방치되어오다 응우옌 땃 타인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1978년부터 1980년에 걸쳐 학교건물을 재건하였다고 한다. 둑 타인학교는 1996년에 베트남 문화공보부에 의해 역사문화유적으로 등록되었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호찌민 주석의 혁명적 생애를 기리고 각종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기 위해 빈 투언성 호찌민박물관을 호 주석과 역사적 인연을 가진 둑 타인학교 바로 옆에 세웠다. 이 박물관은 1983년 착공, 3년간 공사를 계속해 호찌민 주석의 탄생일에 맞추어 1986년 5월 17일 개장한 것이다.
출처: VNN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