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왜곡된 우리역사

우리민족과 북방의 민족들

작성자씽씽|작성시간13.02.11|조회수326 목록 댓글 0

우리민족의 형성

우리민족은 선사시대부터 정착해 농경을 하며 살고 있던 사람들(고인돌, 남방계)와,

고구려, 백제는 만주 동쪽에 살며 인종적으로 퉁구스계이며 수렵과 농업을 주로 하던 부여(말갈)계로 이루어 졌고,

신라는 알타이 산맥 부근이 본거지인 순수 유목을 주로 하던 돌궐(흉노)가 주류를 형성해 오늘날의 우리 민족을 이루었다. 

 

 

말갈족(靺鞨族)- 읍루, 숙신, 물길, 말갈, 넓은 의미의 몽골족에 포함

오늘날 중국, 한국, 러시아의 국민이 이에 해당되며 말갈이라는 표현은 중국이 시대에 따라 구분해 불렀을 뿐 민족보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해 부른 말로 우리와 같은 고대 한민족인 예족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예족과 맥족을 구분하지 않고 예맥족 전체를 한부족으로 불렀다. 

 

말갈(靺鞨,Mohe, 모허)족은 6~7세기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주나라 때에는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후 고구려, 발해에 복속했었으며, 발해 멸망 이후 요나라 때부터 여진(女眞)이라 불렸다가 청나라 때에는 만주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이 신라, 백제와 교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다산 정약용은 이 시기 등장한 "말갈"을 예족(濊族)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말갈족은 후에 여진족으로 불렸으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지배를 당하지만 아구다가 부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확장해 금나라를 세우고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하였다.

고조선은 예맥족이 주류였고, 부여는 예맥족, 고구려는 맥족, 발해는 예맥족.

 

발해와 고구려를 함께 연구한 한규철 경성대 교수(국내 제1호 발해학 박사)는"'말갈'이라는 이름은 자칭이 아닌 타칭이며, 고구려 변두리에 살던 사람을 이르던 말일 뿐 민족이라는 개념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말갈은 고구려에서 수도였던 평양성 사람을 국인(國人)으로 불렀던 것에 대칭해 고구려 변방주민을 부르던 비칭”이라고 하였다. 말갈이라는 호칭이 중국사서에 6세기 무렵 갑자기 등장하는데다 그 영역이 숙신과 읍루의 거주지였던 쑹화(松花) 강 중하류를 넘어 만주 전역과 한반도 북부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 교수는 "`말갈(靺鞨)'이라는 부족명은 중국이 이민족을 경시해 붙여준 명칭"이라며 사실은 우리와 동일한 고대 한민족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말갈족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예맥계 속말말갈이 발해 건국에 기여했는데 속말수(粟末水.지금의 제2쑹화강)에서 유래된 속말말갈은 부여 계통으로 고구려와 혈연, 지역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수한 철기문화를 자랑했다. 삼국시대에도 고구려는 고구려에 편입되지 않은 말갈부족과 연합해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지역명에 따라 말갈 7부라고 불렀는데

속말말갈 : 지린시

백산말갈 : 지린(길림)성- 바이산(백산) 및 옌볜 조선족 자치주, 연해주-하산/하산스키 군

우루말갈 : 연해주-우수리스크

불열말갈 : 헤이룽장성-지시(鷄西市) 및 무단장 

천리말갈 : 헤리룽장성-하얼빈

월희말갈 : 연해주-달네레첸스크

흑수말갈 : 헤이룽장성- 솽야산, 자무쓰 허강 시(鹤崗市),이춘 시(伊春市), 하바롭스크-비킨 뱌젬스키 군

 

이외에도 백돌부(伯咄部), 안거골부(安車骨部), 불열부(拂涅靺鞨), 호실부(号室部) 이 있었다.

말갈(靺鞨)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계 부족이며,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 백돌부(백돌말갈)는 부여 계통(濊貊族)이거나 점차 고구려에 동화한 부족으로 여겨진다.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직접지배를 받거나 간접지배를 받게 된다. 이외에 사모말갈 (思慕靺鞨), 군리말갈 (郡利靺鞨), 굴열말갈 (窟說靺鞨), 막예개말갈 (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거란족(契丹族)

거란은 중국 북부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천여년간 중국의 역사 무대에서 활약하였다. 

'거란'은 그 민족이 자신들을 일컫는 말로서 '연철' 또는 '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은 선비족 우문부(宇文部)의 후예인데, 우문부 안에는 일찍이 일부의 흉노인들도 융화되어 있었다. 위진 시기에는 선비의 3대부인 우문부 · 모용부(慕容部) · 단부(段部)가 서라목륜하(猩木倫河)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호간에 오랫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다가 결국 우문부가 모용부에게 패하여 그들의 우두머리는 고비사막으로 이주하였으며, 거기에 남아있던 부락은 거란과 해(奚)에 의해 양분되었다. 남북조 시기에 거란의 8부는 거란 사회의 첫 번째 부락연맹을 결성하였다. 

 

907년 8부 중의 하나인 질랄부(迭剌部)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연맹의 장으로 추대되었다. 916년 아보기는 주연(酒宴)을 빌어 반대파를 제거한 후 나라를 일으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거란이라 하였다. 아보기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아들 덕광(德光)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야율덕광(耶律德光)은 후진(後晋) 석경당(石敬塘)에게서 유운(幽雲) 16주를 빼앗아 국력이 크게 증강되었으며, 947년에는 다시 국호를 대거란에서 요(遼)로 고쳤다. 

 

거란인들은 유목 위주의 목축업에 종사하면서 초지는 공유하고 가축은 개인이 소유하였으며, 왕실 소유의 가축은 관청에서 별도로 관리하였다. 이 외에 그들은 농업과 수공업도 경영하였는데, 그들이 제조한 마구(馬具)는 한족사회에도 대단한 인기를 끌어 '천하제일'이란 칭호를 얻었다. 거란인들은 모전(毛氈)으로 만든 천막집에서 생활하였으며, 초기에는 문자가 없었으나 건국 후에 한자(漢字)와 회골자(回字)를 모방하여 거란 대(大) · 소자(小字)를 창제하였다. 

 

이 문자는 요나라 때에 관청에서 통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금원(金元) 시기에도 계속 사용되어 3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거란인들은 샤머니즘을 숭배하였는데, 그들이 가장 숭배한 신은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이었다.(거란의 선조들이 숭배한 씨족 토템은 백마를 탄 남자와 흑우를 부리는 여자였다) 봉건적인 요소와 대외 교류의 증대를 따라서 불교와 도교도 점차 흥성하기 시작하였다. 

 

요대(遼代) 말기에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기세를 떨치고 일어나 금나라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서북의 각 부족과 함께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여 구소련 경내의 토크마크(托克馬克)에 서요(西遼)를 세웠다. 서요는 약 100여년간 지속되었는데,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그 지역의 민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교류하면서 중앙아시아 민족들에게 그들의 민족 성분을 융화시켰다. 

 

원(元)이 금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거란 여진(女眞)과 북방의 한족은 모두 한인(漢人)으로 통칭되었다. 거란인은 몽고족 · 한족들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점점 몽고족 · 한족이나 북방의 다른 민족의 한 부분이 되어갔다. 지금은 비록 거란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이 중국 역사에 이바지한 공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돌궐족, 흉노족(突厥族)

현재는 몽골(270만명), 중국(580만명), 러시아(100만명)에 거주하고 있다.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몽골 고원지역 주로 유목생활하였고 돌궐문자(튀르크어)도 있었다.

오늘날 터키 헝가리, 불가리아, 카자흐스탄,우주베키스탄, 몽골, 키르키스탄의 국민, 투르키스탄주민(신장위그르지역) 이에 해당한다. 우리와는 신라 김씨 왕족이 3~4세기 북방에서 내려온 흉노족이였다는 설이 있다. 신라에서 나오는 적석목곽분, 각배, 금관; 로만글라스는 흉노의 표시물이고 왕들에 마립간을 부쳤는데 이는 유목민족의 칸과 같은 어원이다. 

 

돌궐(突厥,Turkistan) 또는 괵튀르크(Gokturk)는 천산 산맥에서 발원한 철륵의 하위 부족이다.

돌궐은 튀르크의 가차(假借)식 표기이며,돌궐은 대개 흉노(훈)의 별종이고 흉노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557년의 영토는 6,000,000km²이다. 괵튀르크는 하늘의 튀르크 혹은 천상의 튀르크라는 의미이다.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 북방 초원의 강자로 등장한 세력은 돌궐이었다. 중국이 오랜 분열기를 마감하고 589년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했을때, 당시 북방의 돌궐과 수나라가 대치하게 되었다. 북방의 강자 유연(선비족)을 멸망시킨 새로운 패자 돌궐은, 중국과 대립관계가 된다.

 

7세기 후반, 돌궐이 동돌궐과 서돌궐(신장)로 분열되었을때 수나라는 서돌궐이 동돌궐을 공격하도록 부추겨 동돌궐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에 동돌궐은 수나라에 신속하고 둘 사이는 군신관계가 성립되었다. 수나라와 돌궐 사이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이어서 고구려 침략에 실패한 수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당나라가 건국되는데, 당나라가 건국될 당시, 돌궐은 다시 세력을 회복해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돌궐의 막강한 군사력에 눌린 당나라는 돌궐에게 신하로써 복종하고 양국의 군신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돌궐에 내분이 일어나고 자연재해로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당과 돌궐의 관계는 역전된다. 당은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을 분열시키는데 성공하고, 돌궐의 힐리 카안(頡利 可汗, Kieli Kağan, Hieli Kağan, İliğ Kağan)은 당나라에 신속하면서 당과 돌궐사이에 군신관계가 성립한다. 중국과 돌궐의 관계를 보면 주도권 관계가 서로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분열되면 중국이 돌궐에 복속되고, 돌궐이 분열되면 돌궐이 중국에 복속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이 우위인 상태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이는 돌궐 자체가 내부 결속력이 약해 늘 내분의 가능성을 안고 있었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중원 왕조는 이이제이 정책을 써서 돌궐의 분열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돌궐민족지도(터키)

 

 

 

몽골족

현재의 몽골족은 동호족을 기본으로 북방에 존재하던 여러 이민족 북적, 산융, 흉노족, 돌궐족의 혼혈 민족이다.

중앙아시아 북부을 장악한 흉노족은 크게 아리아계 유럽 인종과 몽골로이드 아시아 유목 민족이 있었다. 흉노 무덤에서는 아리안과 몽골로이드 유골이 함께 출토되었다. 흉노족은 지배 세력은 아리아 종족이었으며, 하부 피지배 민족으로 말갈, 갈족, 동호족이 있었다.

4~5세기 아틸라의 유럽 정복으로 상징되는 훈족의 서진, 그리고 중국에 남하하여 5호 16국 시대를 기점으로 흉노족은 사라지게 된다. 이 시점에 동호족이 흉노족이 중심지였던 바이칼, 울란바타르로 이동하였다. 이후 동호족과 이 지역에 남아 있던 흉노족, 말갈, 갈족, 타타르여진족만주족, 중국에서 넘어온 한족, 러시아인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몽골 민족에 흡수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