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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하서로> 명명

작성자하늘연못|작성시간10.02.22|조회수206 목록 댓글 1

20일 광주 북구청장은 운암 사거리에서 울산김씨대종회 광주·전남지역종친회 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호남유일 문묘 배향된 유학자 하서 김인후 선생의 아호를 딴 하서로 표지석 제막식을 가졌다.
/광주 북구 제공

 

출처: http://namdonews.com/?section=%EC%82%AC%EB%9E%8C%EB%93%A4&uid=277237&xmode=contents

 

 

 

 

 


김인후(1510~1560)의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 혹은 담재이다. 본관은 울산.

1510년(중종 5)에 장성현 대맥동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1560년(명종 15)에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부터 장성의 신동이요 천하 문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다가

18세 때에 기묘사화로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1483~ ?)를 찾아가 학문과 삶의 자세를 배운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4세 때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게 된다.

 

35세 때 인종은 중종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하서는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을 돌아와 후학에 힘쓴다.


사후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처사 양산보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양씨가승집인 '소쇄원사실'의 기록에 따르면

"신재 최산두가 화순 동복 적벽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고향 장성에서 학문을 배우러 나아갔는데,

이때 하서는 반드시 소쇄원에서 쉬어갔다고한다.


또한 양산보와 도의지교를 맺어 자식들을 서로 혼인시켰는가 하면

소쇄원에 이르면 달이 넘도록 갈 것을 잊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하서가 18세에 그를 만났다.

최산두가 살고 있는 동복에 가기 위해서는 소쇄원 인근을 통해 가야 했는데,

하서는 양산보를 잊지않고 반드시 소쇄원을 오며가며 들렸던 것이다.


결국 둘은 사돈 관계가 되어 도의와 우정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16세기 당시 소쇄원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은 주인인 양산보였겠지만,

소쇄원을 시로 표현하여 나타내 보여준 사람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소쇄원과 관련된 시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작품은 바로 '소쇄원 48영'이다.

 

출처: http://blog.daum.net/phaejy/12537877?srchid=BR1http%3A%2F%2Fblog.daum.net%2Fphaejy%2F12537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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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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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웅비한국 | 작성시간 10.02.24 양산보의 작품이 아니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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