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국보 (16) 고려의 기상이 서려있는 ‘천리장성’...압록강에서 동해안까지 연결
남북경협뉴스 2022.09.14
고려 덕종떄 거란과 여진의 침략막기 위해 건설...국경선외에 이민족과 혈통·문화적 차이 구분선 역할도
고려 고려덕종때 12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천리장성은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이어져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막아 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천리장성은 고려가 11세기초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축조되었다.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북한의 국보 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구려의 장성이 요동 반도에서 만주 중부까지 이어져 있다면, 고려의 장성은 압록강 어귀(강동6주)에서 평안남도 북단을 가로질러 함경남도 함흥인근 도련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이 위치에 세웠던 이유 중 하나는 개마고원을 동북방향으로 앞세워 짓고 서북방향을 압록강을 경계로 지어서 방어적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중국에 직접 종속되는 일을 피할 수 있던 두가지 지정학적 요인이 바로 압록강과 개마고원이다.
압록강은 상당히 깊고 넓은 강이라, 강 건너편에 수비 병력을 배치하면 방어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개마고원은 그 험준함 때문에 그쪽 방면으로는 공세가 굉장히 제한되므로, 고려는 방어력을 압록강 전선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개마고원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로는 압록강을 돌파한다고 해도, 고려 내부로 진군했다가 측면에서 공격당할 위험이 너무나 크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고려 천리장성은 압록강 흥화진(강동6주)에서 시작해 동해안 도련포로 이어져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막는 역할을 했다.
본래 고려 초 때부터 북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려 했으나 거란의 방해 등으로 실행하지 못했다가 3차에 걸친 여요전쟁이 끝난 후인 1033년(덕종 2년)에 평장사 유소(柳韶)로 하여금 성을 쌓게 하였다.
유소는 옛 석성(石城)을 수리하고 진을 두어 국방을 강화하였고 유소는 이러한 석성들을 바탕으로 축성 계획을 세웠고, 국경 각지에 산재해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새로 축조하거나 보수하여 11년이 지난 1044년(정종[13] 10년)에 완성하였다. 다만 사실상 덕종 때의 1년에 대부분을 쌓은 것으로 본다고 한다. 이에 거란이 항의했으나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은 끝까지 건설했다.
석재를 사용하였고, 기초에는 흙을 단단히 쌓아 성축을 높였으며 평지에는 양면 축조 방법, 절벽에는 절벽 그 자체를 성벽으로 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경비 초소를 두는 등 최전방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시킨 것으로 보인다.
성벽의 높이와 폭은 4m~7m(높이와 폭이 각각 25자)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성이다. 대몽항쟁 때는 어이없게 무너졌으나, 평안북도 의주군 등지에 일부 성곽은 아직도 남아있다.
평안북도 의주군 대산리 일대에는 고려때 축조한 천리장성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천리장성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국경선으로서의 의미 외에, 여진족 및 거란족에 대해 고려는 문화적·혈통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우위에 놓임으로써 이들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된다는 문화적 구분선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고려사회가 정치적·외교적·제도적으로 안정을 기하면서 천리장성은 국경선의 기능에서, 때로는 문화권의 구분선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장성은 여진족과는 혈통적 혼효를 막고, 문화적 차이를 구분하려는 구분선과 같은 기능을 갖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성 외곽에 실효지배 중이던 길주 등이 여진에게 반환된 뒤로 천리장성은 국경선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천리장성의 고유명칭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속칭 만리장성이라고 했으나 현재는 고려장성 또는 고려 천리장성이라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