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국보 (19) 몽골 1차 침략을 격퇴한 귀주성...4개월간 치열한 전투 벌어져
남북경협뉴스 2023.02.15
귀주성의 남문. 원래 문 자체는 6.25 전쟁 때 파괴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문은 1979년 북한당국이 복원한 것이다.
귀주성은 북한의 국보 60호이며 평안북도 구성시 북쪽 이구산에 축조된 성으로 귀주성이란 이름은 이구산을 감싼 성벽의 모양이 거북이 등껍질 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성종 13년(994) 훗날 탁월한 외교력으로 거란의 침략을 막은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게 한 다음 귀주성을 쌓게 했다.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 졌는데 내성은 귀주성의 본성이고 외성은 그 후에 덧붙어 쌓았다고 전해진다. 내성은 약 5km, 외성은 1,5km 정도 된다. 높이는 5m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치가 41개나 된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축조방식은 산능선의 바깥면을 깎아내고 거기에 성돌을 대는 외면 축조방식으로 쌓았으며 성돌들 사이로 삼화토로 메워 성벽이 평평하도록 만들었다. 남문과 동문, 서문, 북문터와 4개의 사이문터가 있는데 내성과 외성 사이를 잇는 지하문도 존재한다. 귀주성의 남문은 원래 것은 6.25 전쟁 당시 파괴되었고 현재는 1979년에 복원 된 것이다.
귀주성이 역사에 널리 알려진 것은 박서, 김경손, 김중온 등 고려의 맹장들이 이 성에서 몽골의 1차 침임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1231년(고종18)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살리타이 원수가 이끄는 3만명의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 내려왔다. 당시 몽골군은 본군, 남로군, 북로군으로 나뉘었는데 본군과 남로군은 개성으로 진격했고 우에르가 이끄는 1만의 북로군은 1231년 9월, 10월, 11월, 12월 등 4회에 걸쳐 귀주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몽골군의 공성전에 직면한 병마사 박서는 부대를 성의 4면에 각각 나누어 배치했다. 성의 동·서면은 삭주분도장군 김중온, 남면에는 정주분도장군 김경손, 그리고 안북부와 위주, 태주의 별초 250여 명이 또 3면으로 나뉘어졌다.
고려시대 강동6주에 속한 귀주성의 위치. 거란의 1차 침입시에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청천강 이북, 압록강 남쪽에 확보했다.
1차 공방전은 1개월 동안 치열하게 지속됐는데 몽골군은 귀주를 일시에 제압하기 위해 로 서·남·북문을 동시에 공격했으며 고려군은 때때로 성 밖으로 출격해 몽골군을 패배시켰다.
이 승리로 고려군은 자신감을 가지고 수성에 진력하게 되었다. 이후 공방전은 3개월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몽골군은 누차(樓車), 대상(臺床), 대포차(大砲車) 등 각종 공성기기를 동원했다.
하지만 고려군은 정신력과 두뇌를 동원해 방어전을 펼쳤다. 전투를 지휘하던 김경손은 몽골군이 발사한 포에 죽을 위기에 처해 자리를 옮기라는 부하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내가 움직이면 군사들의 마음이 동요한다”며 그 자리에서 지휘를 이어나갔다. 양군의 귀주 공방전은 그렇게 거의 한 달 동안 계속됐고, 지친 몽골군은 마침내 물러났다.
귀주성 전투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공성전 중 하나며, 이 전투로 인해 몽골의 초반 전략이 완전히 무너졌다. 북로군이 귀주성을 점령한 후 남하해야 했지만 귀주성에서 4개월간 발이 묶이면서 더이상의 진격이 힘들었고 남로군은 동선역 전투에서 패배하며 개성 점령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훗날 조선 후기 실학자 순암 안정복은 그의 저서 '동서강목'에서 귀주성 전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외로운 성에서 약한 군졸로 천하의 사납고 날랜 강성한 오랑캐를 막아 동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산악처럼 우뚝 서게 하였다. 우리 동방에서 성을 잘 지킨 것은 안시성 이후 또 귀주가 있으니, 박서와 김경손의 공은 작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