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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여행]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전의 한이서린 칠천량

작성자손요한|작성시간12.05.01|조회수315 목록 댓글 4

 

 

조선수군의 유일한 패전의 한이서린 칠천량

 

 

칠천도(七川島)는 경상남도 거제시의 섬이다. 동경 128°39', 북위 34°59'에 위치하며, 면적은 9.219㎢, 해안선의 길이 25㎞이다. 2000년 1월 1일에는 거제도와 칠천도 연륙교로 연결되었다.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거북이가 엎드린 모습을 닮았다. 남부 중앙 옥녀봉을 최고점으로 해안에는 곶과 만이 발달하였다. 취락은 하천 하류에 형성된 충적지에 집중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옆개해수욕장(물안해수욕장)이 있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이며, 인구는 2008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76세대, 177명이 살고 있다. 이 섬의 최고점은 남쪽 중앙의 옥녀봉으로 232.2m이다.

현재의 칠천도의 지명유래는 난중잡록원균행상기에는 온라도(溫羅島)로, 난중일기에는 온천도(溫川島), 칠천도(漆川島), 칠천량(漆川梁), 칠내도(漆乃島) 등으로 불리었다.

1012년 고려 현종 3년 특수행정공동체인 부곡이 하청에 설치되면서 칠천도에 목장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칠천도 어온리 물안 마을과 맞은편의 송진포, 실전 사이의 해협은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의 유일한 패전으로 기록된 칠천량 해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칠천도와 칠천도 인근 지역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5월부터 1594년 10월 장문포해전(장목해전)까지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둔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 해전,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견내량해전, 안골포 해전, 부산포 해전, 웅포 해전, 당항포 해전, 제1차 장문포 해전, 영등포해전, 제2차 장문포 해전 등의 전초기지였다.

그러나 조선 수군 최악의 패전인 1597년 칠천량 해전의 배경도 바로 이곳이다.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1597년(선조 30년) 음력 7월 16일 칠천도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전사한다.

1597년 음력 7월 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은 부산 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 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97년 2월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동했을 때 가덕도에서 5명이 전사하자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해서 요시라가 직접 와서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비교된다.

거제도 서쪽의 작은섬 칠천도에 상륙한 조선수군은 일본군에 야습을 당해 칠천량에서 일본수군에게 포위당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함대 대부분이 격침되고 수군도 대부분이 전사했다. 원균은 제대로 된 지휘를 하지 않은 채ㅡ기록에 의하면 선상에서 폭음을 하였다고도 한다[5]ㅡ견내량에서 삼도수군을 상륙하게 한 뒤 반격하지도 않은 채 도주했다. 포로가 되었던 김완이 진술한 해소실기에는 이 때 아군이 각기 수사를 따라 퇴각했다고 하면서 조선 수군이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도 지휘권이 유지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지휘를 무시한 채 퇴각한 배들은 거제, 진해, 한산도 방면으로 퇴각했고, 한산도로 퇴각한 배설 휘하의 경상우수영 병력과 임치첨사 홍견, 가리포첨사 이응표, 해남현감 류형, 녹도만호 송여종 등은 명량해전 전후로 수군으로 복귀한다. 이를 통해 춘원포로 퇴각한 것은 원균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고성 지역 추원포까지 후퇴하여 주둔했다가 통제사 원균과 우치적은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왜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선 12척과 군사 120명을 수습하여 후퇴했고 경상우수영의 부하 우치적원균을 뒤로한 채 전장에서 탈출한다. 원균은 도망치다가 소나무 아래에 숨어있던 일본군, 특히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휘하 군사들의 습격을 받아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했다. 이때 김완은 일본군의 포로가되었다.

김식의 보고에는 원균이 적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돼 있지만 권율의 군관 최영길의 보고로 원균이 전사하지 않은 게 확인되었고, 조정에서는 1601년에 이르러서야 원균의 사망을 언급한다.

충청수사 최호전라우수사 이억기는 상륙하지 않은 채 싸운 후 전사했으며,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판옥선을 이끌고 도주해 한산도를 정리한 후 퇴각하였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조선 수군은 거북선(귀선) 3척을 포함하여 100여 척의 판옥선을 잃고 전면적인 패주를 함으로써 붕괴되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띠고 있다. 우선 조선수군이 붕괴됨으로써 남해의 재해권이 넘어가 실질적으로 정유재란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한위략에 적힌 일본군의 전과는 170척 수준으로 판옥선과 기타 선박(협선)을 포함 300척이 넘는 조선 수군의 규모를 생각하면 상당히 적은 규모로, 일본은 칠천량 해전의 의미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전과를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는 이 때 조선 수군을 공격한 일본군 병력이 단 두 척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포로가 되었던 정기수 역시 소수 병력이 기습했는데 수군이 적이 많은 줄 알고 도주했다고 진술하였다.

 

 

 

 

 

칭천량해전의 패전의 결과와 영향

 

1597년 음력 4월 1일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라는 명을 받고 출옥한 후 남하하여, 음력 4월 27일에 도원수 이 머물고 있던 순천에 도착하였다. 음력 7월 16일칠천량 해전에 패한 후 조선 조정은 다시 음력 7월 22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권준을 충청수사로, 김억추를 전라우수사로 임명하여 전력을 재편한다.[7]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함선이 소실되고, 남해안의 제해권이 왜군쪽으로 넘어가게 되는 바람에 육군의 지원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전라도까지 왜군이 침입하였다. 이때 뺏긴 남해안의 제해권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할 때까지 왜군에게 있었다.

1597년 음력 7월 18일 이순신은 해안 지역을 직접 돌아본 후 대책을 마련한다고 권율에게 요청하고 송희립 등 9명의 군관과 함께 현지로 출발한다. 삼가, 단성, 진주를 거쳐 음력 7월 21일 노량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을 만나 패전 상황을 듣고 대책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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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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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하얀별 | 작성시간 12.05.01 예쁜 꽃들이 패전의 아픔을 알까요?
  • 작성자워크뷰 | 작성시간 12.05.01 유일한 패전이라니 마음이 아파옵니다!
  • 작성자들꽃(野花) | 작성시간 12.05.02 한이서린 곳이지만
    지금은 그것을 잊어버린양 너무나 고요하네요.
  • 작성자석이 | 작성시간 12.05.02 아픔이 있는 우리들의 자리입니다...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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