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학번 K씨의 자산형성기

작성자블랙홀(이호철)|작성시간26.06.06|조회수2 목록 댓글 0

 

0. K의 학창시절

나는 79년 2월에 태어난 K이다.

즉, 빠른 79년생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존재했던 ‘빠른생’이다.

그 당시 ‘빠른생’들은 국민학교 입학을 7살에 했었다.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한 살 많은 78년생 말띠였다.

가뜩이나 공부머리가 없었던 나는

한글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7살에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 덕에 4학년이 될 때까지

한 번도 받아쓰기에서 ‘100점’을 맞아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있는 듯, 없는 듯

늘 조용한 스타일의 학생이었다.

공부는 중간에서 왔다갔다하는 정도였는데

고 3때 아주 잠깐 정신을 차리고 공부한 덕에

서울 끄트머리에 있는 대학에 입학을 할 수가 있었다.

대학생활도 평범함의 연속 그 자체였다.

특별히 튀거나 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학과공부에 충실한 학생도 아니었다.

조용히 먹고 노는 일명 ‘먹고대학생’이었다.

1.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주변 사람들 눈에는 아무런 걱정 없이

세상에서 가장 평온하게 살아가는

무념무상의 대학생처럼 보일 수 있었겠지만

나에게도 나름 걱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걱정은 집안의 가세가

균형을 잃고 한 없이 기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집 형편은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었다.

참고로 학창시절 나의 소박한 꿈은

친구들을 우리집에 데려와서 노는 것이었다.

늘 단칸방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우리집 모습을

친구들에게 보여줄 용기가 없었다.

고로 더 이상 기울 것도 없었는데

그마저도 버티지 못하고

가장 낮은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가

우리집 경제력에 딱 맞는 문구였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우리 부모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모든 부모님들이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대학 1학년 때가 바로 1997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IMF(외환 위기)가 터졌던 해였다.

2. 어머니는 ‘갭투’와 ‘몸테크’의 전수자......

나는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분들이었는데

막연하게 자식 교육만큼은

서울에서 시켜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농사 짓던 땅을 모두 팔아서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하셨다고 한다.

그때가 큰형이 7살, 작은형이 4살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던 1978년 가을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고단한 서울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서울과 지방의 부동산가격 차이가

지금처럼 크게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은 시골의 논과 밭을 판 돈으로

동대문구에 대지 서른평 남짓 하는

방3개짜리 작은 단독주택을 장만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집을 살 때

대출 없이 사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7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개인에게 은행의 문턱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과도 같았다고 한다.

즉, 개인에게 은행이란

돈을 맡기고 이자를 받는 곳이지

반대로 돈을 빌리고 이자를 내는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이 동대문구에 첫 집을 장만 할 때에

부족한 돈을 융통한 방법은

주인집(안채)을 세를 놓고

정작 우리는 문간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참고로 부모님이 그 당시 장만하셨던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옆에 조그마한 부엌이 달린 문간방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부엌과 방 2개 그리고 작은 마루가 있는

안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안채에는 주인이 거주를 하고

문간방은 세를 놓는 경우가 많았는데,

돈이 부족했던 부모님은 반대로 하셨던 것 같다.

모르는 남들이 얼핏 보면

우리를 세입자로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그 첫 집을 시작으로

2~3번 정도 더 집을 사고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미처럼 성실하기만 한 아버지를 대신해서

주로 어머니가 주도해서 집을 사고 팔았었는데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이 조금씩 넓어졌다.

그런데 우리의 문간방 생활은 항상 이어졌었다.

즉, 부모님은 자신들의 경제력 보다 많은 무리를 해서

계속 집을 넓혀갔기 때문에

부족한 집값을 메꾸기 위해

안채는 늘 세입자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없었던 개념인

‘갭투(전세끼고 집 사기)’와 ‘몸테크’를 병행해서

재산증식을 하셨던 것 같다.

훗날 나도 어머니가 했던 것처럼

‘갭투’와 ‘몸테크’를 통해 자산 형성의 기초를 만들었다.

나는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다소 이른 나이에 몸소 체험했다.

-계속


 작성자 부동산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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