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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父子) 청백리 이제신

작성자옻수레|작성시간20.01.18|조회수51 목록 댓글 0

서종면 수입리 청강기념관을 찾았습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훗날 영의정으로 추증된

청백리 청강 이제신(淸江李濟臣선생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양평에서 거주한 넷째아들 이명준(李命俊선생도 청백리였습니다.

흔치 않은 부자(父子청백리인 셈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목민심서에서 이명준 선생의 일화를 소개해

수령들에게 귀감이 되게 했으니 양평의 자랑이기도 하지요.

 

이제신 선생을 모신 재실 녹수재(綠水齋)를 거쳐

전의이씨(全義李氏문중에서 세운 기념관으로 들어섰습니다.

선생의 일대기뿐 아니라 문중의 귀한 자료들이

잘 정비되어 있어 흐뭇한 마음으로 둘러보았습니다.

새롭게 조경된 묘역 역시 정비가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신 선생과 이명준 선생 등의 묘를 둘러보고

관리실에서 차 한 잔 하며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신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했답니다.

5세 때부터 글을 읽고 7세 때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기념관 앞에 시비가 하나 세워져 있었는데

바로 선생이 7세 때 지은 시였습니다.

가만 읽어 보니 가히 탄성이 나올 만합니다.

남명 조식(南冥曺植)도 한번 보고 그 원대함을 예견했다고 합니다.

 

이제신 선생은 17세 때 양평으로 와서

용문 조욱(龍門趙昱선생의 문하에 들어 학문을 닦았습니다.

1564(명종 19)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1571(선조 4) 울산군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1578년 진주목사, 1581년 강계부사를 거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나아갑니다.

하지만 1583년 여진족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경원부가 함락되자 그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의주 인산진(麟山鎭)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선생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저서에 '청강집' 등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의 신도비도 둘러보았습니다.

양평군 향토유적 제 10호로 관리되고 있는 신도비는

사위인 상촌 신흠(象村申欽)이 글을 지었다는데

너무 퇴색되어 판독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한쪽에는 아들 이명준 선생의 신도비도 세워져 있었는데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듯해 그 대비가 묘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양평의 자랑 두 분 청백리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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