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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따라 걷기 강릉단오제와 대관령옛길

작성자조형태|작성시간20.10.11|조회수131 목록 댓글 0

6월 9~16일 남대천 일원서 축제 열려… 율곡 흔적도 볼 수 있어

강릉단오제와 대관령옛길.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둘다 국가 지정 ‘문화재’다. 강릉단오제는 1967년 지정된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이자 2005년 11월 한국 문화의 전통이 가장 잘 살아 있다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된 한국 고유의 문화축제이고, 대관령옛길은 2010년 11월에 명승으로 지정된, 한 손가락 안에 드는 유적지다. 강릉단오제는 이 대관령옛길을 통해서 성대한 행사를 치른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수천 년 이상 이어온 문화재, 즉 옛길과 축제인 것이다.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서, 설·한식·추석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명절 중의 하나다. 단(端)은 ‘처음’, ‘시작’이라는 뜻이고, 오(午)는 ‘초닷새’라는 의미다. 조상들은 이 날을 1년 중 양(陽)의 기운이 가장 성한 날이라 하여 으뜸 명절로 여겼다고 전한다.

야생화 만발한 대관령옛길을 걷고 있다. 반면 나무들은 고지대라 그런지 5월 중순까지 아직 신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으뜸 명절인 단오제가 강릉에서 언제부터 개최됐을까? 이를 살펴보기 전에 강릉이라는 지명과 문화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강릉을 지칭하는 말로 ‘관동’과 ‘영동’이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관동은 철령 동쪽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영동은 백두대간 대관령 동쪽 지역을 말한다. 관동 지역은 아홉 곳으로 흡곡과 통천·고성·간성·양양과 옛날 (동)예국의 수도인 강릉, 그리고 삼척·울진·평해의 각 군·현을 지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서 보듯 강릉은 삼국시대 이전 동예국의 수도였다. 당시 지명은 명주(溟洲)로서 독자적인 행정체계를 유지했다. 고려시대에는 선종을 받아들여 불교문화를 번성시켰고, 고려 말에는 유교의 양반문화를 형성했다.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민중문화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문화가 지금의 ‘강릉단오제’로 통합되어 축제로 탄생한 것이다. 동예국은 기원전이니 지금으로부터 2,000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고 가장 규모가 큰 축제인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열렸는지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 않다. 부족국가였던 동예시대부터 있었던 제천행사가 발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관령옛길 아래 부분에는 신록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한반도 부족국가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동예에서는 해마다 10월에 신께 제사하고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데 이를 무천이라고 한다’고 돼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 최초의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어떠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이어 <고려사>에 ‘935년 강릉 사람 왕순식이 왕건(태조)을 도와 신검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대관령에서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온다. 대관령 산신제를 지낸 첫 기록으로, 지금 ‘천 년 단오’라고 말하는 근거가 된다.


조선시대에는 추강 남효온(1454~1492년)이 쓴 문집에 ‘영동에서는 매년 3, 4, 5월 중에 날을 받아 무당들이 산신을 맞아 신에게 제사한다. 부자들은 제물을 말바리에 싣고, 가난한 사람은 이고 지고 대관령에 올라가 제사를 차리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홍길동전>의 작가로 유명한 허균(1569~1618)의 <성소부부고>란 책에도 강릉에 갔다가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곡식의 성장과 결실 기원한 공동체 행사

10월 무천은 추수감사제의 성격이고, 5월 단오는 곡식의 성장과 결실을 기원하는 파종축제의 성격이 짙다. 따라서 강릉단오제의 기원은 ‘마을의 안녕과 풍농·풍어·풍림’을 신에게 기도드리던 것으로 보인다. 즉 각 마을 주민의 건강과 질병퇴치, 1년 농사의 풍년, 풍성한 고기잡이와 가축번식, 수해와 관련되는 산림의 풍성함, 대관령 산행길의 안전 등을 기원한 것이다.


단오절에는 여러 풍속을 즐겼다. 여자들은 창포물로 머리를 감고 몸에 이롭다 하여 창포 삶은 물도 먹었다.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잎의 이슬을 받아 화장하고 창포물로 세수를 하는 동시에 목욕재계도 했다. 또 창포가 무성한 못가나 물가에 가서 물맞이하는 풍습도 있었다. 크게 자란 고목거수의 옆가지에 그네를 매어 남녀노소가 즐겼으며, 남자들은 씨름을 겨뤘다. 그 외에도 가면극, 민요, 무속제 등 명실공히 종합예술축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1 대관령옛길을 지나다 보면 돌무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과객들이 안녕과 무사귀환을 빌며 돌을 쌓는 관습에서 비롯됐다. 2 강릉바우길 이기호 사무국장이 대관령옛길에 세워져 있는 이병화 유혜 불망비를 쳐다보고 있다.

올해 강릉단오제는 6월 9~16일까지 강릉 남대천 일원과 대관령 국사성황당, 산신각 등지에서 열린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리는 명실상부 한국 최고 최대 축제다.  


강릉단오제는 단오 한 달 전인 음력 4월 5일 ‘신주(神酒)빚기’로부터 시작된다. 술은 신에게 바치는 가장 중요한 제물이다. 단오제례에 쓸 술을 만드는 일을 ‘신주빚기’라 한다. 강릉의 옛 관청이었던 칠사당(七事堂)에서 강릉시장이 내린 쌀과 누룩으로 신주를 담근다. 신주가 잘 익어야 단오제를 무사히 치르고 국사성황신과 국사여성황신이 강릉시민들에게 풍요와 안녕을 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


‘대관령산신제’와 ‘국사성황제’는 음력 4월 보름날 올려진다. 김유신 장군을 산신으로 모신 산신각에서 ‘대관령산신제’가 올려지고, 범일국사를 모신 국사성황사에서 ‘국사성황제’를 지낸다. 성황제가 끝나고 신목잡이가 신목(神木)을 베면 사람들은 신목에 청홍색의 예단을 걸어 국사성황의 행차를 준비한다. 신목은 단풍나무만 쓴다.


국사성황 행차는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내려와 구산에서 ‘구산서낭제’를 받는다. 구산을 떠난 국사성황 행차는 고향인 학산에 이르러 ‘학산서낭제’를 거친다. 학산은 국사성황신인 범일국사의 고향이다. 학산 서낭제 이후 강릉 시내에 돌아온 국사성황 행차는 국사여성황사에서 ‘봉안제’로 받는다.

대관령옛길에 복원된 옛날주막에 정원과 연못 등이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유네스코, “인류에 이런 축제 남은 건 기적”

국사성황 내외를 강릉단오제 가설 굿당으로 모셔가는 ‘영신제(迎神祭)’는 음력 5월 3일 저녁에 이루어진다. 대관령국사여성황신에서 ‘영신제’를 마친 국사성황 행차는 ‘정씨가의 제례’를 받고 ‘영신행차’를 맞이해 남대천 제당으로 향한다. 음력 5월 4일부터 7일까지는 아침마다 ‘조전제(朝奠祭)’가 열린다. 이 유교적 제의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단오굿이 뒤따른다. 강릉단오제의 마무리인 ‘송신제(송신제)’는 음력 5월 7일 저녁에 올려진다. 이어 다음날인 5월 8일에 축제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세계무형유산 목록으로 선정된 강릉단오제를 본 유네스코위원들은 심사평에 ‘인류에게 이런 축제가 남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로 인류 기적의 축제가 한국에서, 그것도 강릉에서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대관령옛길 따라서 축제의 흔적을 좇아가 보자.


대관령옛길 출발지를 대관령휴게소로 잡았다. 대관령옛길은 강릉바우길의 14개 구간 중에 2구간으로, 강릉바우길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사)강릉바우길의 이기호 사무국장이 직접 길을 안내했다. 대관령휴게소~양떼목장 옆~국사성황당과 산신각~KT송신탑~반정(산불감시초소)~이병화 유혜 불망비~옛날주막~하제민원(산불감시초소)을 거쳐 대관령박물관까지 총 11.5㎞를 5시간 45분 걸렸다.


대관령은 영동지방과 영서지방을 잇는 고갯길이다. 선비와 보부상 등이 넘나들던 숱한 사연을 안고 간직한 길이다.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이 길을 지나 <관동별곡>을 쓰고, 한국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여섯 살밖에 안 된 아들 율곡을 데리고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오갔다.


강릉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농산물이 이 길을 통해 영서지방으로 넘어갔고, 영서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이 이 길로 구산리의 구산장, 연곡장, 우계(옥계)장 등으로 팔려나갔다. 이 물산의 교역은 ‘선질꾼’들이 담당했다. 그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길이 대관령옛길이다. 또한 괴나리봇짐에 짚신 신고 오르내리던 옛 선비들의 역사적 향취가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은 조선 초기만 해도 사람 한둘이 간신히 다닐 정도였으나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

1 범일국사를 모신 대관령 국사성황사. 2 반정에 있는 대관령옛길 비석.

16세기부터 대관령이란 지명 기록 나와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처음 나온 것은 대략 16세기부터다. 그 전에는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큰 고개를 의미하는 ‘大’자를 붙이고 험한 요새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關’을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서는 ‘大嶺(대령)’이라고 쓴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에서는 ‘大峴(대현)’으로 기록돼 있다. 두 개념 모두 큰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 초기까지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태종실록>에도 ‘大嶺山(대령산)’으로 돼 있다. 조선 중종에 이르러서야 대관령이란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관령’이라고 처음 언급하면서 ‘이를 대령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관령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온다. 따라서 대관령이란 고갯길은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숱한 사연을 간직할 수밖에 없다.


대관령휴게소를 나서자 양떼목장과 선자령 가는 길을 가리키는 양 갈래의 이정표가 나온다. 평창과 강릉의 경계다. 선자령 가는 길로 접어들면 푹신한 흙길에 만발한 야생화에 흠뻑 빠져든다. 누구나 “이렇게 좋은 길이 있었다니!”라고 감탄한다고 이기호 국장이 전한다. 보라색의 얼레지, 노란색의 괭이눈, 또 다른 모양의 노란색의 개별꽃, 연보라색의 현호색 등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방문객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한다. 습지식물인 속세도 유달리 눈에 띈다.


이 국장은 “높지도 않은 길, 푹신푹신한 흙길, 야생화 만발한 길을 들어서면 누구라도 감탄하는 길이 대관령옛길”이라고 소개했다. 야생화는 끊임없다. 서서히 고도를 올리면서 수종도 조금씩 변한다. 구상나무와 일본잎갈나무, 전나무가 혼재림을 이루고 있다. 시원하다. 중간 중간에 한국의 대표 수종인 소나무와 참나무도 빠지지 않고 있다.


시원한 길을 지나 한국에서 가장 음(陰)기운이 강하다는 성황사와 산신당에 도착했다. 사방은 숲으로 둘러싸인 계곡 지대라 여성의 음부와 비슷한 느낌이다. 산신당과 성황사는 대관령산신과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신 사당이다. 두 사당이 10여 m 거리를 두고 있다. 이곳에서는 1년 내내 굿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국사성황사 뒤에서 강릉단오제에 쓰일 신목을 고른다. 여기서 자른 신목은 대관령옛길을 따라 강릉시내까지 운반된다.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 이이를 데리고 대관령옛길을 넘으면서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그림과 함께 세워져 있다.

잠시 고갯길을 올라서면 능선이다. 대관령옛길 구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GPS가 고도 962m를 가리킨다. 백두대간이 이곳으로 연결된다. 능선 위에선 강릉방향인 동쪽으로는 가파른 급경사 지형이고 올라온 왼쪽은 완만하다. 그만큼 강릉사람들은 대관령 고갯길을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고갯길을 구불구불한 길로 연결시킨 아흔아홉 굽이길 그대로 간다. 경사는 있지만 길은 굽이져 별로 가파른 느낌을 받지 않고 걷는다. 크게 자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이 국장은 “봄에는 야생화 만발하고, 여름엔 시원하고, 가을엔 단풍으로 아름답고, 겨울엔 눈이 쌓여 더욱 운치 있는 길”이라고 자랑했다. 이 말을 보증이라도 하듯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이정표가 나온다.


반정(半程)이다. 반정은 시내에서 대관령 정상까지 대략 20㎞의 중간지점이라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반쟁이라고도 부른다. 웃반쟁이와 아랫반쟁이가 있으며, 상반정은 대관령의 중턱이다.


걷는 길 내내 형형색색의 야생화 만발

숲속의 초본식물들은 파릇파릇한 녹색으로 치장하며 봄의 절정으로 치닫는 반면, 나무들은 높은 위도와 고지대탓인지 아직 전혀 신록의 기운을 받지 못하고 있다. 초본과 목본식물들이 완전히 대비된다. 엘레지, 현호색, 개별꽃, 개망초 등 만발한 야생화는 자태를 뽐내며 방문객의 눈길을 끄는 듯하다.


김시습 시비에 이어 단원 김홍도의 대관령 그림이 나오더니 곧이어 신사임당 시비도 나온다.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란 제목의 시(詩)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강릉)에 두고/ 외로이 한양으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해 저문 산에 흰구름만 날아 내리네.’ 신사임당의 지극한 효심을 잘 표현한 시다.

옛길주막에 물레방아가 세월의 흐름을 잊은 채 돌고 있다.

대관령옛길을 얘기하면서 신사임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임당이 여섯 살 율곡과 막 세 살 된 동생을 데리고 오랜 친정생활을 마치고 시댁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이별이었다. 가마 타고 아흔아홉 굽이를 넘던 사임당은 고갯길에서 내리더니 산 아래 마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때 바로 이 시가 나온 것이다.


한국의 옛길엔 어디를 가나 돌무덤을 볼 수 있다. 돌무덤 있는 길엔 대개 서낭당도 같이 있으나 지금 서낭당은 흔적 없이 사라진 곳이 많다. 돌무덤은 과객들이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돌을 하나씩 쌓은 관습에서 비롯됐다. 그 돌에 무사귀환을 당부하고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산신에게 기원하는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마을 어귀나 특히 고갯길에 돌무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대관령옛길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개의 돌무덤을 지나친다. 대관령은 특히 험준한 산세여서 그 옛날 호랑이가 득세하던 시절, 개인의 안전을 기원하는 관습이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길 중간 중간에 쉼터와 의자가 구비돼, 방문객이 힘들면 쉬어가도록 하고 있다. 옛날 주막도 복원했다. 널찍한 마당에 연못까지 조성해서 운치 있는 주막 그대로의 모습이다. 주모와 막걸리만 있으면 영판 옛날 주막 분위기다.


조그만 계곡이 나온다. 이 국장에게 계곡 이름이 뭐냐고 묻자, “이런 정도는 강원도에서 계곡이라 할 수도 없는 그냥 흐르는 물”이라고 답했다. 다들 한바탕 웃고 지나쳤다. 이 국장은 “이 계곡에서 여름이면 탁족도 한다”고 덧붙였다.

대관령옛길은 평일에도 일반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관령 이정표는 자주 나온다.

‘대관령옛길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영동지방의 관문역할을 하던 곳으로서, 예로부터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며, 또한 천년의 역사가 이어져 오는 강릉단오제가 시작되는 시발지로서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산맥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입니다. (중략) 문화재청으로부터 역사적 문화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지정 명승 제75호(2010,11,15)로 지정된 길이기도 하며, 강원도 명품 산소길 18선으로 선정된 길로서… (후략)’


그냥 흐르는 물이 점점 계곡으로 커진다. 이 국장도 제법 커진 물줄기를 보고 “이 정도 되면 계곡이라 할 수 있죠”라며 한마디 한다. 그 옆으로 하제민원마을이 있다. 그냥 흐르는 물에서 제법 커지더니 이름까지 붙은 용암계곡이 계곡의 모습을 갖춰 흐르고 있다.


대관령박물관이 저만치 보인다. 대관령박물관은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한 개인이 수집한 민속 역사 유물을 기증한 것을 강릉시에서 박물관을 건립해서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유물이 많다.


오전 10시 조금 못 돼서 대관령휴게소에서 출발한 옛길을 걸어 오후 4시 가까이 돼서야 박물관에 도착했다. 아흔아홉 고개 따라 걷던 선비들의 자취가 느껴지고, 그들이 남긴 역사가 되새겨지고, 대관령의 역사가 떠오르는 명품 옛길이다. 사계절 언제 걸어도 흠 잡을 데 없이 만족할 만했다.

대관령옛길 개념도

교통(지역번호 033)

승용차는 서울에서 외곽순환도로를 잠시 타다 중부고속도로로 바꾼다. 중부고속도로 호법분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를 간다. 횡계IC에서 빠져나와 경강로를 따라 가면 대관령휴게소가 나온다. 고속버스는 동서울터미널에서 강릉고속버스터미널까지 하루 40회 운행한다. 문의 동부고속 647-3181, 중앙고속 648-5897~8. 횡계읍에서 택시를 타고 대관령휴게소로 접근하면 택시비 8,000원 남짓. 문의 횡계 개인택시 335-6263 또는 횡계택시 335-5596. 강릉 콜택시 653-2288 또는 651-1155. 강릉 시내버스 교통 문의는 동진버스 653-8011~2. 동해상사 653-0320.


숙식(지역번호 033)

대관령옛길이 있는 대관령박물관에서 승용차로 불과 10여 분 거리에 있다. 1988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조성된 휴양림이나 최근 새로 리모델링했다. 문의 641-9990. 한옥은 선교장전통문화체험관(648-5303)과 현덕사 템플스테이(661-5878)가 있다. 강릉 별미로는 초당순두부정식과 감자옹심이 등이 있다. 관광문의 종합관광안내소 640-4414, 640-4531.

INFORMATION

단오제에 어떤 신들을 모시나?
대관령산신 김유신 장군과 국사성황신 범일국사

강릉단오제에 모실 대관령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강릉단오제에는 대관령산신으로 모신 김유신 장군과 대관령국사성황신으로 모신 범일국사가 있다. 강릉단오제의 대표 설화이기도 한 인물이다. 설화이기는 하지만 신화에 가깝다. 실제 인물이 신격화된 ‘인격신(人格神)’인 것이다. 김유신과 범일국사 외에도 강릉에는 여러 신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강릉에서 살았고, 강릉과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데 있다. 이들이 어떻게 해서 산신과 국사성황신이 됐을까?


김유신 장군은 잘 알다시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최고의 수훈을 세운 인물이다. 가야국 김수로왕의 13대손으로, 강릉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다만 허균의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신라 장군 김유신은 어려서 명주(강릉의 옛 지명)에 유학하여 대관령 산신에게 검술을 배웠다. 그는 강릉 남쪽에 있는 선지사에서 명검을 만들었고, 그 신통한 검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사후에 대관령산신이 되어 이 지방을 보호해 주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대관령과 송정의 모든 소나무를 군사와 노적가리로 보익하여 왜군이 근접치 못하게 했다.’


화부산사에 있는 ‘순충장렬흥무대왕화산재기공비’에도 김유신 관련 기록이 있다.

‘말갈이 신라의 북변을 침입해 괴롭히므로 문무왕은 원년(661년)에 김유신에게 명하여 말갈을 정벌케 했다. 이에 김유신은 하슬라주(강릉)에 출병해 화부산 아래에 주둔하고, 오대산에서 무기를 만들고, 군대의 훈련을 팔송(송정동)에서 시키는 등 무력을 크게 과시했다. 이에 말갈이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김유신을 보자마자 말갈이 도망갔으므로 현지 주민들은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김유신의 공덕을 잊지 않았다.’


이와 같이 강릉사람들은 김유신이 어려서 강릉에 거주했던 인연이 있고, 자신들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수호신으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여겼던 것 같다. 반면 범일국사는 강릉 학산이 고향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설화가 범상치 않다. 강릉의 <臨瀛誌(임영지)>에 ‘굴산의 한 양가 처녀가 석천의 물을 먹고 잉태하여 14개월 만에 옥동자를 낳았는데, 그가 곧 범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곱슬머리의 특이한 자태와 정수리가 진주 모양을 한 기이한 형상이었다’고 전한다.


15세에 출가해서 20세에 경주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흥덕왕 6년(831)에 당나라로 건너가 마조선사의 제자인 염관 제안선사에게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라는 깨우침을 얻고, 문성왕 6년(844)에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의 창시자가 됐으며, 동해 삼화사와 강릉 신복사를 창건하고 양양 낙산사를 중창해 영동 지방 선종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당시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이 국사로 모시려 했으나 모두 마다하고 오로지 지역민들과 함께함으로써 영동지방의 정신적 지주가 됐으며, 진성여왕 3년(889) 굴산사에서 입적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범일국사를 정신적 수호신에서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추앙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강릉단오제 어떤 행사 열리나
한국 전통 민속행사 총 망라해서 보여줘

1 국사성황신을 강릉단오제에 모시기 위해 많은 참석자들이 보는 가운데 성대한 행사를 지내고 있다. 사진 강릉단오제위원회 제공 2 강릉단오제 그네뛰기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이 그네를 타고 있다. 3 군웅장수굿을 지내는 무당이 엄청나게 무거운 동으로 만든 컵을 입으로만 들어 올리고 있다.

‘강릉단오제’의 행사는 종합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화해와 열린 공간 그 자체다. 한국 전통의 민속행사를 총망라해서 보여 주면서 현대인들이 참여해서 경연하고 실제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사 한 달 전 신주빚기로 시작된 단오제는 대관령산신제, 대관령국사성황제, 영신제, 조전제, 단오굿, 관노가면극, 농악경연대회, 어린이 농악경연대회, 학산오독떼기 등 지정문화재 행사를 잇달아 개최한다. 신주빚기로 강릉단오제의 축제분위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지정 문화재 행사와 동시에 다양한 민속행사도 열린다. 한시백일장, 향토 민요경창대회, 전국 시조경창대회, 줄다리기 대회, 씨름대회, 그네대회, 강릉 사투리 경연대회, 궁도대회, 투호대회, 단오장기대회, 이리농악, 북청사자놀음, 중국 형주시 기예단, 태국 민속춤 등 전문가와 일반 참가자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풍성한 행사다.


단오체험촌에서는 창포머리감기, 단오부채만들기, 신주 시음 및 수리취떡 시식 등을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다. 뿐만 아니라 신통대길 길놀이, 단오등 걸기 행사에서는 시민들이 함께하는 한마당으로 치러진다. 8일간의 축제 기간 중 100만 명이 훨씬 넘는 내외국인이 방문해 축제를 더욱 빛낸다.

글·박정원 부장 사진·정정현 국장 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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