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삶에서 당신은 분명 나를 사랑했고, 그것은 틀
림없는 사실이다. 두 사람을 감쌌던 한때의 진녹색 우단
이불이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이불 속에서 벌어진 수많
은 대화의 목격자가 되어줄 것이다.
나의 말이 빚어낸 희고 동그란 알들이 당신의 품속에
서 노랗고 보송보송한 마음으로 부화하는 장면들은 정말
로 실존했고
이런 삶을 상상해보자. 그렇게 말하면
어느새 선물처럼 도착해 있는 순산의 순간들을 감당
할 수 없을 만큼 누리고, 또 누려왔으므로.
괜찮을 거야.
한 번쯤 빼앗긴다고 해도.
창밖으로 훌쩍 다가온 겨울은 이번 생의 내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쓰다 만 편
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서
주머니 손난로를 쥔다. 마주 잡은 두 손이 마치 기도하
는 것 같지. 주머니 손난로는 일회용이고 이 삶도 마찬가
지다.
주머니 손난로를 흔들고, 흔들고, 다시 흔들어대며 나
는 겸사로 거룩하였고
야구 배트를 쥔 사람이 창문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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