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턱에서 만나자.
그렇게 말하고
길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다.
검은 나무와 검은 풀들이
아름다운 들판이었고
아직도 얼굴을 잃지 않고
나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놀이를 하자.
모든 것을 주고 받으며 오늘을 기억하자.
그래서
나는 뛰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는 나의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둥글게 앉아
다정하게 주고 받았다.
등 뒤에 놓인 나의 얼굴을
두 팔로 감싸 안고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것처럼 달려주었다. 그러나
꿈이 긴 팔을 뻗어
나에게 얼굴을 돌려주었고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과
정중하게 악수를 나눈다.
중턱에서 만나자.
그렇게 말하고
아무도 길을 떠나지 않았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지성사, 2023
* 이 지구는 이억명만 살아야 풍요를 누릴 수 있는데
현재 팔십이억명이 바글바글 모여 살고 있다.
팔십억명이 지구를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개그맨 김병조는 '지구를 떠나거라!'라고 했지만
떠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포화상태로 발 디딜 곳이 없어졌다.
누가 옆구리를 툭 치면 금방이라도 핵폭탄을 누르겠다고
협박하는, 그런 지구에서 살고 있다.
단추를 누르고 누르고 또 누르면 이억명만 살아남아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될까?
멸망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둥글게 둘러앉아 다정함을 나누고
사랑했던 사람들과 정중하게 악수를 나누며 이 지구를 지키는 것이
살아남는 법이 아닐까?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