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주거 형편을 기록한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에 보면 고려 때 이미 풍수지리설과 음양, 도참사상의 영향을 받은 주거 건축이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도경 민거조(高麗圖經 民居條)에는 “송악의 지세는 평평하지 못하고 자갈과 산두둑이 많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집은 마치 벌집이나 개미집같이 보였고 지붕은 띠풀로 이었는데 그 띠의 크기는 서까래 양쪽을 간신히 잇대어 놓은 정도였다. 다만 열 집에 한두 집 정도는 기와를 덮은 집도 있다”.라고 적혀 있어 일반 백성들의 집은 대다수가 보잘 것 없는 움집의 형태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선화봉사 고려도경 권28 와탑조(宣和奉使 高麗圖經 卷28 臥榻條)에 있는 주거 내부 생활에 관한 기록을 보면 “침상 앞에는 낮은 평상이 세 틀 놓여 있고 난간이 둘러 있으며 각각 무늬가 그려진 비단 보료가 깔려 있고 바닥에는 큰자리가 놓여 있다”.라고 적혀 있어 귀족계급이나 왕궁에는 여전히 온돌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흙침상을 만들고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는다”.라고 적힌 것으로 보아 역시 고구려 사람들의 장갱과 비슷한 채난방식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 28년에 간행된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노(爐)’, ‘토실(土室)’, ‘옹로(瓮爐)’, ‘빙돌(氷突)’이라는 귀절이 있고 특히 ‘빙돌’이라는 것은 ‘온돌’이 있었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이인로(1152~1220)의 《동문선》 공주 동정기에는 “冬以煜室,夏以凉廳”이라 하여 마루 구조와 온돌 구조가 한 건물에 건축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위 글중 ‘욱실’이란 더운방이란 뜻이며 ‘양청’이란 시원한 마루 즉, 대청마루를 뜻한다.
고려시대 정몽주가 살던 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