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황구지천을 경계로 화성과 오산을 오가며
정조대왕의 손길이 묻어있는 용주사 융건릉 독산성 세 곳을 돌아본다.
용주사는 854년 신라 문성왕 때 '갈양사'로 창건되었으나 고려 조선을 거치며 소실되었다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790년 새로 지은 절이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 시립대 뒷산)에서 천하제일의 길지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현재 융릉)으로 칭하고 부친의 극랑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절을 건립하는데
낙성식 전날 정조가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龍珠寺라 하였단다.
먼저 화성의 용주사 주차장에 도착해 가람배치도를 살펴본다.
보통 일주문이 있는데 매표소 옆 출입문이 바로 사천왕문으로 절간의 출입문이다.
사천왕문을 지나자 해태상이 서있고 석주와 홍살문을 지나게 된다.
일반적인 사찰과 달리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셨기에 홍살문과 이어지는 삼문은
사찰양식이 아니라 궁궐양식을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삼문앞에는 혜경궁 홍씨의 읍혈록 일부가 돌에 새겨져 있다.
시간이 되면 확대해서 읽어 보시면 합니다.
돌기둥에도 불교와 관련된 글귀들이 새겨져 있는데 공부를 할 시간이 없네요.
삼문(三門)을 지납니다.
삼문을 지나면 부처님 사리가 봉안된 5층석탑과 천보루가 나온다.
천보루 좌쪽은 선방으로 사용되는 만수리실, 우측은 스님들의 요사로 쓰이는 나유타료라 부른다.
용주사의 중심건물인 대웅보전은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삼세불을 모시고 있으며
후불탱화는 조선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며
대웅보전 현판을 정조가 직접 썼다고 한다.
그래서 2017년 대웅보전은 보물 제1942호로 지정되었다.
용주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기도에서 딸랑 2개 있는 국보 중 하나로
용주사 동종이 바로 국보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신라 종의 양식을 보이는 고려초기 범종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삼존불과 비천상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그 기법이 뛰어나 고려범종의 걸작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용주사를 돌아보고 융건릉으로 간다. 1.5km 거리에 차로 2~3분 정도 걸린다.
입구에 들어서 융릉건릉역사문화관을 잠시 돌아보고 재실로 간다.
재실은 왕릉관리자의 업무공간이며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재실 문을 들어서 우측에 개비자나무, 좌측에 향나무가 있는데
개비자나무는 한국 특산종으로 잘 자라도 3m 이내인데 이 나무는 높이 4m 줄기 둘레도 80c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나무로 2009년 천년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다.
재실 앞쪽의 백송과 향나무도 수령이 모두 150년이 넘는 노거수에 속한다.
재실 뒤쪽 언덕에 있는 향나무도 수령이 120년이 넘는다.
재실을 둘러보고 융릉으로 가기 전 왼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면 정조 초장지가 있는데
정조가 승하 후 처음 묻혔던 곳이다.
그 후 21년 후 부인인 효의황후가 죽자 현재의 건릉으로 합장하여 이장하였다고 한다.
융릉은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왕후(혜경궁 홍씨)의 합장능이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28세에 뒤주 속에서 죽은 뒤
2달 후 배봉산에 묻혔다가(수은묘), 14년 후 영우원으로 승격 개칭하였고
다시 그 후 27년 후 현재 위치에 이장하고 능호를 현륭원(융릉)으로 변경하였다.
비문에 사도세자의 개략적인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융릉앞쪽 곤신지가 있는데 묘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물이 있는 곳에
'용의 여의주' 형상으로 조성한 원형 연못이다.
많은 물고기가 놀고 있다.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능인 건릉이다.
왕릉 사잇길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흙길이라 최고의 산책길인데
뒤쪽 숲길은 산불예방을 위해 5/15까지 츨입을 제한하고 있다.
독산성은 융건릉에서 4.7km 거리에 차로 10여분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독산은 숲이 우거진 산이 아니라 민둥산이어서 대머리독(禿) 자를 붙인 禿山이라 불렸다.
독산은 해발 208m로 낮지만 주변에 산이 없는 벌판에 솟아 있어 사방이 잘 내려다 보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기가 좋아 삼국시대 이곳에서 고구려와 나제연합(신라+백제)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고구려가 지고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일이 있었다.
독산성도 처음에는 백제에서 목책을 세웠다가 토성이 되었고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지며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해왔다.
임진왜란 중 1593년 명의 원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하하자 전라도 순번사이던 권율장군이
명군과 호응하여 한양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 중 이곳에서 적 대군과 대치하게 된다.
그 때 왜장 기요마사가 벌거숭이산(독산)에 물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물 한 지게를 올려보내 아군을 조롱했으나 권율장군이 흰 쌀을 말 등에 끼얹어 말을 목욕시키는
시늉을 했는데 왜장은 성내에 물이 많은 것으로 오판하여 퇴각했다고 한다.
권율장군은 독산성과 행주산성에서 적을 대파하고 도성을 수복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 독산성에 세마대를 세우고 병기창을 두어 무예연습을 하게 했다.
걸어서 산성을 오르는 길은 서문쪽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서문까지 200m 정도 6~7분 걸린다.
차로 오른는 경우는 동남쪽 산문에서 동문 보적사 입구 주차장까지 1.2km 거리의 도로가 나있다.
오늘은 서문쪽으로 걸어서 오른다.
서문을 들어선다.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인데 정조도 서문을 통해 행차를 했다고 한다.
성 전체적으로 여장이 없어 어디서나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여 있는 것이 참 좋다.
적을 살피고 공격을 하기 좋게 밖으로 튀어나온 치성(雉城)위에는 어디나 전망대를 만들어
안전을 도모하면서 조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서문 뒤쪽은 북문으로 가는 길이다.
서문과 남문 중간에 암문이 하나 있다.
남문쪽 전망대(치성)에서 내려다 본 숲길이다.
남문에서 뒤돌아 본 방금 지나온 전망대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말과 소가 다닐 수 있는 주 출입구다.
진남루라는 6칸짜리 문루가 있었는데 모두 파손되고 1979년 현재 상태로 복구한 것이다.
동문으로 향하는 오르막길
세마대에서 동탄방향
앞에 보이는 바위가 권율바위라는데 권율장군이 바위에 올라 적의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독산성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세마대
세마대 현판이 남쪽 북쪽 2개인데 남쪽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직접 쓴 현판이 걸려있다.
세마대 바로 아래 보적사가 있다.
백제 아행왕(401년) 때 전승기원과 나라의 안녕을 빌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데
산성 축조와 관련한 특별한 목적이 있었지 않았을까?
보적사에 내려오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가난한 노 부부가 양식이 쌀 두 되만 남아 굶어 죽느니 부처님께 공양하기로 하여
공양을 한 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차 있었다.
이후 열심히 공양하면 보화가 쌓이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이야기다.
탑 뒤로 보이는 누각이 세마대다.
보적사의 출입문은 독산성의 동문이고 동문까지 차량이 올라 올 수 있다.
동문 밖에 조그마한 주차장과 매점과 화장실이 있다.
보적사에서 성곽을 따라 북문쪽은 보수공사 중이라 출입이 통제되어 세마대에서 암문방향으로 곧장 내려온다.
보적사 뒤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동탄 시가지
독산성 남쪽 성심학교와 노적봉 방향
서북쪽 융건릉과 봉담방향
서쪽 서오산JC 와 황구지천
하산길에 만난 특별히 빨리 꽃을 피운 진달래 한 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