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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작성자작곡가 오해균|작성시간26.06.19|조회수27 목록 댓글 0


 

50세 이후 한국인이라면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고, 그보다 더 연배가 있는 한국인이라면 현인이 부른 ‘세월이 가면’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대표작으로 〈세월이 가면〉과 〈목마와 숙녀〉를 꼽곤한다. 전술했듯이 이 시들이 노래로 불려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실제로도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의 정수를 이루는 작품으로 사랑, 상실, 시간의 비가역성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우울과 아이러니가 가장 투명하게 드러난 작품이기도 하다. 아울러 박인희가 1970년대에 낭송해 다시 유명해진 〈목마와 숙녀〉는 전후 모더니즘의 상징적 텍스트이다.

이 시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신화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보인 〈신화의 바다〉, 개인적 정서와 시대적 불안을 교차시키며 부성父性의 언어를 통해 전후 세대의 불안과 책임을 사유하는 〈어린 딸에게〉, 일상적 정경 속에 스며든 공허와 고독을 담담하게 포착해 그의 도시적 감수성을 잘 드러낸 〈비 오는 날〉도 있다.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광복으로 졸업하지 못하고, 1945년 가을 서울로 돌아와 아버지로부터 5만원, 작은 이모로부터 2만원을 빌려 오장환의 남만서점을 물려받았다. 상호를 마리서사로 이름을 바꾸고 경영하면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등단은 《국제신보》 주간 송지영의 추천으로 1946년 12월, 시 〈거리〉를 발표하면서 했다. 그의 나이 19세 때였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난 그가 서울에서 살았던 곳은 원서동과 세종로였다. 원서동에서는 1936년부터 1948년까지, 세종로에서는 1948년부터 작고할 때까지 살았다. 그러나 1942년부터 1945년까지는 학업을 위해 황해도 재령과 평양에서 지냈다. 시 쓰랴 문단 활동 하랴, 마리서사를 제대로 경영할 수 없었다. 결국 1948년에 폐업하고 자유신문사에 문화부 기자로 자리를 얻었다. 그 마리서사茉莉書舍가 있던 자리는 종로3가 2번지, 탐골공원 옆으로 지금은 송해로라고 불리는 길목 초입이었다. 현재는 대한보청기가 들어 서있다. 1948년부터 살았던 세종로 집은 지금의 교보생명 지상 주차장이 있는 자리이다.

그는 6.25 동란 때는 피난을 가지 못하고 숨어 지내다가 중공군이 공습하기 시작한 뒤 12월 8일 가족과 함께 열차편으로 대구로 피난을 갔다. 이때 열차에서 적은 시가 〈검은 강〉이다.

신神이란 이름으로서

우리는 최후의 노정路程을 찾아보았다.

어느 날 역전에서 들려오는

군대의 합창을 귀에 받으며

우리는 죽으러 가는 자와는

반대 방향의 열차에 앉아

정욕情欲처럼 피폐한 소설에 눈을 흘겼다.

(후략)

시인이 순식간에 써내려간 〈세월이 가면〉의 산실인 명동의 은성주점터. 지금은 화장품 매장이 들어서 있으나 다행히 은성주점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박인환은 전후의 폐허 속에서 모더니즘의 좌절과 열망을 함께 끌어안으며, 도래하지 않은 세계의 잔해를 도시적 고독·허무·냉소 속에서도 포기되지 않는 감수성으로 형상화했다.

전쟁 중에 종군기자로도 활동하던 그는 휴전 후 서울로 돌아왔고 ‘명동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명동의 봉선화다방, 김수영 시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빈대떡집인 충무로 4가의 유명옥, 조선호텔 뒷편의 모나리자, 지금의 하동관 명동본점 바로 옆에 있었던 동방싸롱에서 김수영, 변영로, 전혜린, 오상순, 천상병 등 당대의 문인들과도 어울렸다.

빠질 수 없는 곳이 최불암 배우의 모친 이명숙 여사가 경영하던 은성이었다. 은성은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맞은편, 지금의 조훈빌딩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이명숙 여사는 일행이 술값이 밀린 채 술을 달라고 하자 외상을 갚으라 했다. 박인환이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펜을 들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ᅠ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ᅠ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ᅠ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ᅠ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ᅠ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ᅠ

나뭇잎에 덮여서ᅠ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ᅠ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ᅠ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아마도 술값 대신 시를 써서 헌사한 게 아닌가 싶다. 박인환은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에게 작곡을 부탁했다. 곡이 만들어지고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현인을 불렀다. 현인은 악보를 잠시 보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명숙 여사는 눈물을 쏟으며 외상은 갚지 않아도 좋으니 그 노래만은 부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박인환이 쓴 시는 이명숙 여사의 옛 사랑 이야기를 시로 옮긴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봉구 소설가의 단편소설 〈명동〉에 나온다.

시인은 가고 시는 남았다. 박인환의 시는 전후의 폐허를 극복이나 희망의 서사로 환원하지 않고, 도래하지 않은 세계의 잔해 속에서 허무와 우울, 냉소와 감수성을 끝까지 견지한 미완의 모더니즘이다. 그는 그 좌절된 형식 안에서 전후 한국시의 결정적 정조를 정립했다.

출처 : 문학인신문(http://www.munhaki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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