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실재 사이를 걷다.
한 달 전쯤, 아내가 5월의 첫 주말에 서울 여행을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이 육십이 되도록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를 '여행'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제대로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의 결혼식이나 바쁜 출장길에 잠시 발도장만 찍고 내려왔을 뿐. 유일한 기억이라면 까마득한 군대 시절, 외박을 나와 대학로를 무작정 걸었던 짤막한 순간뿐이었다.
공간은 닫혀 있고 시간은 무한했던 스무 살의 군인에게 서울은 경계 밖의 신기루 같았다. 돌이켜보면 젊음이란 늘 자신이 속하지 않은 세계를 동경하는 열병을 앓는 시기다. 그렇게 육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애니메이션 '케이팝 디몬 헌터스'의 배경이 된 장소들을 핑계 삼아 그 거대한 도시의 선을 따라 걷기로 했다.
일정은 첫날은 나의 취향대로, 둘째 날은 딸이 추천한 대학로 공연을 보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은 늘 그렇듯 기대와 묘한 불안이 교차한다. 비싼 숙박비를 피해 경복궁 근처 삼청동에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잡았는데, 예약 후에야 남녀 공용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취소조차 불가능한 그 방은 여행 출발 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짐으로 남았다.
한 달의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가, 어느새 우리는 충전된 전기차를 몰고 서대전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찍 도착해 헤이즐넛 향이 감도는 아메리카노를 아내와 나눠 마시며 딸을 기다렸다. 이윽고 열차를 타러 내려가는 길, 철로 너머로 예전에 살던 관사 터가 눈에 들어왔다. 연꽃못에서 썰매를 타던 풍경은 아파트 숲에 지워졌지만, 기억 속의 겨울은 여전히 선명했다. 추억이 아련한 까닭은 그 풍경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풍경 속에 머물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용산행 KTX에 몸을 싣고 나서야 비로소 여행이 실감 났다. 중앙통로를 오가며 계란과 오징어를 팔던 밀차는 사라졌지만, 용산역에서 아들까지 합류하며 우리 가족 4인의 완전체가 만들어내는 온기는 여전했다.
점심을 먹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서울은 교통카드가 필수인 도시였다. 처음 버스를 타다 보니 내릴 때 하차 태그를 잊어버리는 작은 실수를 했다. 미지의 도시에서는 이런 사소한 엇갈림조차 긴장감을 준다.
거대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빠르게 훑고, 작년에는 품절되어 못 샀던 까치 호랑이 배지를 손에 넣었다.
기억에 남는 건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던 옛사람들의 금붙이들이다. 변하지 않는 금빛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인간의 욕망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두 번째 목적지인 전쟁기념관으로 가는 길에는 잊지 않고 카드를 꼭 쥐었다. 하차 태그를 성공하며 이전의 실수가 무마되기를 바라는, 근거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전쟁기념관 역시 압도적인 스케일이었다.
1만 보를 훌쩍 넘긴 다리를 쉬게 할 겸 1층 보관소에 무거운 가방을 맡기고 카페에서 숨을 돌렸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리창 너머를 보니, 전쟁기념관 내 특별 전시실에서 '쿠푸왕의 피라미드'라는 VR 몰입 체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인공지능이 강력하게 추천했던 기억이 나 피곤해하는 가족들을 설득해 지하로 내려갔다.
조금 어지럽더라도 끝까지 실감 나게 가보자는 생각에 '익스트림 레벨'을 선택했다. 안면 마스크와 특수 안경을 착용하는 순간, 나는 수천 년 전의 이집트로 훌쩍 내던져졌다. 코 밑으로 느껴지는 틈새의 현실이 못내 아쉬울 만큼 압도적인 몰입감이었다. 360도로 펼쳐지는 고대의 풍경 속에서 거대한 피라미드를 올려다보고, 배를 타고, 미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보았다. 관 속에 누운 쿠푸왕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의 감각은 소름이 돋을 만큼 실재 같았다.
오랫동안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 속 허구로만 치부했던 가상 현실은 이미 내 턱밑까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단순히 신기한 시각적 유희를 넘어, 이 기술은 앞으로 우리 삶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꿀 거대한 변화의 시작임이 분명해 보였다. 이미 세상은 그런 징후들로 가득하다. 외과의사들은 가상 현실 속에서 복잡한 수술을 미리 시뮬레이션하고, 건축가들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건물 내부를 직접 걸어 다니며 오류를 찾아낸다. 심지어 치매 환자들에게 과거의 친숙한 환경을 가상으로 구현해 주어 잃어버린 기억을 자극하는 심리 치료에도 쓰인다고 한다. 물리적 육체의 한계와 시공간의 제약을 가볍게 뛰어넘는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현실과 가상의 경계마저 스르르 허물어지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1시간에 가까운 미래의 체험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과거의 전쟁이 남긴 묵직한 현실 위로 걸음을 옮겼다. 기념관을 돌며 마주한 실제 무기들과 참혹한 기록들은, 전쟁이 먼 역사가 아니라 언제든 우리 일상을 부술 수 있는 곁에 있는 위협임을 조용히 경고하고 있었다. 평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세대일수록 한 번쯤은 꼭 마주해야 할 서늘한 진실이었다.
일정 지연으로 남산 타워는 과감히 포기하고 숙소로 향했다. 좁은 골목을 걸어 도착한 삼청동 게스트하우스 앞에는 목련 나무 한 그루와 옛 목욕탕의 굴뚝이 남아 있었다.
우려했던 공용 화장실의 낯설음과 방 안에서 출몰한 다리 많은 벌레의 습격은 싼값의 대가였다. 딸이 잘 잘 수 있을지 걱정하며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어버이날을 기념해 아이들이 예약한 한정식집으로 가는 길, 경복궁의 거대하고 높은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 성 밖의 평범한 백성들에게 이 높고 견고한 담벼락은 어떤 의미였을까. 감히 닿을 수 없는 권력의 크기이자, 동시에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한 무력한 울타리였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도망친 선조를 대신해 텅 빈 궁궐에 불을 지른 백성들의 분노는, 어쩌면 저 견고한 담장이 상징하는 기만에 대한 깊은 절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8가지 코스의 정갈한 한정식을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3만 5천 원이나 하는 막걸리 가격은 조금 부담됐지만 훌륭한 저녁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샤워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 화장실 사용까지 별탈 없이 넘기고 나서야 숙소 선택에 대한 나의 미안함도 조금 씻겨 내려갔다.
둘째 날 아침, 체기가 있는 딸을 쉬게 하고 셋이서 북촌 한옥마을을 걸었다. 아침 8시인데도 정숙을 요구하는 관리원들이 서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 몰려든 인파 속에서 이곳 주민들이 겪었을 피로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곳의 한옥들은 단순히 예쁜 풍경이 아니다. 1930년대, 일제의 세력 확장에 맞서 건축가 정세권 선생이 큰 땅을 사들여 작은 한옥들을 지어 분양한, 일종의 민간 차원의 항일 주거 단지다. 풍경 이면에 숨겨진 역사를 알면 공간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법이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가운데 딸과 합류해 경복궁과 창경궁을 차례로 걸었다. 거대한 경복궁의 위용도 좋았지만, 아기자기하게 산보하기 좋은 창경궁의 빗소리가 유독 마음에 남았다.
대학로에서 점심을 먹고 40년 만에 마로니에 공원을 찾았다. 40년 전, 빳빳한 군복을 입고 대학생들의 자유로운 공기를 부러운 듯 넘겨다보던 청년은 이제 흔적조차 없다. 육십의 노신사가 되어 다시 나타난 이곳엔 비 때문인지 학생들도, 어르신들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광장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특정한 장소를 다시 찾을 때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에 머물고 있을 과거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공간은 그 자리에 있어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청춘을 지워버렸다. 청춘이란 특정한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시간 속에만 피었다 지는 눈부신 신기루 같은 것인가 보다.
이번 여행의 대미는 뮤지컬 <팬레터>가 장식했다.
예술과 환상, 그리고 활자에 미친 1930년대 문인들의 이야기. 때로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상이 비루한 현실보다 인간을 더 깊이 위로하고 구원하기도 한다. 배우들의 신들린 연기와 노래가 끝나고, 환호와 함께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커튼콜 무대를 보는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내 안의 굳어있던 어떤 감각이 깨어나는 듯한,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짙은 감동이었다.
하지만 그 여운을 온전히 음미할 틈도 없이 우리는 다시 현실의 시계에 맞춰 뛰어야 했다. 수원을 거쳐 가야 하는 아들과, 대전에서 내릴 딸의 손에 아내는 각각 5만 원씩을 쥐여주며 저녁을 챙겨 먹으라 당부했다. 짧은 만남과 긴 헤어짐 앞에서는 늘 어미의 마음이 가장 분주하다.
용산역을 떠난 KTX는 서대전역에 우리를 부려놓았다. 12,000원의 주차비는 집으로 곧장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비하면 결코 비싸지 않았다. 딸을 괴정동에 내려주고 금산으로 향하는 길, 따뜻한 칼국수 한 그릇으로 여독을 달랬다.
단 하루 만에 다시 돌아온 금산이지만, 체감상으로는 긴 생을 하나 건너뛰고 온 듯한 기분이었다. 여행이란 결국, 내가 떠나온 일상의 중력과 익숙한 내 자리의 안온함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기 위해 기꺼이 치르는 고단한 의식이다. 수많은 환상과 낯선 시공간을 유영하다 마침내 돌아올 곳이 있었기에, 육십에 처음 떠난 이 1박 2일의 생경한 서울 여행은 비로소 완벽해질 수 있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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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진자 (서울 개봉) 작성시간 26.05.04 라온미르 경기가 다들 안 좋은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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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륵(운영진, 서울) 작성시간 26.05.05 new
일상이 소설로 변하는
라온미르님의 서울탐방기 잘 봤습니다
서울에 살지만 서울을 모르는 서울촌놈인것을 이제 알았네요 ^^ -
작성자라온미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5.05 new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지요.
미륵님께는 공기처럼 익숙한 풍경일 서울이, 이방인의 눈에는 낯설고도 신비롭게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글을 쓰다 보니 5년 전 서울 어딘가에서 미륵님의 매장에 머물렀던 제 모습이 선명해졌습니다.
장소는 희미해졌어도 그곳의 느낌은 아직 남아 있네요. -
작성자다홍모란(광주) 작성시간 26.05.05 new
2013년에 처음으로 서울 구경을 갔습니다.
라온미르 님 처럼 그동안 서울을 셀 수 없이 갔지만, 제가 아는 서울은 버스터미널과 기차역, 지하철역이 전부였습니다.
아이들 핑계로 난생 처음 63빌딩, 남산타워, 코엑스 아쿠아리움, 명동, 인사동, 그리고 여의도 공원 불꽃축제를 보았습니다.
우리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 -
답댓글 작성자라온미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시간 4분 전 new
모란님 댓글 보니 1박2일 일정으로 두번은 더 가야 겠네요.
63빌딩,남산타워,명동,인사동, 여의도 공원등
그런데 호텔이 너무 비싸더라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