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 새로운 눈은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일상의 아주 작은 균열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간호사로 교대 근무를 하는 아내의 한 달 치 휴무표를 살피다, 6월 첫째 주에 찾아온 이틀짜리 주말 휴일을 발견했다.
평일에 쉬는 일이 많은 아내에게 주말 연휴란 밀수품처럼 귀하고 비밀스러운 것이다.
그 순간, 코로나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흐지부지되었던 '프로야구 10개 구장 순례'라는 오래된 계획이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우리는 그때까지 대전과 수원, 겨우 두 곳의 좌표만 찍어 둔 상태였다.
달력을 보니 6월 6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경기가 있었다.
예매창을 열었을 때 좌석은 이미 매진이라는 차가운 벽에 막혀 있었지만, 인간의 간절함은 가끔 디지털의 틈새를 뚫고 기적을 만든다.
수없이 새로고침을 누른 끝에 극적으로 낚아챈 두 장의 티켓. 원정팀 한화 이글스의 3루가 아닌 홈팀 롯데 자이언츠의 1루 최상단 좌석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여행의 신이 우리에게 부산으로 가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었으니까.
진짜 난관은 그 다음부터였다. 기차표가 없었다.
토요일 대전에서 부산으로 가는 KTX는 전석 매진.
간신히 경기 시간에 맞춘 SRT를 구했지만, 다음 날 돌아오는 표는 밤 10시가 넘은 시간의, 뚝 떨어진 좌석뿐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가야 해?"
진을 빼며 예매를 마친 내게 아내가 던진 한마디는 묵직했다.
대전에 도착하면 밤 11시 45분, 집이 있는 금산에 닿으면 새벽 1시. 잠시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여행이란 본디 안락함을 포기하고 불편함을 사들이는 행위가 아니던가.
다음 날 새벽부터 다시 어플을 뒤적였고, 결국 저녁 6시 45분 출발의 좀 더 인간적인 시간대의 표를 구해냈다.
5호차와 8호차로 떨어진 자리였지만, 아내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그것으로 출항 허가가 떨어졌다.
6월 6일, 밤샘 근무를 마친 아내를 태우고 캐스퍼의 시동을 걸었다. 대전역으로 향하는 길,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미지의 공간으로 향할 때, 인간의 뇌는 가벼운 불안과 함께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진화론적으로는 위험에 대비하는 신호였겠지만, 현대의 여행자에게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가장 달콤한 자극제다.
대전역 주차장은 이미 만석이었지만, 하상 무료 주차장 구석에서 오직 우리 캐스퍼만이 들어갈 수 있는 절묘한 빈틈을 발견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듯한 유쾌한 예감. 이번 여행은 시작이 좋았다.
1시간 반은 KTX의 속도만큼 빠르게 흘렀고, 부산역에 내린 우리는 곧장 지하철로 향했다.
그곳에서 같은 목적지를 향하는 '우군(友軍)'들을 만났다. 주황색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흐름을 이루었다.
그들의 등에는 최근 가장 뜨거운 선수의 이름부터 추억 속 레전드, 심지어 아주 오래전 팀을 지휘했던 감독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었다.
유니폼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개인이 소장한 기억의 아카이브였다.
초행길이었지만 그 움직이는 기억들을 따라 걷다 보니, 거대한 사직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심 한복판에 우뚝 선 사직구장은 거대한 콜로세움을 닮아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인상을 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이었다.
인간은 왜 이토록 좁고 시끄러운 곳에 모여 열광하는가.
아마도 일상이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거대한 집단적 환희에 자신을 의탁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행복 지수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처음엔 1루 측에 잠시 앉아 있다가, 결국 서서 보더라도 맘껏 소리칠 수 있는 3루 원정 응원석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이 터져라 응원한 보람이 있어, 경기는 짜릿한 역전승으로 끝났다.
승리의 기쁨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9회말 2아웃, 이미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순간에도 율동을 멈추지 않던 한 롯데 여성 팬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야구는 이기고 지는 승부 이전에, 이 순간을 즐기는 삶의 축제 자체였을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2만 3천 명의 인간 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거대한 군중 속에 섞이는 순간, 골방에서 붙들고 있던 사소한 고민과 후회들은 얼마나 보잘것없이 작아지는가.
군중은 때로 개인의 고독을 치유하는 가장 거대한 처방전이 된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영도 입구 근처에 위치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다음 날, 계획에 없던 용두산 공원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15층 객실 창문 너머로 훤히 보이던 용두산 전망대 때문이었다. 그 우뚝 솟은 탑을 보는 순간, 내 안의 오래된 서랍 하나가 스르륵 열렸다.
1978년, 내가 열두 살이던 해 여름방학 끝자락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경영난으로 몹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부산의 한 거래처에서 현금을 받는 조건으로 화물차(용차) 가득 짐을 실었고, 아버지도 그 차에 올라타야 했다.
철없던 열두 살의 나는 그저 '부산'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가고 싶어 아버지를 졸라, 좁고 딱딱한 화물차 가운데 자리에 끼어 앉았다.
그러나 부산의 현실은 혹독했다.
거래처는 차일피일 돈을 미뤘고, 준비 없이 떠나온 나흘 밤낮을 우리는 갈아입을 옷도 없이 허름한 여관방에서 버텨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까맣게 타들어 가던 아버지의 얼굴. 그 시절 우리 부자의 유일한 도피처이자 무료함을 달래주던 곳이 바로 용두산 공원이었다.
50년 가까이 흘러 다시 찾은 용두산 공원은 초입부터 낯설었다.
기억 속 가파르던 '194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가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뽐내며 나를 실어 날랐다.
공원을 천천히 거닐며, 내 마음은 자꾸만 1978년의 그 뜨겁고 고단했던 여름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때의 부산은 내게 용두산 공원과 짜장면 한 그릇, 그리고 간신히 수금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얼굴이 펴진 아버지와 함께 갔던 태종대의 푸른 바다로 각인되어 있다.
부산은 내 생애 최초로 '설레임'과 '초조함'이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감정을 동시에 가르쳐 준 도시였다.
어린 날의 희미한 추억을 선명하게 덧칠하듯, 우리의 영도 여행은 용두산 공원을 시작으로 흰여울 문화마을, 태종대, 해양 박물관, 그리고 화려한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아르떼 뮤지엄을 거쳐 다시 부산역으로 이어졌다.
보슬보슬 내리는 유월의 비는 영도의 열기를 식혀 주어 오히려 걷기에 다정했다.
서두르지 않아도 좋을 만큼 기차 시간은 넉넉했고, 모든 것이 무난하고 평화로웠다.
금산 집에 도착하니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시원한 시골 공기를 마시며 이번 여정을 되짚어 본다.
우리는 왜 끊임없이 길을 떠나는가. 일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역할'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남편으로, 아내로, 혹은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자아는 조금씩 마모된다.
여행은 그 고정된 좌표에서 우리를 강제로 이탈시키는 행위다.
낯선 도시의 길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저 풍경을 바라보는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를 짓누르던 일상의 무게를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사직구장의 함성 속에서 일상의 스트레스를 씻어내고, 용두산 공원의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과거의 어린 나와 아버지를 만나 위로받았던 것처럼.
여행은 단순히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내면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영혼의 세척 과정이다.
짧았던 주말의 부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나는 어제와 같은 집에 서 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나는 분명 떠나기 전의 내가 아니다. 여행은 언제나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내가 이 중독 같은 여정을 결코 끊을 수 없는 이유다.
---https://youtu.be/8S8EVtt7S50?si=113zsgFJeD0DYq8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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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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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라온미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3 어딘가에 올리기 위한 글이 아닌, 저만의 기억을 온전히 붙잡아두기 위한 일기 형태의 개인적인 기행문 입니다.
오늘은 마이산에 왔는데 날씨가 참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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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다홍모란(광주) 작성시간 26.06.14 여행기도 소설만큼 잘 쓰셨군요!
멋집니다.
요즘 저는 주시기하고 사투를 벌이고 있느라...ㅎㅎ ~~
안좋은 더 나빠졌습니다 .. ㅠㅠ -
답댓글 작성자라온미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오늘은 좋은 소식 있을 것 같네요 ~^^
화이팅 입니다! -
작성자진자 (서울 개봉) 작성시간 26.06.15 수금하는 난제는 주식에 투자하고 결과가 어떨지 하늘에 맡겨야하는 것과같은 고통시간이만 아버지 따라가서
느낀 어렸을때 여행기 읽으면서 감탄하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라온미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항상 감사드립니다 ~^^
활기찬 월요일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