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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과경沙門果經; 수행자 삶의 결실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

작성자moosim park|작성시간19.05.31|조회수505 목록 댓글 0


《사문과경沙門果經; 수행자 삶의 결실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

연꽃이 왜 불교의 상징인가

봄이 지나고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산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꽃보다 열매이다. 봄에 핀 꽃이 결실을 맺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꽃이 피면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비록 그 꽃이 작을 지라도 열매는 얼마든지 클 수 있다. 감나무는 꽃이 있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작은 꽃이 피지만 열매만큼은 무척 크다. 그러나 꽃은 화려 하지만 열매는 별 볼일 없는 것도 있다. 꽃이 화려하기로 으뜸가는 장미의 경우 열매가 달려 있는지조차도 모를 정도이다. 

꽃과 열매가 동시에 나오는 연꽃은 모든 꽃 중에서 예외이다. 일반적인 꽃들은 꽃이 지고 나서 결실을 맺는데, 연꽃은 꽃이 핌과 함께 동시에 결실을 맺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유 때문에도 불교의 상징을 연꽃이라 하나 보다.

• 도를 닦아 열매를 맺는

흔히 도를 닦는다고 한다. 도를 닦는 사람을 도사라고 한다. 하지만 심산유곡에서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 동안 도를 닦아도 결실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마치 꽃이 피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겉모습은 화려한 꽃이라도 열매가 없다면 보기는 좋지만 실익이 없다. 마찬가지로 산 높고,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평생 도를 닦았지만 결실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도를 닦으면 결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르치신 도(팔정도)를 닦는 수행은 꽃이 피어 열매를 맺듯이 도를 닦아 과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도과道果를 사향사과라 한다.

• 수행자 삶의 결실

도를 닦아 열매를 맺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의 결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자 삶의 결실에 대하여 이야기하셨다. 구체적으로 사문(출가수행자)의 삶의 결실은 어떤 것일까?

《사문과경沙門果經(Sāmaññaphala Sutta; 사문 생활의 결실 경), DN2》이 디가니까야에 있다. 부처님이 마가다국의 국왕 아자따삿뚜의 질문에 응해서 수행자 삶(생활)의 결실에 대하여 설(설명)하신 것을 기록한 경이다. 사문沙門은 고대인도어 사만나Samaṇa를 한문으로 음사한 것으로 출가수행자를 총칭하는 말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현세에서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수행자 삶의 결실에 대하여 설(설명)하셨다. 마치 연꽃에서 꽃과 열매가 동시에 발생되듯이 부처님 가르침(부처님이 가르치신 수행법)을 따라 바르게 실천하면 반드시 현세에서 결실을 맺는다.

•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의 동문서답

하지만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가르침은 현세에서 결실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화려한 꽃이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처럼. 이는 경에서 아자따삿뚜왕이 전하는 (육사외도 중 하나인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아자따삿뚜왕이 뿌라나 깟사빠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세존이시여, 저(아자따삿뚜왕)는 뿌라나 깟사빠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뿌라나 깟사빠에게 ‘현세에서 눈에 볼 수 있는 수행자 삶의 결실을 보여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처럼 말하자 뿌라나 깟사빠는 저에게 

‘대왕이여, 업을 짓거나 업을 짓게 만들어도, 도륙하거나 도륙하게 만들어도, 학대하거나 학대하게 만들어도, 슬픔을 주거나 슬픔을 주게 만들어도, 억압하거나 억압하도록 만들어도, 협박하거나 협박하도록 만들어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고, 남의 집에 침입하고, 재산을 약탈하고, 노상에서 강도질하고, 타인의 아내를 농락하고, 거짓말을 해도 악을 짓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 땅의 생명체들을 칼날 테로 만든 수레바퀴로 조각내어 부수고 짓이기고 한 덩어리로 만든다 해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으며,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

비록 갠지스 강의 남쪽에 가서 살해하거나 살해 하게 만들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악은 없고,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습니다.

비록 갠지스 강의 북쪽 언덕에 가서 보시하거나 보시하도록 만들도, 그것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공덕은 없고, 공덕의 과보도 없습니다. 베풀고, 수양하고, 자제하고, 진실을 말해도, 생겨나는 공덕이 없으며, 공덕의 과보도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경에 따르면 뿌라나 깟사빠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다. 왕이 현세에서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수행자의 결실을 말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엉뚱하게 ‘도덕부정론(또는 인과부정론)’을 말한 것이다.

• 열매가 없는 꽃과 같은 육사외도사상

도덕부정론에 따르면 ‘살생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다. 악에서 오는 과보도 없기 때문에 살생, 도둑질, 음행을 하여도 전혀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또 ‘보시에 대한 과보도 없어서 보시로 공덕을 쌓을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도덕부정론자(또는 인과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의 말에 왕은 만족할 수 없었다.

육사외도의 가르침, 즉 산자야 벨랏띠뿟따(회의론, 불가지론; 진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산자야의 제자 가운데 뛰어난 사람 두 명이 있었으니, 바로 사리뿟다와 목갈라나이다. 이 둘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고 다른 제자 250명과 함께 석가모니에게 귀의함. 산자야는 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함), 니간타 나타뿟따(금계제어론; 산자야의 회의론을 극복하려고 상대주의적 인식론을 수립하고 이원론적 우주론을 제시. 영혼이 물질로 흘러 들어가서 영혼이 물질에 묶여 있어 현실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고 주장. 영혼이 물질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행을 주장), 아지따 께사깜발린(유물론적 쾌락주의; 유물론자이자 단멸론자. 영혼과 육체를 동일시. 사후세계 부정,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의 목적은 현세의 쾌락, 행복,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선행과 악행의 결과는 없다, 윤회도 없고 선악에 따른 과보도 없으므로 도덕을 부정하였음), 막칼리 고쌀라(유물론, 숙명론, 윤회청정론; 아지비카 교단의 교조, 자이나교와 유사한 교설을 펼쳤고 교세에 있어서도 자이나교에 다음갔다. 교설은 후에 자이나교에 흡수 통합됨. 일체의 구성요소로서 12원소설을 주장, 12원소 가운데는 영혼도 포함, 인간의 영혼도 하나의 원소로 파악했던 유물론자. 인과와 업보를 부정하고 무인無因 무연無緣을 주장,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수행으로 해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 모든 인간은 8백 40만 겁을 윤회하는 동안 저절로 고통이 없어져 스스로 해탈한다는 윤회청정론 주장), 빠꾸다 깟짜야나(칠요소설, 숙명론의 변종; 7요소 가운데는 생명, 영혼도 포함. 상주불멸론, 7요소는 항상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생명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명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이라고 주장, 그러므로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죽이는 자도 없고, 살해되는 자도 없다고 주장함. 왜냐하면 칼로 인간의 목을 자른다고 해도 인간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곱 가지 요소 사이로 칼이 지나갈 뿐이라는 도덕부정론,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음), 뿌라나 깟사빠(도덕부정론, 인과부정론, 우연론; 노예 출신. 선악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마음대로 정의한 것이며 실제로 선악은 없다고 주장. 살생, 도둑질, 간음 등의 악행을 저질러도 인간이 임의로 정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악행을 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함. 반대로 보시와 방생 같은 선행을 한다고 해도 그것 역시 인간의 관념에 따른 것이므로 선행은 아니라고 주장함. 따라서 업은 없으며 업에 의한 응보도 없고, 업보도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길흉화복은 인과나 운명이 아니라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주장함. 당시에 도덕과 인과응보를 부정하는 추종자들이 많았음) 등의 가르침은 모두 현세에서 결실을 볼 수 있는 수행자의 결실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었다. 단지 겉보기에 화려할 뿐 열매가 없는 꽃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 수행자 삶의 일반적인 결실

아자따삿뚜왕은 (육사외도 중 하나인) 도덕부정론자 뿌라나 깟사빠의 동문서답에 실망하였다. 그래서 부처님께 현세에서 볼 수 있는 수행자 삶의 결실에 대하여 말해 달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현세에서 볼 수 있는 수행자 삶의 결실을 설(설명)해 주셨다.

먼저 수행자 삶의 일반적인 결실이 있다. 누구나 수행자가 되어 청정범행을 닦으면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왕의 하인’을 예로 들었다.

왕의 시중을 드는 하인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인이 생각하기를 “왕이나 나나 같은 인간이다. 그런데 왕은 어떤 큰 공덕을 지었길레 현세에서 엄청난 복을 누릴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도 왕과 같은 복을 누릴 수는 없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인 주제에 왕이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방법은 있다. 출가하여 도를 닦아 과를 이루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인은 출가하여 청정범행을 닦았다. 그래서 소욕지족의 삶을 살며 ‘멀리 여읨(paviveke)’을 즐겼다.

이런 소식을 듣게 된 왕은 더 이상 그를 예전의 하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번뇌를 다한 출가수행자로서 존중해 주었다. 그래서 왕은 그에게 인사하고 일어나 자리를 권하고 경의를 표하며 환영하였다. 그리고 네 가지 필수품을 보시하였다.

그 하인은 더 이상 왕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다. 왕보다 더 수승한 복전이 된 것이다. 부처님은 이런 예를 들면서, 이것이 수행자 삶의 일반적인 결실이라고 말씀하셨다.

• 수행자 삶의 보다 높은 탁월한 결실

그런데 수행자 삶의 보다 높은 탁월한 결실이 있다. 부처님은 이를 아자따삿뚜왕에게 설(설명)해주셨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떻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하여 청정한 믿음의 수행자가 되는가를 설명한다.

2) 어떻게 그가 짧은 계행과 중간 계행과 긴 계행을 확립하는가를 설명한다.

3) 어떻게 '감각 기관(기능)의 문을 수호(또는 단속)'(indriya-saṁvara)해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는가를 설명한다.

4) 어떻게 마음챙김(사띠sati)을 확립하고 알아차림(삼빠자나sampajañña)을 갖추는가를 설명한다.

5) 어떻게 만족(santosa; 小慾知足)하는가를 설명한다.

6) 어떻게 다섯 가지 장애(pañca nīvaraṇāni)를 제거하고 네 가지 선정(초선初禪paṭhama-jhāna, 二禪dutiya-jhāna, 三禪tatiya-jhāna, 四禪catuttha-jhāna)을 차례로 얻을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즉 ‘사마타[사마디(삼매) 바와나(계발 수행); 다섯 가지 장애(오개)를 제거하고 네 가지 선정(색계삼매)을 계발하는(닦는) 수행]'를 설명한다. 

7) 어떻게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보다 높고 탁월한 앎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 네 가지 근본 물질작용(四大) 무더기로 이루어진 집적(몸)에 대한 앎, 즉 '이 몸은 물질로 되어 있고, 네 가지 근본 물질작용(四大) 무더기가 연기작용(인연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의 식(識; viññāṇa)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꿰뚫어(통찰하여, 깊이 관찰하여) 안다.
- 네 가지 정신작용(수상행식) 무더기로 이루어진 집적(마음)에 대한 앎
- 하늘귀에 대한 앎
- 타자의 마음에 대한 앎
- 전생의 삶에 대한 앎(숙명명)
- 하늘눈에 대한 앎(천안명)

위의 여섯 가지 항목은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지혜) 바와나(계발 수행); 사마타 후에 사마타의 선정 삼매 상태에서 계발되는 극대화된 고요집중의 사띠 능력을 사용해서 통찰(깊은 관찰) 지혜를 계발하는(닦는) 수행]’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위의 여섯 가지 앎이 '통찰(깊은 관찰)에 의한 앎'인 ‘위빠사나 지혜(vipassanā-ñāṇa)’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 번뇌의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누진명, 멸진명)

위의 마지막 앎이 ‘모든 번뇌가 완전한 소멸하는 누진(멸진)을 성취하여 생기는 궁극의 앎’이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수행자가 되어 계를 지키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면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더 탁월한 결실은 위에 언급된 여덟 가지이다. 이는 수행자가 거두는 보다 높고 수승한 열매와 같다. 그래서 도(팔정도, ariyo aṭṭhaṅgiko magga)를 닦는 수행으로 현생에서 ‘도(道, magga)’를 이루어 ‘과(果, phala)’를 맺는 것은 연꽃이 꽃과 동시에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처럼 도와 과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다.

• 수행자 삶의 궁극의 결실

경에 말미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대왕이여, 예를 들어, 산꼭대기에 맑고 고요하고 청정한 호수가 있는데, 그 곳에 눈 있는 자가 언덕에 서서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 호수는 맑고 고요하고 청정하다. 이곳에 조개류나 모래와 자갈이나 물고기의 무리가 움직이거나 서 있다.’라고 알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수행자는 마음이 삼매에 들어 청정해지고 고결해지고 티끌 없이 오염을 여의어 유연해지고 적응성이 뛰어나 부동에 도달하여, 번뇌를 부숨에 대한 궁극의 앎으로 마음을 지향하게 하고 기울이게 하여, 마침내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발생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그는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압니다.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았을 때, 그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에 대한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합니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는 궁극의 앎이 일어나며, 그는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고, 더 이상 윤회 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압니다.

대왕이여, 이것이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궁극의 결실입니다.

대왕이여, 이것과는 다른, 현세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수행자 삶의 보다 뛰어나고 보다 탁월한 결실은 없습니다.” - 《Sāmaññaphala 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 니까야 D2, 전재성역》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자 삶의 궁극의 결실은 ‘윤회의 종식’이다. 청정범행을 닦아 모든 번뇌를 부수어 해탈하고 더 이상 생사의 윤회를 가져오는 업을 짓지 않게 될 때 수행자의 삶에 대한 결실은 완성되는 것이다.

•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의 극복

부처님 당시에는 사상의 대 혼란기였다. 그래서 ‘원래 있는 것’이라든가 ‘원래 없는 것’이라든가 등등의 갖가지 사상들이 난무하였다.

‘원래 있는 것’이라는 ‘절대유(絶對有)’에 대한 견해는 ‘영원주의 견해’(상견)를 말한다. 이 세상의 근원이 되는 실재(또는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궁극적 실재(실체)를 찾는 수행을 한다. 그래서 궁극적 실재(실체)로서의 진짜 나(진아, 대아, 우주아)와 합일하는 것을 깨달음이라 한다. 이것이 브라만교(힌두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개아인 아뜨만과의 합일(범아일여)이다. 

다음으로 ‘원래 없는 것’이라는 ‘절대무(絶對無)’에 대한 견해가 있다. 이런 견해는 ‘허무주의 견해’(단견)에 해당된다. 육사외도의 견해 중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나와 만물은) 원래 없는 것이기에 도덕적으로 금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한다. 경에서 뿌라나 깟사빠가 말하는 도덕부정론(또는 인과부정론)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부처님 당시 사상의 사조는 ‘영원주의 견해’(상견’)와 ‘허무주의 견해’(단견)가 지배하였다. 이런 극단이 진실이 아님을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증명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셨다. 그런 중도는 ‘중간 길’이 아니라 ‘바른 길’이다. 그 바른 길은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 이것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다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길 가운데 팔정도가 최상이고, 진리 가운데 사성제가 최상이다.(Dhp 273)”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팔정도와 사성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며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이 사성제('고집멸도'성제) 중 도성제로 가르치신 '팔정도를 닦는 수행'을 바르게 실천하여 완성하면, 부처님의 경험이 아닌 자신의 직접 경험으로 사성제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게 된다. 

흔히 선사들이 “너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알라”고 말하지만 일반인에게는 물론 선사의 제자들에게조차도 잘 먹혀 들어가지 않는 말이다. 

부처님이 첫 제자인 다섯 비구(출가수행자)에게 설하신 첫 설법을 기록한 경전을 《초전법륜경》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부처님은 첫 제자들에게, “너 자신이 본래 부처인 것을 알라”고 뜬구름 잡듯이 말하신 게 아니라, 사성제(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차근차근 설(설명)해 주셨다.

왜 수행을 해야 하는가?
근원적 괴로움(둑카)을 품고 있는 삶은 본질적으로 괴로우니까.(괴로움의 진리; 고苦성제)

그럼 괴로움은 왜 일어나는가?
괴로움이 일어나는 데는 근본 원인이 있다.(연기의 진리; 집集성제)

그럼 수행을 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그렇다. 근본 원인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조건 없는 사랑; 자비)과 완전한 행복(조건 없는 행복; 열반)의 경지(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열반의 진리; 멸滅성제)

그럼 어떻게 수행하는가?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방법의 진리; 도道성제)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진리는 이 네 가지이다. 이것 외에 다른 진리가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이 천명하신 이 네 가지 진리, 이것만큼 강력한 메시지는 없다.

《코끼리 발자국 비유의 경》에서 사리뿟따(사리불, 사리자)가 설명하듯이, 부처님이 듣는 사람의 수준(근기; 경험, 소질, 적성, 성향, 성격, 여러가지 능력-이해력, 인내력, 집중력 등)과 처지(처해 있는 상태; 사정이나 형편, 환경, 상황 등)에 맞춰서 설하신 모든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은 사성제 가르침에 포괄되고, 부처님이 듣는 사람의 수준(근기)과 처지에 맞춰서 가르치신 모든 수행법(이른바 37조도품 등)은 사성제('고집멸도'성제) 중 도성제로 가르친 '팔정도를 닦는 수행'에 포괄된다.

혹자는 "팔정도는 구체적인 수행법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이고 원론적인 것이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경전(이른바 불설 경전; 즉 변질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부처님의 설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여 '팔정도'와 '팔정도를 닦는 수행'의 차이조차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팔정도를 닦는 수행법을 제대로 정확히 알게 되면 이것만큼 구체적인 것도 없다.

- 진흙속의연꽃 포스팅 中에서
[출처 :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6UOF&articleno=16155629 (일부 수정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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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식물, 꽃, 자연, 실외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法을 바르게 실천하면 그 결과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 각자에게 즉시 체험(직접 경험)됩니다. 그것이 법이 지니고 있는 덕목입니다. 일반적인 꽃들은 꽃이 지고 나서 열매를 맺는데, 꽃이 핌과 동시에 즉시 열매를 맺어가는 연꽃은 모든 꽃 중에 예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 때문에도 불교(부처님 가르침)의 상징을 연꽃이라 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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