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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비가 갠 뒤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18|조회수55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60422698

어제부터 내리던 비가 아침 무렵에 그쳐서 길을 따라서 반짝반짝 빛나는 물웅덩이가 군데군데 생겨났다.

대학교 2학년 봄.
장마가 오기엔 아직 조금 이르다.

대기층을 투과해서 부드럽게 내리쬐는 빛.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로를 걷는다.
양지 바른 곳에 잠시 멈춰서 있듯이 버스 정류장이 있다.

후우하고 숨을 토하고 무늬가 선명한 벤치에 걸터앉았다.

벤치 끝에 이미 나 말고 한 명 더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한 순간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놀랐지만 금방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고쳐 앉았다.

머리 모양이 전혀 다르다.
게다가 그 사람이 여기에 있을 리 없으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이에 그 사람과 처음 만난 건 지금 같은 계절이었던가 생각했다.

아니, 분명히 장마가 시작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1년이 채 못 되는 시간이 흐르기 전.
그녀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문 너머로 평범한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몇 년이 지나도 체험하지 못 할 것들을 보거나 맛보았다.

물론 문 같은 건 그냥 비유다.
하지만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 문 중 하나가 닫혔다.
이제 열 수는 없을 것이다.

봄이 왔을 무렵, 조용히 정리하는 겨울 물품들처럼 그녀는 떠나갔다.

그 일을 떠올리면 무척이나 감상적으로 변하는 내가 있다.

결국 내 마음을 전하지 못 했다.
그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앙금처럼 뭉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눈앞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울면서 날아올랐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봄날 버스 정류장에서 조는 듯이 그런 생각을 했다.

“꿈을 꾼다는 건 와 닮았어.”

하늘에서 피아노 음색이 들렸다.
그런 착각이 들었다.
벤치 끝에 앉아 있는 여성이 앞을 바라본 채 한 번 더 말했다.

“꿈을 꾼다는 건 와도 닮았어.”

봄날 부드러운 땅에서 얼음이 녹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이 삐걱삐걱 심장을 옥죄기 시작했다.
갑자기 녹슨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목을 그래도 조금 움직여서 옆을 보았다.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
하늘색 원피스에서 쭉 뻗어 나온 다리로 보건데 상당히 키가 커 보인다.

한 번 더 말한다.

“꿈을 꾼다는 건 ”

또 일부분이 들리지 않는다.
아니, 들리는데도 머릿속에서 인식되지 않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알고 있었다.
대뇌 속에서 오래된 동물적인 부분이 반응하고 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그 애가 가지고 있는 게 갖고 싶었어. 얻어도, 얻어도 신기루처럼 사라졌지. 이것도 그 애랑 똑같은 길이로 기를 생각이었는데.”

그녀는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만졌다.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걸 영원히 얻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 한 번은 거기에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비가 갠 뒤 퍼진 청정한 공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시원스러운 목소리였다.

“손에 닿은 그 감촉이 환상이었다니.”

슥- 손을 내린다.
눈을 감은 채 앞을 향하고 있다.
그 옆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다.
깨닫기 시작했다.
똑같은 길이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 날 그 사람은 자기 ‘반쪽’을 잃었다.
그 수수께끼가 지금 풀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군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말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말하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인식되지 않는 감각.
긍정하듯이 하얀 손이 벤치 위에 놓아둔 지팡이를 끌어당긴다.

“그 애가 가진 오직 하나밖에 없는 건 얻을 수 없었지만 대신에 근사한 세계를 얻었어.”

음악 같은 말이 귀를 간질인다.
마치 마약 같다.
그 목소리를 좀 더 듣고 싶다.
부서지기 쉬운 보석 같이 대화가 계속되었다.

“밤이 그 입구가 되고, 나는 사랑을 깨달은 소녀처럼 새로운 세계를 기다리고 있어. 잠이 알이 되고 나는 그걸 품에 안아. 그리고 꿈을 꾼다는 건”

말이 사라진다.
하지만 알 수 있다.
그녀는 그 사람의 악몽을 얻은 것이다.

악몽을 먹는다는 악마가 부르는 악몽.
그 사람을 괴롭혔던 악몽.
그 강한 사람이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단 한 번이라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그 악몽을.

그녀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들리는데 들리지 않는다.
현실감이 없다.
허벅지를 꼬집으려다가 망설였다.
그녀가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서.

그 사람이 가진 ‘반쪽’은 그녀가 소멸시켰다.
그녀는 그걸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조금 어리게 보이는 나’ 라고 표현했던 걸 떠올렸다.
즉 그 사람에게밖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인지할 수 없었던 ‘반쪽’ 은 언젠가 찻집에서 아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있던 그 ‘반쪽’ 은 머리카락이 길었던 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고 손이 닿지 않던 곳에 있던 그녀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어떤 방법으로 그 ‘반쪽’ 을 보고 잡았다.

그 사람을 얻을 생각으로.

그리고 ‘반쪽’ 과 ‘악몽’ 은 사라졌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두 가지로부터 동시에 해방되었다.

그리고 떠나갔다.

“라만차의 남자는 여전하니?”

아름다운 선율 같은 목소리가 지나간다.
곧바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기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을 지켰던 인물을.

“여전히 허풍을 떨고 있어요.”

조금 흥분해서 한 그 말에 그녀는 만족한 건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가 그를 라만차의 남자로 비유한 건 둘시네아 공주면서 알돈소였던 그 사람의 이중성을 암시하려던 것이었다.

이것은 후에 그의 비밀에 다가갔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지만 그건 또 다른 이야기다.

침묵이 흘렀다.
조금 전에 날아올랐던 까마귀의 기분을 이해한다.
지금 이 버스 정류장 주위에는 두 사람 말고 움직이는 물체의 그림자 하나 없다.

그저 부드러운 대기에 싸여 있을 뿐이다.

그녀가 있는 방향이 “공간이 일그러져 있다.” 라고 예전에 그 사람이 말했었다.

눈을 감은 채로 있으면 마치 잠자는 것처럼 온화한 옆얼굴로 보인다.

그녀는 적어도 고등학교 시절에는 맹인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체 왜 시력을 잃게 된 것일까.
상상하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혹시 시력을 잃지 않는다면 그리고 기적처럼 오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나 그가 도저히 당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건 추측 같은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격이 다르다.” 라는 말 같은 건 쓰고 싶지 않았다.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배기가스 냄새를 두르고 버스가 도착했다.
그 순간 이 버스 정류장을 덮고 있던 신비로운 막 같은 공기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해방된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 버스가 멈춰서며 문이 열렸다.
내가 탈 버스였던 걸까.
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디를 가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이 버스를 타야 한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벤치에서 일어나서 후들거리는 무릎을 재촉하며 걸어갔다.

“이거.”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시원하게 뻗은 목덜미에서 펜던트 같은 걸 떼내었다.
탤리즈먼이었다.
그 사람이 이전에 오색지도 탤리즈먼이라고 부르던 물건이다.

“어디에 좀 버려줘. 이제 내겐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

그녀가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을 멈추고 똑바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고,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띠는 그 얼굴을 평생 잊지 못 할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을 본 적 없다.
앞으로 인생을 살면서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깊은 감동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흡혈귀라는 말 따윈 쓸모없다.
그런 말로는 그녀의 측면을 설명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자.”

한 번 더 그녀는 웃는 것처럼 말했다.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짤랑하고 쇠사슬이 소리를 울린다.
희미하게 녹 냄새가 났다.
불가사의한 무늬가 원형 플레이트 한 면에 그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라고 불렸던 물건 같지 않았다.

평면에 그려진 어떤 지도도 반드시 4색 이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시험해볼 것도 없이 알 수 있다.
분명히 이것도 4색으로 간단히 나누어질 것이다.
적어도 그녀의 손을 떠난 지금은.

점잖게 경적이 울린다.
승강구에 슬쩍 발을 걸쳤다.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을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서.
메마른 공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 또 하나 닫힌 것이다.

이윽고 얼빠진 테이프 소리가 다음 목적지를 알린다.
움직이기 시작하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충동적으로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하지만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그림처럼 잘라낸 창문 속에서 멀어져가는 비가 갠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벤치에서 일어서서 하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그 가느다랗고 긴 다리가 방황하는 것 같은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물웅덩이를 밟고 물이 튀어서 그게 아련히 은색으로 빛나는 게 보였다.

그녀를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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