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공포방

[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추적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18|조회수52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60423244

대학교 1학년 겨울.
이른 아침부터 동아리 부실에서 코타츠에 들어간 채 움직이지 않게 되어서 나는 빨리도 오늘 강의를 빼먹기로 결정했다.

몇 명이 나가고 그걸 대신해 편의점 비닐 봉투를 들고 나타나서는 코타츠에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떠나갔다.

이윽고 혼자만 남게 되어서 나도 역시 강의에 나갈까 생각하고 창밖을 바라보다가 그 시린 겨울하늘에 목을 쏙 집어넣고 코타츠에 깊이 몸을 쑤셔넣었다.

꾸벅거리다가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그 상태에서 손을 뻗어서 머리 위에 있는 선반을 부스럭부스럭 뒤져서 옛날 동아리 공책을 꺼내서 읽었다.

문득 선반 구석에 공책이 아닌 소책자를 발견했다.
느릿하게 그걸 빼냈다.
‘추적(追跡)’ 이라는 글자가 표지에 적혀 있었다.
꽃으로 보이는 일러스트가 실린 그 책은 아무래도 직접 만들어서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동인지처럼 만든 것 같다.

A4 재생지로 60페이지 정도 된다.
휙휙 넘겨보니 안에는 활자투성이었다.

……

한밤중 내 방 위를 거인이 건넙니다.
거인은 무게도 없이 냄새도 없이 소리도 없이 투명하고 결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숲에서 마을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곳으로 살금살금 살금살금 걷는 겁니다.

……

단편소설 같다.
‘거인(巨人)’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나는 어째서인지 페이지를 넘겼다.

……

공원에서 놀고 있는 여자애를 납치한 건 애완동물로 기르던 개가 죽은 후였다.

집에 있는 지하실에서 길렀지만 전혀 말을 따르지 않기에 눈을 짓뭉개 보았다.

그러자 소녀는 순순히 복종하게 되어서 애완동물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식사는 하루에 2번.
일하러 가기 전과 돌아온 후에 주었다.
입구는 하나뿐.
내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자물쇠가 잠긴 문.
소녀에게 이름은 없다.
난 애완동물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2년이 흘렀다.
문득 생각나서 지하실 벽에 창문을 박았다.
물론 그저 장식이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소녀에겐 이렇게 말했다.

“창 너머에는 바다가 있어.”

……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책자를 덮었다.
아까 하고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이후에 유쾌한 전개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시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도 가짜 인간을 찾아서 걷는다.
가짜 인간은 인간인 척한다.
인간처럼 먹고, 인간처럼 움직이고, 인간처럼 웃거나 운다.

나는 가짜 인간을 길가에서 공원에서 터널에서 학교에서 빌딩 안에서 그리고 때때로 다른 사람 집 안에서 발견하고 그 녀석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는 것이다.

“너는 인간이 아니야.”

그렇게 하면 가짜 인간은 흐물흐물 녹듯이 사라진다.
그 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내 마을은 상당히 한산해졌다.
앞으로 가짜 인간이 몇 마리나 남아 있을까.
나는 어서 혼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하면 아무도 내 귓가에 비밀의 말을 속삭이지 않을 테니까.



이건 짧았기에 전부 읽었다.
‘가짜 인간(人間もどき)’ 이라는 제목이 있다.
전부 다 기분 나쁜 이야기뿐이다.
이런 책자를 직접 만들다니 그 사람은 분명 근본이 음침한 녀석일 것이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서 판권장을 보았다.
날짜는 2년 전이다.
발행자는 ‘카이 로아나크(カヰ=ロアナーク)’ 였다.

‘로어노크 섬의 괴(ロアノーク島の怪)’ 를 따라한 것 같다.

과연 취향을 알만하다.

이런 걸 만들 법한 선배를 떠올리려고 천장을 보았다.
그러자 딱 한 사람 떠올랐다.
동아리에는 거의 얼굴을 보이지 않는 여성으로 가끔씩 와도 들고 온 노트북으로 오로지 글을 치고 있다.

뭘 쓰고 있는지 엿보려고 해도 “엉큼해.” 라고 말하며 보여주지 않는다.

과연 그 사람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한 번 더 페이지를 펄럭펄럭 넘겼다.

‘추적’ 이라는 대표작을 책자 속에서 찾고 손을 멈추었다.
동아리 부실에서 강의를 빼먹고 빈둥대는 남자가 낡은 책자를 책장에서 발견하고 꺼내는 장면이 시작이었다.

꺼낸 그 책자의 제목은 ‘추적’
오 현실과 똑같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날짜는 2년 전이다.]

문장 속에 이 부분을 읽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제목이 일치한 건 좋다.
나와 상황이 비슷한 남자가 등장하는 것도 전형적인 불량 학생을 생산하는 동아리를 보면 우연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도 ‘2년 전’ 으로 되어 있는 건 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 건가.

나는 조금 두근거리면서 읽어나갔다.

소설은 이 후에 작품 속 작품인 ‘추적’ 을 발견한 주인공이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실종한 동아리 선배의 발자취를 더듬어서 마을을 탐색하는 내용이었다.

실종한 동아리 선배가 누군지 자세한 묘사가 없다.
작품 속 작품인 ‘추적’ 의 구체적인 내용도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실종한 동아리 선배가 간 곳을 암시해주고 있는 거라고 주인공이 알고 있다.

대체로 설명이 부족해서 마치 독자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은 문장이다.

전혀 재미없다.
전혀 재미없기 때문에 더더욱 이상했다.

[마음의 준비를 다하기 전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게 좋다.]

그런 문장이 오른쪽 페이지 끝부분에 있었다.
그 앞까지의 전개하고는 상관없이 부자연스럽게 끼여 있었다.

무심코 손이 멈췄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가는 곳은 어디일가 페이지를 넘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마음의 준비라는 건 대체 뭔가?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굳었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다음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펄쩍 뛸 정도로 놀랐다.

문을 열고 미끄러지듯이 들어온 것은 그야말로 이 책자를 지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여성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이 아니다.
껍데기에서 반쯤 나온 달팽이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나와 코타츠를 바라본 그녀는 그 사람을 보지 못 했냐고 물어본다.

그 사람이라는 건 그녀의 애인으로 내 오컬트 스승이기도 한 동아리 선배가 틀림없다.

여기에 안 왔다고 대답하니 “그렇구나.” 라고 말한 뒤 떠나려고 했다.

나는 당황해서 책자를 펼치면서 이걸 썼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생각나지 않은 이유를 알았어.”

그렇게 말하면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감이 날카롭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야말로 예지능력이라고 불러야 할 감각이었다.
그녀는 에드거 케이시처럼 예지몽을 꾸고 있는 모양인데 잠에서 깨면 그걸 잊어버린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갑자기 그걸 떠올린다.
이걸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미래를 떠올린다.” 라는 기묘한 표현이 되어버린다.

언젠가 마을 안에서 우산을 쓰고 걷고 있는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하늘이 맑았는데도.
나는 서둘러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비닐우산을 샀다.
틀림없이 이제부터 날씨가 나빠질 게 틀림없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내리지 않고 결국 비닐우산은 쓸모가 없어졌다.

다음 날 우연히 그녀랑 만나서 그 일에 대해서 원망 섞인 말을 토로했더니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거 양산.”

힘이 쭉 빠졌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날 뉴스에서 전날 자외선 양이 작년 최대치를 기록한 날보다 더 많이 나왔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실로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 책, 어디서 난 거야?”

그녀의 질문에 난 선반을 가리켰다.

“그런 곳에 있었구나.”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든 걸 잊어버렸어.”

그녀는 이 며칠간 스승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를 찾고 있는데도 찾지 못 하고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도 이제부터 뭐가 일어날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최근에 그를 본 적 없다.
말을 들어보니 전화도 받지 않고 차가 있는데 집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이 책이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무심코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 날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전날 밤에 보여.”

그녀가 계속 말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경험상 위험한 정보일수록 일찍 안다고 한다.

배설물을 밟을 것 같을 때는 이틀 전에 보고, 카레 우동 즙이 튈 것 같을 때는 3일 전에 본다.

뼈가 부러질 것 같을 때는 2주일 전에 본다.
다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정보를 일찍 아는 건 몸이 안 좋을 때가 많다고 한다.
너무 빨리 떠올려 버리면 그게 일어나기 전에 잊어버리고 만다.

“도움이 안 되지?”

도움이 안 되는 걸까.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거 절반은 비망록이야.”

그녀는 책자를 한 번 더 가리켰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스승이 어디 갔는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2년 전에 예지해버렸으니까 지금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거라고.

“어떤 이야기를 적었는지 잊어버렸지만.”

처음으로 그녀는 조금 웃었다.
나는 새삼 독극물이라도 만지는 심정으로 그 책자를 펼쳤다.

“‘추적’ 이라는 이야기예요.”

내가 지금부터 스승을 찾으러 가는 내용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물론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녀가 2년 전에 알아버렸다는 그 의미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책자를 가지고 부실을 나왔다.
시린 겨울하늘도 지금은 괴롭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를 다하기 전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게 좋다.]

그 문장을 3번 마음속으로 읽은 후에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일단 게임 센터로 가는 것 같아요.”

실제로 있는 장소 이름이 나왔다.
나는 그녀랑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그쪽으로 갔다.
마을에 있는 커다란 게임 센터다.
안에 들어가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스승은 보이지 않았다.

‘추적’ 에서 주인공이 스티커 사진을 찍는 묘사가 있어서 일단 코너에 가보았지만 젊은 여성들이 떠들고 있었기에 질겁했다.

게다가 그 뒤를 읽어보니 결국 게임 센터에서는 단서를 찾지 못 했기에 이런 건 소용없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적혀 있는 대로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그 때, 그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냥 마지막 부분을 읽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짓을 하라고 적혀 있냐고 묻기에 고개를 젓고 포기했다.

불길한 예감에 두근거리면서도 나는 나 나름대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국 계속해서 같은 애들끼리 스티커 사진을 찍고 있는 여고생들 때문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고 순서를 기다린 뒤, 마지막에 그녀랑 같이 사진을 찍었다.

‘추적’ 에는 주인공과 여성이 같이 가고 있다는 말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나온 스티커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나는 왠지 꺼림칙한 걸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채 다음 장소를 확인했다.

“다음은 잡화점이에요.”

게임 센터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거리지만 평일이라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자전거를 세우고 캐주얼 숍 주위로 펼쳐진 아담한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온 것은 처음이었다.
패션과는 거리가 멀기에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유행하고 있는 잡화점인 듯하다.

동양풍, 서양풍 섞인 알록달록한 물건들을 흘끗 보면서 스승을 찾는다.

하지만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점원에게 슬쩍 물어보았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잡화점에서도 역시 단서가 없었다.
한숨을 쉬고 ‘추적’을 닫았다.
동행이 보이지 않았기에 찾아보니 가발 코너에 있었다.
그녀는 ‘위그’라고 정정했지만 난 뭐가 다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후에 피가 묻은 것 같은 뿅망치가 마음에 든 듯 살까말까 고민하느라 나를 한참 세워둔 끝에 결국 다른 걸 산 모양이다.

가게를 나올 때, 게임 센터에서도 느꼈던 위화감이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오른다.

“다음은 찻집이에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글 속에서 지구방위군이라는 수상쩍은 가게 이름이 나왔지만 나도 그녀도 그런 가게를 몰랐기에 ‘추적’에서 나온 묘사를 토대로 비슷한 도로를 어슬렁거린 끝에 겨우 빌딩 창문에서 그 이름을 찾았다.

낡아 보이는 빌딩 속 모르는 가게에 들어갔을 때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입구 문을 여니 역시나 유흥거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피규어나 미니카, 인베이더 게임, 그리고 만화가 가게 안에 구비해 놓았다.

가게 안을 둘러보았지만 단골손님 같은 사람들 속에서 스승은 없었다.

실망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조그만 단서를 얻을 테니까.
배가 고파졌기에 라면을 주문했다.
‘추적’에서 주인공이 주문하는 걸 보았기에 메뉴도 보지 않고 말해보았지만 정말로 있었던 모양이다.

눈앞에서 주인장이 봉투에 든 즉석 면을 꺼내는 걸 보았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기다리는 동안 어디서 주워왔는지 그녀가 가져온 해적 룰렛으로 놀았다.

해적이 튀어나오면 승리인지 패배인지 의견이 맞지 않아서 다투고 있으니 “나오면 승리.” 라고 말하면서 주인장이 라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먹고 있으니 발 근처에서 고양이가 다가왔다.
대체 무슨 가게야.
다 먹고 난 뒤 사발이 아무리 봐도 절구만 했다는 걸 지적하지 않고 마스터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3, 4일 전에 왔었지.”

역시 스승은 단골손님인 것 같다.
취미 한 번 고약하다.

“동행이 있었던 것 같은데.”

툭 내뱉은 말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아니, 그래도 잘 기억 안 나.”

[자그만 단서를 얻었다.]

‘추적’을 확인했지만 아무래도 여기서는 이걸로 끝인 것 같다.

포기하고 가게를 나왔다.
문을 닫을 때 가게 안에서 당구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은.”

그렇게 말하면서 계단을 내려가는 발을 멈추었다.

[마음의 준비를 다하기 전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게 좋다.]

몇 번 째인지 모를 이 문장을 읽고 넘기니 다음 페이지에 상당히 노골적인 전개가 나타났다.

“다음은 볼링장이에요.”

또 자전거에 걸터탔다.
이 시점에서 그녀에게 내 추측을 말해줄지 망설였으나 그녀는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돌아봐서 나는 당황했다.

역시 그녀는 대하기 어렵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자전거에서 내려서 몇 번이나 온 적이 있는 볼링장으로 들어갔다.

“볼링은?”

“여기서 점원에게 이야기만 듣는 모양이에요.”

조금 해보고 싶었나보다.
그녀를 놔두고 카운터로 향했다.

“아, 분명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스승 이름을 대자 흔쾌히 찾아주었다.
갈색머리에 젊은 점원이었다.
손님의 개인정보 따윈 어찌되든 상관없다니 교육을 대체 어떤 식으로 받은 걸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고마웠다.
잠시 후 스승 이름이 인쇄된 점수가 나왔다.
날짜는 3일 전으로 오후 2시.
역시나.
예전에 같이 볼링을 했을 때 본명으로 참가한 걸 기억했다.

거터가 많이 나온 스승의 점수는 내 알 바 아니다.
나와 그녀의 시선은 또 다른 사람 이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건 동물 이름이었다.]

‘토끼’ 라는 이름이 스승 옆에 나란히 있었다.

게임 센터에서부터 느꼈던 위화감이 풀린다.
스티커 사진, 유행하는 잡화점, 놀 게 많은 찻집.
그야말로 데이트 코스이지 않은가.
게다가 동물 이름으로 참가하다니 젊은 여성과 볼링을 한 게 틀림없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았으나 그 표정에서 마음속을 읽어내지 못 했다.

스승보다 거터가 많은 ‘토끼’ 의 점수를 보고 여자 특유의 요망함 같은 걸 느껴서 무심코 눈을 돌렸다.

우리는 말없이 볼링장을 나갔다.

[마음의 준비를 다하기 전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게 좋다.]

정말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었다.
그리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라고? 러브호텔에? 그녀를 데리고?
망설임보다 분노가 치솟았다.
그런 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어디야? 빨리 가자.”

가는 곳을 알려주지 않은 채 울적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호텔 거리에 들어선 시점에서 그녀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을 것이다.

근처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걷는다.
그녀는 잠자코 따라온다.

그 이름이 그다지 천박하지 않았던 것 따위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간단히 발견한 간판 앞에 멈춰 서서 나는 바로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래서 들어가는 거야?”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음색에 오히려 내가 긴장했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쑤셔 넣어서 상당히 구겨진 ‘추적’을 펼치고 말했다.

“들어가요.”

“하지만.” 이라고 말한 나를 잡아끌 듯이 그녀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 상황에 심장이 벌렁거리면서도 따라갔다.

“205호실.”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손밖에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카드를 받았다.

성큼성큼 복도를 지나 방 번호에 조명이 켜진 문을 열었다.

들어가자마자 풀썩하고 그녀는 침대에 쓰러져 엎드렸다.
발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한숨을 쉰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서 농담인양 스승 이름을 부르면서 벽장이나 서랍을 열어젖혔다.

머리맡에 있는 작은 상자는 열어볼 엄두가 안 난다.

목욕탕 문을 열었을 때 한 순간 넓은 욕조 안에 스승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 열기 속에서 정말로 물이 계속 흘러나오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오싹해지면서 수도꼭지를 닫았다.

욕조에서 물이 넘치는 소리가 들린다.
제법 아름다운 소리였다.
이건 청소 담당자가 잠그는 걸 잊어버린 걸까 이런 서비스인 걸까 알 수 없었지만 그냥 그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방에 돌아오니 엎드려 있던 그녀가 천장을 향한 채 누워 있었다.

두근거렸다.

“단서는?”

“머리카락이에요.”

목욕탕에서 샤워기 노즐에 감겨 있었던 상당히 색이 빠져 있는 갈색머리를 집어서 보여주었다.

긴 머리카락이었다.
그 후에 그녀가 말하지 않았기에 그건 쓰레기통에 버렸다.

“이제 나가자. 돈은 나눠서 내고.”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내가 내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눠서 내는 게 여기서 나가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먼저 지불했던 그녀에게 절반을 정확히 건넨 뒤 나는 짜증과 수치심으로 “네네, 빨라서 미안하네요.” 라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녀보다 앞서 호텔을 나왔다.

스스로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에 있을 법한 감시 카메라를 신경 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호텔 거리를 나오면서 ‘추적’을 펼쳤다.

“다음은 레스토랑으로 간 모양이에요.”

순서가 반대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을 토해냈다.
낮에 호텔이라니 마치 돈 없는 학생 같지 않은가.
아니, 그 사람은 돈 없는 학생 맞지만.

[레스토랑까지 앞으로 50미터 남았을 때 도로에서 혈흔을 발견한다.]

페이지에서 그 문장을 발견했을 때 잠깐 발이 멈췄다.
그리고 서둘러 자전거에 타서 레스토랑으로 가는 도로에서 혈흔을 찾았다.

있었다.
가로수 사이.
찻길과 가깝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분명히 놓치고 지나갔을 혈흔은 이미 말라 있었다.

누구 피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땅거미가 찾아와 빛바랜 것 같은 거리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불과 몇 미터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이는 골목길이 신경 쓰였다.

차가 지나는 가장자리인데다 바로 직각으로 꺾여서 전망이 안 좋다.

사람 하나 감추기에 안성맞춤인 도로지 않는가.
그런 망상 같은 말이 머릿속에서 떠오른다.
만일을 위해서 레스토랑까지 가서 스승의 인상착의를 말해 보았지만 점원은 알지 못 했다.

데이트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
분명히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다음은?”

그녀가 재촉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택시에 타요.”

[그리고 나는 운전사에게 ‘인명창(人面疽)’을 알고 있는지 묻는다.]

인면창?
어째서 그런 단어가 나오는 걸까.
당황하면서도 계속 읽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이 페이지에는 택시로 이동하는 부분밖에 안 적혀 있는 것 같았다.

풍경 같은 쓸데없는 묘사가 많다.
우리는 택시를 잡고 탔다.
그리고 운전사에게 인명창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어이쿠, 손님. 저 괴담은 질색이라고요.”

40대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하얀 장갑을 낀 왼손을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인면창은 잘 모르지만 요전에 다른 손님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러면서 묘하게 기쁜 듯 택시 괴담을 술술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괴담 좋아하는 손님을 위한 서비스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원래 그런 이야기를 엄청 좋아하는 걸까.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는 계속 나불대었다.
나는 그 이야기에 어떤 단서라도 없을까 진지하게 들어보았지만 틀에 박힌 결말만 계속 나오기에 질려서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택시는 교외로 가는 길을 달려갔다.
내릴 곳은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었다.

‘인면창’이라는 건 몸 일부에 사람 얼굴 같은 종기가 나타나는 현상이다.

아니, 병이라고 해야 할까.
오컬트를 좋아한다면 잘 알 테지만 일반인들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스승이 인면창 얘기를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꽤 최근에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했었더라.
눈을 꾹 감았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옆에는 무릎 위에 자그만 가방을 올려놓은 그녀가 왠지 어두운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위는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택시비를 둘이서 지불하고 차에서 내리려고 하니 운전사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런데 손님. 어떻게 아신 거죠?”

그렇게 말하면서 운전사는 왼쪽 장갑을 벗는 시늉을 했다.

내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니 곧 그가 농담이라며 쾌활하게 웃고는 ‘빈 차’ 표시를 켠 뒤 차를 몰아 떠났다.

아무래도 원래부터 괴담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나는 두 번 다시 마주치지 않게 택시 번호를 기억해두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그녀가 주위를 본다.
공원 입구 근처에서 가로등 하나가 지금이라도 꺼질 듯이 깜빡거린다.

바람이 펜스를 흔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나는 펜 라이트를 뒷주머니에서 꺼내어 ‘추적’을 펼쳤다.
언제 그 사람이 변덕을 부려서 날 심령 스팟에 끌고 갈지 알 수 없었기에 최소한 빛을 낼 수 있는 물건만은 항상 가지고 다녔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걸어가요.”

하지만 둘 다 이곳 지리는 잘 모르기에 난처했다.
근처 지도가 그려진 간판을 보고 현재 있는 위치에서 대강 방향을 잡았다.

페이지를 넘겨보니 아무래도 폐공장에 도착한 모양이다.
고개를 들었지만 아직 공장 같은 실루엣은 보이지 않는다.

강이 가까운 듯 희미하게 습한 바람이 뺨을 만진다.
추워서 걷어 올렸던 상의 소매를 다시 내렸다.

[뒷모습과 만났다.]

갑자기 이 문장이 튀어나왔다.
앞뒤 문장을 읽어봐도 잘 알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는 말인가.
주위는 주택지로 보이지만 을씨년스러워서 우리 이외에 다른 인영은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에는 짧은 잡초가 우거진 빈 터가 있었고 왼쪽에는 높은 담이 이어져 있었다.

불빛이라고는 몇 십 미터 간격으로 서 있는 가로등뿐이다.

그 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중키에 통통한 남자의 등이 나타났다.

확실히 이쪽을 향해서 걸어오는데 그건 아무리 봐도 뒷모습이었다.

옷만 반대로 입고 있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인기척이 없는 밤에 뒷걸음질로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다.

나는 못 본 척 하면서 그걸 지나치려고 길가로 옮겨서 종종걸음으로 지나쳤다.

그리고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보자고 슬쩍 뒤돌아보았다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뒷모습이었다.

뒷모습이 아까와 같은 보폭으로 걸어가고 있다.
옆을 지나치는 순간에 다시 돌아선 걸까.
아니, 그런 기척은 없었다.
발을 멈춘 나에게 그녀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저거.
떨리는 손을 들어 가리키니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뭔데?"

그녀에겐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내 시야에서 뒷모습은 천천히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추적’을 읽어 보니 스승이 있는 곳과는 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그냥 훌쩍 넘길 부분인데 내 다리 사이 알은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시커먼 폐공장 실루엣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는 완전히 다리가 움츠러들었다.

정말로 이런 곳에 스승이 있는지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공장에 도착했는데.”

무너진 블록 담 안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돌아본다.
계속 읽으라는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펜 라이트를 잡고 페이지를 넘겼다.

[부름에 응답하는 소리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그대로 읽어나갔다.
마음의 준비 어쩌고 하는 문장이 없었기에 이어서 페이지를 넘겼다.

정말로 이걸로 스승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조심스레 공장 부지에 들어가서 스승을 불렀다.

함석이 바람에 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응답이 들린 것 같았다.

텅 빈 창고를 몇 군데 지나쳐서 부지 한 구석에 있는 프리패브 앞에 섰다.

희미한 펜 라이트를 비추니 스프레이나 페인트로 낙서가 된 겉 부분이 나타났다.

온통 담쟁이덩굴이 달라붙은 그 모습은 처량하게 폐기된 모습을 자아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한 번 더 불러보았다.
그 순간 안에서 철컹하고 금속 물질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스러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야.”

걷어찬 건지 누군가가 남긴 발자국투성이인 문은 금방 발견했지만 문손잡이를 비틀어도 문이 잠겨서 열리지 않는다.

“소용없어. 그 녀석들 왠지 모르겠지만 여벌 열쇠를 가지고 있거든.”

“뒤에 있는 창문으로 들어가면 되겠지요.”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대답하니 스승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가 있는지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한 후 나는 프리패브 뒤로 돌아갔다.
상당히 높은 곳에 창문이 있었지만 벽에 세워둔 폐자재를 이용해서 기어 올라갔다.

깰 필요도 없이 이미 유리 따윈 남아 있지 않는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안은 어둡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입에 문 펜 라이트를 밑으로 향하니 어떻게든 착지할 곳은 있는 것 같았다.

녹이 슨 뼈대를 잡고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라는 목소리에 발을 디디기 힘들 정도로 플라스틱이나 강철이 흩어져 있는 발밑을 조심하면서 나아가 겨우 스승으로 보이는 인영을 발견했다.

철제 기둥을 끌어안는 듯이 주저앉아 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자신의 손과 수갑으로 기둥을 안아 고리를 만들면서 자유를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얼굴을 라이트로 비춰 보니 눈부시다고 말하기에 바로 치웠지만 상당히 쇠약해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부어오른 것도 깨달았다.

“곡괭이 같은 게 있을 거야.”

스승은 그렇게 말한 후 조금 생각하다가 방구석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주위에 있었을 거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기에 반쯤 손을 더듬어서 찾았다.

녹슨 금속 조각이 손을 찌른다.

나는 개의치 않고 나아가서 드디어 찾던 걸 발견했다.

기둥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최대한 손을 빼도록 한 뒤 수갑 쇠사슬 부분을 노려서 내리쳤다.

어두워서 몇 번이나 궤도를 확인하면서 절반 정도 힘을 넣어서 곡괭이 끝을 내리쳤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한 번 더.”

스승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갑이라고 해도 어차피 싸구려 장난감이다.
다음 일격으로 쇠사슬은 완전히 부서졌다.

“어깨 좀 빌려줘.”

그런 스승을 부축하면서 문을 향해 갔다.
잠겨 있었지만 안에서는 간단히 풀 수 있었다.
드디어 프리패브 밖으로 나왔을 때는 들어간 후 20분 정도 지났을 것이다.

“늘 미안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스승이 한 손을 들며 말했다.

어두워서 그녀의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스승은 작업 건 여자와 호텔까지 간 건 좋았지만 호텔을 나와서 함께 레스토랑을 가던 도중 우연히 그 여자의 애인에게 들켜서 분노한 그 녀석에게 뒤에서 둔기로 얻어맞고 차에 실려 갔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이 폐공장을 본거지로 삼고 있던 남자랑 그 동료들에게 얻어맞고 난 뒤 수갑이 채워져서 감금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니 오싹해졌다.

“힘이 안 들어가.”

그런 스승을 업고 반쯤 질질 끌면서 나는 어쨌든 이곳을 떠나기 위해서 걸음을 내딛었다.

뜨겁다.
감기라도 걸린 걸까 스승은 상당히 몸이 뜨거웠다.
당연할 것이다.
옷도 빼앗긴 건지 이 한겨울에 청바지에다가 긴 소매 티셔츠 달랑 1장밖에 안 입고 있었다.

그녀가 웃옷을 벗어서 스승 등에 덮어준다.
우리는 말없이 걸어갔다.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
이윽고 스승이 열에 비몽사몽 한 건지 반쯤 자면서 중얼중얼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쨌든 이걸로 전부 해결했다고 안도하면서 ‘추적’이 이 뒤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폐공장에 도착한 후 4페이지 분량으로 스승을 구출하는데 성공했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다하기 전에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 게 좋다.]

이 뒤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나는 등에서 스승이 미끄러져 내려가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한 손으로 ‘추적’을 잡고 입에 문 펜 라이트를 비추었다.

마음의 준비.
왜 그래야 할까.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을 달래면서 나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그가 중얼거린 여자의 이름이 입에서 나온 순간, 그 등에 날카로운 칼날이 꽂혔다.]

오싹했다.
한 순간 걸음걸이가 흐트러졌다.
날카로운 칼날.
그런 것이 대체 어디선 나타나는 걸까.

뻔하다.
여기에 나와 스승 이외 그 사람밖에 없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등 뒤에서 따라온다.
등에 업힌 스승 때문에 뒤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 사람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추적’ 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혼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에서 동행하겠다고 한 그녀의 역할은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묘한 위화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다.

처음 등장하는 게임 센터 스티커 사진.
이건 괜찮다.
혼자서 찍는 이상한 녀석도 있을 것이다.
잡화점이나 찻집, 볼링장도 혼자서 들어간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러브호텔은 어떤가.
‘추적’에서 나오는 주인공은 과연 혼자서 방에 들어갔다는 건가.

‘추적’은 극도로 생략된 문장으로 쓰여 있었다.
어쩌면 그건 의도적으로 또 다른 동행자의 존재를 숨기기 위한 건지도 모른다.

즉, 그녀가 맡은 역할은 본래 없었을 관찰자가 아니라 어엿한 등장인물이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나는 신경이 바늘처럼 예리하게 갈고 닦이는 걸 느꼈다.
장소는 뜻밖에도 아까 ‘뒷모습’을 만난 빈 터 앞이다.
스승은 중얼중얼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말은 명확하지 않아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뒤통수에 닿는 스승의 숨결이 뜨겁다.

‘추적’은 스승이 찔린 장면에서 갑자기 끝났다.
배드 엔딩이다.
희망 따윈 없다.

그녀는 정말로 이걸 쓴 내용을 기억 못 하는 걸까.
이 마지막 페이지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순서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지금 날붙이를 들고 있을 리 없다.
아니, 자그만 가방이 있다.
그녀가 잡화점에서 산 건 뭐냐.
피 묻은 뿅망치를 포기하고 마지막으로 고른 물건은 대체 뭐냐.

사고와 의혹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발은 왠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뒤에서 뭘 하고 있을까?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스승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커져서 나에게도 분명히 들리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아야…….”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고 나는 내 심장 소리만 듣고 있었다.

그녀가 발소리를 내며 다가온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왜 불러?”

스승은 잠들어버린 것 같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스승이 이 상황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른 것에 알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후일, 상처가 나았다는 스승의 말을 듣고 그의 아파트로 갔다.

“폐를 끼쳤구나. 미안했어.”

머리를 숙이는 스승에게 “에이, 스승님, 그런 사람 아니잖아요.” 라며 손사래를 치며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일의 전말을 자세하게 들었다.

아무래도 스승은 ‘인명창이 있는 여자’라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어서 어떻게든 그게 보고 싶은 나머지 찾아내서 작업을 걸었다고 한다.

하루 만에 잘도 호텔까지 끌고 간 모양이다.

“그래서 인명창 있었나요?”

“아니, 그건 그냥 화상 자국이었어.”

그래서 이제 용무가 없으니까 여자가 가고 싶어 해서 예약해두었던 레스토랑을 취소하고 당장 헤어질 방법은 없나 간계를 짜내고 있을 때 애인과 맞닥뜨려서 그런 꼴을 겪었다고 한다.

“최악이었지.”

최악인 건 당신이야.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 사건은 어떤 의미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천벌일 것이다.

나는 갑자기 생각이 나서 어제 막 알아차린 사실을 스승에게 피력했다.

“‘추적’을 쓴 작자 필명, 카이 로아나크였죠.”

종이 뒤에다가 볼펜으로 적었다.

KAYI ROANAKU

“아마도 이렇게 쓰는 거겠죠. 로아나크 섬의 괴를 비틀었다고 해도 조금 위화감이 느껴졌던 건 쓸 수 있는 글자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는 건"

계속 말하면서 나는 그 밑에 다른 이름을 적었다.

쿠라노키 아야(倉野木綾) KURANOKI AYA

“아야 씨 이름이에요. 그래서 이걸 둘 다 알파벳 순서로 늘어놓으면…….”

  AAAIKKNORUY

  AAAIKKNORUY

“봐요, 이거 애너그램이죠?”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에 아야 씨가 지금 쓰는 별명도 마찬가지죠.”

  카야노 아리쿠(茅野歩く) KAYANO ARIKU

  ↓

AAAIKKNORUY

“어때요?”

우쭐대는 나에게 스승은 그다지 감흥 없는 기색으로 말했다.

“카이 로아나크를 쓰고 싶지 않으니까 다른 거 지어달라고 보채기에 지금 이름 지어준 게 나니까.”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해도 엄청 대단한 발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서 실망스러웠다.

그 때문인지 조금 심술궂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잘도 그때 아야 씨 이름을 말했네요. 이런 말 한다고 해도 기억나시려나 모르겠지만.”

“다른 여자 이름을 말했다면 찔린다고? 그런 걸로 찔렸다면 벌써 죽었어.”

아, 역시 이 사람은 글러먹었다.

“하지만 아야 씨의 예지 능력으로 적힌, 이른바 예언서라고요. 그 운명을 바꾼 기적과도 같은 한 마디였잖아요.”

“뭐 어차피 소설이니까.”

그 소설 덕분에 살아난 게 어디 사는 누구더라.

“게다가 그걸 읽은 건 너 혼자만이 아니라고.”

스승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말에 나는 얼떨떨해졌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재촉하는 나를 제지하면서 스승은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네가 그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 나도 뒤에서 봤어. 등에 업혀서 말이야. 이거 큰일 났다 싶어서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이름을 부른 거지.”

이 자식 자는 척 했다는 말인가.

나는 왠지 통쾌해져서 소리 내어 웃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