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74072112
대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빨리도 그 해 모든 강의를 수강하지 않기로 결심한 나는 알바가 없는 날에는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딱히 이유도 없이 사전을 1페이지부터 절반 정도까지 독파할 정도였다.
전부 다 읽지 않는 어중간함이 나답다.
아무튼 그런 지루한 나날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
아는 사람이 불렀다.
옛날에 도시전설을 다루는 지역 포럼에 드나들 때 만났던 온쿄라는 닉네임을 가진 소녀였다.
저번에는 다른 이름으로 활동하던데 '온쿄' 시절을 알던 나와 2년 만에 재회한 뒤로 뭔가 느낀 바가 있는지 또 그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용무인지 수상쩍게 느껴지기는 했다.
그래도 얌전히 앉아 있으면 주변 남자들이 흘끗흘끗 바라볼 정도로 귀여운 애였기에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그 시선 절반은 그저 그 애가 입고 있는 고딕 패션이 신기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약속장소로 지정된 카레 가게에서 조금 늦게 온 그녀와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레 가게 음모론이라는 골때리는 이론을 담담히 논하는 그녀에게 나는 반론을 제시했다.
"카레를 먹은 후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이 많다는 건 단순히 개연성 문제야. 그만큼 먹을 기회가 많은 요리라는 거지."
"개연성이 뭐니."
"나사에 비유하자면 그 절대량을 보아 바키의 조각이라기보다는 포세이돈의 부품이라는 거야."
"바키는 누구니."
"도라에몽 대장편 본 적 없어?"
"없어."
거기서 대화가 끝났다.
나이는 분명 나보다 4살 적었을 것이다.
이것도 세대 차이인가.
나도 실시간으로 본 건 아니지만 도라에몽 극장판은 비디오나 만화로 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좀처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아 좀 짜증이 난다.
그러고 보니 새삼스럽지만 이 여자는 믿을 수가 없다.
난 예전에 그녀에게 속아서 험한 꼴을 당했다.
"데이트 하자." 라는 메일 내용은 인사 정도로 여겨야 할 것이다.
심리적인 벽을 만들어 두자고 긴장했을 때였다.
"여기, 여기."
갑자기 온쿄가 일어나서 입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검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검은 옷을 입은 16,7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왔다.
온쿄랑 비슷한 차림이지만 더 검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은색.
연한 보라색 연지.
그리고 에메랄드 그린 컬러 콘택트.
소녀는 무거워 보이는 치마를 입고 내 앞자리에 앉았다.
"루리야. 엄청 어려운 한자를 써."
소녀는 소개를 받고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온쿄에게 속닥속닥 귀엣말을 한다.
"왕(王)은 머물고(留まり) 왕(王)은 떠난대(離れる)."
온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말한다.
머릿속에서 글자가 떠오른다.
루리(瑠璃)인가.
그게 본명인지 닉네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쪽도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게 뭐야."
내 말에 온쿄가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소개해준다고 말했잖아."
머리가 아파졌다.
그건가.
전에 친구를 소개해주겠다던 말.
확실히 그런 말은 한 기억은 있지만 나는 다른 세계에 사는 인간과 사귈 자신은 없다.
무엇보다 내겐 지금 정해진 상대가 있다.
곤혹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는 내게 루리가 유난히 눈을 깜빡거리면서 슬픈 얼굴을 했다.
달리 보면 화난 걸로 보일 만큼 미묘한 변화이긴 하지만.
"소개한다고 했던 거 잊었어? 엄청 귀엽고 곤란한 친구를."
잠깐만.
수식어가 하나 더 늘어났잖아.
소개한다는 건 '엄청 귀여운 친구' 였을 터다.
"곤란한 일이라도 있어?"
검은 게 둘씩이나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 줄 알았다.
온쿄는 내 오컬트 스승만큼이나 수상한 것에 목을 들이대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그 뒷처리를 두 번이나 해준 결과 아무래도 내가 마음에 들은 모양이다.
"분명히 말했잖아. 귀엽고 엄청 곤란한 친구를 소개하겠다고."
수식어 순서가 바뀌었다.
무진장 불길한 예감이 든다.
주문한 카레가 왔기에 일단 먹기로 했다.
이건 본격적인 카레인지 유난히 부재료가 적고 복잡한 향신료 풍미가 코를 찌른다.
나는 눈앞에서 묵묵히 카레를 먹는 두 소녀를 살펴보았다.
저런 옷을 어디서 팔고 있는 걸까.
게다가 옷에 맞추어 화장을 하는 것 같은데 외출할 때마다 그 짓을 하면 엄청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루리가 갑자기 숟가락을 든 오른손을 멈추고 "폐가 됐나요?" 라는 눈으로 물어본다.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그건 그렇고 이 검은 복장에 하얀 피부, 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이 모이니 정말로 인형 같다.
온쿄 쪽은 그나마 패션 범위 안에 들어가는데.
그 이상한 색깔을 띠는 눈을 보고 갑자기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녹색 눈 아가씨'
머릿속에 몇 번이고 떠오른다.
녹색 눈 아가씨.
아, 생각났다.
모리스 르블랑이 쓴 소설.
뤼팽 시리즈 1편이다.
괴도 아르센 뤼팽이 녹색 눈 소녀를 만나서 그녀가 상속할 막대한 유산을 둘러싼 사건에 관여한다는 이야기로 분명 호수 밑에 숨겨진 고대 로마 유적지가 나온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읽었을 때는 머릿속에서 멋대로 녹색 눈 소녀 비주얼에 '칼리오스트로의 성' 에 나오는 히로인 클라리스 공주를 투영시켰었다.
그 소녀 이름은 뭐더라. 잊어버렸다.
꽤 좋아했는데.
카레를 숟가락으로 떠서 수프처럼 후루룩거리다가 떠올랐다.
"오렐리구나."
불쑥 입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온쿄가 그걸 듣고 깜짝 놀란다.
"왜 알고 있는 거야?"
뜻밖의 반응에 나도 놀랐다.
"내가 뤼팽 읽으면 안 되냐?"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 녀석 뭐야.
도라에몽 대장편은 안 보는 주제에 뤼팽 시리즈는 읽는 건가.
확실히 딱히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왠지 석연치 않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다 먹고 물에 손을 뻗었다.
온쿄가 루리를 팔꿈치로 찌른다.
루리가 온쿄 귓가에 대고 속닥속닥 말한다.
이윽고 온쿄가 이쪽을 바라본다.
"루리는 저혈압이야.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 때 잠시 동안 움직이지 못한대. 그렇게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눈을 뜨고 있을 때 방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
또 루리가 온쿄에게 귀엣말을 한다.
"루리 침대 옆에는 자그만 서랍장이 있는데 그 서랍 하나가 열려 있는 거야. 밤에 자기 전에는 전부 닫았을 텐데."
이 첫대면인 사람에겐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겠다는 콘셉트에 점점 화가 난다.
옷차림도 그렇고 자신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자랑하고 싶은 건가.
그런 내 심정은 무시한 채 온쿄는 계속 통역했다.
나는 어느 쪽 얼굴을 봐야 할지 망설이면서 둘을 번갈아보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보고 있으면 그 열린 서랍에서 뭔가 슬쩍 움직이는 게 보인대. 거기에 의식을 집중하고 있으면 천천히 슬금슬금 하얀 게 안에서 나오는 거야. 금방 인간의 손이라는 걸 알았지만 누가 안에 숨을 만한 공간은 없어.
손가락이 보이고, 손바닥이 보이고, 손목이 보이고, 팔이 보이고, 팔꿈치는 없어서 주륵주륵 엄청 늘어나.
그치만 움직일 수 없어. 눈도 못 돌려. 무섭대.
그 손은 뭔가를 잡고 다시 서랍 안으로 들어가.
전부 들어가서 보이지 않게 되면 그제야 일어날 수 있대."
기시감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오싹오싹하다.
이 이야기는 마치 가위 눌린 중에 일어나는 배드 트립 같다.
아니면 그냥 꿈인 건가.
"그거 일어나기 전까지는 정말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야? 그리고 갑자기 일어날 수 있게 된다고? 열려 있던 눈이 한 번 더 열리는 감각은 없어?"
온쿄가 통역한다.
움직이지 않는 건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을 10배 더 농축한 버전이라고 한다.
그 감각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일어날 수 있게 되는 모양이다.
움직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은 평범한 가위와는 다른 것 같다.
가위에 눌렸을 경우에는 반대로 움직이고 싶어하니까.
게다가 자면서 보는 환각이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각성 시 환각이라는 것도 있는 걸까?
애초에 나는 저혈합이라는 증상을 잘 모른다.
게다가 그 '손'이라는 건 뭘까.
"움직일 수 있게 된 후에 서랍을 보면 어떻게 돼?"
"열린 채로 있어. 안을 봐도 아무것도 없어. 속옷이나 양말처럼 원래 들어 있던 물건만 있을 뿐이지."
"그 손이 서랍장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물건은 뭔데?"
"몰라. 기억 안 난대. 아마도 그걸 볼 때는 알고 있었을 텐데 사라진 순간 떠올릴 수 없게 되나 봐."
그렇구나.
뭐가 사라졌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즉 이 사건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아도 성립된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책 내용이 떠올랐다.
불필요한 단기 기억은 뇌의 서랍 깊숙이 파묻힌다.
꿈은 머릿속을 정리하는 도중에 그게 재생되는 필름 조각이라는 것이다.
조각 중에는 뇌를 활성화시키는 강한 기억도 있다.
그것들을 합성해서 그럴싸하게 재구축된 것이 렘 수면 때 상영된다.
거기서 편집된 조각은 뇌의 기억능력을 압박하지 않도록 잊혀간다.
그게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그 손에서 우의적인 느낌을 받았다.
"혹시 그 손이 가지고 가는 건 자신에게 필요 없는 거 아니야?"
둘이서 속닥속닥 의논을 하더니 루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건지 안 중요한 건지조차 모른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자기 방을 둘러보았더니 뭔가 중요한 게 사라진 기분이 들어서 무척 슬퍼진다는 거야."
이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라면 기분 나쁜 이야기다.
더더욱 오싹해진다.
이 감각은 싫지는 않다.
"그게 몇 번이고 일어난다는 거지?"
"한 달 정도 전부터 2,3일 간격으로. 아, 그치만 최근에는 매일 일어나는 것 같대."
나는 잠시 생각했다.
탁탁 숟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정말로 뭔가가 방에서 사라지는지 알아낼 방법이 있어."
둘은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숟가락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계속 말했다.
"그 방에서 침대와 서랍 빼고 전부 밖으로 꺼내는 거야."
잠시 후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하면 혹시 그 손이 뭔가를 가지고 사라졌다고 느껴도 그 상실감은 착각이 돼."
방에 아무것도 없다는 건 이미 확인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리가 체험한 그 불가사의한 사건을 꿈이나 환각으로 거의 단정지었던 나와 그렇지 않은 그녀 사이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루리가 부들부들 떨면서 온쿄 귀에 입을 가져다댄다.
"그런 짓을 했다간 손이 계속 뻗어와서 침대 위에 있던 나를 붙잡는다면..."
섬뜩했다.
공기가 팽팽해졌다.
아뿔싸, 방심했다.
경험상 과도하게 겁을 주는 건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개중에서도 제일 곤란한 게 울리는 것이다.
"너무해."
온쿄는 그렇게 말하고 옆에 있는 소녀를 감싸는 시늉을 했다.
"무슨 속셈이야?"
차갑게 내뱉으며 나를 가볍게 흘겨본다.
무슨 속셈이고 자시고 나는 협력적으로 해결책을 제출했을 뿐이다.
하지만 남의 고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남자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가 붙은 것 같았다.
또 죄책감이 들었다.
이 온쿄라는 소녀에게 마음대로 휘둘리는 것 같다.
"알았어. 그거 무효."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나는 깨닫고 보니 그 손이 나온다던 침실에 현지답사를 가겠다고 약속하고 말았다.
그 이틀 후 토요일.
나는 하품을 하면서 자전거를 몰고 있었다.
아직 동도 트지 않는 이른 시간.
어두운 하늘 깊숙히 있는 미묘한 색채에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쌀쌀한 공기에 셔츠 자락을 연신 잡아당겼다.
오늘은 덥다고 뉴스에서 말했는데.
묘하게 커다란 손으로 직접 그린 지도를 간신히 펼쳐서 목적지를 확인했다.
'뭐야, 근처잖아.'
모퉁이를 도니 어둠 속에 떠오르는 하얗고 아담한 3층 맨션이 눈에 들어왔다.
참 비싼 곳에 살고 있구만.
고등학생 주제에 혼자 살다니 대체 뭐 하는 분이신가 했더니 부모님이 상당히 돈이 많은 건지도 모른다.
주륜장에 자전거를 세우고 계단을 올라갔다.
목적지는 3층 맨 끝방이다.
문 앞까지 왔지만 온쿄는 보이지 않는다.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텐데.
아직 주변은 어두웠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여성이 사는 방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매우 거북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만일을 위해서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역시 잠겨 있다.
온쿄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앉았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우울해져서 뺨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요컨대 이건 잠에서 깰 때 서랍장에서 손이 나오는 환각을 본다던 녹색 눈 아가씨 루리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현지답사다.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계속 방 안에서 불침번을 서는 편이 좋겠지만 처음 만난 소녀의 방에서 밤을 새라니 내쪽에서 사양하고 싶었다.
듣자하니 알람시계가 없어도 그녀는 늘 비슷한 시간에 눈을 뜬다고 한다.
다만 저혈압이었기에 일어나는 시간이 길지만.
나와 온쿄는 이제부터 그 눈을 뜨는 시간 조금 전에 방으로 가서 실제로 그곳에서 뭐가 일어나는지 확인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그 온쿄가 안 온다.
오늘을 위해서 여벌쇠를 받은 건 그 녀석인데 늦잠이라도 잔 걸까.
문앞에서 초조해하며 기다린 지 어언 20분.
자그만 발소리와 함께 겨우 온쿄가 나타났다.
"바보냐."
저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이 녀석 전날 카레 가게에서 봤던 거랑 비슷한 고딕 패션을 왔다.
약속시간을 어겨도 그 옷차림만은 양보 못 한다는 거냐.
"귀엽기도 하셔라."
추궁해서 변명 들을 시간도 아까웠기에 그렇게 빈정댄 후에 빨리 문을 열라고 재촉했다.
온쿄는 제대로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열쇠를 꺼내더니 자물쇠를 열었다.
금속이 스치는 자그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둘이서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부터 넓다.
싫어도 내 방과 비교하게 된다.
어둠 속을 손을 더듬어 나아갔다.
물론 발소리를 죽이면서.
쓸데없는 소리를 내서 안에서 자고 있는 소녀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온쿄가 불투명 유리창이 달린 문 앞에 선 채로 입술에 검지를 갖다댄다.
알고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슬쩍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희미한 빛이 새어나온다.
방에 있는 커튼 틈새로 희미하게 아침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곧 날이 밝는다.
온쿄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한 탓이다.
그런 불평도 잠시 나는 실내를 보고 어안이벙벙했다.
다이닝과 거실을 겸한 것 같은 상당히 넓은 방에 가구나 물건들이 늘어서 있다.
명백히 평소 가구 배치가 아니다.
방 한가운데나 거주공간을 침범하는 공간에 놓여져 있었다.
어질러놓은 건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사하던 도중 같았다.
다만 원래 이 방에 있던 가구들은 원래 위치에 있는 것 같았다.
요컨대 가구 수가 많았다.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 같았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틀 전 카레 가게에서 내가 말했던 게 떠오른다.
'그 방에서 침대와 서랍장 빼고 전부 밖으로 꺼내는 거야'
각하되었을 내 제안을 그녀는 진짜로 실행한 걸까.
보는 사람이 있으니 괜찮다고 안심하고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작위로 놓인 가구들을 어렴풋이 빛줄기가 비춘다.
온코가 굳은 얼굴로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침실이구나.
꿀꺽 침을 삼켰다.
가구는 저 방에서 옮겨온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안에는...
온쿄가 조용히 문을 연다.
뒤따라들어간 내 눈앞에 어두운 실내가 펼쳐진다.
아까 봤던 방보다 커튼이 두껍다.
그래도 거기에는 곧 동이 틀 분위기가 채워지고 있었다.
텅 빈 방.
이상한 광경이었다.
침대와 자그만 서랍장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결코 좁지 않은 방이 더 넓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서랍장 제일 윗 서랍이 열려 있다.
한기가 느껴진다.
멀리서 귀울림이 들리고 페이드 아웃하듯이 사라진다.
힉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온쿄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내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이불이 부풀어오른 침대가 있다.
그 이불 안에 자그만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서랍장을 보고 있다.
눈을 뜨고 있다.
마치 자기 의지가 아닌 것처럼 주변 근육이 뻣뻣한 채로 눈을 부릅 뜨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눈은 서랍장 제일 위 딱 하나 튀어나온 서랍을 응시하고 있다.
이상한 분위기가 방을 감돈다.
나와 온쿄의 숨소리만이 들린다.
이틀 전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꿈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녀는 눈을 뜨고 있다.
그렇다면 가위눌림인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침대와 서랍 사이에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공간에 그녀는 뭔가를 보고 있는 걸까.
침대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소녀의 비명이 울리는 환청마저 들리는 것 같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데 그녀가 부릅 뜬 눈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비명이 들렸다.
정수리를 직격하는 충격이 느껴진다.
온쿄가 머리를 싸매고 소리치고 있다.
공포심을 견딜 수 없게 된 걸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면서 서랍장으로 달려가서 서랍을 힘껏 닫았다.
겨우 움직이게 된 온쿄가 한 박자 늦게 침대 위에 있는 소녀를 감싼다.
"일어나. 일어나."
반복해서 외친다.
나는 뒤에 있는 서랍장을 연신 신경 쓰면서 그걸 지켜보았다.
이윽고 경직된 듯 목을 내밀고 눈을 뜨고 있던 루리가 움찔하더니 작게 숨을 토했다.
"일어났어? 일어났어?"
온쿄가 이불을 벗기고 그 어깨를 흔들었다.
가볍게 얼룩을 씰룩거린 후에 루리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괜찮은 것 같다.
나는 살짝 안도하고 서랍장을 돌아보았다.
그 이상한 기척은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건 그저 흔해빠진 서랍장이다.
그럼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슬쩍 맨 윗 서랍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하얀 천이 보일 뿐이었다.
어두워서 잘 안 보였지만 양말 같았다.
두려워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 기척은 착각이었나.
그때 뒤에서 또 비명이 들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 소리에 펄쩍 뛰듯이 놀랐다.
침대를 보니 온쿄가 입을 가리면서 루리의 오른쪽 손목을 가리켰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에 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건 손바닥 자국처럼 보인다.
손목을 붙잡고 힘을 꽉 주었을 때 생긴 자국...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떠는 온쿄와 달리 정작 본인은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아직 사태를 잘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저혈압이라서 그런 걸까.
나는 순간적으로 폭한이 침입했을 가능성을 생각했다.
자취하는 여성의 방에 숨어들어온 불한당.
하지만 입구는 잠겨 있었다.
그건 나도 확인했다.
바로 커튼 틈새에 손을 집어넣어서 창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둘을 내버려둔 채 옆방으로 가서 모든 창문과 출입구가 잠겨 있는지 확인했다.
만일을 위해서 욕실이나 화장실 안도 멋대로 들어가서 누가 숨어 있는지 확인했다.
넓다고 해도 어차피 맨션이다.
금방 우리 3명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는 건 나와 온쿄가 오기 전까지 이 맨션은 밀실 상태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자국을 보건대 생긴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다.
이 모든 걸 종합해서 합리적으로 도출해낼 결론은 하나밖에 없다.
나는 바로 침실로 돌아와서 아직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는 루리의 오른쪽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찬찬히 그 자국을 보았다.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막대기 4개와 그 맞은편 막대기 1개.
그 위치관계를 찬찬히 확인했다.
왼손이다.
그녀의 오른손 손목에 이 자국을 낸 누군가의 왼손.
그리고 그 자는 바로...
그녀 자신.
"뭐 하는 거야."
온쿄가 항의했다.
이건 자해 행위의 일종인 걸까.
서랍에서 나오는 하얀 손도 망상의 산물?
어쩌면 매일 밤 서랍을 여는 것도 그녀 자신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한 일을 남이 한 것처럼 느끼는 정신장애가 있다고 하던데 이 소녀도 그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더 섬뜩해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걸 보았다.
루리가 내게 잡힌 오른손을 떼어내려고 왼손을 느릿하게 뻗었을 때였다.
소매가 내려가면서 손목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오른손 손목과 완전히 똑같은 자국이 나 있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자국.
왼쪽 손목에도 자국.
마주보듯이 막대기 4개와 막대기 1개.
힘껏 잡은 것 같은 자국.
왼쪽 손목에도 왼손 자국이라고?
나는 내 손바닥을 보고 인체의 손가락 구조를 확인했다.
그 자국은 틀림없이 왼손 자국이다.
어떻게 하면 자기 왼손 손목에 왼손으로 잡은 자국을 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게 아니면 밀실 상태인 이 방 안에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건가.
나는 내 뒤에 있는 서랍장에 다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공포심이 만들어낸 환상.
루리는 자기 왼쪽 손목에 남은 자국을 깨닫고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한 마디 툭 내뱉었다.
"He seemed to have come to this room..."
(그가 이 방에 온 것 같아...)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때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이 그 눈동자에 반사되어 반짝 빛났다.
이틀 전 보았던 눈색과 다르다.
그때는 분명히 에레랄드 그린이었다.
척 봐도 컬러 콘택트를 쓴 걸로 보이는 싸구려 색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소녀의 눈은 선명한 파란색이었다.
컬러 콘택트를 낀 채 잘 리가 없다.
아니, 그런 상식이 없어도 그게 그녀의 본래 눈동자 색이라는 건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외국인이었구나."
그렇게 내가 중얼거리자 온쿄가 옆에서 입을 삐죽였다.
"그러니까 통역한 거잖아."
비스듬히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인형 같은 소녀가 희미하게 웃은 것 같았다.
그 후 전말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자.
그 소녀가 가지고 온 사건은 쉽게 말할 수 없을 만큼 성가신 사태를 일으켜 나가니까.
그걸 말하기 위해서는 좀 더 그와 관련된 과거를 파헤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딱 하나 보충할 게 있다.
그 토요일이 지나고 며칠 후.
나는 헌책방에 들렀다.
거기서 문득 생각이 나서 뤼팽 시리즈 소설을 찾아보았다.
또 읽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어슬렁거리던 나는 입구에서 그 코너를 발견했다.
하지만 거기에 있었던 건 미나미 요이치로가 번역한 아동용 뤼팽 시리즈였다.
실망했지만 초등학생 시절 몇 권 읽은 기억이 그리워져서 한 권 뽑아 들었다.
역시 지금 읽으니 히라가나가 많고 쉬운 표현을 많이 사용해서 위화감이 든다.
왠지 겸연쩍어서 선반에 되돌려놓았다.
그때 그 옆에 있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순간 웃음이 나왔다.
내가 오렐리라고 중얼거렸을 때 온쿄가 놀란 이유를 알았다.
루리를 보고 녹색 눈 아가씨라고 칭한 내게 온쿄는 왜 알고 있냐고 말했다.
그때 그 늬앙스는 "왜 당신도 그 소설을 읽는 거냐." 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숨겨진 진실을 단숨에 꿰뚫어보았다고 지레짐작하고 놀란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그 책을 빼냈다.
지나가는 손님들이 이상한 눈으로 본다.
내용을 확인하니 내 짐작이 맞은 것 같다.
도라에몽도 안 보는 주제에 뤼팽 시리즈는 읽다니 건방지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 오해였던 모양이다.
온쿄는 그저 이 미나미 요이치로가 번역한 아동용 뤼팽 시리즈를 읽은 것뿐이었다.
다른 번역가가 '녹색 눈 아가씨' 라고 번역한 책을 그녀는 미나미 요이치로가 번역한 제목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먼지가 살짝 앉은 그 책 표지를 후 불었다.
'푸른 눈 소녀'
나는 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