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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김밥 이야기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18|조회수75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74073541

학생 시절 가을이었다.

아침이나 저녁 때 살짝 쌀쌀함이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어느 여성과 같이 오컬트 스승의 집을 습격했다.

주변 저택지도 조용해진 밤중이었다.
아파트 한 방에 불이 꺼진 걸 확인하고 발소리를 죽이면서 문앞에 섰다.

손잡이를 돌리니 쉽게 열린다.
문을 잠그지 않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슬금슬금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서 이불을 덮고 있는 스승을 내려다보았다.

둘이서 눈빛을 교환한 후 가지고 온 로프를 교묘하게 요 밑으로 넣은 뒤 신중히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단숨에 로프를 잡아당겨서 이불 채로 들어올렸다.

"뭐, 뭣..."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런 짧은 단어를 내뱉은 스승은 별 저항 없이 우리 앞에 보기좋게 김밥이 되었다.

"뭔가요."

내가 다 묻고 싶다.
난 그저 이 스승의 애인인 아리쿠 씨가 장난 치자고 하기에 동참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이유 같은 건 없고 재밌으면 그만이었다.

불을 켜고 나는 들고 온 과자나 마실 것을 펼쳤다.
김밥을 술안주 삼아 홈 파티를 하는 것이다.

"대체 뭐야."

스승이 버둥거린다.
이불과 요 사이에서 얼굴만 쏙 내민 것이 마치 애벌레 같다.

로프로 몇 군데 묶여서 원통형이 된 이불은 라면 가게에서 고명을 올려놓는 차슈라고 해야 할까.

스승이 발버둥치면 발버둥칠수록 콜라가 맛있다.
나와 아리쿠 씨는 김밥을 앞에 두고 즐겁게 얘기를 나누었다.

이윽고 지친 건지 얌전해진 스승이 불쑥 말했다.

"과자 줘."

우리는 귀중한 감자칩을 요구하는 김밥을 무시하기로 했다.

"......"

"무시하지 마."

"......"

"과자 줘."

"......"

"재밌는 얘기 해줄 테니까 풀어줘."

나와 아리쿠 씨는 방구석에 있던 장기판을 가지고 와서 하사미 장기를 시작했다.

"로마 교황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말이지. 실은 상당히 폭주족이었던 교황이 운전기사에게 핸들을 잡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로마 교황에게 운전을 시킬 정도로 거물인 범죄자를 잡았다는 결말이지?"

"...응."

"......"

"하나 더 들어줘."

"......"

"예수 그리스도가 물 위를 걸어서 건넜다는 기적을 일으킨 호수에 여행자가 왔어. 건너편으로 건너는 배가 있었기에 가 봤더니 어른 1명당 50달러라고 적혀 있는 거야. '이럴 수가! 고작 이 거리에 50달러씩이나 하는 건가.' 그야 예수님도 걸어서 걸을 만하지."

"........풉."

"아, 웃었다."

"......"

"안 돼? 지금 것도 안 돼?"

"좋았어!"

이걸로 하사미 장기 2연승이다.
아리쿠 씨 상대로 게임을 하면 왠지 긴장하게 된다.

"하나 더, 하나 더 들어줘. 천 년 전부터 지어진 독일 오래된 성 유적지에 도적단이 침입했어. 분담해서 탐색을 하고 있으니 돌아온 부하가 말했어.
'수상한 문이 있었지만 잠겨 있었습니다'
'멍청아. 옛날부터 문을 잠그는 곳에는 중요한 게 있는 법이야. 죽을 각오로 비틀어 열어 봐!'
뛰어간 부하가 잠시 후 또 빈손으로 돌아왔어.
'화장실이었어요.'"

"....푸흡."

"아, 웃었다. 웃었어. 야, 이거 풀어줘."

"......"

"무시하지 마."

좋았어.
이걸로 3연승이다.
아리쿠 씨도 의외로 별 거 아니네.

"실은 아까 그 이야기 속에서 한 가지 기묘한 부분이 있어."

김밥의 음색이 살짝 바뀌었다.
그쪽은 쳐다보지 않았지만 보를 든 손이 움찔 멈추었다.

"문을 열어봤더니 문 안은 화장실이었다는 우스꽝스러운 결말이지만 잘 생각해 보면 천 년 전 폐허가 된 화장실인데 어째서 문이 잠겨 있는 걸까."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싹해졌다.

마지막에 들어간 사람은 천 년이 지나도 아직 나오지 않는 걸까.

안에서 문을 잠근 채로.

먼지가 쌓인 음습한 성이 당장이라도 눈앞에 나타날 것 같은 오한이 현기증과 같이 찾아온다.

좁은 아파트 실내 풍경이 흔들흔들 요동친다.

아뿔사.
스승의 수법에 걸릴 뻔했다.

다음 순간 빠각거리는 건조한 소리가 들리고 현실감이 되살아난다.

아리쿠 씨가 스승의 입 앞에 감자칩을 내밀고 마치 먹이를 주듯이 먹이고 있었다.

보상인가?
그치만 역시 풀어주지 않는다.

그 후에도 풀어달라느니 과자를 달라느니 시끄러운 스승은 거의 무시한 채로 우리는 밤을 새웠다.

너무나도 시끄러워서 슬슬 풀어주자고 제안했지만 아리쿠 씨가 "풀면 죽어." 라고 툭 내뱉었다.

죽는 건가.
그럼 풀 수 없네.
주어를 모르는 게 너무 무섭다.

아리쿠 씨는 예지능력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감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윽고 그게 놀랄 정도로 정확하다는 걸 알고는 무서워졌다.

그녀는 예지몽 같은 걸 꾼다.
그리고 깨어나면 그걸 잊어 버린다.
어느 날 문득 그걸 떠올리고는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 경고를 듣고 주변에 있는 우리도 몇 번이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말은 때로는 매우 심각하게 다가온다.
풀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으니 절대로 풀 수 없다.
그게 농담인지 경고인지 전혀 알 수 없어도.

꿈틀꿈틀 애벌레처럼 움직이는 스승을 바라보면서 때때로 날 놀린 것을 보복하려고 여봐란 듯이 콜라를 마셨다.

아, 맛 좋다!

두 번째 콜라에 손을 대었을 때 갑자기 방 안에서 알람 소리가 울린다.

움찔했지만 곧 아리쿠 씨가 스위치를 꺼서 시계는 침묵한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왜 이런 시간에 알람을 설정해둔 걸까.

최근 자주 심야에 돌아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알람까지 맞춰둘 만한 일이 있는 걸까.

"용무가 있어요."

"무슨 용무?"

스승이 애원했지만 아리쿠 씨가 그렇게 물어보니 우물거리면서 "아무튼 풀어 주세요." 라고 빈다.

당연히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아리쿠 씨가 방 안에서 앨범을 찾았다.
대학 입학 앨범이다.
펄럭펄럭 넘겨 보니 아는 얼굴이 곳곳에 보였다.
스승은 입학한 지 오래되었는데 왜 이런 걸 가지고 있나 의아해했더니 아무래도 올해 4학년생들이 입학 때 나온 앨범인 듯하다.

후배 입학 앨범을 가지고 있다니 왠지 엉큼하다.

변태를 보는 눈으로 김밥을 노려본 뒤 아는 사람을 사진 속에서 찾았다.

교육학부 항목에 미캇치 씨라는 오컬트 동료 사진을 발견.

의외로 수수했다.
이것만 오려내서 본인에게 보여주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이어서 아리쿠 씨도 발견했다.
지금과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사진 밑에 있는 이름을 안 봐도 여유롭게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그 페이지를 접은 흔적이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이 둘은 스승 쪽이 일방적으로 대시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이거 꽤나 즐거운 얘깃거리를 발견했다 싶어 옆에 있는 아리쿠 씨를 훔쳐보니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접힌 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를 둘러싼 이상한 긴장감을 눈치챘다.
놀리려고 농담을 던지려다가 멈칫했다.

"처음에 만났을 때 이 앨범을 가지고 있었어."

침묵하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신입생 앨범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그녀를 찾아온 걸까.

그것만 들으면 남의 연애 사정에 닭살이 돋을 것 같았지만 아리쿠 씨 상태가 심상치 않다.

이 대화를 듣고 있을 스승을 돌아보니 잠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일부러 쿨쿨 소리를 냈지만 속눈썹이 경련하고 있었다.
잘 모르지만 지뢰를 밟은 모양이다.

나중에 이 사건의 진상을 알았을 때는 김밥말이보다 더 심한 꼴을 봐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또 다음 기회에 얘기하자.

그때 나는 불온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어떻게든 화제를 바꾼 뒤 김밥을 둘러싼 연회를 계속했다.

기억은 애매하지만 이윽고 어느샌가 잠들어 버린 나는 다다미 위에서 눈을 떴다.

몸 관절이 뻐근하다.
정신이 퍼뜩 들어서 스승을 바라보니 이불에서 어깨까지 조금 내민 상태로 누워 자고 있다.

우리가 자 버려서 혼자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다가 탈피 도중에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나는 깨우지 않도록 로프 매듭을 풀고, 스승과 아리쿠 씨를 놔둔 채로 방을 나갔다.

아침햇살이 눈부셔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주택지를 걸어갔다.

다음 날 밤이다.

컴퓨터 전원을 끄고 목을 우드득우드득 풀었다.
양치를 한 뒤에 자려고 일어섰을 때 책상 위에 놓아둔 PHS가 울렸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었다.

이런 시간에 누굴까 싶어서 통화 버튼을 누르니 쉰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듯이 들려온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집에서 가까운 책방, 책방 앞 공원...

대체 누굴까.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다.
나는 스승이라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왜 그래요?"

큰 목소리로 부르려던 순간, 부스럭부스럭 종이봉투나 비닐봉지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사라졌다.
때때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이엇다.
몇 번 더 불러본 후에 단념하고 전화를 끊었다.

바로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승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
그것만은 알 수 있다.

집에 뛰쳐나와서 자전거에 올라탄 뒤 스승 집으로 갔다.
하늘은 흐리지만 달은 보이지 않고 가로등이 없는 주변은 캄캄하다.

스승의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 완전히 그 주변 지리를 파악하고 있던 나는 '집에서 가까운 책방, 책방 앞 공원' 이라는 힌트로 지시한 곳에 최단거리로 도착했다.

거기는 나무가 많은 일각으로 놀이기구는 거의 없지만 주민들이 산책 코스로 이용하는 광장이었다.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인기척이 없다.
적어도 움직이는 그림자는.

덤불이 있는 곳을 돌아가서 가로등 조명이 만드는 음영을 관찰하면서 다가갔다.

묘하게 조용했다.

딱딱한 흙 위에 있는 자그만 돌을 차서 메마른 소리가 난다.

덤불 앞에 목제로 된 벤치가 2개 늘어선 곳이 있었다.
거기에 누가 있을 것 같아 목을 뻗어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공원이 다른가 싶어서 머릿속으로 주택 지도를 떠올리려고 하고 있으니 그 아무도 없는 벤치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것 같았다.

긴장해서 한 번 더 시선을 돌렸다.

벤치에는 역시 아무도 없고 그 너머는 탁 트인 곳이라 숨을 곳이 없다.

뒤에 있는 덤불 속에 있다면 모르지만 척 봐도 가지가 날카로워 보인다.

저 안에 숨었다간 가지에 긁혀서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남은 건 벤치 옆 쓰레기통인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뭔가 불길한 예감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 쓰레기통은 금속제 철망으로 된 원통으로 위로 갈수록 조금 직경이 커지는 타입이다.

그 안쪽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씌여 있었다.

하지만 보통 공원에서 보는 것보다 상당히 작다.
어른 허리에도 닿지 않을 정도다.

그 쓰레기통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진다.

아니, 의식을 집중하면 알 수 있다.
기척 같은 애매한 게 아니라 확실히 피 냄새가 나고 있다.

숨을 죽이고 천천히 다가갔다. 피 냄새가 강해진다.
틀림없이 쓰레기통 안에서 나고 있다.

쓰레기통 밑에 그늘진 곳에 얼룩이 생겨 있다.

검다.
피다.
잘 보이지 않지만 쓰레기통 하부에 전체적으로 퍼진 걸로 보아 상당한 양이었다.

다리가 긴 모기가 옆을 지나가 자그만 날갯소리를 내면서 쓰레기통 안으로 사라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부스럭, 쓰레기통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기척.

반사적으로 긴장했다.

목소리가 들렸다.
쉰 목소리였다.

"...왔냐."

목소리는 분명히 쓰레기통 안에서 들리고 있다.

"...잘 들어. 시간이 없어."

그 목소리에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기백이 느껴진다.
아니, 그것은 내 방어본능일지도 모른다.

그 쓰레기통은 무척이나 작다.
입구 부분보다 밑 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어른이 안에 들어가기에는 너무나도 작다.

몸이 전부 갖추어진 상태에서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

"...아야를 찾아. 전화가 안 돼. 아마도 집에 있어. 만나서 이렇게 말해."

쓰레기통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하면서 나는 집중했다.

...이건 꿈이지요.

그리고 목소리는 끊겼다.
다리가 긴 모기가 쓰레기통 안에서 튀어나와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변은 조용하다.
나는 숨을 삼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다.
알려고 하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쓰레기통을 직접 들여다보면 되니까.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사고가 뇌가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건 알았다.

내 개인적이고 사소한 세계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원래 형태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다만 피를 봐도 반사적으로 구급차를 불러야겠다는 발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최선책은 그저 지시한 걸 따르는 거라고 직감한 건지도 모른다.

머리에 전류가 지나간 것 같은 가벼운 통증 후에 나는 달려나갔다.

쓰레기통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를 콧속에서 떨쳐버리려는 듯이.

공원을 나와서 입구 밖에 세워둔 자전거에 뛰어들었다.

큰일났다.
큰일이 나버렸다.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아도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건 꿈이지요?

꿈일 리가 없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생생하다.

냄새도 소리도 허벅지에 젖산이 쌓이는 느낌도.

오늘 하루 기억을 떠올려본다.
하지만 1분의 틈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아까까지 인터넷에서 검색한 사이트도 그 전에 먹은 컵라면도 그걸 먹으면서 고등학교 시절 친구랑 통화한 것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렇다면...

거기서 사고가 끊겼다.
아니 멈췄다고 해야 하나.

스승이 '아야'라고 본명으로 부르는 아리쿠 씨 맨션으로 똑바로 갔다.

도중에 가벼운 내리막길이 있어서 속도를 유지한 채로 억지로 커브를 돌려던 순간 앞에서 오는 통행인과 부딪칠 뻔했다.

놀란 얼굴을 한 그 사람을 겨우 핸들을 꺾어 피했지만 균형을 잃고 자전거에서 넘어졌다.

한 바퀴 돌아 엉덩방아를 찧고 반사적으로 내민 오른손이 아스팔트와 마찰해서 피부가 까졌다.

아픔이 느껴진다.
아프다.
엄청 아프다.
제기랄, 절로 욕이 나온다.

"위험하잖아."

갈색머리 젊은 형씨가 다가온다.
나는 펄쩍 뛰듯이 일어난 뒤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일 기억나나요? 어제 일 기억나나요? 자신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나요?"

그는 다가온 나를 보고 한순간 움찔했지만 곧바로 동요하면서 손을 휘둘렀다.

"바보 아냐? 너 뭐야."

툭 내 어깨를 양손으로 밀치고 발길을 돌려 가버렸다.
도중에 몇 번이나 기분 나쁜 듯이 돌아보면서.

남겨진 나는 까진 오른손과 까지지 않은 왼손을 비교했다.

손바닥에 난 상처 안에 자그만 돌이 박혀 있는 걸 끄집어냈다.

아프다.
왜 이렇게 아픈 걸까.

울 것 같기도 하고 오한이 들기도 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튼 움직여서 쓰러져 있는 자전거를 일으켜서 탔다.

밤길을 달린다. 오로지 달린다.

신호에 걸려서 트럭이 다가오기 직전에 간발의 차로 지나간다.

뒤늦게 울리는 경적을 들으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숨이 차고 속도가 떨어졌을 즈음에 겨우 아리쿠 씨 맨션이 보인다.

밝은 가로등 밑을 지나서 늘 자전거를 세워두는 주륜장에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길가에 그대로 세워두었다.

세울 때 안장을 누르는 오른손이 아팠다.

얼굴을 찡그리면서 현관으로 갔다.
입구에는 보안장치가 작동하지 않는다.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방에 불이 켜져 있는지 밖에서 확인하고 들어올걸 하고 후회했지만 돌아갈 시간도 아까웠기에 그대로 계단을 달려올라갔다.

방 번호를 머릿속에서 되풀이하면서 아무도 없는 통로를 달려갔다.

발소리만이 유난히 쌀쌀하게 울린다.

건너편을 가만히 바라보니 목적지인 방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침 천장 형광등 불빛이 꺼진 어두운 일각에서 그 빛이 눈에 띄었다.

있다.
안에 있다.

그치만 도달할 곳도 길의 전모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가 입은 치명적인 상처를 복원하기 위한 길이.

어둠 속 통로가.
보이지 않는다.

소리치고 싶다.

입을 막았다.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없나요?"

초조해지니 초인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빨리 나와줘.
쾅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누구라도 불쾌할 테니까.

철컥.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와 함께 끼익 문이 천천히 이쪽으로 열린다.

안에서 겁먹은 얼굴을 한 여성이 나온다.

"도와주세요."

얼굴을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려다가 숨이 막혔다.
그 말이 아니다.
해야 할 말은 분명히...

"이건 꿈이지요."

차갑고 긴장한 공기가 실내에서 밖으로 흘러나온다.
평상복을 입은 아리쿠 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한 걸음 물러선다.

따라서 나도 현관으로 들어왔다.
아리쿠 씨가 손을 놓자 문이 내 뒤에서 탕 닫혔다.

아리쿠 씨가 한 발자국 더 물러선다.
신발을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있었다.

둘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다.
아무래도 이게 아리쿠 씨의 개인 공간인가 보다.

"상처."

아리쿠 씨가 이쪽을 가리킨다.
바지 오른쪽 무릎 부분이 찢어져 있다.
손바닥이 아픈 것만 정신이 팔려서 깨닫지 못했다.

"기다려."

구급상자라도 가져오려는 걸까.
뒤로 돌아서려는 그녀를 불러세우듯이 입을 열었다.

"이건 꿈이지요."

딱 멈춰 서서 그녀는 한 번 더 이쪽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야?"

늘 표정이 부족한 그녀가 미간을 찌푸린다.

그 공원에서 본 광경을 설명하려고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말을 해 버리면 마치 돌이킬 수 없는 무시무시한 환상이 현실로 변해 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순간적으로 책을 찾았다.
잡지, 아니 신문이라도 상관없다.
뭔가 막대한 정보가 담긴 책이 필요하다.
옛날부터 자연스레 익혀 온 꿈 속에서 그게 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 위한 기술이다.

뺨을 꼬집거나 특정한 키워드를 외치는 등 모두 각각 꿈을 인식하기 위해서 혹은 꿈을 깨기 위한 요령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그게 책을 읽는 것이었다.

거기에 적혀 있어야 할 정보량을 꿈을 재생하고 있는 뇌가 순간적으로 제공하지 못한다면 꿈의 세계가 부서진다.

하지만 아리쿠 씨 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현관과 거기랑 이어진 부엌 주변에는 책이나 잡지가 전혀 없었다.

문에 달린 우편함에서 신문이 튀어나와 있거나 그대로 현관에 떨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는 내 집과는 다르다.

설명하는 대신에 나는 스승에게 들은 말을 반복했다.

"이건 꿈이지요."

아리쿠 씨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한 건지 강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 내 안에서는 그 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더 반복했다.

"이건 꿈이지요."

울고 있는 것 같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누가? 내가? 왜?

"진정해. 꿈이라니 네 꿈이라는 거야? 그렇다면 아니야. 왜냐하면..."

아리쿠 씨는 거기서 말을 끊고 입 안에서 다음 말을 천천히 음미했다.

"먼저 내겐 자아가 있어. 자기 의지로 지금 말하고 있어. 이게 네 꿈이라면 계속 이어져 있는 내 의식이 네 머릿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니? 그런 무서운 상황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기 뺨 꼬집어 봤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꼬집는 것보다 아픈 꼴을 당한 모양이구나."

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걸 바라본다.

"이건 꿈이지요."

"그러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꿈이 아니야."

"이건 꿈이지요."

"대체 뭐니. 무슨 일이 있었는데?"

"이건 꿈이지요."

"아니라고 말했잖니. 꿈인지 아닌지 알 수 있잖아. 꿈속에서 이게 꿈이라고 깨달아도 꿈속에서 이게 현실이라고 깨닫는 경우 있어? 없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알고 있는 내겐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이건 꿈이지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 그렇게 말하라고 누가 말했니?"

"이건 꿈이지요."

"대답하렴."

"이건 꿈이지요."

"잠깐만.... 봐, 계산기. 적당히 숫자를 칠게. 24587×98564=2456395168. 꿈이라면 이런 계산이 순식간에 되겠니? 아무렇게나 나온 숫자가 아니라는 걸 검산해서 확인해볼까?"

"이건 꿈이지요."

"꿈이 아니야."

"이건 꿈이지요."

"...어떻게 해야 알겠니. 서둘러야 하는 일이 있는 거 아니었어?"

"이건 꿈이지요."

"나 화낸다?"

"이건 꿈이지요."

"적당히 해."

"이건 꿈이지요."

아리쿠 씨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깊이 한숨을 쉬었다.

"왜 모르는 거니. 이게 꿈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현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자신이 가짜라는 거야."

지친 듯이 벽에 기댄다.

"네게 현실은 뭐니?"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바라본다.

"잘 생각하고 대답하렴. 해야 할 일은 그 상처를 치료하고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거 아니야?"

나는 한 걸음 흙발로 그녀의 공간에 다가가서 말했다.

"이건 꿈이지요."

그 순간 그녀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창백해진 얼굴을 쑥 들이댔다.

"잘도 알았구나."

조용한 목소리였다.

세계는 어두워졌다.

눈은 뜨고 있다.

어둠 속에서 천장이 보인다.

눈을 깜빡였다.

등에는 다다미 감촉.

몸을 일으켰다.

스승의 방이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모포를 덮은 아리쿠 씨와 김밥말이가 된 스승이 있다.

스승을 불렀다.
반응은 없지만 명백히 자는 척이다.
빠져나오려고 하다가 내가 느닷없이 일어나니까 놀란 걸까.

김밥을 탁탁 때렸다.

"알았어, 깨어나 있어. 깨어나 있다니까."

스승에게 지금 있었던 일을 전했다.

끝까지 움직이지 않고 듣고 있던 스승이 딱 한 마디 했다.

"휘말렸구나."

머릿속에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겨울에 꿈을 꾸었다.
무시무시한 꿈이었다.
현실과 이어지는 것 같은.

하지만 눈을 떴을 때 시간이 되감겨졌다.
나는 무시무시한 꿈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다른 선택을 했다.

그때도 아리쿠 씨랑 같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아리쿠 씨가 꾸고 있는 예지몽에 휘말렸다고 스승이 말한다.

그 공원 벤치 근처 쓰레기통이 떠올랐다.

그 생생한 냄새도 꿈이었던 걸까.
다쳐서 느꼈던 통증도 지금 현실이라고 생각한 그 판단도.

그럼 지금 자신은 어떤가.

손바닥을 펼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게 꿈이라면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게 아닌가.

비지땀이 흐른다.

나는 아리쿠 씨의 기묘한 힘을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튼 이거 풀어줘."

스승이 꿈틀거린다.

"안 돼요. 풀면 죽는다고 하니까."

그렇게 말하고 깨달았다.

"짐작가는 건?"

"어?"

"목숨이 위험할 만한 일 뭐 짐작가는 거 없어요?"

스승이 생각하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 밤 밤놀이하러 갈 생각이었는데 어디 갈지는 정하지 않았어."

오늘 밤 이렇게 김밥말이 당해서 가지 못한 곳에 내일 갈 건가?

그리고 무서운 일을 당한다?

"내가 간다고 하면 거기려나. 아니, 그 심량 스팟도 가보고 싶었는데."

스승이 중얼거렸다.

"아무튼 장난 아니게 무서운 존재가 밤거리에 있는가 보네."

태연자약하게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모포를 덮고 자는 아리쿠 씨를 바라보았다.

"알겠냐. 이제 절대로 이 녀석에게 그 말은 하면 안 돼."

"그 말이요?"

"끈질기게 되풀이했던 그 말 말야."

"아, 네."

"알고 있잖아. 이 녀석이 오늘 밤 여기로 온 이유를."

대충 짐작이 가지만 적당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마디점.
아니, 쐐기인가.

되감기를 막는 쐐기.

그 타이밍을 어떠한 예감으로 그녀가 알고 이렇게 우리 셋을 이 방에 모은 것이다.

"스승은 그 꿈을 정말로 못 꾼 건가요?"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자겠어."

표정을 살폈지만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겠다.

"당분간 밤놀이는 자제해야겠네."

스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아리쿠 씨도 여전히 자고 있었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나는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 스승을 그런 꼴로 만든 무시무시한 존재가 대체 무엇일지.

그런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세계가 복원되는 어두운 기적을.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혹시 어쩌면 본인조차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기증이 날 것 같은 입밖으로 내는 것조차 주저하게 되는 현실에서 깨어난다는 무시무시하고도 기묘한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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