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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스승시리즈] 무덤

작성자빛빔|작성시간26.06.18|조회수63 목록 댓글 0

 

출처 : https://m.blog.naver.com/qordb6712/120174076134

덥다.

참을 수 없어서 상의를 벗고 허리에 묶었다.
한숨 돌리고 산길을 돌아보았다.

길이 몇 번이고 구비져서 산기슭으로 뻗어 있다.
밑에는 아까 내린 버스 정류장이 보일 줄 알았는데 키가 큰 삼나무 숲에 가려서 안 보인다.

오른손에 든 종이가 땀으로 부드러워졌다.

마을을 나올 때는 오늘은 쌀쌀할 것 같아서 나름대로 두껍게 입고 왔는데 생각보다 강한 햇빛과 경사진 산사면 때문에 운동 부족을 체감시켰다.

"좋았어."

나 혼자다.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빨리 앞으로 나아가자고 생각했다.

발을 내밀었다.

그때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산 날씨는 변덕스럽다고 하던데 올려다본 하늘에는 구름 한 점도 없다.

바람을 가르는 새의 날개도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뺨을 닦아내었다.

대기 중 수분이 다양한 물리현상이 우연히 합쳐진 결과 결정이 되어 떨어진 거겠지.

문득 그렇게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자신을 또 다른 내가 떨어진 곳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 무렵 그렇게 스스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경우가 가끔씩 있었다.

책을 읽어 보니 이인증(離人症)이라는 병과 비슷해 보였다.

봐.

고개를 갸웃거리지?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리고 또 걸어가겠지.

좀 이상해도 어차피 평범한 빗방울이니까.

그런 것보다 일부러 이 산까지 버스를 타고 왔잖아.

빨리 가자.

왜 그래?

우두커니 멈춰 서서는.

그런 사소한 사건에 왜 마음을 빼앗기는 거지?

소용없어.

생각해봤자 필시 이유는 없어.

그래도 너는 기다리고 있어.

누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것을.

'....라는 거 알고 있나?'

그리고 일상 바로 옆에 있는 기묘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을.

눈에 비치는데 그런 곳에 있을 줄 생각도 못했던 문을 열어주는 것을.

하지만 알고 있어.

지금은 그것도 소용없다는 것을.

자, 앞으로 나아가자.
아무리 기다려도 그 사람은 문 너머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대학교 3학년 겨울이었다.

오컬트 스승이 사라지고 겨우 그 사실을 마음속으로 매듭지을 수 있게 된 무렵.

나는 스승을 알고 있는 사람한테 지도 한 장을 받았다.
시판되는 게 아니라 손으로 그린 것이다.

"한번 가보는 게 좋아."

달리 손님이 없는 찻집은 자신이 모르는 과거의 냄새가 나서 거북했다.

"이게 뭔가요."

눈에 띄는 화살표가 그려진 지도를 보면서 내가 묻자 그는 후줄근한 넥타이 끝을 만지막거리면서 말했다.

"무덤이야."

피안은 지나가 버렸지만 말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카운터에 있는 마스터에게 물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누구 무덤인지는 묻지 않았다.
금방 알아차렸으니까.

카나코 씨라는 스승의 스승인 사람이다.

나는 스승이나 다른 사람한테서 그녀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사진 1장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인지 안 것 같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녀는 윤곽만 존재했다.

무덤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좀 더 비현실적으로 머나먼 곳으로 사라져 버린 줄 알았다.

"가 볼게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람은 건조하다.
빗방울 하나 더 떨어질 것 같지 않은 하늘 아래에서 겨우 걷기 시작했다.

지도를 한 번 더 펼쳤다.
목적지는 좀 더 위에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올라가니 이윽고 포장된 도로가 끊기고 바퀴 자국이 남겨진 험한 길이 나왔다.

도중에 앞에서 경트럭이 왔기에 산쪽으로 달라붙어 피했다.

그 경트럭은 한쪽 타이어를 중앙 불쑥 솟아오른 부분에 걸치면서 달리고 있었다.

차체가 기울어져서 불안정하게 보였기에 이상하게 여겼지만 잘 생각해 보니 파인 두 바퀴 자국에 타이어를 대고 지나가면 한가운데 파이지 않는 부분이 차 배쪽과 스치게 된다.

그렇군.
이것도 그 풍토색이면서 거기서 살면서 얻는 지혜인가.

나는 그 길 한가운데 불룩 솟아난 부분 위에 올라타서 걸었다.

절벽 쪽에는 건너편 산복에 펼쳐진 밭이 보인다.

단풍이 물들 계절은 지났지만 공기는 맑아서 상쾌한 산 풍경이 멀리까지 보인다.

조금만 더 지나면 나무들이 눈으로 화장할 것이다.

땀을 흘리면서 계속 걷고 있으니 갈림길이 나왔다.
한쪽에 명소인 폭포가 있다는 자그만 간판이 있다.
어쩌고 폭포.
읽을 수 없는 글자다.

지도대로다.
폭포가 없는 쪽 길을 가야 한다.
그게 좀 아쉬웠다.
멀리서 멧비둘기 소리가 들린다.

물통에 든 물로 목을 축이면서 계속 걷다 보니 겨우 그곳에 도착했다.

산사면을 올라간 곳에 서 있는 자그만 묘비.
전망이 탁 트인 곳이다.

밑에는 산기슭에 있는 마을과 그곳을 가르며 흐르는 강이 좁은 몸을 뱀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나무 뿌리를 잡으면서 간신히 올라간 뒤에 "처음 뵙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응답하듯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다.

"좋은 곳이네요."

발 디디기 좁은 곳에 딱 하나 덩그러니 놓인 이끼가 낀 돌.

그 양옆에는 꽃을 꽂아두는 죽통이 있고 시든 붓순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스승도 여기로 성묘하러 온 적이 있었던 걸까.

검게 시든 공양물 흔적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짊어진 가방을 내리고 선향을 꺼냈다.
성냥을 켜서 불을 붙인 뒤 금방 손을 흔들어 껐다.
그리고 그걸 들고 묘비로 다가갔을 때 나는 깜짝 놀라 멈춰 섰다.

어? 이게 뭐야.

곧바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거기에 있었다.

그 의미가 뇌에 스며들 때까지 묘비를 바라보았다.

점점 심장 고동이 빨라진다.

어? 어? 어?

기억의 열쇠가 소리를 낸다.
반쯤 놓쳤던 위화감의 정체가 연쇄하듯이 형태를 갖춘다.

그럼 그것은?
그럼 그때는?
너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하나하나 정리하려고 했다.

선향 냄새가 피어올라 출렁이는 불안정한 과거로 초대한다.

너는 화가 난다.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에게.
그런 삶을 살아온 그 사람에게.

너는 슬퍼진다.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그런 삶을 산 그 사람이.

손에서 선향이 떨어졌다.
신발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올라온다.

고운 날개를 가진 새가 늘어진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어디선가 폭포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물이 한 줄기 하늘에서 떨어진다.

그리고 너는 마지막에 다정해진다.

"그 바보."

그래. 그 바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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